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4

탈북자는 내치고 아프간 난민은 환대하는 文정권의 이중 잣대

 

[노정태의 시사哲]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의 '무조건적 환대'는 가능할까

1815년 10월, 프랑스. 디뉴 교구 미리엘 주교의 집에 낯선 이가 찾아왔다. 한동안 자르지 않은 더벅머리에 초라한 행색을 한 그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노란색 통행증에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장 발장, 석방된 강제 노역수. 도형장에 십구 년 동안 있었음. 절도 및 가택 침입으로 오 년. 도주 미수 네 번, 십사 년. 이 사람은 매우 위험함.’

미리엘 주교는 그를 쫓아내지 않았다. 장 발장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침대에 새 시트를 깔아주었다. 가정부가 소박한 식기에 음식을 내 오자 손님을 맞이할 때 쓰는 은제 식기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주교는 장 발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곳은 저의 집이기보다 당신 집입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당신 것입니다. 당신 이름은 저의 형제라 합니다.”

일러스트=유현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묻지 않고, 그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은 채, 순수한 박애의 마음으로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미리엘 주교 모습에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느낀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철학적 화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환대’(hospitality), 그중에서도 ‘무조건적 환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환대를 두 종류로 구분했다. 흔히 생각하는 환대는 ‘조건적 환대’다. 손님이 누구인지, 주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 이번에 베푼 환대가 나중에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올지 등의 조건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따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대로 ‘무조건적 환대’란 그러한 계산 없이, 아무 질문도 고민도 없이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환대에 대하여>에서 데리다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편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환대 개념을 파헤쳐 들어간다. 그에 따르면 이방인(xenos)에게는 관용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또한 주인에게는 이방인을 환대할 의무가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현대에도 더러 남아 있다. 중동이나 서남아시아 유목민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때까지 대접한다. 알래스카의 이누이트족은 손님이 아내와 동침할 수 있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 기준에서는 터무니없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환대가 법으로 정해져 있거나 어길 수 없는 관습으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낯선 이에 대한 성대한 대접마저도 결국은 조건적 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조건적 환대란 무엇인가? ‘너는 이방인을 환대하라’는 명령과 지시가 없는데도 이방인을 환대하는 것이다. 법 없는 법이며, 명령하지 않고 요청하는 호소에 가깝다. 따라서 무조건적 환대는 이상적 지향점으로 작동할 뿐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해체(deconstruction)의 철학자인 데리다는 난해한 논의와 현란한 말장난으로 ‘악명’ 높은 사람이다. 철학이란 이름으로 비현실적 요구를 들이밀지 모른다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환대에 대하여>는 ‘환대’에 대한 서구 지성계의 통상적 논의와 결이 다르다. 무조건적 환대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현실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롯과 두 딸 이야기를 인용한다. 소돔에 사는 롯의 집에 두 천사가 사람 모습을 하고 찾아왔다. 롯은 ‘조건적 환대’에 따라 손님을 맞이한다. 그런데 악한들이 찾아와 손님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조건적 환대’를 넘어 ‘무조건적 환대’를 지향하는 롯은 두 딸을 대신 내놓으려 했다. 성경에는 마치 미담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데리다는 물음표를 던진다. 롯의 환대는 “가정의 폭군, 아버지, 남편, 그리고 어른인 집주인”의 독단적 횡포 아닐까? 이방인을 보호하기 위해 딸을 강도에게 바친다면 그러한 환대는 평화인가, 폭력인가?

우리 현실로 돌아와 보자. 아프가니스탄은 대한민국과 지리적으로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거리가 멀다. 아프가니스탄의 공식 언어는 파슈토어와 다리어인데, 통역을 구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다. 결정적으로 우리 정신 세계는 불교와 유교, 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형성된 반면 아프가니스탄 난민은 대부분이 무슬림이다. 공통점을 하나 찾다 보면 차이가 열 가지 보일 만큼 서로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환대를 필요로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민이라는 주제가 한국 사회에 제시된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실속 있는 논의로 이어진 적은 없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담론을 생산해야 할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진보 진영의 지적 게으름이 눈에 띈다. 마치 연예인이나 저명인사처럼 앞뒤 맥락 없이 무조건적 환대를 외치는 것만으로 그들의 역할을 다한 것인 양 굴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더 다양한 맥락의 난민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문화, 풍습, 종교, 인종, 언어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꾸준히 논의해야 한다. 북한이란 존재도 잊어서는 안 된다. 탈북자 또한 일종의 난민이라고 볼 때, 우리는 매년 천 명이 넘는 난민을 받고 있다. 그러나 탈북자를 야멸차게 내몰아 국제 인권 단체들의 지탄을 받던 문재인 정권은, 우리 정부에 협력한 아프가니스탄 난민에 ‘특별 기여자’ 자격을 부여해 난민에 대한 사회적 논의마저 원천 봉쇄하고 ‘국뽕’ 소재로 삼았다. 그 홍보용 사진을 찍겠다고 우리 국민인 공무원이 빗속에서 무릎 꿇고 우산을 들게 했다. 이방인을 환대한답시고 같은 국민을 학대하며, 같은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다. 문재인 정권의 환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데리다의 논의로 돌아와 보자. 무조건적 환대는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지향하면서 가능한 것의 영역을 넓혀가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은식기를 훔쳤고 발각됐지만 미리엘 주교는 은촛대까지 선물로 주며 장 발장을 감쌌다. 그 환대에 감화된 장 발장은 19년 옥살이에 따른 증오를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우리에게 찾아온 그 모든 이방인에게 우리의 환대가 기적의 씨앗이 되기를 희망한다.

2021-08-29

새벽 4시의 폭주..北 기습남침 뺨치는 巨與 국회농단

 

[노정태의 뷰파인더㊽] '언론재갈법' 강행, 마구잡이 입법독재

● 국민 잠든 새 기습적 단독 처리
● 컵라면 끓이듯 법을 대하는 與
● 87년 체제의 관습 ‘법사위는 野에’
● 법사위 힘 실컷 남용 뒤 권한 축소
●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의 짬짜미?
● 최후의 방패, 대통령 법률 거부권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8월 25일 오전 3시 54분,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은 국민의힘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처리 직후 여당 의원들은 웃으며 자축했다. 오른쪽부터 민주당 김영배 김용민 김승원 의원. 김남국 의원(왼쪽)은 김영배 의원과 주먹 인사를 나누는 박주민 의원(왼쪽 두 번째)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8월 25일 새벽 4시. 세상이 조용히 잠들어 있을 시각. 국회는 시끌벅적 했다. 법제사법위원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여당 단독으로 통과됐다.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강행처리한 법안은 언론중재법만이 아니었다. 수술실 폐쇄회로(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의료법 개정안, 2030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35% 이상으로 하는 탄소중립법 개정안, 사립학교 교사 신규채용 시험을 교육청에 의무적으로 의탁하도록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 등도 일사천리로 본회의에 넘어갔다.

76년 2개월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북한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국군은 그렇게 대대적인 기습이 있으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이내 국군은 낙동강까지 속절없이 패퇴했다. 한국전쟁의 시작이었다.

대단히 과격한 비유를 하는 이유가 있다. 민주당이 저지르고 있는 입법 폭주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전달하기 위해서다. 민주당은 국민이 잠든 사이에 상식 밖의 법 조항을 들이밀고, 문제가 제기되면 즉석에서 떡 주무르듯 늘리고 줄이고 붙이고 잘라내 가는 식으로 대충 만든 법을 당장 통과시켜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것은 국정농단보다 심각한 국회농단이며 입법독재다.

법치주의 파괴라는 害惡

문재인 정권의 가장 큰 실패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국민은 입을 모아 '부동산 정책'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실패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큰데, 그런 그마저도 지난 5월 10일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정말 부동산 부분만큼은 정부가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하지만 나는 문재인 정권이 남긴 가장 큰 해악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법치주의 파괴다. 부동산 문제 역시 법치주의 파괴와 무관치 않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니 원천봉쇄한 채 강행처리한 임대차 3법을 떠올려보자.

야당의 반대 논리는 이랬다. 이렇게 무리하게 법을 만들어버리면 전세가가 급등한다. 전세가가 급등하면 집값이 오른다. 집값이 오르면 전세가도 덩달아 오른다. 강남 아파트 가격을 잡겠다고 공급을 늘리는 대신 수요를 찍어 누르기 위한 정책을 만들면 풍선효과로 인해 오히려 전국의 집값이 급격하게 오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 모든 우려는 현실이 됐다. 강행 처리된 임대차 3법이 시행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문 대통령은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만은 실패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임대차 3법이 집값 상승의 원인이라고 인정한 것은 아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의 원인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 임대차 3법을 졸속으로 만들고 억지로 통과시킨 과정 전체에 대해 반성을 할리 만무했다.

임대차 3법만이 아니다.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엉터리로 만들고 힘으로 통과시킨 악법은 즐비하다. 통과를 앞두고 있는 언론중재법, 의료법, 탄소중립법, 사립학교법 뿐만이 아니다. 이미 통과된 공수처법을 비롯해 소위 '검찰개혁'과 관련된 온갖 법 역시 마찬가지다. 그 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기존 법체계와 충돌하지 않는지, 예상되는 부작용과 문제 등은 없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반성 따위는 하지 않았다. 마치 컵라면 끓이듯 뜨거운 물만 붓고 익기도 전에 후루룩 마셔버린 셈이다. 즉, 민주당과 청와대는 애초에 법을 법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韓 민주주의의 린치핀(linchpin)

1987년 민주화 이후 국회 법사위원장은 늘 원내 제2당에게 돌아갔다. 원내 제1당이 국회의장직을 갖고, 제2당이 법사위를 갖는 암묵적 룰이 통용됐다. 때로는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대통령이 속한 여당은 원내 제1당이기도 했다. '법사위는 야당의 것'이라는 암묵적 룰이 17대 국회부터 성립해 20대 국회까지 이어져 왔다. 그렇게 '룰'이 생겼다. 법사위원장은 야당 몫,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국룰'이었다.

법사위의 역할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회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 법을 만들고 예산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정부 각 부처가 제출한 예산안은 그에 해당하는 국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심의를 거친다. 그리고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사를 거쳐 본회의에서 의결된다. 예산 문제에 있어서는 각 상임위의 힘이 크고,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막강한 권력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은 구조다.

반대로 법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는 법사위 권한이 막중하다. 2021년 8월 25일 이전 기준으로 말해보자면 그렇다. 법사위는 각 상임위에서 제출된 법안을 검토하고 심사하며 심지어 법안의 내용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국회 내의 국회'라는 둥, '상원'이라는 둥, 법사위의 큰 권한에 대한 불만의 여론이 적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 상임위원회가 다른 상임위원회에 비해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갖는 구조는 원론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고등학교 사회탐구 영역을 풀 수 있을 정도의 지식만 있어도 법사위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법은 모든 국민을 상대로 구속력과 강제력을 지닌다. 아무리 대단한 명분과 좋은 뜻이 있다 한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서는 안 된다. 모든 방면에서 충분한 심사숙고를 거쳐야 한다. 함부로 만든 법은 그 어떤 흉기보다 더 위험하다. 법안을 한 줄 한 줄 꼼꼼히 검토하고 확인하여 본회의로 넘기기 위한 최종 관문으로 법사위가 중요한 이유다.

87년 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관습 중 하나가 바로 '법사위는 야당에'였던 것도 그래서였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명시적 권력이 굉장히 큰 나라다. 게다가 정부 산하 조직이 청와대의 눈치를 보며 그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제왕적 대통령제다.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국회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법을 만들고 예산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총괄하는 법사위, 그 중에서도 법사위원장이라는 자리의 무게가 막중할 수밖에 없다. 그 권한이 과도하고 본래의 기능 이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옳건 그르건, 법사위원장이라는 자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바퀴가 빠지지 않게 해주는 린치핀(linchpin)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자체 의석과 자신들에게 동조하는 위성정당을 합해 180석이 넘는 '거여' 체제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모든 상임위와 법사위원장까지 독식해버렸는데, 바로 이 린치핀을 뽑아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87년 체제 출범 이후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전례 없는 길이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민주당은 마치 제대로 길들이지도 못하는 말의 고삐를 잡고 끌려가는 철부지 기수(騎手)처럼, 법사위의 힘을 제대로 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천방지축 날뛰고 말았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운데)가 8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여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강행을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자칭 '민주 투사'들의 행태

새로 구성된 여야 간 원내지도부의 합의에 따라 21대 국회 후반기에는 국민의힘이 법사위원장 자리를 가져갈 예정이다. 민주당은 어째서 법사위원장을 순순히 내줬을까? 조건이 있었다. 국회법을 개정해 법사위의 기능을 체계·자구 심사로 한정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래도 법사위는 강력하지만, 이전과 같이 '상원' 노릇은 못 하게 막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들이, 법사위를 넘기기 직전에, 바로 그 법사위가 지닌 막대한 힘을 이용해 온갖 법안을 누더기로 만들고 대충 땜질해가며 입법 폭주를 감행하고 있다. 8월 25일 법사위가 수정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당초 내용 중 징벌적 손해배상 요건이 되는 '명백한 고의 또는 중과실' 문구에서 '명백한'을 삭제했다. 또 '보복적이거나 반복적인 허위·조작보도로 피해를 가중시키는 경우' 문구에서 '피해를 가중시키는 경우'라는 표현이 빠졌다. '허위·조작보도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은 경우'라는 단서 조항은 아예 없애버렸다.

기술적인 내용은 복잡하지만 결론은 동일하다. 잘못된 보도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입증책임을 언론사에게 쉽게 떠넘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국과 비슷한 규모의 물질적 부를 이루고 있는 그 어떤 국가도 이런 식으로 법을 만들지는 않는다. 게다가 자신들은 실컷 법사위의 권한을 남용하더니, 상대방에게 넘겨주기 직전에 그 권한을 대폭 축소하면서, 여전히 스스로를 민주 투사인 양 행세하는 정치 집단 역시 해외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수의 의석을 앞세운 폭거이며 의회독재다.

이런 광기의 행보를 막을 방법이 없을까. 사실 법사위 말고도 한 장의 카드가 더 있다. 헌법 제53조에 규정된 법률안 거부권이 바로 그것이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을 공표하는 최종 관문으로, 정부에 이송된 법률안에 15일내로 이의를 표명하고 국회로 되돌려 보낼 수 있다. 물론 대통령이 직접 법률안의 일부를 수정하거나 폐기를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돌려보내진 법안은 과반수가 아닌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어 의결해야 법적 효력을 얻을 수 있다. 입법부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행정부가 갖고 있는 최후의 수단인 셈이다.

8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언론중재법 강행처리 중단 촉구 정의당-언론현업4단체 기자회견에서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뉴스1]

흔들리는 세계사의 기적

통상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는 바람직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설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민주당이 입법 독재를 하고 있으며 청와대가 그것을 사실상 방조 하고 있다.

8월 17일 문 대통령이 한국기자협회에 공문을 보내 "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둥"이라고 칭송하더니, 8월 19일에는 청와대 핵심관계자가 서면 브리핑을 통해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입법적 노력도 필요하다"고 밝히는 식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관련해 "청와대는 전혀 관여한 바 없다"는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의 8월 23일 국회 발언을 믿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동아시아, 아니 세계사의 기적이다. 식민지에서 군사독재를 거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보석과도 같다. 이 찬란한 유산이 민주당과 청와대의 짬짜미 입법 독재로 인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은 정말 중요하다. 말도 안 되는 법을 만드는 국회를 향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이 절실하다.

#언론중재법 #입법폭주 #더불어민주당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8-22

조국·추미애·김의겸의 꿈은 이루어진다? 폴란드를 보라!

 

[노정태의 뷰파인더㊼] 더불어민주당과 폴란드 우파의 데칼코마니

● 절대 다수 의석 ‘입법 폭주’의 일상화
● 한 언론인 출신 의원의 ‘관제 야당’ 노릇
● 법과 정의당(PiS)의 ‘검찰·사법·언론 개혁’
● 법무장관이 검찰총장 겸직하도록 법 바꿔
● 여당이 판사 뽑는 식의 법안까지 발의
● ‘골칫거리’ 방송사 겨냥 표적 법안도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8월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도종환 위원장의 회의 진행을 막으며 항의하고 있다. [뉴스1]
8월 18일,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문체위) 안건조정위원회를 통과했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마련된 안건조정위원회는 여당 3명과 야당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심사를 거치도록 돼있다. 문제는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이 비교섭단체 야당 몫으로 안건조정위원에 배정됐다는 점이다. 그는 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역임했고 민주당의 언론중재법 수정 과정에도 적극 참여했다. 누가 봐도 여당으로 분류돼야 마땅한 사람이 일종의 '관제 야당' 노릇을 하여 편법적으로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했다.

이튿날 오전 민주당은 문체위 전체회의를 열고 언론중재법 개정안 단독처리를 강행했다. 민주당은 이날 문체위를 통과한 개정안을 오는 25일 본회의에서 최종 통과시킨다는 방침이다. 그간 민주당이 주요 핵심 과제를 국회 내에서 처리해온 방식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입법 폭주'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과 열린민주당을 제외하면 이 법을 찬성하는 집단은 없다. 심지어 정의당도 반대한다. 한국기자협회, 관훈클럽, 한국신문협회 등 국내 언론 단체 뿐 아니라 1948년 설립돼 60여 개국 1만5000여 언론사가 소속된 세계 최대 규모 언론단체인 세계신문협회(WAN-IFRA)도 공식적으로 반대의 뜻을 밝혔다. "한국 정부와 여당 등 관계기관은 성급히 마련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 전 세계적인 비난 여론에 직면한 셈이다.

세계신문협회가 단호한 반대의 뜻을 밝힌 이유가 있다. '가짜뉴스 척결' 등을 명분 삼아 언론을 탄압하며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이 한국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추세로 언론 옥죄기를 허용하면 한국 민주주의는 폴란드 수준으로 퇴행할 수 있다.

민족주의, 소수자 혐오, 포퓰리즘

역사적으로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처지였다. 외세에 의해 침략과 수탈을 겪은 역사를 곱씹으며 '민족적 서사'로 삼는다는 점에서 한국과도 유사한 면이 있는 나라다. 그러나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돼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한 식민지 조선과 달리,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동부지역은 소련으로, 독일 북동부 및 서부지역은 폴란드로 편입되는 국경 정리가 이뤄졌다. 결국 폴란드는 소련의 영향권 하에 떨어지고 만 셈이다.

오랜 환란과 분단을 겪은 후 소련의 강압적 통치까지 받게 된 폴란드. 소련의 영향 하에 공산당 정부의 독재가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련의 역사는 레흐 바웬사라는 영웅을 낳았다. 전기 기술 노동자 출신인 그는 공산당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자유 노조 운동'을 조직하며 정치 거물로 성장해 나갔다. 공산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바웬사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등 강력하게 맞섰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1980년대 말부터 동구권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바웬사는 1990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

직선제로 뽑힌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폴란드의 정치적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995년 바웬사는 민주좌파연합 총재 크바시니에프스키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 후 2005년 9월 총선 및 10월 대선을 계기로 폴란드 좌파는 현재 집권 세력인 법과 정의당(PiS)이 주도하는 우파 연합에 권력을 내주고 소수 세력으로 전락하게 됐다.

법과 정의당은 2007년 중도우파 시민연단에 밀려났지만 2015년 이후 재집권에 성공했다. 2019년 10월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면서 폴란드 역사상 최초의 정권 연장을 이뤄냈다. 문제는 그동안 폴란드의 민주주의가 여러모로 큰 타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법과 정의당의 집권 전략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폴란드의 민족주의적 감성에 호소하는 반(反) EU(유럽연합) 정서 부추기기. 둘째, 폴란드인 대다수가 믿고 있는 가톨릭의 보수적 정서에 호소하기 위한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 정서 부추기기. 셋째, 중산층 이하 저소득층의 표심을 직접 끌어오기 위한 현금 살포 복지 정책.

민족주의, 소수자 혐오, 포퓰리즘. 이 세 가지 요소를 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기시감이 든다. 물론 민주당은 스스로를 국민의힘에 비해 '진보' 또는 '개혁'에 가깝다고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지금 대한민국의 집권 여당이 보여주는 행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당은 자신들이 '민주화 세력'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며 정당성의 근거로 삼지만, 실상을 놓고 보면 폴란드 우파 정당과 매우 흡사한 면이 많다.

법무장관이 곧 검찰총장인 나라

2020년 12월 10일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왼쪽)과 윤호중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더불어민주당)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이 통과된 뒤 주먹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2015년 10월, 법과 정의당은 8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 후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검찰을 정권의 사냥개로 만들고, 법원과 판사의 독립성을 빼앗는 것을 골자로 한 '사법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법무장관이 검찰총장을 겸직하도록 법을 바꿨다. 폴란드는 대통령에게 최소한의 권한과 상징성을 부여한 이원집정부제 국가다. 총선을 통해 집권 여당을 뽑고 총리가 실권을 쥔다. 법무장관을 총리가 임명하는데, 그 법무장관은 검찰총장직을 겸임하므로, 결국 모든 검찰 권력을 아무런 제어 장치 없이 여당이 독점하는 셈이다.

우리가 '조국 사태' 이후 목격해온 검찰과 청와대의 갈등을 떠올려보자.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대통령의 (암묵적) 뜻을 어기고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과 조국 전 법무장관 관련 사건들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은 인사권을 남용하고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면서 윤석열을 막으려 했지만 모든 것을 뜻대로 추진할 수는 없었다. 임기를 보장받는 검찰총장직을 두고, 법무장관 및 청와대 권력이 검찰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 때문이었다.

검찰총장이 법무장관의 뜻에 따라 호락호락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윤석열-추미애 갈등의 내용이었다. 만약 한국이 폴란드식의 '검찰개혁'을 이룬 상태였다면 그런 일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법무장관이 곧 검찰총장인 나라, 그리하여 집권 여당이 검찰의 칼자루를 쥐고 제약 없이 휘두를 수 있는 나라, 조국과 추미애가 꾸던 '검찰개혁'의 꿈이 폴란드에서는 이미 실현돼 있었다.

검찰개혁 뿐만이 아니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사법개혁' 역시 폴란드가 우리의 '선진국'이다. 2019년 말, 법과 정의당이 발의한 법안의 내용을 살펴보자. 판사들이 '정치 활동'을 한 혐의가 있다면 처벌할 수 있다. 국가사법평의회에 지명된 판사들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하면 해당 판사는 벌금형 또는 해임 등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국가사법평의회는 본래 판사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직으로, 동료 판사에 의해 선출된 판사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2018년 법과 정의당은 법을 개정해 하원에서 국가사법평의회 위원을 지명토록 했다. 앞서 살펴보았듯 폴란드는 내각제의 성격이 큰 이원집정부제 국가다. 하원에서 국가사법평의회 위원을 지명한다는 것은 집권 여당에서 판사를 뽑는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삼권분립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방향의 '사법개혁'이 이뤄진 것이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사법개혁' 역시 큰 방향성에선 동일하다. 가령 지난 8월 13일, 민주당 김용민, 민형배, 황운하, 김승원, 윤영덕 의원과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으로 구성된 강경파 성향 모임 '처럼회'는 조국 전 장관에 대한 2심 판결에 반발하며 "재판이 사법부 독립의 미명 하에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법부에서 나오는 재판 결과가 자신들의 마음에 안 드니 '개혁'해버리겠다는 의미다. 추미애 전 장관 측은 "처럼회의 노력을 적극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폴란드의 경우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민주당의 '사법개혁'이 향하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민영방송사 겨눈 '언론장악법'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이 나왔는데 '언론개혁'이 빠질 수 없다. 현지시각으로 8월 10일, 법과 정의당이 추진하는 '언론장악법'이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핀란드 최대 민영방송사 TVN은 법과 정의당의 골칫거리였다. 이에 법과 정의당은 '비(非)EU 자본의 폴란드 언론사 소유 금지법'을 추진했다. 미국 디스커버리 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TVN을 강제로 매각하게 만들어 자신들의 영향권 내로 포섭하거나 사세를 꺾기 위한 표적 법안이었다.

이런 행보가 국제 사회의 반발을 불러오지 않을 수는 없다. 폴란드 국경을 넘어 EU와 미국까지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안이 되고 말았다. 미국으로서는 자국의 미디어 그룹이 지니고 있는 자산을 강제 매각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민주주의 이전에 자국 기업 보호 차원에서라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폴란드 국민에게는 폴란드 언론이 필요하다"며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지만 법과 정의당의 '언론개혁'은 전에 없이 큰 반발에 부딪힌 상태다.

너무도 노골적인 언론 장악 시도 앞에 법과 정의당과 연정을 꾸렸던 군소 야당들이 반기를 들었다. 협정당 대표이자 부총리 겸 경제개발부 장관인 야로슬라프 고빈이 연정 탈퇴를 선언했다. 폴란드 하원은 전체 460석인데 그 중 법과 정의당은 198석, 협정당은 10석을 갖고 있다. 여당의 단독 과반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에 군소 야당과 연정을 맺고 있었는데, 협정당이 이탈하면서 232석이던 연정이 222석으로 줄어 과반이 붕괴됐다. 8월 22일 현재 폴란드 정국은 안개 속에 빠져 있다. 이르면 올 가을 조기 총선이 치러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 등 온갖 좋은 말을 갖다 붙여가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불행 중 다행히도 폴란드는 법과 정의당의 하원 의석이 그리 충분치 않았고, 연정을 이루던 군소 정당들이 이탈하면서 정치가 새로운 국면으로 향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민주당만 놓고 봐도 171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법사위를 비롯한 모든 상임위를 민주당이 독식한 상태다. 내년 대선 결과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과 폴란드, 두 나라의 정치에 행운이 있기를 빌어본다.

#언론중재법 #검찰개혁 #사법개혁 #조국 #추미애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8-21

아프간의 비극? 대한민국은 우리 손으로 지키고 만들어온 세계사의 기적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300′과 자유를 위한 항전
탈레반의 카불 장악이 준 교훈

흙과 물. 페르시아에서 온 사신의 요구는 명확했다. 크세르크세스 황제에게 복종하는 뜻으로 스파르타의 흙과 물을 바쳐라. 그러면 영원한 번영과 평화를 제공할 것이다. 거절한다면? 황제의 군대는 땅을 뒤덮고 강물을 모두 마셔버릴 정도로 많다. 그에게 저항하는 것은 그저 미친 짓일 뿐이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생각이 달랐다. 페르시아 황제의 사신을 우물로 걷어차며 레오니다스는 외친다. ‘미친 짓? 여긴 스파르타야!’ 그는 결사대 300인을 이끌고 좁은 길목을 막아선 후 처절한 싸움을 시작한다.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 테르모필레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300>의 내용이다.

일러스트=유현호

<300>은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6년 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작품이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근육질 전사들의 마초적 함성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원작 그래픽 노블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과잉된 연출 역시 ‘고상한’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 평론가와 지식인들은 제대로 비판조차 하지 않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중 다른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 매우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슬라보예 지젝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2007년 Lacan.com에 기고한 ‘진정한 할리우드 좌파(The True Hollywood Left)’라는 글에서 지젝은 <300>에 대한 독창적 해석을 펼쳤다. <300>은 야만적 약소국이 문명적 강대국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스파르타가 야만인이라고? 우리 편 주인공은 무조건 선하고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보면, 맞는 말이다. 스파르타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신체검사를 하여 기형이거나 발육 상태가 좋지 않으면 내다 버려 죽게 한다.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해 아이를 일곱 살 때부터 인간 병기로 길러낸다. 아이들은 남을 때리고, 속이고, 훔치고, 심지어 죽여서라도 자기 목숨을 지켜야 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집단생활을 하고, 검소한 삶을 강요받으며, 음악과 시와 예술을 즐기지 못한다.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병영국가인 것이다.

반면 페르시아는 어떨까? “나는 관대하다.” 크세르크세스가 레오니다스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하는 말이다. 온갖 부와 풍요가 넘쳐흐를 뿐 아니라 스파르타와 달리 ‘다양성’을 존중하기까지 한다.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그렇다. “다양한 인종, 레즈비언과 게이, 장애인 등 모두가 뒤엉켜 난교를 벌이는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은 일종의 다문화주의 라이프스타일의 낙원처럼 묘사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영화 <300>을 보며 스파르타를 미국에, 페르시아를 이라크에 대입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지젝에 따르면 그렇다. 대신 우리는 <300>을 보며 자유와 규율이 지니는 역설적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규율을 따를 수도 있고, 규율을 내던진 채 자유만 탐닉하다 보면 자유를 잃을 수도 있는 부조리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딸기 맛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두고 고민하는 안락한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엄격한 규율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사회계약론>을 쓴 장 자크 루소라든가, 프랑스 혁명 당시 가장 격렬한 평등주의를 주장했던 자코뱅 당원들은 아테네가 아닌 스파르타를 그들의 이상향으로 삼고 있었다. 자유를 위한 복종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300>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편안함과 자유를 포기한 전사들이 그리스 전체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영웅담이다. 얼핏 보면 모순처럼 보이는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광복절을 축하하고 있던 8월 15일, 지구 반대편에서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게 순식간에 함락된 것이다. 미군 철수가 시작된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일부 용맹한 이가 없지 않았으나 대다수 아프간 정부군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않은 채 물자, 예산, 장비 등에서 뒤떨어진 탈레반에게 백기를 들고 말았다.

탈레반은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들의 야만적 인권유린 행태는 21세기가 아니라 19세기 기준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문명 세계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카불 함락을 슬퍼하며 한국 대사관 현지 직원 등 위기에 빠진 이들, 특히 여성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300>을 통해 확인한 자유의 역설 때문이다. 탈레반이 마치 스파르타 결사대처럼 싸우는 동안 아프간 정부군은 크세르크세스의 노예 부대처럼 마지못해 싸우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이라는 ‘관대한 제국’의 영향권 안에서 자유와 문명을 누리면서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일갈했다시피 그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려 들지 않았다. 미군이 떠난 후 카불이 함락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었을까.

자유는 남이 대신 지켜줄 수 없다. 베트남 전쟁에 이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잔인한 진리다. 반면 우리는 북한의 기습 남침을 당한 후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려났지만 전선을 사수한 후 반격하여 국토를 되찾았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기대와 달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그 처참했던 세계 최빈국은 오늘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 있다. 우리는 스파르타처럼 싸우고 일해서 아테네 같은 풍요와 문화와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일부 좌파는 대한민국을 ‘미제의 식민지’라고 비하해왔지만 그들은 틀렸다.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우리 손으로 지키고 만들어온 세계사의 기적이다.

<300>의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스파르타군은 무려 사흘이나 버텼지만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동안 전열을 갖춘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싸워 페르시아를 격퇴한다. 진정한 동맹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연이어 전해지는 아프가니스탄의 비극 앞에서 스스로 묻게 되는 질문이다. 우리는 페르시아의 노예인가, 아니면 그리스의 자유인인가?

2021-08-15

광복절에 생각한다, 최재형家의 애국가 4절 제창을

 

[노정태의 뷰파인더㊻] MZ세대가 이해하는 애국주의

● 애초 논란 될 이유조차 없는 사안
● 자녀·며느리 강요당해? 초점 잘못된 비판
● 美 철학자 로티, 애국이 진보운동 동력
● 애국심 부정해야만 진보? 20세기 유물!
● ‘레드 콤플렉스’와 ‘태극기 콤플렉스’를 넘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8월 4일 경기 파주시 문발동 미라클스튜디오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하기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동아DB]
지난 8월 4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대선 출마의 뜻을 밝혔다. 동시에 '중앙일보'를 통해 후보자 본인과 가족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여럿 공개했다. 그의 아버지인 고(故)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을 중심으로 한, 요즘 보기 드문 대가족의 단란한 장면들이 주를 이뤘다.

그 중 2019년 명절 모임 사진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진 속 일가족은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사진 설명을 읽어보자.

"2019년 최재형 전 감사원장 가족이 명절 모임에서 국민의례를 하는 모습. 맨 뒷줄에 서 있는 사람이 최 전 원장. 가족 모임 때는 국민의례를 하고, 애국가를 4절까지 완창하는 게 최 전 원장 가족의 전통이다."

흔한 일 아니나 이해할 수 있는 일

집안마다 독특한 가풍이나 전통이 존재한다. 이 집안은 그것을 남에게 드러냈다. 그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비판할 수 있을까.

다소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사고실험을 해볼 수 있다. 입만 열면 반일(反日)을 외치지만 실은 뼛속까지 친일파이고 '토착왜구'인 한 대학 교수가 있다면 어떨까. 그 교수는 매년 명절마다 욱일기를 걸어놓고 가족과 함께 기미가요를 제창한다. 통상적인 한국인의 감수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그런 행위를 비난하거나 금지할 수는 없다. 다른 문화와 관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중 하나인 '똘레랑스(관용)'의 핵심이다. '김일성 만세'를 불러도 잡혀가지 않을 자유를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라면 더욱 그렇다.

최재형 가족의 '애국가 4절 행사'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집안의 전통이라는 면에서 이는 애초에 논란이 될 이유조차 없는 사안이다. "참 독특한 가풍을 지녔구나"라고 말하고 지나가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어떤 집은 명절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다른 집은 기도를 하거나 혹은 불공을 바친다. 이런 사례를 논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듯 최재형 가족의 사례도 논란거리가 될 수 없다. 가족 모임에서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을 하는 게 흔한 일이 아니지만, 한국전쟁 영웅인 최영섭 대령의 영향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자녀와 며느리가 강요당하는 것 같고 불쌍하다는 의견은 초점이 잘못된 비판이다. 며느리의 경우부터 생각해보자. 현행 민법상 미성년자의 혼인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성인이 된 후 본인의 의사에 따라 결혼을 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혼했을 여성들을 '피해자'로 단정 짓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다.

아이들은 어떨까. 부모님이 독실한 종교인이어서 태어나자마자 '모태 신앙'을 갖게 된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성장하면서 부모와 다른 가치관, 종교, 취향을 갖게 돼 갈등할 수 있고 그것은 개인과 가족의 불행이다. 하지만 어떤 종교나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 누군가는 태어나면서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어떤 전통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선악을 논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허공의 백지 속에 그려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의는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8월 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오간 대화를 살펴보자. 진행자는 "좋게 보면 애국적이고, 안 좋게 보면 너무 국가주의, 전체주의를 강조하는 분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그러자 최재형은 "국가주의, 전체주의는 아니다"라며 "나라 사랑하는 것하고 전체주의하고는 다른 말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요컨대 '애국가 4절 행사' 논란이 애국주의 논쟁으로까지 비화해버린 셈이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8월 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무명용사의 묘역에 참배를 하고 있다. [동아DB]

미국 진보가 책 한권에 충격 받은 까닭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보수 정치는 애국주의와 친화적이다. 그렇다면 진보는 애국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우리나라 이룩하기'(Archieving Our Country: 국내에는 '미국 만들기'로 번역)를 통해 던진 질문이다. 그는 좀 더 건실한 진보 운동을 위해서는 애국주의를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내용의 강의를 통해 미국 진보 진영에 큰 충격을 줬다. 이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1998년 펴낸 책이 '우리나라 이룩하기'다.

미국이 최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지만 패권까지는 틀어쥐지는 못했던 1차 세계대전 무렵. 당시 미국 진보의 주류는 혁신주의(progressivism) 운동이었다. 혁신주의는 애국주의와 서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더 진보적인 나라가 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애국적 열정이 진보 운동의 주요 동력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미국이 소련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게 됐다. 이후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진보주의는 크게 달라진다. 미국에 대한 자부심, 애정, 열광 등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진보의 주류 담론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문화 상대주의와 정치적 올바름 등의 새로운 가치 체계가 애국주의의 자리를 대신 채워나갔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러한 흐름은 계속됐다. 진보주의자라면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사고방식이 미국에서 시작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진보'의 얼개는 대체로 이 무렵 형성됐다. 특히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된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과 비판 이론을 통해 국가와 애국심 뿐 아니라 성별, 문화, 관습, 종교, 전통 등 기존의 모든 가치를 '해체'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에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진보는 거대 담론을 잃어버렸다.

로티가 볼 때 그러한 지적 조류는 위험천만했다. 로티는 미국에 대한 자부심을 잊고 '해체'에만 몰두하는 이들을 '문화적 좌파'로 지칭한 후, 문화적 좌파의 득세를 이겨내고 이전 시대의 건강한 애국주의를 회복할 때 진보가 되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애국주의

로티의 논리는 간결했다. 미국의 좌파가 미국을 더 나은 나라로 만들고자 한다면 다른 나라보다 미국의 사정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열성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 관심과 개입은 이성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애착을 필요로 한다. 미국을 더 나은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좌파가 미국에 대한 일체의 자부심을 부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미국의 좌파는 미국의 우파만큼이나 미국을 사랑해야 한다.

다들 막연히 생각하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던 이 단순명료한 주장의 여파는 매우 컸다. 미국의 지성계가 일대 충격에 빠졌다.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 사람은 시카고대 로스쿨에서 법철학을 가르치고 있던 마사 너스바움이었다. 너스바움은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라는 글을 통해 "민주적 시민권이나 국가적 시민권보다는 세계 시민권을 시민 교육에 중심으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애국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너스바움의 글은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대한 반론이 '보스턴 리뷰'에 쏟아져 들어왔다. 벤저민 바버, 힐러리 퍼트넘, 찰스 테일러, 마이클 왈저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그 논쟁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삼인, 2003)이라는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중 정치철학의 거장인 찰스 테일러의 비판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세계시민주의가 애국주의나 국가주의의 해악을 막는데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애국주의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둘 다 필요하다. 왜냐하면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지극히 많은 것을 요구하는 공동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성원들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요구하고, 전체 인류보다는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더 큰 연대 책임을 요구한다. 강력한 공통의 귀속 의식 없이는 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세계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 사업에서 실패하면, 그것은 인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1990년대는 미국 중심의 애국주의에서 벗어나 코스모폴리탄이 되자는 주장, 즉 세계시민주의가 미국 사회 주류 담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무렵이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의 승리가 가시화되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힘을 얻었다. 좌파가 문화의 영역에서 애국주의를 부정하고 있었다면, 우파는 시장 경제의 영역에서 코스모폴리탄의 길을 걸었다. 자국 중심주의를 버리고 글로벌 시장과 자유로운 노동력의 이동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20세기 유물 탈피한 MZ세대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016년 영국에서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운동이 일어났고, 같은 해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는 세계시민주의를 표방하며 문화적으로는 좌파, 경제적으로는 우파의 길을 걸어온 글로벌 엘리트를 향해 세계화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반격을 가한 결과다. 게다가 그 후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세계 시민의 정체성을 지닌 엘리트가 국경 없는 세상을 마음껏 즐기던 시대는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간 듯하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은 온 국민이 오후 6시마다 국기하강식을 하기 위해 길을 걷다 멈춰 서야 했던 나라다. 최재형의 가족 모임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하는 모습이 '올드'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애국심을 원천봉쇄하고 부정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또한 20세기의 유물일 뿐이다.

곧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될 MZ세대는 '레드 콤플렉스'뿐 아니라 586세대와 X세대가 공유하는 '태극기 콤플렉스'로부터도 자유로운 세대다. 맹목적인 애국심에 대한 경계는 늘 필요하겠지만, 애국심의 존재와 가치를 완전히 도외시할 수는 없다. 더 나은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서라도 더 나은 애국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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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