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_노정태의 시사哲] 미 의사당 공격과 ‘지정생존자’
일러스트= 안병현
미국의 연방 의회, 일명 ‘캐피털 힐’. 대통령이 신년 국정 연설 중이다. 대통령, 부통령, 상·하원 의원과
대법관까지 모두 한곳에 모였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이 전부 죽는다면 미국은 송두리째 마비되고 말 것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미국은 1947년
이래 ‘지정 생존자’를 두고 있다. 대통령 유고 시 승계 권한을 갖는 사람 중 적어도 한 명은 별도 장소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도록 규정을 만들어 둔 것이다. 지정 생존자는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하고 국가 기능을 회복해야 할 책임을 진다.
2016년
9월 처음 방영한 미국 드라마 <지정 생존자>는 바로 그 제도 위에서 상상을 펼쳐나간 작품이다.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 분)은 정치 경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도시계획 전문가이자 학자다. 대통령이 발탁하여 워싱턴 DC에 발을 들였지만 아무도 그를 진지한 정치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평범한 남자가 하루아침에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이다. 정체불명 집단이 저지른 폭탄 테러로 미 의사당이 무너졌고, 입법 행정 사법의
3부 요인이 거의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최악 상황에서 대통령이 된 커크먼은 테러 음모를 밝혀내고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때로는 현실이 예술을 모방하는 것일까. 2021년
1월 6일, 미 의사당이 공격당했다. 이번에는 실제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시위대가
범인이었다. 트럼프는 백악관 앞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포기도, 승복도 절대 없다” “힘을 보여줘야 한다” “의회로 가서
항의하라”고 연설했다.
그에 고무된 시위대는 의사당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상하원 합동 회의를 거쳐 선거인단의 투표
결과를 확정하는 대선의 마지막 절차를 힘으로 방해하려 든 것이다. 그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계단을 올라 창문을 깨고 건물로
난입해, 기물을 훔치고 파손하면서 셀카를 찍고 자신들의 행동을 인터넷에 생중계했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 네 명, 경찰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시각으로 1월 7일 새벽. 잠을 못 이루고 있던 나는 CNN을 통해 그 사건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는 충격 속에서 문득 <지정 생존자>를 떠올렸다. 워싱턴 DC의 엘리트들을 폭탄으로 한 방에 다 죽여버리고 시작하는 이야기. 엉겁결에 대통령이 된 평범한 남자가 잿더미 위에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이야기. 그것은 당시 미국에 들끓고 있던 포퓰리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
당선 후 포퓰리즘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독일 태생으로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 이론과 정치 사상사를 강의하는 얀 베르너 뮐러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에서 포퓰리즘을
“민주주의 최고의 이상을 실현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타락한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정의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정치인은 자신이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진짜 국민’과 ‘가짜 국민’을 나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만' 진정한 국민이라고 주장한다. 나머지는 ‘우리’를 위협하는 불순물, 침입자, ‘토착 왜구’다.
포퓰리스트는 그런 ‘비국민’을 적발하고, 징벌하고, 쫓아내 ‘순수한 국민’을 회복하는 숭고한 사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트럼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뮐러는 트럼프의 선거 유세 중 이 대목을 주목했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국민 통합이다. 기타 인간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유색인종, 이민자, 성 소수자, 여성, 장애인 등 소수 집단을 향해 쏟아낸 온갖 비하 발언은 그런 의미였다.
백인을 제외한 모두를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며 몰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가르는 나쁜 정치. 민주주의를 악용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타락한 민주주의, 포퓰리즘.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현 정권이 집권 후 보여주고 있는 거의 모든 행보가 포퓰리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는 자신만이 국민의 진정한 대변자라 주장하며 권력을 잡은 후에도 피해자 행세를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 역시 마찬가지다. 180석을
가진 후에도 야당을 탓하고, 언론을 탓한다. 엘리트 세력이 자기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국민의 적’으로 몰아간다. ‘검찰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시도한 검찰 장악이 대표 사례다.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서도 포퓰리즘 세력은 그렇게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망가뜨렸다.
세상은 착한 국민과 나쁜 엘리트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각자 이해관계를 가지고
상호작용한다. 그래서 포퓰리스트는 현실 문제, 특히 경제 문제 앞에서 무능하다. 가령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은 물가가
살인적으로 치솟자 병사들을 상점에 보내 상품에 낮은 가격표를 붙이게 했다. 인플레이션은 ‘부르주아 기생충’ 때문이니 대통령이
가격을 낮추면 물가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집값 폭등은 정권의 무능이 아니라 ‘투기 세력’ 때문이라는 문재인 정권과 너무도
닮은 모습 아닌가.
포퓰리즘은 때로 긍정적 역할을 한다. 엘리트 중심 사회가 간과하거나 억누르는 대중적 열망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트럼프 현상도 그랬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실물 경제는 박살이 났는데 월가에서는 성과급 잔치를 벌이며 ‘그들만의 호황’을 즐겼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속 시원한 개혁을 하지도 못한 채 임기 8년을 흘려보냈다. 돌이켜보면 트럼프가 선거운동을 하던 당시 <지정
생존자>가 폭발적 인기를 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드라마와 현실은 다른 법. 트럼프라는 폭탄은 미국
정치를 ‘리셋’하지 못했다. 오히려 무너진 건 공화당이었다. 대통령뿐 아니라 상하원을 모두 민주당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 선거
결과를 곱씹을 틈도 없이, 현직 대통령이 고무한 군중이 의회를 급습하는 초유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미국을 민주주의의
교과서가 아닌 반면교사로 볼 날이 올 줄이야.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타락한 민주주의인 포퓰리즘을 건강한 민주주의로
이겨내는, 그런 2021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2021-01-16
포퓰리스트의 공통점, 경제에 무능하다
2021-01-09
이낙연發 사면론, 국민통합 카드? 얕은 정치공학!
[노정태의 뷰파인더⑯] 링컨·만델라의 사면권 행사와 李·朴 사면론이 다른 이유
●군주제 잔재와 민주주의 훈장 사이
●잘 활용하면 사회통합 주춧돌
●파벌·정당 싸움 도구면 존재이유 상실
●지금이 美남북전쟁 직후와 견줄 때인가
●주머니 속 볼펜처럼 사용해서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가 1월 3일 비공개 최고위원회 간담회를 마친 뒤 국회 의원회관을 나서고 있다. 그는 이날도 전직 대통령 사면과 관련해 “진영 정치를 뛰어넘어서 국민통합을 이루는 정치로 발전해가야 한다”고 밝혔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
그 모든 정치적 셈법과 이해관계를 잠시 접어두고, 여기서는 사면권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사면권은 대통령이 지니는 고유한 권한이다. 동시에 논란의 여지가 없이 삼권분립 원칙을 훼손하는 권한이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사법부 판결을 뒤엎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면은 법이 아니라 사람을 지정해 내리는 특별사면이다. 같은 죄를 지었지만 다른 처벌을 받는 경우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무는 행위다.
그럼에도 대부분 국가의 법체계 속에는 사면 제도가 있다.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는 여러 국가뿐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같은 민주주의 선진국에도 사면권이 존재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사실상 사문화돼 있는 반면 다른 나라, 특히 미국의 경우 사면권의 행사가 비교적 잦다. 그로 인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대체 이런 제도가 왜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걸까.
문제는 영국에서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며 입헌군주제가 시작됐다는 것이었다.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이후 왕의 권리는 지속적으로 줄었다.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으면 자유인, 즉 귀족을 재판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게 됐다.
국왕이라고 해서 자신의 권한을 앉아서 뺏기고만 있지는 않았다. 때는 1535년, 헨리 8세 시절. 국왕은 사면권을 요구했다. 의회가 관여할 수 없는 국왕의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귀족 처지에서는 양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범죄자를 사면할 권리가 국왕에게 생긴다고 해서 귀족의 권리가 제약될 일은 없다고 본 것이다.
이후 헨리 8세의 큰 그림이 드러났다. 의회에는 누군가를 감옥에 보낼 권리는 없었지만 국왕이 임명한 관리나 공직자를 탄핵할 권리는 있었다. 귀족들은 국왕이 임명한 관리나 공직자를 탄핵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키워나갔다. 그런데 국왕의 사면권은 범죄뿐 아니라 탄핵에 대해서도 적용이 가능했다. 의회가 가진 아주 중요한 권리를 무력화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사면권인 셈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귀족들은 1628년 권리청원, 1689년 권리장전에서 사면권의 문제를 지적한다. 결국 1701년 왕위계승법에서 사면권에 대해서도 제약이 가해진다. 탄핵 중인 정부 인사에 대해서는 사면을 불가능하게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사면권은 폭넓게 인정하는 합의가 이뤄졌다.
이후 영국으로부터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했다. 미국인들은 영국과 달리 입헌군주제가 아닌 대통령제를 만들었다. 각 주가 기본적인 입법·사법·행정의 권리를 모두 갖되, 연방 단위의 대응이 필요한 사안에 있어서는 연방 정부와 의회 및 대법원이 권한을 행사하는 식이었다. 연방의 대통령은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군주의 지위를,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상징적으로 보유하게 됐다.
그리하여 미국의 대통령은 사면권을 갖는다. 미국 연방헌법 제2조 2항은 이렇다. “대통령은 탄핵의 경우를 제외하고 연방 법을 어기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형의 집행 정지 및 사면을 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여기서 ‘탄핵의 경우를 제외’한다는 저 구절이 왜 들어가 있는지, 이제 독자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그간 진행돼온 사면권에 대한 논의를 미국 헌법 제정 과정에서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법학계의 용어로는 계수(繼受)라고 부른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국가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세워진 대통령제 민주주의 국가다. 그 후로 세워진 다양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사실상 전 세계 모든 국가에 대통령 혹은 국가수반의 사면권이 법제화됐다. 군주제의 잔재, 혹은 흔적이 남게 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표적 흔적기관인 충수돌기에 대해 쓸모가 없고 있어 봐야 문제만 일으킨다고 여겼다. 소화에 직접적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간혹 염증을 일으켜 심한 복통을 불러일으키고, 때에 따라서는 사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최근의 의학적 연구에 따르면 충수돌기는 장내 미생물의 서식을 돕고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모든 흔적기관이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는 의미다.
사면권 역시 마찬가지다. 사면권은 군주제의 왕이 가졌던 ‘절대 권력의 흔적기관’이다. 그럼에도 근대 이후 이따금씩 그 나름의 긍정적 기능을 발휘했다. 특히 한 사회가 극도의 혼란과 갈등을 경험한 후 막 빠져나올 때, 국가 지도자는 기꺼이 사면권을 행사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할 수도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그의 뒤를 이은 앤드류 존슨의 사면권 행사는 좋은 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미국은 자국 역사상 최초로 군인을 징집했다. 당연히 그 수행 과정에서 오류와 잡음이 빈발했다. 미성년자가 군에 끌려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군역을 대신해 군대에 가는 이도 있었다. 탈영병을 붙잡아 조사해보면 그런 사례가 적지 않았다. 링컨은 틈날 때마다 그런 이들을 사면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도 기조는 계속됐다. 링컨은 전쟁을 통해 남부연합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지만, 전쟁이 끝나가자 견해를 바꿨다.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하나의 미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벌어진 일의 처벌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남북전쟁 종전 직후 5일 만에 포드 극장에서 존 윌크스 부스 일당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앤드류 존슨은 링컨의 유지를 계승했다. 186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존슨은 미합중국에 대항해 반군을 결성했던 이들에 대한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사면을 받은 사람 중에는 남부연합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도 포함돼 있었다.
6·25전쟁이 대한민국과 유엔의 승리로 끝난 후 김일성을 사면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면, 아찔하다. 미국인에게 이 결정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보자. 남북전쟁은 군인만 62만 명이 죽었고 민간인 사망자 및 피해자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온 참혹한 전쟁이었다. 승기를 잡자 북부에서는 온갖 과격한 보복과 복수의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링컨은 패자를 용서하는 쪽을 택했다. 그의 죽음 후에도 뜻은 이어졌다. 그리하여 미국은 지금도, 물론 내부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연방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전을 겪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딛고 일어선 그 남아공 말이다. 1994년 넬슨 만델라는 흑인 최초로 남아공의 대통령이 됐다. 그는 1995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를 설립해 1998년 7월까지 과거에 벌어졌던 인권 침해에 대해 조사했다. 조사 대상자는 7112명이었다. 그 중 849명이 사면을 받았다. 양심을 통해 진실을 고백한다면 사면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즉 만델라는 조사 대상자의 9분의 1 가량에게 일찌감치 공민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터준 셈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를 용서할 때 진정한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만델라의 뜻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3월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국무위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문 대통령 뒤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보인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
그럴 때 군주제의 흔적기관인 사면권은 긍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법적 시시비비와 판결의 정당성을 떠나 화해와 용서를 통해 새 장을 열어야 하는 역사의 전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어쨌건 공동체가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가장 많은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표자인 대통령이 그 결정권을 갖는 게 그나마 가장 합리적일 테니 말이다.
요컨대 사면권이란 가장 크고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가 필요한 순간을 위한 것이다. 특정 정당의 후보로서 당선된 정치인이 아닌 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첫 번째 시민으로서 대통령이 갖는 고유한 권한이라고 해석해야 마땅하다. 우리가 국민국가 체제를 이루고 사는 한 사면권이라는 절대왕정 시대의 유산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과연 지금의 사면 논의가 ‘가장 넓은 정치’에 부합하느냐다. 우리가 특정한 사안을 해결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두 전직 대통령이 유죄 판결을 받아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죄책 여부, 공과 과를 떠나 두 사람 모두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국민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직에 올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현재의 맥락이 가령 남북전쟁 직후의 미국이나 인종 분리 정책 철폐 이후의 남아공과 견줄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뉠 수 있다. 삼권분립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달성해야 할 국민 통합의 명분이 있는가. 꼭 그래야만 할 시대적·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는가. 이에 대해 국민 전반의 공론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게 현실 아닌가.
지금의 사면 논의가 ‘가장 좁은 정치’에 부합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면론이 나온 시점, 맥락, 의도하는 효과 등에서 얕은 정치공학의 함의가 너무도 뻔히 보이니 말이다.
철옹성 같던 ‘대통령 지지율 40%’가 깨졌다. 중도층의 민심 이반도 도드라지는 모양새다.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지난해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20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월 4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문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못하고 있다’라는 부정평가는 59.9%로 집계됐다. 문 대통령이 한 발 빼고 있었지만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추인해주었던 ‘윤석열 쫓아내기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살아난 윤석열은 여론조사에 따라 대선후보 선호도 1위와 2위를 오간다. 여당이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서울시장 자리 역시 지킬 수 있을지 미지수다. 현 정권의 주요 관계자라면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면을 받아 정치적으로 부활해 야당 표를 깎아주기를 기대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낙연 대표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해 사면 논의가 나왔을 수도 있지만, 물밑에서 어떤 ‘교감’이 있었다 한들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2021년 신년 특별사면 발표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뉴스1] |
필요하다면 링컨처럼 사면권을 과감하게 사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주머니 속 볼펜처럼 취급할 물건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지니고 있는, 가장 민주적이지 않으며 법치주의와 거리가 먼 제도가 바로 사면권이기 때문이다.
여권에서 정략의 도구로 사면권을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유감스럽다. 야당 시절, 입만 열면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판해왔던 그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면권은 대통령제 가 전제군주정을 어느 정도 모방해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이다. 제왕적 대통령을 상징하는 제도를 딱 하나만 대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사면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이 ‘탈정치 선언’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진위야 어찌됐건 대통령은 ‘탈정치’를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좁은 의미의 정치만을 해서도 안 되는 자리다. 행정수반이자 국가 원수로서 필요하다면 자신을 뽑아준 국민뿐 아니라 뽑지 않은 국민까지도 대표해 가장 넓고 큰 정치를 해야만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하는 것이 과연 그런 과업에 해당할까. 사면권은 대통령의 전속권한이다. 어떤 판단을 하건 최종적인 책임은 문 대통령 스스로 질 수밖에 없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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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4
조국에는 ‘조란다 원칙’, 구치소선 인권 참사
[노정태의 뷰파인더⑮] 박범계 첫 임무, 尹 향한 공세 아닌 방역
●세기의 피고인 에르네스토 미란다
●인권의 역사는 범죄자 인권 보호의 역사
●경멸할만한 자의 인권도 똑같이 보호
●現정권 고위층 권리만 보호하나
●秋, 尹 공격할 사이 교정시설 난장판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대규모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가운데, 지난해 12월 29일 한 수용자가 “살려주세요”라고 쓴 문구를 취재진에게 보여주고 있다. [뉴스1] |
그 유명한 ‘미란다 원칙’이다. 경찰이 범인을 체포할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야 하고,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 등을 알려줘야 한다.
‘미란다’는 누구일까. 때는 1963년 3월. 당시 21세이던 에르네스토 미란다(Ernesto Miranda)는 18세 소녀를 납치하고 강간한 혐의로 체포돼 있었다. 2시간여 심문을 거친 끝에 죄를 자백했다. 그는 “자백이 임의로 위협이나 면책의 약속 없이 내가 하는 진술이 나에게 불리하게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의 법적 권리들을 충분히 알고서 취해졌다”는 내용이 담긴 진술서에 서명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미란다의 태도가 달라졌다. 미국 연방수정헌법에 규정된 피의자의 권리를 제대로 고지 받지 못한 채 체포되고 심문받아 자백했으니 무효라고 주장했다. 사실이었다. 경찰은 미란다에게 연방수정헌법 제6조에 따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미란다는 변호인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진술서에 서명했다.
애리조나 주법원은 진술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했다. 절차상 하자가 있었지만 내용은 사실에 부합하며, 진술서에 적힌 내용을 보고 최종적으로 서명했으니 결국 동의한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렇게 내려진 단기 20년 장기 30년의 징역형을 애리조나 주 대법원도 확정지었다.
적잖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실 이야기다. 미란다는 결백한 양심수도, 존경받을만한 인권변호사나 법조인도 아니었다. 그 혐의가 명백한 강력범죄자였다. 하지만 오늘날 미란다 원칙은 인권 보호의 역사에 빛나는 한 이정표가 됐다. ‘나쁜 놈’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현대 문명의 상징이 됐다.
우리는 흔히 ‘인권 보호’라는 말을 들으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인권의 보호를 떠올린다. 착한 사람, 선량한 시민을 지키는 게 인권 보호라고 말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인권의 역사는 언제나 범죄자 인권 보호의 역사였다.
1215년, 영국 귀족들은 존 왕에게 흔히 ‘마그나 카르타’라고 부르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국왕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했고, 국왕이 귀족의 재산을 침해하거나 귀족을 처벌하려 할 때 여러 제약을 부과하는 게 골자였다. 귀족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받아야 할 상황이 왔을 때도 대비했다. 마그나 카르타 제39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자유민은 같은 신분의 사람들에 의한 적법한 판결이나 법의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아니하며, 재산과 법익을 박탈당하지 아니하고, 추방되지 아니하며, 또한 기타 방법으로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왕은 이에 뜻을 두지 아니하며, 이를 명하지도 아니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민’은 지체 높은 귀족이나 왕족만을 뜻하는 표현이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정당한’ 절차에 따라 스스로를 재판하겠다는 이야기다. 애초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리만을 지킬 생각이었다. 이에 왕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귀족뿐 아니라 중산층의 힘도 커졌다. 귀족들이 왕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법으로 요구할 수 있다면, 중산층과 평민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 아니겠는가.
1628년 의회는 찰스 1세에게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을 들이밀었다. 신체의 자유, 조세법률주의 등 중요한 인권 개념이 더욱 넓게 확장됐다. 이후 1689년 12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제정됐다. 영국은 사상 최초의 입헌군주제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중산층과 시민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정치적 바탕이 됐다. 영국은 이렇게 근대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늘어나면서 방역 및 교정당국이 서울동부구치소 직원과 수용자를 대상으로 4차 전수조사를 하기로 한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직원들이 대화하고 있다. [뉴스1] |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공통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왕권이 강화되고 신하, 귀족 등의 권리는 축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범죄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법과 제도 및 관습은 개혁의 걸림돌이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는 인권 타령은 잠시 접어두고 더 중요하고 숭고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온 나라가 힘을 모아야 한다.’ 박정희가 주창한 ‘한국식 민주주의’에 가까운 세계관이다.
실제 역사는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인권의 토대에는 영국의 귀족들이 왕을 협박해 서명하도록 만든 문서가 자리 잡고 있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당할 그날에 대비해, 왕이 자신들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온갖 법적 장치들을 넣었다.
그런 것들이 정교화 되고, 축적되며, 중산층과 일반 시민에게까지 확산된 과정이 인권의 역사다. 인권의 보호 범위는 계속 넓어졌다. 지체 높은 귀족, 존경할만한 중산층뿐 아니라, 미란다처럼 여성을 납치하고 강간한 강력범죄자까지 법에 의해 엄격한 보호를 받게 됐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란다의 범죄를 옹호하지 않았다.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체포, 수사, 재판받을 권리’라는 추상적 가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을 수호했다. 사회가 가장 경멸할만한 자의 인권마저도,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의 인권과 같은 기준에서 보호받아야 한다. 실로 당연해 보이지만 준수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현대 법치국가의 근본 원리다.
한국 역시 미흡하게나마 같은 방향으로 진보해왔다. 경찰이 피의자를 때리고 윽박지르며 수사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 게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묘사된 ‘가학수사’는 희화화된 측면이 있을지언정 과장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수위를 낮추었다고 봐야 한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경찰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사로 인해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사망했다. 그 후 경찰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피의자를 심문하지 못하게 됐다. 세상이 뒤집히면서 얻어낸 건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뿐만이 아니었다.
구치소와 교도소 재소자들의 인권 역시 점차 개선됐다. 신영복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잘 묘사돼 있다시피 한국의 수용 시설은 인격적 대우와는 무관한 곳이었다.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후에서야 재소자의 인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교도관이 재소자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 오늘날의 기준이 확립됐다.
대한민국은 분명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보수 정권과 진보 정권이 손바꿈을 하면서도 그와 같은 경향은 꾸준히 유지됐다. 하지만 최근의 몇몇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우려스럽다. 가장 취약한 계층과 계급, 비록 범죄를 저질렀지만 보호받아야 할 인간의 권리가 아닌, 오직 현 정권 고위층의 권리만을 보호하는 듯한 경향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31일 이용구 법무부 차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교정시설 코로나19 집단감염 현황 및 대책 브리핑’을 열고 “서울동부구치소 코로나19 확진자 집단감염 발생과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뉴스1] |
조국·정경심 부부의 재판 과정 또한 우리가 민주화 이후 경험해온 현실과는 사뭇 달랐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이른바 ‘잡범’들의 인권은 보호하되 ‘범털’들은 검찰 수사 및 언론 취재 등을 통해 그 치부를 밝혀 여론의 심판을 받게 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잡음이 터져 나오고 때로는 비극적 결말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민사회가 정치 권력을 통제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달랐다. 피의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지 않았고 비공개로 출석해 8시간에 걸친 조사를 받으면서 진술거부권을 행사했다. 진술거부권은 헌법으로 보장된 피의자의 권리지만 대부분의 경우 잘 사용하지 않는다. 형량이 높아질 수도 있고 구속영장 청구 사유로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2017년 3월 22일 오전 9시 7분, 조국이 쓴 트윗에서 잘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다. “피의자 박근혜, 첩첩히 쌓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모른다’와 ‘아니다’로 일관했다. 구속영장 청구할 수밖에 없다. 검찰, 정무적 판단하지 마라.”
피의자의 진술거부권은 정상적인 법치국가라면 보장되는 권리다.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란다 원칙’이 그러한 권리를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계층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과 달리, ‘조란다 원칙’은 그저 조국 본인 및 현 정권 관계자들의 인권만을 챙기는 얌체 짓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1966년으로 되돌아가보자. 미란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다시 재판정에 섰다. 저지른 범죄가 엄연히 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자백을 증거로 쓸 수는 없게 됐지만, 많은 범죄자가 그렇듯 그는 자신의 범행을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녔다. 미란다와 동거하던 여성이 증인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유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후 1972년 가석방된 미란다는 1976년 칼에 찔려 죽었다. 술집에서 카드놀이를 하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사태가 커졌다. 미란다를 살해한 혐의를 받은 용의자는 미란다 원칙을 내세워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은 그의 범행을 입증하지 못했고, 결국 그는 석방됐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형사 피의자, 수형시설 수감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죄를 눈감아준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정확하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 범죄를 수사하고 재판해 처벌해야 사회의 정의가 바로 선다.
드러날 범죄는 드러나고, 처벌받을 자는 처벌받게 돼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란다 원칙에 의해 풀려났다 해서 미란다의 범죄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새로운 증거를 통해 결국은 처벌받았으니 말이다.
경찰은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주취 폭행,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범죄 의혹 등의 사안에서 여당 및 집권 세력에 대한 봐주기 수사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앞서 검토했듯 피의자의 인권을 존중하며 수사하는 것과, 피의자의 범죄를 덮어주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미 현 정권에서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데, 더 이상의 퇴행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다.
인권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가장 약한 자들, 더 나아가 다른 이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의 인권 역시 우리의 인권과 동등한 잣대로 보호받아야 한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윤석열 총장에 대한 부질없는 정치적 공세를 삼가고, 동부구치소를 비롯한 수형 시설의 코로나19 방역 상황부터 먼저 챙겨야 한다. 진보가 정권을 잡았는데 사회 전체의 인권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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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헌재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변하는가?
어쩌다보니 2009년 10월에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을 찾았습니다. 당시 맥락은 이렇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미디어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는데, 합법적인 투표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습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그 법을 헌재에 제소했는데 헌재는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법학을 배웠던 사람으로서 의문을 품었습니다. 절차적 흠결이 명백함에도 왜 이런 법을 합헌이라고 결정하는가? 국회의원을 국민이 뽑았다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소위 '민주적 정당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헌재는 '헌법적 정당성'을 따져야 하는 기구 아닌가?
제가 여기서 제시한 논제는 이후, 2020년 말 '검찰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검찰농단 검찰장악 시도를 했던 문재인 정권에 의해 반복됩니다. 문재인 정권 및 그 지지자들은 '민주적 통제'라는 말로 자신들의 법치주의 파괴를 정당화합니다만, 과연 그게 '민주적'이냐, 이 질문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쓴 글을 찾아서 공개하는 것은 언제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연찮게 발견한 것을 혼자 보고 묵히기 아까워 이곳에 올립니다.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헌재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변하는가?
노정태/칼럼니스트 | 승인 2009.10.31 12:07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45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비록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국민의 뜻’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을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누군가 혹은 어떤 기관이 대표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적절한 민주주의 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완전히 다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개별적인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뜻에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승인을 받은 헌법 기관이지만, 국회의원은 기껏해야 지역구 주민 수십만의 주권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은 이정희 의원보다 곱절로, 아니 따따블로 ‘대표성’을 지니는 인물이 되어버리고, 따라서 그의 말은 더 많은 국민의 의지를 담아낼 것이며, 정당하다. 이런 결론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국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의회는 단일한 의사를 표현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즉 본래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분열성으로 인해, 한 사람이므로 단일한 대통령보다 ‘국민의 뜻’을 덜 반영하게 된다. ‘대표성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그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당연히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에 필요한 모든 정당성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내 맘대로 산다, 그것이 나다’라는 식의 단순한 주장만을 반복하며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듯, 민주주의 또한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 통치한다’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일반 의지’에 따라 선출된 헌법의 수호자였다.
흔히들 사람들은 사법부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칭하곤 한다. 대통령도 선거로 뽑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지만, 판사는 임명되고 승진하는 별개의 직급 구조를 가진 집단이다. 반면 의회는 전통적으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간주되어왔다. 헌법재판소가 의회의 결정을 함부로 뒤엎는 것은 당장은 속 시원한 일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옳지 않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법에 대해 절차는 위법하지만 무효로 선언할 수 없다고 판시한 헌법재판소는 바로 그런 입장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고전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의회가 국민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영국의 의회주의가 갓 시작할 무렵, 그리고 아메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무렵을 지배했던 헌법관이었다. 당시에는 행정권을 ‘왕’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왕이 뽑은 상원은 귀족들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결국 국민의 의사를 대변할만한 집단은 하원 뿐이었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현대 사회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인용해보자.
시민들은 자신들이 정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더 이상 헌법 이론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정부 내의 특별한 대행 기관인 하원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이제 정부 전반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염두에 두지, 그 한 부분에 대한 권리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강조는 인용자. 189쪽, 『절반의 인민주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던 국민들은 그가 한나라당에 의해 탄핵당할 때 ‘아, 우리 국민들을 대변하는 헌법기관인 국회가 권력자인 대통령을 끌어내었구나, 나의 일반 의지가 실현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은 그와 정 반대였다. ‘내가 뽑은 대통령한테 네깐 놈들이 뭐하는 짓이냐’는 분노의 파도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러한 헌법적 인식이 타당하냐 그르냐를 떠나서, 국회나 대통령이 그들이 지닌 대표성만으로 모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미디어법과 관련한 사항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헌재가 인정한 바와 같이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은 대리투표를 했고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으며 입법 절차를 전혀 지키지 않았다. 특히 대리투표의 경우, 적어도 필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87년 민주화 이후 이렇게 명백한 대리투표 현장이 발각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므로 그들이 만든 법은 정당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국회 격투기를 더 봐야만 하게 생겼다. 문을 뜯어 부수고 야당 의원들을 패대기치는 것도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이니만큼, 절차적으로 타당하지 않더라도 무효화할 수 없는 입법 행위의 일부가 된다고 추인해버렸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는 누구인가? 어떤 헌법기관이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로 작동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도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인 헌법 수호 기관으로 활동해야 하며 그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나는 칼 슈미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헌법 수호 기관으로서의 헌재에 대한 신뢰가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2020-12-31
독서 목록(2020)
- 20200110 - 아툴 가완디, 곽미경 옮김, 『어떻게 일할 것인가』(경기도 파주: 웅진지식하우스, 2018),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114 - 라종일, 『세계의 발견』(서울: 경희대학교 출판국, 2009)
- 20200114 - 라종일, 『낙동강』(경기도 파주: 형설라이프, 2010)
- 20200117 - 매슈 워커, 이한음 옮김,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19),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118 -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서울: 미래사, 2019)
- 20200119 - 도야마 시게히코, 장은주 옮김, 『지적 생활 습관: 죽는 순간까지 지적으로 살고 싶다』(서울: 한빛비즈, 2017),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120 -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이영래 옮김, 『모두 거짓말을 한다』(서울: 더퀘스트, 2018),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121 - 제임스 클리어, 이한이 옮김, 『아주 작은 습관의 힘』(서울: 비즈니스북스, 2019),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124 - 카렐 차페크 글, 요재프 차페크 그림, 배경린 옮김, 조혜령 감수, 『정원가의 열두 달』(서울: 펜연필독약, 2019)
- 20200124 - 김웅, 『검사내전』(서울: 부키, 2018),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129 - 발타자르 토마스, 이지영 옮김, 『비참할 땐 스피노자』(서울: 자음과모음, 2013),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201 -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김정훈 옮김, 『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서울: 자음과모음, 2013),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206 - 스티븐 프레스필드, 류가미 옮김, 『최고의 나를 꺼내라!』(서울: 북북서, 2008)
- 20200208 - 다니엘 핑크, 김주환 옮김, 『드라이브』(서울: 청림출판, 2011)
- 20200208 - 발타자르 토마스, 김부용 옮김, 『우울한 날엔 니체』(서울: 자음과모음, 2018),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209 - 롤프 도벨리, 장윤경 옮김, 『뉴스 다이어트』(서울: 갤리온, 2020)
- 20200209 - 다니엘 핑크, 이경남 옮김, 『WHEN 언제 할 것인가』(서울: 시공사, 2018),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211 - 피에르 크리스탱 글,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외 그림, 최정수 옮김, 『조지 오웰』(서울: 마농지, 2020)
- 20200223 - 윌리엄 골딩, 이덕형 옮김, 『파리대왕』(서울: 문예출판사, 1983)
- 20200223 - 알베르트 슈바이처, 권혁준 옮김, 『나의 어린 시절』(서울: 정원출판사, 2006)
- 20200224 - 마사 너스바움, 조계원 옮김, 『혐오와 수치심』(서울: 민음사, 2015)
- 20200225 - 존 로크, 공진성 옮김, 『관용에 관한 편지』(서울: 책세상), 전자책, 리디북스.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 68.
- 20200227 - 게오르그 카이저, 장영은 옮김, 『칼레의 시민들』(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0)
- 20200301 - 루 버니, 박영인 옮김, 『노벰버 로드』(경기도 안양: 네버모어, 2019)
- 20200302 - 김동조,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서울: 북돋움, 2012)
- 20200302 - 김동조,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경기도 파주: 김영사, 2015)
- 20200307 - 마이클 모부신, 이건, 박성진, 정채진 옮김, 『마이클 모부신 운과 실력의 성공 방정식』(서울: 에프엔미디어, 2019)
- 20200308 - 장강명, 『댓글부대』(서울: 은행나무, 2015)
- 20200312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편(개정판, 전2권):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1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6), 전자책, 리디북스.
- 20200315 - 엠제이 드마코, 신소영 옮김, 『부의 추월차선』(서울: 토트, 2013)
- 20200321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편(개정판, 전2권):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2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6), 전자책, 리디북스.
- 20200321 - Pavel Tsatsouline, Kettlebell Simple & Sinister: Revised and Updated Edition(StrongFirst, 2019), 2nd edition, Kindle.
- 20200327 - 김동조,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서울: 아웃사이트, 2020)
- 20200404 - 프랑코 모레티, 이재연 옮김, 『그래프, 지도, 나무: 문학사를 위한 추상적 모델』(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20)
- 20200411 - 이소룡, 홍석윤 옮김, 『물이 되어라, 친구여 - 이소룡 어록』(서울: 필로소픽, 2018)
- 20200419 - 아서 코넌 도일, 이경아 옮김, 『주홍색 연구』(경기도 파주: 엘릭시르, 2016)
- 20200424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편: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1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4), 전자책, 리디북스.
- 20200429 - 버튼 루셰, 박완배 옮김, 『의학탐정』(서울: 실사구시-실학단, 1998)
- 20200430 - 리사 샌더스, 장성준 옮김, 『위대한, 그러나 위험한 진단』(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10)
- 20200430 - 히포크라테스, 여인석·이기백 옮김, 『히포크라테스 선집』(경기도 파주: 나남, 2011)
- 20200503 - 팀 마샬, 김미선 옮김, 『지리의 힘』(서울: 사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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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8 - 마이클 코넬리, 한정아 옮김, 『배심원단』(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20)
- 20200510 - 다니엘 디포, 정명진 옮김,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서울: 부글북스, 2020)
- 20200518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편: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2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4), 전자책, 리디북스.
- 20200520 - Jerry Saltz, How to Be an Artist(New York, Riverhead Books, 2020)
- 20200524 - 애머런스 보서크, 노승영 옮김,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언가에 관한, 책』(서울: 마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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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30 - 앨런 무어 글, 데이비드 로이드 그림, 임태현 옮김, 『브이 포 벤데타 30주년 디럭스 에디션』(서울: 시공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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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5 - 로버트 그린, 이수경 옮김, 『마스터리의 법칙』(경기도 파주: 살림, 2013), 전자책, 리디셀렉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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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1 - 미치코 가쿠타니, 김영선 옮김, 정희진 해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경기도 파주: 돌베게, 2019)
- 20200630 - 제프리 슈워츠·레베카 글래딩, 이상원 옮김, 김학진 감수, 『뇌는 어떻게 당신을 속이는가』(경기도 고양: 갈매나무, 2012)
- 20200701 - 김성종, 『최후의 증인 上』(서울: 새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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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 마쓰모토 세이초, 김경남 옮김, 『아직 늦지 않았다 - 마쓰모토 세이초, 반생의 기록』(서울: 모비딕, 2019)
- 20200708 - 이재찬, 『영양만두를 먹는 가족』(서울: 네오픽션, 2020)
- 20200718 - 무라카미 하루키, 양억관 옮김, 『노르웨이의 숲』(서울: 민음사, 2013)
- 20200718 - 무라카미 하루키, 임홍빈 옮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서울: 문학사상, 2009)
- 20200718 - 무라카미 하루키, 양윤옥 옮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서울: 현대문학, 2016)
- 20200719 - 사이토 미나코, 나일등 옮김, 『문단 아이돌론』(서울: 한겨레출판, 2017)
- 20200719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편: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3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4), 전자책, 리디북스.
- 20200719 - 마쓰모토 세이초, 김경남 옮김, 『점과 선』(서울: 모비딕, 2012)
- 20200726 - 테오도어 W. 아도르노, 폴커 바이스 해제, 이경진 옮김, 『신극우주의의 양상』(서울: 문학과지성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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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2 - 프레더릭 포사이스, 강혜정 옮김, 『자칼의 날 2』(경기도 파주: 국일출판사, 2006)
- 20200809 - H. P. 러브크래프트, 정진영 옮김, 『러브크래프트 전집 1』(서울: 황금가지, 2009)
- 20200812 - 이언 매큐언, 한정아 옮김, 『속죄』(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03)
- 20200815 - 줄리언 반스, 송은주 옮김, 『시대의 소음』(경기도 파주: 다산북스, 2017)
- 20200816 - 김정훈·심나리·김항기, 우석훈 해제, 『386 세대유감』(경기도 파주: 웅진지식하우스, 2019),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816 -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서울: 민음사, 2015)
- 20200817 - 조국백서추진위원회, 『검찰개혁과 촛불시민』(서울: 오마이북, 2020)
- 20200818 - 김고명,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하고 싶습니다』(경기도 고양: 좋은습관연구소, 2020),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818 - 질 볼트 테일러, 장호연 옮김,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뇌과학자의 뇌가 멈춘 날』(경기도 파주: 윌북, 2019),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822 -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서울: 동아시아, 2019),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823 - 볼테르, 이효숙 옮김, 『미크로메가스』(서울: 바다출판사, 2011)
- 20200827 - 로드 던세이니, 정보라 옮김,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서울: 바다출판사, 2011)
- 20200830 - Victor M. Koga, 스포츠서적 편집실 엮음, 『자기 방어술』(서울: 일신서적, 2005)
- 20200830 - 버트런드 러셀, 서상복 옮김, 『러셀 서양철학사』(서울: 을유출판사, 2019), 전면개정판.
- 20200902 - 데이비드 A. 케슬러, 이순영 옮김, 『과식의 종말』(서울: 문예출판사, 2010),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0905 - James Sallis, Drive (Orlando, Florida: Harcourt, 2005)
- 20200917 - 오승은, 임홍빈 옮김, 『서유기 제1권』(서울: 문학과지성사, 2003)
- 20200926 - 대런 애쓰모글루·제임스 A. 로빈슨, 최완규 옮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서울: 시공사, 2012),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1011 - 마루야마 겐지, 김난주 옮김, 『소설가의 각오』(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1999)
- 20201016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60년대 편: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1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4), 전자책, 리디북스.
- 20201019 -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서울: 을유문화사, 2015),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1025 - 애거서 크리스티, 김남주 옮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서울: 황금가지, 2002),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
- 20201025 - 애거서 크리스티, 신영희 옮김, 『오리엔트 특급 살인』(서울: 황금가지, 2002),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
- 20201028 - 박성희 『아규멘테이션: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사회의 논쟁법』(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4)
- 20201029 - 애거서 크리스티, 권도희 옮김, 『비뚤어진 집』(서울: 황금가지, 2004),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8.
- 20201029 - 애거서 크리스티, 공보경 옮김, 『커튼』(서울: 황금가지, 2004),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4.
- 20201103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60년대 편: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2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4), 전자책, 리디북스.
- 20201107 - 스튜어트 네빌, 이훈 옮김, 『벨파스트의 망령들』(경기도 안양: 네버모어, 2020)
- 20201113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60년대 편: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3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4), 전자책, 리디북스.
- 20201114 - 센딜 멀레이너선·엘다 샤퍼, 이경식 옮김, 『결핍의 경제학』(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14)
- 20201126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70년대 편: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1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2), 전자책, 리디북스.
- 20201217 - 티모시 페리스, 박선령·정지현 옮김, 『타이탄의 도구들』 (서울: 토네이도, 2017), 전자책, 리디셀렉트.
- 20201223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70년대 편: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2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2), 전자책, 리디북스.
- 20201227 - 리처드 리브스, 김승진 옮김, 『20대 80의 사회』(서울: 민음사, 2019)
- 20201228 - 폴 바비악·로버트 D. 헤어, 이경식 옮김,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 20201228 - 헤너 코테·크리스티안 룬처, 박종대 옮김, 『직장 내 살인사건』(서울: 지식트리, 2012)
- 20201229 - 마크 에임스, 박광호 옮김,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서울: 후마니타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