한 가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왜 박근혜 대통령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사임하지 않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그의 뒤를 이어 대권에 도전하고 안위를 보호해줄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노태우가 있었기 때문에 직선제 개헌 수용이라는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대중적 인기와 후광이 돌아오게 한 후 퇴임했고, 노태우는 대통령이 된 후 3당합당을 통해 김대중과 '재야'를 제외한 반대파를 모두 흡수했다.
물론 여당의 일원이 된 김영삼이 결국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으로 보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5공 세력에게는 나름의 탈출 전략이 존재했으며 그렇기에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넓게 잡아 친박에게 주어지지 않은 정치적 선택지가 바로 그것이다. 친박(이라는 게 뭔지 현재로서는 대단히 아리송하지만)은 마치 박근혜라는 텅 빈 인물을 데려다놓고 대통령으로 만든 후 권력을 잡았듯, 반기문이라는 또 다른 텅 빈 인물로 그 자리를 채워넣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기름장어는 박근혜의 지지율이 거덜나자 재빨리 손을 떼는 모양새이다.
박근혜에게는 퇴로가 없다. 단지 정치적 수명의 문제가 아니다(애초에 박근혜라는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 듯하고). 지금 하야하면 곧장 감옥에 갈지 모른다는 아주 원초적인 공포심이 박근혜의 결단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야권의 대선주자들 중 일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조건으로 사면을 약속해야 한다. 특히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일수록 그러한 유화책을 내걸 때 박근혜의 사임을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사인의 천관율 기자가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1) 박근혜는 헌법적 정당성을 가진 대통령이며 2) 시민사회는 불법적 쿠데타를 저지르지 않는 한 그를 끌어내릴 수 없다. 다시 말해 3) 박근혜가 임기를 끝내지 않고 조속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스스로 사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뿐이다.
이 시점에서 시민사회와 대통령의 대립이 장기화될수록 대통령과 청와대가 유리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직도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의 인사권이 있고, 국정원과 일베 같은 초특급 정보 기구들도 그의 수중에 있으며, 길거리에서 덜덜 떨면서 시위해야 하는 시민들과 달리 대통령은 따뜻한 청와대에서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명박도 그런 식으로 '소나기가 지나갈' 때까지 버텼다. 박근혜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박근혜가 잔여 임기를 채울 가능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경찰과 검찰은 그냥 청와대의 편을 드는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최근 몇 주 동안 경찰의 태도가 눈에 보이게 유순해졌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권력기구이며, 청와대의 편이다. 단지 지금 여론이 너무 안 좋기 때문에 시위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근혜 개인을 감옥에 집어넣는 것과, 그를 청와대에서 끌어내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박근혜는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최대한 청와대에서 버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를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그러므로 여기서 누군가는, 적어도 '정치인'이라면, 박근혜에게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면 사면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물론 수많은 이들에게 비난받겠지만, 현재 '쪽팔려서' 여당을 지지하지 못하는 부동층들의 여론을 수습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야 우병우와 최태민 일가 및 김기춘의 비위를 최대한 밝혀내고 처벌할 수도 있다.
박근혜를 사면하라. 그리고 그를 청와대에서 쫓아낸 후, 박근혜 외의 모든 악인들을 처벌하라. 이러한 결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지지하겠다.
2016-11-10
박근혜, 클린턴, 정치인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볼 때 놀랍게도 박근혜와 힐러리 클린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 박근혜는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독특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영애' 시절을 넘어 정계에 재입문한 이후의 박근혜에 대해 생각해보자. 박근혜는 '여성스러움'을 무기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박정희가 낳은 삼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활동 가능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딸'임을 굳이 강조할 이유가 없다. 그는 중성 명사인 '후계자'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성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지지 여부를 놓고 9말0초의 진보진영은 한바탕 뜨거운 '논쟁'을 했다. 그런데 그걸 논쟁이라고 불러도 될까? 실상은 '여자로서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말한 최보은에 대한 인간사냥에 가까웠다.
그 인간사냥이 문제였던 것은 최보은의 '지지 선언'의 반어적 맥락을 무시했다는 것 뿐만이 아니다. 최보은을 몰아가던 자들, 대표적으로 김규항 같은 사람들은, 2002년 당시 정치인 박근혜가 지니고 있던 중요한 페미니즘적 함의를 도외시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유효했던 상황이다. 정치인 박근혜는 '여성의 성 역할'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역할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박정희의 생물학적 후계자 중 주류 정치권에서 활동 가능한 유일한 소실이라는 정치적 역할이 박근혜에게 할당되었을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성 역할을 밀어내버렸다.
그러므로 박근혜가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비판을 부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고 있지만 박근혜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두고 '섹스는 여성이지만 젠더는 남성이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근혜는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남성'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박근혜가 자의건 타의건 수행하고 있었던 '여성의 성 역할 거부'는 '남성 되기'와 동일시될 수 없다. 힐러리 클린턴의 역사적 대선 도전이 실패로 끝나고 나니 너무도 뚜렷하게 보인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난과 검증을 당한 대선 후보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얼마나 거센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나긋나긋한 굿 와이프' 따위의 역할을 거부했다. 빌 클린턴의 불륜은 힐러리 클린턴의 '성적 매력'에 대한 온갖 종류의 시시덕거림을 낳았지만, 애써 '사랑으로 결합한 부부'의 모습을 연출해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본인의 성별로 인해 남자들이라면 받지 않을 검증과 비난과 모욕을 당한다는 사실을 힐러리 클린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비난은 그가 '스마일링 맘' 같은 태도를 취하면, 요컨대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익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사회적 태도를 보여주면, 어느 정도 줄어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언제나 단호하게,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의 태도를 고수했다. '정치인'으로서 페미니즘적 의제를 선언하고 또 실천했다. '굿 와이프'로서의 자신을 연출하면서 가부장제와의 타협을 도모하는 대신, 가부장제 사회가 '여자 정치인'을 받아들일 때까지 모욕을 참고 견디며 자신의 일을 하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백악관 시절 이후 뉴욕 상원 의원으로서의 경력이 쌓였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 대단한 정치인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어떤 사회적 역할을 뒤틀어서, 가령 '남자들이 어질러놓은 정치판을 뒤치닥거리해주는 엄마' 같은 역할을 감내하지 않고서, '여성이면서 워싱턴 정가를 주무르는 정치인'이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박근혜가 본의 아니게 도달한 지점도 사실 그와 같았다. 박근혜는 '아줌마'도 '아가씨'도 '엄마'도 아니었다. 한때의 '영애'였지만 성인으로서 정치인이 된 후에는 줄곧 '박근혜'였을 뿐이다. 그것은 그가 물려받은 정치적 상징 자산에 힘입은 것이지만, 사실 정치권 내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은 모든 여성들이 누려야 마땅한 너무도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박근혜는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의 자리를 그냥 획득했고, 그에 딱히 미련을 갖지도 않았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2차 대국민담화에서 그는 '대통령'의 표정을 버리고 '죄송하다고 울먹거리는 중년 여자'를 드러냈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고, 실은 멍청하고,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한 게 아니라며 푸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높은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둘러대는 모든 종류의 부정적 성 역할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정치적 수명은 바로 그 시점에 끝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이라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싸워 얻어낸 위치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를 수십년에 걸쳐서 사냥했던 적들이 간절히 원하는 그 전리품만은 절대 내어주지 않은 것이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 선거에서 졌다고 눈물을 흘린다면, 다른 여성 정치인들이 '울지 않을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박근혜와 클린턴 모두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되, 사회적으로는 '여성'이 아닌, 어떤 중간지대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정치 경력은 반드시 이 시점에서 끝장이 나야 한다. 다른 한 사람의 가장 높은 유리천장에 대한 도전은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성 역할을 거부하면서 정치적 커리어를 쌓는 여성은 앞으로 더욱 늘어나야만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선거는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힐러리 로뎀 클린턴을 지지한다. 여성의 사회적 성 역할에 갇히지 않은 채 정치인으로서 이력을 쌓아나가는 더 많은 여성 '정치인'의 출현을 두 손 모아 소망하면서 말이다.
'영애' 시절을 넘어 정계에 재입문한 이후의 박근혜에 대해 생각해보자. 박근혜는 '여성스러움'을 무기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박정희가 낳은 삼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활동 가능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딸'임을 굳이 강조할 이유가 없다. 그는 중성 명사인 '후계자'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성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지지 여부를 놓고 9말0초의 진보진영은 한바탕 뜨거운 '논쟁'을 했다. 그런데 그걸 논쟁이라고 불러도 될까? 실상은 '여자로서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말한 최보은에 대한 인간사냥에 가까웠다.
그 인간사냥이 문제였던 것은 최보은의 '지지 선언'의 반어적 맥락을 무시했다는 것 뿐만이 아니다. 최보은을 몰아가던 자들, 대표적으로 김규항 같은 사람들은, 2002년 당시 정치인 박근혜가 지니고 있던 중요한 페미니즘적 함의를 도외시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유효했던 상황이다. 정치인 박근혜는 '여성의 성 역할'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역할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박정희의 생물학적 후계자 중 주류 정치권에서 활동 가능한 유일한 소실이라는 정치적 역할이 박근혜에게 할당되었을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성 역할을 밀어내버렸다.
그러므로 박근혜가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비판을 부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고 있지만 박근혜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두고 '섹스는 여성이지만 젠더는 남성이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근혜는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남성'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박근혜가 자의건 타의건 수행하고 있었던 '여성의 성 역할 거부'는 '남성 되기'와 동일시될 수 없다. 힐러리 클린턴의 역사적 대선 도전이 실패로 끝나고 나니 너무도 뚜렷하게 보인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난과 검증을 당한 대선 후보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얼마나 거센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나긋나긋한 굿 와이프' 따위의 역할을 거부했다. 빌 클린턴의 불륜은 힐러리 클린턴의 '성적 매력'에 대한 온갖 종류의 시시덕거림을 낳았지만, 애써 '사랑으로 결합한 부부'의 모습을 연출해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본인의 성별로 인해 남자들이라면 받지 않을 검증과 비난과 모욕을 당한다는 사실을 힐러리 클린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비난은 그가 '스마일링 맘' 같은 태도를 취하면, 요컨대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익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사회적 태도를 보여주면, 어느 정도 줄어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언제나 단호하게,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의 태도를 고수했다. '정치인'으로서 페미니즘적 의제를 선언하고 또 실천했다. '굿 와이프'로서의 자신을 연출하면서 가부장제와의 타협을 도모하는 대신, 가부장제 사회가 '여자 정치인'을 받아들일 때까지 모욕을 참고 견디며 자신의 일을 하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백악관 시절 이후 뉴욕 상원 의원으로서의 경력이 쌓였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 대단한 정치인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어떤 사회적 역할을 뒤틀어서, 가령 '남자들이 어질러놓은 정치판을 뒤치닥거리해주는 엄마' 같은 역할을 감내하지 않고서, '여성이면서 워싱턴 정가를 주무르는 정치인'이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박근혜가 본의 아니게 도달한 지점도 사실 그와 같았다. 박근혜는 '아줌마'도 '아가씨'도 '엄마'도 아니었다. 한때의 '영애'였지만 성인으로서 정치인이 된 후에는 줄곧 '박근혜'였을 뿐이다. 그것은 그가 물려받은 정치적 상징 자산에 힘입은 것이지만, 사실 정치권 내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은 모든 여성들이 누려야 마땅한 너무도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박근혜는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의 자리를 그냥 획득했고, 그에 딱히 미련을 갖지도 않았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2차 대국민담화에서 그는 '대통령'의 표정을 버리고 '죄송하다고 울먹거리는 중년 여자'를 드러냈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고, 실은 멍청하고,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한 게 아니라며 푸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높은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둘러대는 모든 종류의 부정적 성 역할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정치적 수명은 바로 그 시점에 끝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이라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싸워 얻어낸 위치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를 수십년에 걸쳐서 사냥했던 적들이 간절히 원하는 그 전리품만은 절대 내어주지 않은 것이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 선거에서 졌다고 눈물을 흘린다면, 다른 여성 정치인들이 '울지 않을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박근혜와 클린턴 모두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되, 사회적으로는 '여성'이 아닌, 어떤 중간지대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정치 경력은 반드시 이 시점에서 끝장이 나야 한다. 다른 한 사람의 가장 높은 유리천장에 대한 도전은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성 역할을 거부하면서 정치적 커리어를 쌓는 여성은 앞으로 더욱 늘어나야만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선거는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힐러리 로뎀 클린턴을 지지한다. 여성의 사회적 성 역할에 갇히지 않은 채 정치인으로서 이력을 쌓아나가는 더 많은 여성 '정치인'의 출현을 두 손 모아 소망하면서 말이다.
2016-11-08
거국중립내각은 최순실의 꿈을 꾸는가
최순실-박근혜-청와대 스캔들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국민이 대통령에게 위탁한 권력이 엉뚱한 곳에서 휘둘러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권력을 이용해서 무슨 '갑질'을 했건, 어디에서 얼마를 '해먹었'건,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문제의 핵심은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도 않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듣도 보도 못한 누군가에게 국가의 핵심적 권력 행사를 위탁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정치권 내에서 무슨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번 스캔들이 터지기 전이라면, 내게 주어진 정보를 이용해서 이런 저런 계산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 교주에게 빠져 그 딸에게 국정 전반의 전권을 위탁했다'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사실로 확인되었으니, 현재로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거국중립내각'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가 야권에서 추천하는 인물인지 아닌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내가 가진 시민사회 및 법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름이 '거국중립내각'이건 '편파치중내각'이건 '최순실 내각'이건, 모든 내각은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내각을 해산할 권리 역시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이것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통령의 수많은 권한 중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 중 하나다. 국무총리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86조를 살펴보자.
국무총리가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명을 받아" 이루어진다. 설령 그 '명'이 국정 전반에 대한 포괄적 위임이라 하더라도, 대포폰을 쓰건 비선실세를 만나건 최태민에게 정신과 육체를 모두 지배당하건,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무총리에게 '명'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국무총리는 그 '명'을 거역할 수 있는 권한을 갖지 못한다.
'거국중립내각'의 구성요소인 다른 국무위원들은 또 어떤가?
국무총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의 국무위원 임명에 대한 제청, 그리고 국무위원의 해임에 대한 '건의' 뿐이다. '거국중립내각'의 법무부장관이 우병우의 혐의를 유야무야 덮으려고 하는 것을 총리가 파악했다 한들, 그 총리는 자신의 권한으로 법무부장관을 해임할 수 없다. 역시 이 경우에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대통령인 박근혜가 갖는다. 가령 문재인이 총리가 된다 한들, 박근혜가 거부한다면, 조윤선 문체부장관을 해임시킬 수 없다. '책임총리'란 이토록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현행 헌법상 '거국중립내각'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책임총리'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이 총리의 편에 서서 그에게 국정을 일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헌법적 개념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 당시 이해찬 총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통령으로부터 포괄적으로 권한을 위임받은 총리가 누릴 수 있는 한시적이며 임의적인 특권에 불과하다. 박경신 교수의 말을 인용해본다. "우선 새로운 총리가 누가 되었든 그가 권한이양을 얼마나 받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어야 하고 그 총리는 국회의원들이 뽑는 총리 즉 내각제 하의 총리와 유사한 정치적 위상을 갖게 된다." 지금 국민들이 야당에 요구하는 것이 고작 '박근혜를 잘 모시는 총리'인가?
절반이 넘는 국민들이 박근혜를 지지했고, 투표했다. 나머지 국민들은 그 결과에 승복했고,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민주적 절차를 통해 주어진 권한을 박근혜는 엉뚱한 사람들의 손에 넘겨준 상태였다. 이 모든 상황은 대통령제의 실패도 아니고, 내각책임제를 시작해야 할 이유도 되지 못하며, '거국중립내각'을 통해 유야무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해결될 수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대통령제가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처리해야 하는 '비정상적' 상황일 뿐이다. 대통령제의 원조격인 미국에서도 이미 겪었고, 심지어 대한민국 역시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는, 흔하다면 흔한 대통령 하야 요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야 요구를 하지 않는가? 왜 하야 요구를 하지 않으며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국회에 띡 방문한 박근혜가 '야 니네가 추천해'라고 띡 던지고 가는 상황을 만들어서 주도권을 뺴앗기는가? 야권은 '최순실 게이트'에 진정으로 분노하긴 했는가? 최순실 일당에게 국정 농단을 허락한 박근혜를 몰아내고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합법적 권력을 획득하는 대신, 박근혜를 식물대통령으로 만들고 자신들이 '비선실세'가 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닌가? 선출되지 않았으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정작 책임져야 할 때에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낸 후 차지하고 싶어서 '거국중립내각' 타령으로 세월을 허비한 것은 아닌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일개 비리 사태가 아니다. 헌정 질서의 위기다. 국민에게 선택받은 이가 헌법상 주어진 권력을 올바로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주판을 튕기며 스스로를 또 하나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자리에 놓기 위해 골몰하는 야권을, 국민들은 절대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정 총책임자는 대통령이지 '책임총리'가 아니다. 정치권은 헌정질서 농단 사건을 두고 또 다른 헌정질서 농단을 모의하는 짓을 당장 그만두고, 헌법상 정해진 절차에 따라, 대한민국을 정상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정치권 내에서 무슨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번 스캔들이 터지기 전이라면, 내게 주어진 정보를 이용해서 이런 저런 계산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 교주에게 빠져 그 딸에게 국정 전반의 전권을 위탁했다'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사실로 확인되었으니, 현재로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거국중립내각'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가 야권에서 추천하는 인물인지 아닌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내가 가진 시민사회 및 법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름이 '거국중립내각'이건 '편파치중내각'이건 '최순실 내각'이건, 모든 내각은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내각을 해산할 권리 역시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이것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통령의 수많은 권한 중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 중 하나다. 국무총리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86조를 살펴보자.
제86조 ①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②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
③군인은 현역을 면한 후가 아니면 국무총리로 임명될 수 없다.
국무총리가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명을 받아" 이루어진다. 설령 그 '명'이 국정 전반에 대한 포괄적 위임이라 하더라도, 대포폰을 쓰건 비선실세를 만나건 최태민에게 정신과 육체를 모두 지배당하건,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무총리에게 '명'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국무총리는 그 '명'을 거역할 수 있는 권한을 갖지 못한다.
'거국중립내각'의 구성요소인 다른 국무위원들은 또 어떤가?
제87조 ①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②국무위원은 국정에 관하여 대통령을 보좌하며, 국무회의의 구성원으로서 국정을 심의한다.
③국무총리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④군인은 현역을 면한 후가 아니면 국무위원으로 임명될 수 없다.
국무총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의 국무위원 임명에 대한 제청, 그리고 국무위원의 해임에 대한 '건의' 뿐이다. '거국중립내각'의 법무부장관이 우병우의 혐의를 유야무야 덮으려고 하는 것을 총리가 파악했다 한들, 그 총리는 자신의 권한으로 법무부장관을 해임할 수 없다. 역시 이 경우에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대통령인 박근혜가 갖는다. 가령 문재인이 총리가 된다 한들, 박근혜가 거부한다면, 조윤선 문체부장관을 해임시킬 수 없다. '책임총리'란 이토록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현행 헌법상 '거국중립내각'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책임총리'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이 총리의 편에 서서 그에게 국정을 일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헌법적 개념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 당시 이해찬 총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통령으로부터 포괄적으로 권한을 위임받은 총리가 누릴 수 있는 한시적이며 임의적인 특권에 불과하다. 박경신 교수의 말을 인용해본다. "우선 새로운 총리가 누가 되었든 그가 권한이양을 얼마나 받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어야 하고 그 총리는 국회의원들이 뽑는 총리 즉 내각제 하의 총리와 유사한 정치적 위상을 갖게 된다." 지금 국민들이 야당에 요구하는 것이 고작 '박근혜를 잘 모시는 총리'인가?
절반이 넘는 국민들이 박근혜를 지지했고, 투표했다. 나머지 국민들은 그 결과에 승복했고,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민주적 절차를 통해 주어진 권한을 박근혜는 엉뚱한 사람들의 손에 넘겨준 상태였다. 이 모든 상황은 대통령제의 실패도 아니고, 내각책임제를 시작해야 할 이유도 되지 못하며, '거국중립내각'을 통해 유야무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해결될 수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대통령제가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처리해야 하는 '비정상적' 상황일 뿐이다. 대통령제의 원조격인 미국에서도 이미 겪었고, 심지어 대한민국 역시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는, 흔하다면 흔한 대통령 하야 요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야 요구를 하지 않는가? 왜 하야 요구를 하지 않으며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국회에 띡 방문한 박근혜가 '야 니네가 추천해'라고 띡 던지고 가는 상황을 만들어서 주도권을 뺴앗기는가? 야권은 '최순실 게이트'에 진정으로 분노하긴 했는가? 최순실 일당에게 국정 농단을 허락한 박근혜를 몰아내고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합법적 권력을 획득하는 대신, 박근혜를 식물대통령으로 만들고 자신들이 '비선실세'가 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닌가? 선출되지 않았으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정작 책임져야 할 때에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낸 후 차지하고 싶어서 '거국중립내각' 타령으로 세월을 허비한 것은 아닌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일개 비리 사태가 아니다. 헌정 질서의 위기다. 국민에게 선택받은 이가 헌법상 주어진 권력을 올바로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주판을 튕기며 스스로를 또 하나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자리에 놓기 위해 골몰하는 야권을, 국민들은 절대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정 총책임자는 대통령이지 '책임총리'가 아니다. 정치권은 헌정질서 농단 사건을 두고 또 다른 헌정질서 농단을 모의하는 짓을 당장 그만두고, 헌법상 정해진 절차에 따라, 대한민국을 정상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2016-11-05
2016/10/30 - 2016/11/05: 두 번째 사과, 주필리핀 미국 대사, 파리협정
* 지난달 25일 이른바 '비선실세' 최순실의 존재와 대통령 취임 전 연설문 개입 등을 시인한 박근혜 대통령은, 11월 4일 두 번째 대국민담화를 통해 필요하다면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것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하루 전 취임 의사를 밝힌 김병준 국무총리 내정자의 '냉장고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누군가에 의해 현 상황이 조율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동력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온 국정과제들까지도 모두 비리로 낙인찍히고 있는 현실도 참으로 안타깝"다며, 현재 수사의 대상으로 오른 사안들과 그 외의 비리 의혹 사이에 선을 긋고 있다.
이번 대국민담화의 핵심은 최순실의 혐의를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지으려 한다는 것.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권력형 비리의 직접적 당사자가 아님을 주장함으로써, 대통령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 이것은 검찰의 수사를 통해, 혹은 내부 고발 등을 통해, 뒤집힐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한 "심지어 제가 사이비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박근혜 대통령은 단언하였다. 이 또한 향후 수사 혹은 내부 증언에 의해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의 네티즌들은 대국민담화 중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이런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는 구절을 패러디하고 있다.
* 성김 전 대북특별대표가 주필리핀 미국 대사로 임명됐다.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연이은 공격적 발언 및 그에 상응하는 친중 반미 행보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된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러셀 국무부 차관보는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는 “작은 난관에 직면했다”며 “양국을 연결하는 우정과 공통의 가치관에 변함은 없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우방 혹은 태평양 전진 기지였던 필리핀 대사로 성김 전 대북특별대표를 임명한 것은, 미국이 바라보는 필리핀의 지위가 '우방'에서 '불량국가'에 한 걸음 가까워졌음을 보여준다.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애정, 호의, 동경심을 감추지 못하는 한국의 일부 '진보' 인사들은 미국의 이러한 인사 조치를 보다 진지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 지구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 협약인 '파리협정'이 11월 4일 정식으로 발효됐다. 주요 37개 선진국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이 비준을 거부하고 캐나다가 탈퇴하는 등 뚜렷한 한계를 드러냈던 교토의정서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우선 당사국이 총 195개국으로, 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했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미국, 중국, 인도 등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고 있거나 온실가스 배출량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국가들이 구속력 있는 협약을 맺었다.
교토의정서와 달리 파리협정의 채택이 폭넓게 이루어진 것은 그 어떤 국가도 기후 변화를 더이상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평균 기온이 오르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안다. 북극의 바다가 여름에 얼지 않고 있다는 것 역시 인공위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투발루 뿐 아니라 뉴욕 역시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극단적인 기상 현상으로 인해 지구 곳곳에서 이재민이 발생하고 있다. 위기가 구체화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지구 평균온도의 상승폭을 섭씨 2도씨 내로 제한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지난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400PPM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유엔 산하 IPCC(정부 간 기후변화 협의체)를 비롯한 기후학자들은 그동안 지구의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가 450PPM에 도달하면 지구 생명체의 멸종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파리협정의 준수 및 각계의 노력과 기술적 발전을 통해, 예정된 파국을 지연시키고 막아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하루 전 취임 의사를 밝힌 김병준 국무총리 내정자의 '냉장고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누군가에 의해 현 상황이 조율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동력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온 국정과제들까지도 모두 비리로 낙인찍히고 있는 현실도 참으로 안타깝"다며, 현재 수사의 대상으로 오른 사안들과 그 외의 비리 의혹 사이에 선을 긋고 있다.
이번 대국민담화의 핵심은 최순실의 혐의를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지으려 한다는 것.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권력형 비리의 직접적 당사자가 아님을 주장함으로써, 대통령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 이것은 검찰의 수사를 통해, 혹은 내부 고발 등을 통해, 뒤집힐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한 "심지어 제가 사이비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박근혜 대통령은 단언하였다. 이 또한 향후 수사 혹은 내부 증언에 의해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의 네티즌들은 대국민담화 중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이런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는 구절을 패러디하고 있다.
* 성김 전 대북특별대표가 주필리핀 미국 대사로 임명됐다.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연이은 공격적 발언 및 그에 상응하는 친중 반미 행보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된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러셀 국무부 차관보는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는 “작은 난관에 직면했다”며 “양국을 연결하는 우정과 공통의 가치관에 변함은 없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우방 혹은 태평양 전진 기지였던 필리핀 대사로 성김 전 대북특별대표를 임명한 것은, 미국이 바라보는 필리핀의 지위가 '우방'에서 '불량국가'에 한 걸음 가까워졌음을 보여준다.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애정, 호의, 동경심을 감추지 못하는 한국의 일부 '진보' 인사들은 미국의 이러한 인사 조치를 보다 진지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 지구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 협약인 '파리협정'이 11월 4일 정식으로 발효됐다. 주요 37개 선진국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이 비준을 거부하고 캐나다가 탈퇴하는 등 뚜렷한 한계를 드러냈던 교토의정서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우선 당사국이 총 195개국으로, 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했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미국, 중국, 인도 등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고 있거나 온실가스 배출량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국가들이 구속력 있는 협약을 맺었다.
교토의정서와 달리 파리협정의 채택이 폭넓게 이루어진 것은 그 어떤 국가도 기후 변화를 더이상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평균 기온이 오르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안다. 북극의 바다가 여름에 얼지 않고 있다는 것 역시 인공위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투발루 뿐 아니라 뉴욕 역시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극단적인 기상 현상으로 인해 지구 곳곳에서 이재민이 발생하고 있다. 위기가 구체화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지구 평균온도의 상승폭을 섭씨 2도씨 내로 제한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지난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400PPM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유엔 산하 IPCC(정부 간 기후변화 협의체)를 비롯한 기후학자들은 그동안 지구의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가 450PPM에 도달하면 지구 생명체의 멸종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파리협정의 준수 및 각계의 노력과 기술적 발전을 통해, 예정된 파국을 지연시키고 막아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2016-11-01
[북리뷰] 만주를 생각한다, 철도를 고민한다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고바야시 히데오, 산처럼, 1만2천원.
부산에서 신의주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럽의 끝인 지브롤터까지 향하는 꿈.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대륙을 향한 철도의 로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만주라는 공간, 그리고 그 만주에 철도가 깔리던 그 시대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민중가요의 한 구절처럼 '광활한 만주벌판'을 노래하지만, 정작 그 만주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심지어 몽고인과 러시아인들이 뒤섞이는 점이지대가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이해는 아직도 피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와세다대학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교수인 고바야시 히데오의 책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를 펼쳐보자.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일명 '만철'은 한때 설립되고 사라져버린 일개 기업이 아니었다.
마치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영국이라는 국가 이전에 동인도회사라는 한 기업이 먼저 기틀을 다졌던 것처럼, 일본의 만주 지배 역시 일본이라는 국가의 프로젝트였지만 만철이라는 한 기업의 영리 활동의 외관을 빌렸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댓가로 얻어낸 철도 영업권 및 철도 부속지 관할권을 메이지 천황은 만철에 일임했고 야심만만한 일본의 엘리트들이 미개척지를 향해 뛰어들었던 것이다.
만주는 '비어있는 땅'이었다. 청나라가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그 진공에 수많은 세력들이 동시에 빨려들어갔다. 그런 만주에서 철도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기관차와 열차 및 기타 부속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 재료를 공급하는 제철소, 그 모든 시설과 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무장 세력까지 포괄하는 준 국가 활동과 다를 바 없었다. 만철의 조사부는 그 모든 과정을 통솔하는 브레인 역할을 하면서, 훗날 일본의 대장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국가통제와 관려통제를 섞어서 짜낸"(16쪽) 통제경제의 모델을 생산해냈다.
그 여파는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만철 조사부는 1937년부터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했다. 그것은 30여년 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군복무를 한 박정희에 의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부활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만주국의 5개년 계획은 안산(鞍山) 제철소와 쇼와(昭化) 제강소를 중심에 두고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그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 일본으로부터 얻어온 차관과 기술력을 동원해 포항제철소를 건립했던 것이다.
만주국의 관료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논의는 이미 몇 차례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만주국과 만철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 분위기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짧고 가벼운 책은 일제강점기 만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입체적으로 끌어올려주기 위한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해낸다. '광활한 만주벌판', 그곳에는 철도가 놓여 있었다.
고바야시 히데오, 산처럼, 1만2천원.
부산에서 신의주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럽의 끝인 지브롤터까지 향하는 꿈.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대륙을 향한 철도의 로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만주라는 공간, 그리고 그 만주에 철도가 깔리던 그 시대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민중가요의 한 구절처럼 '광활한 만주벌판'을 노래하지만, 정작 그 만주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심지어 몽고인과 러시아인들이 뒤섞이는 점이지대가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이해는 아직도 피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와세다대학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교수인 고바야시 히데오의 책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를 펼쳐보자.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일명 '만철'은 한때 설립되고 사라져버린 일개 기업이 아니었다.
정식명칭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 이 책에서 그 '탄생부터 사망까지' 40년에 가까운 역사를 더듬어보면서 이 회사가 가진 의미를 고찰해보려 한다. 1906년부터 1945년까지 20세기 전반의 반세기를 버텨온 이 회사는 일본 최대의 주식회사로서 중국 동북(東北)지역, '만주'에 군림했다. '만주'의 중요 산업을 지배하고, 철도 인접지역에 '부속지'라는 이름의 '영토'를 가진 이 회사는, 명칭은 주식회사였지만 그 실상은 하나의 식민지 국가였다. 세칭 '만철왕국.' 이 회사는 물론 중국 동북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일본 국내에도 그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15쪽)
마치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영국이라는 국가 이전에 동인도회사라는 한 기업이 먼저 기틀을 다졌던 것처럼, 일본의 만주 지배 역시 일본이라는 국가의 프로젝트였지만 만철이라는 한 기업의 영리 활동의 외관을 빌렸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댓가로 얻어낸 철도 영업권 및 철도 부속지 관할권을 메이지 천황은 만철에 일임했고 야심만만한 일본의 엘리트들이 미개척지를 향해 뛰어들었던 것이다.
만주는 '비어있는 땅'이었다. 청나라가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그 진공에 수많은 세력들이 동시에 빨려들어갔다. 그런 만주에서 철도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기관차와 열차 및 기타 부속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 재료를 공급하는 제철소, 그 모든 시설과 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무장 세력까지 포괄하는 준 국가 활동과 다를 바 없었다. 만철의 조사부는 그 모든 과정을 통솔하는 브레인 역할을 하면서, 훗날 일본의 대장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국가통제와 관려통제를 섞어서 짜낸"(16쪽) 통제경제의 모델을 생산해냈다.
그 여파는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만철 조사부는 1937년부터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했다. 그것은 30여년 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군복무를 한 박정희에 의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부활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만주국의 5개년 계획은 안산(鞍山) 제철소와 쇼와(昭化) 제강소를 중심에 두고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그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 일본으로부터 얻어온 차관과 기술력을 동원해 포항제철소를 건립했던 것이다.
만주국의 관료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논의는 이미 몇 차례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만주국과 만철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 분위기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짧고 가벼운 책은 일제강점기 만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입체적으로 끌어올려주기 위한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해낸다. '광활한 만주벌판', 그곳에는 철도가 놓여 있었다.
2016.11.01ㅣ주간경향 11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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