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8

[북리뷰] 읽고 쓰는 여자들, 스스로를 변호하다

문학소녀
김용언 저·반비·1만5000원

'문학소녀'는 멸칭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자아도취적이며, 자기 자신과 소설 속의 주인공을 구분하지 못하고, 흔히 경제적으로 무책임하며, 그나마 문학적 취향도 사실 좋지 않은 여성들을 향한 조롱의 표현이 바로 '문학소녀'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전혜린은 바로 그 '문학소녀'의 대명사와도 같다.

그러므로 전혜린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전혜린의 책을 감명깊게 읽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칼럼니스트 고종석 등의 냉소어린 평가는 전혜린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완전히 고착시켰다. "이들의 선고에 힘입어, 이제 전혜린은 특정한 독서의 출발점의 공통 대명사가 아니라, 부잣집 철부지 문학소녀의 대명사로 더욱 자주 호명되는 것 같다."(16쪽)

『문학소녀』는 바로 그러한 경향성과 맞서 싸우는 책이다. 애초에 '문학소녀'라는 멸칭을 제목으로 전유하고 있는 것부터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미스터리 소설 잡지 <미스테리아>의 편집장인 저자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전혜린과 '문학소녀'들에 대한 폄하의 근간에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내 말은, 전혜린이 그렇게 비웃음과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17쪽) 그에게 이 책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를 추적하면서 나의 '문화적 기억'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한, 내 어린 시절을 오랫동안 사로잡았던 전혜린을 이해하기 위한,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문학소녀는 왜 안전하게 놀려댈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한, 그리고 전혜린을 쉽게 비웃는 이들에게 변호를 자청하기 위한 기나긴 '수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20쪽)

이 책을 읽고 환호할 독자들은 이 서평이 나가기 전부터 『문학소녀』의 출간 소식을 전해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이들에게는 앞서 인용된 것 이상의 책 소개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남자들, 그 중에서도 여성 차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진지하고 비장하게 전혜린을 '변호'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여기서 잠깐 내 이야기를 해보자. 중학교 3학년 시절의 일이다. 고교 비평준화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는 대부분 시험과 무관한 책을 읽으며 소일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그 무렵에 읽었다. 『태백산맥』의 1부 제목은 '恨의 모닥불'이다. 그걸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자율학습 감독을 하던 담임선생님이 내가 읽던 책을 힐끗 보더니, '성(性)의 모닥불?' 하면서 빼앗아가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읽던 소설이 '그런 책'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돌려주었다. 혼나지도 않고, 조롱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머쓱해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격려를 받았다. 좋은 책 읽는다고.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거나,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등, 우리 사회에 통용되던 책읽기에 대한 그 모든 관대한 시선들을 문득 떠올려본다. 내가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였던 그것은 남자들에게만 허용된 특권 아니었을까? 전혜린을 읽지 않은, 전혜린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도 이 고민에 동참해야 한다. 지금까지 상식인 양 통용되어온 여성의 독서를 향한 폄하의 시선에 『문학소녀』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한국의 문학계는 좀 더 진지하게 응답할 의무가 있다.

2017.07.18ㅣ주간경향 1235호

2017-07-14

한산모시, 세탁기, 에어컨

올 여름 더위는 한산모시로 맞서보자?

2017년 7월 13일, 대한민국 청와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천군수 출신으로 이날 처음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한 나소열 자치분권비서관이 눈에 띄자 문 대통령은 '한산모시'를 거론했다." 일종의 스몰 토크일 수도 있겠지만 논의가 전개되는 방식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문 대통령이 ""예전 군수님으로 계실 때 한산모시를 입으셨는데 보기에도 참 좋았다"고 말"하자, "나 비서관은 "모시를 입으면 체감온도가 3도 더 떨어진다고 한다. 대통령님께서도 한산모시를 입으시면 어떠신가"라고 답해 회의장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이 '한산모시' 대화는 복선이다. 어떤 복선인가? 현 정부가 기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탈핵 기조에 맞물려, 공공기관 냉방 온도 제한을 민간에까지 확대하고 싶다는 대통령의 심경을 드러내기 위한 복선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문 대통령이 여름철 냉방 온도가 28도에 맞춰져 있는 것을 거론하며 "우리는 28도 지키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김수현 사회수석이 "여름철 온도가 28도 넘게 올라가면 자동으로 냉방이 켜지고 내려가면 꺼진다"고 답했다.

이어 문미옥 과학기술보좌관이 "사무실 냉방 온도는 양복을 입고 일하는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며 "재킷을 벗는 것이 에너지 절약에 굉장히 좋다는 논문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넥타이만 풀거나 재킷을 벗어도 그렇다. 시민들은 반팔을 입는데 과거 관공서나 은행, 대기업에 반팔 입고 들어가면 추웠다"며 "정부는 28도를 스스로 하면 되는데 민간에는 어떻게 되나"라고 물었다.

김승욱, ""한산모시 입으면 3도 떨어져" 靑 회의서 '무더위나기' 화제", 연합뉴스, 2017년 7월 13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13/0200000000AKR20170713095500001.HTML

내가 지난 포스트(링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 청와대에서 나온 한산모시 타령은 박정희 시대의 '근검절약', '한 집에 전등 하나 끄기'와 동일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실제로 그 시대에는 산업용으로 쓰기에도 전기가 모자라던 시점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정법: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면?

다른 모든 판단을 일단 보류해두고, 한 가지 가정법을 도입해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산모시에 대해 스몰토크를 하다가 '공공기관 에어컨 온도 28도를 민간에도 실현할 방법 없느냐'라고 말했다면 여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동일한 취지의 발언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상대적으로 너무 잠잠하다.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 이것은 값비싼 한산모시로 옷을 해 입는 기득권층 외의 모든 사람의 더위 고통을 무시하는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옷감인 모시는 가격도 비쌀 뿐더러 재질이 약하기 때문에 바느질하기도 힘들다. 빨래할 때에도 당연히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 없고, 조심스럽게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야 한다. 그걸 잘 널어서 말리지 않으면 옷감이 상한다. 입을 때에는 그냥 입는 게 아니라 풀을 뿌려서 빳빳하게 다려야 한다. 요컨대 생산 및 관리에 있어서 철저히 노동집약적인 옷이다.

게다가 그 옷을 입는 사람은 육체노동을 할 수가 없다. 옷감이 너무 섬세하고 약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몸 쓰는 사람이 활동적으로 입으라고 만드는 옷이 아니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시조 읊는 양반님네들을 위한 옷이다. 만들고 관리할 때에는 남의 노동이 들어가고, 입는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 옷, 그런 옷을 입자는 말이 농담처럼 회의를 앞두고 오가는 청와대의 풍경이다.


지배층의 한산모시, 피지배층의 에어컨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일이다. 탈핵 탈원전이라는 추상적 당위를 실현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탈핵 선언을 해버린 청와대에서, 그 무더위에 맞서는 방법으로 농담인 양 슬쩍 한산모시를 운운한다는 것 말이다. 치열하게 머리를 쓰면서, 땀흘려 몸을 움직인 후, 제대로 냉방이 된 곳에서 쉬는 국민들의 모습을 우리의 청와대는 상상하지 못한다. 대신 과거의 지배계층, 세습 귀족들이 입던 노동집약적인 옷감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탈핵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전기 공급 저하에 맞춰 냉방 온도를 높일 것을 민간 영역에까지 넌지시 주문한다. 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정작 본인들은 긴팔 옷 입고 있었고, 회의장에 들어올 때까지 재킷까지 걸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애초에 한산모시는 그런 옷감이 아니다. 남이 빨아주고 다려주고 풀먹여주는 한산모시 입고 공사판에서 삽질을 하거나 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국 한산모시에 대한 대화는 애초에 더울 일 없는 '윗분들'한테나 통할 소리다.

그런데 그걸 국민들 들으라고, 기업들 들으라고 언론 앞에서 넌지시 흘리고 있다. 이것은 위선이며 기만이다. 게다가 탈핵이라는 당위를 앞세우고 있다. 나는 내가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의 21세기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쯤에 해당하는 대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것은 에너지 정책 이전에 철학의 문제다. 세계관의 차이다. 무슨 말인지 좀 더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고장난 냉장고에 갇혀버린 '진보'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이 과연 '진보'인가? '적극적인 에너지 수요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 탈원전론자들의 기본 논지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경제 성장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한국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 중 하나였던 값싼 전기를 포기하더라도, 탈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물론 산업용 전기가 한국에서 놀라우리만치 저렴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따라 기업들이 방만하게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정용 전기를 OECD 평균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링크). '에너지 절약'이라는 당위와 누진제로 오랫동안 국민들의 정신을 옥죄어온 탓이다.

그러므로 산업용 전기 이용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민간 영역에서 소비하는 전기 사용량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진다. 탈핵 탈원전주의자들은 당연히 그 또한 줄여야 한다, 혹은 '합리화'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강신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경향신문, 2013년 7월 2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12131165

이런 식의 주장은 환경주의의 탈을 쓴 전근대적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오가는 탈핵 탈원전 논의의 근간과, 이 퇴행적 전근대주의와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에너지의 사용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현재의 환경 담론은 과연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선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가?


더 많은, 더 효율적인, 더 평등한 에너지를

에너지를 더 쓴다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이고, 평등이며, 사랑이다. 일단 그것은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 장하준의 그 유명한,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인류에 더 큰 기여를 했다'는 말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기계의 도움을 받아 훨씬 빠르게 그것들을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노동생산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강신주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에너지의 사용, 가령 에어컨은, 한산모시 입고 부채질하는 지배층이 아닌 사람들도 여름에 시원하게 몸을 식힐 수 있게 해준다. 즉 계급적으로도 더욱 평등한 선택지인 것이다. 방직산업의 발전이 노동의 착취를 포함한 여러 폐해를 낳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더욱 분명한 사실은 이전까지는 평생 한 벌의 옷만 겨우 입고 살았을 수많은 저소득층에게 풍족한 의복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여름에는 제대로 틀어놓지 않는 에어컨 때문에 낮 시간을 허비한다. 겨울에는 추위에 떨면서 일을 하는데, 개인용 난방 기구를 틀려고 하면 회사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단속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노동 시간이 길어지는 원인 중 일부가 된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은, 에너지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나는 당연히 전자의 편이지만 결코 후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이고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길이기 때문이다.

'에어컨 온도를 높이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되지', 이것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거의 같은 소리다. 지배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피지배계층을 포함한 국민 전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결코 아니다. 그 한산모시를 만들고, 빨래하고, 풀을 먹여 다리는 사람의 노동을 지워버릴 뿐 아니라, 그렇게 팔자 좋게 좋은 옷 입고 유유자적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 역시 도외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

만약 어떤 정치 세력이 '우리는 내년도 경제성장률 목표를 마이너스로 잡겠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에너지에 대해서만큼은 '지금보다 전기의 생산도 소비도 줄이자'는 말이 무슨 합리적인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 에너지의 생산·소비는 경제 그 자체의 성장 및 침체와 직결된 것인데 말이다.

이번 탈핵 탈원전 논의를 계기로 한국의 진보 진영이 집단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전근대로의 퇴행적 경향성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한 인상이다.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 에너지의 생산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 안에 원전이 있다면, 그 원전의 위험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최대한 효율적이면서 평등하게 배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무턱대고 일단 원전은 악이니까 추방하고 보자는 식의 정념을 바탕으로 한 탈핵 논의는 우리를 경제성장도 안 되고 행복하지도 않은 전근대국가의 길로 주저앉힐 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고,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치도 않는다.

우리에게는 한산모시가 아니라 26도, 혹은 25도로 맞춰진 에어컨이 필요하다. 의사결정권자들이 한산모시를 입고 다니면서 에어컨을 끄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터와 집에서 적절한 환경을 제공받는 그런 나라를 원한다. 이번 여름의 탈핵 논의를 계기로, 진보 진영 내의 퇴행적 전근대 경향성이 더욱 가시화되고 비판되기를 바란다.

2017-07-12

전기를 아끼는 나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때'

문재인 대통령이 탈원전 선포를 해버리면서 에너지 전환이 주요 정치적 논점 중 하나로 부상했다. 본디 국가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긴 하나, 정치적 지지와 호오에 따른 입장의 차이가 해당 논점을 파악하고 입장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체로 기존에 '진보'로 여겨지던 진영에서는 탈핵에 찬성하며, '보수'는 탈핵에 반대하거나 신중론을 편다.

지금껏 '진보 논객' 소리를 들어왔지만 나는 지금처럼 기습적으로 선포된 탈핵 논의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논의일 뿐 아니라, 비도덕적이다.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발주한 공사를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엎어버리는 것이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다는 것이다.

탈핵 찬성론자들은 대체로 이런 입장이다. '전기요금이 오른다고? 까짓거 한 달에 전기요금 만 원 더 내고 핵발전소(꼭 이렇게 부른다, 핵무기를 연상시키기 위해) 없는 세상에 살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해보자. 현재로서도 그 '단돈 만원'의 전기요금을 내지 않기 위해 무더위를 온몸으로 견디는 취약계층이 있다. 전기요금 내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선풍기 트는 것도 아쉬워하는 에너지 빈곤층이 2016년 기준으로 130만 가구를 넘었다. 이들 앞에서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때' 같은 소리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크게 다르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산업용 전기료만 오르면 괜찮다?

그러면 대체로 이런 반론이 돌아온다. '산업용' 전기요금만 많이 올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공약대로 탈핵을 추진할 경우 2030년 가구당 전기료가 연간 31만4000원 인상될 것이라는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의 주장에 반박하는 기사를 읽어보자.

정 의원의 자료만 봐도 ‘연간 전기요금 31만원 인상’이라는 말은 과장이다. ‘31만원’은 산업용, 상업용, 주택용을 모두 합친 금액이다. 용도별로 나눠보면 산업용 전기료는 1320만7000원가량 인상된다. 하지만 주택용 전기료의 인상폭은 연간 6만2000원, 월간 5200원에 불과하다.

백철, "탈핵하면 전기료 폭탄 떨어진다는 가짜뉴스에 대하여", 경향신문, 2017년 7월 8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707081514011&code=940100

저 대목을 읽고 '아, 가정용 전기요금은 고작 한 달에 5000원 오르니까 괜찮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산업용 전기료가 무려 1320만원 이상 오른다는 것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대한민국은 산업용 전기료가 지나치게 낮은 나라다. 너무 전기값이 싼 나머지, 심지어 제철소에서도 용광로보다는 전기로를 선호한다. 그 편이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저러한 주장은 '재벌'에 대한 분노와 맞물려, '저들'에게 '고지서 폭탄'을 날리고픈 감정선을 건드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산업용 전기는 재벌 대기업만 쓰는 게 아니다. 게다가 상업용 전기료도 따라서 오를 수밖에 없다. 집에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비한 사람들 중 적잖은 이들이 그것을 중고나라 등에 매물로 내놓는다. 왜냐하면 전기요금이 심각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까페에는, 제아무리 '자그마한 동네 까페'여도, 그런 전기 먹는 괴물이 적어도 한 대 이상 있다. 만약 산업용 전기요금이 연간 1320만원 이상 오른다면 상업용 전기를 사용하는 '자그마한 동네 까페'들은 무사할까?

삼성전자도 동네 까페도 전기를 쓴다

'가정용' 전기는 '우리편'이고, '산업용' 전기는 '남의 편'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소규모 도자기 공방은 설비의 용이성과 편리성 때문에 가스가마가 아닌 전기가마를 운용하는 경우가 있다. 가정용이건 상업용이건 산업용이건, 전기 요금 인상의 직격타를 맞는다. 업무에 따라서 많은 양의 데스크탑을 사용하는 개인 개발자 프로그래머 등도 결국 전기요금 인상에 영향을 받는다.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이 오르는 것은 지금껏 배불리 먹고 있던 '재벌 밥그릇 빼앗기'니까 괜찮다는 식의 논리는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낮에는 산업용, 상업용 전기를 써가며 일을 하고, 밤에는 가정용 전기를 사용하는 집에서 쉰다. 구속된 이재용 부회장을 뒤로하고 연일 승승장구하는 삼성전자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직접 소유하고 경영하는 기업인 키친아트도(참고로 나는 자주 쓰고 바꾸는 후라이팬 류는 꼭 키친아트에서 구입한다) 산업용 전기를 쓴다. 세상에 '나쁜 기업'에게만 미사일처럼 콕 박히는 전기요금 인상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나는 지금 한국의 굉장히 낮은 산업용 전기요금이 전적으로 옳고 훌륭하며 영원히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용 전기와 달리 산업용 전기는 요금이 올라도 된다는 식의 나이브한 주장이 얼마나 맹목적인지, 그에 따라 옳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논증하고 있을 따름이다.

기업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다만 기업의 이익과 성장을 독점하는 일부 '오너'들과, 그들의 전횡을 수수방관하는 사회 시스템이 문제다. 아마 이 주장에는 대부분의 진보 진영 사람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벌과 대기업이 밉다는 이유로 산업용 전기료가 폭등해도 괜찮다는 식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출할 수밖에 없는 고정비용으로서의 전기료 인상은 대기업보다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들에게 더 큰 타격을 안겨줄 것이 너무도 명백한데 말이다.

이게 다 단군 할아버지 때문이다

전기요금은 장기적으로 볼 때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건 지금 너무 저렴하긴 하니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해보자. 단군 할아버지가 부동산 계약을 할 때 사기를 당했던 건지, 여름에는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고 그 와중에 습도가 6-70%대를 찍는다. 겨울에는 반대로 영하 10도까지도 우습게 내려간다. 여름에는 킨샤샤보다 덥고 겨울에는 모스크바보다 추운 날이 적지 않다.

이런 나라에서 전기 소비 자체를 죄악시하고, 그 위에 재벌 대기업에 대한 적개심을 끼얹어, 문재인 정권의 앞뒤 가리지 않는 탈핵 선언을 옹위하려 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공공기관 실내 온도를 28도로 제한하는데 나라의 뇌가 푹 익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봄에는 미세먼지, 여름에는 폭서와 습기, 가을에도 미세먼지, 겨울에는 혹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렇다. 그렇다면, 무조건 전기를 아껴야 한다는 당위를 내거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전기를 아끼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2016년에 폭염으로 무려 17명이 목숨을 잃은 나라에서,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무자들은 28도에 맞춰진 에어컨 때문에 낮에 더워서 일도 못하고 헤롱거리다가 야근을 하게 되는 이게 정상인가? 우리는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에 살 권리가 있지 않을까?

여름에는 열사병으로 목숨을 잃는 취약계층은 겨울에는 또 가스비를 내기 어려워서 전기장판 하나로 목숨을 부지한다. 에어콘을 꺼요, 냉장고가 없으면 음식이 빨리 상해서 이웃과 사이좋게 나눠먹게 되네요, 선풍기 하나면 충분해요 같은 소리는 이미 충분히 잘 만들어진 집에 살면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찍찍 내뱉는 배부른 비윤리적 망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탈핵 논의는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정치화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는 '박정희 시대의 향수' 때문에 에어컨을 끄고 땀흘려 고생하라는 식이었다면, 문재인 정권 시절에는 그 자리를 환경 담론이 차지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정권이나 저 정권이나, 퇴행적인 '에너지 절약'이라는 거짓 당위를 앞세워 냉철한 논의가 설 자리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택배 상하차 기사들이 고생한다며 정부에서 130억을 들여 택배 자동화 기술을 개발하기에 앞서, 모든 택배 상하차 기사들이 쉬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쉬는 시간에는 에어컨이 틀어진 휴게실에서 쉴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만들어주는 나라 말이다.

저렴한 전기료가 우리의 실생활과 상관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값싼 전기를 '사람'이 아닌 '기계'에만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직장에서 혹은 각자의 일터에서 보낸다. 일하는 내가 행복하지 못하면 그 어떤 나도 행복할 수 없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전기료의 급격한 인상은 일터의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전기를 사람이 쓰는 것, 사람의 몸이 편하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이런 논의가 동반되지 않는 한 전기요금과 관련된 현재의 논의는 극히 퇴행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에 에어컨을 28도로 고정시키는 정부와, 아파트 경비실에 설치된 에어컨을 틀지 못하도록 하는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결국 '전기를 아끼는 게 개인의 고통보다 중요하다'는 박정희 시대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 자리에서 쫓아낸 지금도 그 망령은 여전히 살아있다. 아니, 이제는 친환경 탈핵 탈원전이라는 새로운 망토를 두르고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에 살고 싶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탈핵 탈원전의 당위를 무턱대고 앞세우는 대신, 보다 냉철하게 향후 대한민국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여름이 되기를 바란다.



* 일러두기: 본문의 부정확한 서술을 수정했습니다. 2017년 7월 12일 오후 5시 20분.

2017-07-09

[별별시선]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2008년 12월, 나는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원자력발전소 추가 건설 계획을 비판했다. 그해 11월엔 바이오매스,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풍자성 칼럼을 썼다. 그러나 2017년 7월의 나는 당시의 나에게 온전히 동의할 수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9년쯤 됐으니 입장이 바뀔 법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다. 첫째, 신재생에너지의 기술적 발전에 대한 기대치가 수정됐다. 둘째,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자동차 산업이 변하고 있다. 셋째, 환경오염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하나씩 짚어보자. 내 입장이 달라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장밋빛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 가령 구글의 판단도 그렇다. 2007년 11월27일 구글은 google.org라는 비영리법인을 통해 ‘석탄보다 저렴한 재생가능에너지’(RE<C) 계획을 발표했다. 지열발전을 개량해 석탄보다 낮은 가격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이루어낸다는 것이었다. 유가가 하늘로 치솟고 수많은 기술 기업들이 신재생에너지라는 난제에 덤벼들던 시절의 일이다. 안타깝게도 2011년 11월22일, 구글은 RE<C 계획의 실패를 선언했다. 대신 그 외의 재생에너지와 전기자동차에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신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기대치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의 주요 수출 산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이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가솔린 혹은 디젤이 아니라 전기를 동력원으로 삼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지난 5일, 스웨덴의 자동차 메이커 볼보는 2019년부터 전기차 혹은 하이브리드 자동차만 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치 아이폰이 휴대폰 시장을 스마트폰 시장으로 바꿔놓았듯, 테슬라의 국내 진출은 전기차로의 전환에 있어서 촉매 역할을 할 것이다. 전기차는 전기를 연료로 삼는다. 따라서 전력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발전량을 줄이고 냉장고를 없애자는 식의 주장은 너무도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2008년과 달리 미세먼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중이다. 미세먼지의 주요 발생 원인으로는 석탄화력발전과 디젤 자동차를 꼽을 수 있다. 정부는 대신 액화천연가스(LNG)발전을 늘리겠다고 하지만, 석탄에 비해 비싸고 가격 변동이 심할뿐더러, 정도가 덜하다뿐이지 역시 미세먼지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신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은 날씨에 따라 좌우된다. 그래서 LNG 등 화력발전소가 더 자주 가동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친환경적인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탈핵 선언 철회를 촉구한 환경단체 ‘환경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대표 마이클 쉘렌버거 역시 이러한 딜레마로 인해 입장을 바꾼 경우에 속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이고,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동시에 개인과 산업체가 모두 안정적으로 충분한 전기를 공급받으려면 ‘탈핵’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연구와 투자를 유지하고 늘려나가되 현실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석탄에 비해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은 현재까지 원자력뿐이다. 원자로 해체, 사용후 핵연료 처분, 중·저준위 폐기물 관리 비용을 모두 포함해도 그렇다. 원전 사고의 우려는 최대한 안전성을 높이고 운영 과정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대응할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사회적 위험 요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저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했다고 여겨지는 이 말은,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유작인 「When The Facts Change」의 제목이 되었다. 그렇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경향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비고: 탈핵 및 국제 정치에 대한 노선 차이를 이유로 경향신문은 이 칼럼을 끝으로 나를 별별시선 필자에서 제외시켰다.


입력 : 2017.07.09 20:53:00 수정 : 2017.07.11 17:13:33

2017-07-04

[북리뷰] 통일의 길, 헬무트 콜에게 묻는다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
헬무트 콜 저·김주일 역·해냄·1만5000원

지난 6월 16일,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한 권 꺼냈다.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 헬무트 콜 총리가 1991년 독일 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달성한지 5년만인 1996년에 펴낸 회고록이다. "1990년 10월 3일에 이루어진 독일 재통일,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 필연, 그 아무것도 아니었을까?"(11쪽) 콜은 포퍼의 역사관을 인용하며 독일 통일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당연히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성과임을 강조한다. "인간은 익명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이리저리 발길질만 당하는 단순한 놀이공이 아니라, 책임을 갖고 역사 발전에 적극 참여할 능력과 사명감이 있"(11쪽)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통일'이라는 개념을 '외세 배격'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헬무트 콜 총리 자신부터가 철저한 친 나토(NATO)주의자였고, 1983년 서독 영토 내에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미국의 전략 무기 퍼싱 미사일 배치에 찬성했다. 녹색당과 사민당의 반발이 엄청났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내 주장이지만, 만약 1983년 우리가 퍼싱 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서독과 미국과의 관계는 큰 타격을 입었을지도 모른다."(27쪽)

그렇게 쌓아올린 미국, 영국, 프랑스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전범국가인 독일의 통일이 기존 전승국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통일된 독일은 세계를 뒤흔들 수 있을만큼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존재이기에 위협이 된다는 이른바 '독일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으면 국제 사회가 독일의 통일을 허락하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콜은 그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기존의 우방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소련을 설득하는 어려운 과업에 임했다. 운도 좋았다. 정의감에 불타는 복음주의자 조지 H. W. 부시가 미국의 대통령이었고, 협상이 가능한 지적인 개혁 개방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였으니 말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충격 속에서 헬무트 콜은 이른바 '10개항 프로그램'을 발표해 통일 논의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 중 제3항은 "서독 정부는 독립적, 비사회주의 정당들의 참여하에 자유, 평등, 비밀선거를 원하는 동독 주민들의 요구를 지지한다"(125쪽)고 밝히고 있으며, 제5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 국가와 비민주 국가 사이의 국가연합적 구조는 한마디로 난센스다. 그것은 동독에 민주화된 정부가 들어섰을 때만이 가능한 것"(126쪽)이라며 기존의 정권과 선을 긋는 것이었다. 대내외적 압력에 굴복한 여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은 조기 총선에 임했지만 참패했고, 기민당과 연합한 동독의 군소 3정당의 연합체 '독일동맹'이 압승한다. 요컨대 서독은 동독에 민주적 절차를 강요했다. 그렇게 확보된 정당성이 있었기에 평화적인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 소개된 것은 1998년의 일이다. 약 20여년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는 독일의 통일 과정에 대해 보다 잘 알게 되었는가? '통일을 하면 돈이 많이 든다' 외에 다른 논의가 전무한 상태로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헬무트 콜 총리는 독일의 통일을 원했고, 진지하게 현실에 대응했다. 2017년 현재, 한반도와 대한민국의 현황은 어떠한가?

2017.07.04ㅣ주간경향 12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