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3

강남좌파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날 길, 4·7선거에 달렸다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헝거게임’을 통해 본 ‘참여연대 권력’의 시작과 끝

일러스트=안병현
 

어느 날 크나 큰 재앙이 닥친 후 북미 대륙은 수도인 ‘캐피톨’과 13개 구역으로 이루어진 판엠이라는 국가로 재편되었다. 오래전 반란을 일으켰던 13구역은 초토화되었고, 나머지 12개 구역은 오직 캐피톨의 번영과 풍요를 위해 착취당하고 있다. 16세의 소녀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 분)은 그중 가장 가난한 12구역에 살고 있다.

판엠에는 74년째 이상한 제도가 운영 중이다. ‘반란을 속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캐피톨을 제외한 전국 12개 구역에서 매년 12세부터 18세까지 남녀 한 쌍을 추첨해, 총 24명의 청소년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게 하는 것이다. 선수 추첨부터 단 한 사람의 승자가 살아남을 때까지 벌이는 살육전의 이름은 ‘헝거 게임’. 캣니스는 동생을 대신하여 헝거 게임에 자원한다.

헝거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24명중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평생토록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다. 캣니스처럼 가난한 구역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셈이다. 그렇게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모든 판엠 주민들은 원치 않아도 시청해야 한다. 자기네 구역 출신의 누군가가 이기라고 응원하고, 열광하고, 실망하면서. 가장 잔인하게 고안된 ‘빵과 서커스’인 셈이다.

대체 왜 이런 잔인하고 비합리적인 짓을 하는 걸까? 판엠의 독재자인 스노우 대통령은 설명한다. “겁주는 게 목적이면 24명을 모아놓고 몰살하는 게 낫잖아?” 헝거 게임의 목적은 공포가 아닌 희망이다. “두려움보다 강한 유일한 것이지. 단, 그것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가두어 둬야 해.”

미국 작가 수잰 콜린스의 소설 <헝거 게임>의 설정이다.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또한 4부작으로 제작되어 큰 흥행을 거둔 바 있다.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에 맞서는 시위대가 영화에 나오는 ‘세 손가락 경례’를 하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미얀마 국민들을 향해 세 손가락 경례로 응원의 마음을 보내며, 이 지면에서는 좀 더 깊은 논의를 해보도록 하자. 스노우 대통령이 말한 ‘헝거 게임’의 내용과 목적에서 우리는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의 작동 과정을 엿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을 주도하고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맞서 싸웠던 사람이다. 당시 많은 이는 자본주의와 불평등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정권이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불만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탈리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벌어지지 않는 것일까? 왜 억압당하는 자가 억압하는 체제를 전복하지 않고 때로는 도리어 옹호하는가?

그람시는 경찰과 군대 등을 통해 폭력을 행사하는 좁은 의미의 ‘국가’와 그 밖의 ‘시민사회’를 구분했다. 시민사회는 교회, 언론, 학교, 지역 공동체 등 다양한 제도 및 삶의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배계급은 국가뿐 아니라 시민사회를 통해서도 지배한다. 심지어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헤게모니’다.

가령 무솔리니 정권에 불만이 있는 한 공장 노동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잠재적 혁명분자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다. 매주 성당에서 신부의 강론을 들으며 착하고 순종적인 삶을 살기로 마음먹는다. ‘국가’의 폭력에는 반대하지만 ‘교회’의 설교에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시민사회, 그중에서도 종교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짜 희망을 주는 헝거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평생 자신이 태어난 구역에서 착취당하고 살아야 하는 가난한 젊은이에게 헝거 게임은 ‘인생 역전’의 기회이기도 하다. 각 구역 출신 우승자가 ‘멘토’가 되어 출전자를 지도하는 교육 프로그램까지 갖춰져 있다. 그런 구조 속에서 24명의 젊은이가 잘못된 체제와 싸우는 대신 자기들끼리 덫을 놓고 칼로 찌르며 화살을 쏜다. 판엠의 헤게모니는 그런 식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계급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다시 그람시로 돌아와 보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피지배계급은 어지간해서는 혁명에 동참하지 않는다. 한 번에 세상을 뒤엎는 ‘기동전’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진득하게 사람들 틈에서 영향력을 늘리고 때를 노리는 ‘진지전’을 펼쳐야 한다. 대중을 천천히 견인해나가는 전략이다.

헤게모니론과 기동전, 진지전은 한국의 운동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주사파 등 혁명을 꿈꾸던 세력과 달리 시민운동을 통해 영향력을 넓히는 쪽을 택한 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김창엽, 성낙돈 교수의 논문 “헤게모니론 관점에서 본 시민단체 시민교육의 성격: 참여연대 사례를 중심으로”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시피, 참여연대는 그 ‘진지전’의 핵심 거점이었다.

참여연대는 조국이 주도한 사법 개혁 운동, 장하성의 소액 주주 운동, ‘재벌 저격수’ 김상조의 재벌 개혁 운동, 박원순이 이끈 부패 정치인 낙천 낙선 운동 등을 통해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피지배층이 자발적으로 복종할 만한 권위를 축적한 것이다. 결국 헤게모니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참여연대는 문재인 정권을 통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실세 집단으로 등극했다.

그들이 권력을 잡은 후 대한민국은 내로남불 부동산 천국이 되고 말았다. 젊은이들은 저임금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면서 빚을 내 주식과 가상 화폐 투전판에 뛰어들고 있다. 근로소득만으로는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캐피톨’ 강남에 사는 강남좌파들이 온 나라를 헝거 게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캣니스는 헝거 게임에서 우승한다. 우승자로서 얻게 된 인기와 영향력을 바탕으로 혁명군에 동참하여 판엠의 헤게모니를 파괴한다. <헝거 게임>은 한 청년이 ‘진지전’을 벌여왔던 혁명군과 힘을 합쳐 ‘기동전’을 통해 잘못된 체제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인 셈이다.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 교육, 언론,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사회의 헤게모니는 저들 손에 넘어간 상태다. 자발적인 복종 상태에 빠진 이들은 여전히 단단한 결속력을 과시한다. 선거가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강남좌파의 헤게모니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응징의 화살로 헝거 게임을 끝낼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3-28

민주당, 코로나 빌미로 금권정치 門 열어젖히나 [노정태의 뷰파인더㉗]

 가난한 사람 수렁 몰아넣는 ‘투표 거래’의 재앙

●朴 “시민에게 10만원 씩 디지털 화폐 지급”
●로스쿨 교수 리처드하센의 논문 ‘투표 거래’
●평등·풍요·공동체 모두 해치는 행위
●美 연방대법원 “사적 이익 위한 불법 거래”
●권력형 성폭력엔 어물쩍, 대신 선심성 공약
●‘지역 표심’에 가덕도 특별법 동조 野 의원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3월 25일 서울 장한평역 사거리에 서울시장 출마 후보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뉴스1]
“서울시장이 되면 1호 결재로 서울시민 모두에게 1인당 10만 원씩 블록체인 기반의 KS서울디지털화폐로 지급되는 보편적 재난지원 계획에 서명하겠다.”

3월 19일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발언이다.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자평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 무슨 ‘막걸리 고무신 선거’를 연상케 하는 소리일까.

이 발언은 박영선 혼자만의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여당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 또한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그는 지난 3월 18KBS 라디오 ‘주진우 라이브’와 유튜브 채널 ‘이동형 TV’에 출연해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했다. ‘시민들에게 10만원씩 나눠 주겠다’는 것이었다. 축제 비용, 전시행정 비용, 불용액 등을 모으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청와대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 4차 재난지원금이 지급되지도 않았는데 5차 재난지원금을 논의한다. 차등 지급으로 준비 중인 4차 재난지원금과 달리 5차 재난지원금은 전 국민 지급도 가능하다고 운을 띄우고 있다. 구체적으로 서울·부산시장 재·보궐선거(재보선)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맥락상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사람은 없다.

더 놀라운 건 민주당 측에서 ‘10만원 매표 발언’에 대해 어떤 해명이나 변명조차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일종의 ‘여당 프리미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정치가 밥 먹여준다’ 같은 상투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매표 행위에 나서는 게 온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투표 거래에 반대하는 논증 3가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가덕신공항특위 위원장이 3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가덕도신공항 기술자문단 공청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투표 거래가 잘못된 행위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정치인은 특히 그렇다. 정치인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선거법과 국회법만은 통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매표 행위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게 돼있는 공직선거법 230조를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불법이니까 나쁘다’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표를 사고파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왜’ 나쁜가? 그렇게 본질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답을 찾는 일이 생각처럼 간단치만은 않다. 이 또한 나름 중요한 법적·정치적·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캘리포니아대 어바인 캠퍼스 로스쿨 교수인 리처드 하센(Richard L. Hasen)은 2000년 발표한 논문 ‘투표 거래(Vote Buying)’에서 그 문제를 본격 탐구했다. 그에 따르면 투표 거래를 반대하는 논증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불공정성. 투표 거래가 허용된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에게 표를 팔아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부자들은 자신들에게 더욱 유리하게 제도를 바꾸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져서 계속 표를 팔아야 한다.

둘째, 비효율성. 남의 표를 사서 투표권을 더 행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더 추구하기 위해 그러한 행동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가시킨다는 관점에서 볼 때, 누군가 남의 투표권을 구입하여 대신 행사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효용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표를 산 사람은 그렇게 얻은 정치적 권력을 이용해 보조금 등 사회 공공 자원을 오직 자신에게만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양도불가능성. 투표권이 애초에 양도할 수도 매매할 수도 없는 권리라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투표는 금전적으로 환산 가능한 개인적 이득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투표의 개념 정의 자체가 이미 ‘공적 행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투표권을 매매하는 순간 그것은 공적 행위에서 벗나버린다. 누군가가 투표권을 사고파는 것은 ‘투표’가 아닌 ‘투표의 왜곡’일 뿐이다.

가난한 이의 자유가 줄어든다!
4·7 부산시장 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3월 25일 부산 해운대구 한 아파트 정문에서 인근 주민센터 관계자들이 부산시장 보궐선거 선거벽보를 부착하고 있다. [뉴스1]
하센이 논문에서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세 가지 논증은 마치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에 대한 서양 철학의 관점을 자유주의, 공리주의, 공동체주의로 분류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자유주의자에게는 자신의 자유를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 타인의 자유 역시 존중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가난한 이가 부자에게 투표권을 판매하는 일이 허용된다면 가난한 이의 자유는 한없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매표 행위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공리주의자에게 정의란 사회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투표 매매를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여기 다른 사람의 투표권을 굳이 돈을 줘서 구입하는 사람이 있다. 설령 처음에는 선한 의도로 남의 투표권을 샀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결국 ‘초심’을 잃고 공공의 이익을 해치며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고 만다. 공리주의의 눈으로 보더라도 매표는 용납될 수 행위다.

공동체주의자는 정의와 도덕을 공동체의 관점에서 판단한다. 그런 면에서 투표권의 양도불가능성을 이유로 투표 거래를 금지하는 입장은 공동체주의와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투표 행위 자체가 공동체의 의사 결정일 뿐 개인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정의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동체주의를 전제하고 있으니 말이다.

쉽지 않은 내용이므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투표 거래는 나쁘다. 왜 나쁜가? 첫째,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더욱 가난하고 힘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투표 거래는 평등을 해친다. 둘째, 부유한 사람이 권력을 동원해 사회 전체의 부를 갉아먹으며 자신의 주머니를 챙기게 되므로 나쁘다. 투표 거래는 풍요를 해친다. 셋째, 투표라는 행위가 갖고 있는 본질적 속성, 집단의 의사를 결정하는 숭고한 의식적 측면을 망가뜨린다. 투표 거래는 공동체를 해친다. 이렇듯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투표 거래는 허용될 수 없는 행위다.

역사적으로 투표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 투표 거래는 늘 존재해왔다. 앞으로도 완벽하게 근절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발 이번만은 ‘XX당’을 찍어달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회유하고 읍소하고 다니는 그 모든 행위가 넓은 의미의 투표 거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좀 더 범위를 넓혀보자. 어떤 공약이나 복지 혜택 등을 내거는 것 역시 투표 거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대단히 까다로운 문제다. 가령 어떤 후보자가 누구에게 혜택이 될지 뻔히 짐작 가능한 법안이나 정책을 내세우면서 당선된다면 그것은 매표 행위라고 보아야 할까?

유의미한 약속과 매표 행위 사이
1982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브라운 대 해틀래지(Brown v. Hartlage) 사건에서 그 문제를 다뤘다. 판결문을 작성한 브래넌 대법관은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에 이익을 안겨주겠노라는 공약을 투표 거래와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고 봤다.

투표 거래가 원칙적으로 금지돼야 할 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연방대법원은 “투표 거래는 사적 이익을 위한 불법 거래의 속성을 본질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라며, 일단 그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공약을 내걸고 지키는 행위 자체를 법원에서 선제적으로 판단하고 금지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하센의 논문에 인용된 판결문을 좀 더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후보자가 선거 운동 과정에서 공약을 내거는 행위에 대한 주 정부의 제한에 헌법적 한계가 있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분명하다. 공약은 합법적인 것이라는 보편적 인식이 존재한다. 공약은 실로 ‘민주주의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자유로운 정치적 토론을 끝까지 진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유지하는 것은 적법한 수단에 의해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고 정부를 교체할 수 있도록 하는 … 우리 헌법 체계의 근본적 원칙 중 하나다.’”

선거가 정상적으로 치러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내용이 아무리 황당해도 대중에 공공연히 발표된 공약이라면 상대 후보자에 의해 검증, 비판받을 수 있다. 따라서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에 명백히 유리한 공약을 내세운다는 이유만으로 매표 행위로 판단할 수는 없다. 법원·경찰 등이 먼저 나서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면 선거가 안 된다.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 경찰 등 공권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 현재 권력을 지닌 자가 훨씬 유리해진다는 뜻도 된다.

물론 모든 공약이 정당한 선거 행위이며 투표 거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투표 거래라고 볼 수밖에 없는 공약이 엄연히 존재한다. 불평등을 가속화하고, 사회 전체의 부와 풍요를 해치며,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그런 공약을 정치인들은 오직 당선을 위해 내걸곤 한다.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명백한 불법선거, 금권선거는 법의 힘으로 차단해야 마땅하다. 막걸리 나눠주고 고무신 돌리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선거 후보자나 정당이 제시하는 공약을 두고 매표 행위 여부에 대해 일일이 판단하고 단속하기 시작하면 선거 제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공약의 탈을 쓴 투표 거래를 차단하는 것은 불법과 합법의 회색지대에 있다. 결국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얼토당토않은 선심성 공약을 내세우며 표를 구걸하는 이들을 상대방 후보자나 정당이 비판해야 한다. 유권자인 시민들은 그런 정치적 토론에 귀를 기울이고 현명하게 판단하며 아닌 건 아니라고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공약이 유의미한 약속이 될지 아니면 평등과 풍요, 공동체를 해치는 매표 행위가 될지, 그 최종 결정권은 시민의 손에 쥐어져 있다.

Ifthen …’ 조건문 형식 현금 지원?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실망과 우려가 겹친다. 부산시장 재보선은 오거돈 전 시장이 성추행으로 사퇴하면서 치러지고 있다. 서울시장 재보선은 박원순 전 시장이 성폭력을 저지른 후 경찰 조사도 해명도 없이 목숨을 끊어버린 탓에 치러지고 있다. 최근 일각에서 박원순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으나, 경찰 수사 및 국가인권위원회의 자료 등을 놓고 볼 때 박 전 시장이 파렴치한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민주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대표 시절 만들었던 당헌대로 재보선에 후보를 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기어이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권력형 성폭력에 대해 진지한 반성의 뜻을 밝히고, 또 권력을 쥐더라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의식적 변화를 논해야 마땅했다. 그것이 ‘제도화된 공론장’으로 선거를 올바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민주당은 정 반대로 가고 있다. 자신들에게 원죄가 있는 권력형 성폭력의 문제는 은근슬쩍 넘어간다. 대신 점점 더 나빠지는 여론을 수습하기 위해 선심성 공약만 남발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면서까지 힘을 실어준, 심지어 국회에서 졸속으로 특별법을 통과시킨 가덕도 신공항이 대표적인 사례다.

투표 거래를 비판하는 세 가지 논증에 따라 가덕도 신공항을 검토해볼 수 있겠다. 가덕도 신공항은 10조원 이상의 정부 예산을 투입해 짓는 거대 공항이다. 그러나 경북 지역은 공약의 수혜지에서 벗어난다. 평등의 차원에서 의문부호가 붙는다. 이미 해외 연구 용역을 통해 확인됐다시피 가덕도를 매립해 공항을 짓는 것은 예산의 효율적 활용과 거리가 멀다.

정부·여당은 선거를 앞두고 가덕도 신공항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면제하고 사전타당성 조사를 간소화하는 내용이 담긴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대한민국 공동체의 유대감과 판단의 기준마저 허물어뜨리는 일이다. 이 또한 선거 공약이니만큼 단순한 불법 매표 행위와 동일시할 수야 없다. 신공항 건설을 추진하는 이들, 혹은 신공항 건설에 찬성하는 지역 주민들에게도 나름의 논리와 근거가 있을 테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좋은 공약’의 사례로 기억될 수는 없다.

“서울시민 모두에게 1인당 10만 원씩 블록체인 기반의 KS서울디지털화폐로 지급되는 보편적 재난지원 계획에 서명하겠다”는 박영선의 발언은 어떨까. 코로나19로 인해 타격을 입은 계층을 지원한다는 대의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경우라면 정확한 판단 근거와 목적에 따라 합리적으로 예산이 집행돼야 한다. 적어도 박영선이라는 후보자가 서울시장에 당선되는지 여부가 재정 정책의 실행 여부와 연결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서울시장이 되면 10만원씩 주겠다’고, ‘Ifthen …’의 조건문 형식으로 현금 지원을 약속하는 행위를 투표 거래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야당의 헛발질
문제는 결국 정치다. ‘어차피 선거용 공약이니까’, ‘내 지역구의 표심을 지켜야 하니까’라는 식의 핑계를 대며 민주당이 가덕도 특별법을 밀어붙일 때 동참했던 야당 의원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이 코로나 위로금이나 재난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여야가 앞 다퉈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는 양상까지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박영선과 이해찬의 ‘투표 거래성 발언’이 중요한 토론 거리로 떠오르는 모양새도 아니다. 야당이 야당다운 기능을 못하다보니 여당 정치인들이 선거법 위반 가능성을 무릅써가며 돈을 뿌리고 표를 사려 드는 것이다.

민주당은 코로나를 빌미로 금권정치의 문을 열어젖히고 있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유권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저 눈치만 보고 있는 듯하다. 정치가 이런 식이니 선거에 나오는 공약과 저질스러운 투표 거래의 구분마저 날로 희미해지고 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국민 스스로의 선택뿐이다. 나와 이웃의 자유를 지키고, 사회 전체의 부와 풍요를 극대화하며, 공동체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함양하기 위해 누구에게 투표해야 할까. 어떤 정당과 정치세력을 응징해야 할까. 최종적인 판단은 온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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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1

이낙연發 ‘가짜뉴스’와의 전쟁, 그렇다면 김어준은?

 [노정태의 뷰파인더㉒] 세계 20위권 후진국으로의 퇴행

● ‘가짜뉴스 처벌법’ 통과시킨 17개국 명단
● 與 윤영찬 ‘최대 3배 징벌적 손해배상’ 법안
● 러시아, 말레이시아 관련 규제 연상
● 말레이시아, 與 선거 패배 후 법 폐지
● 독일 최악의 수 ‘네트워크 집행법’
● 韓, 전기통신사업법 등 있어 별도 법 불필요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월 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표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악의적 보도와 가짜뉴스는 사회의 혼란과 불신을 확산시키는 반사회적 범죄”라고 말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푸에르토리코, 볼리비아, 브라질, 알제리, 보스니아, 헝가리, 루마니아, 요르단,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UAE),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러시아. 2020년 3월부터 10월까지 ‘가짜뉴스 처벌법’을 통과시킨 17개국의 명단이다. IPI(국제언론인협회·International Press Institute)의 자료에 기반해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2월 13일 보도한 내용이다. 

2007년 집권 이후 독재를 하고 있으며, 올해 예정된 총선은 야당 없이 치르려 하는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정권 역시 202010월 이후 비슷한 취지의 ‘가짜뉴스 처벌법’을 제정한 바 있다. 정부가 ‘쿠데타 세력’이나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인물은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게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기도 하다. ‘가짜뉴스 처벌법’은 독재를 지속하기 위한 이중 삼중의 안전판인 셈이다. 

형식적인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는 홍콩 역시 ‘가짜뉴스 처벌법’ 제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가짜 정보를 제작 전파하는 인터넷 정보서비스업체를 대상으로 한화 약 1700만 원에서 1억7000만 원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정보 유포에 책임이 있는 개인 역시 수백에서 수천만 원에 달하는 벌금의 대상으로 삼는 법이다. 

가짜뉴스를 잡겠다며 독재의 칼을 뽑아드는 권력. 불행히도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월 3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악의적 보도와 가짜뉴스는 사회의 혼란과 불신을 확산시키는 반사회적 범죄”라며 2월 임시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처리하겠노라고 천명했다.

최대 3배의 징벌적 손해배상
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언론사가 정정보도할 경우 최초 보도와 같은 시간, 분량, 크기로 보도하도록 강제하는 법안(김영호 대표발의). 인터넷 뉴스 내용이 진실하지 않거나 사생활을 침해한다면 피해자가 기사 차단을 청구할 수 있는 법안(신현영 대표발의). 인터넷 이용자가 고의로 거짓, 불법 정보를 생산하거나 유통해서 손해를 입히면 최대 3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법안(윤영찬 대표발의). 포털 댓글로 중대한 침해를 받은 피해자가 해당 게시판 운영을 중단하도록 요청할 수 있게 하는 법안(양기대 대표발의). 7년 이하의 징역에 해당하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 가중처벌을 방송에도 적용하는 법안(이원욱 대표발의).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윤영찬 의원이 대표 발의한 최대 3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여당은 이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상을 더 넓히고자 한다. 인터넷 이용자를 넘어 언론 전체에 확대 적용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 법을 2월 중 처리하겠다는 게 대한민국 여당의 당론이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민주당에서 내놓은 ‘가짜뉴스 처벌법’은 사실 그리 나쁘지 않다.” “가짜뉴스가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걸 바로잡기 위한 조치라면 일종의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런 반론은 엉터리다. 앞서 언급한 2020년의 ‘가짜뉴스 처벌법’ 외에도, 러시아 의회는 2019년 3월 별도의 ‘인터넷 규제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 내용을 뜯어보면 민주당이 추진하는 ‘가짜뉴스 처벌법’과 다를 게 없다.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공공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가짜정보”를 유통할 경우 최대 40만 루블, 한화로 약 6000만 원의 벌금을 물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러시아 ‘인터넷 규제법’의 근간을 이룬다. 또 당국이 부정확한 정보를 삭제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 삭제하지 않을 경우 해당 웹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정부에 주어진다. ‘윤영찬 법안’과 ‘양기대 법안’을 섞어놓은 모양새다. 

말레이시아에도 비슷한 법이 있었다. 2018년 4월, 총선을 한 달 앞둔 미묘한 시점에 시행된 말레이시아의 ‘가짜뉴스 처벌법’에 따르면, 가짜뉴스를 유포하거나 작성할 경우 징역 6년 혹은 한화 약 1억3500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당시 말레이시아 정계는 국영 투자기업 1MDB와 관련된 비리 문제로 떠들썩한 상황이었다. 나집 라작 전 총리와 측근들이 그 회사를 통해 45억 달러(한화 약 4조9840억 원)를 받아 챙겼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총선을 한 달 앞둔 시점에 ‘가짜뉴스 처벌법’을 만들고, 총리의 비리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확인해주지 않은 뉴스는 가짜뉴스”라고 엄포했다. 

이렇듯 ‘가짜뉴스 처벌법’을 만들고 실행하는 국가 중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주주의 선진국’은 단 한 곳도 없다. 민주당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대체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일까. 요즘 일각에서는 ‘우리도 이제 눈 떠보니 선진국에 살게 되었다’는 식의 담론이 유행하는데, 실상은 ‘눈 떠보니 도로 독재국가에 살게 되었다’로 귀결되고 있는 건 아닐까.

‘미스터 가짜뉴스’의 시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부인 멜라니아 여사가 1월 20일 미국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플로리다주로 떠나는 머린원에 탑승하기 전 마지막 환송행사를 열었다. [AP 뉴시스]
전 세계적으로 ‘가짜뉴스 처벌법’이라는 이름의 반민주적 언론 탄압 법안이 기승을 부리게 된 이유를 살펴보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시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에 대한 가짜뉴스 확산을 막겠다는 명분을 들이대지 않는 독재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미 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막강하기 짝이 없는 감염병 예방법을 갖고 있다. 가짜뉴스와 관련한 유언비어 처벌만을 명분으로 새로운 법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영장 없이 국민의 동선(動線)을 추적하고 신용카드 및 온갖 개인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로나19보다 조금 더 이른 시점까지 눈길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이 집권하고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2018년부터 ‘가짜뉴스와의 전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전임 이해찬 대표 시절부터 민주당은 허위조작정보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각종 법안을 준비해왔다. 당내에 ‘가짜뉴스 신고센터’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언론의 감시 기능을 마비시킨다는 비판 앞에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가짜뉴스라는 말을 유행시킨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01611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그 남자, 전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내놓는 언론을 상대로 가짜뉴스라는 손가락질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트럼프 자신이야말로 가짜뉴스의 가장 큰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코로나19와 관련된 것만 몇 개 적어 봐도 그렇다. 그는 처음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 자체가 가짜뉴스라고 했다가, 미국까지 퍼져오자 마스크를 쓰면 옮지 않는다는 말이 가짜뉴스라고 하더니,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피해가 발생하자 말라리아 치료제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이 특효약이라고 떠벌이다가, 심지어 자외선을 쬐면서 소독제를 인체에 주사하면 코로나가 낫는다는 소리까지 했던 인물이다. 가짜뉴스를 의인화하면 도널드 트럼프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문제는 ‘미스터 가짜뉴스’가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가짜뉴스라는 단어 자체가 일종의 글로벌 유행어처럼 변해버렸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마찬가지였다. 언론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신성한 가치를 무시하는 인물이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앉는 그 순간부터, 전 세계의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퇴행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트럼프에 뺨 맞고 트위터에 화풀이’
그 와중에 독일이 최악의 수를 두었다. 2018년 1월 1일, 독일 연방 의회는 ‘소셜 네트워크에서의 법집행 개선을 위한 법’, 일명 ‘네트워크 집행법(NetzDG)’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위법 소지가 있는 게시물이 공개될 경우, 소셜네트워크 사업자 등에게 그 게시물을 방치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부과하는 게 골자다. 

독일의 ‘네트워크 집행법’은 이후 제정된 수많은 ‘가짜뉴스 금지법’의 모델이 됐다. ‘그것 봐라.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선진국 중 하나인 독일에서도 인터넷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한 가짜뉴스의 범람을 경계하고 법으로 처벌한다. 그러니 우리도 비슷한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독재자들에게 좋은 핑계를 제공해준 셈이다. 

‘네트워크 집행법’은 200만 명 이상의 이용자를 보유한 SNS가 대상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훼손, 테러 선동, 범죄 단체 모집, 종교 비방, 아동 포르노 등 21개 위법행위와 관련된 게시물에 대해 신고가 들어올 경우 SNS 사업자가 게시물을 검토하고 당사자에게 신고 사실을 통보하며 삭제 등의 처리를 하도록 하는 법이다. 만약 그러한 처리 시스템을 갖추지 않을 경우 최대 5000만 유로(한화 650억 원 상당)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이미 말했듯 이 법안은 당시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독일 내에서도 졸속 입법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법이 제정될 수 있었던 건, 트위터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혐오발언을 쏟아내던 트럼프에게 독일 뿐 아니라 전 세계가 진저리를 치던 분위기의 영향이 컸다. 독일 내부의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극우 세력 및 정당이 급부상하고 있었기에 뭔가 ‘특별한 수’를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들어가 보자. 이런 법이 만들어질 수 있던 배경에는 ‘트럼프에게 뺨 맞고 트위터에 화풀이하는’ 심리가 작동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2017년 4월 ‘경향신문’에 기고한 ‘독일 ‘가짜뉴스 처벌법’ 바로알기’라는 칼럼에서 지적하다시피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독일인들이 쓰는 주요 SNS는 모두 미국 회사였다. “독일 법원이 ‘범죄적 내용’을 삭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500만유로의 벌금을 물리더라도 고통 받을 독일 사업자는 거의 없”었다. 

이유가 뭐가 됐건 독일은 선을 넘었다. 그러자 ‘독일이 하니까 우리도 괜찮다’며 세계의 온갖 독재 국가들이 ‘가짜뉴스 처벌법’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자칭 ‘보수 유튜버’와 김어준 사이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활동 시절인 지난 20111222일 당시 김용민, 주진우, 김어준, 정봉주 씨(왼쪽부터).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불행히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수준 높은 민주국가라는 대한민국 역시 그런 분위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초고속인터넷을 빨리 도입한 IT(정보기술) 선진국이다. 이에 전기통신사업법 등 관련 법제를 이미 다 구비해두었고, 독일의 ‘네트워크 집행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법을 만들 필요조차 없었지만,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칭 ‘보수 유튜버’라는 사람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을 때마다 화가 나고 짜증이 치민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을 처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한민국이 ‘가짜뉴스 처벌법’ 만들기 경쟁에서 세계 20위권의 후진국으로 퇴행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다. 이미 우리에게는 그런 이들을 제재할 수 있는 다양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충분하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체 왜 자칭 보수 유튜버들이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걸까? 가짜뉴스를 팔아서 한 몫 벌고 심지어 여당 정치인들이 고개를 조아리는 권력자가 된 성공 사례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방송인 김어준이 만들었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를 떠올려보자. 이명박의 혼외자식설부터 해서, 입에 담기도 민망한 온갖 혐오발언과 인신공격을 퍼부으면서도 “이건 유머다, 소설이다”라는 식으로 면피해왔던 그들의 행태는 어떠했던가. 그것은 오늘날 세계 각국의 극우 유튜버나 SNS 선동꾼들이 하는 짓과 다를 바 없었다. 

김어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민주당이 선거에서 패배하자 부정개표설을 퍼뜨리고, 그런 내용을 담아 영화를 만들겠다며 후원금을 받았다. 세월호가 침몰하자 그것을 어떤 어마어마한 음모에 의한 ‘사건’으로 포장하면서 유족과 대중의 마음을 들쑤셨다. 자신만이 밝힐 수 있는 어떤 진실이 있는 것처럼 꾸며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돈을 긁어모았다. 가짜뉴스를 만들고 유포하는 것을 몇 년에 걸쳐 직업으로 삼아왔던 셈이다. 

그런 짓을 하던 김어준이 합당한 대가를 치르기는커녕 정권이 바뀌자 승승장구하고 있다. 대체 이 나라에서 무슨 가짜뉴스를 처벌한다는 것인가? 선거를 앞두고 ‘가짜뉴스 처벌법’을 통과시키겠다는 이낙연과 민주당은 대한민국을 얼마나 망가뜨려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말레이시아의 경이로운 상식
앞서 ‘가짜뉴스 처벌법’을 만든 온갖 나라의 사례 중 말레이시아는 모범적인 경우로 기억되어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부랴부랴 법을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자 라작 총리와 측근들이 1MDB를 통해 저지른 비리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놀랍게도, 혹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 권력이 막으려던 ‘가짜뉴스’야말로 진실을 담고 있었다. 여당이 된 야당은 라작 총리와 측근들에 대한 수사 및 처벌을 단행하면서 동시에 ‘가짜뉴스 금지법’을 폐지했다. 그런 법은 언제든 권력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 자신들의 선의를 믿으라고 국민에게 강요하는 대신, 올바른 제도를 만드는 쪽을 택한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고 합리적이지만 때로는 상식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결국 유권자가 진실을 택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 가짜뉴스를 처벌한다는 명분하에 진실을 찍어 누르는 세상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짜뉴스로 이득을 보는 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선례를 만들어 나감으로써, 현존하는 법과 제도를 통해 가짜뉴스의 폐단을 최소화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왕도를 택할 것인가. 우리에게도 아직 선택의 기회는 남아 있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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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조국·추미애 홀린 ‘브라질판 강남좌파’ 다큐

 [노정태의 뷰파인더㉖] 넷플릭스 ‘위기의 민주주의’ 아전인수 격 해석한 여권

● 윤석열 겨냥한 듯 보이는 조국의 소감문
● 골자는 ‘브라질 기득권의 룰라·지우마 탄압’
● 단순명료한 선악 구도에 할리우드도 열광
● 룰라·노동당에 편향적 작품이라 비판 소지
● 실제는 중도가 단일 대오로 군부 권력 뺏어
● 反美 브라질 상류층의 내로남불 서사
● 한국 586 세대와 같은 일종의 ‘역사왜곡’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이 3월 10일(현지시간) 최대 도시 상파울루의 금속노조 본부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이틀 전 부패 유죄 판결에 대한 대법원의 무효 결정을 얻어내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다. 그가 내년 대선에 출마해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과 맞붙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상파울루=AP 뉴시스]
지난 3월 3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페이스북에 짤막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The Edge of Democracy)’에 대한 소감문이었다. 그리 길지 않을 뿐 아니라 왜곡해 비판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문장 전체를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일전 이 공간에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The Edge of Democracy)’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브라질에서 룰라 대통령이 어떻게 구속되는지, 후임자 지우마 대통령이 어떻게 탄핵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세르지우 모루 연방 판사(한국의 검사와 유사한 역할)의 “세차(洗車) 작전” 수사였다. 이 수사와 기소로 룰라-지우마 두 대통령이 이끌던 ‘노동당’(PT) 정부가 무너지고 난 후 극우파 정치인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집권을 한다. 

그런데 모루는 보오소나루 대통령에 의하여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이후 모루는 보우소나루 대통령과의 불화로 사임하였고, 현재는 2022년 대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

文이 보우소나루?
3월 3일이라는 시점을 놓고 보면 이 글로 ‘저격’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문재인 정권의 적폐청산 수사를 진두지휘해 검찰총장까지 수직상승했지만, 문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퇴하고 정계 진출 여지를 남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하면 이상하다. 윤석열을 모루에 비유한다면, 그가 지휘한 수사와 공판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룰라 또는 지우마가 될 테니 말이다. 윤석열에게 ‘보은 인사’를 했지만 갈등을 빚은 문 대통령은 그렇다면 한국의 보우소나루라는 말인가? 

잘못된 인용이 나온 게 조국 혼자만의 탓은 아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역시 ‘룰라는 우리 편, 모루는 저쪽 편’이라는 식의 관점으로 ‘위기의 민주주의’를 보고 페이스북에 감상문을 게재한 바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도 비슷한 관점으로 작품을 봤다. 지난해 1211일 김어준의 팟캐스트 ‘다스뵈이다’ 143회가 제공한 ‘연성 쿠데타’ 논리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을 모루에 빗대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요 도끼로 제 발등 찍는 꼴이다. 그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이제 좀 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대체 브라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위기의 민주주의’는 그 사건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여 전달하고 있을까. 우리가 진짜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놀라우리만치 부실한 서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The Edge of Democracy)’. [넷플릭스 홈페이지]
‘위기의 민주주의’는 2시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영화지만 그 내용은 간단하다. 조 전 장관이 요약한 그대로다. 선한 의지를 가진 불굴의 노동운동가 룰라와 그 정치적 후계자인 지우마를 브라질의 부패한 기득권층이 정치적으로 암살했다는 것이다. 

브라질 정치의 구조상 부정부패는 늘 있어왔고 단번에 뿌리 뽑히지 않았다. 빈곤층과 유색인종으로 대표되는 브라질 민중을 위해 노동당 정부는 대대적인 복지 정책을 추구했다. 은행과 산업 자본가들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룰라는 워낙 인기가 많았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했지만 지우마는 공략 가능한 대상이었다. 고문을 이겨낸 민주 투사이며 경제학자였지만 정치적 스킨십이 부족했고, 입장이 다르면 주변인까지 적으로 돌릴 만큼 정치적으로 서툴렀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기득권은 지우마가 직접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몇몇 회계 처리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사소한 빌미를 잡아 탄핵했다. 브라질 국회의 과반수가 이런 저런 비리에 얽혀 있음에도 적반하장 격으로 탄핵이 벌어졌다. 

이 단순 명료한 선악 구도는 미국을 통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뉴욕타임스’ ‘뉴요커’ ‘가디언’ 등 영향력 있는 매체와 할리우드의 스타 제작자, 감독, 배우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위기의 민주주의’는 2020년 오스카상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분야 후보로 노미네이트되는 영광을 누리기까지 했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필자도 ‘위기의 민주주의’를 봤다. 기본적으로 촬영이 잘 된 작품이다. 브라질 행정수도인 브라질리아는 현대 건축의 아이콘인 르 코르뷔지에의 아이디어에 기반해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모든 길이 곧고 길쭉하며 건물은 크고 시원시원하게 깔끔한 선으로 이뤄져 있다. 다큐멘터리는 그 전경을 다양한 각도에 담아 브라질 정치와 현대사를 훑어나간다. 눈 호강은 확실히 시켜준다. 

하지만 내용은 놀라우리만치 부실하다. 너무도 일방적이고 편향적이다. 노동당 정권이 왜 몰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감독이자 제작자이며 내레이터인 페트라 코스타 자신부터 브라질 현대사의 모순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자기 성찰 대신 손쉽게 지목할 수 있는 적을 비난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그 모든 맥락을 놓고 보면 ‘위기의 민주주의’에 쏟아진 할리우드의 찬사마저도 문득 불편하게 느껴진다. 

우선 브라질 정치를 살펴보자. 브라질은 민주국가였지만 1964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긴 암흑기를 겪었다. 1984년 거세진 민주화 요구에 군부가 한 발 물러났다. 1985년 민정이양 총선이 치러진 것이다. 하지만 군부는 대통령 직선제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기로 결정했다. 자신들의 남은 영향력을 발휘해 대통령 자리는 지킬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자본주의=군부독재=언론=기득권’ 단순 도식
2020년 2월 3일 추미애 당시 법무장관이 경기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법무검찰개혁위원회와 상견례 겸 간담회를 하고 있다. 뒤로 조국 전 장관 등 역대 장관들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보인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이 제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브라질민주운동당은 중도 성향의 정치 세력이었다. 룰라가 만들고 이끌던 노동당(PT)은 제2당으로 급성장했다. 중도와 좌파가 1당과 2당이 돼버린 상황에서 군부의 정당인 국가혁신동맹(ARENA)은 맥을 추지 못했다. 1985년 군부 출신의 마지막 대통령 주앙 피게이레두가 사임하고 새로운 선거가 치러졌을 때, 간선제였음에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것은 브라질민주운동당의 탄크레두 네베스였다. 하지만 네베스는 선거 직후 의식을 잃었고 부통령이던 조제 사르네이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후 브라질에서는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군정종식 및 민정이양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직선제 개헌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위기의 민주주의’가 룰라 및 노동당에 편향적인 작품이라고 비판받을 소지가 여기에 있다. 브라질 정치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오직 ‘위기의 민주주의’만 본 대다수 해외 시청자들은 브라질 민주화 운동을 룰라와 노동당, 공산주의 세력이 다 한 것처럼 오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공산주의와 거리를 둔 중도세력이 단일 대오를 형성해 군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온 것이다. 

그런 맥락은 의도적으로 생략됐다. 페트라 코스타는 2002년 룰라가 대선에 당선되기까지 연거푸 고배를 마시는 모습을 방송 인터뷰로 보여준다. 룰라가 강경한 반(反)시장주의 태도를 보일 때는 졌지만, 시장의 힘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겼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그는 ‘시장’을 곧 ‘기득권’으로, 또한 ‘군부’와 거의 동일한 무엇인가처럼 다룬다. ‘자본주의=군부독재=언론=기득권’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유일한 민주화 운동가인 룰라가 민정이양 후에도 살아남은 군부 세력과의 선거에서, 시장과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에 밀려난 양상처럼 보인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룰라와 대선에서 맞붙은 것도, 그리고 룰라를 계속해서 이겨온 것도, 마찬가지로 ‘민주 정당’이었다. 하지만 ‘위기의 민주주의’에서 브라질의 중도 정치 세력은 룰라와 연정을 했다가 뒤통수를 친 배신자쯤으로만 묘사될 뿐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마치 한국의 ‘강남좌파’ 혹은 ‘586 세대’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1987년 민주화에 586 세대가 아무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크지 않았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로 대표되는 양김 세력이 건재했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중국 천안문 사태와 같은 비극을 피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다. 

한국의 586 세대는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민주화를 이룬 것처럼 역사를 해석한다. 또 그런 세계관을 유포한다. 마찬가지로 ‘위기의 민주주의’를 만든 페트라 코스타 역시 룰라와 노동당을 중심에 놓고 일종의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브라만 좌파’의 카메라
브라질의 민주주의는 룰라 혼자 이루어낸 게 아니다. 룰라와 노동당이 다른 정치 세력과 마찬가지로 비리 혐의로 무너진 것은 민정이양 이후 브라질 정치의 고질적인 패턴일 뿐이다.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인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부터가 그랬다. 비리 혐의로 탄핵을 당했다. 군정 종식 이후 자신들이 뽑은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다. 그 소중한 직선제 대통령을 탄핵했다. 브라질은 축구만 잘 하는 게 아니라 탄핵도 잘 하는 나라다. 소수 정당에 워낙 유리한 선거 제도를 갖고 있다 보니 집권 여당이 의회를 장악하기 어려운 제도적 이유 때문이다. 

코스타는 멜루의 탄핵에 대해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침묵을 ‘멜루 탄핵’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여보자. 그렇다면 ‘위기의 민주주의’는 브라질 민주주의가 멜루를 당선시키고 탄핵시킬 때까지만 해도 ‘정상’이었다가, 룰라를 비리 혐의로 수사하고 지우마를 탄핵하자 갑자기 ‘위기’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돼버린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소리다. 브라질 사람 중 특정 계층의 어처구니 없을 만큼 당당한 자기중심적 태도가 이 작품의 바닥에 깔려 있다. 

‘위기의 민주주의’는 노동당 엘리트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브라질판 ‘강남좌파’의 자기중심적인 현대사 해석에 기반하고 있는 작품이다. 노동당으로 대표되는 브라질의 좌파, 그 중에서도 노동당 창당 이후 제도권 정치를 택한 좌파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이 아닌 나머지 모든 세력을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어떤 존재로 표상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립할 수 없는 서사다. 이는 한국 ‘강남좌파’들의 민주화 서사와도 일맥상통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 페트라 코스타는 한국의 강남좌파와는 차원이 다른 대단한 가문 배경과 재산을 갖고 있다. 토마 피케티의 용어를 빌자면 ‘브라만 좌파’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의 어머니는 중산층 집안 출신의 대졸자였다. 할아버지는 행정수도 (비록 건설 단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브라질리아의 기획자 후보로 거론될만한 거대 건축업자였다. 아버지는 미국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보고 감명 받아 미국 유학을 갔던 엘리트였다. 

페트라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과거 필름 영상을 보며 그 가문의 계급적 지위를 느끼는 건 어렵지 않다. 평범한 브라질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리던 1980년대, 부부는 일상적으로 8mm 필름 카메라를 꺼내들고 다양한 영상을 찍고 있던 것이다. 

페트라는 그 계급의 브라질 상류층이 대체로 그렇듯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런던정경대(LSE)에서 학위를 따고 뉴욕 맨해튼에서 영화에 빠져들었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는 국민 대다수가 빈곤층인 가운데 ‘글로벌 리버럴 엘리트’로 살아가는 제3세계 특권층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뉴욕에 사는 미국 리버럴의 시각으로 브라질을 바라보는 작품이다. 브라질 여성이 직접 출연해 포르투갈어로 내레이션을 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모종의 ‘내로남불’ 서사
패트라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노동당을 지지하는 브라질인이다. 당연히 반미주의자다. 하지만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딸을 영국으로 유학 보냈고, 그 딸은 미국에서 가장 생활비가 비싼 맨해튼에 살다가 브라질로 돌아왔다. 그 뒤 브라질의 포퓰리스트 정권을 비난하기 위해 브라질 전체의 민주주의를 도매금으로 비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보우소나루 정권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비난하고 싶은 미국 영화인들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서사적 착취’ 아닌가. 

대부분의 경우 회계 부정과 조작은 더 큰 범죄를 알리는 신호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종이와 디지털 공문서에 적혀 있는 글과 숫자를 믿을 수 없다면 성립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페트라는 지우마에게 씌워진 연방 정부 회계 부정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부정부패란 늘 있어왔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통해 얼버무리고 있지만, ‘위기의 민주주의’가 모종의 ‘내로남불’ 서사라는 사실은 달라질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바라보고 수용하는 국내의 시청자들을 보면 우려는 더 커진다.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입시 부정 및 공문서 위조,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연루된 회계 부정 혐의에 애써 눈을 감는 이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한국의 중산층이나 서민보다 브라질의 ‘브라만 좌파’와 더욱 정서적으로 가깝다는 걸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생계 문제에서 자유로운,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더욱 ‘약자와 빈민을 위한 정치적 변혁’에 매진하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득은 알차게 챙기는 그런 부류에게 ‘위기의 민주주의’는 큰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하다. 

좌파 포퓰리스트 룰라가 사라진 자리를 우파 포퓰리스트 보우소나루가 차지하면서 브라질 민주주의는 진정한 위기에 빠졌다. 룰라 정권 ‘인사이더’ 사이에서 내부 감시와 비판 기능이 마비된 탓이 크다. 바꿔 말하면 ‘내로남불’이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보지 말자고, 혹은 나쁜 영화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을 우리의 ‘민주주의 교과서’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영화의 내용 뿐 아니라 제작 과정 및 소비되는 방식 자체가 거대한 반면교사라고 봐야 한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3-20

나무 심는 영웅인줄 알았는데 뭉개버리네… 이것이 ‘국토 농단’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과
LH사태로 본 ‘공유지의 비극'

1913년, ‘나’는 프로방스 지방을 거쳐 알프스 산맥 속을 걷고 있었다. 라벤더만 듬성듬성 핀 삭막한 황무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수통에는 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 마을 흔적은 있었지만 인적을 찾기 어려웠다. 절망감이 커져갈 즈음 늙은 양치기를 만났다.

아내와 아들을 잃고 세상과 동떨어져 살던 고독한 양치기는 식사 후 테이블에 앉아 도토리를 쏟아놓고 고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 그는 좋은 도토리를 자루째 물에 푹 담갔다가 꺼내 들고 나갔다. 그러고는 지팡이로 땅에 구멍을 뚫고 도토리를 심기 시작했다. 그 늙은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는 홀로 황무지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부피에는 진심으로 그 일에 매진했다. 어린 가지와 잎사귀를 뜯어 먹어 나무가 자라는 데 방해가 되자 양을 팔아버리고 대신 벌을 치기 시작할 정도였다. ‘나’는 종종 그 산을 찾아갔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그 수십 년 동안 부피에는 꿋꿋하게 나무를 심었다. 숲이 자리를 잡자 말라붙었던 개울에 물이 흐르고 곤충과 동물이 찾아오면서 결국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거듭났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1953년 작 <나무를 심은 사람> 내용이다. 캐나다의 애니메이터 프레더릭 백이 1987년 동명 애니메이션으로 오스카상을 받으면서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가 세계 곳곳에서 나무를 심고 황량한 땅을 푸른 숲으로 되돌리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나무를 심은 사람>을 실화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렇지는 않다. 장 지오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치밀하게 잘 짜인 작품이다. 우리는 <나무를 심은 사람>을 통해 오늘날 정치학, 경제학, 사회철학 등의 필수 개념으로 자리 잡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이 1968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 제목이다. 숲, 어장, 혹은 깨끗한 공기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 무한하지는 않은 자원을 떠올려보자. 내가 먼저 물고기를 잡지 않으면 남이 잡는다. 어부들 사이에서 경쟁이 붙는다. 그런데 그 어장을 개인이나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다면 아무나 와서 물고기를 잡을 것이다. 결국 수많은 이가 경쟁적으로 자원을 채취하여 공유지는 망가지고 만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과정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황무지 주민들은 숯을 구워 도시에 팔았다.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경쟁적으로 나무를 베었다. 화자인 ‘나’는 숲의 파괴에 대해 부피에와 대화를 나눈다. “난 그의 땅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주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아마도 공유지거나, 주인이 있는데 그냥 버려두고 있는 땅 같다고 했다.”

부피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땅을 되살리기 위해 인생을 바쳤다. 그 조용한 헌신은 보답을 받았다. 숲이 저절로 살아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자연에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33년 산에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했고, 1935년에는 정부 조사단이 숯 굽는 일을 금지했다. ‘나’는 감탄한다. “숲은 국회의원들에게조차도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천연자원을 보호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과 국가의 관리가 필요하다. 제도경제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한발 더 나아가, 시장 대 국가의 대립 구도를 넘어 공동체의 힘으로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해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시장뿐 아니라 공동체의 역량마저도 국가의 투명한 행정과 공정한 법 집행의 영향을 받는다. 공유지의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건 결국 국가 몫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속 프랑스 정부가 되살아난 숲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한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대한민국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3기 신도시 개발 정보를 입수한 LH 직원 및 고위 공직자들은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허겁지겁 매입했다. 더 많은 보상금을 타내기 위해 값비싼 묘목을 빽빽하게 심었다. 나무가 자라기는커녕 다 말라 죽어버릴 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뽑아버리기 위해 심는 나무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사건을 진정 해결하고 싶다면 검찰 개혁이니 검수완박이니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검찰에 수사권을 돌려주어야 한다.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시행령만 개정하면 당장이라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자체 조사를 운운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 여당은 공허한 특검 논의로 물타기를 시도한다.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정당한 소유권과 올바른 공권력이 필수적이지만, 그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윗물이 탁한데 아랫물이 맑을 수는 없는 법.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 후 사저를 짓기 위해 농지를 구입하면서 ‘영농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 땅에 농사를 짓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정 숙소가 필요하다면 비닐하우스에서 자든가 해야 한다. 교양과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불법이 아니어도 하지 않을 일을 대통령이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을 향해 ‘부동산 적폐 청산’을 외친다. 누가 누구를 적폐로 모는가. 누가 누구를 청산한단 말인가.

<나무를 심은 사람>은 고독한 영웅의 조용한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국민들 역시 그런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선 이후 태양광과 풍력발전소를 늘리겠다며 산을 깎고 나무를 뽑아왔다. 농지 구입을 의아하게 여기는 국민들을 향해 ‘좀스럽다’고 쏘아붙였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뽑는 사람’인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일으킨 알프스의 화전민처럼, 신도시 개발 계획 정보를 입수한 LH 직원 및 정부 고위층은 경쟁적으로 게걸스럽게 땅을 집어삼켰다. 이것은 ‘국토 농단’이다. 알프스의 숲이 저절로 살아나지 않았듯 부패한 권력이 알아서 반성하는 일은 없다. 우리 스스로 정치판의 잡초들을 뽑아내고 건강한 도토리를 심어 나가야 한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