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3

‘검수완박’ 文정권이 軍에는 사법독립 촉구? 표리부동!

 [노정태의 뷰파인더㊳] 헌병 동원하고 맹견 풀어 ‘예비군 윤석열’ 사냥

● 삼권분립 작동 않는 평시 軍법정
● 장군의 지위는 말 그대로 ‘왕’
● ‘中과 대립’ 대만도 평시 軍법정 폐지
● “독립적 재판” 文 일성, 진심일까
● 검찰을 軍검찰처럼 만드는 박범계案
● 공수처의 ‘자연인 윤석열’ 수사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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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 법무부 장관과 김오수 검찰총장이 6월 3일 서울 서초구 고등검찰청에서 만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평시 군사법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난 5월 18일 발생한 공군 A 중사의 사망 때문이다.

A 중사는 같은 부대 내의 상급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그는 성폭력을 당할 당시 녹음을 해두었고, 자신의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혔으며, 지체 없이 상부에 보고했다. 심지어 성폭력이 발생한 차량은 가해자의 후임인 제3자가 몰고 있었다. 증인까지 있는 사건이었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은 사건 해결에 있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가해자를 처벌하고 자신과 다른 곳에 배치해달라는 A 중사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급자인 B 준위는 최대한 ‘좋게좋게’ 넘어가고자 했다. 피해자를 불러 저녁식사를 하며 달래려 들었다. 가해자인 장모 중사가 조사와 동시에 제5공중기동비행단으로 이동조치 된 날짜는 3월 17일. 사건 발생 후 보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상담 프로그램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A 중사는 4월 15일, 제20전투비행단 성고충상담관에게 ‘자살하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성폭력상담소가 4월 30일 내린 결론은 전혀 달랐다. “자살 징후 없었으며 상태가 호전됐다.”

군내에서 법적인 조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군은 국선변호사 제도를 운영 중이다. 공군 법무실 소속 군법무관이 국선변호사로 선임됐다. 하지만 그 변호사는 직무유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행태를 보였다. 국선변호사 제도가 있긴 하지만 유명무실했다는 뜻이다.

피해자는 성폭력을 겪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군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건 초기 국선변호사를 믿고 별도의 법적 대응을 취하지 않았다. 본인의 지휘계통을 따라 사건을 보고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군은 A 중사를 버렸다. 사건을 드러내고 수사하기는커녕, 다른 부대로 전출해달라는 A 중사의 요청마저도 마지못해 들어줬다. 새로운 부대 역시 A 중사를 배척했다. A 중사는 연인과 혼인신고를 한 그날 스스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비극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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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A 중사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장모 중사가 6월 2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용산구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으로 압송되고 있다. 장 중사는 이날 구속영장이 발부돼 미결수용실에 구속 수감됐다. [국방부 제공]
이런 비극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한두 가지로 압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군 특유의 폐쇄적 집단주의 같은 문화적 요인이 적잖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드러나는 제도적 문제가 있다. 평시 군사법정이 바로 그것이다.

A 중사 사건은 부대 내의 인맥과 관계를 고려하는 군사법정의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가해자는 8월에 전역할 예정이었다. 이에 군 검찰이 가해자의 전역만 기다리면서 시간 끌기로 일관했다는 의혹에 휩싸여있다. 가해자를 구속 수사하는 등 ‘눈에 띄는’ 행보를 취하면 부대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부대가 비난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코로나 시국에 회식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의 사건 은폐의 핵심 원인 아니었을까.

평시에도 군사법정은 군인 사이의 사건을 관할한다. 현행 체제에서 장군의 지위는 ‘왕’과 같다. 삼권분립은 작동하지 않는다. 군 검찰이 소속되는 보통군검찰부, 군 판사가 소속되는 보통군사법원 모두 편제상 군단급 부대의 휘하 조직이다. 군 검사는 수사 감독 및 기소 등의 재판 과정에서, 군 판사는 판결 과정에서 모두 지휘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게다가 군 지휘관은 법조인 자격이 없는 일반 장교를 재판관으로 참여하도록 지시할 수 있다. 심판관 제도 때문이다. 이 또한 군 내부의 특수성 등을 이유로 지금껏 용인돼왔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군 지휘자의 뜻을 거스르는 수사와 기소 등이 쉽사리 이루어지기 어렵다. 설령 재판까지 간다 해도 군 지휘자가 ‘꽂아 넣은’ 다른 군인이 판사 노릇을 할 개연성도 있다.

그나마 이게 ‘개선된’ 형태다. 2017년부터 시행중인 현행 군사법원법에 따르면, 사단급 이하 부대에서는 보통군사법원을 가질 수 없다. 그 전까지는 사단장, 즉 ‘투 스타’(2성급 장군)들도, 자신의 부대에서 조선시대의 왕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을 지녔다. 여차하면 아무나 감옥에 넣고, 또 감옥에서 꺼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형식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여전히 북한과 전쟁 상태다. 휴전 상태일 뿐 종전 협정을 하지 않았다. 일각의 터무니없는 낙관적 태도와 달리 북한은 여전히 우리에게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보다 훨씬 강한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대만조차도 2018년 평시 군사법정을 폐지했다.

민주공화국은 법치국가다. 군대는 치외법권이 아니다. 삼권분립이 작동하지 않는 곳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지난 6월 6일 A 중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후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은 입장이기도 하다. 그는 A 중사의 부모에게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을 전했다. 청와대로 돌아온 후에는 박경미 대변인을 통해 “최근 군과 관련해 국민이 분노한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며 “군 사법 독립성과 군 장병이 독립적으로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군사법원법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처리를 요구했다.

이토록 집요한 내로남불
이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문 대통령의 입장에 동의한다. 사법의 독립성은 신성한 것이다. 군 장병 뿐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있어서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재판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는 인권의 최후 보루와도 같다.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문 대통령의 진심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사법부, 권력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사하는 경찰 등은 군인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사회가 사법 영역에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확립한 뒤 같은 기준을 군에 요구해야 설득력을 지닌다.

문 대통령은 완전히 반대 방향의 행보를 고집하고 있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한 김오수 검찰총장과 박범계 법무장관이 빚고 있는 마찰만 해도 그렇다. 법무부는 ‘검찰직제개편안’을 통해 검찰의 독립적 수사권을 사실상 완전히 박탈하려 하고 있는 반면, 현 정권에서 임명한 (아마도) 마지막 검찰총장인 김오수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반대의 뜻을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검찰직제개편안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미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인해 검찰은 부패, 공직, 경제, 선거, 방위사업, 대형 참사의 6대 범죄를 제외한 다른 범죄에 대해서는 인지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다. 그런데 박범계의 ‘직제개편안’은 그마저도 수사하려면 법무부의 승인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느 국가건 행정부가 수사권과 기소권을 정치적 목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하면 법치주의는 남아날 수 없다. 그래서 미국은 지역별 검찰총장을 선거로 뽑는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대륙법계 국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법무장관이 검찰총장 및 검사들의 사건 기소와 공소에 개입할 수 없도록 차단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법무장관은 구체적인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 지휘 감독한다’는 검찰청법 제8조가 바로 그 안전판이다. 저런 장치가 없다면 대한민국 검찰청은 일개 사단장이 쥐락펴락하던 군 검찰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박범계가 요구하는 직제개편안이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 검사들에게 독립적인 헌법기관의 지위를 포기하고, 법무장관의 충견이 되라는 소리다. 각 지청은 ‘총장의 요청에 따라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수사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륙법과 영미법을 떠나 법치국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퇴행이다.

반복해보자. 현재 박범계 법무장관이 요구하는 검찰직제개편안은 검찰을 송두리째 군 검찰과 같은 권력의 개로 만들겠다는 소리다. 검찰총장을 통해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만 검사가 수사를 할 수 있다는 건, 사단장의 승인을 받아 군 검찰이 수사하고 기소하던 2017년 이전의 군사법정 체제와 다를 바 없다.

군 검사와 군 판사를 군대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 군사 문제와 무관한 군인의 일반 범죄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른 방향이다. 그런데 왜 문재인 정권은 동시에 검사와 판사를 청와대의 권력에 굴복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가? 사법개혁, 검찰개혁에 있어서까지 이토록 집요한 내로남불의 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정훈교육 듣는 예비군을 수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수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6월 10일 보도되면석 국민은 더 큰 충격에 빠졌다. 공수처는 6월 4일 윤 전 총장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입건하고 수사3부(최석규 부장검사)에 배당했다고 한다. 일단 윤 전 총장은 ‘공직자’가 아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공수처가 수사에 착수했는지 의아할 뿐이다. 설령 그가 공직에 있을 당시 벌어졌던 사안이라 해도 ‘공직자’ 범죄 수사를 목적으로 하는 기구가 자연인 윤석열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상식의 선에서 납득 불가능하다.

공수처라는 조직의 태생과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 법치주의가 도입된 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법치주의를 능멸하는 제도가 생긴 적은 없었다. 현재 공수처는 여당이 독단적으로 법을 바꿔 대통령이 야당의 뜻과 무관하게 처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공직자를 대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갖는다. 공수처를 통제할 수 있는 상위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군 사법제도와 비교하자면 ‘사단장 직속 헌병+검찰’ 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군대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군대 비유로 끝내보도록 하자. 군인 및 군 경험자들은 고위 장성들을 흔히 ‘똥별’이라 부르며 조롱한다. 문 대통령은 그들의 수사권, 기소권, 사법권을 빼앗는 개혁을 하고 있다. 개혁에 원론적으로 반대할 사람은 아마 ‘똥별’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다. 군인이 ‘제복 입은 시민’으로서 온전히 대우받을 때 우리의 국방력도 질적으로 나아진다.

공직에서 물러난 윤석열은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모자 거꾸로 쓰고 정훈교육 듣는 예비군 신세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헌병을 동원하고 맹견을 풀어 한낱 예비군을 잡으려 든다. 그러면서 동시에 군사법원의 개혁을 요구한다. 이런 표리부동한 이중성이야말로 이번 정권의 본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문 대통령의 현재 모습은 그가 개혁하겠다는 ‘똥별’들과 너무도 닮아 있다.

#여군사망 #군사법정 #공수처 #윤석열 #신동아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이준석의 페미니즘 공격이 별 일 아니라는 이들을 위한 사고실험

성별 외 다른 변수를 제외하기 위해, '나경투'라는 정치인이 있다고 해보자.

나경투는 1986년생 여성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지만 국민의힘 지지층이 많지 않은 서울의 모 지역구에서 세 번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세 번 낙선했다. 하지만 말솜씨가 좋고 방송 감각이 있어서 다양한 예능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하버드 대학교도 나왔다고 하고, 뭐 기타등등 다 이준석과 동급이다.

나경투는 2021년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 출마했다. 나경투는 전통적인 국민의힘 지지층인 교회 다니는 중장년 표심을 자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경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심지어 당대표가 어찌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에도, 경선 과정에서 열변을 토했다.

  •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퀴퍼 금지
  • 군형법상 계간죄(남자 동성애 처벌) 폐지 결사 반대
  • 기타등등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성소수자 혐오

나경투의 선거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진중곤 같은 논객들이 달려들어 페이스북에서 논전을 벌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이 되고 말았다. 나경투는 자신의 성소수자 혐오를 공정이라던가, '안물안궁의 권리'라던가, 아무튼 뭔가 대충 그럴싸한 담론과 버무려 포장했다.

그리하여 진보 보수 양쪽으로부터 나경투의 혐오 선동은 사실상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한국의 여론 지형상 여론조사에서도 높은 수치를 받고, 그 여세를 몰아 당심을 자기 것으로 끌어들여, 당대표가 되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여러분은 나경투가 단지 '30대'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지지받아 마땅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나경투가 공공연하게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하고 혐오 선동을 하여 자신의 지지층을 형성한 것을 두고, "이건 어쩌면 나경투라는 인물에게 어떤 문제가 있느냐는 두번째 고민거리일지도 모른다는 증거처럼 보인다"는 식으로 말하는 칼럼을 떠올릴 수 있는가?

심지어 그 칼럼이 한국의 자칭 진보 진영의 기관지와도 같은 한겨레에 실릴 수 있다고, 그런 가능성을, 상상조차 할 수 있는가?

이준석은 남자 나경투다. 나경투는 여자 이준석이다. 당신이 나경투에게 반대한다면 이준석에게도 반대해야 한다. 게다가 가상의 사례인 나경투와 달리 이준석은 리얼이다. 나는 사람들이 왜들 이렇게 평온하게, 심지어 즐겁게, 박수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실은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너무도, 너무도 역겹다.

'조국의 시간'에 열광하는 앵무새들.. 이제 그만 자아도취서 깨어나길

[노정태의 시사哲]
나르키소스 신화로 본 악성 자아도취의 비극

강의 신 케피소스는 물의 요정 리리오페를 겁탈했다. 그렇게 태어난 나르키소스는 “소년 같기도 하고 성인 남자 같기도 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들 홀딱 반해 탄식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늘 냉담한 나르키소스는 모든 이의 구애를 뿌리칠 뿐이었다.

일러스트=안병현

헤라 여신의 시종인 요정 에코도 거절당했다. 에코는 원래 수다쟁이였지만 헤라의 저주를 받았다. 자기 말을 못 하고 남의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니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야멸차게 내뱉은 말을 자기 입으로 되풀이해야 했으니 말이다. “저리 꺼져. 네 품에 안기느니 죽는 게 나아.”

상심한 에코는 목소리와 뼈만 남았다. 그 뼈마저도 돌로 변해버렸다. 그 사연을 접한 이들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청했다. “그도 이렇게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소서!” 네메시스 역시 나르키소스에게 ‘차인’ 전력이 있는 터라, 일사천리로 청원은 접수되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버린 나르키소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물가에서 죽어버리고 만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 기록한 나르키소스 신화다.

나르키소스는 수선화가 되었다. 에코는 메아리가 되어 지금도 남이 한 말을 따라 하고 있다. 이 비극적 이야기는 수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대표적이다.

프롬은 <인간의 마음>에서 악(惡)을 탐구한다. 그가 볼 때 악의 본질은 다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죽음에 대한 사랑(네크로필리아), 자아도취(나르시시즘), 근친상간. 프롬은 이 중 상대적으로 가장 무난해 보이는 자아도취야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지목한다. 왜 그럴까?

사실 자아도취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인간 정신의 작동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태어난 직후의 아기를 생각해보자. 나와 세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울면 젖을 주고 달래준다. 모두가 나를 보며 웃어준다. 나는 곧 세상과 동일하므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나르시시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성장한다는 것은 그런 자아도취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나’의 바깥에도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나와 같지 않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 늘 벌어진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듯 ‘나’를 넘어서는 객관적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말과 같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세상에 나를 맞추는 대신 나에게 세상을 맞추려 든다. 그런 태도는 때로 창조력의 원천이 된다. 가령 스티브 잡스가 그렇다. 잡스는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고 남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일삼았다. 동료들은 잡스가 ‘현실 왜곡장’을 펼친다고 농담 삼아 빈정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리더십과 비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스마트폰 세상은 오지 않았거나 퍽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 히틀러는 어떨까. 히틀러는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했다. ‘순수한 아리안 민족’의 영광을 부활시킬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아도취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까지 그의 망상 속으로 끌어들였다. 히틀러의 개인적 자아도취는 독일 전체의 집단적 자아도취로 확장됐고, 그 속에서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악행이 벌어지고 말았다.

프롬은 종양을 진단할 때 쓰는 의학적 용어를 빌려, 자아도취를 양성(benign)과 악성(malign)으로 구분한다. 생명에 대한 사랑, 범인류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개방적 태도, 그런 것이 함께할 때 자아도취는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다. 반면 죽음과 고통을 찬미하며 가족이나 부족, 민족 같은 폐쇄적 혈통에 집착할 때 자아도취는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 자아도취가 집단적 자아도취로 커지면 그 여파는 개인을 넘어설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자아도취의 폭풍에 시달리는 중이다. 지난달 출간한 조국 전 법무장관의 책 <조국의 시간> 때문이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기술하고 있다. 요즘은 연예인 에세이도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이지 않는 편이다. 그런 자의식에 독자들이 부담을 느낀다는 판단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몇 구절 읽어보자. “제가 누구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자체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유폐 상태였다고 토로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것. 전형적 자아도취 증상이다. “이유 불문하고 국론 분열을 초래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 ‘이유’가 문제인데,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소리. 나르시시스트는 불리하면 이런 식으로 논점 일탈을 한다. 압권은 이 대목.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 내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이토록 비장한 표현에서 우리는 일본 사무라이들이 선호하는 죽음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조국의 자아도취는 양성보다 악성에 가까운 듯하다.

문제는 이 자아도취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고액 사모펀드에 가입할 재산도 인맥도 없는 사람들, 자기 자식을 인턴으로 꽂아 넣고 입시 특혜를 안겨줄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 그런 이들이 <조국의 시간>을 구입하여 인증샷을 올리며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외친다. 자신의 현실을 잊기 위해 우상(idol)에 자아를 투영하는 팬클럽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작은 나르시시스트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남들처럼 공부하고 일하고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조국과 그의 팬클럽만 모르는 것 같다. 마트에서 나뒹굴며 소리 지르는 어린이처럼 ‘무죄판결 내 거야’라며 떼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조국을 SNS에 비친 자기 모습에 넋이 나간 나르키소스라 한다면, 그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이들은 그에게 반한 에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달리 현실은 꼭 비극으로 끝날 필요가 없다. 그들 스스로는 진지한 비극의 주인공 행세를 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는 엉터리 희극일 뿐. 조국과 그의 팬들 모두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성숙한 존재가 되시기를 희망한다.

2021-06-12

'시험'을 줄이고 '테스트'를 늘리자

일본어를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 외래어를 있는 그대로 갖다 쓰는 일본어에서 '시험'[試験(しけん)]과 '테스트'는 다른 단어입니다.

'시험'은 대학교 입학을 결정한다거나, 뭐 그런 것들. '사회적 관문'의 기능을 하는 제도를 '시험'이라고 합니다.

반면 '테스트'는 좀 더 가볍고 자주 보는 것들. 공부를 잘 했는지, 진도를 따라오고 있는지, 등을 평가하기 위해 보는 것들이 '테스트'입니다.

일본어에서 '시험'과 '테스트'의 관계는 뭐랄까, '문'[門(もん)]과 '도아'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서양식 주택에 달린 문도 모두 '문'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인들에게 '문'이란 전통가옥에 붙어있는 것들이고, 대부분의 서구식 건물의 출입구를 막아주는 판자 같은 건 '도아'라고 부르니까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Meritocracy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의 실력을 키우고, 공정하게 평가하며, 학습효과를 높이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테스트'입니다. 테스트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 실력을 가늠할 수 있고, 평가도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공부도 잘 됩니다.

반면 '시험' 한 방으로 인생을 좌우하는 시스템은 어떻습니까. 물론 음서제에 비하면야 '공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험을 준비하고, 시행하고, 실패에 대응하는 등 모든 방향에서 결국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흘러갑니다. 시행횟수가 반복될수록 그렇죠.

'시험'이 그렇게나 공정한 제도라면, 멸망하기 전까지 과거제도를 굴렸던 조선이 왜 그런 나라가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시험'과 '테스트'의 구분으로 돌아와봅니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시험 중심의 나라입니다. 이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문제는 오늘날 '능력주의' 내지는 '공정에의 요구'라는 이름 하에, '시험주의'를 강화하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헌대 시험주의는 그 성격상 테스트, 특히 많은 테스트와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잦은 테스트를 통해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본래의 밑천이 다 드러나는 것은 '능력주의' 혹은 '시험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잘 보았던, 혹은 잘 볼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시험'을 통과한 후, 그 성적에 따라 본인이 불공정한 제도의 수혜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죠.

'테스트' 중심의 사회는 단지 자본가나 세습 자산가 뿐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에게도 그다지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안정적 직장과 연봉에 걸맞는 생산성을 내고 있는지 계속 평가받고 수시로 위치가 변경된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이제 한국은 고도성장기를 지난지 오래이므로, 유연안정성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유연안정성의 길이란 곧 '시험주의'에서 벗어나 '테스트주의'로 나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능력주의'라는 말에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막연한 환상을 끼얹는 일을 그만두세요. '능력주의'는 엄연히 정의와 용례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시험주의'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테스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테스트주의'입니다.

2021-06-11

'음서제 대 과거제'라는 가짜 논쟁

이준석 당선과 그에 뒤따르는 논의에 끼어들면서 느끼는 게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실력 안 되는데 빽/연줄/기타등등으로 끼어드는 놈들'에 대한 분노가 정말 크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그런 감정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논의가 '음서제 대 과거제' 수준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결국에는 '윗분'과 '아랫것'들을 구분하는 걸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역동적이면서도 약자를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사회를 원합니다. 그것은 음서냐 과거냐를 넘어서, 일단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음서제로 '양반'되냐 과거제로 '양반'되냐, 이 갈등은 '양반과 노비의 구분'이라는, 전근대적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근대적인 세계를 원합니다. 매 순간 모든 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지만 낙오자를 버리지는 않는, 그런 세상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2021년. 우리 모두 근대인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