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2

[朝鮮칼럼 The Column]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나

[朝鮮칼럼 The Column]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나

2020년 2월 19일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수 나온 대구 남구 신천지예수교회 다대오지성전 앞을 대구 남구청 관계자들이 방역하고 있다./김동환 기자
 
“신천지 비호세력에 나라를 맡길 수 없습니다” “술과 주술에 빠진 대통령을 원하십니까”. 선관위에 따르면 이번 대선 기간 우리 국민 모두가 내걸 수 있는 현수막 문구다.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해온 표현들이다. 이런 걸 ‘게시 가능’이라 판단한 선관위도 문제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민주당에 있다. 특정 종교나 신앙 및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을 향한 무차별적 혐오 발언을 공론장에 퍼뜨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과 지지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당의 당원을 향해서도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친여 방송인 김어준이 지난 18일 유튜브 ‘다스뵈이다’를 통해 한 말을 되짚어보자. 그는 지난해 10월 민주당 대선 경선 3차 선거인단 투표에서 성분 분석이 안 되는 10만 표가 나왔다며, 그때 머릿속에 세 글자 ‘신천지’가 떠올랐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패널로 나온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 여론조사업체 윈지코리아컨설팅 박시영 대표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사회 상식의 하한선이 어디인지 의심케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나는 신천지나 무속 등을 지지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 신천지 특유의 포교 방식으로 인해 포섭된 이들이 인생을 허비하고 금전적 피해를 입으며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공권력의 적절한 개입과 수사 및 처벌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무속인에 의한 사기·협박·폭력·갈취 등의 범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피해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악질 범죄로 반드시 엄단해야 한다.

이런 견해는 필자의 독창적인 생각이나 입장이 아니다.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어떤 종교를 믿을지, 더 나아가 어떤 종교를 창시할지도 개인의 자유에 포함된다. 단, 그 종교 활동 과정에서 범죄를 저질렀거나 그럴 우려가 있다면 공권력의 제지를 받아야 마땅하다. 설령 그런 경우라 해도 종교 자체를 비하·폄훼·매도하거나 누군가 어떤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당연한 상식이 왜 집권 민주당에서는 통용되지 않은 것일까?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문재인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재작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국내에 상륙하고 퍼져나가던 무렵으로 돌아가 보자. 청와대는 중국발 외국인 입국을 막으라는 의료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외국인 혐오’ ‘제노포비아’라며 묵살하고 있었다. 그러다 막상 국내에 전파된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하자 희생양 찾기에 나섰다.

마침 대구에서 코로나가 크게 확산되었고 그중에도 신천지를 통해 퍼졌다는 사실이 역학조사를 통해 드러나자, 환자의 개인정보 보호 같은 현대 국가의 상식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났다. 질병관리청은 짐짓 중립적인 태도로 신천지를 지목하고, 여당 지지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대구 코로나’ ‘신천지 코로나’ 같은 혐오 표현을 만들고 퍼다 날랐으며, 그 모든 과정을 청와대는 묵인하거나 부추겼다. 국민 상당수가 그런 비인격적 혐오 몰이에 동참하거나 방관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만 아니면 돼’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문제야’라는 식으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서로 모여 기도하고 노래하며 공동생활하는 소수 종교와 종파일수록 감염병에 취약하다. 이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공통의 현상이다. 뉴욕에서는 보수적인 유대교 종파가, 유럽에서는 이주민들의 무슬림 사원이 초기 코로나 폭발의 도화선 노릇을 했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그 어떤 문명국가도 정부가 앞장서 특정 집단을 향해 ‘너희가 문제야’라는 시그널을 보내지는 않았다. 병을 퍼뜨린 이들이 밉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번 혐오의 씨앗이 뿌려지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심지어 반려동물로부터 지지 선언을 받네 마네 하는 ‘인권 감수성’을 뽐내다가도, 민주당은 신천지와 무속인을 만나면 오히려 잔인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마치 흑인은 총에 맞아도 개는 총에 맞지 않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는가? 이 질문을 마주하지 않는 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모든 담론은 허구다.

2022-02-19

이재명 석사논문, 표절보다 심각한 것은…

이재명 석사논문, 표절보다 심각한 것은…

[노정태의 뷰파인더] ‘행정학 석사 李’를 들여다보다

● 주제, ‘지방정치 부정부패 극복방안’
● 백기완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
● “지방정치에 주민 직접참여 활성화”
● 자칫 ‘지역 영주’ 부채질하는 주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석사학위 논문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 표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석사 학위논문 표절 여부에 대한 검증은 대선 후로 미뤄졌다. 지난해 말 가천대가 교육부에 제출한 조사 계획에 따르면 그렇다. 가천대는 4월 7일까지 조사위원회의 검증을 마치고 4월 17일까지 연구윤리위원회 승인 등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아내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논문 재조사 결과 발표도 대선 이후인 3월 31일로 미뤄졌다.

두 사람의 논문을 같은 층위에서 비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이재명은 대선후보인 반면 김건희는 후보의 부인일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김건희의 논문과 학위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상태에서 학력 부족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취득했다는 인상을 준다. 논문 표절 시비가 불거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비판받을만한 일이지만 비슷한 목적으로 학위를 딴 수많은 이들과 비교해야 할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인용 표시 안했고, 표절 인정한다”
이재명의 논문은 다르다. 이재명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이재명은 201611월 4일 부산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자신의 논문에 대한 자부심까지 드러낸 바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를 졸업했고 사법시험을 합격한 변호사”라서 “어디 이름도 모르는 대학의 석사 학위”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부정부패 극복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야간 특수대학원을 갔고, 2년 반 동안 연구한 끝에 굳이 논문을 썼다는 것이다. 다만 인용문의 따옴표를 못 친 게 있어서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재명은 지난해 1229MBC 라디오에 나와서는 “(학교 측에) 필요 없다, 제발 취소해달라, 그러고 있는 중”이라며 “제가 인정한다. 제대로 인용 표시 안했고 표절 인정한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몇몇 구절을 가져다 놓고 비교하거나 ‘카피킬러’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표절지수를 산출해볼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은 4월 17일 이후에나 내려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재명의 석사논문이 표절이라고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이 글의 목적 또한 표절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재명이 쓴 석사논문의 표절 여부와 무관하게 그 내용을 읽고 검토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0512월 경원대(현 가천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에 행정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방안에 관한 연구’를 펼쳐보자. 일각에서는 이 논문의 영어 부제가 문법에 맞지 않게 번역됐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와 같은 지엽적 문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은 건설적인 담론을 형성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재명은 이 논문을 쓰고 2006년 2월 행정학 석사가 됐다. 그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같은 해 열린 5·31 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현 민주당) 공천을 받아 성남시장에 출마했기 때문이다. 지자체장 출마를 준비하는 정치인이 지자체 부정부패 해결 방안을 연구하고 학위까지 받았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곧장 대학원에 오는 대신 사회생활을 하다가 만학의 길을 걷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중 상당수는 자신이 사회에서 경험했던 내용을 심화·확장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 결국 본인의 전문 분야에 대해 논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아주 초보적 지적 정직성 문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초선 성남시장 때인 201310월 2일 한 행사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동아DB]
2006년 낙선한 이재명은 2010년에 결국 성남시장이 됐다. 그렇다면 그가 쓴 부정부패에 대한 논문이 시 행정의 현장에서 실현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2010년 성남시장 이재명’과 ‘2006년 행정학 석사 이재명’이 동명이인이 아니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러모로 곱씹어볼만한 일이다. 정치적 지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재명의 학구열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석사과정 학생 이재명의 타 저작 인용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위에서 말한 ‘따옴표를 빼먹은’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보다 더 심각한 오류가 논문에서 눈에 띈다. 가령 13쪽, 이재명은 이렇게 적고 있다.

“특히 지방정부의 부패는 세무, 경찰, 위생, 환경, 건설 등의 분야에서 관행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백기완 외, 2000: 85-87).”

호기심을 참지 못해 논문을 읽다 말고 말미에 붙어 있는 참고문헌 목록으로 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기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썼다는 책의 제목을 찾아볼 수 없다. 참고문헌 목록은 저자의 이름을 가나다 순서로 나열하고 있는데, 단행본의 경우는 ‘김판석’에서 ‘백린’으로, 논문의 경우는 ‘김해동’에서 ‘박홍식’을 지나 ‘서울행정학회’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 중간에 들어가야 할 백기완의 이름과 그가 공저한 책의 제목은 어디에도 없다.

이재명이 직접 고르고 인용한 참고문헌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 퍽 실망스러운 일이다. 혹시 논문 제출 직전에 백기완이 행정학 석사 논문에 인용할만한 저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참고문헌 목록뿐 아니라 본문에서도 인용문을 지웠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지적 정직성과 스칼라십(Scholarship)의 문제다.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인이 쓴 논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란은 지금껏 퍽 말초적인 수준에서 이뤄져 왔다. ‘표절이냐, 아니냐’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재명의 경우처럼 논문에서 펼친 주장을 직접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된 경우라면 표절 여부만 따져서는 안 된다. 논문을 꼼꼼히 읽어보고 그 ‘내용’을 논박해야 한다. 내용을 논해야 설령 해당 논문이 표절로 판명된다 해도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공적 담론이 남는다.

‘상향식 공천’ 듣기에는 좋은 말
그러한 문제의식을 유지한 채 ‘지방정치 부정·부패 유형과 실태분석’을 다룬 3장을 펼쳐보자. 2005년 논문을 쓸 당시 이재명은 전국 정당이 지방선거 후보자를 공천하는 과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상향식 공천과 같은 공천결과의 합리성이 보장되지 않은 채 하향식 공천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공천과정과 관련된 부패행위가 만연하고 있다”(20쪽)는 것이다.

그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방안과 좌절을 논하는 대목에서 이재명은 다소 평정을 잃는 듯하다. 길게 인용해보자.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일각에서 기초단체장에 대해서는 주민자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전국 정당에 의한 정당공천을 배제하자는 논의가 많았고, 특히 집권여당은 공천배제를 당론으로 정하기까지 하였는데 선거법협상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한나라당과의 합의를 통해 기초의원까지 정당공천을 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말았다.”(21-22쪽)

요컨대 이재명은 지방선거에 있어서 최대한 전국정당의 공천을 배제해야 한다는 쪽이다. ‘하향식’ 공천 대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상향식’ 공천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중앙정부와 전국정당의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은 채, 지방 단위에서 무한대의 경쟁과 돈 선거가 벌어지며, 그 재원 마련을 위해 부정부패가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재명 스스로도 이 난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논문의 서론에서 한 문단을 인용해보자.

“지방정치과정에서의 부패는 중앙정치와는 달리 극복방안이 마땅치 않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중략) ①지방의 선출직 공직자의 경우에는 형사상 유죄판결을 받는 경우 외에는 어떠한 견제수단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②재정자립도가 높은 지방의 경우에는 중앙정부에 의한 간섭적 정치적 통제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③이 때문에 지방정치에 주민들의 직접참여를 활성화함으로써 주민에 의한 정치적 통제를 조직할 필요가 커지고 있다.”(2쪽, 원문자는 인용자)

사정이 이러한데 지방의회 등에서 상향식 공천이 과연 올바로 작동할 수 있을까? ①에서 이재명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시피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게 된다고 해도 무방한 지자체장이,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온갖 영향력을 발휘해 지방의회까지 손에 쥐고 ‘지역 영주’로 자리매김하도록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②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가령 IT(정보기술) 대기업이 몰려 있고 재정자립도가 높은 성남시 같은 곳의 지자체장은 더욱 감시와 견제로부터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③에서 제안하고 있는 주민 직접 참여를 위한 주민의 정치적 조직화라는 것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시장의 재선을 위해, 혹은 시장의 ‘더 큰 꿈’을 위해 공적 자원이 투입되는 일까지도 벌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행정학 석사’ 이재명의 제언을 따르면, ‘성남시장’ 이재명의 권력은 줄어들기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느끼게 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월 16일 서울 지하철 잠실새내역 7번 출구 앞에서 집중유세를 갖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이라는 명분
부정부패, 특히 지방정치의 부정부패를 근절하는 것은 한 편의 논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론보다는 실천이, 연구실보다는 현장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재명의 논문은 그런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썩 만족스럽지 않다. 선거로 뽑히고 임기를 보장받은 부유한 지자체의 수장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고 키워나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때, ‘정치적으로 조직된 시민’이 그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 아닐까.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건 당장 현업에서 쓰기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건, 모든 공부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문제는 유명인의 공부와 논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태도다. 마치 조선의 선비와 유생들이 한자로 쓰인 중국 책의 현실성에는 아무 상관없이 그걸 누가 더 잘 외웠느냐를 놓고 겨루던 것을 연상케 한다. 누가 무슨 공부를 했고 그 내용이 논문에 어떻게 정리돼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표절이냐 아니냐’만 물고 늘어진다. 그런 소모적인 논쟁 대신, ‘행정학 석사 이재명’의 눈으로 ‘성남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 이재명’을 검토하고 비판했더라면 더 유익한 논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좀 더 지적이고 정직하며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선진국의 모습일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바보야, 문제는 ‘알이백’이 아니라 ‘원자력 컴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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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장 자크 아노의 ‘불을 찾아서’
무탄소를 위한 탈원전 철폐

일러스트=유현호

지금부터 약 8만년 전, 불을 사용할 줄은 알지만 스스로 피워낼 줄은 모르던 원시 부족이 있었다. 우람족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어느 날 힘이 센 다른 유인원 종족에게 습격당하고, 피신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불씨를 꺼뜨리고 만다. 불을 잃어버린 우람족은 음식을 익힐 수도, 추위를 피할 수도, 창끝을 뾰족하고 단단하게 다듬을 수도 없다. 부족 전체의 운명이 걸린 상황. 족장은 건강한 세 청년 나오, 아무카르, 고우에게 특명을 내린다. 불을 찾아오라고.

검치호에게 쫓기고 물에 빠져가며 고생하던 세 용사는 식인종에게 잡혀왔지만 아직 잡아먹히지 않은 이카를 구해준다. 이카는 우람족보다 기술과 문화가 발전한 다른 부족의 원시인이다. 이카는 힘세고 리더십이 있는 나오에게 여자로서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나오에게 남녀 관계란 번식을 위한 짝짓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생존에만 급급한 우람족은 유머와 웃음을 알지 못한다. 이카는 실망하여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 버린다. 상실감이 든 나오는 불을 찾겠다는 본래 목적도 잊은 채 이카의 고향 마을로 향한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81년 작 <불을 찾아서>의 내용이다.

어린 시절 비디오로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의아했다. 불을 사용할 줄 알지만 스스로 피우지는 못한다니 이건 작위적 설정 아닐까?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화로의 신이자 가정의 신인 헤스티아가 있다. 우리의 고대 신화에도 부뚜막의 신, 아궁이의 불씨를 지키는 조왕신이 존재한다. 원시시대를 넘어선 후에도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만큼 어렵고 중요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원하는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한 최초의 에너지 전환(Energy Transition)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에너지 전환은 GE에 고용되었던 이탈리아의 핵물리학자 체사레 마르체티가 주창한 개념이다. 마르체티가 볼 때 인류 역사는 에너지의 발전사와 동일했다. 나무로 불을 지피던 시절, 석탄이 주요 에너지원이던 시기, 석유가 핵심 에너지원이자 전략 자산이던 시대, 그리고 원자력이라는 전혀 다른 힘을 발견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된 오늘날로 나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은 나무나 풀을 소화할 수 없다. 대신 불을 붙인다. 나무는 활활 타오르면서 인간에게 따스함을 전해준다. 나무를 ‘먹지’ 않고도 그 에너지를 꺼내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인류는 불을 통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에너지 생산·소비 시스템을 확보했다. 불을 이용해 손쉽게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요리를 함으로써 영양분을 남김없이 섭취할 수도 있게 되었다. 불을 피우고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인류는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인류 문명은 그 후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사용하는 에너지 수준은 <불을 찾아서>의 고인류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자연 속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 불을 때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본격적으로 달라진 것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일이다. 석탄과 증기기관의 힘으로 작은 섬나라 영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넓은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유의 힘으로 미국이 영국 자리를 빼앗았고,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개발하면서 또 다른 에너지 시대를 열어젖힌 미국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강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탈원전은 에너지 전환일까? 나무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를 지나 천연가스로 이행한 과정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연료에 포함된 탄소(C)는 줄어들고 수소(H)가 늘어난 것이다. 그을음은 덜 생기면서 효율 높은 화력을 얻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최종적으로 발견한 고밀도 에너지 원자력은 심지어 에너지 생성 과정에서 탄소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원자력을 버리고 태양광과 풍력을 늘리는 것을 ‘전환’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마르체티가 말한 에너지 전환 개념에는 맞지 않는다. 구름이 끼고 바람이 멈추면 작동하지 않는 비효율적 발전에 의존하는 것은 ‘에너지 전환’이 아니라 ‘에너지 퇴행’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원자력으로 에너지를 전환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인류 발전 궤적을 놓고 봐도 그렇거니와, 기후변화가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오늘날 상황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인류는 저탄소 에너지를 넘어 무탄소 에너지 사용을 대폭 늘려야 한다. 지난 10일 ‘원자력 르네상스’를 선언하며 원전을 추가 건설하겠다고 선언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역사의 올바른 방향에 섰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들도 결국 그 행렬에 동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현실은 어떨까? 임기를 석 달도 남기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행보를 보면 황당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에 탈원전 인사를 임명한 것부터 그렇다. 애견협회 회장 자리에 보신탕 집 사장을 앉혀놓은 꼴이다. 탈원전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녹록지 않자 이재명 후보는 ‘탈원전이 아니라 감원전’이라고 양두구육(羊頭狗肉)하더니, 대선 후보 토론에서는 ‘RE100′ 같은 전문용어를 부정확하게 인용하기도 했다. 핵심은 RE100(재생에너지 100%)이 아니라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는 것이며, 그러자면 탈원전을 철폐하고 원자력을 더 활용하며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어떻게든 호도하고자 한 것이다.

<불을 찾아서>의 마지막 장면. 나오는 이카와 함께 불씨를 들고 우람족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힘겹게 얻은 불씨를 누군가 실수로 또 꺼뜨리고 만다. 하지만 좌절은 금물. 이제는 불을 피울 줄 아는 이카가 있다. 이카는 능숙한 솜씨로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붙인다. 나오와 우람족은 환호성을 터뜨리며, 그 전까지 몰랐던 사랑과 웃음까지 깨닫게 된다. 에너지 전환이 가져다 준 해피엔딩인 셈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시절부터 원자력에 고급 두뇌와 예산을 투자한 나라다. 이카가 속한 선진 부족의 길을 일찌감치 걷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렇게 손에 넣고 키워온 소중한 과학의 불씨를 꺼뜨리려는 자들이 있다. 실수라고 보자니 너무도 초지일관하여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우리를 식인종의 먹잇감으로 만들 셈인가?

2022-02-15

갑질사회, 캅질사회

일행이 통으로 전세 내어 쓰는 기차에서 앞자리에 발 올린 게 그렇게까지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일인가? 시트가 좀 더러워졌다 한들 적당히 털고 가면 될 일 아닌가?

또 마찬가지로, 어떤 술집을 전세 내듯이 해서 온 단체 손님들이, 술 마시다가 담배를 피운 게 그렇게까지 욕 먹을 일인가? 그것도 불판에 고기 굽는 집이라면 어차피 계속 환기해야 하는데 담배연기가 그렇게 대수인가?

물론 현행법상 실내 흡연은 과태로 부과 대상이다. 하지만 그게 검사를 사칭하고, 음주운전하고, 자신의 친족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고, 시장 권한으로 특정 업체에 아파트 개발 이익을 몰아준 것과 같은 급은 아니지 않은가?

윤석열이 기차에 발 올린 사진을 보자마자 '빨리 사과하고 털고 지나가자'고 하는 것은 타당한 판단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냐 권위의식 쩐다'는 식으로까지 나가는 것은 좀 이상해보인다. 좁은 기찻간에서, 주변인들이 익스큐즈 한다면, 그 정도 발 뻗는 것도 안 되는 일인가.

나는 만성 비염 환자다. 가급적이면 마스크를 안 쓰는 게 내 건강에 유익하다. 그래서 나는 실외에서 근처에 사람이 없으면, 특히 밤이면,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밤 산책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상당수 혹은 대부분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에서. 이건 코로나 예방이라는 목적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미세하게나마 본인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다.

사람들이 왜들 이러는 걸까? 윤석열의 기찻간 발 올리기 논란, 그에 맞불이라고 제시된 이재명 담배 짤방 등을 놓고 보니, 이해가 간다.

한국에 만연한 것은 '갑(甲)질'만이 아닌 것이다. 모두가 서로를 향해 눈을 홉뜨고 감시하는 '캅(cop)질'도 일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범죄, 특히 권력 가진 자의 권력형 범죄는 '우리편'이라고 잘도 봐주면서, 막상 기껏해야 경범죄에 지나지 않을 무언가는 아주 죽어라고 잡아 족치는 이상한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기찻간에 발 올린 적 없다. 고속버스에서도 그런 짓 하지 않는다. 의자도 뒤로 젖히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서 가는 성격이다. 담배는 애초에 피우지도 않는다. 그런 짓을 옹호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또한 이 글을 이재명 쉴드 치는 것으로 읽고 뭐라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오독하고 화내는 리플을 솔직히 보고 싶지 않고, 지겹다. 지우던가 가리던가 해버릴 예정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우리가 진정 '자유주의'에 입각한 사회를 원한다면, 중범죄와 경범죄를 구분해야 한다. 중범죄는 확실히 잡고, 경범죄는 시민들끼리 서로 가볍게 훈계 계도하거나 그냥 봐주기도 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갑질'과 '캅질'이 횡횡해서야 '사람 사는 세상'은 커녕 '법치국가'도 제대로 만들기 어렵다.

2022-02-12

‘올림픽 한복’이 까발린 中 사탕발림 제국주의

‘올림픽 한복’이 까발린 中 사탕발림 제국주의

[노정태의 뷰파인더] 소수민족 정책 탈 쓴 패권 전략

● 장이머우 연출 개막식 논란
● 쑨원, ‘오족공화’ 고안 이유
● 다민족주의, 약육강식 시대 유산
● 차별 않는다는 자치권, 양날의 칼


2월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왼쪽에서 다섯 번째)이 오성홍기를 든 소수민족 중 하나로 표현돼 논란을 빚었다. [뉴스1]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개막식의 한 장면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하기 위해 나르는 사람들 중,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에 댕기머리를 한 여성이 한국 시청자들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의 것인 양 포장하는 ‘동북공정’이라며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2월 7일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황대헌, 이준서 선수가 연달아 실격 처리되는 일이 벌어지자 여론은 한층 더 나빠졌다.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두 선수가 예선에서 탈락한 후, 폴란드 선수가 중국 선수를 이겼음에도 또 한 차례 비디오 판독을 거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폴란드 선수를 실격 처리하자 논란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이번 동계올림픽은 중국만을 위한 잔치가 돼버린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인터넷을 넘어 정치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2월 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국기가 게양대로 옮겨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주한중국대사관 “그들의 바람이자 권리”
그러자 2월 8일 주한중국대사관은 대변인 명의로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의 중국 조선족 의상 관련 문제에 대한 입장 표명’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쇼트트랙 판정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개막식의 조선족 의상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중국이 ‘문화공정’과 ‘문화약탈’을 하고 있다며 억측과 비난을 내놓고 있는 데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반발했다.

중국대사관의 입장은 이렇다.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므로, “중국의 각 민족 대표들이 민족의상을 입고 베이징 동계올림픽이라는 국제 스포츠 대회와 국가 중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그들의 바람이자 권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북한에 퍼져 있는 한반도의 문화는 조선족에게도 공통되는 것이므로, 조선족이 조선족의 옷을 입고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다 해서 “이른바 ‘문화공정’ ‘문화약탈’이라는 말은 전혀 성립될 수 없다”는 취지다.

사실 이런 입장은 중국대사관이 나서기 전부터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다른 문화에 개방적 성향을 지니는 식자층과,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국내의 혐오 분위기에 반대하는 진보 성향을 지닌 이들이 진작부터 해왔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족은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한민족’의 일부다. 그런 조선족이 한민족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중국인으로서 중국에 살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재현하는 것 또한 이상할 게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해두고 싶은 사실이 있다. 필자는 최근 수년 사이 늘어난 조선족 혐오 분위기에 반대한다. 민족주의적 감성에 입각해 조선족을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라고 추켜세우는 모습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을 일종의 예비 범죄자 집단인 양 몰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보편적 인권 차원을 넘어 한국과 한국인의 장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족의 전통 문화에 대한 중국대사관의 해명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납득해서는 곤란하다. 저런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 혹은 소수민족 정책의 탈을 쓴 제국주의적 확장과 지배 프로세스를 묵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퍽 순진한 사람
중국은 공식적으로 56개 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국가다. 여기서 ‘공식적’이라는 말은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1954년 최초의 헌법을 제정할 때부터 56개의 민족을 나열하고 규정했다. 1982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각 민족은 모두 평등하다. 국가는 각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고, 각 소수민족의 평등, 단결, 상호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킨다. 어떠한 민족의 차별과 억압을 금지하고, 민족단결을 파괴하고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를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그러한 헌법적 기초에 근거해 1984년 민족구역자치법(民族區域自治法)을 제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구만 보면 좋은 말처럼 보인다. 모든 민족이 평등하고,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며, 차별과 억압을 금지하고 분열 조장도 하지 않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퍽 순진하다. 모든 말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살펴봐야 그 진의를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다.

잠시 역사를 되돌려보자. 청나라가 무너지고 신해혁명이 일어났으며 중화민국을 수립했던 무렵,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은 고민이 깊었다. 청나라는 만주족과 일부 몽고족이 수적 열세를 이겨내고 베이징을 차지하며 중원 전체를 정복한 왕조였기 때문이다. 반면 중화민국은 근대적 이념을 기반으로 한 신생 공화국이었지만, 한족이 중심이 된 나라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한족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민족에 의한 지배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할 것이며, 반대로 만주족과 몽고족은 정복자에서 피정복자로 굴러 떨어지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중화민국을 파괴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쑨원은 ‘오족공화’(五族共和)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만주족, 몽골족, 후이족(회족), 한족, 티베트족이라는 다섯 개의 민족을 명시하고 이들 모두가 중화민국을 이루며 하나가 된다는 이념이었다. 이 오족공화의 개념은 이후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설한 후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됐다. 일본인을 뜻하는 ‘야마토 민족’, 조선 민족, 몽골족, 한족, 만주족이 서로 협력하며 잘 살아가는 나라, 근대적인 국가 만주국을 이루겠다는 소리다.

노골적 차별과 지배 담론
이것은 분명 청나라 시절보다는 나아진 것이다. 만주족이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민족을 명시하고, 나열한 후 ‘민족 간 차별을 금지한다’고 선포하는 발상은 21세기는 고사하고 20세기 중반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적어도 한국이나 서구의 식자층이 떠올릴법한 ‘다문화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소리다. 노골적인 차별과 지배 담론일 뿐이다.

오족공화, 오족협화, 그 뒤를 잇는 중국의 56개 민족 담론이 얼마나 폭력적인 발상인지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가상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카뮈의 소설 ‘이방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는 알제리를 지배했다. 다른 식민지처럼 총독을 파견한 정도가 아니라 프랑스의 영토로 간주하고 행정체계 내에 편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한계에 부딪혔고 알제리는 치열한 전쟁 끝에 1962년 독립을 얻어냈다.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탄압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후 프랑스는 헌법을 개정한다. 마치 중국처럼 ‘프랑스는 프랑크인, 켈트인, 이베리아인, 리구리아인, 그리스인, 부르군트인, 골족, 바이킹, 유대인, 베르베르인 등 10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고 규정했다고 해보자는 말이다. 참고로 베르베르인이란 알제리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아랍계 민족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인 뫼르소가 햇빛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쏴 죽인 현지인 또한 베르베르인이다.

어떤가. 중국이 말하는 ‘다민족주의’가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가. 특히 1950년을 전후해 무력으로 병합한 티베트과 위구르를 ‘수많은 중국의 민족 중 하나’로 간주하고 억압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한국을 비롯해 서구 민주주의 문명권을 이루는 나라의 식자층이 생각하는 ‘다문화주의’와는 거의, 혹은 전혀 상관없다. 문화적, 역사적, 도덕적으로 점령 상태를 유지해서는 안 될 타민족을 억지로 한 나라의 범주에 포섭하면서도 그들에게 동등한 법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사탕발림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19세기-20세기 잔여물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구시대의 유산이다. 강자가 약자를 복속시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횡횡하던 시절에나 통용됐을 논리가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중국식 다민족주의는 현대적인 다문화주의는 고사하고, 21세기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법 앞의 평등’과 ‘공화주의’ 같은 아주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민주국가의 이념과도 전혀 맞지 않는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최근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중국은 호적(戶口: 후커우)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주를 막는 것이 목적인데, 결과적으로 대도시에서 살지 않는 소수민족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각 민족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명분하에 주어지는 ‘자치권’ 역시 양날의 칼이다. 한족과 소수민족이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다른 법을 적용받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것을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용납한다. 그것은 ‘민족’의 입장에서는 존중되겠지만 구체적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법적 사각지대에 산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진보 진영에서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다문화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다. 위구르와 티베트의 참상도 그렇거니와, 심지어 조선족 역시 문화적 말살을 경험하고 있다. 학교에서 조선어(한국어) 수업을 하지 않고 중국어로만 시험을 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 할 19세기와 20세기의 잔여물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은 다민족, 다문화국가로의 진입로에 접어들었다. 인구와 산업 구조의 변화, 출산율 저하 등 여러 요건을 놓고 볼 때 우리는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오는 이들과 그 자녀들을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중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민족’이 아닌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상을 지닌, 말하자면 ‘한국계 한국인’과 가까운 과거에 한국으로 온 ‘외국계 한국인’을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국민으로 취급하고 단일한 국민으로 동화해나가야 한다. 문화, 종교, 민족 같은 요소는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그다지 혹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취급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문화적 다양성’이 확보된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