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6

[신동아] '공부 잘한' 이준석에게 드리운 짙은 그림자

* 일러두기: 이 칼럼에서 다루려다 분량 관계상 뺀 내용이 있다. 이준석의 '공정' 담론은 청년층 뿐 아니라 노년층에게도 해로운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을 참고할 것: "이준석의 '공정'은 가난한 노인이 더 가난해지는 것"

'공부 잘한' 이준석에게 드리운 짙은 그림자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1. 06. 06. 10:01 수정 2021. 06. 06. 12:54

기사 도구 모음

[노정태의 뷰파인더㊲] 자비심 없는 '공정한 경쟁'

● 성취와 능력 부각하는 세계관
● 우연과 행운에는 말을 아끼다
● 자신이 얻은 기회는 당연하다?
● 약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공감 부족
●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은 없다
● 부풀어 오른 자의식과 포퓰리스트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이준석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5월 30일 광주 서구 치평동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1차 전당대회 광주·전북·전남·제주 합동 연설회에서 정견을 발표하고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필자는 1983년생이다. 20대부터 소위 '청년 논객'으로 살아왔다. 30대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그놈의 '청년' 딱지가 떨어지지 않는다. 나이를 안 먹어서가 아니라, 우리 세대에 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준석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단지 젊다는, 동년배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박수를 치며 지지의 뜻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생각해볼 게 많기 때문이다.

‘공정한 경쟁'의 세계관

이준석이라는 이름을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면 네 권의 책이 나온다. 출간 순서대로 나열해보자. 2011년 12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정치에 첫 발을 디딘 후 2012년에 출간한 '어린놈이 정치를?'이 첫 번째 책이다. 같은 해 '거침없이 배우는 LINQ'라는 컴퓨터 서적을 번역 출간한 그는, 한동안 방송 및 정치 활동에 전념하다가 2018년 소설가 손아람과의 대담집인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를 펴냈다.

이 글에서는 그의 가장 최근작인 '공정한 경쟁'을 통해 그의 세계관, 그 중에서도 '공정 담론'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공정한 경쟁'에는 "대한민국 보수의 가치와 미래를 묻다"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 제목과 부제 모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이준석은 진지하게 '산업화 세대 이후의 보수'를 고민하고 있다. '여는 글'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은 젊은 세대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엉덩이 밑에 깔린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아젠다를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설령 산업화 세대나 민주화 세대의 구성원이라 해도, 후속 세대가 자신만의 길을 모색한다는 말을 할 때, 나쁘다고 하거나 반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준석이 생각하는 새로운 아젠다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아젠다는 '공정 사회'로 보고 있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공정의 가치를 지금의 집권 세력은 잘못 해석하고 있고, 공정과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허덕이고 있다."

‘공정' 담론은 2019년과 2020년의 서점가를 뜨겁게 달군 주제였다. 가령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무렵 출간된 이준석의 책이 공정을 화두로 삼고 있다는 점은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은 정치인이 펴낸 그렇고 그런 책이 아니다. 어디서도 트집 잡히지 않도록 하나마나한 소리를 두루뭉술하게 돌려서 말하고 있지 않다. 좋게 말하면 인상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황당한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심지어 본인도 그러한 내용이 논란의 대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철학자 마이클 센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공정성을 앞세운 능력주의 담론은 현 체제 속에서 경쟁에 이긴 사람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담론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내재적 약점이다.

그래서 능력주의의 옹호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내가 지금껏 거둔 성공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물론 나는 힘들게 노력했지만, 나처럼 좋은 여건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처지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늘 노력중이다. 능력주의가 제대로 발휘되는 공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준석의 특이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그는 다른 능력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런 식으로 입에 발린 겸양의 발언 같은 걸 내뱉지 않는다. 그런 '정치적 발언'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본인이 거둔 그 모든 성취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공정한 경쟁'의 곳곳에서 그런 생각을 감추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낸다.

노력과 우연, 행운의 중첩 작용

2012년 2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과 이준석 비대위원(오른쪽)이 비대위 회의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왼쪽은 김종인 비대위원. [동아DB]
이준석은 '박근혜 키드'로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20대의 나이에 집권여당 비상대책위원이 되는 벼락출세를 맛봤다. 덕분에 일찌감치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지역구에서는 연이어 낙선했지만 방송가의 눈에 들어 예능인으로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쌓았다.

그 과정에 이준석 본인의 노력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100%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여러 가지의 우연과 행운이 중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일각에서 말하듯 유승민 전 의원과 이준석의 아버지가 서로 돈독한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그러한 요소 역시 이준석이라는 사람의 출세를 논함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그저 자신의 '공정 철학'을 설파할 뿐, 이 모든 우연과 행운에 대해 이준석은 말을 아끼고 있다.

이준석은 카메라 앞에서 말을 잘 하는 젊은 정치인이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다. 하지만 세상에 말 잘 하고 정치에 뜻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 중 누가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가.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노력을 하기 위한 무대 자체가 '유승민 친구 아들 이준석'이 아닌 수많은 정치지망생들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 이준석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본인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보면 분명히 그렇다.

"가령 정당을 대표해 토론에 나가려면 우선 직위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런 직위를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직위를 받아 다른 정치인들과 토론을 해본 젊은 사람은 제가 거의 유일하고요. 저는 제가 비대위원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토론에 나가면 상대로 김부겸 의원, 노회찬 의원 등이 나왔어요. 제 입장에서는 아주 고급의 대련, 훈련 기회를 얻은 셈이죠."

일반적으로 이 정도 이야기를 꺼내면, 적어도 가식적으로라도 겸양의 말이 뒤따른다.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게 참 행운이죠. 그래서 젊은 정치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제공돼야 합니다'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준석은 다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결론은 '내가 잘났다, 내가 노력했다'로 마무리된다. 방금 인용한 문단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방송 토론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공부를 많이 하고 들어가도 준비한 것과 전혀 다른 질문이 나와 당황하는 경우도 있고요. 저는 그 과정을 처음부터 잘 소화한 편이었어요."

이렇게 한껏 뽐을 낸 후 이준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대목에 따로 제목을 붙인다면 '청년정치 사다리 걷어차기'가 어떨까 싶다.
"청년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이란 이름으로 기득권에 특별한 혜택을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봐요. (중략) 저는 어렵더라도 기존 질서에 기대지 않고, 제 실력으로 청년정치를 실현시킬 생각입니다."

"엘리트주의 감수하겠다"

나는 지금 일부 대목을 부풀려 이준석의 생각을 왜곡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준석은 정말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경쟁, 특히 자신이 인생의 승리를 거둔 입시 경쟁을 '공정한 경쟁'의 표본으로 여긴다. 본인의 중학교 시절에 대한 이준석의 회고담이다.

"중학생에 불과한 아이들 700명이 등수를 두고 다투었어요. 좀 잔인한 측면도 있지만 저는 그 시절의 공부가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었고요."

우리 정치권, 특히 엘리트 중심의 보수 정당에는 공부를 잘 한 사람이 참 많다. 그들 중 상당수, 아니 대다수는 자신의 '공부 머리'에 대한 자부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그 누구도,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본인이 승리를 거둔 입시 과정을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혹시 그런 경우를 본 적 있다면 제보 부탁드린다.

이준석은 이런 사람인 것이다. 내가 이긴 경쟁을 두고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 책이 나올 때까지 몇 차례나 교정지를 봤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표현을 그대로 대중 앞에 내보내는 사람. 몇 페이지 더 넘기면 "저를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한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빛나는 재능과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0선 중진'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지 않은가?

‘공정한 경쟁'에는 좋은 내용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준석이 나름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는 교육 분야에서 그렇다. 학령인구가 줄고 있으므로 고등학교를 모두 기숙학교로 바꾸는 아이디어가 대표적이다.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면 사교육이 원천 봉쇄될 뿐 아니라 가정환경 때문에 겪게 될 위화감도 줄어든다. 특히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농어촌 지역의 경우 몇 개 학교를 통합해 기숙사로 운영하면 교육적 가치와 효율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여성 문제에 있어서도 '정답'을 말할 때가 있다. 교육 문제를 다루는 5장에서 그는 한국 사회가 여성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더욱 장려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다. 고학력 여성들이 경력 단절을 겪고 직업 시장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해 결혼과 출산을 미루면서 저출산이 심화된다는 면을 놓고 볼 때, 이러한 현실 인식은 정확하다.

약자와 패배자에 대한 자비심

하지만 거기까지다. '정치평론가'로서 이준석이 내놓는 올바른 담론은, '정치인' 이준석의 부풀어 오른 자의식과 호승심(好勝心) 앞에서 힘을 잃어버린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공정하게 경쟁하고 있으며, 자신의 능력으로 이긴다고 생각한다. 약자와 패배자에 대한 공감과 자비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을 타자화하며 당대표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행보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도 그 경향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국민은 젊고 합리적이며 유쾌한 보수 정치를 원한다. 지금껏 진보 진영이 독점해온 정치적 의제를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갱신하는 것 또한 보수 정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약자, 소외된 자, 애초부터 발언권을 얻지 못한 자들에 대한 연민을 전제로 해야 한다. 내가 이긴 경쟁이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경쟁이었다는 이준석과 그에게 환호하는 이들을 보며 (마음 한 구석의) 우려를 감출 수 없는 이유다.

#이준석 #공정한경쟁 #2030 #청년정치 #신동아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6-05

요리할 돈이 없어서 배달음식을 먹는 사람들

상파울루, 브라질. 2011년 2월 뉴스. 피자 배달점이 늘어나고 있다. 왜일까? 

도시 빈민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들에게 부엌이 없기 때문.

 '가난한 사람이 핸드폰은 있다고? 그런데 가스비를 낼 돈이 없다고?' 같은 소리들. 얼마나 근시안적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시각인가. '요리를 할 돈이 없어서 배달음식을 먹는다' 같은 '비논리적' 현상이야말로 현실에 더 가깝다.

Food is also one of the few pleasures available to the poorest. In the favelas (slums) of São Paulo, the largest city in South America, takeaway pizza parlours are proliferating because many families, who often do not have proper kitchens, now order a pizza at home to celebrate special occasions.
"The 9 billion-people question", The Economist, Feb 24th 2011, Special Report.

2021-05-29

[아무튼, 주말] 韓美 정상회담을 中에 보고하라? 그들을 '사대주의자'라 부른다

 

[아무튼, 주말] 韓美 정상회담을 中에 보고하라? 그들을 '사대주의자'라 부른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1. 05. 2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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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남한산성'으로 본
한·미·중 국제정치학
일러스트=안병현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향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발이 묶여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게 되었다. 갇힌 조선은 성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항복하여 백성의 피해를 줄이고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자는 주화파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농성하고 역전의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주전파가 대립한 것이다.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은 그 광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주화파의 대표인 최명길(이병헌 분)은 말한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하니 자존심을 버리고 고개를 숙이자는 입장이다. 반면 김상헌(김윤석 분)은 임금이 오랑캐에게 굽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신은 차라리 가벼운 죽음으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막강한 적의 군대가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일전을 벌이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은 그저 허황될 뿐. 게다가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내부의 갈등과 반란을 다스리지 못해 무너졌다. 천하의 패권은 청나라로 넘어갔다. 그 격동기에 조선은 새로운 흐름에 올라타는 대신 기존의 낡은 세계관 속에 스스로를 묶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일방적으로 주전파를 비난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각자의 논리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당시는 국운이 쇠했을지언정 아직 명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조선왕조는 명나라 황제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처럼 내려오는 유교적 위계질서를 통치 근거로 삼았다. 갑자기 사대의 대상을 바꾸는 것은 스스로의 집권 정당성을 부정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런 맥락을 놓고 보자면 김상헌의 주전론에는 나름의 이념적 근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국제정치학 용어를 빌려 설명하자면, 최명길은 현실주의를 대변하고 있던 반면, 김상헌은 자유주의를 표방한 셈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학문 분야로 정착한 국제정치학은 크게 세 가지의 학문적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 국가와 국제 관계를 힘(power)으로 바라보고 설명하는 현실주의(realism). 국가 간의 공동 이익 창출과 상호 협력에 주목하며, 특히 ‘제도’를 통해 상호 견제가 가능하다고 보는 자유주의(liberalism). 국제 관계뿐 아니라 각국의 내부 동역학까지 고려하며 다양한 맥락을 따지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는 케네스 월츠, 존 미어샤이머 등이 있다. 이들의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전제 몇 개를 공유한다. 국가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언제 침략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늘 안고 있다. 국제 관계를 설명하는 유일한 요소는 결국 힘이다. 국제사회에 정의(正義)란 없다. 억울하고 분해도 약자는 강자의 뜻을 따라야 한다. 병자호란의 위기 속에서 최명길이 택한 입장이기도 하다.

반면 조셉 나이, 로버트 코헤인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자들은 생각이 다르다. 물론 국제 관계는 힘으로 작동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국가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할 수 있다. 문화와 가치를 공유한다면 그러한 협력은 더욱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 간 합의를 통해 제도를 구축하여 장기적인 공존 공영을 꾀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다.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일종의 국제기구로 바라본다면 이는 김상헌을 비롯한 주전파의 세계관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셈이다. 유교의 종주국인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를 향해서는 사대를 할 수 없다는 입장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명·청 교체기에 오늘날을 곧장 대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미국은 마치 명나라처럼 저물어가는 제국이며, 중국은 청나라처럼 떠오르고 있으니, 처신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총수출액 중 중국에 대한 수출 비율은 25.8%로 1위를 차지했다. 중국에서 무역 보복을 할 수 있으니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보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 21세기 주화론자들의 주장이다.

이는 현실과 거리가 있다. 우리가 중국에 수출하는 물량의 절반 이상은 소재·부품이다. 특히 반도체의 비율이 높다. 중국에서는 한국이 싫어도 수입할 수밖에 없는 필수 요소인 것이다. 상대가 무역 보복을 할까 두려워 할 말을 못 한다는 변명도 옹색하기 짝이 없다. 중국에 대한 수출 비율이 32%에 달할 정도지만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쿼드에 가입한 호주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이다. 한미 동맹을 공고하게 다져나가는 것은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핵심적인 가치를 공유한다. 동북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 대중문화를 모두 갖춘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국뿐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 노병의 삶이 조용히 웅변하는 진실을 보라. 미국은 강자고 한국은 약자다. 하지만 한미 관계는 오직 힘의 논리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돕기 위해 피 흘리고 싸운 혈맹이다. 현실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우방이 누구인지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이 정치권에는 더러 있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린 내용만 봐도 그렇다. “문 대통령 귀국 길에 주요 수행원 중 한 사람은 중국에 들러 회담과 관련해서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네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이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중국의 속국인가?

현실의 힘에 굴복할 것인가, 기존의 신념에 충실할 것인가. <남한산성>이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그때와 같지 않다. 현실주의적으로 힘을 추종하건, 자유주의적으로 가치와 제도에 신뢰를 보내건, 우리가 갈 길은 정해져 있다. 그 사실을 끝내 부정하고자 하는 자들을 흔히 사대주의자라 부른다.

2021-05-27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

리디셀렉트에 있길래 심심풀이 삼아서 읽어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TTS 기능을 이용해 '들었다'고 해야 옳겠지만, 아무튼.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시피 <대담한 작전>은 유발 하라리의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세계 속에 우뚝 솟은 신흥 선진국 K-나라, 그곳이 바로 이곳이지만, 아직도 지성계는 글로벌 트렌드를 못 따라가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떴다 하면 유치원때 쓴 그림일기까지 출판하고 있다.

라고 욕하기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대담한 작전>을 보면 유발 하라리가 왜 오늘날의 '유발 하라리'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글을 잘 쓴다. 하나마나한 소리 같지만 그게 아니다.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지고 있다. 탁월하다. 대중에게 팔릴 책을 쓰는 저술가로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

둘째, '근대 이후'의 세계를 상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 내용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가치가 있다.

<대담한 작전>은 서양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특수작전들을 다룬다. 흔히 특수작전이라고 하면 근대국가, 즉 정규군/상비군 체제가 갖추어진 이후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그런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다.

소수의 인력으로 전략적 요충지 혹은 인물을 점령, 파괴, 납치, 살해하는 것을 특수작전이라 말한다면, 오히려 근대(와 총력전의 등장) 이전이야말로 특수작전의 전성기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기사도 문학과 전설들은 대부분 특수작전의 일종으로 해석 가능하다.

이와 같은 관점은 두 가지의 장점을 낳는다. 첫째, 앞서 말했듯 근대 이후의 세계를 절대적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은 역사 서술을 가능케 한다. 둘째,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기사들의 모험담이라는 재미있는 영역에 대한 독점적 해설권을 자신이 가져가게 된다.

학자로서, 또한 저술가로서, 대단히 유리한 포지션을 단번에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큰 영역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 얼마나 짜릿할까? 이런 학생을 학자로서 길러내는 교수는 또 얼마나 뿌듯할까?

'근대 이후 세계에 대한 상대적 이해'. 이것이 오늘의 키워드다. 유발 하라리의 이후 성공작인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유발 하라리를 오늘날의 스타로 만든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 근대 문명을 상대화함으로써, 서양인들에게는 자기 각성의 계기를, 동양인들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 아자아자'의 기쁨을 안겨줌으로써, 글로벌 스타 지식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담한 작전>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할 게 없다. 나는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원래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하라리가 뭘 제대로 설명하는 건지, 자기 취지에 맞게 부풀려 왜곡하는 건지, 판단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일단 재미있게 쭉 읽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대중교양서로서는 차고 넘치는 일이다.

유발 하라리라던가, 토마 피케티라던가, 몇몇 스타 지식인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등장하면 한국의 출판계는 그들의 저작을 우르르 번역해서 내놓는다. 물론 그런 모습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고상하게만 살았던가? 경박한 상업주의에 입각해 여러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출판계가 아직은 살아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한국 출판계가 떳다방처럼 책을 찍어낸다면, 진정한 독자가 해야 할 일은 개탄하기보다는 '똘똘한 한 권'을 찾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지성계'란 그런 노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2021-05-25

문재인의 '우리 여기자' 발언, 무엇이 문제인가?

이 핀트를 못 잡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니, 제대로 뭐가 문제인지 짚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맥락을 떠올려보자. 바이든에게 한 기자가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 기자의 성별이 여성이었다. 통상적인 질문을 했고, 통상적인 답변이 나왔다. 통상적인 기자회견의 모습이었다.

문재인은 그 직후에 '우리도 여기자 없어요?'라고 했다. 

그 순간, 처음 질문한 미국 기자는 여성차별을 당한 것이다. '성별이 여성인 기자'에서, 특별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한 '여기자'로 취급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여성들에게 우대 정책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백악관의 컨퍼런스 룸은 이미 그런 맥락이 다 지나간 곳이다.

이걸 페미니즘의 용어로 말해보자면 이렇다. 문재인은 그 기자회견장에서 '가부장적 페미니즘'을 구현한 것이다. 여성이 기자도 못 되고, 기자가 되더라도 질문 한 마디 자기 입으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자'에게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세상에서나 어울리는 짓을 미국 백악관에서 했다는 말이다.

한국의 언론계가 그 정도 수준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언론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가부장적 여성 보호 배려의 페미니즘 단계를 넘어섰다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 백악관의 내부 업무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문재인의 '여기자 질문해보셈' 발언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백악관의 수준을 순식간에 문재인의 청와대와 같은 것으로 끌어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바이든이 '여기자에게 무조건 첫 질문을 줘야지, 그게 페미니즘이지'라고 생각해서 질문 기회를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이든은 그런 걸 자기 입으로 떠벌이지 않는다. 그 정도 '위선'은 지키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다.

'우리도 여기자 한 명 질문해보세요'라니. 이런 식이면 질문 기회를 받은 기자는 '내가 실력과 무관하게 여자라서 '배려'받았나?' 싶어질 것이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큰 실례다.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여자'로 취급할 때나 가능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더 나쁜 건 문재인의 그런 발언을 두둔한 권인숙이다. 그런 가부장적 페미니즘 행태가 "작지만 소중한 발언"이라고? 제정신인가?

나는 권인숙이 한국 민주주의와 여성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바를 부정하지 않는다. 세상에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앞으로는 큰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젊은 안티페미들이 득세를 하면서 반여성주의 진영은 세대교체를 하는 모양새다. 여성주의 진영 또한 세대교체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