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2

우크라이나 참전한 이근에게 살인죄를 묻겠다고요? [노정태가 고발한다]

우크라이나 참전한 이근에게 살인죄를 묻겠다고요? [노정태가 고발한다]

SNS에 우크라이나 도착 소식을 올린 이근. 배경은 러시아군 포격으로 불타는 하르키우시. 그래픽=전유진  

먼저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이근 대위'라는 유튜브 셀럽(유명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폭발적 인기를 끈 유튜브 방송 '가짜사나이'에서 그가 반복하던 "너 인성에 문제 있어?" 같은 유행어는 사실 왜 유행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침공당한 우크라이나로 떠났다. 참전이 목적이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외교부는 여권법 위반에 대한 행정 제재를 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난 8일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정부의 규정된 사전허가 없이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외교부는 현재 여권법에 따라 법무부 등 관계부처와 협의를 통해 여권에 대한 행정제재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여권법 위반에 따른 행정 제재는 여권 반납 명령→(불응시) 여권 무효화→새 여권 발급 제한 등 3단계 조치로 이뤄진다.
오웰도 처벌해야 했을까
우크라이나 국제 의용군으로 참전한 캐나다 코미디언 앤서니 워커. [트위터 캡처]
 
하지만 나는 이근의 우크라이나 의용군 참전을 반대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정부가 이근이나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다른 이들의 참전을 막는 것에도 회의적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싸울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라서 그렇다. 왜 대한민국은 국민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남의 나라 전쟁에 나설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 걸까.

이쯤에서 조지 오웰을 한번 소환해보자. 193612월,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의용군에 입대했다. 처음엔 저널리스트로 그곳에 갔지만 난생처음 가본 카탈루냐에 발을 딛자마자 의용군에 들어가 버렸다.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오웰은 무정부주의적인 카탈루냐에 매료됐고, 프랑코 정권에 맞서 카탈루냐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 가치가 있다고 느껴서 기자가 아닌 군인으로서 스페인 내전에 가담했다.

전쟁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전장의 공포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같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 투쟁과 내분이었다. 특히 소련의 지원을 받는 스탈린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공통의 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프랑코 정권의 파시스트들보다 때로는 더 악독했다. 결국 오웰은 몸과 마음의 부상을 끌어안은 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원고를 쓰려고 그의 『카탈루냐 찬가』를 다시 읽어봤다. 어디에도 영국 정부가 오웰의 스페인 의용군 입대를 처벌했다는 내용이 없다. 누군가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타국에서 목숨을 거는 일은, 권장할만한 일이 아닐 수는 있어도 금지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상식으로 깔려 있어서일 것이다.

영국·캐나다·미국 등은 여전히 그런 상식이 통한다. 심지어 영국과 캐나다는 우크라이나 참전을 원하면 참여해도 좋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 역시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러시아와 국가 차원의 전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침략자 러시아와 싸우고 싶은 국민이 있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외인부대 되는데 '이근'은 안 된다?
지난 8일 화상으로 영국 하원 연설을 하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합뉴스]
 
이런 상식은 한국에서는 상식이 아니다. 비단 강경한 정부의 태도뿐만이 아니라 이근의 우크라이나 입국을 다룬 기사에 달린 일반 국민의 댓글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 이유로 그의 우크라이나 행을 비난한다. 첫째, 한국인의 우크라이나 참전은 외교 분쟁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둘째, 실제 전쟁에 뛰어들면 총, 칼, 폭약 등을 사용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그건 범죄다. 셋째, 한국인이라면 한국을 지켜야 한다.

이 비판을 하나하나 따져보자. 이근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모인 2만여 명의 외국인 입대 지원자들은 모두 전쟁을 하려고 우크라이나에 도착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침공에 맞서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속성으로 시민권을 발급받은 외국인들은 '국제 군단'(International Legion) 등 별도 편제로 묶여 우크라이나군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법적·제도적 절차를 갖추면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반론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된다. 원래 한국인이라도 우크라이나 군복을 입고 작전을 수행하면서 러시아군을 사살한다면 그것은 통상적인 교전 행위일 뿐이다.

프랑스에는 외국인으로 이루어진 '외인부대'가 있다. 이들 외인부대는 대개 프랑스 국경 바깥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그 과정에서 실제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한국인 중에도 이 외인부대에 자원입대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프랑스군의 일원으로서 다른 어떤 나라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고 때로는 사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한국과 제3국의 외교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전쟁 중 적군을 살상하고 오면 살인죄를 물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군인이 작전 중 수행한 행위는 통상적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말할 수 없다.

분단국가라는 대한민국의 엄혹한 현실이 있는데 이를 내버려 두고 굳이 외국의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떨까.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에겐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복무를 마친 사람에게까지 그런 논리를 적용하는 건 무리다. 대한민국 남성은 국가의 '병역 자원'이기에 앞서 양심과 의지를 지닌 독립된 인격체다.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권리를 송두리째 부정당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참전에 살인죄를 묻겠다니
지난 1일 영국 거주 우크라이나인들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반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국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은 자국민의 참전을 허용하고 있다. [EPA]
 
문제는 법이다. 우리 법은 안타깝게도 그런 권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형법 제 111조 사전죄(私戰罪)다. 이에 따르면 "외국에 대하여 사전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금고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용군으로 외국 군대에 들어가 참전하면 외교상 문제를 일으켜 국익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게 이 조항이 만들어진 주된 이유다.

그런데 지금도 한국인들은 프랑스 외인부대, 혹은 한국 국적을 가진 채로 미군에 입대하기도 한다. 지금껏 그 누구도 그런 선택을 한다는 이유로 비난받거나, 조롱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배척당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국제 군단을 프랑스 외인부대나 미군과 다르게 취급해야 할 이유나 근거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한국인의 우크라이나 참전을 찬성하지 않는다. 누군가 조언을 구한다면 국내법을 어기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겠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쟁에 뛰어들어 우크라이나를 돕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의지를 국가가 법으로 틀어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설가 김영하의 책 제목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감수하고서라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머나먼 땅,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서 그 나라 군복을 입고 전쟁터에 뒹굴다 목숨을 잃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국가가 자국민의 양심적 병역 거부마저 존중하는 시대에, 양심적 병역 수행 역시 존중해야 하는 게 아닌지 묻고 싶다. 나도 안다.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유주의자로서 우리 사회에 작은 생각의 균열을 내고 싶다.
이근을 비롯해 우크라이나군에 자원입대한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한다.

2022-03-08

평화를 돈으로 살 수 있는가

답: 불가능하다. 돈도 결국 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나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해외 금융자산 동결. 아무리 많은 '외환보유고'를 쌓아도, 그게 자기 땅 자기 곳간에 물리적으로 들어 있지 않은 한, 이토록 쉽게 빼앗기고 마는 현실을 전 세계인이 깨닫고 있다.

링크한 WSJ 기사도 그런 것. 아예 첫 줄부터 이렇게 묻는다. "What is money?" If Russian Currency Reserves Aren’t Really Money, the World Is in for a Shock"

실로 그렇다. 러시아 뿐 아니라 중국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그토록 열심히 축적해온 '외환보유고'라는 게, 이런 식이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국과 전쟁하려고 하면 싹 동결될 싸이버 머니 아닌가?

그런데, 원래 돈이 그런 것이다. 돈을 돈으로 만드는 건 화폐 구성 물질의 재화로서의 가치나 유용성이 아니다. 신용을 보증해줄 권력, 힘, 폭력, 그런 것들이 돈을, 특히 기축통화를, 기축통화로 만들어준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노정태라는 훌륭한 필자가, 신동아라는 역사와 전통의 근본 시사 정론지에 쓴, 이 칼럼을 참고해볼 수 있다.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여기서 생각을 한 단계 더 이어가 보자. 민주당의 통일정책이란 결국 '평화를 돈으로 사자'로 요약된다. 북한에 유화책을 펴서 돈을 주고, 돈을 더 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면, 우리 말을 잘 들을 거라는 논리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평화란 힘이 충분히 강해 상대방이 나를 넘보지 못할 때 구현되는 어떤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돈을 적에게 주는 식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악당에게 돈을 줘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돈이란 힘의 다른 표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악당에게 돈을 주는 것은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이며,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은 평화의 정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짓이다.

돈으로 뭐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그것은 미국이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 전쟁을 이겨 세계를 정복했던 시절의 산물이다. 워낙 막대한 힘으로 평화가 강요되었기에 돈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제 드디어 '장기 20세기'가 완전히 끝났다. 지정학과 네셔널리즘의 시대가 돌아왔다. 우리 국민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2022-03-05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젤렌스키 조롱은 反민주적이다

● ‘젤렌스키 무능론’은 與 당론?
● 민주주의, ‘부적격자에 자격주는’ 역사
● 프랑스 마크롱도 ‘초보 정치인’이었다
● 나라 리셋 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 뉴시스]
“6개월 된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 나토(NATO)가 가입을 해주려 하지 않는데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 2월 25TV토론에서 한 말이다. 우상호 민주당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2월 28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여러 미숙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이재명을 두둔하고 나섰다.

러시아를 탓하는 척하면서 우크라이나에도 슬쩍 책임을 돌리고, 젤렌스키에게 ‘정치 경력 없는 초보 무능 대통령’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박용진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 역시 2월 25일 광주방송에 출연해 이재명과 동일한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으니 말이다. “잠깐 인기 있고, 잠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나라의 운영을 맡길 수 없습니다.”

민주당이 마치 당론처럼 밀어붙이는 ‘젤렌스키 무능론’은 왜 등장한 것일까? 속내는 박용진의 인터뷰를 통해 의문의 여지없이 해소된다.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치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에게 ‘외적의 도발을 불러일으키는 무능한 초보 정치인’ 딱지를 붙이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견강부회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 최근 방송 토론 보시면 건성건성 대답해요. (중략) 이 중요한 국가 경제 문제와 안보 문제를 이런 식으로 맡길 수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호렌카에서 3월 2일 우크라이나 군인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일부 뼈대만 남은 집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남부 헤르손을 장악한 러시아는 인근 마리우폴, 키이우, 동부 하르키우 등에 전방위적 공격을 퍼부었다. [AP 뉴시스]
‘인민의 일꾼’에서 대통령직까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젤렌스키는 ‘인민의 일꾼’이라는 정치 풍자 시트콤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같은 이름의 정당을 창당해 단번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라는 말이 틀린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젤렌스키에 빗대 윤석열을 폄하하려 하는 이재명과 민주당의 공격은 퍽 부당하다. 타국민이 겪는 전쟁과 고통을 국내 정쟁에 활용하는 비윤리적 면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 국가,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십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철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고대 그리스를 제외하고 나면, 민주주의의 역사란 곧 ‘부적격자에게 자격을 주는’ 역사다. 참정권과 투표권이 지속적으로 확대돼온 궤적을 놓고 보면 그렇다는 소리다.

민주주의가 ‘외래 문물’로 수입된 한국에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소위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소수자들은 정치적 참정권을 뒤늦게, 순차적으로 획득했다. 처음에는 유산계급 남자에게만 참정권이 있었다. 그러다 유색인종 유산계급 남자, 무산계급 남자, 유산계급 여자, 무산계급 여자 순서로 참정권을 획득하고 온전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게 됐다.

선거에 나온 다른 이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리와, 그 선거에 출마해서 다른 이의 표를 받아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권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러니 ‘아니, 코미디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고? 저 나라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따위 반응을 하는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말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속으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를 구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일종의 사농공상 내지는 카스트 제도를 내면에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범죄를 저질러서 참정권이 제한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선거에 나오면 안 될 사람’은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누군가 선거에 나왔다면 그 사람을 지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그런 선택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며 그 또한 정치적 자유의 일부다. 하지만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정치인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구분 짓고 웃음거리로 삼아 정쟁의 도구로 쓰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트럼프, 오바마 그리고 마크롱
이른바 ‘선진국’에서도 ‘자격’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일은 드물지 않게 벌어져 왔다. 21세기의 인상적인 선거를 놓고 보자면 오히려 최근의 역사는 ‘자격 있어 보이는’ 정치인들이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트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역임한 도널드 트럼프만 해도 그렇다. 한국인 중 상당수는 트럼프라는 이름을 영화 ‘나홀로 집에 2’에 깜짝 출연한 부동산 사업가 정도로만 기억했다. 그래서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을 이변이라고 보도하는 해외 언론들을 보면서, 그게 어느 정도의 이변인지 제대로 실감하는 이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에서 트럼프는 ‘나홀로 집에 2’가 아니라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인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13년이나 꾸준히 방영된 인기 프로그램이다. 내용은 이렇다. 트럼프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회사 중 하나의 경영자가 되기 위해 16에서 18명의 지원자가 접수한다. 트럼프는 그들을 어르고 달래다가도 골탕 먹이고, 속이고, 혼내고, 해고한다. “유 아 파이어드!”(You are fired: 당신은 해고야!)가 ‘어프렌티스’를 상징하는 명대사인 것은 그래서다. 백만장자 트럼프가 ‘노답’, ‘고구마’인 지원자들을 속 시원하게 해고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어프렌티스’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로 돌아가 보자. 트럼프가 만들어낸 진정한 이변은 대선이 아니라 공화당 경선이다. 조직도 경험도 없는 트럼프가 쟁쟁한, ‘자격’ 있는 정치인들을 제치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트럼프 본인도 과연 그 정도 성공을 예상했을 지에 대해 정치 전문가와 기자마다 의견이 갈릴 정도다.

그러나 중요한 건 대중의 마음이다. 미국인, 특히 공화당 지지자들은 워싱턴 DC에 모여 있는 기성 정치인들, ‘자격’이 충분한 그들을 싸잡아서 싫어했다. 그 모든 이들을 향해 ‘유 아 파이어드!’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 기득권’에 대한 분노의 열풍은 트럼프만의 독창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의 선임자인 버락 오바마 역시 ‘기득권 대 정치 신인’의 구도를 타고 순식간에 권력을 잡은 케이스다. 물론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고, 그 후 시카고에서 인권변호사 겸 헌법학 교수로 일해 왔다. 일리노이 주 의회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력은 ‘중앙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것이 아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뿐 아니라, 경선 과정에서 나가떨어진 수많은 후보 중 그 누구도 오바마에 비해 경험과 ‘자격’ 면에서 부족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경험도 조직도 없는 오바마를 택했다. 그가 잘 생긴 젊은 남자인 점도 영향을 미쳤겠으나, 근본적인 동력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그것과 동일했다. ‘기성 정치권’의 때가 묻지 않은 누군가를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혀, 나라 전체를 리셋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말이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역시 비슷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국립행정원(ENA) 졸업 후 경제부처 공무원으로 일하다,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경력을 쌓고, 프랑수와 올랑드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부실장과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 모든 이력을 통틀어 마크롱은 자기 이름을 걸고 선거에 나간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2016년 8월 장관직을 내던지고 ‘전진하는 공화국’이라는 정당을 만들더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이 그가 경험한 최초의 선거다. 마크롱은 젤렌스키와 다를 바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자’가 아닌 열망을 조직하는 자
이렇듯 민주국가의 선거는 ‘자격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만을 선호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특정 시점에 국민들이 지니고 있는 열망을 잘 조직하고 반영하는 이가 승리를 거두게 돼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사회 안정을 추구하며 계층과 계급의 격차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편을 선호하는 정치 세력, 즉 보수 진영일수록 선거에 부정적인 경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은 진보 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선거 회의론자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몇 명의 후보를 선거로 뽑은 후, 최종 결과는 추첨에 의해 결정하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제안한 바 있다. 어차피 최종 후보에 속할 정도면 ‘자격’은 충분한 사람일 테니 극한의 대립과 정쟁을 벌이지 말고 최종 승자의 결정은 운에 맡기자는 내용이다. ‘일본 정신의 기원’에서 고진은 추첨제를 제안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성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권력욕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러나 제3장 투표와 제비뽑기에서도 썼지만, 인간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러한 인간성이 나올 여지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176쪽)

퍽 나이브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진지한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선거는 정치력, 경제력, 기타 여러 요소에 의해 참여자를 제한하기에 완벽하게 민주적일 수 없다는 취지다.

과연 그런 비판이 옳은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추첨제가 선거보다 나은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선거마저도 필요 없다’, ‘적당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추첨하면 된다’ 이런 주장까지 해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선거는 유권자의 열망을 조직하여 국가적 분위기와 정책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행사다. 민주주의 선거에 '부적격자'는 없다. 젤렌스키 같은 배우 겸 TV 프로그램 제작자건, 가라타니 고진 같은 문학평론가건, 누구라도 국민의 선택을 받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젤렌스키를 조롱거리로 삼아 국내 정치에 끼워 맞추려 들었던 이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아무튼, 주말] 젤렌스키가 초보 대통령? 한국 정치는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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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킹스스피치’의 청중 효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청중 비용’

일러스트=유현호
 

1925년, 영국.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버티(콜린 퍼스)는 말을 더듬는 장애가 있다. 아내 엘리자베스(헬레나 보넘 카터)는 남편을 위해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러그(제프리 러시)를 찾아냈다. 라이오넬은 공인 자격 없는 아마추어 치료사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것은 몸이 아닌 마음 문제인 것이다.

버티는 네 살 무렵부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기대만 크고 강압적인 아버지 조지 5세와, 왕족의 책임 따위 무시한 채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동생을 쪼아대는 형 데이비드에게 억눌리면서 생긴 심인성 말더듬증이다. 조지 5세는 장성하여 두 딸까지 두고도 여전히 말을 더듬는 작은아들을 보며 탄식한다. “과거의 왕은 옷만 잘 입고 말만 잘 타면 그만이었어. 지금은 집에 있는 대중의 환심을 끌어내야만 해. 이제 우리 왕족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해. 우리는 배우가 된 거야.”

바다 건너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아가는 가운데 조지 5세는 세상을 뜬다. 그 뒤를 이어 에드워드 8세로 왕위에 오른 형 데이비드는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여성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해버린다. 버티는 형의 자리를 이어받아 조지 6세가 되어 마이크 앞에 서야 한다. 영화 <킹스 스피치>의 내용이다.

버티의 문제는 무엇일까? 라이오넬과 버티의 첫 수업. 라이오넬은 버티가 헤드폰을 쓰게 한 후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주면서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대목을 낭독하게 한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축음기에 녹음된 버티의 목소리는 유창했던 것이다. 단 한마디도 더듬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청중 효과(audience effect)가 부정적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중 효과란 말 그대로 청중의 존재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를 의미한다. 어떤 운동선수들은 관객의 환호성이 울려 퍼질 때 최고 기량을 발휘하는 반면, 어떤 선수는 연습할 때는 펄펄 날지만 관객이 들어오는 실제 시합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버티는 누군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담을 느껴 말을 더듬는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심리 현상이다.

이 개념을 국제정치학 영역으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국제정치학의 거대 담론 중 하나인 ‘민주 평화론’을 떠올려 보자.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 여론에 따라 움직이므로, 적어도 잘 발전한 민주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고전적 이론이다. 1994년 스탠퍼드 대학교의 제임스 피어론 교수는 이마누엘 칸트로 거슬러 올라가는 민주 평화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청중 효과를 연상케 하는 ‘청중 비용(audience cost)’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전쟁을 일으켜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 국민에게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민주국가가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국민이 정치권의 청중이 되어 부정적 피드백을 제공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국가가 절대 전쟁을 하지 않거나 전쟁을 무조건 피한다는 뜻은 아니다. 국민들 스스로가 외국의 침략에 맞서거나, 최악의 경우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한다면, 설령 지도자가 평화를 원한다 해도 전쟁 여론을 억누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국민의 압력 때문이다.

요컨대 민주국가는 독재국가에 비해 청중 혹은 국민이 정치권에 요구하는 바가 많고,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정치인이 국민 여론을 거스르고자 한다면 정치적으로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대신 국민이 원하는 방향의 정책이나 전쟁이라면 독재국가보다 더 전폭적인 지지와 희생을 얻어낼 수 있다. 민주국가의 지도자가 지불해야 하는 높은 청중 비용은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따라서 민주국가는 독재국가처럼 적국을 기만하여 기습 전쟁을 벌이기 어렵지만, 공개적으로 전쟁에 나서면 독재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보여줄 수도 있다.

<킹스 스피치>로 돌아가 보자.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른 후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조지 6세는 라이오넬의 도움을 받아 더듬거리면서도 성공적으로 전쟁 연설을 해낸다. 입헌군주정의 군주가 치러야 할 높은 청중 비용이다. 그와 함께 전쟁을 이끈 처칠 총리도 마찬가지다.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식의 달콤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땀과 눈물뿐’이라며 국민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했다.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정직해야 한다. 높은 청중 비용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을 하나로 모아 국난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 2월 러시아는 기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우크라이나가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다. 단, 젤렌스키 대통령만은 예외였다. 그는 소셜미디어(SNS)로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수도 키이우(키예프) 사수 의지를 드높였다. 미국에서 항공편을 제시하자 ‘탈출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고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작은 승전보가 쌓이면서 국제사회의 여론 또한 푸틴과 러시아를 비난하고 책임을 묻는 쪽으로 쏠리고 있다. 점점 커지는 전쟁의 청중 비용이 우크라이나를 북돋고 러시아를 억누르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이고도 감동적인 장면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지난 2월 25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은 TV 토론에서 ‘초보 대통령이 러시아를 자극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상식 이하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자 민주당 측 인사들은 마치 당론으로 정하기라도 한듯 젤렌스키를 ‘코미디언 대통령’이라고 조롱하며 러시아를 두둔하거나 양비론적으로 발을 빼는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외국인들 보기에 너무도 부끄럽다. 우크라이나는 코미디언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우리는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들이 코미디를 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 정치는 웃기지도 않고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다. 거짓말로 호객하고 자리에 앉으면 정체불명 약을 파는 약장수 광대들을 대체 어찌해야 할까. 3월 4일과 5일, 대통령 선거 사전 투표일이다. 9일에는 본투표가 있다. ‘청중’인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을 몇 안 되는 기회,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

2022-03-04

바가바드 기타(1)

얼마 전 반야심경의 현대어 번역 어쩌구 하는 글을 썼는데, 그 주제가 머릿속에 남아서, 이것저것 틈틈이 좀 더 찾아보다가, 며칠 전 거리에서 '샨티'라는 이름의 인도 식당을 보았고, 엘리엇의 '황무지'의 마지막 줄인 '샨티 샨티 샨티'를 중얼거리다가, 최초의 핵실험이 터져나올 때 오펜하이머가 주절거렸던 '나는 이제 세계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도다'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대목을 연상했으며, 그리하여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 니체를 굳이 읽을 필요조차 없다. 니체 철학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문학적으로도 더 탁월하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 및 여타 인도 철학을 애호하고 옹호하는 이들은, 그토록 아름답고 강렬한 텍스트가 결국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고, 신분 차별을 정당화하며, '너희 크샤트리아들은 우리 브라만이 시키는대로 가서 쌈박질이나 해라'는 취지로 전락하고 만다는 엄연한 사실을 도외시한다. 이것은 니체 철학을 애호하는 자들과도 마찬가지다(니체 철학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애매하고 또 우스꽝스러워지는지에 대해서는 러셀이 <서양철학사>에서 신랄하게 비웃은 바 있다).

하지만 실로 강렬한 텍스트인 관계로, 머리에서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 내지는 '보다 나은 계급'의 일원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여기는 서구의 리버럴 계층에게 바가바드 기타는 더욱,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을 테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필립 글래스의 사티야그라하 무대 영상을 세 번째 돌려보다가, 이제 한 번쯤 글로 털고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타자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