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길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의 후폭풍 속에서 매일 정신없고 힘드실 테지만, 잠시 시간을 내어 제가 드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요즘 너무 많이 하는 이야기지만, 혹시 '오징어 게임' 보셨습니까? 안 보셨더라도 어떤 내용인지는 잘 아시겠죠. 빚에 쫓기며
사는 한 남자가 어떤 '게임'에 참여합니다. 무인도에서 치러지는 그 '게임'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뽑기(달고나), 줄다리기
같은 어린 시절 하던 놀이를 다 큰 어른들에게 시키는 것입니다. 단, 몇 번이건 실패해도 괜찮았던 어린 시절과 달리 이번에는 한
번 탈락하면 두 번의 기회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주최 측이 총으로 쏴서 죽여버리니까요.
제가 왜 '오징어 게임' 이야기를 꺼내는지 짐작이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퇴 후보에 대한 투표의 무효 처리 여부 때문입니다. 민주당 선관위가 만들고 송영길 대표님이 추인하신 현재의 해석은 제가 보기 옳지 않습니다. 마치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게임이 그렇듯이 말이죠.
당규를 상식적으로 해석하면
문제의 특별당규, 그러니까 '제20대 대통령선거후보선출규정'에서 현재 쟁점이 되는 제59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논란을 보도하는 언론은 많지만 전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곳은 찾기 어렵더군요. 해당 특별당규 PDF 파일 속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59조(후보자의 사퇴) ①경선 과정에서 후보자가 사퇴하는 때에는 해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는 무효로 처리한다.
②후보자가 투표 시작 전에 사퇴하는 때에는 투표시스템에서 투표가 불가능하도록 조치하되, 시간적‧기술적 문제 등으로 사퇴한 후보자를 제외하는 것이 불가능한 때에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조치 방법을 정한다.
민주당 선관위는 제59조 1항을 이런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퇴한 후보자에 대한 투표는 소급하여 무효가 된다.'
하지만 이 조항은 그런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후보자가 경선 도중 사퇴했다면, 그 후 그 후보자를 찍은 표는
무효'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합니다.
민주당 선관위의 해석론을 '소급무효론', 저를 비롯해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을 '추후무효론'으로 이름을
붙이고 논의를 계속해 나가봅시다. 소급무효론의 가장 큰 문제는 결선투표제의 도입 취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데 있습니다.
결선투표란 무엇입니까? 유력 후보가 아닌 군소 후보 지지자의 표심도 온전히 반영하는 것이 결선투표제입니다. 결선투표 이전까지의
과정을 모두 이겨낸 후보뿐 아니라, 여력이 부족해 중간에 사퇴한 후보자를 지지한 표심 또한, 존중받아 마땅한 표심입니다. 그걸
하루아침에 무효표로 처리해버리는 건 투표라는 제도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술래에게 걸렸다고 해서, 술래에게 총 맞아 죽는 것과 같은 부조리극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59조 2항과 함께 놓고 보면 1항의 취지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2항은 투표의 무효 처리 방법을 정하고 있습니다. 사퇴한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막아 무효표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투표를 불가능하게 처리하고, 그게 안 된다면 선관위가 책임지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찍은 표를 무효로 만들라는 뜻이 아니죠.
무효표 소급 불가 명확한데
특별당규 제60조를 보면, 제59조에서 말하는 '무효'가 소급될 수 없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제60조(당선인의 결정) ①선거관리위원회는 경선 투표에서 공표된 개표결과를 단순합산하여 유효투표수의 과반수를 득표한 후보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
②제1항의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결선투표를 실시한다.
제60조 1항의 의미를 곱씹어봅시다. 어떤 투표가
유효투표인지 아닌지는 투표가 치러진 후, 개표하여, 그 결과를 공표할 때 정해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세균
후보와 김두관 후보가 사퇴 전 득표했고, 개표하여, 공표된 2만3731표와 4411표는 유효합니다. 단 사퇴 후에 어떤 식으로건
그들에게 투표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무효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선투표제 도입의 취지에 따라 상식적으로 바라보면,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을까요.
저는 평소 더불어민주당에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영길 대표님께 이런 고언을
드리는 이유는 민주당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이건 국민의힘이건 정의당이건 이 나라 정당들 모두 우리
민주주의의 버팀목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집권 여당입니다. 개헌선에 육박하는 의석을 단독으로 지니고 있는, 제6공화국 출범 이후 가장 힘이 센 슈퍼 여당입니다. 이런 거대한 정치적 결사체에서 지지하는 후보자가 사퇴했다는 이유로 내 표가 탈락하는 경험을 국민에게 안겨줘서는 안 됩니다. 경선 규칙이 다소 애매하게 만들어져 있었다면 그 과오를 인정하고 더 많은 의견이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룰을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민주'의 모습, 아닐까요?
민주주의는 오징어 게임 아니다
민주주의는, 투표는, '오징어 게임'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순간 선거는 전쟁이 되고 맙니다. 내 표가 무시당했다는 좌절과 모멸감, 내 투표는 의미가 없다는 박탈감을 느끼는 국민이 많으면 많을수록 송영길 대표님이 이야기하신 "군사 쿠데타" 가능성은 오히려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1956년 5월 5일, 제3대 대선 직전 야당 후보였던 독립운동가 신익희 선생은 기차를 타고 가던 중 뇌일혈(혹은 심장마비)로 급사했습니다. 너무도 황망한 죽음이었기에 많은 이들은 그가 병사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암살당했을 거라는 의혹을 제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국민은 이미 죽은 신익희에게 기꺼이 표를 던졌습니다. 무려 185만 표가 나왔죠.
신익희가 얻은 185만 표. 그것은 무효표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민심은 무효가 아니었죠. 이승만 정권의 지속을 더는 원치 않는다는 대중적 열망이 한껏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무시했고, 4·19 혁명으로 축출되었습니다. 그 후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부가 권력을 잡습니다.
무효표 무시하지 마십시오. 내 표를 무효로 만들지 말라는 유권자의 함성을 함부로 짓밟지도 마십시오. 정치권에서 그런 오만한 태도를 보일 때 국민 마음은 차갑게 식어갑니다. 결국 군사 쿠데타,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일이 벌어지는 토양이 됩니다. 더불어민주당이 국민과 더불어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아름답게 가꿔나가는 정당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고언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