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30

공익 추구와 사실 보도

- 정의와 국익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신문을 만드는 데 있어 항상 갈등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국익이 있고, 야당이 생각하는 국익이 있고, 신문도 저마다 다르게 국익을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문은 국익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고 보십니까.

“공익이나 국익, 정의가 중요한 가치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비판적 입장은 늘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정치적인 행동도 국익이나 정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은 없어요. 그것이 참으로 정의, 국익이 되려면 실현하는 수단은 정의로운지 봐야 합니다. 정의나 국익이란 것이 책임을 기피하는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에요.

구체적인 예를 말씀 드리자면, 며칠 전 여러 신문에서 대학 강사가 미국 오스틴에서 자살한 사건을 다뤘어요. 비정규직 강사들의 부당한 대접에 공감하기 때문에 유심히 기사를 봤어요. 전적으로 강사들의 처우가 부당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이 16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가서 호텔에서 자살한 것을 보면 책임 있는 어머니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볼 때 사회정의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볼 수 있어요. 한국이 아닌, 미국까지 가서 자살했으면, 다른 이유도 있을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자살하지 않으면 안될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보도해야 해요. 사회정의의 관점에서만 처리하지 말고 좀더 사실적인 보도를 했으면 합니다. 너무 쉽게 강사 처우 문제로 가버려 충분히 해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사회정의 국익, 이런 것이 우리의 사고를 단축하는 역할을 하면 안됩니다. 사실을 먼저 탐색하고,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해요.”(김우창, 대담 이대근, ""위기의 한국 언론, 가장 필요한 것은 객관성"", 《경향신문》, 2008년 3월 29일 8-9면)

물론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미약한 '팩트'에 기반하여 의견을 내놓았다가 틀리는 모습을 못 본 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전반적으로 부족한 '사실'에 대한 지적이라는 점에서 짚어둘 가치가 있다.

이론가의 위의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라캉은 임상의고 지젝은 문화비평가야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임상에 쓰이는 정신분석의 기법이 문화비평에 쓰일 수 있는 연결고리를 제시하지 않는 한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지젝의 문화비평은 유추에서 출발한 곡예일 수밖에 없지 (노정태, "라캉 논쟁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노정태의 블로그, 2008년 3월 12일))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인식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라캉을 문화분석에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을 “문화”라는 사회적 대상으로 옮겨왔을 때 과연 그 이론의 인식론적 토대는 절대적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다. 오히려 제임슨이 시인하듯이, 라캉을 “알레고리적”으로 활용하는 것만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알튀세르, 제임슨, 지젝, 바디우처럼 라캉을 사용하는 이론가들은 “철학적 차원”에서 라캉을 재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이론에서 항상 라캉은 철학자의 얼굴을 하고 출몰한다. 바로 이런 사실에서 문화분석에서 라캉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택광, "라캉, 수용의 문제: 문화분석에서 라캉 사용하기"(WALLFLOWER, 2004년 12월 17일))


'라캉 논쟁'을 통해 (적어도 '철학과'에 속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잠정적으로 합의된 바와 같이, 정신분석을 과학이 아닌 그 무언가로 규정함으로써 라캉을 '사이비'의 덫으로부터 구원해낸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다른 철학자들에게 "알레고리적"으로 활용되기만 하는 이론가의 위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가령 《사도 바울》에 등장하는 바디우의 보편성 논의에 라캉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가? 그것은 프랑스의 라캉주의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일종의 통행세 같은 것 정도가 아닐까? 막 《사도 바울》을 읽은 후 '바디우'라는 키워드로 이택광 선배의 블로그를 검색하다가 예전에는 눈여겨 읽지 않았던 글을 발견하였다. 거기서 최근 논의되었던 부분에 대한 언급을 따서, 일단 기록을 위해 붙여놓는다.

진보신당 TV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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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8

'영구분단론'은 답이 아니다

내가 아는 '진보진영'의 인사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지만원의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론(이하 '영구분단론')의 지지자라는 것은 사실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자신들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받는다는 것을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 자들이 민주노동당을 점거해버린 상황이다. 게다가 진보진영의 특성상 북한을 떠안겠다는 발언과 내치겠다는 발언은 모두 만만치 않은 부담감을 안겨준다. 등장한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구분단론'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아, 몰라 씨바, 그냥 지들끼리 알아서 하게 냅둬!'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적인 변화가 이른바 'NL'진영에게 반드시 타격으로 돌아가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만약 지금 당장 영구 분단 체제가 정착된 후, 2년 후 북한의 통치 체계가 무너졌다고 가정해보자. 가까운 시일 내에 남한이 북한에 중국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북한이 망하면 그 영토와 인구의 거의 대부분은 중국에 편입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데 우리가 베이징 올림픽의 전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티벳의 항쟁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배는 그리 인도적이지 않다.

물론 흔히 말하는 '주사파'의 궁극적인 존립 근거는 북한에 자신들을 받아줄 정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것만이 '민족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김정일 정권이 몰락함으로써 주사파의 존재 근거가 희박해진다고 해도 민족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국경 너머에서 고통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고려해야 한다는 요청이, 극우파와 '민족주의자'들에게서 공히 울려퍼지는 상황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가정해볼 수 있다. 혹은 그 반대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이들이 북한에서 발생하는 현실을 외면하려 들고, 그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는 경우도 상상해볼 수 있다. 탈북자들을 일차적으로 받아주는 완충제 역할을 현재는 중국이 하고 있었으나, 중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북한에서 탈출하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 외에도 가능한 문제의 조합은 끝이 없다.

'영구분단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일종의 이론적 도피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그가 한반도의 이남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하필이면 좌파 정당의 지지자일 경우, 자신들이 진보적이라고 착각하는 모종의 종교 집단의 구성원과 맞닥뜨리거나, 그들이 벌이는 해악을 목도하거나, 그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데, 물론 넌더리가 난다. 하지만 남북문제는 오직 남한과 북한과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 자체가 한국이 처해있는 국제 정세 중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구분단론' 처럼 대책 없는 대외정책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나는 지금 당장 중국이 북한을 넘어 남한까지 통합하려 들 것이라거나, 그럴 수 있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북한이 망하면서 중국에 편입된다면 지금처럼 속 편하게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던 시점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이 선거를 앞두고 무력시위를 펼친 지금, 진보신당의 논평이 어떻게 나올지 나름대로 귀추가 주목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진보진영에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이러한 사태에 대처할 수 있을만한 이론적인 기반이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다. 북한의 무력 시위는 한반도 평화에 위협이 된다. 그것은 정권을 유지하고픈 북한의 통치자들과 한국의 극우파 등에게만 이득이 되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나열하고 원론적인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 이상의 정당 논평은 사실상 무의미하고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러한 논평의 이론적 근거가 '영구분단론'이어서는 곤란하다. 지금은 90년대가 아니다. 2008년에도 '영구분단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은, 지적인 나태와 정서적인 미성숙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2008-03-27

대륙철학의 존재 근거와 '라캉 논쟁'의 후반전

이 논쟁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라캉의 정신분석을 현재 통용되는 과학이라 보기 어렵다'라는 결론에 참여자들 전원이 동의한 전반부, 그리고 '심리학은...' 으로 시작하여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논쟁이 되어버린 후반부. 전반부에 대해서는 논쟁 참여자인 한윤형의 승복이 있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고, 이제 우리는 후반부에 대해서만 결론을 내리면 될 것이다.

"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17일)를 다시 펼쳐보자. 앞서 내가 인용했던 바와 같이 한윤형은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에 있어서 두 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a) 분과학문인 심리학의 메타화로 나오지 않는 철학 이론들, 특히 인간의 의식이나 심리에 대한 철학 이론들은 모두 말이 안 된다. 특히 주체 철학 혹은 의식 철학이라 부르는 분류에 들어가는 학자들, 데카르트, 칸트, 독일 관념론, 헤겔, 훗설은 철학이라 볼 수 없다.

b) 우리는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여기서 그 누구도 a)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이나 심리에 대한 철학 이론들"을 "모두 말이 안 된다"고 몰아붙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철학과에 드디어 다니고 있으니 논외로 치고, 그 외의 '과학주의자'들은 '그래도 철학에는 나름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 주장 또한 상식적이다. 대륙철학자들이라고 해서 심리학의 발전을 모르는 바가 아닐테니, 그들 또한 나름의 대비책을 세워서 철학의 입지를 지키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과학주의자'들이 왈가왈부할 수 없으므로, 그냥 '아, 그렇군'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윤형은 다음 문단부터 허수아비 논증을 시작한다.

"a)의 결론은 논리필연적이다. 다음과 같은 예상반론이 가능하다. “데카르트나 훗설의 시대엔 심리학이 지금과 같은 데이터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이론은 성립이 가능했다. 그러나 라캉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답변. “지금도 데카르트주의자가 있고 현상학자들이 있다. 당신들의 얘기가 일관성을 갖추려면 심리학의 발전이 데카르트에서 훗설까지의 철학자들의 논법을 격파했다고 주장해야 한다. 빙빙 돌리지 말고 어서 한번 그렇게 주장해 보시지.”"

이건 과학 논쟁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소양의 문제에 더 가깝다. 철학의 허벅지 칸트로 돌아가보자. 칸트는 신, 영혼, 자유의 개념은 경험세계의 논리를 통해 논박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존재증명 논쟁은 무의미하지만, 신의 존재는 우리의 윤리적 삶을 위해 요청된다는 것이 그의 논법이다. 나머지 두 가지도 그렇다. 여기서 문제는, 적어도 후설이 말하는 '심리학'은 데카르트적 자아, 즉 영혼에 대한 학문에 매우 가까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성찰해야 할 물음은 이제 다음과 같은 것으로 향한다. 즉 어떠한 그리고 어떻게 영혼들-특히 인간의 영혼들-이 세계 속에 즉 생활세계 속에 존재하는가, 따라서 어떻게 영혼들이 물리적 신체에 영혼을 불어넣는가, 어떻게 영혼들이 시간공간성 속에 자리잡게 되는가, 어떻게 각자가 그가 살고 있고 살고 있음을 의식하는 세계에 관한 의식을 가지면서 영혼적으로 살아가는가에 향한다. . .(생략). . .
영혼은 물론 세계 속에 존재한다."(346, 에드문트 후설, 이종훈 옮김,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7))


하지만 후설은 여기서 자신이 영혼을 연구하는 방식이 자연과학의 그것과 평행을 이루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수학적 자연과학과] 평행하는 학문이라는 과제에 의해, 그리고 심리학의 주제인 영혼이 자연과학의 주제인 물리적 자연과 동일한 의미의 실재적인 것이라는 파악에 의해 미리 멍에가 지어졌다. 여러 세기에 걸친 이러한 편견이 그 모순을 통해 밝혀지지 않는 한, 참으로 영혼에 관한 학문 즉 생활세계-모든 객관적 학문과 유사하게 심리학은 이 생활세계에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다-로부터 근원적 의미를 갖는 것에 관한 학문인 심리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347, 같은 책)


후설으로부터 시작한 현상학은 하이데거로 이어진다. 그런데 "요즘 회자되고 있는 해체주의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철학적 흐름도 그 뿌리를 하이데거의 이와같은 「현상학적 해체」에 두고 있다"(이기상, 옮긴이의 말,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서울: 문예출판사 1994))고 하니, 라캉주의를 제외한 현대 대륙철학의 상당수는 과학적인 검증의 대상이 아니거나 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물론 이것은 '관념론'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얘기가 일관성을 갖추려면 심리학의 발전이 데카르트에서 훗설까지의 철학자들의 논법을 격파했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화자가 대륙철학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나뉘어진다. 만약 한윤형이 대륙철학의 자기 방어 기제에 대해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런 소리를 했다면, 그는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놓고 그냥 선을 찍찍 그어버린 다음 '전선'을 확보하려고 든 것이다. 반대로 알면서도 저런 소리를 했다면, 그는 내가 지난번에 비판한 바와 같이 '논증이 아닌 자해공갈'을 하려 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논쟁 상대방을 '대륙철학의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는 과학도'로 몰아가고자 하는 정치적 기동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입장은 모두 옳지 않다.

하지만 한윤형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b) 우리는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 후,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지는 않고, 도리어 심리학이 과학인지 덜 과학인지 더 과학인지 등과 같은, 자신이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대해 김재권, 콰인, 쿤 등의 역시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철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썰'을 풀기 시작한다. 나머지는 우리가 이미 보고 겪어서 알고 있는 진흙탕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논지'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 논지의 전제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라캉 논쟁'의 후반전은 사실상 벌어질 필요가 없었다. 혹은, 이상한 모자가 내 글 "완전한 몰이해"에서 리플을 통해 말한 바와 같이, 라캉의 이론에 대해 라캉 자신의 텍스트를 통해 공부한 누군가가 그를 방어하면서 촉발되었어야 겨우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어이 논쟁에서 이겨보겠다는 심사의 발로로 인하여 그다지 의미 없는 논쟁은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 후설과 칸트와 하이데거를 다시 들춰보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소득이 없다고 말할 것까진 없을 것 같다. 아이추판다님이 올리겠다고 약속한 새로운 글을 기다리며, '라캉 논쟁'의 후반부를 나는 여기서 마무리짓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