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은 착하기까지 하다'는 이야기는 결국 가진 자들이 '우리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 '진솔한' 말을 털어놓거나, 비교적 가난하게 큰 사람들이 '그게 현실이죠'라고 소소한 술회를 털어놓으며 끝나게 마련이다. 즉, 못 가진 자들의 심리가, 기껏해야 질투심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정도에서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한국에서 좌파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이 부분을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질투와 계급의식의 차이도, 혹은, 그것들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 그리하여 질투가 계급의식으로 승화되지도 못하고, 계급의식이 질투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솔직하게 드러나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급의식을 통해 질투심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강인욱은 박예진을 정재민에게 빼앗긴 후 그람시의 옥중수고 따위를 읽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 전에 이미 손을 댔었더라도, 출세하여 자기 손으로 인생을 개척하겠다는 그가 그 내용을 진정으로 흡수했을 리 없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울분을 해결하기 위해, 혹은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좌파 서적을 집어든 순간 그가 계급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진 것이기도 하다. 계급의식과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이 바로 사회 계층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인욱은 정재민보다 부유해질 수도 없고, 그의 세계를 뛰어넘는 시각을 통해 도래하지 않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도 없다. 계급의식은 깨달아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제2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러 추구하는 한 쉽사리, 어쩌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질투를 느끼기 시작한 이상, 그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계급 의식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억지로 겨우 가능하기에 어떤 경우에도 미학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좌파들이 우파로서는 어림잡을 수 없는, 특정 계급에게는 해방이고 또 다른 계급에게는 묵시록에 가까울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우파들의 자산으로부터 파생되며 그 소유권을 박탈당했을 때에는 철저하게 파산하여버릴 가치를 배가 고프지만 체면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음식을 힐끔거리듯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온당한 일이 아닐 터이다. 맑스가 확실히 말한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이 부르주아의 도덕적 가치관을 모두 폐기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면 그것들이 제1가치로서 남아있을리가 없기에, 결국 부르주아의 도덕적인 혹은 '쿨한' 모습들은 좌파에게는 일종의 사다리로서 받아들여져야 마땅하다. 달리 말하자면, 좌파들은 자본주의적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기독교적으로 희구하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질투를 느끼는 순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좌파 지망생은, 욕망의 게임에 한 발을 들여놓게 되고 결국 패배하도록 예정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르주아들의 세계를 파괴하면서 노멘클라투라로 다시 태어난다. 보드카 대신 코냑을 마시고 비스킷 위에 케비어를 얹게 되면서 역사는 조악한 형태로 다시 반복되며, 대 부르주아들이 가지고 있던 귀족적인 우아함과 소 부르주아들이 담지하고 있던 지역 공동체와의 밀착은, 대체로 유착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복구될 수 없는 지경까지 파괴된다.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있던 서구 문명이 구 공산권의 그것보다 미적으로 탁월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고목나무처럼 소련이 쓰러지고 중국이 기이하게 변태하면서 두 체제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완벽하게 해소되어버렸다.
이 과정이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좌파가 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계급적인 갈등을 해결하려는 청년은 살롱 좌파가 될 수도 없는데, 그것은 이미 '좌파'로서 거듭나버린 그에게 또 하나의 계층적 문제가 있다는 좌절감을 안겨줌으로써 모든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그러므로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테리 이글턴 같은 좌파가 된다면 부르주아 계급의 지적인 교양이나 우아함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러한 질투심을 이겨내기 위해 테리 이글턴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도 온당하지도 않다. 그 순간, 계급의 문제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주변부와 중심부의 갈등이 악몽처럼 덮쳐올 것이며, 그 유령을 이겨내기 위한 엑소시즘을 진행할만한 어떤 신성함이나 초월적인 힘이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결론을 내릴 수 없다.
2007-05-20
한국의 현재를 사는 사람들
한국의 현실이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지금 당장 무엇을 하려 들기보다는, 혹은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들을 종합적으로 활용하려 들기보다는, 앞으로 도래할 어떤 새로운 세계나 그것을 열어줄 수 있는 계기를 목놓아 기다리는데서 만족하거나 '미래를 대비'하는 쪽에 자신의 자원을 모두 쏟아붓는다는 식으로 스스로의 역할을 규정하는 그것이야말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불러온 문화적 현상의 본질 중 하나이다. 요컨대 한국적 특수성을 논하는 자들 중, 정작 한국의 현재를 사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여건에 대한 불만은 한국어에 대한 것으로 곧잘 치환된다. 한문 고전과의 역사적 맥락이 단절되어 우리의 정신 세계가 붕 떠버렸다는 페이퍼하우스 대표 최내현의 말을 전해들었을 때,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적잖이 놀랐고 또 반갑기까지 했지만, 어제 인쇄되어 나온 드라마틱 22호에 실린 그의 칼럼은 다소 실망스럽다. 영어의 you에 해당하는 한국어 어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명백한 사실이고, 그것이 상대방을 특정하지 않으면 발화가 불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여 궁극적으로는 관계를 규정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현격하게 방해한다는 것 또한 정확한 지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능 혹은 기능의 결여가 낳는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언제라도 읽는 이를 you로 호칭할 수 있는 영어와는 달리, 한국어에서는 심지어 글을 쓸 때에도 독자와의 관계를 고려해야만 하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적'인 문어체를 만들어 낼 수도 없다는 것이다. 2인칭 호격의 부재는 술자리가 아니라 글자리에서 더욱 도드라지며, 그것이야말로 그 문제의 본질이다. 심지어는 지금 나도,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누구라고 함부로 지칭할 수가 없기 때문에, 독자를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다소 기만적인 자기 독백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현대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문어체와 구어체의 완벽한 괴리이며, 그 현상의 이면에 깔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2인칭 호격의 부재인데, 그것을 단지 '상대방의 높낮이를 늘 재야만 하는 현실'로만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서글픈 일이다.
그 칼럼 하나에 담긴 내용과는 별개로 최내현 대표는, 또한 드라마틱과 판타스틱의 창간과 발행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또 하고 있는 박현정 편집이사는, 한국의 현실을 사는 사람 중 하나다. 판타스틱이 창간 특수 이후 과연 얼마나 안정적인 판매량을 보일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낙관하기 어렵지만, 드라마틱이 지금까지의 상업적 부진을 딛고 문화적인 영향력을 가진 매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지만, 페이퍼하우스에서 시도하고 있는 매체들은 그 자체로서 한국의 문화적 현실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을 추구하고 있다. 내가 드라마틱의 에디터여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에서 자생력을 갖춘 문화, 그 중에서도 '작가'라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르는 드라마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이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드라마 작가들에게는 공통되는 하나의 분위기가 있다. 자신들이 쓰는 극본이 비평계에서 도외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어쨌건 쓰고 또 쓰는, 본의 아닌 끈질김 같은 그런 것. 언론들은 언제나 지엽말단적인 것에만 열광하고, 조금만 자신의 자의식으로 함몰되면 곧장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그들은 꾸준히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방송 매체의 특성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드라마 작가들도 결국 한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판타스틱에는 거의 관여를 하고 있지 않으니 드라마틱에 대해서만 좀 더 얘기해보자면, 이 매체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관통하는 어떤 분위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민준 편집장, 최원택 수석, 그 외 모든 사람들은 한국 드라마를 절대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잡지에서 일하기 위해 그런 자세를 부러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때 대단한 영화 키드였던 조 편집장은 '케세라세라'가 어떤 면에서는 영화가 보여줄 수 없었던 성취를 이루었다고 감탄사를 늘어놓는다. 양키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부러운 심경을 감추지 않는 취미가 최 수석 또한, 자신이 언젠가 드라마 극본을 쓴다면 '환상의 커플'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만들고 말겠다고 다짐한다. 우리는 한국 드라마의 현장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눈에 보이는 작품 중 80%가 그저 그런 범작에 불과하고, 15%가 구제불능이며, 겨우 5% 정도만이 진지하게 탐구할만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직접 한국 문화의 현장 속에 뛰어들려 하지 않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아니 한국 지식인들이, 머리로는 그렇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술자리에서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자기 연민을 위한 희생양으로, 드라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장르를 싸잡아 비난하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내 이름은 김삼순'이 방영되고 있는 동안에도 한국의 모든 것이 정체되어 있다고 찌질거린다.
한윤형과 술을 마시던 금요일 밤에 이택광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를 술자리에서 서너번 쯤 만났는데, 거기서 느낀 인상과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한 사람의 블로거로서 그는 한국 학계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절대 비관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한국 학자들이 공부 안 한다는 언급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문학자들끼리 모여 자전거를 타자는 제의를 하고, 들뢰즈 독회에서 받은 신선한 인상을 긍정적이고 경쾌한 어조로 기록한다. '객관적'인 시각에서만 보자면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바로 그 별 거 아닌 일상성이 그의 블로그의 탈식민성을 구성하고 있다. 탈식민주의의 궁극적인 목표가 타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관계맺을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라면, 한국의 학계가 할 수 있는 일은 탈식민주의에 대한 텍스트를 읽으며 고뇌하는 것보다는 그런 책을 읽고 사는 자신들의 모습을 일단 긍정부터 하는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드러내지 않을 때의 강유원을, 한 사람의 서평가로서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기도 하다. 자신이 철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결국 한국 철학의 현재 속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정답이다. 이택광은 블로그를 통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한 인문학자의 삶을 구성해내고 있다. 나는 그의 영화평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정신분석학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터라 그의 논의를 힘들여 추적하지도 않지만, 그가 웹에서 보여주는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만큼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현재를 추적하는 사람이라면 또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아트 인 컬쳐'의 편집장이며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의 저자인 이정우(임근준) 씨. 글을 만지고 사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곤 하는 CIS 증후군, 즉 Contemporary Is Sucks 따위 마인드를 그에게서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의 책이나 잡지를 직접 읽어본 적이 없고 다만 블로그만을 꾸준히 관찰해온 터라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꺼려지긴 하지만, 애초에 '한국 현대 미술가들을 추적하겠다'는 발상을 내놓는 것부터가, 지금 내가 이렇게 주절거리는 테마를 그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구체적으로 붙들어왔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미술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곳의 시장이 정상적으로 살아있으며 그로 인해 그와 같은 비평이 소비될 여지가 있는지는 모를지라도, 창작자가 아닌 비평자로서 살아가겠다고 작정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꿋꿋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 정도는 내 수준에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물론 미술은 대부분 단일한 물리적 대상으로 현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아무리 모나리자가 위대해도 그것을 내 방에 가져다 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음악이나 문학 등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예술에 비해 필연적으로 훨씬 강하게 현실에 밀착한다. 음악 애호가가 바흐만 듣고 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잭슨 폴락의 그림을 한 점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재산이 필요하다. 컨템포러리에 대한 수요가 미술에서 끊일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라고 추측한다면, 창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쪽은 적어도 문학보다야 상황이 낫다고 볼 수 있겠지만, 비평을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만을 죽 훑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경마장의 말처럼 무조건 앞을 향해 질주하기만 한다는 뜻도 아니고, 이들이 중심부의 상황을 힐끔거리며 동경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을 내가 굳이 꼽아드는 이유는, 한국의 문화가 이러저러하고 그리하여 주변부의 사람으로서 소외되어 있다고 너무 편하게 생각해버리고 안주해버리는 어설픈 지식인들, 그래왔던 나와는 너무도 다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바로 그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사실 이 주제를 글로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국이 주변부라는 사실을 '제대로' 폭로하고자 절치부심 다짐만 하고 있으면, 나 또한 한국의 현실을 사는 게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을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초라함을 논하되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이라고,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여건에 대한 불만은 한국어에 대한 것으로 곧잘 치환된다. 한문 고전과의 역사적 맥락이 단절되어 우리의 정신 세계가 붕 떠버렸다는 페이퍼하우스 대표 최내현의 말을 전해들었을 때,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적잖이 놀랐고 또 반갑기까지 했지만, 어제 인쇄되어 나온 드라마틱 22호에 실린 그의 칼럼은 다소 실망스럽다. 영어의 you에 해당하는 한국어 어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명백한 사실이고, 그것이 상대방을 특정하지 않으면 발화가 불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여 궁극적으로는 관계를 규정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현격하게 방해한다는 것 또한 정확한 지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능 혹은 기능의 결여가 낳는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언제라도 읽는 이를 you로 호칭할 수 있는 영어와는 달리, 한국어에서는 심지어 글을 쓸 때에도 독자와의 관계를 고려해야만 하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적'인 문어체를 만들어 낼 수도 없다는 것이다. 2인칭 호격의 부재는 술자리가 아니라 글자리에서 더욱 도드라지며, 그것이야말로 그 문제의 본질이다. 심지어는 지금 나도,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누구라고 함부로 지칭할 수가 없기 때문에, 독자를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다소 기만적인 자기 독백체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현대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문어체와 구어체의 완벽한 괴리이며, 그 현상의 이면에 깔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2인칭 호격의 부재인데, 그것을 단지 '상대방의 높낮이를 늘 재야만 하는 현실'로만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서글픈 일이다.
그 칼럼 하나에 담긴 내용과는 별개로 최내현 대표는, 또한 드라마틱과 판타스틱의 창간과 발행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또 하고 있는 박현정 편집이사는, 한국의 현실을 사는 사람 중 하나다. 판타스틱이 창간 특수 이후 과연 얼마나 안정적인 판매량을 보일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낙관하기 어렵지만, 드라마틱이 지금까지의 상업적 부진을 딛고 문화적인 영향력을 가진 매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지만, 페이퍼하우스에서 시도하고 있는 매체들은 그 자체로서 한국의 문화적 현실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을 추구하고 있다. 내가 드라마틱의 에디터여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에서 자생력을 갖춘 문화, 그 중에서도 '작가'라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르는 드라마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이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드라마 작가들에게는 공통되는 하나의 분위기가 있다. 자신들이 쓰는 극본이 비평계에서 도외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어쨌건 쓰고 또 쓰는, 본의 아닌 끈질김 같은 그런 것. 언론들은 언제나 지엽말단적인 것에만 열광하고, 조금만 자신의 자의식으로 함몰되면 곧장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그들은 꾸준히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방송 매체의 특성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드라마 작가들도 결국 한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판타스틱에는 거의 관여를 하고 있지 않으니 드라마틱에 대해서만 좀 더 얘기해보자면, 이 매체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관통하는 어떤 분위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민준 편집장, 최원택 수석, 그 외 모든 사람들은 한국 드라마를 절대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잡지에서 일하기 위해 그런 자세를 부러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때 대단한 영화 키드였던 조 편집장은 '케세라세라'가 어떤 면에서는 영화가 보여줄 수 없었던 성취를 이루었다고 감탄사를 늘어놓는다. 양키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부러운 심경을 감추지 않는 취미가 최 수석 또한, 자신이 언젠가 드라마 극본을 쓴다면 '환상의 커플'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만들고 말겠다고 다짐한다. 우리는 한국 드라마의 현장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눈에 보이는 작품 중 80%가 그저 그런 범작에 불과하고, 15%가 구제불능이며, 겨우 5% 정도만이 진지하게 탐구할만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직접 한국 문화의 현장 속에 뛰어들려 하지 않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아니 한국 지식인들이, 머리로는 그렇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술자리에서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자기 연민을 위한 희생양으로, 드라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장르를 싸잡아 비난하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내 이름은 김삼순'이 방영되고 있는 동안에도 한국의 모든 것이 정체되어 있다고 찌질거린다.
한윤형과 술을 마시던 금요일 밤에 이택광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를 술자리에서 서너번 쯤 만났는데, 거기서 느낀 인상과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한 사람의 블로거로서 그는 한국 학계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절대 비관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한국 학자들이 공부 안 한다는 언급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문학자들끼리 모여 자전거를 타자는 제의를 하고, 들뢰즈 독회에서 받은 신선한 인상을 긍정적이고 경쾌한 어조로 기록한다. '객관적'인 시각에서만 보자면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바로 그 별 거 아닌 일상성이 그의 블로그의 탈식민성을 구성하고 있다. 탈식민주의의 궁극적인 목표가 타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관계맺을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라면, 한국의 학계가 할 수 있는 일은 탈식민주의에 대한 텍스트를 읽으며 고뇌하는 것보다는 그런 책을 읽고 사는 자신들의 모습을 일단 긍정부터 하는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드러내지 않을 때의 강유원을, 한 사람의 서평가로서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기도 하다. 자신이 철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결국 한국 철학의 현재 속에서 살아가는 것만이 정답이다. 이택광은 블로그를 통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한 인문학자의 삶을 구성해내고 있다. 나는 그의 영화평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정신분석학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터라 그의 논의를 힘들여 추적하지도 않지만, 그가 웹에서 보여주는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만큼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현재를 추적하는 사람이라면 또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아트 인 컬쳐'의 편집장이며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의 저자인 이정우(임근준) 씨. 글을 만지고 사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곤 하는 CIS 증후군, 즉 Contemporary Is Sucks 따위 마인드를 그에게서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의 책이나 잡지를 직접 읽어본 적이 없고 다만 블로그만을 꾸준히 관찰해온 터라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꺼려지긴 하지만, 애초에 '한국 현대 미술가들을 추적하겠다'는 발상을 내놓는 것부터가, 지금 내가 이렇게 주절거리는 테마를 그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구체적으로 붙들어왔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미술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곳의 시장이 정상적으로 살아있으며 그로 인해 그와 같은 비평이 소비될 여지가 있는지는 모를지라도, 창작자가 아닌 비평자로서 살아가겠다고 작정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꿋꿋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 정도는 내 수준에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물론 미술은 대부분 단일한 물리적 대상으로 현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아무리 모나리자가 위대해도 그것을 내 방에 가져다 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음악이나 문학 등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예술에 비해 필연적으로 훨씬 강하게 현실에 밀착한다. 음악 애호가가 바흐만 듣고 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잭슨 폴락의 그림을 한 점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재산이 필요하다. 컨템포러리에 대한 수요가 미술에서 끊일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라고 추측한다면, 창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쪽은 적어도 문학보다야 상황이 낫다고 볼 수 있겠지만, 비평을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만을 죽 훑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경마장의 말처럼 무조건 앞을 향해 질주하기만 한다는 뜻도 아니고, 이들이 중심부의 상황을 힐끔거리며 동경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을 내가 굳이 꼽아드는 이유는, 한국의 문화가 이러저러하고 그리하여 주변부의 사람으로서 소외되어 있다고 너무 편하게 생각해버리고 안주해버리는 어설픈 지식인들, 그래왔던 나와는 너무도 다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바로 그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사실 이 주제를 글로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국이 주변부라는 사실을 '제대로' 폭로하고자 절치부심 다짐만 하고 있으면, 나 또한 한국의 현실을 사는 게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을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초라함을 논하되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이라고,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07-05-18
[[문화와 가치]]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6
어떤 사람에게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비록 우리들이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부언하더라도, 아무 뜻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일은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우 종종 일어난다.)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열 수 없는 자물쇠를 걸라. 그러나 당신이 그들이 그 방을 밖에서 찬탄하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방에 대해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은 뜻이 없다! (39쪽)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열 수 없는 자물쇠를 걸라. 그러나 당신이 그들이 그 방을 밖에서 찬탄하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방에 대해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은 뜻이 없다! (39쪽)
200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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