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0

나무 심는 영웅인줄 알았는데 뭉개버리네… 이것이 ‘국토 농단’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과
LH사태로 본 ‘공유지의 비극'

1913년, ‘나’는 프로방스 지방을 거쳐 알프스 산맥 속을 걷고 있었다. 라벤더만 듬성듬성 핀 삭막한 황무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수통에는 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 마을 흔적은 있었지만 인적을 찾기 어려웠다. 절망감이 커져갈 즈음 늙은 양치기를 만났다.

아내와 아들을 잃고 세상과 동떨어져 살던 고독한 양치기는 식사 후 테이블에 앉아 도토리를 쏟아놓고 고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 그는 좋은 도토리를 자루째 물에 푹 담갔다가 꺼내 들고 나갔다. 그러고는 지팡이로 땅에 구멍을 뚫고 도토리를 심기 시작했다. 그 늙은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는 홀로 황무지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부피에는 진심으로 그 일에 매진했다. 어린 가지와 잎사귀를 뜯어 먹어 나무가 자라는 데 방해가 되자 양을 팔아버리고 대신 벌을 치기 시작할 정도였다. ‘나’는 종종 그 산을 찾아갔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그 수십 년 동안 부피에는 꿋꿋하게 나무를 심었다. 숲이 자리를 잡자 말라붙었던 개울에 물이 흐르고 곤충과 동물이 찾아오면서 결국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거듭났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1953년 작 <나무를 심은 사람> 내용이다. 캐나다의 애니메이터 프레더릭 백이 1987년 동명 애니메이션으로 오스카상을 받으면서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가 세계 곳곳에서 나무를 심고 황량한 땅을 푸른 숲으로 되돌리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나무를 심은 사람>을 실화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렇지는 않다. 장 지오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치밀하게 잘 짜인 작품이다. 우리는 <나무를 심은 사람>을 통해 오늘날 정치학, 경제학, 사회철학 등의 필수 개념으로 자리 잡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이 1968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 제목이다. 숲, 어장, 혹은 깨끗한 공기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 무한하지는 않은 자원을 떠올려보자. 내가 먼저 물고기를 잡지 않으면 남이 잡는다. 어부들 사이에서 경쟁이 붙는다. 그런데 그 어장을 개인이나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다면 아무나 와서 물고기를 잡을 것이다. 결국 수많은 이가 경쟁적으로 자원을 채취하여 공유지는 망가지고 만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과정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황무지 주민들은 숯을 구워 도시에 팔았다.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경쟁적으로 나무를 베었다. 화자인 ‘나’는 숲의 파괴에 대해 부피에와 대화를 나눈다. “난 그의 땅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주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아마도 공유지거나, 주인이 있는데 그냥 버려두고 있는 땅 같다고 했다.”

부피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땅을 되살리기 위해 인생을 바쳤다. 그 조용한 헌신은 보답을 받았다. 숲이 저절로 살아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자연에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33년 산에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했고, 1935년에는 정부 조사단이 숯 굽는 일을 금지했다. ‘나’는 감탄한다. “숲은 국회의원들에게조차도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천연자원을 보호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과 국가의 관리가 필요하다. 제도경제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한발 더 나아가, 시장 대 국가의 대립 구도를 넘어 공동체의 힘으로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해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시장뿐 아니라 공동체의 역량마저도 국가의 투명한 행정과 공정한 법 집행의 영향을 받는다. 공유지의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건 결국 국가 몫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속 프랑스 정부가 되살아난 숲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한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대한민국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3기 신도시 개발 정보를 입수한 LH 직원 및 고위 공직자들은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허겁지겁 매입했다. 더 많은 보상금을 타내기 위해 값비싼 묘목을 빽빽하게 심었다. 나무가 자라기는커녕 다 말라 죽어버릴 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뽑아버리기 위해 심는 나무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사건을 진정 해결하고 싶다면 검찰 개혁이니 검수완박이니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검찰에 수사권을 돌려주어야 한다.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시행령만 개정하면 당장이라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자체 조사를 운운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 여당은 공허한 특검 논의로 물타기를 시도한다.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정당한 소유권과 올바른 공권력이 필수적이지만, 그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윗물이 탁한데 아랫물이 맑을 수는 없는 법.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 후 사저를 짓기 위해 농지를 구입하면서 ‘영농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 땅에 농사를 짓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정 숙소가 필요하다면 비닐하우스에서 자든가 해야 한다. 교양과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불법이 아니어도 하지 않을 일을 대통령이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을 향해 ‘부동산 적폐 청산’을 외친다. 누가 누구를 적폐로 모는가. 누가 누구를 청산한단 말인가.

<나무를 심은 사람>은 고독한 영웅의 조용한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국민들 역시 그런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선 이후 태양광과 풍력발전소를 늘리겠다며 산을 깎고 나무를 뽑아왔다. 농지 구입을 의아하게 여기는 국민들을 향해 ‘좀스럽다’고 쏘아붙였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뽑는 사람’인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일으킨 알프스의 화전민처럼, 신도시 개발 계획 정보를 입수한 LH 직원 및 정부 고위층은 경쟁적으로 게걸스럽게 땅을 집어삼켰다. 이것은 ‘국토 농단’이다. 알프스의 숲이 저절로 살아나지 않았듯 부패한 권력이 알아서 반성하는 일은 없다. 우리 스스로 정치판의 잡초들을 뽑아내고 건강한 도토리를 심어 나가야 한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3-14

文 대통령이 더 빨리 백신을 맞아야 하는 이유

 OECD 10개 경제대국 중 韓·日 국가수반만 백신 안 맞아 [노정태의 뷰파인더㉕]

● 접종 참관 대통령·‘모의접종’ 경남지사
19세기 말부터 백신은 늘 정치적
● 일제,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 접종 실패
● 조선인, 민심 동요 탓 위생업무 非협조
● 이승만 정권이 일제보다 두창 예방 잘 해낸 비결
● ‘강제 않는 설득’이 백신 접종 출발
● 접종 시기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나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왼쪽에서 두번째)이 2월 26일 서울 마포구 보건소를 방문, 재활시설 종사자인 김윤태 의사(푸르메 넥슨어린이 재활병원)가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접종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시사 상식 퀴즈. 다음 중 2021년 3월 14일 현재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사람은? ① 문재인 대통령 ② 김경수 경상남도지사 ③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④ 권영진 대구시장 ⑤ 없다. 

정답은 5번이다. 유명 정치인 중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1호 접종자가 화이자 백신을 맞을 때 옆에서 ‘참관’했다. 김경수 지사는 ‘모의 접종’에 참여했다. 백신을 실제로 맞은 게 아니라, 옷 위로 주사기를 놓고 주사 맞는 시늉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여권 고위층 그 누구도 백신을 직접 맞으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야권 정치인 및 지자체장들이 ‘나라도 백신 맞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겠다’고 손을 들고 나서기 시작했다. 안철수 대표가 2월 22일 “정부가 허락한다면 정치인으로서, 또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을 용의가 있다”고 나선 게 시초다. 국민의힘 소속 권영진 대구시장 역시 백신을 맞겠다고 자청했다. 권 시장의 접종은 3월 8일로 예정돼 있었다. 같은 날 박성수 송파구청장, 3월 10일에는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도 백신을 맞겠노라고 공언했다.

한반도 역사상 ‘1호 백신 접종자’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난 2월 26일. 서울 마포구 보건소에서 의료진이 접종에 사용할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준비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모두 질병관리청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3월 7일 저녁, ‘지자체장은 백신 우선접종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공문을 보낸 것이다. 표면적 이유는 백신 수급이 제한된 만큼 현장대응 업무를 수행하는 인력까지만 우선 접종 대상에 포함한다는 것이었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석연치 않은 게 사실이다. 야권 서울시장 후보나 야당 소속 지자체장이 대통령보다 먼저 백신을 맞는다면 대통령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을 우려하지 않았나 싶다. 

야당과 언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청와대와 여당은 전가의 보도를 꺼내들었다. ‘백신을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말로 정치적 발언이다. 처음 이 땅에 예방접종이라는 현대 의학이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백신은 단 한 번도 정치적이지 않은 적이 없다. 그 맥락을 온전히 파악해야 오늘날의 코로나 백신 정국을 이해할 수 있다. 

지석영은 1879년 두창(천연두) 대유행 당시 조카딸을 잃었다. 그는 고향 충주를 떠나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 소속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에게서 우두술을 익혔다. 그 뒤 우두의 원료 및 종두침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술을 배웠고 재료도 갖고 있으니 이제 접종을 해야 할 때. 하지만 주변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의 장인도 우두를 ‘일본인이 조선인을 죽이기 위해 만든 위험한 약’ 취급했다. 하지만 지석영은 장인을 설득했고 1897년 말 두 살 난 처남에게 우두를 접종해 성공을 거두었다. 한반도 역사상 ‘1호 백신 접종자’는 지석영의 처남이요, ‘1호 백신 접종 참관자’는 지석영의 장인이었던 셈이다. 

당시 지석영이 느꼈던 환희는 1931년 1월 25일자 ‘매일신보’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평생을 통해 볼 때 과거에 (급제)했을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왔을 때가 크나큰 기쁨이었는데 그때(처남의 팔뚝에 우두 자국이 완연히 나타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지석영은 고향에서 40여 명에게 추가로 우두 시술을 했다. 이후 한성으로 돌아와 1880년 3월부터 우두국을 개설하고 교육 및 접종 사업에 몰두했다.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그해 10월부터는 우두국을 종두장으로 확대 개편해 본격적인 우두 접종 사업을 펼쳤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터졌다. 개화파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구식 군인 뿐 아니라 ‘개화’에 위세가 눌렸던 온갖 세력이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무당도 있었다. 무당에게 우두 접종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적이기도 했다. 

우두 접종으로 천연두가 사라진다고 해보자. 혹은 완전히 박멸되지 않더라도 그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미신적인 공포가 사라지고 그저 ‘질병’의 하나로 취급하게 된다고 해보자. 이는 천연두를 ‘손님’이라 부르며 마마배송굿이나 손님굿 등을 통해 돈을 벌어왔던 무당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난리 통이었으니 범인이 정확히 누군지 특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무속인들에게 직접 불을 지르거나 대중을 부추길만한 동기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석영은 난리가 끝난 후 화재로 사라진 종두장을 복구했고 체계적인 교육 및 접종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일제의 강제 접종이 실패한 이유
여러 난관에도 지석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종두의들은 최선을 다해 결과를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일본은 1895년 반포된 종두규칙을 인정했고, 기존 조선 인력을 활용해 우두를 접종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한제국 역시 종두 접종을 강제하고 있었으나 행정 역량의 한계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반면 일제는 강제 접종을 실행에 옮겼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의 경험을 반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일제의 우두 정책은 효과적이었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랬다. 1913년 총독부는 “두창은 거의 절멸에 가까이 갔다”고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19년 이후 갑자기 두창 환자가 폭증했다. 1919년에는 2140명의 환자와 700명의 사망자가 나오더니, 1920년에는 1만1532명의 환자와 361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915~1917년까지 발생한 환자와 사망자가 각각 50명 이하, 10명 이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창궐’했다. 한번 되살아난 두창은 일제강점기가 끝나도록 잡히지 않았다. 1930년을 넘기며 두창 환자는 다시 1000명을 넘었고, 1942년에도 1600명의 환자가 발생했다고 기록돼 있다. 

박윤재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2012년 ‘의사학(醫史學)’에 발표한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이라는 논문에서 일제강점기 두창 예방접종 정책의 실패를 되짚는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위생 의식을 탓했다. 두창으로 집안 식구가 사망하면 시체를 나무 위에 걸어둔다거나, 심지어 시신을 집안에 오랫동안 두고 친척들이 모여 밥을 먹기도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참담한 의식 수준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남긴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두창 예방을 위해 개를 잡아먹거나, 개의 피를 문간에 흘려놓거나, 마마신을 속이기 위해 절구에 쓰는 방아를 시체인 양 꾸며 거꾸로 두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조선보다 일찍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에서는 20세기 들어 사실상 두창이 사라졌다. 그러니 일제는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실패를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그저 더 많은 강제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싹튼 민족의식이 종두법 보급을 가로막았다. 박윤재 교수는 논문에서 “3·1운동의 목표가 식민 지배에 대한 반대였던 만큼 조선인들도 경찰의 위생업무에 협조하지 않았다. 민심은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고 썼다. 

결국 식민지배가 끝나도록 일제는 조선에서 두창의 ‘집단면역’에 도달하지 못했다. 논문에 따르면 “1920년 통계에 따르면, 두창 환자 중 규정된 제2기 종두까지 완료한 사람은 63.8%에 지나지 않는다.……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총독부의 행정력이 가장 깊숙이 침투한 경성부조차 접종 예정자 중 70%의 사람만이 춘추 정기 종두에 참여할 뿐이었다.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검두(檢痘)에 오는 사람은 그 중 다시 반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두창의 위험성을 몰랐을 리는 없다. 적절한 예방접종을 통해 그것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고작 16년 후, 1961년 이래 국내에 두창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난 후 의무접종을 시행하자 다들 순순히 예방접종을 받았다. 덕분에 수월히 집단면역에 도달했다.

행정 역량 이전에 ‘강제 않는 설득’
지난해 1221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델라웨어주 뉴어크에 있는 크리스티애나 병원에서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고 있다. 그의 접종 모습은 TV로 생중계됐다. [AP=뉴시스]
두창 백신의 도입과 보급의 역사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백신을 통한 집단면역 형성과 전염병 퇴치는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상당수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서적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둘째, 무턱대고 강제만 하는 방역 정책은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식민지를 다스리던 조선총독부도 해내지 못했다. 

셋째, 가장 중요한 대목. 필요에 대한 설득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백신 접종과 집단면역은 의외로 수월하게 달성될 수 있다. 일제보다 행정 역량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는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이었지만 두창 예방만큼은 일제보다 외려 더 잘 해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관건은 ‘강제하지 않는 설득’의 방법론이다. 실질적으로는 강제라 해도, 받아들이는 이가 반감을 느껴 비이성적 선택을 하지 않게끔 하는, 그런 설득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백신처럼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공포를 자아낼 수 있는 대상이라면 더욱 섬세하면서도 대범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훌륭한 정치적 설득력이 요구되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대체 왜 그는 ‘1호 백신 접종자’가 되지 않았는가? 왜 남이 백신 맞는 것을 멀뚱히 지켜보는 장면을 연출했는가? ‘1호 백신 접종자’의 자리는 의료진에 양보할지라도 최대한 빨리 백신 맞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줬어야 하지 않을까? 여당 정치인들이 ‘대통령을 모르모트로 만들 셈이냐’ 따위 망언을 내뱉을 때 말리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을까? 

65세 이상이니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을 수는 없고 화이자 백신은 더욱 물량이 부족하니 현장 인력과 고위험군에게 먼저 투여해야 한다는 변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백신을 처음 개발한 미국과 영국에서도 백신의 초기 물량은 부족했다. 미국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히 넉넉한 물량을 확보하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선진국은, 선진국일수록, 대통령이나 여왕 혹은 총리 같은 사회지도층이 먼저 팔뚝을 걷어붙이고 백신을 맞았다. 그런 모습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올해로 78세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당선인 신분으로 백신을 맞았다. 그래야 백신 거부 세력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현 시점에서 문 대통령이 화이자 백신을 맞는 것은 결코 ‘귀중한 물량을 낭비하는 일’이 아니다. 정 반대다. 평범한 의료인 한 사람이 맞는 것보다 대통령이 맞는 게 열 배, 백배는 더 중요하다. ‘백신은 안전하다’, 더 나아가 ‘백신을 맞는 것이 우리 모두를 코로나로부터 지키는 길이다’라는 메시지를 대중에게 퍼뜨리고 설득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참모진은 무슨 생각일까. 대통령 본인은 안 맞으면서 남에게 백신 맞으라고 권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게 대중에게 불러일으킬 의심과 공포에 대해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 아닌가? 아니면, 혹시나 해서 한 사람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물어보고 싶은데, 문 대통령은 백신을 맞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안티백서(Anti Vaxxer: 백신 음모론자)’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며 세계 10대 경제 강국인 만큼 대한민국을 떳떳하게 ‘선진국’이라고 불러보자. 선진국 중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가수반이 백신 맞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나라는 딱 세 곳 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던 시절의 미국,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이다. 트럼프는 퇴임했으니 논외로 한다면, 문 대통령이 이 사안에 대해서만큼은 일본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지 않는 건 의아한 일이다. 

대통령이나 그에 준하는 국가수반이 앞장서서 백신을 맞지 않는 나라들의 명단을 선진국 너머로 확장해서 채워보면 어떨까. 독자 여러분의 머릿속에 예상 가능한 나라들이 스쳐 지나갈 것이다. 그렇다.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 독재자 혹은 포퓰리스트가 집권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백신 솔선수범’이 벌어지지 않았다.

국가수반이 백신 맞지 않은 국가
포퓰리스트로 악명 높은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백신을 안 맞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음모론을 퍼뜨리고 백신의 효능을 부정하며 ‘안티백서’ 노릇을 하고 있다. 중국 시진핑 주석 또한 백신을 맞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찍힌 사진이 있긴 하나, 백신을 맞았다고 홍보하지도 않았으므로, “맞지 않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3월5일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러시아의 푸틴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홍보 소재로 삼는 푸틴이지만 ‘나는 남자답게 백신을 맞았다’며 인증샷을 올리지는 않았다. 그러니 러시아의 자랑, 국내에서도 위탁생산 중인 ‘스푸트니크 V’ 백신을 푸틴은 맞지 않았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중국과 러시아가 세계 각국을 상대로 ‘백신 세일즈’를 하고 있다는 점을 놓고 보면 실로 황당한 일이다. 

지난 3월 4일, 청와대는 “문 대통령은 기꺼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받겠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다만 접종 시기는 밝히지 않았는데, 6월에 열릴 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늦어도 4월 초에는 첫 번째 접종을 해야 한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선진국 국가수반의 선례를 따르자면 문 대통령은 진작 백신을 맞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여태 접종을 미루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석연치 않다. 대통령의 백신접종 시기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치기 힘들다. 4월 7일 재·보궐선거를 코앞에 두고 백신을 접종하기 위해 아껴두고 있는 건 아닐까? 

백신은 과학과 본능의 싸움이다. 모든 싸움은 곧 정치다. 따라서 과학은 탈정치적일 수 없다. 본능을 이겨내고 과학을 택하는 그 자체가 정치적 결단이기 때문이다. 다만 2021년 현재는 충분히 많은 사람이 본능이 아닌 과학을 택하고 있기에 그 정치적 갈등이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2021년 대한민국에는 백신을 둘러싼 수많은 정치 쟁점이 있다. 대체 왜 다른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매우 적은 양의 화이자 백신을, 그것도 개발도상국을 위한 모금 프로그램인 코백스를 통해 도입해야 했는가? 무슨 근거 혹은 목적으로 아스트라제네카에 백신 정책을 ‘올인’했을까? 당장은 진실을 알 길이 없다. 

더 중요한 건 이후의 행보다. 백신 논란을 방치하고 있는 문 대통령의 행태가 백신에 대한 국민적 불안과 공포를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그렇다면, 이 또한 정치적 선택이다. 그런데 이것은 백신 도입에 차질을 빚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정치적 악행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19세기 말 구한말에서나 있었던 ‘의학이냐 무속이냐’, ‘과학이냐 미신이냐’ 차원으로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뒷짐 지고 ‘참관’하는 동안 백신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은 깊숙이 곪아가고 있다. 국민 사이에 특히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대한 공포가 퍼져가고 있다. 친문 지식인과 누리꾼들은 그런 여론을 비난하고 매도하기 바쁘다. 마치 일제강점기 총독부 관리와 경찰 및 일제에 복무한 지식인들이 조선인들을 상대로 백신의 효능을 강압적으로 ‘계몽’했던 풍경이 연상된다고 하면 과도한 표현일까. 

필자는 과학주의자이며 이성주의자다. 아직 젊고 의료인도 아니니 한참 순위가 밀리겠지만 내 차례가 온다면 가리지 않고 백신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대통령은 백신을 맞지 않으면서, 친문 정치인과 지식인, 누리꾼만 목청을 높여가며 반대 세력을 매도하는 정치적 풍경에도 단호히 반대한다. 이건 감히 말하건대 최악의 정치다. 

백신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는 이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어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백신을 거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거부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줘야 한다. 다만 좀 더 영향력 있는 이들이 솔선수범해 효능과 이익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을 자연스럽게 백신과 친숙해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일단 분위기가 백신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형성되고 나면 극소수의 불안과 공포 역시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반대로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상대로 그랬듯 강압과 폭력을 동원하면 오히려 의심과 반감이 커져 목표 달성이 어려워진다.

“누가 즐거이 접종 받겠는가”
이것은 방금 떠올린 이상주의적 몽상이 아니다. 세계 최초로 종두법을 개발한 에드워드 제너의 조국 영국에서 백신 거부권을 보장하면서 제시한 논리다. 1898년의 일이다. 지석영이 조선 최초로 종두법을 시행한 때가 1879년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백신을 거부할 권리에 대한 담론은 백신 보급과 불가분의 관계다. 과학은 근대의 산물이며 근대는 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근간으로 삼는 만큼 당연한 일이다. 

그 점을 지석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압적인 종두법 시행에 대해 우려를 드러낸 바 있다. 박윤재 교수의 논문을 마지막으로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한국 우두법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지석영은 1908년 강제적인 우두 접종을 비판했다. 피접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낯선 이방인이 갑자기 종두인허원이라 칭하며 강제로 우두를 접종하고자 할 때 누가 즐거이 접종을 받겠느냐는 비판이었다. 이 비판은 우두법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설명과 설득이 필요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총독부가 조선인들과 함께 우두를 불신하게 된 원인들에 대해 논의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논의가 공개되지는 않았다.” 

국민 스스로 백신의 필요성을 깨닫고, 인식하며, 부작용이 있더라도 함께 위험을 감당하는 집단면역의 길. 결국은 그 길이 옳다. 일제 36년간 달성하지 못했던 두창 박멸을 해방된 조국에서는 그 절반도 안 되는 시간에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독재를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인 자발성의 힘을 일깨워야 한다는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백신을 맞아야 한다. 가능한 한 빨리 공개적으로 접종받아야 한다. 백신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약간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참아낼 가치가 있는 우리 모두의 싸움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민주국가의 대통령과 독재국가의 지도자를 나누는 갈림길 위에 그가 서 있다. 문 대통령이 과학과 민주주의의 편에 서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3-07

공항 만들어 메가시티 구축? 여당의 주술행위

 [노정태의 뷰파인더㉔] 차라리 지방거점 국립대에 28兆 퍼붓자

●文 “부·울·경, 동북아 8대 대도시권 도약”
●일본의 97개 공항이 과연 경제 살렸나
●반도체 등 항공 화물 수요도 수도권에
●일단 짓고 나면 수요 발생? 일종의 신앙
●보스턴 증명하듯 도시경쟁력 핵심은 대학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월 25일 부산신항 다목적부두에 있는 해양대 실습선 선상에서 열린 ‘동남권 메가시티 구축 전략 보고’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부산·울산·경남은 오늘 힘찬 비상을 위해 뜻을 모았습니다. 동남권의 역량을 결집하여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북아 8대 대도시권으로 도약하는 메가시티 구축전략을 수립했습니다. 2040년까지 인구 1000만 명, 경제 규모 490조 원의 초광역 도시권 구축이 목표입니다.”

2월 25일 부산신항 다목적 부두에 있는 해양대 실습선 선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발언이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과 사퇴로 인한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여당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 카드를 꺼내들었다. 문 대통령은 그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직접 부산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 산업과 경제의 절반 이상이 모여 있는 나라다. 수도권 집중을 막자는 대의에 원론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도에만 자원이 집중된 나라는 그만큼 큰 빈부격차와 자원 불균형을 피할 수 없고, 이는 대외 경쟁력 뿐 아니라 국내 정치의 안정성마저도 해치는 요인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쌍수 들고 환영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대통령이 저 시점에 저곳에서 저런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선거개입이라는 걸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옹호하기 위해 동남권 메가시티가 필요하다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이런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메가시티라는 게 무엇인가. 인구 800만의 광역권을 1000만으로 만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신공항 건설은 메가시티를 이루기 위해 필수불가결한가. 혹은 도움이 되는가. 공항이 아니라면 무엇을 통해 어떻게 자족적인 경제권으로 기능하는 메가시티를 이룰 수 있는가.

8459억 달러 vs 2965억 달러
2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안(대안)이 통과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메가시티에 대한 엄밀하고 통일된 개념 정의는 없지만 그 내용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유엔 경제사회국(United Nations 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이 2018년 발행한 ‘세계 도시화 전망’(World Urbanization Prospects) 보고서에 따르면, 메가시티(megacity)란 1000만 명 이상의 거주자를 지닌 광역 도시권을 뜻한다. 하나의 도시가 1000만 이상의 인구를 갖지 못하더라도 단일 생활권을 구성하는 여러 도시가 한데 어울려 있다면 메가시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실 서울과 수도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울시의 집계에 따르면 서울은 1988년 인구 1029만 명을 기록하며 ‘1000만 도시’가 되었지만, 2020년 말 현재 총인구 9911088명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서울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인구 1000만이 안 되므로 메가시티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서울’은 서울특별시 그 이상의 존재다. 인천, 부천, 과천, 성남, 의정부 등 인근 광역시를 모두 자신의 생활권으로 포괄하고 있다. 인천과 경기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인 ‘수도권’은 201912월 현재 그 외 모든 지역보다 인구가 많은 곳이 됐다. 앞으로도 그 추세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수도권은 대단한 글로벌 도시다. 소위 ‘국뽕’을 빨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2015년 1월 22일 브루킹스연구소에서 발표한 ‘글로벌 메트로 모니터’(Global Metro Monitor)에 따르면, 구매력평가 기준(PPP) 국내총생산(GDP)을 놓고 볼 때 2014년 한국의 수도권은 8459600만 달러(한화 약 9518980억 원)로 도쿄, 뉴욕, LA의 뒤를 이어 세계 4위에 올라 있었다. 인구로 따져도 2460만 명으로 세계 5위다. 한국인 뿐 아니라 세계인이 서울 수도권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동남권은 어떨까. 같은 자료를 검토해보자. 브루킹스연구소는 부산과 울산을 하나의 도시 단위로 놓고 통계를 제공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2014년 현재 부산-울산의 구매력평가 기준(PPP) GDP29651000만 달러(한화 약 3336627억 원)로 세계 36위, 인구는 7681200명으로 세계 49위에 머물고 있다. 경상남도 전체의 인구를 합하더라도 2021년 현재 800만 명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일단 짓고 본’ 日 공항들의 실태
그러니 우리는 “동남권의 역량을 결집하여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북아 8대 대도시권으로 도약하는 메가시티 구축전략”이 뭔지,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다. 경제력으로 세계 4위권인 메가시티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적어도 세계 10위권에는 올라야 한다. 획기적일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 전략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인구를 놓고 보면 더욱 갈 길이 멀다. 2040년까지 인구 1000만을 달성하려면 앞으로 19년 안에 200만 명의 순유입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가정에서 아이를 열심히 낳는 것과 별도로, 국내에서 이사를 오건 해외에서 이민을 오건 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또 정착해야 인구 1000만의 동남권 메가시티를 구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또한 대단히 획기적인 인구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실현 불가능한 목표에 가깝다.

경제와 인구의 성장을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밝은 미래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기대가 있을 때 삶의 터전을 옮기는 모험을 감행한다. 내 자식이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 때 좀 더 기꺼이 아이를 낳는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한국의 낮은 출산율은 대한민국이 지금은 풍요로워도 그 구성원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19년 만에 인구 200만 명 순증가, 즉 현재 800만인 인구가 25% 늘어난다는 것은 고도 성장기에나 있을법한 엄청난 사건이다. 동남권 메가시티 플랜이 제대로 작동하고 성공을 거둔다면 온 나라에 긍정적인 선례가 될 테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필자가 어떤 정답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조심스러운 제안을 해볼 수 있을 뿐인데, 그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논하기로 하자.

일단은 분명한 오답에 대해 말해야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알고 계실 것이다. 실은 문 대통령이나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혹은 성추행으로 사퇴한 오거돈 전 부산시장 역시 잘 알고 있다. 가덕도에 28조 원을 들여 신공항을 짓는 것은 동남권 메가시티를 이루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이다.

한국에서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여러 공항의 실패 사례를 또 거론하지는 말기로 하자. 그보다 더 극적이고 확실한 교훈을 주는 사례가 바다 건너 일본에 충분히 많으니 말이다. 일본에는 총 97개의 공항이 있고, 그 중 54개가 지방관리 공항이며, 그 중 상당수가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취지하에 ‘일단 짓고 본’ 공항이다. 그래서 일본 경제가 살아났던가.

‘카고 컬트’ 이어나가는 족장
2월 26일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안(대안)이 통과된 직후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부산시장 후보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여기서 변성완 후보, 박인영 후보, 이낙연 대표, 김태년 원내대표, 김영춘 후보(왼쪽부터)가 박수를 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가덕도 신공항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대략 이런 식이다. 세계적인 거점 항구인 부산항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부산항에 가까운 거점 공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남권의 주민들에게는 인천공항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해외로 나가고픈 숙원이 있었다는 말 역시 빠지지 않는다.

두 논리 모두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항공 운송은 선박에 비해 비용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산업 차원에서 움직이는 항공 화물은 그 종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항공 화물이 바로 반도체인데, 모두가 알다시피 삼성전자의 공장은 평택에 있고 SK하이닉스의 공장은 이천에 있다. 둘 다 경기도, 즉 수도권이며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공항이 있지만 화물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가덕도 신공항을 통해 해외로 곧장 나가고픈 간절한 소망은 이해한다. 허나 해외 노선이라는 게 이쪽에서 공항을 만들기만 한다고 당장 생기는 대상이 아니다. 항공사가 노선을 개설해야 한다. 외국 항공사들이 인구 2000만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교통이 원활한 수도권을 두고, 인구 800만에 구매력평가 GDP로 세계 36위인 동남권에 별도로 직항 루트를 개설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공항이 있어도 취항하는 노선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세계로 통하는 노선’을 뚫을 권리는 외국 항공사에게 있다. 180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민주당이 미국 항공사에 ‘가덕도에 취항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가덕도 신공항을 어떻게든 옹호하려는 이들은 공항을 만들면 수요가 생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창출된 수요가 동남권 메가시티 창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는 희망사항을 장밋빛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을 뉴스 댓글이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종종 보게 된다.

그런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머릿속에는 ‘카고 컬트’(Cargo Cult)라는 개념이 스쳐 지나간다. ‘화물 숭배’라 번역할 수 있다. 뉴기니와 인근 멜라네시아 각지에 사는 원주민들이 믿게 된 토착 신앙이다. 오지 중의 오지였던 그곳에도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인들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거점으로 삼은 섬에 배와 비행기로 필요한 물자를 투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현지인들 역시 그들이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던 온갖 문명의 풍요와 편리를 맛보았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 벌어졌다. 더 이상은 비행기가 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카고’가 오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자 현지인들은 비행기를 신의 사자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카고’를 신의 선물로 이해하는 자생적 신앙 체계를 만들어 나갔다.

카고 컬트는 점점 정교화되었다. 백인들이 비행장을 만들고 관제탑을 세워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것을 본 일부 현지인들은 나무와 수수깡 등으로 가짜 비행기, 활주로, 관제탑 등을 만들었다. 심지어 항공관제사의 손놀림을 흉내 내며 ‘카고’의 도래를 기원하는 주술 행위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다고 비행기가 다시 날아와 ‘카고’를 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알만한 지식인들이 희망사항과 현실을 뒤섞어가며 가덕도 신공항에 경제성이 있다는 둥, 일단 24시간 운항 가능한 국제공항이 생기면 부‧울‧경 메가시티가 탄생할 거라는 둥, 혹세무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마치 이제 전쟁이 끝났고 백인들이 와서 ‘카고’를 내려놓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카고 컬트를 이어나가는 족장이나 샤먼과 다를 바 없다.

보스턴과 실리콘밸리가 주는 교훈
부산을 비롯한 동남권의 현지 주민들이 가덕도 신공항에 찬성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땅이 오거돈 전 시장의 친인척 땅이건 말건, 실제로 공항이 지어진 후 해외 노선이 열리건 말건, 일단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지역 경제에 활기가 돌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주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해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해법이 있을까? 필자가 도시 정책 및 산업 정책 등의 전문가는 아니기에 타인의 식견을 빌려올 수밖에 없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를 펼쳐보자.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의 제조업은 쇠퇴했다. 그 과정에서 도시 간 명암이 갈렸다. 보스턴은 법률, 금융, 생체의학 연구 등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며 경제적으로 부활했다. 디트로이트는 지금껏 침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교육, 특히 연구 중심 거점 대학의 유무가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보스턴에는 하버드대를 비롯해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여럿 자리 잡고 있는 반면, 디트로이트는 그렇지 않다. 입학 순위가 높은 미시간대가 인근에 있긴 하나, 미시간대는 엄밀히 말해 디트로이트 시내가 아닌 미시간 주 앤아버에 있으며 별개의 생활권과 경제권을 구성한다. 디트로이트에는 ‘자동차 산업의 하버드’가 없었고, 그것이 두 도시의 명암을 갈랐다.

좀 더 확실한 사례로 스탠퍼드대와 실리콘밸리의 관계를 떠올려보자. 스탠퍼드대는 애플 본사까지 고작 2km, 구글 본사까지는 8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스탠퍼드대에서 쏟아진 고급 인재들은 자신들이 대학에 다니던 바로 그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생활을 꾸려나간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노동과 대학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다. 대학을 빼놓고는 도시의 경제와 미래를 논할 수 없는 셈이다.

동남권 뿐 아니라 서남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또 다른 메가시티가 가능하려면 미래 유망 산업과 연계된 대학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해법은 요즘 흔히 ‘지거국’이라 부르는 지방거점국립대에서 찾아야 한다. 대학 교육과 지역 경제 및 국가 산업 전략을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28兆, 지방거점 국립대에 퍼붓는다면
동남권 메가시티 문제는 단지 한 지역의 토목공사 차원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지역 균형 발전의 핵심은 각 지역마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이는 산업을 보유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산업은 대학 교육과 함께 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국립대 개편과 개혁에 대해서까지 논의해야만 한다. 지방마다 거점이 되는 국립대는 국가가 직접 통제할 수 있으며, 대체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기에 지역 주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시내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거국’(지방거점 국립대)이 살아야 각 지방이,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산다.

나는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에 대해 찬성한다. 어쩌면 김경수 경남지사나 문재인 대통령보다도 더, 진심으로 찬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28조원을 바다에 퍼붓는 것에 회의적일 뿐이다. 충분한 논의와 고민을 거쳐 그 돈을 각 지역의 거점이 되는 대학에 퍼붓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훨씬 나은 미래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남권 메가시티 논의가 보다 건설적인 해법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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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6

‘백신 진수성찬’이라며 정권이 내놓은 밥상은 텅 비어 있었다

[노정태의 시사哲]
[아무튼, 주말] ‘백신 상상놀이’ 빠진 文 정권에 피터 팬이 말했다 “놀고 있네”

/일러스트=안병현
 

마흔 살의 M&A 변호사 피터 배닝(로빈 윌리엄스 분). 사업이 한창 궤도에 오른 시점에 뜻밖의 일을 겪는다. 런던에서 아들과 딸이 납치당한 것이다. 고아였던 그를 거두어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준 웬디 할머니의 집 안 곳곳은 갈고리로 긁은 흔적이 가득하고, 벽에는 협박 편지가 칼로 꽂혀 있다. ‘피터 팬, 네 아이들을 찾고 싶다면 네버랜드로 와라.’

네버랜드에서 맞이한 첫 번째 저녁. 식탁 위에는 빈 그릇과 식기만 가득하다. 어리둥절한 피터에게 팅커벨이 규칙을 설명해준다. ‘상상해 봐, 그럼 진짜로 먹을 수 있어.’ 아이들은 피터가 없는 동안 리더가 된 루피오의 지시에 따라 기도를 하고 열심히 먹는 시늉을 하지만 여전히 그릇은 비어 있다. 피터의 상상은 달랐다. 크림을 한 숟가락 떠서 루피오의 얼굴에 날리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짠! 루피오는 크림을 뒤집어쓰고 갑자기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무에서 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음식을 가지고 ‘노는’ 상상을 통해 피터는 어린 시절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임스 매슈 배리의 소설 ‘피터 팬'을 원작으로 삼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1년 작 ‘후크'의 한 장면이다. 루피오에게 상상의 크림을 던질 때 피터는 더 이상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변호사 피터 배닝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피터 팬으로 돌아간 것이다.

네덜란드가 낳은 문화인류학의 대가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라는 현상에 주목했다. 놀이는 모든 문화의 근간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대표작 ‘호모 루덴스'를 펼쳐볼 때다.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내가 엄마 할게, 네가 아빠 해. 놀이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행위다. 스스로 역할과 규칙을 정한다. 또한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소꿉놀이가 끝나거나 놀이방을 나가면 나는 엄마가 아니고 너도 아빠가 아니다. 하지만 소꿉놀이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한없이 진지하게 엄마와 아빠가 되어 있다. 자유로운 규칙, 시공간의 한계, 진지한 몰입. 놀이를 만드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인류 문화의 근간에 깔려 있다는 놀라운 통찰이다.

놀이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다. 무언가를 흉내 내고 따라 하는 ‘모방유희’, 서로 견주고 다투는 ‘경쟁유희’가 그것이다. 모방유희는 종교, 예술, 창작의 원천이 된다. 경쟁유희는 전쟁, 스포츠, 법률, 심지어 철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토대에는 소피스트들의 말싸움과 언어유희가 깔려 있다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호모 루덴스'는 1938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은 21세기에 들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인터넷, 소셜미디어, 문화 산업의 발전 때문이다. 웹소설과 웹툰은 막대한 규모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의 영향력과 수입은 어지간한 연예인 부럽지 않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같은 대표적 K팝 그룹은 수출 기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미학자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에 따르면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피터 팬이 루피오의 얼굴에 크림을 던지면 텅 빈 테이블에 음식이 생기듯, 말 그대로 ‘상상력이 밥 먹여주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호모 루덴스의 놀이, 혹은 마법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매직 서클’ 내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치, 외교, 안보, 경제 등 다양한 분야는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의 영역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놀이와 상상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코로나 백신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다. 현재 국내에 들어온 화이자 백신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었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상대적으로 넉넉한 편이다. 그나마도 물량이 부족해 우리는 2월 25일까지 백신을 맞지 못하고 있었다. 졸지에 이란, 이집트, 터키, 브루나이, 베네수엘라, 우크라이나와 같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국민의 실망감이 차오르는 듯하자 갑자기 ‘K주사기’ 타령이 시작됐다. 국내에서 개발된 ‘최소 잔여형 주사기’를 이용하면 6인용 백신을 7명에게 주사할 수 있다는 “대박 사건”이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치약이 없어서 이빨을 못 닦는 집구석에 치약 짜주는 도구가 많다고 기뻐하는 꼴이었다. 옆 반 애들은 피자를 각자 두 조각씩 먹는데, 문재인 반장은 달랑 피자 한 판 사다놓고 잘 쪼개면 여섯 조각을 일곱 명이 먹을 수 있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2월 3일에는 백신 유통 모의 훈련을 한다며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시끌벅적한 행사를 하고 보도 자료를 뿌리는 촌극도 벌어졌다. 23일에는 백신접종센터 대테러 훈련도 있었다. 이미 세계 백여 국가에 백신이 유통되고 있다. 테러범도 그런 걸 목표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쇼 머스트 고 온(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이었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대통령이나 총리, 여왕 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앞장서서 백신을 맞았다. 비과학적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갔다. 대통령이 자기가 맞지도 않는 백신 접종을 ‘참관’하러 간 나라가 또 있을까. 결국 우리는 대통령이 ‘안티백서(Anti-Vaxxer, 백신 음모론자)’인 나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셈이다. ‘K방역’은 이렇게 끝났다.

문재인 정권은 백신 계약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원인을 정확히 밝히고 이해와 용서를 구해도 모자라다. 하지만 정부는 현실의 백신 부족을 상상력으로, 그것도 식상해진 ‘탁현민 쇼’로 때우고 있다. 국민은 피터 팬이 돌아오지 않은 네버랜드에서 억지로 맛있는 척 꾸역꾸역 먹는 시늉을 하던 어린이들 신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테이블에 백신이 넉넉하게 올라올 날은 과연 언제일까.

루피오는 ‘기도하고 밥을 먹는’ 상상을 아이들에게 강요했다. 재미가 없었고 밥그릇은 텅텅 비어 있었다. 피터가 루피오의 얼굴에 크림을 던지자 그제야 테이블은 진수성찬으로 가득 찼다. 정치는 현실이지만 때로는 ‘상상력의 예술’이 된다. 청와대의 ‘호모 루덴스’들을 향해 ‘놀고 있네’라며 통쾌하게 한 방 날려줄 피터 팬을 기다린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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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8

오용된 빌 게이츠, 오염된 원전 논쟁

 [노정태의 뷰파인더㉓] 누가 그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나

● 교과서로도 완벽한 책 ‘기후재앙’
● 목표 “세계 에너지산업 바꾸는 것”
● 그의 진심은 원자력발전소 혁신
● 국내 논의는 엉뚱한 방향 향해
● 탈원전 논의 수준에 그칠 책 아냐
● ‘탄소 제로’ 해법, 한국이 쥐고 있다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최근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원제: How to Avoid a Climate Disaster)을 펴냈다. [빌 게이츠 공식 페이스북]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이하 ‘기후재앙’)은 훌륭한 책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이며 명민한 두뇌를 가진 엔지니어가 오랜 기간 준비해서 낸 책으로 손색이 없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다양한 이슈를 공부하고 명확하게 정리해냈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 같은 제목의 대학 강의가 생긴다면 1학년 1학기 교과서로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빌 게이츠의 목표는 명료하다. 2050년까지 탄소 배출을 ‘제로(0)’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상 탄소 배출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발전된 기술과 비즈니스 및 행정을 통해 배출 탄소를 적극 제거함으로써 탄소 중립을 거의 달성한 상태를 그는 ‘제로’라고 부른다.

이 명료한 목표는 사실 대단히 무모한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이 책을 둘러싼 오해와 논쟁은 대부분 그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대한 전환 위한 ‘투 트랙 전략’
기후변화가 화제로 떠오르면서 국내에도 관련 서적이 다수 번역됐다. 국내 저자들의 책도 여럿 출간됐다. 모두 살펴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비를 줄여야 하고, 플라스틱 사용은 죄악에 가까우며, 육류 섭취는 완전히 끊거나 줄여야 마땅하고, 전기는 태양광과 풍력만이 올바르다는 그런 내용들이 담겨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물론 ‘기후재앙’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빌 게이츠가 사업에 전념하던 젊은 시절 미국 시애틀에서 가장 오래된 햄버거 프랜차이즈인 버거마스터에서 삼시세끼를 모두 해결했다거나, 그의 아버지도 버거마스터에 죽치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우편물을 버거마스터로 보낼 지경이 되었다거나, 그럼에도 이제는 환경을 위해 치즈버거를 그리 많이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162쪽)은 유쾌하고 진솔하다. 

하지만 그런 건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와 거의 무관하다.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빌 게이츠는 그보다 훨씬 크고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의 목표는 “세계 에너지 산업, 다시 말해 5조 달러 규모의 산업이자 현대 경제의 근간이 되는 산업을 바꾸는 것”(18쪽, 서문)이다. ‘제로’에 도달하기 위해 인류는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되는 산업, 에너지 산업을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 ‘기후재앙’의 주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거대한 전환은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투 트랙 전략이란 첫째로 제로 탄소 전기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데 ‘올인’하고, 둘째로 화석연료에 의존적인 지역을 포함해 자동차부터 열펌프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기화하는 전략이다.”(281쪽) 

순서를 바꿔 서술해보면 더 이해가 쉽다. 우선 세상의 모든 에너지 공급원을 전기로 바꾼다. 자동차도 전기로 몰고, 배도 (가능하다면) 전기로 운항하고, 비행기는 배터리가 너무 무겁기 때문에 불가능하므로 탄소 배출 제로인 항공유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냉방 뿐 아니라 난방 역시 화석연료를 태우는 보일러 대신 전기로 작동하는 히트펌프로 대체하며, 취사 같은 것도 전기로 바꾼다. 그리고 그 전기 자체를 탄소 제로로 생산하면 많은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 것이다.

산업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말
글로 적어놓고 보면 별것 아닌 계획 같지만 그 속에 담긴 경제적 함의는 실로 무지막지하다. 무슨 종류의 발전소를 세우고 송전탑을 짓네 마네 하는 차원을 가볍게 넘어선다. 자동차, 선박, 건축, 냉난방, 항공, 제조업, 농업 등 소규모 서비스업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산업 분야를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자동차와 운송 분야를 생각해보자. 테슬라를 필두로 한 전기차 메이커들의 공격으로 기존의 승용차 업계가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정부에서 지급하는 보조금을 빼고 나면 전기차는 여전히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충전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주행 거리가 짧으며, 배터리의 수명이 다하면 다량의 처치 곤란한 폐기물을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전기차를 충전하는 전기의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이 있다면 전기차 역시 ‘제로’를 향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량의 승객과 화물을 날라야 하는 버스, 트럭 등 대형 운송 차량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리튬 이온 배터리 전기차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배터리 자체의 무게로 인해 운송 효율이 턱없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비행기 역시 계속 탄화수소(석유)를 연소하는 엔진을 쓸 수밖에 없다. 전 세계 화물의 대다수를 운반하는 컨테이너선의 경우 벙커C유(油)를 연료로 사용한다. 벙커C유는 원유를 정제하고 나오는 잔여물인지라 그 가격이 턱없이 저렴하다. 어지간해서는 가격 경쟁이 되지 않는다. 시장에서 자동적으로 퇴출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빌 게이츠가 원자력에 우호적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 어떤 다른 청정에너지원도 원자력에너지와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더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가까운 미래에 저렴한 비용으로 전력망을 탈탄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123쪽) 

빌 게이츠는 체면치레삼아 ‘원자력 발전의 문제는 삼척동자도 안다’고 한 마디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의 진심은 이런 것이다. 

“원자력은 자동차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원자력은 그 어떤 화석연료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을 죽인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동차의 문제점을 개선한 것처럼 원자력발전소도 문제를 하나씩 분석한 다음, 혁신으로 해결하며 개선해야 한다.”(126쪽) 

일각에서는 빌 게이츠가 원자력발전소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대목이 전체 책의 분량상 얼마 되지 않는다며, 이 책을 탈원전 정책에 대한 반대 논거로 끌어들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빌 게이츠는 우리가 원자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내기를 원한다. 원자력을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더 개선하고 발전시켜가며 널리 사용하기를 바란다. 어느 정도냐면, 벙커C유를 퇴출시키기 위해 핵연료로 움직이는 컨테이너선의 활용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정도다. 중요한 대목이니 직접 읽어보자. 

“또한 핵연료로 움직이는 컨테이너선도 고려해야 한다. 핵연료 컨테이너선과 관련된 리스크는 현실적이다(예를 들어 배가 침몰한다고 해도 핵연료가 새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많은 기술적 난제들이 해결되었다. 이미 군용 잠수함과 항공모함은 핵연료로 움직이지 않는가?(211쪽)”

‘원자력 묻고 더블로 가자’
경북 울진에서 가동 중인 한울원자력발전소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원자력발전은 당연하고, 다소 철 지난 유행어를 빌리자면, ‘원자력 묻고 더블로 가자’는 것이 ‘기후재앙’의 주제다. 빌 게이츠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을 10% 줄이고, 2040년까지는 20% 줄이자는 식의 점진적 개혁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산업적, 경제적 구조를 통째로 들어 엎자는 것이다. 그 취지를 빌 게이츠는 결론 부분에서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정직하게 서술하고 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과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굉장히 다르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은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을 위한 중간 단계의 목표가 아니다. 직감적이지는 않지만 굉장히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잘못된 방식으로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감축하면 자칫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을 ‘못하게’(원문에도 강조가 돼 있음) 될 수 있기 때문이다.”(280쪽) 

아직 ‘기후재앙’을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저자의 취지가 잘 와 닿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방금 언급한 요점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이 책은 기후변화에 대한 책이지만, 기후변화‘만’을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이 아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에너지 체계와 그에 기반한 산업 구조를 만들자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빌 게이츠의 목표다. ‘기후재앙’은 바로 그 새로운 미래를 향한 청사진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국내의 논의는 실로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특히 진보 언론의 왜곡이 도드라진다. ‘경향신문’은 논설위원 칼럼에서 빌 게이츠가 만든 원자력발전소 연구 기업인 ‘테라파워’의 신형 원자로가 핵융합로라고 서술했다가 독자들의 비난을 받고 슬그머니 칼럼의 내용을 바꿨다. 

‘한겨레’ 역시 여러 차례 ‘기후재앙’을 비판했는데 그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2월 23일 공개된 ‘빌 게이츠, 친원전 진영의 구세주가 됐다고?’라는 기사를 보면, “에너지생산, 제조업, 농축산업, 교통, 냉난방 등 인류 전 영역의 변화와 재생에너지 투자·확대를 촉구했던 게이츠의 주장은 오로지 원전만이 유일한 구세주인 것 마냥 납작해졌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빌 게이츠는 세상의 모든 에너지를 전기로 통합하기를 원한다. 그 전기의 생산에서 원자력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더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원전만이 유일한 구세주인 것 마냥”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볼 때, 원전을 배제한 그 어떤 ‘친환경 정책’도 친환경이 아니라는 것 역시 명백하다. 

원자력발전과 에너지를 둘러싼 논의는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오염돼 있다. 그 현실이 ‘기후재앙’에 대한 해석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빌 게이츠가 볼 때 원자력의 사용은 너무도 당연해서 논쟁거리가 되지도 않는다. 그래야 마땅하다. 그가 원자력에 그렇게까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당연히 택해야 할 해법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통째로 바꾸는 이야기를 하는데 왜 빌 게이츠를 한국의 탈원전 논쟁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가. 빌 게이츠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는 건 과연 누구인가.

메추라기가 대붕(大鵬) 비웃듯
2017년 7월 31일 당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가운데)과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에서 2번째)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에서 탈원전 정책 긴급 당정협의가 열리고 있다. [동아DB]
‘장자’의 ‘소요유’편을 떠올려보자. 북쪽바다의 물고기가 변신한 거대한 새 대붕(大鵬)이 하늘을 난다. 그런데 메추라기가 대붕의 나는 모습을 보며 한 마디 한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저러느냐?” 구만리 창공을 나는 대붕을 보며, 기껏해야 몇 자 몇 치를 뛰듯이 날아다니는 메추라기가 비웃는 것이다. 

‘기후재앙’에 대한 국내 언론의 반응과 논란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빌 게이츠가 이 책에서 한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탈원전 논쟁과 무관하지 않다. 원전 사용을 늘리자는 것이니 굳이 분류하자면 탈원전 반대다. 

하지만 그 맥락에서 소비되고 말 논의가 절대 아니다. 인류가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생존과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구만리 상공을 나는 대붕의 눈이다. 

메추라기들의 짹짹거리는 소리는 잊고, 대붕의 눈높이에서 한국의 탈원전 논쟁을 바라보자. 현재 대한민국은 러시아, 중국과 함께 원전을 낮은 가격으로 양산해낼 수 있는 원천기술을 보유한 몇 안 되는 국가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 서방 세계의 동맹국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원전은 에너지 인프라이며 동시에 안보 자산이기 때문이다. 

2050년까지 ‘탄소 제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에 많은 원자력발전소가 필요하다. 원자력발전소를 저렴하게 빨리 짓는 것으로 정평이 난 우리의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가 진정 ‘역대급 위기’라면,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을 우리가 손에 쥐고 있다. 

현 정권이 탈원전 정책을 철회하고 적극적인 원전 세일즈 외교를 펼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빌 게이츠를 비롯해 기후변화 대책으로 원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환경주의자와 운동가들을 앞세워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에너지 산업 분야에서도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처럼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중요 플레이어를 배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역사상 두 번 오기 힘든 기회다. 

이는 경제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후 유엔과 국제사회의 도움 속에 성장하여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는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맞아 전 세계를 구원함으로써 그 은혜를 멋지게 갚을 수 있는 상황이다. 자체적인 원자력발전소 기술을 가진 중국은 논외로 해보자. 인도, 나이지리아 등 인구가 많고 경제가 성장하고 있지만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석탄화력 발전소를 늘릴 수밖에 없는 나라가 아직 지구상에는 많다. 선진국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대정전을 겪은 텍사스에 한국의 원전이 힘을 보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빠르고 안전한 원자력발전소가 빛을 안겨준다면, 우리는 돈을 벌면서 동시에 세계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문명 고민하는 호쾌한 시각
과학적으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삼중수소 논란’ 같은 것을 일으키는 탈원전 진영의 눈높이는 ‘장자’에 나오는 메추라기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위험하지 않은데도 위험하다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화들짝 놀라고 비명을 지르는 피해자의 위치에 스스로를 묶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기후재앙’은 그런 면에서 신선한 자극을 준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쇠고기를 덜 먹고 비닐봉지 대신 에코백을 들고 다니자는 ‘착한’ 운동을 넘어, 지구 전체를 바라보고 이해하며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빌 게이츠의 생각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호쾌한 시각만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우리도 이제 개인과 국가를 넘어 문명을 고민해볼 때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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