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9

왕중왕, king of kings, 諸王の王

C. S. 루이스의 책에서 봤던가? 기억으로 하는 이야기다. 틀릴 수도 있고, 틀렸다는 걸 지적받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아무튼.

고대 히브리어에는 최상급을 한 단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야훼는 자신을 '왕들의 왕들의 왕'이라고 칭했다. 가장 높은 왕이라는 뜻이었다.

그 아들인 예수 역시 평범한 왕보다 더 높은 왕인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예수는 자신이 '가장 높은 왕'이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왕중왕'이라는 표현을 써야 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그리스어 화자들에게 '왕들의 왕들의 왕' 같은 표현은 생경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어 화자였던 신약성서의 기록자들은 그 표현을 직역했다. 자기 언어의 표현을 쓰지 않고, 어색하게 보이는 그 '왕들의 왕'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겼다.

라틴어를 지나 유럽 각국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시대에 도달했다. 직역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영어는 최상급 표현이 있는 언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정역의 번역자들은 그 표현을 있는 그대로 옮겨서, 'king of kings'라는 어구를 만들어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루이스가 저 말을 한 이유는 따로 있다. 성경의 언어가 번역하기 좋다는 것이다. 도치 병치 등이 주로 사용되어 있다. 특정 언어의 음성과 운율에 좌우되지 않는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루이스는 그렇게 보았다.

그래서 루이스는 '왕중왕'도 참 좋다고 했다(고 기억한다). 실로 간단한 언어적 장치를 통해 이전에 없던 심상을 전달하지 않았느냐고. 그 어구를 직역함으로써 영어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언어가 풍성해지지 않았느냐고.

한국어 성경은 어떨까. '왕들의 왕'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는 '왕중왕'이다.

과연 '왕중왕'이라는 표현에 한국어 성경 번역자들은 어떻게 도달했을까? 중국어로 성경을 옮긴 예수회 신부들이 먼저 만들었을까? 일본어 번역의 영향인가? 기독교의 전파와 도래에서는 한반도가 일본 열도보다 더 빠르지 않았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나는 대답할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검색을 해보니 '諸王の王'이라는, 한국어와는 사뭇 다른 표현이 나온다는 것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 뿐.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직역'은 나쁘고 '의역'은 좋다느니, 반대로 '딱딱한 번역투'에서 벗어나 '생생한 우리 입말'을 되찾자느니, 그런 추상적인 논의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식의 강퍅한 담론이, 특히 민족주의적 정념과 뒤엉키기 시작하면, 안그래도 얕은 우리말의 물줄기는 더욱 쉽게 말라 비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수를 '왕들의 왕'이 아닌 '왕중왕'으로 번역한 덕분에, 우리는 '프로권투 헤비급 왕중왕전'도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는 몸 좋은 남자 배우를 보고 즐기는 여성들이 '역시 맨 중의 맨은 휴 잭맨' 같은 농담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의 국적을 논하며 무언가를 솎아내자는 이야기나 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다.

한국어의 '의'는 일본어의 'の'가 아니다.

1) 일본어에는 'の'라는 조사가 많이 쓰인다.
2) 일본어의 조사 'の'는 한국어의 '의'와 같다.
3) 한국어에서 '의'의 사용은 모두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3-1) 일본어로부터 벗어난 한국어 사용을 위해 '의'를 쓰지 말아야 한다.

1)을 빼면 모두 틀린 말이다. 일본어 조사 'の'는 한국어 '의'로 치환될 수 없다. 한국어의 소유격조사 '의'와 달리 일본어의 'の'는 훨씬 다양한 맥락에서, 심지어 일본인들에게도 설명하라고 시켜보면 잘 설명하지 못하는 복잡한 용법을 지닌다.

3)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3-1)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일본 생각을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 우리말의 '의'는 우리의 '의'다. 일본의 'の'가 아니다. 한국어를 얕잡아보는 자, 폄하하는 자, 한국어를 일본어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 과연 누구일까.

2021-05-02

우리는 윤여정의 수상에 박수칠 자격이 없다

 [노정태의 뷰파인더㉜] 인습적 여성혐오의 ‘생존자’

● 오스카 거머쥔 완벽한 연기자
● 가시밭길의 이름, 가부장제
● ‘악녀 장희빈’, 광고에서 잘리다
● ‘길티 플레져’와 국뽕 스민 호들갑
● 수많은 ‘윤여정들’에게 보내는 박수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배우 윤여정이 4월 2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레드카펫에 올라 웃음 짓고 있다. [AP 뉴시스]
온 나라가 윤여정 열풍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오스카상 수상이라는 경사가 벌어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지인처럼 매끄러운 발음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또박또박 전달하는 ‘윤여정식 영어’도 화제다. 덕분에 적잖은 사람이 ‘영어 울렁증’에서 벗어나 힐링을 맛보고 있다. 글렌 클로즈 같은 대배우와 맞붙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한국의 ‘할머니’ 역할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았으니 이런 쾌거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반응들은 어딘가 불편하다. 배우 윤여정의 수상을 축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지금 쏟아지는 요란한 찬사가 애써 가리고 덮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배우로서 오래도록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왔지만 그가 ‘꽃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그는 한 사람의 배우이자 여성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통과했다. 가시밭길의 이름은 대한민국 가부장제와 보수적 성역할, 그리고 여성혐오였다. 윤여정은 설령 오스카를 받지 못했더라도, ‘유별난 여자’를 향한 우리 사회의 공격성을 온전히 받아내고 극복했다는 것만으로 박수 받아 마땅한 승리자다.

‘악녀 장희빈’과 이유 없는 적개심
윤여정은 대학교 1학년이던 1966년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해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김기영 감독의 1971년 작 ‘화녀’의 주연을 맡아 농염하면서도 강렬한 연기를 펼치며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46년생 윤여정은 고작 스물다섯 나이에 한국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윤여정은 배역에 대한 이해, 표현력, 순발력 등 모든 분야에서 빠질 데 없는 완벽한 연기자이지만, 그간 맡아온 주요 역할은 무난한 ‘호감형’이 아니었다. 대체로 ‘연기파’에게 어울리는 무언가로 간주되는 역할, 많은 경우 악역이었다.

‘화녀’에서 윤여정은 작곡가 동식의 집에 하녀, 즉 식모로 들어가 겁탈을 당하고 동식의 아내에 의해 강제로 유산을 당한 후 복수극을 펼친다. TV에서의 히트작 ‘장희빈’ 또한 마찬가지다. 장희빈이 어떤 캐릭터인지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악녀 장희빈’의 전범을 만든 사람이 바로 윤여정이다.

청춘스타로 잘 나가던 윤여정은 갑자기 미움의 대상이 됐다. 당시 윤여정은 청량음료 오란씨의 광고 모델이었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포스터가 있었는데, 눈에 구멍이 뚫리는 식의 ‘테러’가 자행됐다. 급기야 윤여정은 광고 모델에서 잘렸다. 본인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사람들이 방송국으로 쳐들어왔고 문방구 주인은 물건 같은 것을 던지기도 했단다.

이 이야기를 과연 ‘뭘 몰랐던, 순박했던 시절’의 추억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물론 윤여정은 그런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 것과, 우리가 ‘정말 괜찮은 일이었구나,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 후로도 윤여정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그를 향해 이유 없는 적개심을 표출하는 대중 역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음악다방 ‘쎄씨봉’의 멤버들과 어울려 멋진 젊은 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 중 한 사람인 가수 조영남과 연애를 거쳐 결혼까지 했다. 조영남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윤여정도 그 길에 함께 했다.

13년의 결혼 생활은 이혼으로 끝났다. 귀국한 그는 두 아들을 양육해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은 반발했다. ‘어떻게 이혼한 여자가 TV에 출연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여정은 그 반발을 온전히 실력으로 돌파했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윤여정의 귀국 후 첫 출연작은 박철수 감독의 ‘어미’(1985)였다. ‘어미’는 김수현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 때문에 더욱 유명한 작품이다. 시놉시스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비극으로 끝나는 한국판 테이큰’이다. 라디오 진행자이며 저명한 작가인 홍 여사(윤여정 분)는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싱글맘이다. 고등학생인 딸은 엄마가 홀아비인 최 교수(신성일 분)를 만나 밀회를 즐기는 동안 인신매매 조직에 납치당한다. 딸은 강간당한 후 성매매 업소로 팔려가고, 그런 딸을 찾기 위해 어머니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하지만 딸은 충격을 극복하지 못해 자살하고, 어머니는 세상을 향한 복수극을 벌인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어미’는 그리 좋은 작품이 아니다. 설정과 각본, 연기 모두 훌륭하지만 지나치게 선정적인 연출이 몰입을 깨뜨린다. 김수현 본인부터가 이 작품을 극장에서 본 후 매우 격분했다. 이후 김수현은 박철수와 절대 협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말을 지켰다.

김수현이 택한 최적의 배우
19951118일 첫 방영된 KBS2 ‘목욕탕집 남자들’은 김수현 작가가 대본을 썼다. 극중에서 윤여정(왼쪽)과 고두심이 대화하고 있다. [KBS 제공]
대신 김수현의 파트너로 등극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윤여정이었다. 연기 잘 하고 탁월한 대사 전달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좋건 나쁘건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얻고 있는 스타. 하지만 그에게 끼얹어진 오명 아닌 오명 때문에 다른 작가나 연출자들이 선뜻 데려가지 못하는 문제적 인물. 하지만 김수현은 KBS2 ‘목욕탕집 남자들’, MBC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등 주요 히트작에서 윤여정에게 좋은 배역을 연이어 맡겼다.

중요한 건 각각의 작품에서 윤여정이 수행한 역할이다.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철모르는 로맨티스트 둘째 며느리(목욕탕집 남자들), 여주인공을 발탁해 배우로 발돋움하게 해주는 당찬 여성 디자이너(사랑과 야망), “엄마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가부장적인 집에 시집가는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친정엄마(사랑이 뭐길래).

여기에는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한국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좋아하는,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여성의 역할’로부터 어딘가 벗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여성에 대한 입체적 시각을 드러내기 위한 최적의 배우가 바로 윤여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수현은 대중이 보는 드라마를 쓴다는 자의식을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다. 결론에 다다르면 사회 통념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대신 화해와 통합, 혹은 봉합을 선택했다. 특히 큰 성공을 거둔 홈드라마에서 그런 경향이 도드라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현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당시 한국 사회의 평균보다는 한 발자국, 최소한 반 발자국 정도는 앞서 나가는 인식을 보여줬다. 그런 까다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게 윤여정의 주요 임무였다.

2007SBS에서 방영된 ‘내 남자의 여자’에 대해 당시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와 유지나 동국대 영상영화학과 교수가 나눈 대담을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유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김수현은 과거에 보여줬던 도발성에서 나아가, 이번 드라마에서는 결혼제도, 즉 가부장적 일부일처제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더군요. (친구의 남편과 바람이 난) 김희애가 ‘셋이 같이 살자’고 말하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거죠.”

“영화로 비교하면 김수현 정도의 여성의식이면 상당한 것입니다. 박철수 감독이 영화화한 ‘어미’만 봐도 그렇죠. 페미니즘 텍스트 같아요. TV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페미니즘 의식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은근슬쩍 봉합하는 마무리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어미’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어미’는 김수현의 스크린 복귀작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렇듯 윤여정은 김수현과 짝을 이뤄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평면적인 역할을 극복해나갔다.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로도 그랬고, 현실 속의 한 인간으로도 그랬다.
물론 그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장희빈’ 시절처럼 여기저기서 봉변당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윤여정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너무도 재미있는 김수현 드라마에서, 주어진 역할을 너무 잘 해내기에, 안 볼 수가 없었을 뿐이다. 이렇게 윤여정은 왕년의 청춘스타에서 벗어나 중견 배우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한 번 확보해갔다.

사회가 즐겨오던 ‘길티 플레저’
4월 29일 서울 노원구의 한 영화관 전광판에 영화 미나리 포스터가 나오고 있다. 배우 윤여정이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도 다시 높아지는 분위기다. [뉴스1]
2021년 4월, 윤여정은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이라는 위업을 달성한다. 그러자 한 언론에서 그의 전 남편인 조영남을 인터뷰했다. 조영남은 ‘대단한 일이다, 바람 피워서 이혼당한 남편에 대한 최고의 복수’라는 식의 코멘트를 했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다시 한 번 여론의 된서리를 맞고 있다.

물론 조영남의 저 발언은 주책없는 소리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전후 맥락 자체가 너무도 이상하다. 윤여정을 ‘조영남의 전 부인’으로 바라보고, 이혼했다는 사실을 죄악시하고, 심지어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야깃거리로 삼던 것은 조영남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식이었다. ‘쎄씨봉’ 회원들의 음악이 다시 유행하고, 급기야 2018년 영화 ‘쎄씨봉’이 개봉할 당시를 떠올려보자. 그 시절의 추억담이 입에 오르며 윤여정은 계속 원치 않는 맥락으로 소환됐다. 대중 역시 그런 ‘추억 팔이’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윤여정을 두고 한 배우와 연기를 이야기하는 대신 그의 실패한 결혼을 논하며 시시덕거리던 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즐겨오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어떤 행동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결국 즐기게 되는 심리) 아니었던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스카상 수상에 대한 조영남의 발언이 마뜩찮은 것과는 별개다. 조영남 한 사람만을 극렬히 비난하면서 마치 자신은 결백한 양 서둘러 알리바이를 만드는 듯한 모습에 외려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나뿐인가.

지금 나는 윤여정이라는 훌륭한 배우를 두고 여성혐오의 ‘희생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본인도 그렇게 인식되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성혐오의 ‘생존자’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콧대 높은 여자, 똑똑한 여자, 한 마디도지지 않는 여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따지고 드는 여자. 그런 여자가 인생 안 풀리고 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혈안이 된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잊어서는 안 된다.

윤여정은 늘 그랬다.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고답적이고 인습적인 여성상을 잘 알았다. 그러면서도 반대 되는 길을 택해왔다. 그의 인생은 그로 인해 순탄하게 흘러오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71년 3월 11일,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 그대로 한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순종에서 벗어난
“저는 결코 미인이 아니죠, 김기영 선생님도 저를 퍼니페이스(funnyface)라고 하셨는데 저 역시 동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역은 근본적인 여성의 매력, 순종이나 미적인 감각을 벗어난, 웬만해선 타협이 잘 안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역할입니다.”

윤여정에게 진정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면, ‘국뽕’ 중심의 과도한 호들갑을 멈추는 게 어떨까. 대신 대중의 편견과 증오를 딛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여성 예술가들을 좀 더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포용할 수 있어야겠다. ‘47년생 윤여정’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윤여정들’을 향해 힘찬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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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文정권이 손 놓은 암호화폐, 나라를 투전판으로 만들었다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미다스 신화와 마르크스로 본 암호화폐와 투기 심리

일러스트=안병현
미다스는 신들의 사랑을 받는 현명한 임금이었다. 특히 디오니소스가 그를 총애했다. 디오니소스의 양육자이자 스승인 사티로스 실레노스를 잘 대접했기 때문이었다. 소원을 들어주겠노라는 디오니소스의 말에 미다스는 ‘내 손이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문자 그대로 그와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차라리 저주였다. 음식을 먹으려고 잡으면 황금이 되었다. 물이나 술을 마시려고 잔을 들어도 모든 게 황금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사랑하는 딸을 쓰다듬었더니, 딸 역시 황금으로 변해버렸다.

미다스는 고통으로 절규하며 디오니소스에게 간청한다. 디오니소스는 미다스에게 팍톨로스 강물에 가서 목욕을 하면 축복, 아니 저주가 풀릴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미다스는 지시를 이행했고 정상적인 몸을 되찾았다. 그 후로 팍톨로스강은 오늘날까지도 터키 최대의 사금(沙金) 산지로 남아 있다고 한다. 미다스왕과 관련된 고대 그리스 신화 중 하나다.

신화는 인류의 집합적 지혜의 소산이다. ‘탐욕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좀 더 깊이 있는 독해가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 경제 철학의 핵심 개념인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구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온갖 것을 만들고 또 소비하며 살아간다. 원시사회가 아닌 다음에야 물물교환으로 경제활동을 해나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인류는 화폐를 발명했다. 금이나 은처럼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귀금속을 매개체로 삼아 가치의 저장과 교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상품이 지니는 가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물건 자체를 직접 사용·소비의 대상으로 삼을 때 발생하는, 말하자면 쌀이나 물고기를 직접 먹을 때 누리는 가치. 그것을 사용가치라고 한다. 반면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 때 매겨지는 가치가 있다. 이를 교환가치라 부른다.

모든 재화는 각기 다른 사용가치를 지닌다. 당연한 일이다. 농부에게는 쌀이 남고 어부에게는 생선이 남는다. 농부는 생선을 먹고 싶고 어부에게는 쌀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낮은 사용가치가 상대방에게는 높은 것이다. 그러니 농부와 어부는 화폐라는 중간 매개체를 이용해 서로의 사용가치의 합의점, 즉 교환가치를 찾는다.

여기서 화폐의 독특한 성격이 문제가 된다. 미다스왕의 고초가 잘 보여주다시피 우리는 황금을, 즉 돈을 입거나 먹을 수 없다. 화폐는 오직 교환가치만을 갖는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스스로 앞장서 ‘미다스의 손’이 되고자 한다. 진정 쓸모 있는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신 돈으로 돈을 벌 궁리만을 하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는 내적 모순으로 인해 무너지고 공산주의 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그의 주저 <자본론>에서 이 과정을 수학 공식과 현란한 수사학을 동원해 설명한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21세기가 아니라 19세기의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경제학’이라 보기 어렵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려던 모든 시도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분은 경제에 대한 철학적 담론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미다스왕의 전설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용가치를 ‘내적 가치’로, 교환가치를 ‘외적 가치’로 넓혀서 이해한다면, 이는 우리의 경제생활을 돕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무언가가 가치 있는 재화라면, 그것은 그 자체에 사용할만한 가치가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비싸게 팔릴 것이라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시끌벅적한 ‘암호 화폐’는 어떨까. 일단 개념의 오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암호 화폐는 ‘화폐’가 아니다.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도 비트코인이나 그 외의 알트코인을 화폐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다만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 재산의 일종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그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다. 사용가치를 지니는가? 만약 암호 화폐가 화폐라면 그 개념 정의상 암호 화폐는 사용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반대로 화폐가 아니라고 해도 암호화폐는 복잡하게 짜여진 디지털 암호문에 불과하다. 컴퓨터 자원을 소모하고 저장 용량을 차지할 뿐이다. 유의미한 사용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없다.

결국 사용가치는 없고 교환가치만 있다. 내가 구입한 것보다 다른 사람이 더 높은 가격으로 사줄 것이라는, 그래서 ‘돈 복사기’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그 기대만이 남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참여자가 거래 대상의 내적 가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시장, ‘폭탄 떠넘기기’를 꿈꾸고 있는 시장을 일반적으로 ‘투기 시장’이라고 부른다. 암호 화폐 시장은 투기 시장이다.

문제는 왜 투기판에 20대와 30대가 대거 뛰어들고 있느냐일 것이다. 암호 화폐를 거래하는 젊은 층이 드나드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유심히 살펴보면 ‘졸업’이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돈을 벌 만큼 벌거나 다 잃어서 판에서 나간다는 뜻이다. 좋은 의미에서 ‘졸업’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말을 한다. ‘집 샀습니다! 성투(성공한 투자) 하세요!’

문재인 정권을 향해 묻고 싶다.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사는 것이 왜 나쁜가. 적어도 집은 실체가 있는 물건이다. 대출을 못 갚으면 집을 팔면 된다. 가격이 떨어져도 그냥 그 집에서 살면 그만이다. 사용가치가 있는 재화라는 뜻이다. 반면 암호 화폐는 사용가치가 0으로 수렴한다. 집을 사는 것은 투자일 수도 있고 투기일 수도 있지만, 암호 화폐를 사는 것은 100% 투기다.

내 집 한 채 마련하여 빚을 갚으며 천천히 자산을 키워나가는 정상적인 경로를 끊어버리니 온 나라가 투전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정책 실패다. 그러면서도 암호 화폐에 대한 과세 유예 카드를 만지고 있다. 이제는 부동산으로 세금 폭탄 맞는 사람들과 암호 화폐 투자자들을 ‘갈라치기’할 셈인가.

미다스왕은 아들과 딸이 황금으로 변한 후에야 자신이 걸린 저주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가 원한 것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이었던 것이다. 충혈된 눈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젊은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을 얻기 위해 가장 위험한 도박에 뛰어드는 모순적인 광란. 그것을 진정시킬 책임은 전적으로 문재인 정권에 있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4-25

보스 정치보다 못한 팬덤 정치

 [노정태의 뷰파인더㉛]대깨문의 적반하장과 민주당 잔혹史

●‘초선 의원의 亂’과 문자 폭탄
●한층 강경한 ‘친문 정당’으로의 길
●黨心 추종이 민주주의에 反한다?
●당원도 결과에 따른 책임지는 것
●한국 정당은 ‘구경하는 정치’ 조장
●극성 친문이 쏘아올린 퇴행 신호탄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19대 대통령선거가 한창이던 2017년 4월 21일. 인천 부평구 부평역 광장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집중유세가 열렸다. [동아DB]
극성 열혈 지지층. 현재 정치권의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다. 야당보다는 여당에서 더 큰 고민거리가 돼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4·7 재·보궐선거(재보선)에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자리를 동시에 빼앗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성 친문 지지층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4월 9일 민주당의 초선 의원 다섯 명은 ‘더불어민주당 2030의원 입장문’을 내고 ‘조국 사태’ 때 조국 전 법무장관을 감싼 것을 반성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이에 사흘 뒤 ‘민주당 권리당원 일동’ 명의의 권리당원 성명서가 발표됐다. 성명서는 초선 의원들의 입장 발표를 ‘초선 의원의 난(亂)’이라 표현하며, “초선의원들은 4·7 보궐선거 패배 이유를 청와대와 조국 전 장관의 탓으로 돌리는 왜곡과 오류로 점철된 쓰레기 성명서를 내며 배은망덕한 행태를 보였다”는 과격한 표현까지 내놨다.

극성 친문은 단지 성명서를 발표한 데 멈추지 않았다. 김정란 상지대 명예교수 등 유명 극성 친문 지지자들이 앞장서서 초선 의원 다섯 명의 연락처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 번호로 온갖 폭언이 담긴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그것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인증하는 모습을 지난 4월 9일 이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극성 親文의 영향력
4월 20일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광주, 전남, 제주 당대표, 최고위원 후보 합동연설회에서 홍영표, 송영길, 우원식 당대표 후보들(왼쪽부터)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동아DB]
민주당에서 극성 친문이 미치는 영향력은 앞으로 더욱 커질 듯하다.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당 지도부가 총사퇴한 가운데 새로운 당대표와 최고위원을 뽑는 전당대회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규정대로라면 지도부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고위원은 당규에 따라 중앙위원회에서 뽑아야 한다. 하지만 차기 당권 주자인 홍영표, 우원식 의원 뿐 아니라 문자폭탄에 시달린 다섯 명의 초선 의원들까지 권리당원 전체투표를 통한 최고위원 선출을 요구했다. 이에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는 당대표와 최고위원 모두를 전당대회에서 뽑기로 결정했다.

민주당에서 당비를 내는 당원을 권리당원이라고 한다. 모든 민주당 권리당원이 극성 친문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극성 친문이라면 99% 이상의 확률로 권리당원일 것이다. 요컨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극성 친문은 막강한 조직표로 작동하고 있다.

민주당 전당대회 규정상 일반 권리당원은 40%, 국민 일반의 투표가 10%, 일반당원이 5%의 투표권을 갖는다. 권리당원의 지지를 받으면 무난히 이길 수 있다. 지난 4월 16일 선출된 윤호중 원내대표 역시 친문 성향으로 분류된다.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이 한층 더 강경한 ‘친문 정당’으로 향할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일단 오해의 여지가 없는 내용부터 이야기해보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SNS에서 특정인의 연락처를 공유하며 욕설과 폭언 등을 퍼붓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SNS를 통해 악플 폭격을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상식적인 시민 사회의 양식과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다. 위법성이 있을 때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 특히 정당정치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른 각도에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극성 친문 지지자들의 행태를 두고 일각에서는 ‘소수가 다수의 의사를 왜곡하는 현상’이라고 비판한다. ‘민심’과 ‘당심’이 괴리되었을 때, 마땅히 ‘민심’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얼핏 들으면 반론의 여지가 없는 정론처럼 들린다. 소수의 열성적 지지층이 활동하여 일부 의원들을 움직이고, 그 일부 의원들이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면서 당이 바뀌고, 정당이 국가 전체의 국정을 좌우하는 상황은 우리에게 전혀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원의 투표로 정당의 행보가 결정되는 것 자체를 ‘민주주의에 반(反)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 반대다. 당원의 뜻에 따라 정당이 움직이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핵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 중 상당수가 실은 국민보다는 집권 여당의 당원들의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부자 노인의 정당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맨 오른쪽)과 이소영, 오영환, 장경태, 장철민 의원(오른쪽에서 세번째 부터)이 4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더불어민주당 2030의원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동아DB]
가장 최근의 사례.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어떻게 집권하게 되었을까? 그는 2019년 테레사 메이 총리가 사임한 후 보수당 당원들의 투표로 당대표가 됐다. 집권당의 당대표는 곧 총리다. 따라서 그는 총리로 취임했다. 물론 그 전에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운동을 펼치며 온 국민에게 자신의 이름과 얼굴, 정치적 의제를 알린 상태였지만, 영국인들이 그를 총리로 직접 뽑지는 않았다.

보리스 존슨은 보수당 내 경선을 통해 영국 총리가 됐다. 그 투표권은 오직 보수당원만이 가지고 있었다. 보수당의 당원은 노년층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소득 수준을 놓고 봐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한마디로 부자 노인들의 정당이다. 영국이라는 나라의 총리가 오직 부자 노인들만의 투표로 결정되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일까?

브렉시트의 경제적 여파를 정확히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제 상식에 비추어보면, 브렉시트는 무역 및 국가 간 노동력의 이동을 저해한다. 이는 전반적으로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 특히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니 영국의 주요 언론들이 새삼스럽게 ‘온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보수당의 당내 경선으로 새 총리를 뽑는 상황’을 문제 삼았던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가디언’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진보 성향 언론은 유럽연합 및 국경의 개방성 등 진보 의제를 놓고 존슨 총리의 취임에 반대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나 ‘이코노미스트’ 같은 보수 성향의 경제지들은 브렉시트가 미칠 경제적 여파와 혼란을 우려하며 존슨을 반대했다.

하지만 보수당은 예정대로 당대표 경선을 강행했고 존슨이 승리했다. 이후 정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는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을 단행했다. 201912월, 아직 코로나19가 중국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던 그 무렵, 존슨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선거를 치렀다. 선출의석 650석 가운데 365석을 차지하여 단독으로 과반을 넘기는 압승이었다.

어차피 본질은 ‘YS당’, ‘DJ당’
여기서 우리는 내각책임제가 정당과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을 알 수 있다. 내각책임제에서 집권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다. 정당이다. 어떤 정당이 총선을 통해 다수 의석을 차지하거나, 총선 후 여러 정당이 연정을 통해 다수 의석을 확보한다. 그렇게 집권당 혹은 집권 내각이 형성되고, 그들이 법을 만들고 집행하며 국정을 수행한다.

반면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 문화는 정당보다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역사가 길지 않은 후발주자로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듯,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한국 보수 정당은 그저 ‘대통령당’일 뿐이었다. 자체적인 정치 의제를 토론하고 형성하는 기능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법을 만드는 거수기 집단에 더 가까웠다.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보스가 건재하던 시절로 돌아가 보면 분명 그렇다. 김영삼·김대중은 당대표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정치, 정책, 가치관 등을 표상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당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했다. 어차피 본질은 ‘김영삼 당’, ‘김대중 당’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이와 같은 정치 문화를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던 고도 성장기였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집중된 리더십의 필요성은 당내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1987년의 직선제 개헌, 그 이후의 역동성 있는 정치 변화 등은 정당보다는 사람, 특히 대선 주자를 중심으로 빠르게 이합 집산하는 한국 정치의 기본 구조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의 원론과는 다르다. 정당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의회 정치의 중요성이 누락돼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형 정치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 누군가의 개인적 의지나 열정이 아니라 다수에 의해 합의된 이상과 이념에 따라 움직인다. 이를 원한다면 정당의 역할은 더욱 커져야 한다.

‘코빈마니아’의 실패
다시 영국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행하는 ‘대한민국 정책브리핑’에 따르면 영국의 선거는 돈이 안 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예 법으로 돈을 못 쓰게 막아놓았다. “영국은 선거법상 선거비용을 1만 파운드(약1400만원)이하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고 유권자들을 직접 찾아나서는 선거 운동원에게 절대 돈을 지급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선거를 치를 수 있단 말인가. 비밀을 풀 열쇠는 자원봉사에 있다. “영국의 선거운동은 무보수 자원봉사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점심식사를 자비로 챙겨오고 교통비도 자기 돈을 쓴다. 말 그대로 ‘봉사’를 하는 것이다.” 주영 대사관 홍보실에서 제공한 자료라고 하니 믿어도 좋을 듯하다.

왜 영국의 정치 고관여층은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써가며 자원봉사를 하는 걸까. 정치에 대한 영국인의 관심과 사랑이 유별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정치에 대해 관심 많기로 따지면 한국인을 능가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정당에서 자원봉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 중 일부는 인터넷에서 악플을 달고 문자폭탄을 보내는 등의 비상식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이 차이는 대체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앞서 이야기했듯 영국에서 특정 정당의 당원이 된다는 것은 퍽 많은 함의가 있다. 당대표를 뽑는 등 주요 의사결정에서(물론 정당마다 규정이 다르긴 하겠으나) 대부분 여론조사와는 무관하게 당원이 전적인 결정권을 갖는다. 평소에는 그리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테레사 메이가 사임하고 보리스 존슨 등 다양한 후보가 당대표 경선에 나서는 상황이라면 그 무게가 달라진다. 나의 한 표가 지금 당장 누군가를 영국 총리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단 영국만의 일이 아니다. 다른 ‘민주주의 선진국’ 역시 정당을 운영하는 데 자원봉사에 크게 의존한다. 대신 당원 및 자원봉사자들에게 그만한 정신적 보상을 제공한다. 그 중 핵심은 당내 의사결정권을 주는 것이다. 설령 ‘민심’과 ‘당심’이 다르다 해도 ‘당심’을 이루는 사람들은 어떤 이념이나 정책에 집중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도 진다.

극단적인 두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다. 보리스 존슨을 총리로 만든 영국 보수당의 ‘당심’은 총선 승리로 이어졌다. 반면 제레미 코빈을 열렬히 지지하던 노동당의 진보 블록, 소위 ‘코빈마니아’(Corbynmania)들은 그렇지 못했다. 노동당은 201912월의 총선에서 처참히 패했다. 코빈의 오랜 정치 경력 역시 그 시점에 종지부를 찍었다.

존슨 지지자들이 옳고 코빈 지지자들은 틀렸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당심’은 ‘민심’과 가까웠거나 민심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다른 ‘당심’은 그러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코빈 지지자들은 당내 경선 및 총선 과정의 자원 봉사를 통해 뜨겁게 정치에 참여했다. 다만 유권자들이 그들의 지나친 사회주의 성향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정당에 들어간다. 혹은 스스로 정당을 만든다. 민주적으로 그 정당의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이념과 정책을 정직하게 밝히고, 대중을 설득하여, 그에 따른 정치적 결과도 온전히 스스로 책임진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정치의 작동 방식과 매우 가깝다. 결국 당원들이 정당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정당민주주의가 관건인 셈이다.

‘정치 개혁’의 첫걸음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자면, 나는 현재로서는 민주당이건 국민의힘이건 ‘당심’보다는 ‘민심’에 가까운 지도부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편이다. 특히 국민의힘은 젊고 신선한 지도부가 등장해 한국 보수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면 좋겠다.

정당은 정치 결사체다. 당원 스스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하고, 지도부를 구성하며,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도 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에 더욱 가깝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변화는 당원으로부터, 즉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형태여야 한다.

지금처럼 두 거대 정당이 일관된 방향도 이념도 정책도 없이 여론조사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정치 풍조는 시민들의 ‘정치 효능감’을 떨어뜨린다. 정치를 ‘참여하는’ 것이 아닌 ‘구경하는’ 것으로 만든다. 평범한 시민들이 정당에 뛰어들어 시간과 돈을 써가며 내 의사를 드러낼 이유를 빼앗는다. 물론 곧장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지만, 이상을 잊지 말아야 현실을 바꿀 수도 있다.

극성 친문, 소위 ‘대깨문’처럼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는 것은 몇 번을 비판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는 보스 정치보다 못한 팬덤 정치로의 퇴행일 뿐이다. 진정한 시민 참여가 이루어지는 정당 민주주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극성 지지층의 행태는 제지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좀 더 상식적이고 건설적인 시민 참여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정치 개혁’의 첫걸음이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