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1

능력주의는 ‘갑질 면허증’인가

[노정태의 뷰파인더㊷] 마이클 샌델 ‘능력의 폭정’ 제대로 읽기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한 한국식 착각 

● 훨씬 급진적인 샌델의 주장

● ‘공정한 능력주의’조차 비판

● 보수 하이에크와 진보 롤스의 공통점

● 시장이라는 거대한 운의 산물

● 도덕 탈 쓰고 사람 깔보는 ‘가붕게’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감을…

●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과 ‘갑질 면허증’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2022학년도 수능 첫 모의평가가 실시된 지난 6월 3일 서울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있다. [뉴스1]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2022학년도 수능 첫 모의평가가 실시된 지난 6월 3일 서울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있다. [뉴스1]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품고 있는 착각을 지적하면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샌델은 ‘더 나은 능력주의’, ‘더 착한 능력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능력주의 그 자체에 극복할 수 없는 결함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능력주의를 들어 엎어버리기 위해 책을 썼다.

그 목적의식은 책의 제목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능력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 ‘폭정’은 두 번 고민할 필요 없이 나쁘다. 불가피하다면 폭력 시위와 저항 운동을 통해서라도 벗어나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전복해야 할 무언가다. 현행 시스템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더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하버드대 교수라는 간판과 온화한 말투 덕에 잘 감춰져 있지만, 샌델의 주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이는 책의 서론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는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를 놓고 이뤄진다. (중략) 그러나 이 논쟁은 능력주의의 문제가 더 뿌리 깊은 것일 수 있음을 돌아보지 않는다.”(33쪽) 그 뿌리 깊은 문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199쪽)

‘자연 귀족정’과 ‘인위적 귀족정’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쓴 ‘공정하다는 착각’. 원제는 능력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이다. [미래엔 제공]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쓴 ‘공정하다는 착각’. 원제는 능력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이다. [미래엔 제공]

최근 국내에 불평등, 공정, 능력주의 등에 대한 담론이 많이 오갔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 역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렵잖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능력주의는 혈통이나 부에 따른 차별에 반대한다. 하지만 불평등 그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두뇌나 육체의 운동 능력, 예술적 감각 등 소위 ‘재능’이라 부르는 것과, 그 재능을 만개하게 해주는 ‘노력’을 합친 결과물인 ‘능력’(Merit)에 의한 차등 대우는 적극 찬성하는 게 능력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이는 기본적으로 능력주의에 기반을 둔 신생 독립 국가인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이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급진적인 공교육 체제를 주장하면서 한 말을 샌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제퍼슨은 재능과 미덕을 갖춘 ‘자연 귀족정’을 이야기했고, 그런 체제가 ‘부와 출생에 근거한 인위적 귀족정’을 압도하기를 바랐다.”(254쪽)

능력주의, 혹은 ‘자연 귀족정’은 완벽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공정한 여건에서 경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논쟁은 대부분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은 옳다고 전제한 후,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자’는 식으로 마무리되게 마련이다. 이는 엄밀히 말해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능력주의의 ‘보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앞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의 현실 뿐 아니라 이상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안타깝게도 이 책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제목이 달라졌고, 그러한 ‘급진적’ 맥락은 감춰지고 말았다. 심지어 표지에는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는 샌델의 문제의식과 거리가 있다. 샌델은 아주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해졌다고 치자. 모든 아이에게 학교에서, 작업장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경쟁하는 데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치자. 그러면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진 것인가?”(198쪽)

‘신동아’를 비롯해 다양한 지면에서 능력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몇 편 썼을 때 내게 돌아온 반응은 대체로 싸늘했다. 격렬한 반발을 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은 좌우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일종의 종교적 힘을 갖고 있다. 그러니 샌델의 이와 같은 급진적(radical)인 비판을 도드라지지 않게 배치한 출판사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점을 뭉뚱그려버리면 ‘공정하다는 착각’은 반쪽짜리 책이 되어버리고 만다. ‘공정한 능력주의’도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고 논증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설령 모두에게 완전히 공평한 기회를 준다 한들 능력주의는 옳지 않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하이에크에게도 시장은 필연적 당위 없어

아무리 공정한 시스템을 설계해도 지능, 재능, 근성, 체력, 건강, 인맥 등 수많은 요소가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여기까지는 독자 여러분에게도 퍽 친숙한 주장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그런 상투적인 비판을 넘어서는 책이다. 오래도록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지만 논의 수준은 평범한 대중 교양서를 넘어서고 있다.

샌델은 두 철학자를 언급한다. 본인이 평생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온 존 롤스, 그리고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지적 수호성인으로 여기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샌델은 하이에크의 입장을 ‘자유 시장 자유주의’로, 롤스의 입장을 ‘복지국가 자유주의’로 이름 붙인다. 두 철학자가 자유 시장에 대해 내놓는 결론은 확연히 다르다. 롤스는 국가가 나서서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하이에크는 아주 최소한의 것을 제외하고 나면 국가의 개입은 없어야 마땅하다는 편이다.

모든 사람이 완전히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생산, 소비, 거래하는 자유 시장을 떠올려보자. 능력주의의 목적은 바로 이런 완전한 자유 시장을 만들고, 유지하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자유 시장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공정한 시장과 공정한 기회가 있다면 공정한 결과가 나오는가? 혹은, 그렇게 나온 결과를 우리는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시장경제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을 철학적 목표로 삼고 있던 롤스는 ‘아니오’라고 했다.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이에크 역시 ‘시장에서의 승패는 능력에 따른 보상이며, 따라서 능력주의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샌델이 인용하는 바, 하이에크는 “내가 가진 재능이 우연히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주는 재능인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207쪽)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소년이 축구를 잘 하는 재능을 지니고 영국에서 태어났다면 고국에서 엄청난 스타가 될 수도 있지만,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적어도 자기 나라에서 그만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어렵다. 방탄소년단의 멤버들이 1821년에 태어났다면, 물론 각자의 재능과 노력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을 수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팝 스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유로운 대중문화와 시장경제라는 전제조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떠올려볼 수 있다.

하이에크가 볼 때 시장에는 필연적인 이유나 당위가 없다. 샌델에 따르면 여기까지는 롤스 역시 같은 생각이다. 다만 두 철학자는 시장이라는 거대한 운의 산물과 그에 대한 불평등에 대한 입장이 다를 뿐이다. 롤스는 그 불평등한 결과를 정부 혹은 상위의 권력이 개입하여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 반면 하이에크는 시장 자체가 도덕과 무관하므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시장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다.

롤스와 하이에크를 명료히 다듬다

2014년 12월 3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로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동아비즈니스포럼 2014’에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치유할 대안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2014년 12월 3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로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동아비즈니스포럼 2014’에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치유할 대안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두 입장에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있다. 아무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공정한 기회’를 보장한다고 해서 능력주의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 되는 건 아니라는 주장을 두 명, 아니 세 명의 철학자가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샌델 역시 ‘시장의 우연성’이라는 논제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샌델이 해석하고 인용하는 바, 보수적인 하이에크와 진보적인 롤스 모두 능력주의에 반대했다. 샌델은 본인의 능력주의 비판을 그러한 맥락 위에 배치하고 있다.

27세에 최연소로 하버드대에서 철학 교수가 된 샌델의 실력은 바로 이 대목에서 빛난다. 그는 두 거물 철학자의 까다로운 논의를 평이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다듬어 자신의 논지에 맞도록 제시한다. 그 과정에 롤스나 하이에크의 사상을 어느 정도 ‘왜곡’하고 있는지 따져 묻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 중요한 건 ‘공정하다는 착각’이 능력주의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비판을 담은 책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개선이 아닌 극복을 주장하고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한 논의가 퍽 오래도록 오가고 있음에도 이 점을 언급하는 서평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능력주의가 현실적으로는 잘못될 수 있지만 본래의 취지는 옳다는 확고한 믿음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샌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볼 때 능력주의는 ‘원론적으로 옳지만 현실적으로는 미흡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능력주의는 아무리 선한 목적으로 도입하고 잘 운영해도 결국은 공동체를 해치고 민주주의를 망가뜨린다. 그 본질적 속성은 교정 불가능하다. 책의 원제가 ‘능력의 폭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샌델에게 능력주의는, ‘악’이라고 말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사회적 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혈통이 아닌 재능에 따라 부와 지위를 나누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쁘다는 말인가? 이 지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서평과 인용을 통해 많이 논의된 바 있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감을 안겨준다. 그런 오만한 태도는 민주주의를 논하기에 앞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인간의 본성에 반한다.

앞서 말했듯 샌델은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운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장의 존재나 크기 역시 운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의 성공이나 실패에는 거들먹거리며 내세울 것도 없고, 위축되고 쪼그라들 것도 없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미국 사회를 점령하고 세계적으로도 번져나간 능력주의 신봉자, 테크노크라트, 고학력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을 본인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자신들과 같은 ‘능력’을 지니지 못한, ‘스마트’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멸시의 시선을 보낸다.

서울대 청소노동자와 ‘능력의 폭정’

이는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누구는 ‘가재 붕어 게(가붕게)들은 용이 되지 않고도 개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며 시혜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기도 한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보다 이렇게 도덕의 탈을 쓰고 사람을 깔보는 게 때로는 더 모멸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몰라서 그러는 걸까.

한국이건 미국이건, 능력주의를 노골적으로 찬성하건 겉으로는 비판하는 척하면서 그 지배적 위치를 즐기건, 능력주의의 승리자들이 하는 행동은 비슷하다. 자식들을 어떻게든 명문대에 입학시켜 ‘능력’을 입증하려 들고, 고학력 엘리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세상의 규칙을 바꿔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한다. 이것이 바로 ‘능력의 폭정’이며, 이는 개선이 아닌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다.

적잖은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어느 정도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능력주의를 완전히 폐기하면 대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자는 것인가? 단순한 신분제 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샌델은 추첨을 통한 대학 입학,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기회의 평등이나 결과의 평등이 아닌 ‘조건의 평등’ 같은 답을 제시하지만 모두 독자를 만족시키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대체로 그렇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들어갈수록 현실의 해법을 강하게 외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공정하다는 착각’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 반대로, 우리는 이 책의 근본적인 비판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지난 6월 26일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였던 59세의 이 모씨가 사망한 사건을 생각해보자.

청소노동자를 관리하는 안전관리팀장은 새로 부임한 후 청소부를 대상으로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관악학생생활관’을 영어 혹은 한자로 써라, 대학 건물에 붙은 숫자와 명칭을 대라, 각 건물의 준공연도를 적어라 따위가 문제의 내용이었다. 고인의 유가족에 따르면 안전관리팀장은 청소노동자에게 이런 시험을 보게 한 후 점수가 낮으면 공개적으로 무안을 주었고, 그것은 고인에게 큰 스트레스를 안겼다. 건물을 청소하는 능력을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지필시험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직 사안의 전모가 밝혀졌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이것은 ‘능력의 폭정’이다. 본인들은 시험을 잘 봐서 정규직, 사무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이들이, 청소노동자를 ‘능력’이 부족하고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하며 모멸감을 줬다. 적어도 고인은 그렇게 느꼈고 고통을 가족에게 호소했다.

고작 시험 몇 개 잘 봤다고…

능력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능력주의의 횡포에 대해 비판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비단 이번에 발생한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 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고작 시험 몇 개 잘 봤다고 평생 으스대고 남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능력주의는 ‘갑질 면허증’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여겨지는 순간 능력주의는 순식간에 타락한다. 신분제에 비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장점마저 순식간에 잃고 만다. 우리는 그 어떤 시험을 봤건, 떨어졌건, 무슨 일을 하건 누구의 자식이건, 존엄한 존재로서 겸허한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공정 #능력주의 #마이클샌델 #서울대청소노동자사망 #신동아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1-07-10

[노정태의 시사哲] 미군이 점령군? 낡은 역사 판타지에 빠져 '백 투 더 조선' 외치지 마라

 

[아무튼, 주말] 영화 '백 투 더 퓨처'로 본 이재명 대한민국 건국 논쟁
일러스트=유현호

미국의 작은 도시 힐 밸리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 마티 맥플라이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번 주 토요일 밤으로 예정된 댄스 파티에서 조지와 로레인이 키스하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티뿐 아니라 마티의 형과 누나의 목숨이, 아니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마티가 원래 살던 1985년이 아니라 1955년. 마티는 괴짜 과학자 브라운 박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왔다. 본의 아니게 조지와 로레인의 첫 만남을 방해해버렸다. 문제는 조지와 로레인이 마티의 부모님이라는 것. 게다가 로레인은 조지가 아닌 마티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다. 마티는 로레인의 관심을 피하면서, 조지를 더 남자답게 만들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정해진 날 정해진 장소에서 키스를 하게 해야 한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내용이다.

시간 여행을 다루는 이야기의 역사는 짧지 않다. 영국의 소설가 H G 웰스가 ‘타임머신’을 출간한 18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시간 여행 그 자체에 대한 물리학적, 철학적 고찰이 시작되려면 천재 두 명이 더 필요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불완전성의 원리’로 유명한 수학자이며 논리학자 쿠르트 괴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빠르게 움직이거나 강한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물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중 한 사람은 지구에 남고 다른 한 사람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이동하는 우주선에 탑승한 후 수십 년이 지나 지구로 돌아온다면, 지구에 남아있던 쌍둥이는 노인이 되겠지만 우주선을 탄 쌍둥이는 나이를 거의 먹지 않은 채 돌아올 것이다.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가령 인공위성의 시계는 중력의 영향을 덜 받지만 워낙 속도가 빨라서 지표면의 시계보다 느리게 작동한다. 인공위성은 미세하게나마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오차를 꾸준히 보정해주지 않으면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GPS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상대성이론 속에 살고 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두 유대인 천재는 프린스턴 대학의 고등연구소에서 만났고 곧 단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괴델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 “제가 일반 상대성이론을 이용해서 새로운 우주 모델을 만들어 봤습니다. 그 우주에서는 특별한 상상력을 동원한 장비 없이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죠.” 철학자이며 과학 저술가인 짐 홀트의 책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괴델 우주’를 검토하고 오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심란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괴델 우주가 출현하면서 시간 여행은 과학에 근거를 둔 논리 퍼즐이 되었다. 그것을 ‘타임 패러독스’라 부른다. ‘백 투 더 퓨처’도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작품이다. 스스로를 태어나지 못하게 만든다면? 아직 발표되지 않은 히트곡을 원작자에게 들려준다면? 어떤 스포츠팀이 이길지 결과를 미리 다 알아놓고 도박을 해서 돈을 번다면?

영화와 창작물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타임 패러독스를 피해간다. 그 퍼즐 게임을 보는 것이 시간 여행물의 재미 중 하나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논리적 분석은 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괴델 우주에 살고 있지 않고,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 당연한 소리다. 어떤 식으로건 과거에 영향을 준다면 같은 미래에 도달할 수 없고, 같은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면 시간 여행자의 존재가 부정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과거 위에 세워진 현재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김원웅 광복회장은 1945년 해방 정국에서 미군이 점령군이었고 소련군은 해방군이었다고 말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 등 일부 지식인은 미국의 공식 포고령에서 ‘점령(occupy)’이라는 단어를 썼으니 그저 ‘팩트’를 말했을 뿐이라며 편을 들었다.

분명한 사실부터 이야기해보자. 미군이 스스로를 ‘점령군’이라 칭한 것은 공문서의 어휘다. 반면 소련군이 스스로를 ‘해방자’라 부른 건 선전용 문서에서 나온 말이다. 미군의 표현이 증명사진이라면 소련군의 표현은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위해 필터를 잔뜩 먹인 셀카와 마찬가지다. 소련과 북한의 ‘쌩얼’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이들은 이승만이 단독 정부를 수립하지 않았거나, 혹은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과 유엔군이 패배하는 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역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거라는 망상을 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낡은 역사책에 기반한 일종의 시간 여행 판타지에 푹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리하여 진정한 민족국가를 세울 수만 있다면!

1945년, 남과 북의 조건은 거의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미군에게 ‘점령’당한 반면, 북한은 소련을 통해 ‘해방’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76년이 흐른 지금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르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쌍둥이 실험을 보는 것만 같다. 미국이라는 로켓을 타고 넓은 우주로 나간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선 반면, 소련을 통해 ‘해방’되고 중국의 품에 안긴 북한은 세계 최악의 인권 탄압 독재 국가로 주저앉아버렸다. 우리는 미국에 ‘점령’되면서 자유를 얻었고, 북한 주민들은 소련을 통해 ‘해방’된 후 압제에 시달린다. 누가 점령군이고 누가 해방자인가.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마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처럼 묘사한다. 그들 소원대로 미군이 ‘점령’하지 못했다면 그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은 존재할 수도 없었다. 전형적인 타임 패러독스다. 다 큰 어른들이 그들만의 역사 판타지 속에 허우적거리며 ‘백 투 더 조선’을 외치고 있다. 사상의 자유는 존중하지만 본인들이 낡고 후지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를 바란다. 국민은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백 투 더 퓨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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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4

아동용 카시트 의무화와 출산율 감소 - 1970년대 미국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출산율 감소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 아동용 카시트 장착을 의무화하면서, 평범한 승용차에는 애 셋을 태울 수 없게 된 시점과, 셋째 아이 출산 포기 가정이 늘어난 시점이 맞물린다는 분석.

물론 오비이락일 수 있겠지만 흥미로운 관찰이긴 합니다. 중요한 건 이런 연구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 0.8까지 떨어진 출산율을 회복해야 한다며 제대로 된 분석 없이 허구한날 여자 욕만 하고 개허접한 캠페인이나 하는 한국 사회와 여러모로 대조된다고 하겠습니다.

https://www.economist.com/science-and-technology/2020/11/26/child-safety-laws-may-reduce-the-birth-rate
 

K-방역이라고? 증오 선동하는 단체기합 통치술!

[노정태의 뷰파인더㊶] 사회적 거리두기에 나타난 文 권력사용법


● 단체기합은 왜 인간성을 말살하나
● ‘고문관’ 찾기, 동료 간 미움 조장
● 방역 핑계로 연좌제까지 쓴다?
● ‘컨트롤 타워’ 文이 비난 피하는 방식
● 정의롭지 못한 국가, 강도떼와 같아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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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5월 3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2차 코로나19 대응 특별방역 점검 회의’에서 발언을 한 뒤 마스크를 쓰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1983년생인 필자와 그 윗세대는 학창 시절 수많은 단체기합을 받고 자란 세대다. 필자 세대에서는 학교에서 학생에게 벌점을 주는 식으로 통솔한다는 개념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분단 전체가, 혹은 교실 전체가 혼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요즘 젊은 세대나 청소년들은 ‘가짜사나이’ 같은 예능에서나 봤을 단체기합이 불과 10여 년 전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학창시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이었다.

40대, 더 나아가 30대 후반까지 포괄하는 세대는 유독 문재인 정권에 우호적이다. 반대로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한국 보수 세력에는 적대적이다. 그 이유를 한 두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다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놓고 볼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단체기합을 받으며 자란 세대는 보수 정치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일제 잔재와 보수정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회과학’이라 분류되는 책을 적잖이 읽고 자랐다. 그 내용은 책과 저자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깔고 있는 전제가 있었다. 그 전제란 이렇게 요약 가능하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온갖 사회적 병폐는 근대의 산물이다. 경제 개발과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위해 ‘조국 근대화’를 추구했던 박정희는 그러므로 그 모든 병폐를 가져온 ‘슈퍼 전파자’다. 게다가 박정희는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관동군 장교로 복무한 바 있다. 박정희 그 자체가 일제 잔재이며 그러니 소탕해야 마땅하다.”

나와 내 윗세대가 치를 떠는 단체기합의 정체가 무엇인가. 군대에서 받는 기합, 얼차려 따위가 아니던가. 이를테면 이런 인식이다. “세상의 모든 나쁜 것이 군대로부터 나왔고, 한국군은 만주 관동군 출신들이 꽉 잡은 조직이며, 따라서 단체기합은 일제 잔재이며 소탕해야 마땅하다. 군인 출신 대통령을 자신들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보수 정치권은 단체기합을 주는 나쁜 놈들이다. 나는 저 나쁜 놈들이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을 찍을 뿐이지, 민주당을 ‘묻지마 지지’하는 ‘대깨문’(문재인 대통령 열성 지지층)과는 다르다.”

이것은 필자와 비슷하거나 좀 더 나이 많은 세대에 흔히 퍼져 있는 정치적 사고의 패턴을 요약한 것이다. 모든 40대가 그렇다고 장담할 수야 물론 없다. 하지만 어떤, 혹은 많은 40대는 현재의 보수 정치권을 단체기합 주는 꼴통 학교 선생이나 자신이 군대에서 만났던 말 안 통하는 윗사람과 등치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당 혹은 청와대에서 그 어떤 추문과 ‘내로남불’이 터져 나온다 해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런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를 너무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학창시절 및 군 시절 경험을 사회 일반에 지나치게 확장한다는 점에서 자기중심적인, 따라서 유치한 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도 분명 귀담아 들을 대목이 있다. 2021년 현재 당연하게 여겨져야 할 현대 사회의 규칙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강압적 폭력 행사하는 자
단체기합은 왜 나쁜가. 첫째, 잘못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책임을 뒤집어씌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안에 대해서만, 딱 잘못한 만큼만 벌을 받아야 한다. 이는 비단 단체기합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근대 형사법 체계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연좌제 금지가 바로 이 원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혹은 다른 가족이 어떤 죄를 저질렀건 그 범죄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한 가족이나 친지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 단체기합은 이런 상식을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좋게 볼 수가 없는 훈육 방식이다.

둘째, 처벌이 예측 가능하지 않게 만든다. 집단 얼차려를 받을 때는 언제나 ‘마지막 구호 붙이지 않기’ 따위 규칙이 따라붙는다. 그러면 누군가 실수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전체 인원이 받는 기합의 양이 달라진다. 이 또한 상식적으로 볼 때 전혀 납득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영국의 귀족들은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을 만들 때 국왕에게 죄형법정주의를 요구했다. 어떤 행위가 어떻게 범죄가 되는지, 그리고 그 각각의 범죄에 따라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미리 정해져 있고 그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법은 법으로서 정당성을 지닌다. 반면 단체기합은 ‘여러분이 하는 행동에 따라서 본 교관은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소리 지르는 교관과, 그 교관이 만들어낸 자의적인 엉터리 규칙,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못해 ‘삑사리’를 내는 누군가의 실수에 따라 처벌의 내용과 수준이 달라진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셋째, 같이 기합을 받는 구성원이 서로를 증오하게 만든다. 단체기합을 받다보면 누군가는 고문관이 된다. ‘마지막 동작에 구호 붙이지 않기’ 따위 이상한 규칙을 틀리는 일이 곧잘 발생한다. 그렇게 누군가 실수를 하고 다른 사람이 모두 ‘연대책임’을 지다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비합리적인 단체기합을 강요하는 것은 교관 내지 선생인데, 시달리고 있는 훈련병 혹은 학생들은 교관이나 선생이 아니라 실수한 동료를 향해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우리가 다 고생하고 있잖아’ 이런 분위기에서 졸지에 ‘고문관’이 된 사람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낀다. 즉 단체기합은 강압적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책임을 감추고, 대신 가장 어리석고 둔한 누군가에게 증오의 화살을 돌리게 만드는, 인간성 말살 기계인 것이다.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국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든 지 1년 반 정도 지났다. 온 국민은 단체기합을 받는 중이다. 특히 자영업자들이 그렇다. 적나라하게 말해보자. 문재인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K방역’이라 떠벌이는 것의 본질은 단체기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재인은 방역을 핑계로 엉뚱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예측 불가능한 정책 설계와 집행으로 국민을 불안과 스트레스에 빠뜨리면서, 결국 국민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난 7월 1일부터 전국에는 2주간에 걸친 특별방역 점검기간이 시행중이다. 지난 6월 29일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의 발표에 따르면 “수도권 감염 사례를 분석하면 방역 긴장도가 떨어져 방역수칙이 잘 지켜지지 않거나 유증상 상태에서 바로 검사받지 않는 경우가 다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코로나19 전파 가능성이 높은 업종을 대상으로 특별히 더 경계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내용이다. 여러 가지 행정적 지시 사항이 전달되는 가운데, 권 장관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방역수칙을 위반할 경우, 무관용 원칙에 따라 과태료 등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라도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방역수칙 위반이 반복되는 경우에는 해당 지역의 동일 업종 전체에 대한 운영제한 등이 적용될 수 있다.”

처음 이 내용을 뉴스를 통해 읽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정 업소가 방역수칙을 반복적으로 위반한다 해서, 해당 지역 동일 업종 전체에 대해 운영제한 등을 적용할 수 있다고? 이걸 세 글자로 하면 ‘연좌제’요, 네 글자로 하면 ‘단체기합’이다. 문 대통령이 임명한 권 장관은 빨간 모자 대신 노란색 방역 점퍼를 입은 채, 자영업자들을 향해 ‘자꾸 구호 틀리고 그러면 전원 연병장 다섯 바퀴 돈다’고 말하고 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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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주인이 ‘내일부터 6명 모임 가능’이라고 쓴 안내문에 ×표를 치고 있다. 당초 7월 1일 수도권의 모임 제한 인원이 4명에서 6명으로 늘어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1주일 연기됐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권 장관의 발표가 나온 것은 6월 28일. 이틀 후인 6월 30일에는 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7월 1일부터는 5인 이상 집합 금지, 밤 10시 이후 음식점과 카페 영업 금지 등의 제한 조치가 완화될 예정이었다. 긴 코로나19 시기를 힘겹게 보내고 있던 자영업자들은 달력이 넘어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리 재료도 주문하고 일손이 부족한 곳은 단기 아르바이트도 고용했다. 평범한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동안 인원수 제한에 부딪쳐 만날 수 없었던 이들과 약속을 잡고 식당에 예약을 하며 들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재인 정권은 그 기대를 단번에 뒤집었다. 7월 2일 0시 기준 확진자가 826명까지 치솟았으니 어떤 면에서는 불가항력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잘 따져보면 그렇게 옹호할 수만은 없는 사안이다. 6월 중순부터 확진자 수가 늘고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는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7월이 오면 모여서 먹고 마실 수 있다’는 희망찬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던지, 자영업자들이 손님맞이 준비를 하도록 수수방관했다. 그리고 7월 1일이 되기 불과 여덟 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에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6월과 같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최소 일주일 연장한다고.

이번엔 누가 ‘고문관’으로 찍힐까
자영업자들 입장에서는 어떤 기분이 들까. ‘운동장 세 바퀴 돌아’라는 말을 듣고 죽어라 뛰었는데, 뒷짐 지고 배 나온 교련 선생이 이런 소리를 하는 꼴이다. ‘너희들 태도가 불량해. 아직 반성하는 기색이 안 보여. 두 바퀴 더 뛰어!’

자영업자에게 이건 장사 준비를 했다가 엎어야 하는 경제적 손실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자영업자로서 생사가 오가는 문제다. 마치 단체기합이 그렇듯, 문재인 정권의 ‘K방역’에는 일말의 합리적 예측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 정서적 피해는 국민들 스스로가 뒤집어쓰고 있다. 국민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책임을 묻게 만들어서, ‘컨트롤 타워’인 문 대통령이 비난을 피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갓 퍼지며 맹위를 떨칠 무렵, 대구를 중심으로 특정 교회 신도 감염자가 폭증하던 무렵을 잠시 떠올려보면 무슨 말인지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콕 찍어 욕할 수 있는 대상이 자신들의 지지층이 아닐 때, 문재인 정권은 너무도 쉽게 국민을 향해 손가락질한다. 이번 확진자 증가 추세가 쉽게 꺾이지 않으면 이제는 또 누가 ‘고문관’으로 찍힐까. ‘저 고문관 때문에 너희가 다 고생하는 거 알지? 자, 다들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실시!’

예측 가능하지 않은 권력, 정책의 스트레스를 특정 계층에게만 전가하는 권력, 국민이 서로를 불신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권력은, 그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정의롭지 않다. 정의롭지 못한 국가는 강도떼와 다를 바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한 말이다. 문득 저 명언을 곱씹게 된다. 어서 이 지긋지긋한 단체기합이 끝나고 우리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코로나19 #K방역 #사회적거리두기 #자영업 #신동아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기자 프로필

신동아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6-26

수술실에 CCTV 달자고? 현대판 ‘파놉티콘’에 스스로 들어갈 텐가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조지 오웰의 ‘1984’로 본 ‘CCTV 의무화법’의 위험성

 

윈스턴 스미스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건 그가 하급 당원으로서 개성 없는 일을 하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한때 ‘영국’이라고 불렸던 오세아니아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오세아니아의 곳곳에는 지도자 ‘빅 브러더’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빅 브러더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어진 정교한 그림이다. 게다가 모든 곳에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24시간 쉴 새 없이 정권 홍보 방송을 내보내는 텔레비전이지만, 동시에 마이크와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어 모든 이의 대화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고전 반열에 오른 명작이 흔히 그렇듯이 조지 오웰의 <1984> 역시 몇몇 장면이나 구절로만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좀 더 깊은 고민을 해보도록 하자. <1984>에서 묘사하는 디스토피아의 작동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약간 공부가 필요하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감옥인 ‘파놉티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마치 도넛처럼 중앙이 비어 있는 원형 건물을 떠올려보자. 건물은 총 6층이며 층마다 감방이 늘어서 있다. 원형 건물 가운데에는 감시탑이 서 있다. 죄수들의 감방은 철창으로 막혀 있지만 시야를 가리는 요소가 없다. 반면 감시탑 창문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다. 간수는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단번에 볼 수 있지만 죄수는 자신이 감시당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구조다. 벤담은 이런 감옥을 고안하고는 그리스어로 ‘모든’을 뜻하는 ‘pan’과 ‘보다’라는 뜻의 ‘opticon’을 합쳐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들 알다시피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철학자. 그런 사람이 왜 이런 비인간적 감옥을 고안했을까? 18세기 말 상황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산업 혁명으로 고향을 떠나온 낯선 이들이 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인권 개념이 확장되면서 사람 몸을 훼손하거나 때리는 식의 처벌은 선호되지 않았다. 그 결과 전례 없이 수형자가 늘어났고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범죄자를 처벌, 교화, 재교육할 새로운 방안이 절실했다.

파놉티콘은 그런 상황에 대응하고자 고안한 시스템이었다. 벤담의 설명을 들어보자. “끊임없이 감독관의 감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나쁜 일을 할 능력과 그러한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 대부분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감시당하는 사람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하는 완전한 지배 장치, 그것이 바로 파놉티콘이다.

조지 오웰로 돌아가 보자. 1984년 4월 4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어느 날, 윈스턴은 펜을 들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짓은 그 자체로 ‘사상죄’에 해당했다. 그 이유를 독자 여러분도 이제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텔레스크린 혹은 파놉티콘의 감시를 ‘의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기에 무엇을 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권력은 국민이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응징하려 든다.

과연 소설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우리는 방방곡곡 CCTV가 설치된 세상에 살고 있다. 범죄 예방을 위한 공공 장소 CCTV의 필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째고 피를 쏟으며 목숨이 오가는 곳인 수술실 내부에도 CCTV를 설치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여론 몰이를 보면, 인권도 프라이버시도 윤리적 감수성도 모두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이런 입법 시도에 국제사회는 할 말을 잃었다. 세계의사회(WMA) 데이비드 바브 회장은 지난 22일 의사협회에 보낸 영상에서 “이 법안은 ‘조지 오웰’적 성격이 짙어 전체주의 국가의 사고에 가깝다”며 법안을 폐기할 것을 요청했다. 대리 수술이나 성폭력 등 의료진의 일탈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엄격한 규약을 확립하고 동료 간 리뷰를 강화하는 등, 효과가 검증된 다른 방법이 있다. CCTV는 그런 목적 달성에 부적합하다.

반면 부작용만은 확실하다. 전신 마취 수술은 응급 상황에 대비해 대개 완전 탈의 상태로 진행한다. 환자는 자신의 나신과 수술 과정 등을 담은 전자 기록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 방식으로는 검색도 접근도 어려운 ‘다크웹’에는 아동, 시신, 동물 등에게 성욕을 품는 자들이 찍은 온갖 끔찍한 영상이 돌아다닌다. ‘한국 수술실 영상’들은 다크웹의 핫 아이템으로 거래될 것이다. 돈과 관심을 노리는 유튜버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고, 개인적 협박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도 충분하다.

유출자를 엄벌하면 되는 것 아닐까? 잡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후약방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를 불신하면서 CCTV 영상 관리 업체는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해킹 위험도 있다. 원자력, 잠수함 등 기밀 등급 높은 자료도 털린다. 수술실 CCTV 영상이 무사할 거라고 믿는 건 허황된 꿈이다. 일단 찍은 영상은 유출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여성 연예인 등 대중의 선정적 관심이 쏠리는 사람의 수술 영상이라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안보 사항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고위급 인사의 의료 정보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수술을 받는 영상이 다크웹에서 거래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외국인, 특히 무슬림 여성들의 의료 관광 수요는 기대할 수조차 없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심지어 중국마저도 수술실 내 CCTV를 의무화하지 않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84>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윈스턴의 저항은 실패로 끝난다. 사상 경찰에 체포된 그는 2+2=4가 아니라 5라고 대답하라고 강요당하며 세뇌된다. 결국 오세아니아의 대다수 국민처럼 진심으로 빅 브러더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감시탑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파놉티콘의 죄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CCTV는 감시 도구이며 인권침해 수단이다. 의료인에 대한 불만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일부 정치인이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부추겨 국민 스스로 파놉티콘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건 정말 나쁜 정치다. 파놉티콘의 죄수가 아닌 시민 한 사람으로서, 나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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