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뷰파인더㊷] 마이클 샌델 ‘능력의 폭정’ 제대로 읽기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한 한국식 착각
● 훨씬 급진적인 샌델의 주장
● ‘공정한 능력주의’조차 비판
● 보수 하이에크와 진보 롤스의 공통점
● 시장이라는 거대한 운의 산물
● 도덕 탈 쓰고 사람 깔보는 ‘가붕게’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감을…
●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과 ‘갑질 면허증’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2022학년도 수능 첫 모의평가가 실시된 지난 6월 3일 서울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있다. [뉴스1]
그 목적의식은 책의 제목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능력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 ‘폭정’은 두 번 고민할 필요 없이 나쁘다. 불가피하다면 폭력 시위와 저항 운동을 통해서라도 벗어나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전복해야 할 무언가다. 현행 시스템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더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하버드대 교수라는 간판과 온화한 말투 덕에 잘 감춰져 있지만, 샌델의 주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이는 책의 서론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는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를 놓고 이뤄진다. (중략) 그러나 이 논쟁은 능력주의의 문제가 더 뿌리 깊은 것일 수 있음을 돌아보지 않는다.”(33쪽) 그 뿌리 깊은 문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199쪽)
‘자연 귀족정’과 ‘인위적 귀족정’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쓴 ‘공정하다는 착각’. 원제는 능력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이다. [미래엔 제공]
이는 기본적으로 능력주의에 기반을 둔 신생 독립 국가인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이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급진적인 공교육 체제를 주장하면서 한 말을 샌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제퍼슨은 재능과 미덕을 갖춘 ‘자연 귀족정’을 이야기했고, 그런 체제가 ‘부와 출생에 근거한 인위적 귀족정’을 압도하기를 바랐다.”(254쪽)
능력주의, 혹은 ‘자연 귀족정’은 완벽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공정한 여건에서 경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논쟁은 대부분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은 옳다고 전제한 후,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자’는 식으로 마무리되게 마련이다. 이는 엄밀히 말해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능력주의의 ‘보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앞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의 현실 뿐 아니라 이상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안타깝게도 이 책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제목이 달라졌고, 그러한 ‘급진적’ 맥락은 감춰지고 말았다. 심지어 표지에는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는 샌델의 문제의식과 거리가 있다. 샌델은 아주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해졌다고 치자. 모든 아이에게 학교에서, 작업장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경쟁하는 데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치자. 그러면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진 것인가?”(198쪽)
‘신동아’를 비롯해 다양한 지면에서 능력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몇 편 썼을 때 내게 돌아온 반응은 대체로 싸늘했다. 격렬한 반발을 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은 좌우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일종의 종교적 힘을 갖고 있다. 그러니 샌델의 이와 같은 급진적(radical)인 비판을 도드라지지 않게 배치한 출판사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점을 뭉뚱그려버리면 ‘공정하다는 착각’은 반쪽짜리 책이 되어버리고 만다. ‘공정한 능력주의’도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고 논증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설령 모두에게 완전히 공평한 기회를 준다 한들 능력주의는 옳지 않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하이에크에게도 시장은 필연적 당위 없어
아무리 공정한 시스템을 설계해도 지능, 재능, 근성, 체력, 건강, 인맥 등 수많은 요소가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여기까지는 독자 여러분에게도 퍽 친숙한 주장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그런 상투적인 비판을 넘어서는 책이다. 오래도록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지만 논의 수준은 평범한 대중 교양서를 넘어서고 있다.샌델은 두 철학자를 언급한다. 본인이 평생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온 존 롤스, 그리고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지적 수호성인으로 여기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샌델은 하이에크의 입장을 ‘자유 시장 자유주의’로, 롤스의 입장을 ‘복지국가 자유주의’로 이름 붙인다. 두 철학자가 자유 시장에 대해 내놓는 결론은 확연히 다르다. 롤스는 국가가 나서서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하이에크는 아주 최소한의 것을 제외하고 나면 국가의 개입은 없어야 마땅하다는 편이다.
모든 사람이 완전히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생산, 소비, 거래하는 자유 시장을 떠올려보자. 능력주의의 목적은 바로 이런 완전한 자유 시장을 만들고, 유지하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자유 시장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공정한 시장과 공정한 기회가 있다면 공정한 결과가 나오는가? 혹은, 그렇게 나온 결과를 우리는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시장경제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을 철학적 목표로 삼고 있던 롤스는 ‘아니오’라고 했다.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이에크 역시 ‘시장에서의 승패는 능력에 따른 보상이며, 따라서 능력주의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샌델이 인용하는 바, 하이에크는 “내가 가진 재능이 우연히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주는 재능인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207쪽)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소년이 축구를 잘 하는 재능을 지니고 영국에서 태어났다면 고국에서 엄청난 스타가 될 수도 있지만,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적어도 자기 나라에서 그만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어렵다. 방탄소년단의 멤버들이 1821년에 태어났다면, 물론 각자의 재능과 노력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을 수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팝 스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유로운 대중문화와 시장경제라는 전제조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떠올려볼 수 있다.
하이에크가 볼 때 시장에는 필연적인 이유나 당위가 없다. 샌델에 따르면 여기까지는 롤스 역시 같은 생각이다. 다만 두 철학자는 시장이라는 거대한 운의 산물과 그에 대한 불평등에 대한 입장이 다를 뿐이다. 롤스는 그 불평등한 결과를 정부 혹은 상위의 권력이 개입하여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 반면 하이에크는 시장 자체가 도덕과 무관하므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시장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다.
롤스와 하이에크를 명료히 다듬다
2014년 12월 3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로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동아비즈니스포럼 2014’에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치유할 대안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27세에 최연소로 하버드대에서 철학 교수가 된 샌델의 실력은 바로 이 대목에서 빛난다. 그는 두 거물 철학자의 까다로운 논의를 평이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다듬어 자신의 논지에 맞도록 제시한다. 그 과정에 롤스나 하이에크의 사상을 어느 정도 ‘왜곡’하고 있는지 따져 묻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 중요한 건 ‘공정하다는 착각’이 능력주의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비판을 담은 책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개선이 아닌 극복을 주장하고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한 논의가 퍽 오래도록 오가고 있음에도 이 점을 언급하는 서평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능력주의가 현실적으로는 잘못될 수 있지만 본래의 취지는 옳다는 확고한 믿음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샌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볼 때 능력주의는 ‘원론적으로 옳지만 현실적으로는 미흡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능력주의는 아무리 선한 목적으로 도입하고 잘 운영해도 결국은 공동체를 해치고 민주주의를 망가뜨린다. 그 본질적 속성은 교정 불가능하다. 책의 원제가 ‘능력의 폭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샌델에게 능력주의는, ‘악’이라고 말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사회적 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혈통이 아닌 재능에 따라 부와 지위를 나누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쁘다는 말인가? 이 지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서평과 인용을 통해 많이 논의된 바 있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감을 안겨준다. 그런 오만한 태도는 민주주의를 논하기에 앞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인간의 본성에 반한다.
앞서 말했듯 샌델은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운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장의 존재나 크기 역시 운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의 성공이나 실패에는 거들먹거리며 내세울 것도 없고, 위축되고 쪼그라들 것도 없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미국 사회를 점령하고 세계적으로도 번져나간 능력주의 신봉자, 테크노크라트, 고학력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을 본인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자신들과 같은 ‘능력’을 지니지 못한, ‘스마트’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멸시의 시선을 보낸다.
서울대 청소노동자와 ‘능력의 폭정’
이는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누구는 ‘가재 붕어 게(가붕게)들은 용이 되지 않고도 개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며 시혜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기도 한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보다 이렇게 도덕의 탈을 쓰고 사람을 깔보는 게 때로는 더 모멸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몰라서 그러는 걸까.한국이건 미국이건, 능력주의를 노골적으로 찬성하건 겉으로는 비판하는 척하면서 그 지배적 위치를 즐기건, 능력주의의 승리자들이 하는 행동은 비슷하다. 자식들을 어떻게든 명문대에 입학시켜 ‘능력’을 입증하려 들고, 고학력 엘리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세상의 규칙을 바꿔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한다. 이것이 바로 ‘능력의 폭정’이며, 이는 개선이 아닌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다.
적잖은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어느 정도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능력주의를 완전히 폐기하면 대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자는 것인가? 단순한 신분제 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샌델은 추첨을 통한 대학 입학,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기회의 평등이나 결과의 평등이 아닌 ‘조건의 평등’ 같은 답을 제시하지만 모두 독자를 만족시키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대체로 그렇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들어갈수록 현실의 해법을 강하게 외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공정하다는 착각’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 반대로, 우리는 이 책의 근본적인 비판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지난 6월 26일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였던 59세의 이 모씨가 사망한 사건을 생각해보자.
청소노동자를 관리하는 안전관리팀장은 새로 부임한 후 청소부를 대상으로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관악학생생활관’을 영어 혹은 한자로 써라, 대학 건물에 붙은 숫자와 명칭을 대라, 각 건물의 준공연도를 적어라 따위가 문제의 내용이었다. 고인의 유가족에 따르면 안전관리팀장은 청소노동자에게 이런 시험을 보게 한 후 점수가 낮으면 공개적으로 무안을 주었고, 그것은 고인에게 큰 스트레스를 안겼다. 건물을 청소하는 능력을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지필시험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직 사안의 전모가 밝혀졌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이것은 ‘능력의 폭정’이다. 본인들은 시험을 잘 봐서 정규직, 사무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이들이, 청소노동자를 ‘능력’이 부족하고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하며 모멸감을 줬다. 적어도 고인은 그렇게 느꼈고 고통을 가족에게 호소했다.
고작 시험 몇 개 잘 봤다고…
능력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능력주의의 횡포에 대해 비판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비단 이번에 발생한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 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고작 시험 몇 개 잘 봤다고 평생 으스대고 남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능력주의는 ‘갑질 면허증’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여겨지는 순간 능력주의는 순식간에 타락한다. 신분제에 비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장점마저 순식간에 잃고 만다. 우리는 그 어떤 시험을 봤건, 떨어졌건, 무슨 일을 하건 누구의 자식이건, 존엄한 존재로서 겸허한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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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