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3

이준석의 페미니즘 공격이 별 일 아니라는 이들을 위한 사고실험

성별 외 다른 변수를 제외하기 위해, '나경투'라는 정치인이 있다고 해보자.

나경투는 1986년생 여성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지만 국민의힘 지지층이 많지 않은 서울의 모 지역구에서 세 번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세 번 낙선했다. 하지만 말솜씨가 좋고 방송 감각이 있어서 다양한 예능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하버드 대학교도 나왔다고 하고, 뭐 기타등등 다 이준석과 동급이다.

나경투는 2021년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 출마했다. 나경투는 전통적인 국민의힘 지지층인 교회 다니는 중장년 표심을 자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경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심지어 당대표가 어찌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에도, 경선 과정에서 열변을 토했다.

  •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퀴퍼 금지
  • 군형법상 계간죄(남자 동성애 처벌) 폐지 결사 반대
  • 기타등등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성소수자 혐오

나경투의 선거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진중곤 같은 논객들이 달려들어 페이스북에서 논전을 벌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이 되고 말았다. 나경투는 자신의 성소수자 혐오를 공정이라던가, '안물안궁의 권리'라던가, 아무튼 뭔가 대충 그럴싸한 담론과 버무려 포장했다.

그리하여 진보 보수 양쪽으로부터 나경투의 혐오 선동은 사실상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한국의 여론 지형상 여론조사에서도 높은 수치를 받고, 그 여세를 몰아 당심을 자기 것으로 끌어들여, 당대표가 되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여러분은 나경투가 단지 '30대'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지지받아 마땅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나경투가 공공연하게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하고 혐오 선동을 하여 자신의 지지층을 형성한 것을 두고, "이건 어쩌면 나경투라는 인물에게 어떤 문제가 있느냐는 두번째 고민거리일지도 모른다는 증거처럼 보인다"는 식으로 말하는 칼럼을 떠올릴 수 있는가?

심지어 그 칼럼이 한국의 자칭 진보 진영의 기관지와도 같은 한겨레에 실릴 수 있다고, 그런 가능성을, 상상조차 할 수 있는가?

이준석은 남자 나경투다. 나경투는 여자 이준석이다. 당신이 나경투에게 반대한다면 이준석에게도 반대해야 한다. 게다가 가상의 사례인 나경투와 달리 이준석은 리얼이다. 나는 사람들이 왜들 이렇게 평온하게, 심지어 즐겁게, 박수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실은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너무도, 너무도 역겹다.

'조국의 시간'에 열광하는 앵무새들.. 이제 그만 자아도취서 깨어나길

[노정태의 시사哲]
나르키소스 신화로 본 악성 자아도취의 비극

강의 신 케피소스는 물의 요정 리리오페를 겁탈했다. 그렇게 태어난 나르키소스는 “소년 같기도 하고 성인 남자 같기도 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들 홀딱 반해 탄식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늘 냉담한 나르키소스는 모든 이의 구애를 뿌리칠 뿐이었다.

일러스트=안병현

헤라 여신의 시종인 요정 에코도 거절당했다. 에코는 원래 수다쟁이였지만 헤라의 저주를 받았다. 자기 말을 못 하고 남의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니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야멸차게 내뱉은 말을 자기 입으로 되풀이해야 했으니 말이다. “저리 꺼져. 네 품에 안기느니 죽는 게 나아.”

상심한 에코는 목소리와 뼈만 남았다. 그 뼈마저도 돌로 변해버렸다. 그 사연을 접한 이들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청했다. “그도 이렇게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소서!” 네메시스 역시 나르키소스에게 ‘차인’ 전력이 있는 터라, 일사천리로 청원은 접수되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버린 나르키소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물가에서 죽어버리고 만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 기록한 나르키소스 신화다.

나르키소스는 수선화가 되었다. 에코는 메아리가 되어 지금도 남이 한 말을 따라 하고 있다. 이 비극적 이야기는 수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대표적이다.

프롬은 <인간의 마음>에서 악(惡)을 탐구한다. 그가 볼 때 악의 본질은 다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죽음에 대한 사랑(네크로필리아), 자아도취(나르시시즘), 근친상간. 프롬은 이 중 상대적으로 가장 무난해 보이는 자아도취야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지목한다. 왜 그럴까?

사실 자아도취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인간 정신의 작동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태어난 직후의 아기를 생각해보자. 나와 세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울면 젖을 주고 달래준다. 모두가 나를 보며 웃어준다. 나는 곧 세상과 동일하므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나르시시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성장한다는 것은 그런 자아도취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나’의 바깥에도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나와 같지 않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 늘 벌어진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듯 ‘나’를 넘어서는 객관적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말과 같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세상에 나를 맞추는 대신 나에게 세상을 맞추려 든다. 그런 태도는 때로 창조력의 원천이 된다. 가령 스티브 잡스가 그렇다. 잡스는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고 남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일삼았다. 동료들은 잡스가 ‘현실 왜곡장’을 펼친다고 농담 삼아 빈정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리더십과 비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스마트폰 세상은 오지 않았거나 퍽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 히틀러는 어떨까. 히틀러는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했다. ‘순수한 아리안 민족’의 영광을 부활시킬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아도취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까지 그의 망상 속으로 끌어들였다. 히틀러의 개인적 자아도취는 독일 전체의 집단적 자아도취로 확장됐고, 그 속에서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악행이 벌어지고 말았다.

프롬은 종양을 진단할 때 쓰는 의학적 용어를 빌려, 자아도취를 양성(benign)과 악성(malign)으로 구분한다. 생명에 대한 사랑, 범인류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개방적 태도, 그런 것이 함께할 때 자아도취는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다. 반면 죽음과 고통을 찬미하며 가족이나 부족, 민족 같은 폐쇄적 혈통에 집착할 때 자아도취는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 자아도취가 집단적 자아도취로 커지면 그 여파는 개인을 넘어설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자아도취의 폭풍에 시달리는 중이다. 지난달 출간한 조국 전 법무장관의 책 <조국의 시간> 때문이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기술하고 있다. 요즘은 연예인 에세이도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이지 않는 편이다. 그런 자의식에 독자들이 부담을 느낀다는 판단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몇 구절 읽어보자. “제가 누구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자체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유폐 상태였다고 토로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것. 전형적 자아도취 증상이다. “이유 불문하고 국론 분열을 초래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 ‘이유’가 문제인데,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소리. 나르시시스트는 불리하면 이런 식으로 논점 일탈을 한다. 압권은 이 대목.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 내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이토록 비장한 표현에서 우리는 일본 사무라이들이 선호하는 죽음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조국의 자아도취는 양성보다 악성에 가까운 듯하다.

문제는 이 자아도취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고액 사모펀드에 가입할 재산도 인맥도 없는 사람들, 자기 자식을 인턴으로 꽂아 넣고 입시 특혜를 안겨줄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 그런 이들이 <조국의 시간>을 구입하여 인증샷을 올리며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외친다. 자신의 현실을 잊기 위해 우상(idol)에 자아를 투영하는 팬클럽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작은 나르시시스트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남들처럼 공부하고 일하고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조국과 그의 팬클럽만 모르는 것 같다. 마트에서 나뒹굴며 소리 지르는 어린이처럼 ‘무죄판결 내 거야’라며 떼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조국을 SNS에 비친 자기 모습에 넋이 나간 나르키소스라 한다면, 그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이들은 그에게 반한 에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달리 현실은 꼭 비극으로 끝날 필요가 없다. 그들 스스로는 진지한 비극의 주인공 행세를 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는 엉터리 희극일 뿐. 조국과 그의 팬들 모두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성숙한 존재가 되시기를 희망한다.

2021-06-12

'시험'을 줄이고 '테스트'를 늘리자

일본어를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 외래어를 있는 그대로 갖다 쓰는 일본어에서 '시험'[試験(しけん)]과 '테스트'는 다른 단어입니다.

'시험'은 대학교 입학을 결정한다거나, 뭐 그런 것들. '사회적 관문'의 기능을 하는 제도를 '시험'이라고 합니다.

반면 '테스트'는 좀 더 가볍고 자주 보는 것들. 공부를 잘 했는지, 진도를 따라오고 있는지, 등을 평가하기 위해 보는 것들이 '테스트'입니다.

일본어에서 '시험'과 '테스트'의 관계는 뭐랄까, '문'[門(もん)]과 '도아'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서양식 주택에 달린 문도 모두 '문'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인들에게 '문'이란 전통가옥에 붙어있는 것들이고, 대부분의 서구식 건물의 출입구를 막아주는 판자 같은 건 '도아'라고 부르니까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Meritocracy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의 실력을 키우고, 공정하게 평가하며, 학습효과를 높이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테스트'입니다. 테스트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 실력을 가늠할 수 있고, 평가도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공부도 잘 됩니다.

반면 '시험' 한 방으로 인생을 좌우하는 시스템은 어떻습니까. 물론 음서제에 비하면야 '공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험을 준비하고, 시행하고, 실패에 대응하는 등 모든 방향에서 결국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흘러갑니다. 시행횟수가 반복될수록 그렇죠.

'시험'이 그렇게나 공정한 제도라면, 멸망하기 전까지 과거제도를 굴렸던 조선이 왜 그런 나라가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시험'과 '테스트'의 구분으로 돌아와봅니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시험 중심의 나라입니다. 이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문제는 오늘날 '능력주의' 내지는 '공정에의 요구'라는 이름 하에, '시험주의'를 강화하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헌대 시험주의는 그 성격상 테스트, 특히 많은 테스트와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잦은 테스트를 통해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본래의 밑천이 다 드러나는 것은 '능력주의' 혹은 '시험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잘 보았던, 혹은 잘 볼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시험'을 통과한 후, 그 성적에 따라 본인이 불공정한 제도의 수혜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죠.

'테스트' 중심의 사회는 단지 자본가나 세습 자산가 뿐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에게도 그다지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안정적 직장과 연봉에 걸맞는 생산성을 내고 있는지 계속 평가받고 수시로 위치가 변경된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이제 한국은 고도성장기를 지난지 오래이므로, 유연안정성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유연안정성의 길이란 곧 '시험주의'에서 벗어나 '테스트주의'로 나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능력주의'라는 말에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막연한 환상을 끼얹는 일을 그만두세요. '능력주의'는 엄연히 정의와 용례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시험주의'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테스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테스트주의'입니다.

2021-06-11

'음서제 대 과거제'라는 가짜 논쟁

이준석 당선과 그에 뒤따르는 논의에 끼어들면서 느끼는 게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실력 안 되는데 빽/연줄/기타등등으로 끼어드는 놈들'에 대한 분노가 정말 크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그런 감정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논의가 '음서제 대 과거제' 수준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결국에는 '윗분'과 '아랫것'들을 구분하는 걸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역동적이면서도 약자를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사회를 원합니다. 그것은 음서냐 과거냐를 넘어서, 일단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음서제로 '양반'되냐 과거제로 '양반'되냐, 이 갈등은 '양반과 노비의 구분'이라는, 전근대적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근대적인 세계를 원합니다. 매 순간 모든 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지만 낙오자를 버리지는 않는, 그런 세상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2021년. 우리 모두 근대인이 됩시다.

2021-06-09

엑셀과 능력주의 (feat. 이준석)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면 엑셀쯤은 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해보자. 이 말 자체는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소리다. 엑셀을 참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들먹인다면 문제는 퍽 달라진다. 엑셀 사용 능력을 '시험'봐서 평가하겠다는 것은 정치와 상관 없다.

한국에서, 특히 보수 쪽 지지 성향이 있는 분들은 '능력주의'라는 말을 원래 의미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능력을 파악하여 그에 따라 공정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능력주의라고 뇌피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사실 좀 더 한국어 맥락에 부합하게 옮기자면, '시험주의'에 가깝다. 어떤 시험을 통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잠재력)을 평가한 후, 그에 따라 사회적 계층을 할당하자는 소리다. 

 

마이클 영의 책 Meritocracy가 바로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디스토피아 사회를 그린 SF 소설이고,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은 마이클 영이 저 책을 쓰면서 만든 말이다. 마이클 영은 2002년에 죽었는데, 그 전에 <가디언>에 본인의 뜻을 밝힌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너무도 최신 용어라는 소리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한국에서 능력주의의 본래 의미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이준석이다. 선거로 뽑혀야 마땅한 정치인을, 시험 봐서 뽑자고 하면 너무 과격하니까, 출마 자격을 평가할 때 시험을 보자. 시험홀릭, 입시제도가 낳은 괴물, 뭐 그런 단어들이 떠오르는 발상이다.

물론 그런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떠올려보자. 

오세훈은 파일명 뒤에 붙는 v(version의 v)가 무슨 뜻인지도 몰라서 VIP의 V라고 했다가 전국민의 조롱거리가 되었었다. 하지만 경선에서 승리했고, 심지어 선거 본선에서도 이겼다.

정치인이 컴퓨터를 잘 알아야 한다고? 컴퓨터 잘 못 쓰는 사람들은 출마도 못 하게, 시험 봐서 떨어뜨리자고? 이준석은 지금 오세훈을 '멕이는' 건가?

정치인에게 필요한 능력은 딱 세 가지다. 내가 봐도 참 아름답고 기가 막힌 정리인데, 아무튼 이렇다.

  1.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매력
  2. 내게 모인 사람들의 능력, 인성, 충성심을 파악하는 안목
  3. 아니다 싶은 사람을 내치고, 대립각을 세울 줄 아는 투쟁력

이 모든 것은 컴퓨터 사용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심지어 글을 몰라도 된다.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하겠지만, 좀 극단적인 예시이긴 한데, 샤를마뉴 대제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는 문맹이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을 확장하는데는 아무 무리가 없었다. 징기스칸도 아마 문맹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말고. 현대의 정치인이라고 뭐가 다를까. 믿음직한 참모가 글 읽고 표 볼 줄 알면, 정치인 본인은 문맹이어도 정치를 할 수 있다.

이준석에게는 3의 능력이 있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1이 없다. 매우 심각하다. 그러니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세 번 출마해서 세 번 떨어진 것 아닌가. 안타까운 일이다. 당대표가 된다면, 그래서 인지도가 높아진다면, 좀 나아지려나.

나는 컴퓨터라는 도구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필요한 분야는 일부러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방향에서 컴퓨터를 잘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정치라는, 호모 사피엔스가 농경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해왔던 그런 영역에서는, 엑셀이 아니라 매력이 본질이다.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운운하면서 자꾸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능력주의'를 거론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능력주의는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학적, 철학적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어로 정확히 옮기자면, '시험주의'에 더 가깝다. 이준석은 능력주의자인데, 좀 더 잘 번역해보자면, 시험주의자라는 소리다. 

나는 진정한 능력주의(라는 게 있다면, 그게 뭔지는 몰라도)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시험주의는, 글쎄. 잘 모르겠다. 시험 보는 재주라면 나도 딱히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2021년의 대한민국이 시험주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방해하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