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3

'오징어 게임'보다 잔인한 이재명 '두꺼비 게임'

[노정태의 뷰파인더-53] 공영개발 탈 쓴 민영개발의 민낯

● 공영개발, 과도하고 부당한 협상력
● 리스크 낮고 낮은 비용 개발 가능
● 자본주의 윤리 따르는 민영개발
● 갈등에 따른 리스크 감수해야
● 알쏭달쏭 이재명式 ‘환수’의 의미
● 강제수용 ‘치트키’ 쓴 기괴한 民개발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한국 정치가 '화천대유 사건', 혹은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으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매일 새로운 의혹과 해명이 나온다. 지금 쓴 글이 내일, 아니 반나절 뒤에도 유효할지 장담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므로 사안의 본질에 집중해 보도록 하자. 아무리 새로운 사실관계가 불거져 나온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요소가 있다. 어떤 정당의 정치인이 연루됐건, 어떤 대선후보에게 이익이 되거나 손해가 되건, 바뀔 수 없는 사실이 존재한다.

만약 이 사안을 사전 지식이 많지 않은 누군가에게 설명한다고 해보자.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처럼, 독자 여러분이 모두 알만한 그 노래,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화천대유자산관리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는 가운데, 9월 23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개발사업 현장에서 건설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가운데 터널을 중심으로 왼편이 A1, A2, A6 구역, 오른편이 A10 구역이다. 위로는 빌딩이 밀집한 판교 테크노밸리가 위치해 있다.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모래로 두꺼비집을 만들며 놀 때, 늘 의아했다. 남들도 다 부르는 노래여서 나도 따라 불렀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찝찝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대체 두꺼비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두꺼비에게 헌 집을 내어주고 두꺼비는 내게 새 집을 줘야 한단 말인가? '한국세시풍속사전'에 따르면 '헌 집'은 알을 몸속에 품다가 낳고 죽는 옴두꺼비 어미를 뜻하고 '새 집'은 그렇게 태어난 자식을 뜻한다는데, 선뜻 납득하기는 어려운 설명 같다.

아무튼 룰(rule)은 분명하다. 내가 헌 집을 주면 두꺼비는 새 집을 준다. 두꺼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두꺼비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한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그런 믿음을 품고 놀이터의 모래밭에서 한쪽 손을 파묻고 다른 손으로 모래를 쌓아 토닥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대한민국 공영개발이 원론적으로 표방하는 바가 바로 저 '두꺼비 놀이'와 같다. 공공개발은 원칙적으로 국가나 지자체가 나서서 두꺼비처럼 헌 집을 받아 새 집으로 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원론적'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 예상 가능하다시피 현실은 그렇게 이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그 어그러진 현실의 구조를 이해해야, 이재명 경기지사가 성남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두꺼비는 왜 헌 집을 받고 새 집을 돌려줄까.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두꺼비가 이타적이다. 내가 헌 집에 사는 걸 원치 않고, 대신 새 집을 주고 싶어 헌 집을 가져간다. 이런 경우 두꺼비는 내게 집을 공짜로 주거나, 저렴하게 팔거나, 낮은 가격으로 빌려줄 것이다. 내가 새 집에 살게 하는 것이 헌 집을 가져가는 두꺼비의 목적인 게 분명하다면 말이다.

두 번째 가능성도 있다. 두꺼비가 이기적인 경우. '이기적'이라는 말을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고 경우의 수를 따져보자. 두꺼비는 나의 헌 집을 사서 새 집을 지은 다음 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팔아 이익을 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두꺼비에게 헌 집을 순순히 내놓지 않을 것이다. 두꺼비가 새 집을 지어서 얼마나 이익을 볼지 따져본 후, 두꺼비가 제대로 된 값을 쳐주지 않는다면 나의 헌 집을 팔지 않고 버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타적 두꺼비와 이기적 두꺼비

경기 성남시 서판교에 있는 화천대유 사무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이 비유를 택지개발에 대입해보자. '이타적인 두꺼비'는 공영개발이고, '이기적인 두꺼비'는 민영개발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영개발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또는 정부투자기관 등의 공공부문에서 직접 개발하여 민간에 분양하는 택지공급방식"이라고 정의한다. 공영개발은 공공부문에서 직접 하는 것이다. 이윤을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대신 더 많은 국민에게 더 좋은 주거 환경을 제공하는 게 목적이다. '이타적인 두꺼비' 모델이다.

물론 거기에는 함정이 있다. 공영개발이 결정되고 추진되면 해당 부지의 땅 주인과 원주민은 맞서기 어렵다. 더 많은 이에게 좋은 주거 환경을 제공한다는 대의명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영개발 두꺼비는 '새 집 줄게'의 약속을 내밀고 '헌 집 다오'에서 과도하거나 부당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토지소유자와의 매각 협상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을 경우, 공영개발의 주체는 공익사업 용지를 강제로 취득할 수 있도록 토지수용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갖추고 있는 제도적 장치다.

‘이타적인 두꺼비'는 착한 두꺼비, '이기적인 두꺼비'는 나쁜 두꺼비, 이렇게 단칼에 나눠서 이야기하기 곤란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기적인 두꺼비는 헌 집을 사서 새 집을 지어 팔아 돈을 벌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이타적인 두꺼비와 달리 강제수용 같은 수단을 동원할 수 없다. 이기적인 두꺼비는 자본주의 윤리에 충실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당 토지의 적절한 시장 가격을 파악하고, 개발했을 때 얼마나 이익이 날지 스스로 계산하여, 땅 주인과 제대로 협상을 해서 매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토지개발 대상지의 땅 주인 처지에서 보자. 제대로 협상이 진행된다고 가정했을 때, '이타적인 두꺼비'보다는 '이기적인 두꺼비'를 만나 땅을 파는 것이 좋다.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윈-윈(Win-Win) 게임의 여지가 있는 셈이다.

문제는 기존의 땅 주인 내지는 주택 소유주와 '이기적인 두꺼비'의 협상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이기적인 두꺼비가 너무 이기적인 가격을 불러서일 수도 있고, 땅 주인이 소위 '알박기'를 하며 버틸 수도 있다. 집과 땅 등 부동산은 대략적인 시세만 있지 '정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소수의, 혹은 단 한 명의 땅 주인이 버티고 들어서 전체 개발 일정이 지연되면 그 손해가 한도 끝도 없이 커질 수 있다. 개발 사업에서 '리스크'라 할 수 있는 것 중 큰 부분이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5500억 원 환수? 이중인격 두꺼비!

서울중앙지검 대장동 개발 의혹 사건 전담수사팀이 9월 29일 경기 성남시 성남도시개발공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마치고 압수물품을 버스에 싣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정리해보자. 토지개발은 크게 공영개발과 민영개발로 나뉜다. 공영개발은 공공부문에서 직접 개발하기에 강제수용 등의 방법을 동원할 수 있고, 그래서 리스크가 낮으며, 따라서 낮은 비용으로 개발이 가능하다. 대신 공공부문은 그 이익을 자신들이 취할 수 없다. 저렴하게 새로운 주택을 분양하고, 기존에 해당 지역에 살던 원주민 세입자를 위한 임대주택 등도 충실하게 마련해야 한다.

반면 민영개발은 민간이 추진하는 개발 사업이다. 모든 토지 소유주와 협상해야 하며 세입자를 내보낼 때도 갈등이 생길 여지가 상대적으로 크다. 토지 매입 단계부터 리스크가 발생할 가능성이 공영개발에 비해 큰 것이다. 따라서 리스크가 크고, 큰 리스크는 곧 높은 사업비로 이어진다. 대신 민영개발의 주체는 공영개발보다 높은 가격으로 주택을 분양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다.

이제 화천대유 사건으로 돌아와 보자. 여러 정치인의 이름과 다양한 의혹과 논란이 오가지만, 본질은 간단하다. 대장동 개발은 공영개발의 탈을 쓴 민영개발이었다. 원주민을 내쫓고 토지 소유주의 땅을 가져갈 때는 공영개발이었는데, 막상 토목공사를 하고 건물을 짓고 분양을 할 때가 되자 민영개발이 되고 말았다. '이타적인 두꺼비'인 척 하면서 내 헌 집을 값싸게 가져가더니, '이기적인 두꺼비'가 돼 나에게 새 집을 비싸게 팔았다는 뜻이다.

앞서 말했듯 토지개발에서 가장 큰 리스크는 토지 매입 단계에서 발생한다. 공영개발의 경우 강제수용이라는 '치트키'를 통해 그 리스크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 대신 공영개발은 이익을 목표로 하지 않거나, 이익이 남더라도 법에 규정된 상한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공영개발의 탈을 쓰고 강제수용을 동원해 토지를 매입한 후 민영개발의 형식으로 개발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다. 국가나 지자체 등을 앞세워 '공공선'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땅을 헐값에 매입한 후, 그것을 통상적인 시장가에 판다면, 당연히 턱없이 높은 이익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재명 지사가 이런 비상식적인 사업 모델을 자신의 치적인 양 포장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대장동 개발이 천문학적 이익을 냈으며, 그 중 5500억 원을 '환수'했다고 주장한다. 일단 그것을 '환수'라 부르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민영개발의 경우에도 당연히 진행되는 온갖 기부채납 등을 마치 자신이 추진해 이루어진 '환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식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진행된 모든 민영개발에서 막대한 '환수'가 이루어져 왔다고 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애초에 '환수'할 만큼 큰 이익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익만 해도 수천억 원이 넘는다. 공영개발의 명목 하에 싸게 매입한 땅을 민영개발의 형식으로 비싸게 팔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민중의 소리'는 그것을 "민간업자들은 성남시에 5500억 원을 환수 당하고도 8000억 원에 가까운 순익 로또를 맞았다"고 정리한다. 현실을 호도하는 해석이다. 5500억 원은 '환수' 당한 것도 아니고, 8000억 원에 가까운 막대한 순익은 애초에 발생하지도 말았어야 한다. 비상식적이고도 천문학적인 이익을 낳은 '민관 공동개발 모델' 그 자체가 문제다. 이타적인 탈을 쓰고 이기적으로 돈을 번 이중인격 두꺼비, 그것이 바로 대장동 개발의 실체다.

기괴하고도 잔인한 '설계'

이재명 지사 스스로가 인정했다시피 그는 이런 기형적인 개발 모델을 '설계'한 사람이다. 성남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본인이 직접 서명한 문서까지 남아 있다. 화천대유나 개발 시행사 성남의뜰로부터 이 지사에게 직접 흘러간 자금이 없다고 해도, 우회적인 방식으로 어떤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 사건에는 이 지사 뿐 아니라 최근 국민의힘에서 탈당한 곽상도 무소속 의원, 이 지사의 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 혐의와 관련해 대법원에서 무죄 의견을 냈던 권순일 전 대법관 등이 연루돼 있다. 9월 29일에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친 소유 주택과 관련한 논란도 제기됐다. 여야를 막론하고 특검에 찬성해 최대한 빨리 수사를 진행해야 옳다.

공영개발은 공영개발의 요건을 준수하며 진행돼야 한다. 민영개발은 개발 대상지 소유주와 원주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전제해야 한다. 이 지사가 '설계'한 민관 공동개발은 강제수용을 통해 토지를 값싸게 수용하여 민영 사업자를 통해 비싸게 판다. '오징어 게임'보다 기괴하고 잔인한 '두꺼비 게임'이다. 특검을 통한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그 내막이 낱낱이 밝혀져야 마땅하다.

#이재명 #대장동 #화천대유 #오징어게임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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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2

자영업자 학살극 주범은 숫자놀음에 정신 팔린 'K방역'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죽음 선택한 22명의 자영업자

1958년, 서독 노이슈탄트. 15세의 소년 미하엘은 사랑에 빠졌다. 36세의 한나와 묘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육체 관계로 시작했지만 한나는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연상의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배우며 <오디세이아>, <에밀리아 갈로티>, <전쟁과 평화> 등 온갖 문학의 고전을 소리 내어 읽어나가던 뜨거운 여름. 그러던 중 한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첫사랑은 끝났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뀐 후 미하엘은 대학에 진학하여 법대생이 되었다. 그는 재판 견학을 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첫사랑 한나를 다시 만난 것이다. 한나는 강제수용소에서 간수로 일한 나치 전범이었다. 한나는 수감자가 죽을 걸 알면서도 매달 60명씩 선별해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이 수용소에는 매달 새로운 수감자가 들어오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간수들도 그렇게 했다’. 한나의 항변이 법정에 울려퍼졌다. 독일의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책 읽어주는 남자>의 내용이다.

이 작품은 영화 <더 리더>의 원작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하면서 주인공의 이름이 ‘미하엘’에서 ‘마이클’로 바뀌었지만 주제 의식은 동일하다. 판사가 한나에게 질문한다.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을 곳으로 보냅니까?’ 한나는 수긍하지 않는다.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던진 바로 그 질문, ‘악의 평범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유현호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한나 아렌트는 1963년 <뉴요커>의 의뢰를 받았다. 이스라엘 비밀경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체포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1963년 2월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전반적인 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하에 연재되었고, 훗날 책으로 묶여 나왔다.

아렌트는 일단 재판의 광경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일에 집중했다. 교수대에 선 아이히만은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하고 그 절반을 마셨다. 성경을 읽어주겠다는 목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검은색 두건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재판받고 처형당하는 입장이면서도 마치 남의 장례식에서 애도 연설을 하는 양 행세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에 도달했다.

아이히만은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너무도 평범하고 정상적이었다. 아렌트가 볼 때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 ‘평범성’, 혹은 ‘진부함’이나 ‘일상성’에 있었다. 아이히만은 명령에 복종하는 교양 있는 고급 장교로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태도로 유대인에 대한 체계적 학살을 진행했다. 자신이 따르는 명령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어떤 사람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명령이라서, 시키는 대로 충직하게 수행했을 뿐이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더 리더>의 한나 역시 마찬가지다. 직접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단지 수용소에 사람이 너무 많으니 간수 한 사람당 열 명씩 제소자를 골라내어 아우슈비츠로 보냈을 뿐이다. ‘합리적’인 행위다. 미군의 폭격으로 수용소에 불이 났을 때 한나는 잠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당연한 것 아니에요? 간수는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에 갇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한나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 모습을 보며 미하엘은 한나의 중요한 비밀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지난달 25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브리핑에서 2주가량 사적 모임을 미루거나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재는 2500명 내외의 (확진자) 발생에 대해서는 대응할 수 있지만, 확진자가 증가하게 되면 (중증 환자 규모도) 뒤따라서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방역 당국에 따르면 현재 우리는 하루 신규 확진자 3000명 이하에 대해 1~2주가량 대응할 수 있다.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역 4단계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나? 이미 4단계를 몇 주째 연장하고 있지 않은가? 확진자 수 관리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국민에게 모임 자제를 ‘요청’할 게 아니라, 자영업자에게 영업 정지를 ‘명령’하고 그에 따른 손해를 공식적으로 보상해야 하는 건 아닐까?

정부는 국민, 특히 자영업자에게 방역의 짐을 떠넘기고 있다. 최저임금 폭등으로 한계에 치달은 자영업자들은 코로나 이후 생사의 기로에 섰다. 코로나19 대응 전국 자영업자 비상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코로나 이후 최소 22명의 자영업자가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 ‘자영업자 학살극’이 과연 방역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악의 평범성’은 아우슈비츠 같은 극악한 반인륜 범죄에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자영업자들이 굶건 죽건 확진자 숫자 놀음에 정신이 팔린 무신경하고 잔인한 K방역 또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영업자 분향소에 조문은커녕 근조 화환조차 보내지 않았다. 경찰은 분향소 설치를 방해하다가 마지못해 허락해놓고도 시민들을 감시했다. 나는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더 리더>의 한나가 내놓는 변명이 떠오른다. 현실 속의 아이히만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지루하고 상투적인 ‘악의 평범성’에 갇혀 있는 것이다.

10월 말부터 시행할 수 있다는 ‘위드 코로나’는 방역 단계를 낮춘다는 말과 같다. 단기적으로나마 확진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은경 청장의 노고를 보면서도 의문을 표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확진자가 5000명, 1만 명으로 늘어나면 어떻게 할 계획인가. ‘위드 코로나’ 하면서 동시에 방역 4단계를 연장할 셈인가. 청와대의 방침에 따라 끝없이 희망고문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더 리더>는 배움과 참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하엘은 감옥에 갇힌 한나에게 책을 녹음하여 테이프를 보내준다. 한나는 반성하고 생각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더 리더>와 달리 우리의 이야기가 꼭 비극으로 끝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영업자를 비롯한 국민 모두에게 정직한 태도로 인격적 예우를 드러내는, 그런 방역과 정치를 요구한다.

2021-09-28

홍남기 부총리님, 자영업자 죽음 앞에서 자화자찬하다니요

홍남기 경제부총리

홍남기 경제부총리

문재인 정부 들어 정부 지출이 경제 성장률을 크게 앞지르면서 나랏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는 합리적 예산 조정 없이 무차별적인 선심성 지출 증가로 이어진 현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에 비판적입니다. 부동산값 폭등으로 가뜩이나 청년들의 내 집 마련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단 쓰고 보자"며 미래 세대에 빚을 떠넘기는 건 무책임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19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아 재정을 더 과감히 풀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박가분 작가가 그렇습니다. 마침 노정태 작가는 도움이 꼭 필요한 자영업자는 외면하고 전 국민 돈 잔치에 불과한 재난지원금에 장단을 맞춘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저격하는 칼럼을 보내왔습니다. 전혀 다른 시각을 담은 두 칼럼을 27일과 28일 연속으로 내보냅니다. 안혜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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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와중인 지난 19일 전남 순천의 한 야산 중턱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사망자 신원은 석 달가량 실종 상태였던 48세 A씨였다. 산 아래에서 발견된 그의 승용차와 신분증을 통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농자재 배달 사업을 하던 A씨는 빚에 쫓기다 파산 신고를 했고, 지난 6월 가족에게 "떠나고 싶다"고 말한 후 집을 나섰다가 석 달 만에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코로나 19 대응 전국자영업자비상대책위원회(자대위)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에 설치했던 합동분향소가 문을 닫은 다음 날 일이었다.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자영업자들을 추모하며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에 따른 영업제한조치 철폐를 촉구하는 분향소가 설치됐다. 연합뉴스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자영업자들을 추모하며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에 따른 영업제한조치 철폐를 촉구하는 분향소가 설치됐다. 연합뉴스

그리고 사흘 후인 지난 2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중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대한민국의 올해 성장률을 4.0%로 점쳤다. 지난 5월 전망치 3.8%보다 0.2%포인트 상향 조정한 것이다. 한국 경제의 회복세가 빠르다는 이유였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당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을 읽고 그만 평정을 잃었다. 홍 부총리는 "수출 호조세, 2차 추경 등의 정책효과가 반영되며 우리나라 성장률이 상향조정된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전망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주요국들에 비해 코로나 위기에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홍 부총리에게, 자영업과 자영업자란 과연 무엇인가? 문재인 정부는 자영업자를 국민으로 생각하고 있긴 한 걸까?
모두가 아는 사실부터 짚어 보자. 홍 부총리는 문 정부의 핵심 관료 중 한 사람이다. 정권 출범 후 초대 국무조정실장이었고, 2018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부총리로 재직하며 최장수 장관 기록까지 세웠다. 한평생 직업 공무원으로 살아온 이른바 '늘공'(원래 공무원)이라는 점에서 이 기록은 더욱 놀랍다.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동지들이 한 자리씩 차지한 이른바 '어공'(어쩌다 공무원)보다 청와대의 더 큰 신임을 받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어서다.
내가 볼 때 그가 신뢰를 받는 이유는 청와대의 지시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정책 방향의 지시가 청와대에서 내려온다고 해보자. 일반적으로 '어공' 출신 장관들은 무리해서라도 밀어붙이려 든다. 반면 '늘공'들은 현실의 제약을 고려해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거나, 절충점을 찾아 설득하고자 한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은 '늘공'들의 이러한 행동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들이 자주 쓰는 '관피아'(관과 마피아를 합친 용어)라는 말엔 국민의 뜻을 받아 당선된 정치인이 내리는 지시를 공무원들이 무시한다는 불만이 담겨 있다.
바로 여기에 홍남기의 롱런 비결이 숨어 있다. 그는 여느 '늘공' 출신들과 다르다. 청와대의 지시와 요구를 거스르지 않는다. 반발하는 시늉은 한다. 최저임금 인상, 전 국민 재난지원금, 선심성 돈 풀기를 위한 추경 편성 등 청와대와 민주당이 밀어붙이는 사안에 대해 처음에는 반대하다 결국 정치권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패턴을 반복한다. 오죽하면 '홍백기'(홍이 항복했다)나 '홍두사미'(용두사미를 빗댄 말) 같은 말이 오가겠는가.
'늘공'답지 않은 홍남기의 권력 순응주의는 자영업자들에게 재앙의 서곡과도 같았다. 코로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 정부 들어 최저임금을 무리하게 인상할 때 이미 자영업자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2018년에 16.4%, 2019년에 10.9%씩 껑충 뛰어오르면서 한계에 몰린 자영업자들은 아르바이트생을 내보내거나 본인과 가족의 노동을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인 아이스크림 판매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패스트푸드 매장마다 키오스크가 줄줄이 들어선 것도 그 무렵 일이다. 2020년 한국경제연구원의 '2018년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최저임금 적용 대상자의 취업률은 4.1~4.6%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학자 아니라 장삼이사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 현실화한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홍 부총리는 무엇을 했을까?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그리고 그 이론적 배경이 되는 소득주도성장(소주성)에 대해 반론을 펴기는커녕 오히려 소주성이 향후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며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 부작용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소주성이 정말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면 애초에 그 자리에 걸맞은 역량이 없는 것 아닐까. 혹은 소주성이 엉터리인 줄 알면서도 '윗선'의 요구라 입 다물고 적극적인 동조를 했다면, 그는 장관이 아니라 말석의 9급 공무원 자격조차 없는 게 아닐까. 정치가 엉터리 요구를 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것이 공무원의 가장 기본적인 직업윤리고, 그러라고 법으로 신분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렇게 자영업의 기초체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코로나가 터졌다.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삼각 파도처럼, 양쪽에서 동시에 자영업자들을 강타한 것이다. 자영업자 보호는커녕 비합리적인 사회적 거리 두기로 자영업자 죽이기에 나선 청와대와 민주당은 정작 돈이 가야 할 곳은 외면하고 '온 국민 재난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들에게 푼돈을 뿌리며 매표에 혈안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부총리가 할 일은 소득 상위 몇 %에게 재난지원금을 주냐는 식의 소모적 논쟁에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소득 배분이 아니라 실제 자영업자가 겪는 피해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어야 한다. 물론 현실은 달랐다. 청와대는 보다 많이 주자는 입장이 완강했고, 심지어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88%라는 여야 합의를 무시하고 온 국민(경기도민)에게 돈을 뿌리겠다고 나섰다. 홍 부총리는 늘 그렇듯 미약한 반발의 목소리를 내다 이내 '홍백기'를 들어 올렸다.

흔히 공무원을 두고 '영혼이 없다'고 비아냥거린다. 공무원들 스스로도 이런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원래 공직이란 그 자체가 희생이며 헌신이다. 안정된 일자리와 연금 욕심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가 금세 그만두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다. 국가와 국민에 봉사하겠다는 마음 없이는 공직을 오래 수행하기 어렵다.

국가공무원 취임 선서는 이렇다.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헌법과 법령을 준수하고, 국가를 수호하며,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 문장 어디에도 정권이나 청와대를 향한 충성 서약은 없다. 공무원이 지켜야 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과 국익이지, 특정 정권과 권력 집단의 이해관계가 아니다.
묻고 싶다. 최장수 '늘공' 장관 홍 부총리의 충성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 그가 지키는 건 국가인가, 아니면 정권인가. 그도 아니면 그저 일신의 영달일 뿐인가. "아니요"라고 해야 할 때 그 말을 못하는 장관이 오래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오늘도 대한민국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말 그대로 생사를 건 투쟁을 해나가고 있다. 방조자도 때론 공범과 다를 바 없는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이 정부 자영업 대학살극의 책임을 물을 때 홍남기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2021-09-26

인문학을 '부수적 학문' 취급하는 윤석열에게 告함!

 [노정태의 뷰파인더-52] 보수정치 몰락의 어떤 시금석

● ‘인화력’ 좋은 윤석열의 여러 실언
● 가장 문제적 발언…‘인문학 무용론’
● 尹 “인문학, 공학 공부하며 병행해도 된다”
● 기업이 굳이 원치 않는 ‘쓸모없는’ 학문?
● 철학과 사상 없이 정치 논할 수 있나
● 인문학은 반성 않는 맹종과 열광에 맞서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9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외교안보 관련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지난 9월 13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안동대를 방문했다. 지방에 소재한 국립대에서 청년들과 만나 일자리와 대학 교육 등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9수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윤석열은 소위 '인화력'이 좋은 편이다. 처음 본 사람들과도 스스럼 없이 대화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인지 그날 언론에 실언으로 보도될 말이 여럿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아프리카 발언'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향해 "지금 기업이 기술로 먹고살지, 손발로 노동을 해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며 "그건 인도도 안 하고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유연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같은 월급을 받는다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이가 없다'고 이야기했던 대목 역시 마찬가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단지 월급 통장에 들어오는 돈의 액수만으로 갈리는 게 아니다. 직업의 안정성,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의 대출 한도와 여부, 미래의 계획 및 이직시의 이점 등에서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좋은 뜻'을 이해하더라도, 당장 정규직 일자리를 원하는 청년들을 두고 할 말은 아니라고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기업에 필요한 맞춤형 인재 양산해야"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이른바 '인문학 무용론'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프리카 발언, 비정규직 발언은 단순한 말실수 내지 세련되지 못한 표현의 문제로 이해할 여지가 없지는 않다. '저숙련 고반복' 육체노동보다는 고부가가치 지식노동의 가치를 중시해야 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줄이고 원하는 사람은 이직해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큰 뜻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인문학 무용론'은 다르다.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관점의 문제다. 한 발 더 나아가보자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윤석열이 '인문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그 장면으로부터, 우리는 왜 대한민국 보수 정치가 몰락했으며 지금도 쉽게 전열을 회복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더듬어볼 수 있다.

공정한 논의를 위해 발언의 전체 맥락을 짚어보자. 윤석열은 잔디밭에서 학생들과 둥글게 모여 앉은 후, 청년 취업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경제 성장이라고 운을 뗐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가 생기고 있다 해도 그 일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없으면 뽑을 수가 없다고 했다. 영상에 담긴 표현을 최대한 그대로 옮겨보자.

"학교나 연구소나 그런데서 실제 기업에 필요한 맞춤형 인재를 양산해 내야 돼요. 그러니까 이제, 대학과 학교와 기업이 서로 연계가 돼서 학교에 공부하는 과정도 완전히 바뀌어야 됩니다."

대학이 과연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곳인가? 학생들이 취업에 유리한 학과를 찾아다니는 현실만 보면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옳지 않다. 가령 AI(인공지능)나 빅데이터 같은 최근의 '핫 트렌드'를 떠올려 보자. 지금이야 누구나 아는 키워드지만 불과 5년 전만 해도 대부분 들어본 적도 없는 개념이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특히 고도의 기술이 적용되는 분야는 발전이 빠르고 예측이 어렵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대학에서 미리 알고 기업이 원하는, 앞으로 원하게 될 인재를 육성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난해 9월 서울시내 한 대학의 취업게시판에 취업정보가 걸려있는 모습. [뉴스1]

"AI도 5년이면 관심 사그라질 것"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과 학과는 늘 변화를 겪는다. 필자가 들었던 증언에 따르면 6‧25전쟁이 막 끝났던 1950년대에는 서울대 정치학과의 입학 성적이 법학과보다 높았다고 한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고 정치적 변화가 워낙 극심했던 해방과 분단 직후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0년대 이과에서 가장 입학 성적이 높은 학과는 의대가 아니라 물리학과였다고 한다. '과학과 기술'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자던 박정희 시대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MBC의 드라마 '허준'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무렵에는 경희대 한의학과의 성적이 서울대 의과대학을 제외한 모든 의대를 넘어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대학 입시생들의 선호, 개별적인 학과의 장래와 전망,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회적 변화와 돌발 이벤트 등은 우리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사회의 큰 흐름이 그러할진대 1분 1초가 다른 고도의 기술 산업 분야라면 어떻겠는가? '당신들은 어떤 학생을 원합니까'라고 물어보면 기업의 대답은 매 해마다 달라질 것이다. 대학에서 미리 예측하고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은 허황된 소리일 뿐이다. 자신들이 앞으로 어떤 인재를 필요로 할지, 그건 기업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학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분야이긴 하지만 뚜렷한 경향이 있다. 학과별로 나누어진 폐쇄성을 극복하여 초학제적(Transdisciplinary) 대학을 지향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미래의 기술과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학의 초학제적 변화는 당연한 일이다.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이 지난 5월 4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가 좋은 참고점이 될 수 있다. 그는 AI를 전공했지만 AI 또한 "몇 년 전의 블록체인, 빅데이터처럼 유행하다가 5년이면 이 관심이 사그라질 것이라 본다"고 한다. 즉 대학은 당장의 유행을 쫓는 게 아니라 아주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만들어가는' 조직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카이스트의 인문사회학 분야를 디지털과 융합한 디지털 인문사회학으로 개편했다. 이러한 변화의 방향은 다른 대학에서도 참고할 가치가 있다.

극소수 명문대에만 인문대 남겨둬야 하나?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9월 12일 서울 서대문구 UCU라운지에서 열린 ‘청년 싱크탱크 상상23 청년, 희망을 해킹하라’ 토크콘서트에 참석해 청년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여기서 윤석열의 발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러나 인문학을, 여러분이 무슨 지금 세상에서는 공학이라든가 이런 자연과학 분야가 취업하기 좋고 일자리를 찾는데 굉장히 필요한데, 기업이 그걸 원하니까, 그러면 인문학이라는 거는 그런 걸 공부하면서 병행해도 되는 것이지, 그렇게 많은 학생을 갖다가, 4년 뭐 대학원 과정까지 그렇게, 그건 소수면 되는 거지 그럴 필요가 과연 있느냐, 그래서 그런, 기업 필요에 따라서 학과의 재조정도 있어야 되는데, 그것도 현실적으로 교육 당국이 추진하려고 그러면 반발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윤석열의 '인문학 무용론'은 이렇듯 대학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에서 출발한다. 대학의 존재 이유가 "실제 기업이 필요로 하는 맞춤형 인재를 양산"하는 것이라면, 기업의 수요에 맞춰 학과를 만들고 없애며 인문대는 극소수의 명문대를 제외하고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학제적 커리큘럼 하에 학생들을 미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적응형 인재로 길러내고자 한다면 그럴 수 없다. 인문학을 '틈 날 때 하는' 취미생활로 축소하는 것도 옳은 방향이 아니다. 인위적인 문·이과 구분을 넘어서는 지식 생산과 교육의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문과와 이과의 교양을 구분하는 것은 원래부터 가능하지 않았거니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가령 오늘날의 가장 치열한 쟁점 중 하나인 '백신 거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백신 거부는 왜 나쁜가? 인구의 70% 이상이 백신을 맞거나 코로나에 걸려 항체를 가지고 있어야 집단 면역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과학적 사실만으로는 완고한 백신 거부 운동가를 설득할 수 없다. 이웃에 대한 도덕적 책무를 강조하거나, 백신을 만든 것 역시 사람이고 백신 또한 신의 축복이자 섭리라는 종교적 논리를 제시하거나, 이도 저도 안 되면 다양한 인센티브를 개발하고 제공해야 한다. 굳이 나누자면 '이과'가 아니라 '문과'가 나서서 분석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항체는 과학이지만 접종은 시민의 의무와 연대 의식 같은 철학의 영역이다. 집단 면역에 도달하려면 문과와 이과가 힘을 합쳐야 한다.

보수 진영이 무시하는 인문학의 가치

인문학을 '돈 못 버는 쓸모없는 학문'으로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천만하다. 정치의 영역에서 보자면 더욱 그렇다. 정치란 결국 얼마나 많은 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철학, 사상, 이데올로기 등 무형의 정신적 요소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정치를 논할 수는 없다. 공통의 신념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인문학의 고유 영역이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전대협 세대, 혹은 주사파들이 대한민국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비난 혹은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과연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했던 그들이 지금도 조직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을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1980년대에 형성된 냉전 시대의 통일지상주의에 입각해 남북관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 떠나서 문재인 대통령부터가 그렇다. 리영희 스스로도 1990년대에 상당 부분 폐기한 '전환시대의 논리'에 담긴 사고방식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대착오적인 교조적 신념을 반복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과학적'이라고 여긴다. 그런 착각 속에 단단히 빠져 있는 자들을 '과학'으로만 설득할 수는 없다. 백신 반대 운동가들이 미국의 민주당 정권과 고학력 엘리트를 악마로 여기는 음모론적 세계관에 심취해 있다면, 한국의 주사파나 시대착오적 좌파 세력은 미국이나 주한미군, 미국과 함께 한국전쟁을 치러내며 건국된 대한민국을 악으로 여긴다. '민족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유사 종교다.

보수 정치가 박근혜 정권 이후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에 빠져 있는 이유도 같은 각도에서 짚어볼 수 있다. 진보 진영은 '일제-친일파-미군정-친미파-이승만-박정희-전두환-민정당-한나라당-이후 보수 정당'으로 이어지는 계보도를 만들어 상대를 '악마화' 했다. 그에 맞서는 자신들은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거악과 싸우고 있기에 무슨 짓을 해도 전략적으로 허용된다는 유치찬란한 논리가 지금껏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마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옮길 때부터 지금까지, 인문학은 종교와 싸워 왔다. 인문학의 적은 과학이 아니라 반성하지 않는 맹종과 열광인 것이다. 보수 진영이 무시하는 인문학의 가치도 거기 있다. 우리가 경제를 넘어 문화적, 정신적 선진국 반열에 오르려면 인문학의 힘으로 '정치의 종교화'를 극복해야 한다.

#윤석열 #인문학 #대학 #문·이과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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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9

이재명式 마법의 주문 '공공재', 일산대교 다음은?

 [노정태의 뷰파인더-51] 통행료 면제 논란과 '트러스트'

● 자본주의는 ‘돈 놓고 돈 먹기’
● 이 단순명료한 상식 통하지 않는 사람
● ‘공공성’ 내세워 파주, 일산, 김포 주민 자극
●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李에게 할 말
● 선거 홍보 위해 탕진되는 ‘신뢰’라는 공공재
● 권력자가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린다면…
● 정부는 공공선에 복무해야(GSGGood)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이재명 경기지사, 정하영 김포시장(왼쪽), 이재준 고양시장(오른쪽) 등이 9월 3일 경기 김포시 걸포동 소재 일산대교 톨게이트 현장에서 ‘일산대교 무료화 선언 합동 현장 브리핑’을 하고 있다. [김포시청 제공]
흔히 자본주의를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사람이 성실하게 땀 흘려 두 손으로 일을 해야 한다, 불로소득은 옳지 않다'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 놓고 돈 먹기'가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돈 놓고 돈 먹기'에도 나름의 윤리가 있다. 남의 돈을 먹기 위해서는 우선 내 돈을 걸어야 한다는 기본 원리가 그것이다. '이게 뭐가 윤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 보자. 세상에는 자기 돈을 걸지도 않고 남의 돈을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푼돈을 걸어놓고 목돈을 내놓으라고 우기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본인이 잘못된 베팅을 해놓고 손실이 발생하면 남이 물어줘야 한다는 식으로 나오는 이들은 또 어떤가.

이런 모든 경우를 감안해 보면, '돈 놓고 돈 먹기'는 자연 법칙 같은 게 아니다.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투자를 해야 하며, 투자를 하는 것은 본인의 판단에 따르는 것으로 그 책임 역시 스스로 져야 한다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투자의 윤리'인 셈이다.

위험을 부담하는 자가 수익을 향유한다. 투자의 원리요, 자본주의 근간이 되는 원칙이다. 투자를 통해 돈을 버는 것 자체를 경원시하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젊은이들도 주식이나 가상화폐 등 다양한 방면으로 투자를 하고 수익을 올리거나 손실을 경험하는 세상이다. '돈 놓고 돈 먹기'가 꼭 나쁜 말은 아니라는 점을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600원 통행료 공략한 대권주자

경기 김포시 걸포동과 고양시 법곳동 이산포 분기점을 잇는 일산대교의 모습. [동아DB]
이 단순명료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이하 존칭 생략)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 9월 3일, 이 지사는 최종환 파주시장, 정하영 김포시장, 이재준 고양시장과 함께 일산대교 요금소에서 일산대교 무료화를 위한 공익처분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일산대교는 그 자체가 별도 법인인 '일산대교(주)'에서 관리하고 있다. '일산대교(주)'의 지분은 2009년 이후 100% 국민연금이 인수한 상태다. 다리 건설에서 지분 인수까지 들어간 총 액수는 2500억 원이 넘는다.

그렇다면 일산대교는 국민연금의 소유인가. 그렇지는 않다. 국민연금은 경기도에 일산대교를 기부채납했다. 다만 2038년까지 30년간 유료로 일산대교를 운영하며 통행비를 받겠다는 협약을 체결한 상태다. 경기도가 소유하고 있는 교량을 국민연금이 소유한 일산대교(주)가 빌려, 통행 요금을 받아 관리하고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연금이 일산대교(주)를 인수했던 2009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일산대교(주)는 매년 100억 원씩 적자를 내고 있었다. 다리를 이용하는 인구가 많지 않았던 탓이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일산, 김포, 파주의 인구가 늘어난 다음, 더 정확히 말하면 김포신도시에 입주가 시작된 이후다. 그럼에도 2009년부터 2017년까지는 적자를 면치 못했고, 2017년에 이르러서야 순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294억 원의 매출에 순이익 43억 원을 올렸다.

9월 현재 일산대교의 통행료는 경차 600원, 소형(1종) 1200원, 중형(2, 3종) 1800원, 대형(4, 5종) 2400원이다. 이를 과도한 요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타 민자도로나 다리의 통행료 뿐 아니라, 서울 남산 1, 3호 터널에 책정된 혼잡통행료(2000원) 등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매일 혹은 자주 일산대교를 이용하는 운전자 처지에서는 무료로 이용 가능한 다른 한강 다리와 달리, 푼돈이나마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이재명은 바로 그런 심리를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해 먹어도 적당히 해 먹었어야지요"

이재명은 일산대교(주)의 사업자 운영권을 회수하고 공익처분을 내리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2월부터 운을 떼기 시작하더니 9월에 발표하고 10월부터 전격적으로 시행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산대교(주)를 소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으로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며 법적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투자법 제47조에 따른 공익처분은 주무관청이 청문 등의 절차를 거쳐 확정하면 곧장 효력을 갖는다. 경기도와 국민연금 사이에 치열한 법적 다툼을 예상할 수밖에 없다.

경기도 측의 입장은 이렇다. 국민연금은 일산대교(주)에 후순위채권을 설정했다. 쉽게 말해 돈을 빌려줬다는 뜻이다. 자신이 소유한 회사에 돈을 빌려주는 이유는 이자를 받기 위해서다. 일산대교 통행료가 얼마가 걷히건 정해진 이자를 가져간다. 그러니 국민연금이 그 이자율을 낮추면 일산대교 통행료도 낮아질 수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연금 수익률을 지키기 위해 자회사를 상대로 한 돈놀이를 계속한다.

이재명이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국민연금공단은 일산대교(주) 단독주주인 동시에 자기대출 형태로 자금차입을 제공한 투자자입니다. 국민연금공단은 출자지분 100% 인수 이후 2회에 걸쳐 통행료 인상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선순위 차입금은 8%, 후순위 차입금은 최대 20%를 적용해 이자를 받고 있습니다."

이후 이재명은 트위터에서 좀 더 과격한 표현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해 먹어도 적당히 해 먹었어야지요. 이자율 20%? 악덕사채업자입니까?"

이러한 표현을 통해 그가 노리는 바는 분명하다. 파주, 일산, 김포 주민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이다. 물론 경기도의 방침대로 공익처분이 시행된다면 국민연금은 예상치 못한 손실을 입게 된다. 국민연금은 온 국민이 낸 돈으로 만든 기금이다. 온 국민이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2500억 원의 투자금과 향후 기대되는 이익은 국민연금이 투자하고 있는 900조 이상의 기금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손해가 국민에게 당장 실감될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 이재명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와 같이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던 것이다.

"도로는 국가 기간시설로 엄연한 공공재입니다. 사기업일지라도 불합리한 운영으로 정부와 국민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면 시정해야 합니다. 하물며 국민연금으로 운영하는 국민연금공단의 사업은 수익성과 공공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2월 15일 경기 김포시 걸포동 일산대교(주) 회의실에서 열린 일산대교 통행료 개선을 위한 현장 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를 하고 있다. [뉴스1]

권력 입맛 따라 계약서도 무시되는 나라

도로는 국가 기간시설로서 공공재인가? 그렇다. 사기업일지라도 영업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해친다면 정부가 나서서 어떤 식으로건 조율할 필요가 있는가? 그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재명의 발언과 공익처분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공공재'는 도로 뿐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공공재가 바로 '신뢰'다.

우리에게 '역사의 종말'로 잘 알려진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또 다른 명저 '트러스트'에서 바로 그 '신뢰'에 주목했다.

"경제적 현실을 검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 후쿠야마가 법과 제도 등 '딱딱한' 요소가 아닌 문화라는 '부드러운' 요소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른바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들은 대체로 유사한 법과 제도를 지니고 있다. 일단 세계적으로 법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발전한 대륙법, 영미권에서 발전한 보통법(common law)으로 나뉜다. 각국은 입법 과정에서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고 연구하기에, 결국 세계 각국의 법은 세월이 흐를수록 유사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같은 법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법이 운영되는 양태는 동일하지 않다. 사회적 덕목(social virtues), 그 중에서도 신뢰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법을 만들어 놓았다 해도 국민이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법을 지키는 사람, 계약을 곧이곧대로 이행하는 사람이 손해라는 인식이 한번 퍼져 자리 잡고 나면 그것을 되돌리기란 매우 어렵다. 하물며 법과 계약을 지키지 않는 주체가 일개 국민이 아닌 정부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라 하루아침에 정책이 뒤집힌다거나, 정치권의 풍향에 따라 사업의 행방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면, 그런 나라에서 정상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기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워진다. 기업가는 정치권에 연줄을 대고 뇌물을 바치며 '정치 리스크'를 피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발생하는 비효율은 결국 소비자, 더 나아가 국가 전체의 비용으로 전가되고 만다. 그러므로 사회적 신뢰가 낮은 사회는 다른 요소가 아무리 유리하더라도 높은 수준의 풍요를 누릴 수 없다.

국민연금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이재명의 주장은 신빙성이 낮아 보인다. 설령 국민연금이 과도하게 높은 통행료를 받고 있다 해도 기습적 공익처분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민자 사업이란 정부에 돈이 없거나 해당 민자 도로 등에 수익성이 부족해 착수하지 못할 때 민간에서 자금을 동원해 공사를 하고 특정 기간 동안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계약 형태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중앙 정부나 지자체에서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릴 수 있다면, 앞으로는 과연 누가 정부를 믿고 민자 사업에 뛰어들 수 있을까? 일산대교라는 공공재의 가치보다 훨씬 큰, 정부에 대한 신뢰라는 공공재가, 이재명의 대선 홍보를 위해 탕진되고 있다.

무시되는 사용수익권과 'GSGG'

자본주의는 '돈 놓고 돈 먹는' 시스템이다. 삐딱하게 보자면 '사람보다 돈이 앞서는 세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돈 놓고 돈 먹는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만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내가 건 판돈이 얼마인지 정확히 기록·기억하며, 기대 수익을 평가하고, 성공하건 실패하건 본인의 책임으로 투자하는 이성적인 개인주의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이 '공공성'을 앞세워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이 '공공성'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권력자가 '이것은 공공재'라고 지목하는 순간 합법적으로 체결된 계약이나 사용수익권이 아무렇지 않게 무시되는 나라는 결코 좋은 나라라고 볼 수 없다. 정부는 다른 그 어떤 공공재보다 우선하여, 정부에 대한 신뢰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재명 캠프에 속해 있는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 말마따나, 정부는 공공선에 복무해야 한다(Government Serves General Good)는 말이다.

#이재명 #일산대교 #민자사업 #기부채납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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