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더위는 한산모시로 맞서보자?
2017년 7월 13일, 대한민국 청와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천군수 출신으로 이날 처음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한 나소열 자치분권비서관이 눈에 띄자 문 대통령은 '한산모시'를 거론했다." 일종의 스몰 토크일 수도 있겠지만 논의가 전개되는 방식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문 대통령이 ""예전 군수님으로 계실 때 한산모시를 입으셨는데 보기에도 참 좋았다"고 말"하자, "나 비서관은 "모시를 입으면 체감온도가 3도 더 떨어진다고 한다. 대통령님께서도 한산모시를 입으시면 어떠신가"라고 답해 회의장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이 '한산모시' 대화는 복선이다. 어떤 복선인가? 현 정부가 기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탈핵 기조에 맞물려, 공공기관 냉방 온도 제한을 민간에까지 확대하고 싶다는 대통령의 심경을 드러내기 위한 복선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문 대통령이 여름철 냉방 온도가 28도에 맞춰져 있는 것을 거론하며 "우리는 28도 지키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김수현 사회수석이 "여름철 온도가 28도 넘게 올라가면 자동으로 냉방이 켜지고 내려가면 꺼진다"고 답했다.
이어 문미옥 과학기술보좌관이 "사무실 냉방 온도는 양복을 입고 일하는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며 "재킷을 벗는 것이 에너지 절약에 굉장히 좋다는 논문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넥타이만 풀거나 재킷을 벗어도 그렇다. 시민들은 반팔을 입는데 과거 관공서나 은행, 대기업에 반팔 입고 들어가면 추웠다"며 "정부는 28도를 스스로 하면 되는데 민간에는 어떻게 되나"라고 물었다.
김승욱, ""한산모시 입으면 3도 떨어져" 靑 회의서 '무더위나기' 화제", 연합뉴스, 2017년 7월 13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13/0200000000AKR20170713095500001.HTML
내가 지난 포스트(링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 청와대에서 나온 한산모시 타령은 박정희 시대의 '근검절약', '한 집에 전등 하나 끄기'와 동일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실제로 그 시대에는 산업용으로 쓰기에도 전기가 모자라던 시점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정법: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면?
다른 모든 판단을 일단 보류해두고, 한 가지 가정법을 도입해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산모시에 대해 스몰토크를 하다가 '공공기관 에어컨 온도 28도를 민간에도 실현할 방법 없느냐'라고 말했다면 여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동일한 취지의 발언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상대적으로 너무 잠잠하다.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 이것은 값비싼 한산모시로 옷을 해 입는 기득권층 외의 모든 사람의 더위 고통을 무시하는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옷감인 모시는 가격도 비쌀 뿐더러 재질이 약하기 때문에 바느질하기도 힘들다. 빨래할 때에도 당연히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 없고, 조심스럽게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야 한다. 그걸 잘 널어서 말리지 않으면 옷감이 상한다. 입을 때에는 그냥 입는 게 아니라 풀을 뿌려서 빳빳하게 다려야 한다. 요컨대 생산 및 관리에 있어서 철저히 노동집약적인 옷이다.
게다가 그 옷을 입는 사람은 육체노동을 할 수가 없다. 옷감이 너무 섬세하고 약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몸 쓰는 사람이 활동적으로 입으라고 만드는 옷이 아니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시조 읊는 양반님네들을 위한 옷이다. 만들고 관리할 때에는 남의 노동이 들어가고, 입는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 옷, 그런 옷을 입자는 말이 농담처럼 회의를 앞두고 오가는 청와대의 풍경이다.
지배층의 한산모시, 피지배층의 에어컨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일이다. 탈핵 탈원전이라는 추상적 당위를 실현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탈핵 선언을 해버린 청와대에서, 그 무더위에 맞서는 방법으로 농담인 양 슬쩍 한산모시를 운운한다는 것 말이다. 치열하게 머리를 쓰면서, 땀흘려 몸을 움직인 후, 제대로 냉방이 된 곳에서 쉬는 국민들의 모습을 우리의 청와대는 상상하지 못한다. 대신 과거의 지배계층, 세습 귀족들이 입던 노동집약적인 옷감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탈핵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전기 공급 저하에 맞춰 냉방 온도를 높일 것을 민간 영역에까지 넌지시 주문한다. 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정작 본인들은 긴팔 옷 입고 있었고, 회의장에 들어올 때까지 재킷까지 걸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애초에 한산모시는 그런 옷감이 아니다. 남이 빨아주고 다려주고 풀먹여주는 한산모시 입고 공사판에서 삽질을 하거나 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국 한산모시에 대한 대화는 애초에 더울 일 없는 '윗분들'한테나 통할 소리다.
그런데 그걸 국민들 들으라고, 기업들 들으라고 언론 앞에서 넌지시 흘리고 있다. 이것은 위선이며 기만이다. 게다가 탈핵이라는 당위를 앞세우고 있다. 나는 내가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의 21세기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쯤에 해당하는 대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것은 에너지 정책 이전에 철학의 문제다. 세계관의 차이다. 무슨 말인지 좀 더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고장난 냉장고에 갇혀버린 '진보'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이 과연 '진보'인가? '적극적인 에너지 수요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 탈원전론자들의 기본 논지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경제 성장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한국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 중 하나였던 값싼 전기를 포기하더라도, 탈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물론 산업용 전기가 한국에서 놀라우리만치 저렴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따라 기업들이 방만하게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정용 전기를 OECD 평균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링크). '에너지 절약'이라는 당위와 누진제로 오랫동안 국민들의 정신을 옥죄어온 탓이다.
그러므로 산업용 전기 이용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민간 영역에서 소비하는 전기 사용량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진다. 탈핵 탈원전주의자들은 당연히 그 또한 줄여야 한다, 혹은 '합리화'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강신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경향신문, 2013년 7월 2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12131165
이런 식의 주장은 환경주의의 탈을 쓴 전근대적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오가는 탈핵 탈원전 논의의 근간과, 이 퇴행적 전근대주의와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에너지의 사용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현재의 환경 담론은 과연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선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가?
더 많은, 더 효율적인, 더 평등한 에너지를
에너지를 더 쓴다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이고, 평등이며, 사랑이다. 일단 그것은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 장하준의 그 유명한,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인류에 더 큰 기여를 했다'는 말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기계의 도움을 받아 훨씬 빠르게 그것들을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노동생산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강신주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에너지의 사용, 가령 에어컨은, 한산모시 입고 부채질하는 지배층이 아닌 사람들도 여름에 시원하게 몸을 식힐 수 있게 해준다. 즉 계급적으로도 더욱 평등한 선택지인 것이다. 방직산업의 발전이 노동의 착취를 포함한 여러 폐해를 낳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더욱 분명한 사실은 이전까지는 평생 한 벌의 옷만 겨우 입고 살았을 수많은 저소득층에게 풍족한 의복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여름에는 제대로 틀어놓지 않는 에어컨 때문에 낮 시간을 허비한다. 겨울에는 추위에 떨면서 일을 하는데, 개인용 난방 기구를 틀려고 하면 회사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단속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노동 시간이 길어지는 원인 중 일부가 된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은, 에너지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나는 당연히 전자의 편이지만 결코 후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이고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길이기 때문이다.
'에어컨 온도를 높이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되지', 이것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거의 같은 소리다. 지배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피지배계층을 포함한 국민 전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결코 아니다. 그 한산모시를 만들고, 빨래하고, 풀을 먹여 다리는 사람의 노동을 지워버릴 뿐 아니라, 그렇게 팔자 좋게 좋은 옷 입고 유유자적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 역시 도외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
만약 어떤 정치 세력이 '우리는 내년도 경제성장률 목표를 마이너스로 잡겠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에너지에 대해서만큼은 '지금보다 전기의 생산도 소비도 줄이자'는 말이 무슨 합리적인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 에너지의 생산·소비는 경제 그
자체의 성장 및 침체와 직결된 것인데 말이다.
이번 탈핵 탈원전 논의를 계기로 한국의 진보 진영이 집단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전근대로의 퇴행적 경향성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한 인상이다.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 에너지의 생산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 안에 원전이 있다면, 그 원전의 위험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최대한 효율적이면서 평등하게 배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무턱대고 일단 원전은 악이니까 추방하고 보자는 식의 정념을 바탕으로 한 탈핵 논의는 우리를 경제성장도 안 되고 행복하지도 않은 전근대국가의 길로 주저앉힐 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고,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치도 않는다.
우리에게는 한산모시가 아니라 26도, 혹은 25도로 맞춰진 에어컨이 필요하다. 의사결정권자들이 한산모시를 입고 다니면서 에어컨을 끄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터와 집에서 적절한 환경을 제공받는 그런 나라를 원한다. 이번 여름의 탈핵 논의를 계기로, 진보 진영 내의 퇴행적 전근대 경향성이 더욱 가시화되고 비판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