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2

고래와 영웅 - 도덕적 에너지 실천에 대하여

1.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고 싶다.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어린이의 꿈이다. 그러나 현실은 팍팍하고, 일상은 지루하며 때로 고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영웅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세상과 맞장을 뜨는 사람들'에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어떤 정치적 당위가 없거나 아예 부도덕한 존재라 해도, 그가 '거대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기만 하다면, 사람들은 흥분하고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지강헌처럼 부당한 형사 정책에 희생된 이가 탈옥을 하면 국민들은 호응하고 그를 기린다. 하지만 신창원 같은 명백한 범죄자가 탈옥을 해도, 그저 탈옥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언론이 흥분하고 팬클럽이 생기며 그가 입었던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것이다.

약한 것과 옳은 것은 전혀 같은 가치가 아니지만 우리는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대중을 설득하고자 할 때에는, 설령 자신들이 실제로는 강자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약자라고 포장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와 같은 무모한 도전은 반드시 합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대신 사람들의 뇌리에 뚜렷이 박히는 어떤 '그림'이 나와주는 것이 관건이다. 마치 1975년,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포경선에 달려들던 그린피스처럼 말이다.


2.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태학 박사 과정을 밟던 대학원생 패트릭 무어(Patrick Moore)는 1971년, 냉전의 한복판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뜨거웠던 대학가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에서 벌어지기로 예정된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자 하는 한 환경운동 그룹에 참여한 것이다. 그들은 낡은 어선 한 척을 타고 수소폭탄 실험의 현장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본인들을 '인간 방패'로 제공하는 시위를 하기로 했다.

목표와 방법이 정해졌다. 그런데 그 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처음에는 '평화(Peace)'로 하자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누군가의 제안으로 그 앞에 '녹색(Green)'이 붙었다. '그린피스(Greenpeace)'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그린피스호는 그들이 막고자 했던 그 수소폭탄 실험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더 이상의 수소폭탄 실험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과연 그린피스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린피스 호에 탔던 12명의 환경운동가들은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반핵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그린피스의 활동은 1975년 전기를 맞이한다. "Save the Whales", 일본과 소련의 포경선에 맞서 고래들을 구하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린피스는 다시 바다로 나갔다. 포경선의 작살이 날아다니고 고래들이 물보라를 튀기는 가운데 그린피스의 젊은 활동가들이 그 어느 나라의 법도 적용되지 않는 공해상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린피스는 자신들의 활동을 영상에 담았고, 언론은 이런 '멋진 그림'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삽시간에 그린피스는 전 세계인이 아는 환경운동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이후 그들은 승승장구하며 다양한 환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패트릭 무어와 다른 이들의 입장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생물학자였던 패트릭 무어는 거대 조직으로 거듭난 그린피스가 염소(Chlorine)의 사용 자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염소는 그냥 염소일 뿐이다. 물론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용 화학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나트륨과 결합된 염소는 염화나트륨, 즉 소금이다.

특정한 원소 하나를 두고 '악마의 원소'라 이름붙이며 모든 종류의 일상용품으로부터 염소를 추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던 그린피스를, 훈련된 생태학자인 패트릭 무어는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린피스의 창립자 중 하나인 그는 그린피스를 탈퇴했다. 1986년의 일이었다.


3.

화학은 화학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제품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린피스는 자연에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인 원자번호 17번을 가진 그 원소를 '악'으로 보기 시작했다. 포경선과 싸우는 것은 이제 식상한 일이다. 미국 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지상 핵실험 따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린피스는 여전히 맞서 싸울 거대한 악을 필요로 했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염소를 '악마의 원소'라 이름붙이고 반대 운동을 벌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면, 방사능을 '죽음의 파장'이라는 식으로 낙인찍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방사능은 자연에 존재하는 특정한 파장들을 이르는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빛,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길면 적외선이고 짧으면 자외선이다. 그 자외선보다 짧은 파동에는 X선과 감마선이 있고, 알파파, 베타파, 감마파라는 입자선도 존재한다. 이러한 파장들을 모두 포괄하는 이름이 바로 그 무시무시한 방사선이다. 방사선은 일반적으로 방사성 물질이 더 안정한 물질로 붕괴될 때 발생하는 입자선 혹은 전자기파라고 정의된다.

그냥 그게 전부다. 염소가 염소인 것처럼, 방사선은 방사선이고, 방사능이란 특정 물질이 방사선을 내뿜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단어다. 염소를 '악'이라 부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면 방사능을 '악'으로 매도하는 것 역시 한심한 일이다.

인간은 19세기 말까지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방사선의 존재를 파악하고 방사능 물질을 추출하여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주기율표에 써있는 자연수의 형태로 똑 떨어지는 줄만 알았던 원자들이, 중성자의 갯수에 따라 다양한 동위원소를 갖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우라늄에는 중성자가 146개 있는 우라늄-238도 있지만 143개 있는 우라늄-235도 있으며 자연계에 0.7%가량 존재하는 중성자 143개짜리 우라늄을 많이 뭉치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핵분열의 속도가 빨라지며 심지어 임계치를 넘기면 폭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발견과 기술적 진전은 도덕과 무관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힘이 있고 그것을 꺼내 쓰는 방법을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만약 핵분열의 발견과 통제 기술의 발달이 2차 세계대전과 맞물리지 않았더라면 핵무기의 제작은 훨씬 뒤로 늦춰졌을 것이다. 원유를 정제해서 나오는 가솔린이 오래도록 연료와 연구용으로만 사용되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제서야 네이팜탄으로도 만들어지고 몰로토프 칵테일(일명 화염병)로도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류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보다 먼저 그것이 폭탄으로 사용되는 광경을 목격한 탓에, 원자력이라는 에너지 자체는 도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연 현상이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반핵 운동이 터져나온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린피스 역시 반핵운동 단체로 시작했고, 원자폭탄 뿐 아니라 원자력 발전까지 그 모든 원자력에 반대했다. 마치 십수년 후 '염소'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듯, 그린피스로 대표되는 기존의 환경 운동은 '방사능'이라는 자연 현상에 대한 반대 운동에서 출발한 셈이다.


4.

방사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린피스는 방사능에 반대했고, 염소에 반대했고, 지금은 또 무언가에 반대하고 있다. 그들이 자연 현상과 도덕적 판단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는 '거대 자본/원자력 마피아/미 제국주의/기타등등'으로 표상되는 어떤 거대한 권력과 조직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굉장히 어처구니 없는 소리가 버젓이 진보적 담론으로 유통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거대한 조직과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소수자들'로 포장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포지셔닝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은 방사능이 뭔지 몰라도, GMO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도, 심지어는 염소가 무엇인지 몰라도 그린피스의 편을 든다. 한국수력원자력과 몬산토와 카길과 미 제국주의가 그 배후에 있다고 외치면 많은 이들의 판단은 그 지점에서 멈춰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 내제되어 있는 도덕심의 작동 원리를 그들이 잘 활용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소수자의 편에 서는 것, 그것은 권태롭고 피곤한 일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웅의 편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포경선과 맞서 싸우는 그린피스의 모습을 TV로 보고 후원금을 퍼부어주었던 서구 시민들 중 대부분은 그 전까지 일본이 고래고기를 먹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며, 심지어 적잖은 이들은 고래라는 동물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요나를 삼킨 동물'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은 그린피스의 활약을 보고 감동한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크고 무시무시한 작살을 단 배' 앞에 어줍잖은 낡아빠진 어선을 끌고 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 영웅들에게, 나의 후원금을 보낸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5.

2017년 10월 현재 대한민국에서 오가는 탈핵 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학적 사실 뿐 아니라 정책적 당위성의 측면에서도 탈핵 진영은 탈핵 반대 진영에 비해 논거가 빈약하다. 아니, 사실 논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체르노빌처럼 흑연을 감속재로 쓰는 고속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후쿠시마처럼 비상용 발전기를 침수될 수 있는 낮은 곳에 배치해놓은 원자력 발전소도 한국에는 없다. 우주에서 공룡을 멸종시킬만큼 거대한 운석이 날아와 강타하지 않는 한 한국의 원전은 깨질 뿐 폭발하지는 않는다. 우라늄이 폭발할 수 있을만큼 농축되어 있지 않으니까. 심지어 북힌의 장사정포가 날아와도 원자로의 방호벽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찬성하는 이들은 당당하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권력'이 그들의 편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말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탈핵 반대 진영은 본인들이 과학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린피스나 환경운동연합이 그러하듯이 스스로를 도덕적 당위의 담지자로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탈핵은 '운동'인 반면, 원자력 발전은 '정책'이며 '기술'일 뿐이다. 탈핵에 찬성하는 것은, 고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그린피스를 후원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벅차오르는 기분을 안겨준다. 반면 원자력 발전은 구차한 현실론에 지나지 않는 무언가로 취급된다. 심지어 원자력 업계 종사자들도 종종, 그래 실은 그렇게 좋은 건 아니고 궁극적으로 보자면 없어져야겠지만 당장은 할 수 없죠,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현실의 무게를 아는, 일상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보이지 않는 영웅적 노력의 결과물인지 아는 나잇대의 사람들은 그러므로 원자력 발전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세상을 바꾸고 싶고, 저 거대한 권력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싶고, 전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젊은이들은, 일단 탈핵에 찬성한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원자력 발전소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피가 뜨거운 젊은이들에게 너무도 싱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탈핵에 반대하는 이들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벗어나, 원자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왜 도덕적이며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가격이 싸서, 짓다 만 발전소가 있으니까, 수십조원에 달하는 원전 시장을 빼앗기니까, 라는 식의 주장으로는 대통령 탄핵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청산주의적, 도덕주의적 열기를 이겨내기 어럽다.

원자력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차원을 넘어, 왜 사용해야 하며 왜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아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림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6.

이제서야 국내에서도 원자력 발전이 기후 변화 대응책으로서 필요하다는 주장이 공론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경제 규모와 교역량에 비해 놀라우리만치 세계적 트렌드에 뒤쳐진 나라다. 고맙게도 현 장권의 기습적인 탈핵 정책이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원자력 발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었고, 원자력 발전이야말로 탄소 배출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저발전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는 기후 변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21세기 인류가 처한 단 하나의 가장 큰 안보 위험 요소를 꼽는다면 그것은 기후 변화일 수밖에 없다. 가령 방글라데시의 경우 인구는 1.6억인데 그 중 4천만 명 이상이 해발 1미터 이하의 저지대에 살고 있다. 해수면이 1미터만 높아져도 대한민국 전체 인구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환경 난민이 된다는 뜻이다.

한국인들은 따로 도망갈 곳도 없으므로 최선을 다해 기후변화에 맞서고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최대한 많은 국토를 가꾸고, 가급적 나무를 심어서 토양의 유실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현 정권의 '신재생 발전' 드라이브로 인해 전국 방방곡곡에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아서 태양광 발전기를 짓고 있다. 그런 식으로 국토를 벌거숭이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원전은 없애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원자력 발전을 유지하고 에너지 믹스에서 원전의 비중을 확대하는 것은 단지 경제적이거나 합리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그만큼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임으로써, 한국에 비해 가난하고 기후 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나라의 빈민들이 그만큼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방글라데시처럼 인구는 많은데 기술력이 부족한 나라에 원전을 건설하고 운영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현재 방글라데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원전을 건설중이다).


7.

원자력 발전에 찬성하는 것이 과연 '영웅적'인 일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여기 원자력 발전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너무도 안전하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을 높이자'는 대중적인 운동을 할 여지가 없다는 것 말이다. 원자력 발전은 실로 너무도 안전하다. 얼마나 안전하냐면, 심지어 지붕에 설치하는 태양광 발전보다 안전하다.

WHO 조사에 따르면, 1조킬로와트시(kWhr)의 전력을 생산할 때마다 석탄은 세계 평균 10만 명, 천연가스는 4천명, 태양광(지붕 설치)는 440명, 수력(세계 평균)은 1400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런데 원자력은 인류 최악의 사고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까지 포함해도 세계 평균 고작 90명의 사망자를 냈을 뿐이다. 이보다 안전한 에너지원은 없다. 지붕에 설치하는 태양광 발전보다 원자력 발전이 더 안전한 것이다.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의 숫자가 그것을 입증한다.

안전한 원자력 발전을 계속 사용하는 것, 그 활용을 늘려나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영웅적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이 발생한다. 원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전의 사용은 결코 영웅적인 일이 아니다. 무릅써야 할 위험 따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전이 위험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 원전이 '폭발'하면 수백만의 이재민이 생길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영토 내에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원자력 발전소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낀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탈핵 반대 진영에서는 그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원전이 위험하지 않다고 홍보하는 쪽에 주력해왔다. 그런 계몽은 언제나 옳고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확률이 0.0000000000000000000001%여도 0은 아니니까 위험하다'고 우기는 사람들에게는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해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 과학적인 사실, 기술적인 설계, 그에 대해 쌓여있는 한국의 노하우를 놓고 볼 떄, 원전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2) 원자력 발전은 저렴하고 질 좋은 전기를 생산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으므로써, 기후 변화에 취약한 제3세계의 빈민들을 돕는 도덕적 에너지다.
3) 그러므로 아무리 사실에 입각한 안전성을 주장해도 수백조분의 1의 가능성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느끼는 그 엄청나게 희박한 가능성의 공포심을, 견뎌내시라. 그것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에 사는 한국인의 의무다. 그 조그마한 공포심 때문에 우리가 원전을 포기하면, 방글라데시의 빈민가가 물에 잠긴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잘 사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원전 공포심을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사실 1)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2)도 당연한 것이고 3)까지 나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적잖은 이들은 아직도 원전의 사고 위험을 두려워하고, '수십만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핵폐기물'에 대해 정말 큰 부담감을 느낀다. 경수로에서 사용된 핵연료라고 해봐야 물에 담가서 열을 식힌 후 포장해서 쌓아두면 그만일 뿐인데도 말이다.

사실을 전달하고 계몽하는 것은 늘 필요하다. 그 가치는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탈핵이란 원전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원전이 안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쁘기' 때문에 그들은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핵에 반대하는 이들 역시, 우리 인류에게 골고루 내재되어 있는 그러한 성향을 충족시킬만한 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원전이란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괴물과 싸우기 위한 우리의 최후의 보루라고. 굉장히 안전하고 튼튼하며, 핵폐기물 문제도 과장되었다 뿐이지 사실 합리적으로 처리가 가능하지만, 그래도 걱정된다면 그 걱정을 하시라고. 당신이 걱정하면서 '핵발전소'를 참아내는 그만큼, 가난한 나라의 환경 난민들은 웃음지을 수 있다고.


8.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어린 시절에만 그런 게 아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기여하고 싶어하고, 때로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도 하며, 설령 남을 돕지는 못하더라도 해를 끼치지는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

포경선을 향해 달려들던 그린피스의 활동가들이 자극한 것은 바로 그런 원초적인 참여의 본능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의 삶의 99.99%는 고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고래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 때, 뭔가 올바른 일에 동참하고 싶다는 인류 본원의 도덕심은 위안을 받았다.

그린피스는 그렇게 세계적인 조직이 되었고, 자신들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고자 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원자력에 수십년에 걸쳐 사악한 에너지이며 죽음의 방사능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이제는 그 낙인을 벗겨내고 현실을 올바로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전 지구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화석 연료의 사용량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셰일 가스 로또를 터뜨린 미국은 한번 포기해버린 원전 기술을 복원하는대신 되려 석탄을 캐서 활활 불태우겠다고, 파리 협정에서 탈퇴하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위무하기 위해 제3세계의 환경 난민에 대한 고민을 집어치우고, 태양광 발전기가 멈추는 밤이면 밤마다 석탄 화력 발전소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중이다.

원자력은 악이 아니다. 화력도 악하지 않다. 다만 현 시점에서, 보다 나은 에너지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를 촉진시키는 화력 발전의 규모를 늘려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태양광이나 풍력은 모두 간헐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대규모의 화력발전, 특히 가스발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태양과 바람의 나라는 사실 석탄과 가스로 돌아간다. 그것은, 도시에 거주하는 선진국 시민들에게는 흡족해보일 수도 있지만, 환경 난민이 될 위기에 처한 제3세계의 빈민들에게는 재앙과도 같다.

원자력은 안전하다. 그 안전성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이미 해두었다. 그래도 정 불안하다면,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니라 지구 어딘가에 사는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원자력이라는, 아직 인류에게 친숙하지 않은 에너지의 사용에서 비롯하는 불안과 막연한 공포심을 참고 견디는 것, 원자력이 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공부하는 것, 그리고 지난 수십년 동안 쌓여온 편견과 혐오의 시선을 벗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한국 같은 발전된 산업 국가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도덕적 에너지 실천이다.

2017-10-01

유시민, '미친놈 전략', 민주주의

지난주 목요일(9월 28일) 방영된 썰전을 보며 매우 당황했다. 북핵 문제에 대해 유시민 작가가 매우 이상한 논리를 아주 힘주어 강변하는 가운데, 박형준 교수가 그것을 제대로 반박하지 않고 지나간 모습 때문이다. 편집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청자에게 전달된 바 그렇다.

유시민의 논리를 요약해보자. 김정은은 '미친놈 전략'을 쓴다. 트럼프도 '미친놈 전략'을 쓴다. 그런데 수천 발이 넘는 핵탄두를 가진 미국의 대통령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북한의 지도자를 비난할 도덕적 근거는 희박하다. 둘 다 '미친놈'이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은 당위론적인 정답인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이 주장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도덕과 당위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과 당위를 구분하는 것은 국제 정치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미국 네가 뭘 잘한 게 있다고 북한한테만 핵을 포기하라는 거냐'는, 자주파의 기본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미친놈 전략'이라는 표현이 가져다주는 착시일지도 모르겠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모두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표현을 바꿔보자. 영화 <이유없는 반항>에 나온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절벽을 향해 차를 몰아가고, 브레이크를 먼저 밟는 쪽이 지는 싸움을 한다고 해보자는 말이다. 결국 똑같은 전략적 행위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미친놈 전략'은 '미친놈'을 '나쁜놈'으로 착각하게 할 우려가 있는 반면, '치킨게임'은 이기는 쪽이 대범한 것이고 지는 쪽이 '치킨(겁쟁이)'인 싸움이니 말이다.

아마 트럼프와 김정은 둘 다, 스스로 '미친놈 전략'을 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치킨게임'을 벌이는 중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미국의 행동도 바뀔 수 없다. 이것이 미국의 주장이다. 나를 포함해 문재인 정권의 대외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많은 이들도 이렇게 생각한다. 반면 유시민,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 그 외 여권을 옹호하는 이들은 북한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 미국이 제재를 가하면 전쟁의 위험이 높아진다고 경고한다. 뾰족한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미친놈 전략'을 쓰고 있다고 빈정거리며, 미국도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양비론을 곁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치킨게임'의 관점에서 지금의 현상을 바라본다면, 유시민 식의 주장이 통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위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정은 한 사람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동의하는 순간 핵 개발을 포기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은, 설령 트럼프가 김정은과 사랑에 빠져서 데니스 로드맨과 셋이 함께 셀카를 찍는다 해도, 핵탄두를 지닌 북한이 ICBM까지 가지고 있는 상태를 용납할 수가 없다. 북한은 독재국가인 반면 미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의 공식적인 시스템은 모두 김정은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김정은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거나 제거된다면 핵 개발도 멈출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미국은 궁극적으로 투표를 통해 대통령과 상 하원 의원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다. 물론 정치권의 판단과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정치인들이 원하건 원치 않건, 국민이 원하면 전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갖는 '괴물같은 호전성'인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성향을 지닌다. 그런데 전쟁을 해야 할 상황이 오고, 그 전쟁으로 인하여 국민 정서가 자극되기 시작하면, 멈출 수도 없다. 국민이 최종적인 의사 결정을 하는데, '국민 일반'의 판단은 정치권에 비해 훨씬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굉장히 재수없는 엘리트주의자 같은 말을 했는데,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냉전의 설계자이며 궁극적으로 소련을 붕괴시킨 대전략가 조지 케넌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조지 캐넌의 미국 외교 50년』의 한 페이지를 인용해보자.

자기 자신이 전쟁과 평화 중 어느 상황에 처했다고 보는지에 따라 하룻밤 새에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뒤바꾸는 이런 놀라운 능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묘한 특징입니다. 이를테면 엊그제만 해도 우리나라와 다른 강국 사이의 쟁점은 미국의 젊은이 한 명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우리의 대의는 신성하고, 대가는 고려할 가치도 없으며, 폭력에는 무조건 항복 말고는 어떤 한계도 없어야 합니다.

이제 저는 여기에 대한 답을 압니다. 민주주의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민주주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상대의 자극에 느릿느릿 대응합니다. 그런데 일단 자극을 받아서 칼을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면, 이제 자극했다는 사실 자체가 쟁점이 됩니다. 민주주의는 화가 나서 싸웁니다 --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됐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싸우는 거죠. 민주주의는 자신을 자극할 만큼 경솔하고 적대적인 강국을 징벌하기 위해 싸웁니다 -- 이 강국에게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런 전쟁은 끝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조지 F. 케넌, 유강은 옮김, 『조지 케넌의 미국 외교 50년』(서울: 가람기획, 2013), 180-181쪽. 강조는 인용자.

김정은은 하루아침에 전쟁을 시작할 수 있고 끝낼 수도 있다. 북한의 전쟁 시작과 끝은 모두 김정은 혹은 그에 준하는 수뇌부 몇 사람의 의사결정에 달렸다. 북한 주민 2천5백만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트럼프가 처한 상황은 정 반대다. 물론 미국 대통령은 의회나 대법원의 승인 없이 독자적인 결정만으로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코드를 가지고 있지만, 트럼프가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미국의 전쟁은 미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미국이 함부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훌륭한 안전핀이다.

문제는 그 안전핀이 뽑기 어렵게 고안된만큼, 한번 뽑으면 되돌리는 것도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조지 케넌이 말하는 '전쟁'은 1차 세계대전이다. 그가 볼 때 미국은 유럽의 전쟁에 그렇게 깊숙이 휘말릴 필요가 없었다. 미국 국민들의 생각도, 전쟁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다가 막상 미국인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미국의 국민들이 더 많은 피를 보고 싶어하게 되었다. 미국인이 흘린만큼 독일인의 피도 강처럼 흘러야 한다는 분노가 미국을 뒤덮었고, 전쟁은 끝날 때가지 끝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다시 유시민으로 돌아가보자. 유시민은 너무도 '상식'인 양, '이라크 전쟁은 석유 때문에 시작된 것이 정설'이라고 말했다. 엉터리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인 이유는 그게 아니다. 9/11 테러로 미국인들이 불타죽고 떨어져 죽고 건물 잔해에 깔려죽는 것을 보아버렸기 때문에, 뭐가 됐건 '나쁜 씹새끼들'을 처부숴야 했던 복수심이 핵심이다. 당시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던 미국 상하원 의원들, 가령 힐러리 클린턴 뉴욕 주 상원의원 같은 사람은, 내심으로는 그런 터무니없는 보복성 무력행동에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국민들이 다들 눈이 뒤집힌 상태였고, 정치권이 국민 여론을 따라간 것이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이다.

심지어 조지 W. 부시와 그의 측근들도 어느 시점에는 이라크에 WMD(대량살상무기)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했다. 그런데도 왜 전쟁을 했을까. 석유 때문에 전쟁을 했다, 이런 '진보의 상식'만을 달달 외우고 있는 사람들은 밥 우드워드가 쓴 『부시는 전쟁중』(Bush At War)과 『공격 시나리오』(Plan of Attack), 그리고 『현실 부정 국가』(State of Denial, 번역 미출간)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미 백악관 수뇌부도 빈 라덴에게 테러를 당하고 후세인을 두들겨 패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미국인 전반이 '빡이 돌아있는' 상태였고, 그들 스스로도 '빡이 돌아있는' 상태여서, 눈에 보이는 '개새끼'한테 손에 잡히는대로 폭탄을 집어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북한과 미국이 치킨게임을 한다. 누가 꿇어야 하나? 당연히 북한이 꿇어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김정은이라는 '미친놈' 하나만 생각을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설령 2020년에 오바마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 해도, 미국 국민 전부가 '미친놈'처럼 화를 내기 시작하면 전쟁을 할 수 있다. 조지 W. 부시 개인이나 럼즈펠트와 딕 체니가 전쟁광이어서가 아니라, 9/11을 당한 미국인 대부분이 'mad'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3억명의 미국인 전부가 '미친놈'이 되기 전에, 김정은이라는 한 사람의 '미친놈'이 치킨게임에서 져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이라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못할까? 일단 미국 정부는 북한인의 입국을 모두 막은 상태지만, 한국 여권 들고 미국으로 잠입한 북한 공작원이 무슨 짓을 하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김정은 정권의 목적은 결국 협상이라고? 김정은 정권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고, 그들 중 누군가는 김정은 정권을 몰락시키기 위해 미국을 자극하는 테러를 감행할 수도 있다. 이건 그냥 '시나리오'일 뿐이지만, 9/11도 터지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가능할 줄 누가 알았는가?

북한과 미국, 김정은과 트럼프가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김정은이 져야 한다. 왜냐하면 미국은 치킨게임에서 지느니 그냥 전쟁을 해버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어는 '미국'이다. 트럼프라는 개인의 성향이 아니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평범한 시민들'이 전쟁을 결심하면 이라크에 대량학살무기가 있건 없건 그딴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김정은이 제2의 오사마 빈 라덴 취급을 받기 시작하면 한국에 미국인이 얼마나 살건 미국남자니 영국남자니 하는 여행객들이 한국 음식 맛있어요 같은 유튜브 영상을 올리건 말건, 삼성전자 공장이 파괴되면 아이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건 말건, 미국은 전쟁을 할 것이다. 저기 잡아야 할 개새끼들이 있는데 아이폰 다음 세대 출시에 지장이 생길까봐 전쟁을 안 한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전쟁 분위기에 일단 휩쓸리고 나면, 팀 쿡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은 미군, 특히 일선에서 직접 전쟁을 수행하는 사병들을 만나보았다. 그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학교를 다니거나 졸업하고 대도시에 거주하는 리버럴한 고학력 미국인 말고, 소위 '플라이오버 스테이트' 출신의 십중팔구 트럼프 찍었을 저학력 저소득층 말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보다 전쟁 경험이 많은 나라도 흔치 않다. 우리에게는 전쟁이라는 것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미국은 계속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생각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김정은 정권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 '김정은도 미친놈, 트럼프도 미친놈, 에헤야 모르겠다 전쟁은 안된다' 같은 시골 서당 훈장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여권의 주요 지식인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너무도 우려스럽다. 국제 정치와 안보를 다루면서 '미친놈' 전략이니까 고집하는 놈이 '나쁜놈'이라는 식의 논변이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아닌 진지한 의견으로 여겨지며 TV를 통해 유포된다. 과연 우리에게는 과연 김정은이나 트럼프를 '미친놈'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긴 한 것인가?

2017-09-26

[북리뷰] 북핵 위기, 케인스를 공부할 시간

평화의 경제적 결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저 정명진 역 부글·1만5000원

그 영국 재무부 관료는 1차 세계대전의 뒷수습을 위한 파리평화회의가 자기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음을 직감했다. 전범국들이 끝도 없는 가난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가는 가운데, 전승국들은 원초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혀, 경제학자인 그가 볼 때 턱도 없는 배상을 요구하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한 미국마저도 그 복수의 굿판을 방관하고 있는 상황. 그는 공직을 내려놓고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명저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그렇게 태어난 책이다. 머리말에서 케인스는 스스로를 3인칭으로 두고 이 상황을 기술한다. "그는 평화조약의 조건을 적은 초안을 수정할 수 있는 희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아니 유럽의 경제적 문제에 대한 파리평화회의의 전반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근거들이 이 책의 여러 장을 통해 설명될 것이다."(9쪽)

케인스의 주장을 아주 간단히 요약해보자. 독일은 석탄과 철로 산업을 일으켜 해외 무역으로 돈을 버는 나라다. 그런데 승전국들은 독일에게 석탄을 현물로 내놓고 모든 식민지와 무역용 상선까지 포기하면서 동시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갚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능할 때마다 통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가설의 늪에 빠져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독일은 여러 해에 걸쳐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려 외환 보유를 확대할 수 있어야만 배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176쪽)

독일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므로 수출 산업의 부활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경우, 유일한 천연자원이라 할 수 있는 석탄을 판매하거나 현물로 제공하는 것 외에는 배상을 할 방도가 없다. 결국 승전국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합리적 수준의 배상을 위해 독일의 경제 부활을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독일 경제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계속 배상을 요구하는 모순된 입장을 취할 것인가.

케인스는 파리평화회의의 결과를 예상하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연합국은 독일을 경제적으로 으깨버리는 길을 택했고, 독일은 그 빚을 갚기 위해 무리하게 화폐 발행을 일삼다가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져버렸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 틈을 타 독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며 권력을 잡았고, 연합국을 비난하기 위해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자주 거론했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서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성찰하는 이들에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 법.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승전국들은 비로소 케인스의 처방을 받아들였다. 두 번이나 세계 대전을 벌인 독일을 향해 마셜 플랜을 펼침으로써 경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고 민주주의의 물질적 기반을 확고히 다졌던 것이다. 그렇게 부유하고 평화로운 민주국가로 거듭난 서독은 결국 동독과 다시 하나가 되었다.

독일은 히틀러의 집권 이전부터 민주주의 국가였다. 북한을 향한 경제적 지원이 북한 주민들에게 돌아갔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운 반면, 독일은 고도성장의 과실을 비교적 고르게 분배한 모범적인 복지국가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우리의 현실, 특히 북한을 향한 경제 봉쇄에 직접 대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읽고 공부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국제 정세와 경제적 현실을 아우르며 미래를 향한 청사진을 그려내면서 현실을 과감히 비판하는 지식인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2017.09.26ㅣ주간경향 1245호

2017-09-12

[북리뷰] 현대 문명에 흐르는 검은 피

황금의 샘 1, 2
다니엘 예긴 저·김태유 허은녕 역·라의눈 각권 2만4800원

1911년 여름, 윈스턴 처칠은 해군장관에 임명되었다. 영국은 하루가 다르게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키워가는 빌헬름 황제의 독일에 대응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처칠은 선택을 해야 했다. 해군 함정의 연료를 계속 석탄으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석유로 전환할 것인가?

"그 시절, 영국 군함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석유로의 전환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웨일즈산 석탄 대신,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페르시아산 석유에 의존해야 되기 때문이다. 처칠은 "해군 함정의 연료를 석유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풍랑이 심한 바다에 무기를 맡겨놓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연료를 석유로 바꾸면 함정의 속력을 높이고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전략적 이점이 크다는 점은 명확했다. 결국 처칠은 함정의 연료를 석유로 전환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진했다."(1권 17쪽)

처칠의 판단은 옳았다. 아니 그보다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초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자국 영토 내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는 나라였지만, 그런 위험을 먼저 무릅쓰고 우수한 해군 함정을 건설하여 영국 해군을 굴복시킨다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산산조각나버릴 테니 말이다. 더 효율적이고 막강한 에너지원이 발견되어버린 이상 영국 뿐 아니라 석유가 나오지 않는 모든 나라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처칠은 그의 회고록에 '지배력이란 모험을 무릅쓴 데 대한 상(賞, prize)이다'라고 썼다."(1권 17쪽)

석유 산업 및 국제 정치 경제의 권위자인 다니엘 예긴의 책 『황금의 샘』은 석유가 만들어낸 20세기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훑어내는 대작이다. "석유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20세기를 지배했고, 이 책은 바로 석유의 지배가 일어나게 된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1권, 18쪽)

『황금의 샘』의 원제인 The Prize는 바로 그런 중의적인 뜻을 담고 있다. 주로 자동차, 비행기, 선박의 연료로 사용되며,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석유화학제품의 원료이기도 하고, 투기의 대상이기도 하며, 수많은 국제 분쟁을 야기하고, 그 가격의 오르내림에 따라 전 세계의 경제가 울고 웃는 단 하나의 상품. 그리고 그것을 확보하는 나라만이 세계의 패권국이 될 수 있는 상급. 그것이 바로 석유이며, 따라서 석유의 역사는 곧 20세기 인류의 역사와도 같다.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존 D. 록펠러는 '수직 계열화'라는 경영의 일대 혁신을 이루어냈다. 석탄을 연료로 쓰는 해군력으로 패권국이 되었던 영국은 석유를 갖지 못해 1차 세계대전 이후 위축되고, 반대로 자국 내에서 석유를 펑펑 뽑아내는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편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유전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진주만을 폭격하고 전쟁을 벌여 예정된 패배의 늪으로 걸어들어갔던 것이다.

지난 7월, 중국은 동아프리카의 요충지인 지부티에 사상 최초의 해외 군사 기지를 가동했다. 석유 수송로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중동의 석유에 의존하는 한국과 일본 입장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중국이 계속 원유를 공급하는 한 북한 봉쇄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에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세상을 읽으려면 여전히 석유의 흐름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직 석유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2017.09.12ㅣ주간경향 1243호

2017-08-29

[북리뷰] 일본의 발전, 그 뿌리를 찾아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신상목 저·뿌리와이파리·1만5000원

'조선은 임진왜란때 망했어야 마땅한 나라다.' 조선의 패망과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 등을 논할 때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망할만한 나라'였다면, 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한 일본은 '성공할만한 나라'라고 불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회는 일본이 오랜 전란 끝에 통일되었던 그 시기, 즉 에도시대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공직을 박차고 나와 우동집 '기리야마 본진'을 차린 것으로 유명한 전직 외교관 신상목의 책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의 화두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기여한 '축적의 시간'이자 '가교의 시기'로서의 에도시대에 주목한다. 에도시대에 어떻게 근대화의 맹아가 태동하고 선행조건들이 충족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주제이다."(17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 정도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내막은 훨씬 복잡하고 의미심장하다. 도쿠가와 가문의 당시 본거지는 슨푸(시즈오카)였지만, 도요토미는 도쿠가와가 교통의 요지에 앉아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에도(도쿄)로 쫓아냈던 것이다.

오늘날의 도쿄를 보면 '에도로 쫓아냈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신들과 함께 자리잡았던 그 무렵, 에도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강 하구 습지에 불과했다. 에도 성이 있었지만 낡아빠진 상태였다. 우물을 파면 소금물이 나오는 그런 척박한 땅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괴롭힘에 굴하는 대신 가신들과 철저히 단결하여 에도를 발전시켰다. 치수(治水) 사업을 통해 "1)인공의 물길을 뚫고, 2) 자연 물길의 흐름을 바꾸고, 3) 수면을 메워버리는 대토목공사"(36쪽)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렇게 척박한 에도를 교통과 상업의 허브이며 옥토로 바꾸는동안, 부질없는 전쟁에 몰두한 도요토미는 몰락하고, 버려졌던 땅 에도를 기반으로 삼아 발전시킨 도쿠가와 가문이 패자가 되었다. 에도시대는 계획도시 에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출현 과정을 조선왕조의 건국 이야기와 비교해보자. 이성계는 풍수지리에 능한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쩔 수 없이 자리잡은 터를 본인과 신하들의 힘으로 '개척'해내고 기반으로 삼았다. 건국 영웅담의 이면에 작동하는 사고의 체계부터 이미 확연히 다르다.

한층 더 대담한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이른바 '자생적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영조가 청계천 준설 공사를 벌인 것을 '조선판 뉴딜 정책'이라고 칭하곤 한다.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일본의 '자생적 근대화'는 에도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다시 말해 우리보다 약 170여년 빨랐다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에도 개척의 역사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의 가장 앞부분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낯설지만 우리의 한반도 중심 세계관을 뒤흔드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독자에 따라서는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막연한 거부감과 우월감만 앞세우던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합병당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면, 우리가 잊지 말고 배워야 할 역사는 '우리'의 역사만이 아닐 것이다.

2017.08.29ㅣ주간경향 12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