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7

공항 만들어 메가시티 구축? 여당의 주술행위

 [노정태의 뷰파인더㉔] 차라리 지방거점 국립대에 28兆 퍼붓자

●文 “부·울·경, 동북아 8대 대도시권 도약”
●일본의 97개 공항이 과연 경제 살렸나
●반도체 등 항공 화물 수요도 수도권에
●일단 짓고 나면 수요 발생? 일종의 신앙
●보스턴 증명하듯 도시경쟁력 핵심은 대학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월 25일 부산신항 다목적부두에 있는 해양대 실습선 선상에서 열린 ‘동남권 메가시티 구축 전략 보고’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부산·울산·경남은 오늘 힘찬 비상을 위해 뜻을 모았습니다. 동남권의 역량을 결집하여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북아 8대 대도시권으로 도약하는 메가시티 구축전략을 수립했습니다. 2040년까지 인구 1000만 명, 경제 규모 490조 원의 초광역 도시권 구축이 목표입니다.”

2월 25일 부산신항 다목적 부두에 있는 해양대 실습선 선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발언이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과 사퇴로 인한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여당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 카드를 꺼내들었다. 문 대통령은 그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직접 부산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 산업과 경제의 절반 이상이 모여 있는 나라다. 수도권 집중을 막자는 대의에 원론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도에만 자원이 집중된 나라는 그만큼 큰 빈부격차와 자원 불균형을 피할 수 없고, 이는 대외 경쟁력 뿐 아니라 국내 정치의 안정성마저도 해치는 요인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쌍수 들고 환영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대통령이 저 시점에 저곳에서 저런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선거개입이라는 걸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옹호하기 위해 동남권 메가시티가 필요하다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이런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메가시티라는 게 무엇인가. 인구 800만의 광역권을 1000만으로 만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신공항 건설은 메가시티를 이루기 위해 필수불가결한가. 혹은 도움이 되는가. 공항이 아니라면 무엇을 통해 어떻게 자족적인 경제권으로 기능하는 메가시티를 이룰 수 있는가.

8459억 달러 vs 2965억 달러
2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안(대안)이 통과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메가시티에 대한 엄밀하고 통일된 개념 정의는 없지만 그 내용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유엔 경제사회국(United Nations 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이 2018년 발행한 ‘세계 도시화 전망’(World Urbanization Prospects) 보고서에 따르면, 메가시티(megacity)란 1000만 명 이상의 거주자를 지닌 광역 도시권을 뜻한다. 하나의 도시가 1000만 이상의 인구를 갖지 못하더라도 단일 생활권을 구성하는 여러 도시가 한데 어울려 있다면 메가시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실 서울과 수도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울시의 집계에 따르면 서울은 1988년 인구 1029만 명을 기록하며 ‘1000만 도시’가 되었지만, 2020년 말 현재 총인구 9911088명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서울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인구 1000만이 안 되므로 메가시티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서울’은 서울특별시 그 이상의 존재다. 인천, 부천, 과천, 성남, 의정부 등 인근 광역시를 모두 자신의 생활권으로 포괄하고 있다. 인천과 경기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인 ‘수도권’은 201912월 현재 그 외 모든 지역보다 인구가 많은 곳이 됐다. 앞으로도 그 추세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수도권은 대단한 글로벌 도시다. 소위 ‘국뽕’을 빨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2015년 1월 22일 브루킹스연구소에서 발표한 ‘글로벌 메트로 모니터’(Global Metro Monitor)에 따르면, 구매력평가 기준(PPP) 국내총생산(GDP)을 놓고 볼 때 2014년 한국의 수도권은 8459600만 달러(한화 약 9518980억 원)로 도쿄, 뉴욕, LA의 뒤를 이어 세계 4위에 올라 있었다. 인구로 따져도 2460만 명으로 세계 5위다. 한국인 뿐 아니라 세계인이 서울 수도권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동남권은 어떨까. 같은 자료를 검토해보자. 브루킹스연구소는 부산과 울산을 하나의 도시 단위로 놓고 통계를 제공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2014년 현재 부산-울산의 구매력평가 기준(PPP) GDP29651000만 달러(한화 약 3336627억 원)로 세계 36위, 인구는 7681200명으로 세계 49위에 머물고 있다. 경상남도 전체의 인구를 합하더라도 2021년 현재 800만 명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일단 짓고 본’ 日 공항들의 실태
그러니 우리는 “동남권의 역량을 결집하여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북아 8대 대도시권으로 도약하는 메가시티 구축전략”이 뭔지,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다. 경제력으로 세계 4위권인 메가시티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적어도 세계 10위권에는 올라야 한다. 획기적일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 전략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인구를 놓고 보면 더욱 갈 길이 멀다. 2040년까지 인구 1000만을 달성하려면 앞으로 19년 안에 200만 명의 순유입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가정에서 아이를 열심히 낳는 것과 별도로, 국내에서 이사를 오건 해외에서 이민을 오건 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또 정착해야 인구 1000만의 동남권 메가시티를 구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또한 대단히 획기적인 인구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실현 불가능한 목표에 가깝다.

경제와 인구의 성장을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밝은 미래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기대가 있을 때 삶의 터전을 옮기는 모험을 감행한다. 내 자식이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 때 좀 더 기꺼이 아이를 낳는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한국의 낮은 출산율은 대한민국이 지금은 풍요로워도 그 구성원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19년 만에 인구 200만 명 순증가, 즉 현재 800만인 인구가 25% 늘어난다는 것은 고도 성장기에나 있을법한 엄청난 사건이다. 동남권 메가시티 플랜이 제대로 작동하고 성공을 거둔다면 온 나라에 긍정적인 선례가 될 테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필자가 어떤 정답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조심스러운 제안을 해볼 수 있을 뿐인데, 그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논하기로 하자.

일단은 분명한 오답에 대해 말해야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알고 계실 것이다. 실은 문 대통령이나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혹은 성추행으로 사퇴한 오거돈 전 부산시장 역시 잘 알고 있다. 가덕도에 28조 원을 들여 신공항을 짓는 것은 동남권 메가시티를 이루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이다.

한국에서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여러 공항의 실패 사례를 또 거론하지는 말기로 하자. 그보다 더 극적이고 확실한 교훈을 주는 사례가 바다 건너 일본에 충분히 많으니 말이다. 일본에는 총 97개의 공항이 있고, 그 중 54개가 지방관리 공항이며, 그 중 상당수가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취지하에 ‘일단 짓고 본’ 공항이다. 그래서 일본 경제가 살아났던가.

‘카고 컬트’ 이어나가는 족장
2월 26일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안(대안)이 통과된 직후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부산시장 후보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여기서 변성완 후보, 박인영 후보, 이낙연 대표, 김태년 원내대표, 김영춘 후보(왼쪽부터)가 박수를 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가덕도 신공항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대략 이런 식이다. 세계적인 거점 항구인 부산항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부산항에 가까운 거점 공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남권의 주민들에게는 인천공항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해외로 나가고픈 숙원이 있었다는 말 역시 빠지지 않는다.

두 논리 모두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항공 운송은 선박에 비해 비용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산업 차원에서 움직이는 항공 화물은 그 종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항공 화물이 바로 반도체인데, 모두가 알다시피 삼성전자의 공장은 평택에 있고 SK하이닉스의 공장은 이천에 있다. 둘 다 경기도, 즉 수도권이며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공항이 있지만 화물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가덕도 신공항을 통해 해외로 곧장 나가고픈 간절한 소망은 이해한다. 허나 해외 노선이라는 게 이쪽에서 공항을 만들기만 한다고 당장 생기는 대상이 아니다. 항공사가 노선을 개설해야 한다. 외국 항공사들이 인구 2000만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교통이 원활한 수도권을 두고, 인구 800만에 구매력평가 GDP로 세계 36위인 동남권에 별도로 직항 루트를 개설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공항이 있어도 취항하는 노선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세계로 통하는 노선’을 뚫을 권리는 외국 항공사에게 있다. 180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민주당이 미국 항공사에 ‘가덕도에 취항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가덕도 신공항을 어떻게든 옹호하려는 이들은 공항을 만들면 수요가 생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창출된 수요가 동남권 메가시티 창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는 희망사항을 장밋빛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을 뉴스 댓글이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종종 보게 된다.

그런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머릿속에는 ‘카고 컬트’(Cargo Cult)라는 개념이 스쳐 지나간다. ‘화물 숭배’라 번역할 수 있다. 뉴기니와 인근 멜라네시아 각지에 사는 원주민들이 믿게 된 토착 신앙이다. 오지 중의 오지였던 그곳에도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인들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거점으로 삼은 섬에 배와 비행기로 필요한 물자를 투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현지인들 역시 그들이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던 온갖 문명의 풍요와 편리를 맛보았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 벌어졌다. 더 이상은 비행기가 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카고’가 오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자 현지인들은 비행기를 신의 사자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카고’를 신의 선물로 이해하는 자생적 신앙 체계를 만들어 나갔다.

카고 컬트는 점점 정교화되었다. 백인들이 비행장을 만들고 관제탑을 세워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것을 본 일부 현지인들은 나무와 수수깡 등으로 가짜 비행기, 활주로, 관제탑 등을 만들었다. 심지어 항공관제사의 손놀림을 흉내 내며 ‘카고’의 도래를 기원하는 주술 행위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다고 비행기가 다시 날아와 ‘카고’를 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알만한 지식인들이 희망사항과 현실을 뒤섞어가며 가덕도 신공항에 경제성이 있다는 둥, 일단 24시간 운항 가능한 국제공항이 생기면 부‧울‧경 메가시티가 탄생할 거라는 둥, 혹세무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마치 이제 전쟁이 끝났고 백인들이 와서 ‘카고’를 내려놓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카고 컬트를 이어나가는 족장이나 샤먼과 다를 바 없다.

보스턴과 실리콘밸리가 주는 교훈
부산을 비롯한 동남권의 현지 주민들이 가덕도 신공항에 찬성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땅이 오거돈 전 시장의 친인척 땅이건 말건, 실제로 공항이 지어진 후 해외 노선이 열리건 말건, 일단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지역 경제에 활기가 돌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주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해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해법이 있을까? 필자가 도시 정책 및 산업 정책 등의 전문가는 아니기에 타인의 식견을 빌려올 수밖에 없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를 펼쳐보자.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의 제조업은 쇠퇴했다. 그 과정에서 도시 간 명암이 갈렸다. 보스턴은 법률, 금융, 생체의학 연구 등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며 경제적으로 부활했다. 디트로이트는 지금껏 침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교육, 특히 연구 중심 거점 대학의 유무가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보스턴에는 하버드대를 비롯해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여럿 자리 잡고 있는 반면, 디트로이트는 그렇지 않다. 입학 순위가 높은 미시간대가 인근에 있긴 하나, 미시간대는 엄밀히 말해 디트로이트 시내가 아닌 미시간 주 앤아버에 있으며 별개의 생활권과 경제권을 구성한다. 디트로이트에는 ‘자동차 산업의 하버드’가 없었고, 그것이 두 도시의 명암을 갈랐다.

좀 더 확실한 사례로 스탠퍼드대와 실리콘밸리의 관계를 떠올려보자. 스탠퍼드대는 애플 본사까지 고작 2km, 구글 본사까지는 8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스탠퍼드대에서 쏟아진 고급 인재들은 자신들이 대학에 다니던 바로 그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생활을 꾸려나간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노동과 대학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다. 대학을 빼놓고는 도시의 경제와 미래를 논할 수 없는 셈이다.

동남권 뿐 아니라 서남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또 다른 메가시티가 가능하려면 미래 유망 산업과 연계된 대학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해법은 요즘 흔히 ‘지거국’이라 부르는 지방거점국립대에서 찾아야 한다. 대학 교육과 지역 경제 및 국가 산업 전략을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28兆, 지방거점 국립대에 퍼붓는다면
동남권 메가시티 문제는 단지 한 지역의 토목공사 차원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지역 균형 발전의 핵심은 각 지역마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이는 산업을 보유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산업은 대학 교육과 함께 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국립대 개편과 개혁에 대해서까지 논의해야만 한다. 지방마다 거점이 되는 국립대는 국가가 직접 통제할 수 있으며, 대체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기에 지역 주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시내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거국’(지방거점 국립대)이 살아야 각 지방이,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산다.

나는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에 대해 찬성한다. 어쩌면 김경수 경남지사나 문재인 대통령보다도 더, 진심으로 찬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28조원을 바다에 퍼붓는 것에 회의적일 뿐이다. 충분한 논의와 고민을 거쳐 그 돈을 각 지역의 거점이 되는 대학에 퍼붓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훨씬 나은 미래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남권 메가시티 논의가 보다 건설적인 해법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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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6

‘백신 진수성찬’이라며 정권이 내놓은 밥상은 텅 비어 있었다

[노정태의 시사哲]
[아무튼, 주말] ‘백신 상상놀이’ 빠진 文 정권에 피터 팬이 말했다 “놀고 있네”

/일러스트=안병현
 

마흔 살의 M&A 변호사 피터 배닝(로빈 윌리엄스 분). 사업이 한창 궤도에 오른 시점에 뜻밖의 일을 겪는다. 런던에서 아들과 딸이 납치당한 것이다. 고아였던 그를 거두어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준 웬디 할머니의 집 안 곳곳은 갈고리로 긁은 흔적이 가득하고, 벽에는 협박 편지가 칼로 꽂혀 있다. ‘피터 팬, 네 아이들을 찾고 싶다면 네버랜드로 와라.’

네버랜드에서 맞이한 첫 번째 저녁. 식탁 위에는 빈 그릇과 식기만 가득하다. 어리둥절한 피터에게 팅커벨이 규칙을 설명해준다. ‘상상해 봐, 그럼 진짜로 먹을 수 있어.’ 아이들은 피터가 없는 동안 리더가 된 루피오의 지시에 따라 기도를 하고 열심히 먹는 시늉을 하지만 여전히 그릇은 비어 있다. 피터의 상상은 달랐다. 크림을 한 숟가락 떠서 루피오의 얼굴에 날리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짠! 루피오는 크림을 뒤집어쓰고 갑자기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무에서 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음식을 가지고 ‘노는’ 상상을 통해 피터는 어린 시절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임스 매슈 배리의 소설 ‘피터 팬'을 원작으로 삼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1년 작 ‘후크'의 한 장면이다. 루피오에게 상상의 크림을 던질 때 피터는 더 이상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변호사 피터 배닝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피터 팬으로 돌아간 것이다.

네덜란드가 낳은 문화인류학의 대가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라는 현상에 주목했다. 놀이는 모든 문화의 근간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대표작 ‘호모 루덴스'를 펼쳐볼 때다.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내가 엄마 할게, 네가 아빠 해. 놀이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행위다. 스스로 역할과 규칙을 정한다. 또한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소꿉놀이가 끝나거나 놀이방을 나가면 나는 엄마가 아니고 너도 아빠가 아니다. 하지만 소꿉놀이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한없이 진지하게 엄마와 아빠가 되어 있다. 자유로운 규칙, 시공간의 한계, 진지한 몰입. 놀이를 만드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인류 문화의 근간에 깔려 있다는 놀라운 통찰이다.

놀이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다. 무언가를 흉내 내고 따라 하는 ‘모방유희’, 서로 견주고 다투는 ‘경쟁유희’가 그것이다. 모방유희는 종교, 예술, 창작의 원천이 된다. 경쟁유희는 전쟁, 스포츠, 법률, 심지어 철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토대에는 소피스트들의 말싸움과 언어유희가 깔려 있다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호모 루덴스'는 1938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은 21세기에 들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인터넷, 소셜미디어, 문화 산업의 발전 때문이다. 웹소설과 웹툰은 막대한 규모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의 영향력과 수입은 어지간한 연예인 부럽지 않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같은 대표적 K팝 그룹은 수출 기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미학자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에 따르면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피터 팬이 루피오의 얼굴에 크림을 던지면 텅 빈 테이블에 음식이 생기듯, 말 그대로 ‘상상력이 밥 먹여주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호모 루덴스의 놀이, 혹은 마법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매직 서클’ 내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치, 외교, 안보, 경제 등 다양한 분야는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의 영역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놀이와 상상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코로나 백신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다. 현재 국내에 들어온 화이자 백신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었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상대적으로 넉넉한 편이다. 그나마도 물량이 부족해 우리는 2월 25일까지 백신을 맞지 못하고 있었다. 졸지에 이란, 이집트, 터키, 브루나이, 베네수엘라, 우크라이나와 같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국민의 실망감이 차오르는 듯하자 갑자기 ‘K주사기’ 타령이 시작됐다. 국내에서 개발된 ‘최소 잔여형 주사기’를 이용하면 6인용 백신을 7명에게 주사할 수 있다는 “대박 사건”이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치약이 없어서 이빨을 못 닦는 집구석에 치약 짜주는 도구가 많다고 기뻐하는 꼴이었다. 옆 반 애들은 피자를 각자 두 조각씩 먹는데, 문재인 반장은 달랑 피자 한 판 사다놓고 잘 쪼개면 여섯 조각을 일곱 명이 먹을 수 있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2월 3일에는 백신 유통 모의 훈련을 한다며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시끌벅적한 행사를 하고 보도 자료를 뿌리는 촌극도 벌어졌다. 23일에는 백신접종센터 대테러 훈련도 있었다. 이미 세계 백여 국가에 백신이 유통되고 있다. 테러범도 그런 걸 목표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쇼 머스트 고 온(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이었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대통령이나 총리, 여왕 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앞장서서 백신을 맞았다. 비과학적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갔다. 대통령이 자기가 맞지도 않는 백신 접종을 ‘참관’하러 간 나라가 또 있을까. 결국 우리는 대통령이 ‘안티백서(Anti-Vaxxer, 백신 음모론자)’인 나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셈이다. ‘K방역’은 이렇게 끝났다.

문재인 정권은 백신 계약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원인을 정확히 밝히고 이해와 용서를 구해도 모자라다. 하지만 정부는 현실의 백신 부족을 상상력으로, 그것도 식상해진 ‘탁현민 쇼’로 때우고 있다. 국민은 피터 팬이 돌아오지 않은 네버랜드에서 억지로 맛있는 척 꾸역꾸역 먹는 시늉을 하던 어린이들 신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테이블에 백신이 넉넉하게 올라올 날은 과연 언제일까.

루피오는 ‘기도하고 밥을 먹는’ 상상을 아이들에게 강요했다. 재미가 없었고 밥그릇은 텅텅 비어 있었다. 피터가 루피오의 얼굴에 크림을 던지자 그제야 테이블은 진수성찬으로 가득 찼다. 정치는 현실이지만 때로는 ‘상상력의 예술’이 된다. 청와대의 ‘호모 루덴스’들을 향해 ‘놀고 있네’라며 통쾌하게 한 방 날려줄 피터 팬을 기다린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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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8

오용된 빌 게이츠, 오염된 원전 논쟁

 [노정태의 뷰파인더㉓] 누가 그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나

● 교과서로도 완벽한 책 ‘기후재앙’
● 목표 “세계 에너지산업 바꾸는 것”
● 그의 진심은 원자력발전소 혁신
● 국내 논의는 엉뚱한 방향 향해
● 탈원전 논의 수준에 그칠 책 아냐
● ‘탄소 제로’ 해법, 한국이 쥐고 있다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최근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원제: How to Avoid a Climate Disaster)을 펴냈다. [빌 게이츠 공식 페이스북]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이하 ‘기후재앙’)은 훌륭한 책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이며 명민한 두뇌를 가진 엔지니어가 오랜 기간 준비해서 낸 책으로 손색이 없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다양한 이슈를 공부하고 명확하게 정리해냈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 같은 제목의 대학 강의가 생긴다면 1학년 1학기 교과서로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빌 게이츠의 목표는 명료하다. 2050년까지 탄소 배출을 ‘제로(0)’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상 탄소 배출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발전된 기술과 비즈니스 및 행정을 통해 배출 탄소를 적극 제거함으로써 탄소 중립을 거의 달성한 상태를 그는 ‘제로’라고 부른다.

이 명료한 목표는 사실 대단히 무모한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이 책을 둘러싼 오해와 논쟁은 대부분 그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대한 전환 위한 ‘투 트랙 전략’
기후변화가 화제로 떠오르면서 국내에도 관련 서적이 다수 번역됐다. 국내 저자들의 책도 여럿 출간됐다. 모두 살펴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비를 줄여야 하고, 플라스틱 사용은 죄악에 가까우며, 육류 섭취는 완전히 끊거나 줄여야 마땅하고, 전기는 태양광과 풍력만이 올바르다는 그런 내용들이 담겨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물론 ‘기후재앙’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빌 게이츠가 사업에 전념하던 젊은 시절 미국 시애틀에서 가장 오래된 햄버거 프랜차이즈인 버거마스터에서 삼시세끼를 모두 해결했다거나, 그의 아버지도 버거마스터에 죽치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우편물을 버거마스터로 보낼 지경이 되었다거나, 그럼에도 이제는 환경을 위해 치즈버거를 그리 많이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162쪽)은 유쾌하고 진솔하다. 

하지만 그런 건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와 거의 무관하다.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빌 게이츠는 그보다 훨씬 크고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의 목표는 “세계 에너지 산업, 다시 말해 5조 달러 규모의 산업이자 현대 경제의 근간이 되는 산업을 바꾸는 것”(18쪽, 서문)이다. ‘제로’에 도달하기 위해 인류는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되는 산업, 에너지 산업을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 ‘기후재앙’의 주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거대한 전환은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투 트랙 전략이란 첫째로 제로 탄소 전기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데 ‘올인’하고, 둘째로 화석연료에 의존적인 지역을 포함해 자동차부터 열펌프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기화하는 전략이다.”(281쪽) 

순서를 바꿔 서술해보면 더 이해가 쉽다. 우선 세상의 모든 에너지 공급원을 전기로 바꾼다. 자동차도 전기로 몰고, 배도 (가능하다면) 전기로 운항하고, 비행기는 배터리가 너무 무겁기 때문에 불가능하므로 탄소 배출 제로인 항공유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냉방 뿐 아니라 난방 역시 화석연료를 태우는 보일러 대신 전기로 작동하는 히트펌프로 대체하며, 취사 같은 것도 전기로 바꾼다. 그리고 그 전기 자체를 탄소 제로로 생산하면 많은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 것이다.

산업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말
글로 적어놓고 보면 별것 아닌 계획 같지만 그 속에 담긴 경제적 함의는 실로 무지막지하다. 무슨 종류의 발전소를 세우고 송전탑을 짓네 마네 하는 차원을 가볍게 넘어선다. 자동차, 선박, 건축, 냉난방, 항공, 제조업, 농업 등 소규모 서비스업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산업 분야를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자동차와 운송 분야를 생각해보자. 테슬라를 필두로 한 전기차 메이커들의 공격으로 기존의 승용차 업계가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정부에서 지급하는 보조금을 빼고 나면 전기차는 여전히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충전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주행 거리가 짧으며, 배터리의 수명이 다하면 다량의 처치 곤란한 폐기물을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전기차를 충전하는 전기의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이 있다면 전기차 역시 ‘제로’를 향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량의 승객과 화물을 날라야 하는 버스, 트럭 등 대형 운송 차량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리튬 이온 배터리 전기차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배터리 자체의 무게로 인해 운송 효율이 턱없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비행기 역시 계속 탄화수소(석유)를 연소하는 엔진을 쓸 수밖에 없다. 전 세계 화물의 대다수를 운반하는 컨테이너선의 경우 벙커C유(油)를 연료로 사용한다. 벙커C유는 원유를 정제하고 나오는 잔여물인지라 그 가격이 턱없이 저렴하다. 어지간해서는 가격 경쟁이 되지 않는다. 시장에서 자동적으로 퇴출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빌 게이츠가 원자력에 우호적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 어떤 다른 청정에너지원도 원자력에너지와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더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가까운 미래에 저렴한 비용으로 전력망을 탈탄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123쪽) 

빌 게이츠는 체면치레삼아 ‘원자력 발전의 문제는 삼척동자도 안다’고 한 마디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의 진심은 이런 것이다. 

“원자력은 자동차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원자력은 그 어떤 화석연료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을 죽인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동차의 문제점을 개선한 것처럼 원자력발전소도 문제를 하나씩 분석한 다음, 혁신으로 해결하며 개선해야 한다.”(126쪽) 

일각에서는 빌 게이츠가 원자력발전소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대목이 전체 책의 분량상 얼마 되지 않는다며, 이 책을 탈원전 정책에 대한 반대 논거로 끌어들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빌 게이츠는 우리가 원자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내기를 원한다. 원자력을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더 개선하고 발전시켜가며 널리 사용하기를 바란다. 어느 정도냐면, 벙커C유를 퇴출시키기 위해 핵연료로 움직이는 컨테이너선의 활용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정도다. 중요한 대목이니 직접 읽어보자. 

“또한 핵연료로 움직이는 컨테이너선도 고려해야 한다. 핵연료 컨테이너선과 관련된 리스크는 현실적이다(예를 들어 배가 침몰한다고 해도 핵연료가 새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많은 기술적 난제들이 해결되었다. 이미 군용 잠수함과 항공모함은 핵연료로 움직이지 않는가?(211쪽)”

‘원자력 묻고 더블로 가자’
경북 울진에서 가동 중인 한울원자력발전소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원자력발전은 당연하고, 다소 철 지난 유행어를 빌리자면, ‘원자력 묻고 더블로 가자’는 것이 ‘기후재앙’의 주제다. 빌 게이츠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을 10% 줄이고, 2040년까지는 20% 줄이자는 식의 점진적 개혁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산업적, 경제적 구조를 통째로 들어 엎자는 것이다. 그 취지를 빌 게이츠는 결론 부분에서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정직하게 서술하고 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과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굉장히 다르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은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을 위한 중간 단계의 목표가 아니다. 직감적이지는 않지만 굉장히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잘못된 방식으로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감축하면 자칫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을 ‘못하게’(원문에도 강조가 돼 있음) 될 수 있기 때문이다.”(280쪽) 

아직 ‘기후재앙’을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저자의 취지가 잘 와 닿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방금 언급한 요점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이 책은 기후변화에 대한 책이지만, 기후변화‘만’을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이 아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에너지 체계와 그에 기반한 산업 구조를 만들자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빌 게이츠의 목표다. ‘기후재앙’은 바로 그 새로운 미래를 향한 청사진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국내의 논의는 실로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특히 진보 언론의 왜곡이 도드라진다. ‘경향신문’은 논설위원 칼럼에서 빌 게이츠가 만든 원자력발전소 연구 기업인 ‘테라파워’의 신형 원자로가 핵융합로라고 서술했다가 독자들의 비난을 받고 슬그머니 칼럼의 내용을 바꿨다. 

‘한겨레’ 역시 여러 차례 ‘기후재앙’을 비판했는데 그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2월 23일 공개된 ‘빌 게이츠, 친원전 진영의 구세주가 됐다고?’라는 기사를 보면, “에너지생산, 제조업, 농축산업, 교통, 냉난방 등 인류 전 영역의 변화와 재생에너지 투자·확대를 촉구했던 게이츠의 주장은 오로지 원전만이 유일한 구세주인 것 마냥 납작해졌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빌 게이츠는 세상의 모든 에너지를 전기로 통합하기를 원한다. 그 전기의 생산에서 원자력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더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원전만이 유일한 구세주인 것 마냥”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볼 때, 원전을 배제한 그 어떤 ‘친환경 정책’도 친환경이 아니라는 것 역시 명백하다. 

원자력발전과 에너지를 둘러싼 논의는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오염돼 있다. 그 현실이 ‘기후재앙’에 대한 해석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빌 게이츠가 볼 때 원자력의 사용은 너무도 당연해서 논쟁거리가 되지도 않는다. 그래야 마땅하다. 그가 원자력에 그렇게까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당연히 택해야 할 해법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통째로 바꾸는 이야기를 하는데 왜 빌 게이츠를 한국의 탈원전 논쟁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가. 빌 게이츠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는 건 과연 누구인가.

메추라기가 대붕(大鵬) 비웃듯
2017년 7월 31일 당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가운데)과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에서 2번째)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에서 탈원전 정책 긴급 당정협의가 열리고 있다. [동아DB]
‘장자’의 ‘소요유’편을 떠올려보자. 북쪽바다의 물고기가 변신한 거대한 새 대붕(大鵬)이 하늘을 난다. 그런데 메추라기가 대붕의 나는 모습을 보며 한 마디 한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저러느냐?” 구만리 창공을 나는 대붕을 보며, 기껏해야 몇 자 몇 치를 뛰듯이 날아다니는 메추라기가 비웃는 것이다. 

‘기후재앙’에 대한 국내 언론의 반응과 논란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빌 게이츠가 이 책에서 한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탈원전 논쟁과 무관하지 않다. 원전 사용을 늘리자는 것이니 굳이 분류하자면 탈원전 반대다. 

하지만 그 맥락에서 소비되고 말 논의가 절대 아니다. 인류가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생존과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구만리 상공을 나는 대붕의 눈이다. 

메추라기들의 짹짹거리는 소리는 잊고, 대붕의 눈높이에서 한국의 탈원전 논쟁을 바라보자. 현재 대한민국은 러시아, 중국과 함께 원전을 낮은 가격으로 양산해낼 수 있는 원천기술을 보유한 몇 안 되는 국가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 서방 세계의 동맹국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원전은 에너지 인프라이며 동시에 안보 자산이기 때문이다. 

2050년까지 ‘탄소 제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에 많은 원자력발전소가 필요하다. 원자력발전소를 저렴하게 빨리 짓는 것으로 정평이 난 우리의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가 진정 ‘역대급 위기’라면,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을 우리가 손에 쥐고 있다. 

현 정권이 탈원전 정책을 철회하고 적극적인 원전 세일즈 외교를 펼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빌 게이츠를 비롯해 기후변화 대책으로 원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환경주의자와 운동가들을 앞세워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에너지 산업 분야에서도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처럼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중요 플레이어를 배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역사상 두 번 오기 힘든 기회다. 

이는 경제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후 유엔과 국제사회의 도움 속에 성장하여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는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맞아 전 세계를 구원함으로써 그 은혜를 멋지게 갚을 수 있는 상황이다. 자체적인 원자력발전소 기술을 가진 중국은 논외로 해보자. 인도, 나이지리아 등 인구가 많고 경제가 성장하고 있지만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석탄화력 발전소를 늘릴 수밖에 없는 나라가 아직 지구상에는 많다. 선진국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대정전을 겪은 텍사스에 한국의 원전이 힘을 보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빠르고 안전한 원자력발전소가 빛을 안겨준다면, 우리는 돈을 벌면서 동시에 세계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문명 고민하는 호쾌한 시각
과학적으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삼중수소 논란’ 같은 것을 일으키는 탈원전 진영의 눈높이는 ‘장자’에 나오는 메추라기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위험하지 않은데도 위험하다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화들짝 놀라고 비명을 지르는 피해자의 위치에 스스로를 묶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기후재앙’은 그런 면에서 신선한 자극을 준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쇠고기를 덜 먹고 비닐봉지 대신 에코백을 들고 다니자는 ‘착한’ 운동을 넘어, 지구 전체를 바라보고 이해하며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빌 게이츠의 생각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호쾌한 시각만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우리도 이제 개인과 국가를 넘어 문명을 고민해볼 때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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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7

[朝鮮칼럼 The Column] 文 대통령은 철종인가, 고종인가

 대통령이 주변 세력에 휘둘리는 허수아비?
갈등 방치해 권력 지키고 지지자 결속 다지는 효과
필요에 따라 수동적 모습 적극적으로 연출하는 것

지난 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문재인 대통령./연합뉴스
박범계 법무장관은 신현수 민정수석과 문재인 대통령을 모두 ‘패싱’하고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발표했던 것일까.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면서도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는 않고 있다. 유영민 비서실장은 중대범죄수사청 설치에 대해 ‘문 대통령이 속도 조절 당부를 했다’고 국회 운영위에서 발언했다. 하지만 박 법무장관, 김경수 경남지사, 박주민 의원 등은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다’며 반발하는 상태다.

이런 식이다 보니 일각에서는 ‘문재인 허수아비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마치 안동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 없이 휘둘리다가 일찍 세상을 뜬 ‘강화 도령’ 철종처럼, 문 대통령을 자리에 앉혀놓고 조종하는 특정 세력이 막후에서 현 정국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비선 실세’의 통제하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의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청와대 내부 인사로부터 전해들은 어떤 ‘소스’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사례와 권력의 생리를 놓고 볼 때 ‘문재인 허수아비설’은 설득력이 크지 않다.

연합군과 소련군 양쪽의 압박을 받아 함락 직전이던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돌아가 보자. 이미 상당수의 부하들이 적에게 투항했다. 일부는 아예 명령을 듣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 틀어박혀 무의미한 항전을 이어나갔다. 왜일까?

히틀러는 베를린을 떠나거나 항복 의사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무적의 천재 전략가 히틀러 총통’이라는 대중의 환상이 깨진다. 그것은 권력의 붕괴를 뜻했다. 그러니 존재하지도 않는 군대를 지휘하며 전쟁놀이를 하다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되었을 때 자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나라가 망하건 말건 본인은 총통으로서 죽을 테니 말이다.

문 대통령의 모든 것을 히틀러와 비교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외우내환과 사분오열을 방치하거나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입지와 이익을 지키는 어두운 권력의 기술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종의 사례가 좀 더 잘 와닿을지 모르겠다. 고종은 대원군과 명성왕후 사이의 갈등을 철저히 활용했다. 동학을 믿는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그 청군을 통제할 수 없으니 일제를 불러들였고, 개화파의 힘이 커지자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갔다.

결국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나라는 쑥대밭이 되어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한일합방 이후 고종과 그 일가는 일제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공족(王公族)으로 분류됐다. 황족에 준하며 일본의 귀족인 화족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얼핏 보면 무능한 고종이 아버지와 아내와 신하들, 침략하는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끌려다닌 것 같지만, 최후의 승자는 고종이었다.

대통령이 주변 세력에 휘둘리고 있다고만 볼 수 있을까. 박범계 대 신현수, 유영민 대 김경수 등의 갈등 구도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충돌할 때 드러났던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실력이다. 이게 바로 문재인 대통령의 ‘실력’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윤건영 의원의 말마따나 현 정권의 힘은 이 와중에도 40%대를 유지하는 대통령 지지율에서 나온다. 지지의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문 대통령이 능력이 부족하고 서툴 수는 있어도 나쁜 의도를 가진 건 아니라는, 선한 의지에 대한 지지층의 믿음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문재인 허수아비설’은 현 정권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믿었던 부하들조차 말을 듣지 않는 외로운 대통령을 향해 지지자들은 오히려 동정표를 보내고 결속을 다지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 틀어박힌 채 고립무원의 지도자상을 연출하며 권력을 지켰던 것과 마찬가지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국토부가 반기를 들자 당장 부산을 방문해 “조속한 입법을 희망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라. 문 대통령은 ‘패싱’당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필요에 따라 수동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연출할 뿐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일 뿐 ‘팩트’는 아니다. 문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확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오늘도 ‘패싱’당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묻고 싶을 따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철종인가, 고종인가.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2021-02-22

터키에 에스프레소 머신이 퍼지게 된 이유는?


터키는 커피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국가 중 하나. 그들이 커피를 마시는 방법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아주 곱게 간 커피 가루를 제즈베라는 구리 주전자에 넣고 끓여서 마시는 것이다. 당연히 매우 쓰기 때문에 설탕을 팍팍 쳐서 먹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터키의 거리에 에스프레소 머신이 늘어났다. 낯선 문화가 갑자기 퍼진 것이다. 그 이유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난민들이 넘어왔기 때문.

시리아 사람들이 원래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셨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시리아의 커피 문화도 오래되었고, 터키와 비슷하다. 곱게 분쇄한 커피를 추출해서, 아니 차라리 달여서 많은 양의 설탕이나 프림과 함께 마셔왔다.

하지만 시리아 난민들은 좁은 공간에 모여 살고 자연스럽게 거리에서 시간을 보낸다. 몇 시간씩 커피를 달이고 있을 공간도 시간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중고로 구입해 거리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터키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은 중고로 미화 2500달러 정도인데, 감가상각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관계로 되팔때도 비슷한 값을 받을 수 있다. 식당 같은 큰 사업을 벌이기에는 부담스러운 이들이 작은 자영업으로 하기에 딱 적당한 아이템이 되었다. 그래서 터키의 도시 중 시리아 난민이 많은 곳에는 어김없이 에스프레소 머신이 즐비하다.

그 에스프레소는 우리가 아는 '에스프레소'와 다르다. 원두를 탬핑하지 않는다. 당연히 표준적인 에스프레소보다 맛이 연한데, 그 위에 인스턴트 커피 가루를 뿌려서 더 강한 맛을 낸다. 

그럼 처음부터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아무튼 시리아 난민들은 난민 생활이라는 환경 속에서 그런 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위에 막대한 양의 설탕과 프림을 뿌려 먹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아무리 봐도 맛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커피가 맛있고 맛없고 등등은 모두 문화와 취향에 따른 것이겠지.)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건 어떤 식으로건 살아가며, 자신의 문화를 지키려 한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교훈. 최근 몇 달 간 유튜브에서 본 영상 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기에, 공유한다. 11분 정도 되니 여유 있으신 분들은 한번 직접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