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명박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진중권은 프레시안에 연일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기존에 진중권을 마땅찮게 생각하던 이들도, 그가 이명박과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은 즐겁다고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역시 진중권은 개 팰 때 최고야!' 같은 찬사가 줄을 잇는다. 극우파와 싸우는 것이 진중권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는 식의 평가가 그 뒤를 따른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진중권이라는, 한국 사회가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의 위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진중권에 대한 은근한 폄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진행된다. '진중권이 하는 말이 꼭 틀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어딘가 모르게 은근히 기분이 나쁘고, 그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령 허지웅은 "[디 워]에 대한 짧은 결산"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디 워> 광풍 당시 언론은 이를 영화의 질적 수준에 대한 찬성과 반대 논쟁으로 몰아갔고, 궁극적으로 평론가 대 관객이라는, 실제 존재하지 않지만 발끈하기 딱 좋은 마술적 대결구도를 만들어냈다. 여기에는 입 바른 말 했다가 고생한 진중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하필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은 거다.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를 정색하고 논하는 건 일종의 넌센스에 가깝다. 이 논쟁은 현상으로 접근해야 의미가 있다.
허지웅, "[디 워]에 대한 짧은 결산", ozzyz review 허지웅의 블로그, http://ozzyz.egloos.com/3611252
여기서 허지웅이 가지고 있는 논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둘째, 바로 그러한 일을 하면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어려운 단어를 끄집어내 대중들의 심기를 거스른 진중권의 행동은 잘못되었다. 이 각각에 대해 반박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중권이라는 비평가가 한국 사회에 어떤 의의를 지니는 존재인지에 대해 좀 더 명료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우선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는 것이 넌센스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것은 영화평론가로서의 직업적 의무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소리이다. 물론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가 대단히 형편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알고 있음'은 그저 그렇거니 하고 짐작하는 정도의 앎일 뿐이지, 왜 그 영화가 잘못되었고 어느 부분이 특히 어떻게 잘못 만들어져 있는지를 다른 이에게 설명하고 그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앎'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석판!'이라고 외침으로써 조수가 석판을 들고 지붕 위에 올라오도록 할 수 있음을 뜻하지, 언어의 사용을 둘러싼 현상에 접근하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 비평을 자신의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디 워'가 대체 왜 어디서 어떻게 나쁜 작품인지에 대해 다른 이를 설득할 수 있을만한 분석력과 표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 평론가의 1차적인 의무 아닌가? 비평가가 자신이 다루는 작품에 대해, 그것의 장점과 단점을 합리적인 언어로 풀어낼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는 사실상 극장을 드나드는 수많은 대중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일 뿐이다. 자신의 감상을 과장된 수사로 포장하여 진열하는 것은 비평이 아니다. 물론 아름다운 문체와 현란한 수사를 구사하는 비평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비평을 비평이게 하는 것은 작품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해석이며,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평론가는 자신의 존재론적 위의를 상실하게 된다.
진중권이 '디 워' 사태에서 유일무이한 '비평가' 였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디 워'라는 말도 안 되는 영화 앞에서 수많은 영화 평론가들이 입을 다물거나 버벅거리고 있을 때, 진중권은 브라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각오로 그 작품이 가지고 있던 서사적 결여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한 단어로 압축해내는데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다. 독일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사람 답게, 그는 자신이 아는 고전적인 미학 이론에 근거하여 '디 워'라는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결함에 치명타를 날렸다. 이것은 허지웅이 말하는 것처럼 '디 워'를 "현상으로 접근"하려 했던 여타 사람들이 보여주지 못한 미덕이다.
비평에 있어서 어떤 사태를 바라볼 때, 그것에 "현상으로 접근" 하는 것은 결국 대상 그 자체를 비평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황우석 사태의 핵심에는 사이언스에 게재된 황우석의 논문이 있었고, '디 워' 사태의 핵심에는 쇼박스의 극장에 내걸린 심형래의 영화가 있었다. 황우석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에도, 그때에는 진중권 본인을 포함하여, 그 광기에 "현상으로 접근"한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정작 그 파문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집요한 탐구와 과학적 검증을 통해 황우석의 논문 그 자체가 날조된 것임을 밝혀낸 MBC PD수첩의 황학수 PD였다. '디 워' 파동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어쩌고 광기가 어쩌고 떠드는 이들은 많고도 많았다. 하지만 정작 '디빠'들의 파동을 잠재우고 '디까'들에게 이론적인 무기를 제공하여, 중간계의 균형을 50대 50 정도로 바로잡은 이는 '디 워'가 2000년 전부터 구리다고 정평이 났던 극작법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산물임을 폭로한 진중권이다. 그가 작품 자체에 대한 치명타를 가하지 않았다면, 허지웅 같은 희생자가 아무리 대중의 광기 앞에서 소녀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들 '디 워' 사태는 곱게 마무리되었을 리 만무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표현이 공중파에 등장한 것은, 허지웅을 포함하여 진중권의 계몽주의를 마뜩찮게 생각하는 이들이 불평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앞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그 마법의 여덟 글자는 '디 워'의 서사가 엉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해 수세에 몰려 있던 디까들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대중들이 어려운 말이라면 무턱대고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대중들은 어려우면서도 자신들이 그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말을 싫어한다. 그 용어를 사용하는 '지식 계층'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맥락에서 차분한 설명과 함께 그것을 풀어준다면 대중들은 그것을 선선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바로 그렇다. '디 워'라는 모범적인 텍스트와 함께 그 말을 듣고 보니, 한 방에 쉽게 이해가 되더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중들은 생각보다 그리 심하게 멍청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계몽을 해줄 수 있는 비평가가 진중권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보론: '디 워' 사태에서 진중권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그게 아니다. 그는 '디 워'의 CG를 '그럭저럭 봐줄 만 하다'고 평가함으로써, 디빠들이 딛고 설 수 있는 최소한의 영토를 승인하는 전략적인 패착을 범하였다. 물론 개별적인 오브젝트의 완성도는 나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한 화면 안에 합성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프레임 안의 피사체가 지녀야 할 질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것은, 거기서 동원된 CG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데 복무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CG는 아무리 따로 떼어놓고 볼 때 그럴싸하다 한들 좋은 CG가 아니다. 하지만 진중권은 고사하고, 전문적으로 영화를 비평하는 이들 중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큰 목소리로, 전문가적인 식견과 함께 제시한 이가 과연 있던가?)
2.
이러한 논의를 통해 나는 진중권이라는 비평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그는 '디 워' 같은 개 쓰레기 영화도 찬찬히 바라보고 자신이 가진 비평적 언어로 해설하려 했다. 진중권은 한국 비평계에 횡횡하던 가짜 규칙을 허물어뜨리고 진짜 논쟁을 시작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현실 속의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응시의 끈을 놓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비평가인 것이다. 문제는 진중권이 지닌 그러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데 있다. 이명박 싫어하는 게 자랑이지만 사실 그 지지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련의 네티즌들은 진중권을 오직 '극우파 까는 호두까기 인형' 정도로 치부하려 든다. 그런 식으로 진중권을 폄하하는 것이야말로 '평론 혐오'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중권이 지닌 가치는 그가 쓰는 칼럼이 아닌, 앞서 길게 논한 비평가로서의 자세와 더불어, 그 칼럼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이론적 틀에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몇 편의 글을 통해 넌지시 언급한 후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인터넷 문화를 '구술문화'로, 서구의 분위기를 '문자문화'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이자, 지식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논거로 댈 게 따로 있지, 무슨 구닥다리 월터 옹 이야기를 꺼내냐는 것이 그 첫 번째였다. 그러한 논의 구조는 지나치게 편리한 의제 설정이라는 식의 비판이 두 번째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요컨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라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진중권의 문제 제기는 비평계에서 거의 반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한윤형이 "지존키워 진중권의 전투일지"에서 연대기순으로 정리해놓은 바와 같이, 진중권은 한국의 인터넷 토론의 역사 그 자체라고 불리워도 무방한 인물이다. 레닌을 빼놓고 러시아 혁명을 논할 수 없듯, 진중권을 빼놓고 인터넷 말싸움을 논할 수도 없다. 그런 그가 한국의 인터넷 문화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였는데, 그것이 여느 사람들이 내놓던 것과는 사뭇 다른 지점을 짚고 있다면, 우리는 한 번쯤은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가 당시 골 족의 풍속을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원조 진빠 한윤형의 말에 따르면 진중권은 실제로 《갈리아 전기》의 문체와 형식을 모방하여 '조독마 원정기'를 쓸까 고민했었다고 한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보자. 가령 이글루스 블로거 찬별은 "영어 교육 잡상"이라는 포스트에서 이오공감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그러나 이글루스의 반대의견의 상당수는, 같은 사람이 하나의 글 안에서
1) 영어 교육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했다가,
2) 영어 공교육의 필요성은 있지만 방법이 틀렸다고 헀다가,
3) 박명이와 인수위는 애초부터 하나같이 ㅄ들이라고 했다가,
기타 등등 상호 모순적 주장을 이것저것 말하는데,
그런 글에 찬성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뿐이다. 모두들 행간만 읽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글 내용이 아닌 <이미지> 만을 읽기 때문이다. -_-
찬별, "영어 교육 잡상", 찬별은 초식동물, http://coldstar.egloos.com/3598330, 2008년 1월 30일
글의 내용이 아닌 이미지만을 읽는다는 말은, 진중권이 인터넷 토론을 '목소리 큰 놈이 이기고, 내 편 많은 놈이 이기는 싸움'이라고 평가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성립할 수 있는 관찰이다. 찬별의 관찰과 진중권의 관찰이 지니는 공통점을 이론적인 차원에서 포괄하고 한국 사회가 나아가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둔다면, 인터넷을 포함한 한국의 문화를 '구술문화'로 보는 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는 의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진중권의 구술문화 논의에는 큰 약점이 존재한다. 개항 이후 100년이 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시대의 문자 문화가 한국에 계승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지금 이 시점의 대한민국에 왜 문자문화가 이리도 희박한지, 혹은 왜 아직까지도 구술문화가 판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진중권이 내놓는 대답은 '이게 다 박정희 때문이다'로 요약될 수 있으며 그것은 그 논의에 대한 실망감만을 야기시킬 뿐이다. 설령 그것이 답이라고 해도, 그 책에서 제시된 논증 과정은 너무도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중권이 쏟아내는 칼럼에서 얼마나 이명박을 '시원하게' 까느냐에만 관심이 있지, 그가 어떤 이론적 바탕 하에서 이명박을 비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명박을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한국이 구술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인 사회라는 문제의식에는 비판의 칼날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들, 혹은 텍스트를 소비하는 대중들은 진중권을 그저 '극우파 잡는 광대'로만 치부할 뿐이다. 어쩌면 그 광대야말로 진실을 바라보고 있는 유일한 증인일지도 모르는데.
3.
진중권이 지닌, 비평가로서의 성실한 자세는 대중이 아닌 날로 먹는 '칼럼니스트'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디 워'에 대한 값싼 감상을 그대로 내놓기가 면구스러웠던지 자기 자식들을 방패막이 삼고 덤벼들었던 김규항이 그렇고, 분명 본인은 '선빵'을 맞았는데도 자기 대신 대중들과 싸워주는 진중권에게 투덜거리는 허지웅이 그렇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중들은 평론가의 의견과 함께 제시되는 전문적인 지식을 결코 혐오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평론혐오시대"가 도래한 것은 대중들이 어쩌고 저쩌고 해서가 아니라, 평론가들이 대중들이 납득할만한 지적인 권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영화평론들을 보면 하나같이, 영화 그 자체에 대한 평론가의 지식과 식견은 온데간데없고, 네티즌들이 리플로 찍 하고 달아놓으면 그만일법한 감상을 거창한 수사로 처발라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용도로 지젝이니 라캉이니 주디스 버틀러니 등등이 남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인문학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진중권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보라. 그는 '디 워'를 두 눈으로 똑똑히 (두 번이나) 보았고, 그 속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초보적인 미학 이론의 결여를 발견해내어, 그것을 대중에게 가르쳤다. 진중권이 오직 비난만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소녀시대는 벤야민이 말한 대량복제의 산물이고, 반면 원더걸스는 좀 더 전통적인 아이돌에 가깝기 때문에, 나는 그래도 소녀시대가 좀 더 좋다고 적혀있던 '위(僞) 진중권'의 인터뷰를 떠올려보자. 그러한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은, 진중권이 가진 비평가로서의 권위를 대중들이 시인하고 있음을 방증한다(반면 허지웅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원더걸스에 대한 애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원더걸스 팬들은 '허지웅도 좋아하는 원더걸스'라는 식으로 소녀시대 팬들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또한 그는 자신이 겪어낸 인터넷과, 그것을 포괄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맥락을 이론적으로 종합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대한 그의 논의를 곱씹으며, 나는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하였고 그것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대한민국에 극히 드물게 존재하는 '진짜 비평가' 진중권의 텍스트를 곰곰히 되짚어보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지식인들을 그저 소비만 해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 시점이다.
일전에 만난 KBS의 안주식 PD는, 향후 5년간 진중권이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우리 사회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진중권이 이명박 정권의 안기부에 끌려가 주리를 틀리고 고문을 당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프레시안에 올라오는 칼럼들이 보여주는 거친 호흡과 완성되지 못하는 문장 등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이 앞선다. 자신이 글을 생산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지만 그저 약간의 대중을 몰고 다니는 것으로 밥벌이하고 사는 청맹과니들, 그리고 그들에게 호응하면서 그저 글의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대중들이 결합하여, 진중권과 같은 진정한 비평가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열린우리당, 아니 통합민주당은 총선을 의식한 나머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항쟁의 뜻을 일찌감치 접어버렸다. 결국 한반도 대운하는, 완성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착공은 될 것이고, 남한강과 낙동강의 상류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배를 까뒤집은 채 죽어나갈 것이다. 혀뿌리를 자른 채 콩글리쉬를 더듬거리는 지진아들이 인터넷에서 저글링처럼 뛰어다닐 때, 대상을 비평하는 대신 그저 "현상 차원"에서 논의하는 '글쟁이'들은 서로 못난 글에 추천의 리플을 달고 있을 터이다. 세상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진중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그 괴이함에 어쩌면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시대는 더욱 우울하게 흘러갈 것이다. 그래도 꼭지는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