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뷰파인더㉖] 넷플릭스 ‘위기의 민주주의’ 아전인수 격 해석한 여권
● 윤석열 겨냥한 듯 보이는 조국의 소감문
● 골자는 ‘브라질 기득권의 룰라·지우마 탄압’
● 단순명료한 선악 구도에 할리우드도 열광
● 룰라·노동당에 편향적 작품이라 비판 소지
● 실제는 중도가 단일 대오로 군부 권력 뺏어
● 反美 브라질 상류층의 내로남불 서사
● 한국 586 세대와 같은 일종의 ‘역사왜곡’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이 3월 10일(현지시간) 최대 도시 상파울루의 금속노조 본부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이틀 전 부패 유죄 판결에 대한 대법원의 무효 결정을 얻어내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다. 그가 내년 대선에 출마해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과 맞붙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상파울루=AP 뉴시스] |
“일전 이 공간에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The Edge of Democracy)’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브라질에서 룰라 대통령이 어떻게 구속되는지, 후임자 지우마 대통령이 어떻게 탄핵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세르지우 모루 연방 판사(한국의 검사와 유사한 역할)의 “세차(洗車) 작전” 수사였다. 이 수사와 기소로 룰라-지우마 두 대통령이 이끌던 ‘노동당’(PT) 정부가 무너지고 난 후 극우파 정치인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집권을 한다.
그런데 모루는 보오소나루 대통령에 의하여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이후 모루는 보우소나루 대통령과의 불화로 사임하였고, 현재는 2022년 대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
곰곰히 생각하면 이상하다. 윤석열을 모루에 비유한다면, 그가 지휘한 수사와 공판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룰라 또는 지우마가 될 테니 말이다. 윤석열에게 ‘보은 인사’를 했지만 갈등을 빚은 문 대통령은 그렇다면 한국의 보우소나루라는 말인가?
잘못된 인용이 나온 게 조국 혼자만의 탓은 아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역시 ‘룰라는 우리 편, 모루는 저쪽 편’이라는 식의 관점으로 ‘위기의 민주주의’를 보고 페이스북에 감상문을 게재한 바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도 비슷한 관점으로 작품을 봤다. 지난해 12월 11일 김어준의 팟캐스트 ‘다스뵈이다’ 143회가 제공한 ‘연성 쿠데타’ 논리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을 모루에 빗대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요 도끼로 제 발등 찍는 꼴이다. 그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이제 좀 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대체 브라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위기의 민주주의’는 그 사건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여 전달하고 있을까. 우리가 진짜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The Edge of Democracy)’. [넷플릭스 홈페이지] |
브라질 정치의 구조상 부정부패는 늘 있어왔고 단번에 뿌리 뽑히지 않았다. 빈곤층과 유색인종으로 대표되는 브라질 민중을 위해 노동당 정부는 대대적인 복지 정책을 추구했다. 은행과 산업 자본가들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룰라는 워낙 인기가 많았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했지만 지우마는 공략 가능한 대상이었다. 고문을 이겨낸 민주 투사이며 경제학자였지만 정치적 스킨십이 부족했고, 입장이 다르면 주변인까지 적으로 돌릴 만큼 정치적으로 서툴렀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기득권은 지우마가 직접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몇몇 회계 처리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사소한 빌미를 잡아 탄핵했다. 브라질 국회의 과반수가 이런 저런 비리에 얽혀 있음에도 적반하장 격으로 탄핵이 벌어졌다.
이 단순 명료한 선악 구도는 미국을 통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뉴욕타임스’ ‘뉴요커’ ‘가디언’ 등 영향력 있는 매체와 할리우드의 스타 제작자, 감독, 배우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위기의 민주주의’는 2020년 오스카상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분야 후보로 노미네이트되는 영광을 누리기까지 했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필자도 ‘위기의 민주주의’를 봤다. 기본적으로 촬영이 잘 된 작품이다. 브라질 행정수도인 브라질리아는 현대 건축의 아이콘인 르 코르뷔지에의 아이디어에 기반해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모든 길이 곧고 길쭉하며 건물은 크고 시원시원하게 깔끔한 선으로 이뤄져 있다. 다큐멘터리는 그 전경을 다양한 각도에 담아 브라질 정치와 현대사를 훑어나간다. 눈 호강은 확실히 시켜준다.
하지만 내용은 놀라우리만치 부실하다. 너무도 일방적이고 편향적이다. 노동당 정권이 왜 몰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감독이자 제작자이며 내레이터인 페트라 코스타 자신부터 브라질 현대사의 모순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자기 성찰 대신 손쉽게 지목할 수 있는 적을 비난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그 모든 맥락을 놓고 보면 ‘위기의 민주주의’에 쏟아진 할리우드의 찬사마저도 문득 불편하게 느껴진다.
우선 브라질 정치를 살펴보자. 브라질은 민주국가였지만 1964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긴 암흑기를 겪었다. 1984년 거세진 민주화 요구에 군부가 한 발 물러났다. 1985년 민정이양 총선이 치러진 것이다. 하지만 군부는 대통령 직선제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기로 결정했다. 자신들의 남은 영향력을 발휘해 대통령 자리는 지킬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2020년 2월 3일 추미애 당시 법무장관이 경기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법무검찰개혁위원회와 상견례 겸 간담회를 하고 있다. 뒤로 조국 전 장관 등 역대 장관들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보인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
‘위기의 민주주의’가 룰라 및 노동당에 편향적인 작품이라고 비판받을 소지가 여기에 있다. 브라질 정치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오직 ‘위기의 민주주의’만 본 대다수 해외 시청자들은 브라질 민주화 운동을 룰라와 노동당, 공산주의 세력이 다 한 것처럼 오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공산주의와 거리를 둔 중도세력이 단일 대오를 형성해 군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온 것이다.
그런 맥락은 의도적으로 생략됐다. 페트라 코스타는 2002년 룰라가 대선에 당선되기까지 연거푸 고배를 마시는 모습을 방송 인터뷰로 보여준다. 룰라가 강경한 반(反)시장주의 태도를 보일 때는 졌지만, 시장의 힘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겼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그는 ‘시장’을 곧 ‘기득권’으로, 또한 ‘군부’와 거의 동일한 무엇인가처럼 다룬다. ‘자본주의=군부독재=언론=기득권’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유일한 민주화 운동가인 룰라가 민정이양 후에도 살아남은 군부 세력과의 선거에서, 시장과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에 밀려난 양상처럼 보인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룰라와 대선에서 맞붙은 것도, 그리고 룰라를 계속해서 이겨온 것도, 마찬가지로 ‘민주 정당’이었다. 하지만 ‘위기의 민주주의’에서 브라질의 중도 정치 세력은 룰라와 연정을 했다가 뒤통수를 친 배신자쯤으로만 묘사될 뿐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마치 한국의 ‘강남좌파’ 혹은 ‘586 세대’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1987년 민주화에 586 세대가 아무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크지 않았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로 대표되는 양김 세력이 건재했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중국 천안문 사태와 같은 비극을 피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다.
한국의 586 세대는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민주화를 이룬 것처럼 역사를 해석한다. 또 그런 세계관을 유포한다. 마찬가지로 ‘위기의 민주주의’를 만든 페트라 코스타 역시 룰라와 노동당을 중심에 놓고 일종의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코스타는 멜루의 탄핵에 대해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침묵을 ‘멜루 탄핵’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여보자. 그렇다면 ‘위기의 민주주의’는 브라질 민주주의가 멜루를 당선시키고 탄핵시킬 때까지만 해도 ‘정상’이었다가, 룰라를 비리 혐의로 수사하고 지우마를 탄핵하자 갑자기 ‘위기’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돼버린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소리다. 브라질 사람 중 특정 계층의 어처구니 없을 만큼 당당한 자기중심적 태도가 이 작품의 바닥에 깔려 있다.
‘위기의 민주주의’는 노동당 엘리트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브라질판 ‘강남좌파’의 자기중심적인 현대사 해석에 기반하고 있는 작품이다. 노동당으로 대표되는 브라질의 좌파, 그 중에서도 노동당 창당 이후 제도권 정치를 택한 좌파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이 아닌 나머지 모든 세력을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어떤 존재로 표상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립할 수 없는 서사다. 이는 한국 ‘강남좌파’들의 민주화 서사와도 일맥상통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 페트라 코스타는 한국의 강남좌파와는 차원이 다른 대단한 가문 배경과 재산을 갖고 있다. 토마 피케티의 용어를 빌자면 ‘브라만 좌파’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의 어머니는 중산층 집안 출신의 대졸자였다. 할아버지는 행정수도 (비록 건설 단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브라질리아의 기획자 후보로 거론될만한 거대 건축업자였다. 아버지는 미국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보고 감명 받아 미국 유학을 갔던 엘리트였다.
페트라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과거 필름 영상을 보며 그 가문의 계급적 지위를 느끼는 건 어렵지 않다. 평범한 브라질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리던 1980년대, 부부는 일상적으로 8mm 필름 카메라를 꺼내들고 다양한 영상을 찍고 있던 것이다.
페트라는 그 계급의 브라질 상류층이 대체로 그렇듯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런던정경대(LSE)에서 학위를 따고 뉴욕 맨해튼에서 영화에 빠져들었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는 국민 대다수가 빈곤층인 가운데 ‘글로벌 리버럴 엘리트’로 살아가는 제3세계 특권층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뉴욕에 사는 미국 리버럴의 시각으로 브라질을 바라보는 작품이다. 브라질 여성이 직접 출연해 포르투갈어로 내레이션을 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회계 부정과 조작은 더 큰 범죄를 알리는 신호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종이와 디지털 공문서에 적혀 있는 글과 숫자를 믿을 수 없다면 성립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페트라는 지우마에게 씌워진 연방 정부 회계 부정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부정부패란 늘 있어왔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통해 얼버무리고 있지만, ‘위기의 민주주의’가 모종의 ‘내로남불’ 서사라는 사실은 달라질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바라보고 수용하는 국내의 시청자들을 보면 우려는 더 커진다.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입시 부정 및 공문서 위조,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연루된 회계 부정 혐의에 애써 눈을 감는 이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한국의 중산층이나 서민보다 브라질의 ‘브라만 좌파’와 더욱 정서적으로 가깝다는 걸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생계 문제에서 자유로운,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더욱 ‘약자와 빈민을 위한 정치적 변혁’에 매진하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득은 알차게 챙기는 그런 부류에게 ‘위기의 민주주의’는 큰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하다.
좌파 포퓰리스트 룰라가 사라진 자리를 우파 포퓰리스트 보우소나루가 차지하면서 브라질 민주주의는 진정한 위기에 빠졌다. 룰라 정권 ‘인사이더’ 사이에서 내부 감시와 비판 기능이 마비된 탓이 크다. 바꿔 말하면 ‘내로남불’이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보지 말자고, 혹은 나쁜 영화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을 우리의 ‘민주주의 교과서’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영화의 내용 뿐 아니라 제작 과정 및 소비되는 방식 자체가 거대한 반면교사라고 봐야 한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