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5

"저의 모든 경향은,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저에 반대하여 강력히 제기될 때, 저는 마치 전광석화처럼 즉시 명료하게 봅니다 -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기술도 제가 절대적 가치로 의미하는 것을 기술하기에 좋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혹시 제안할 수 있을지 모르는 모든 유의미한 기술을 그것의 유의미성을 이유로 처음부터 제가 물리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즉, 저는 이제 이 무의미한 표현들은 제가 아직 올바른 표현들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의미성이 바로 그것들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했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들을 가지고 하기를 원한 것은 그저 세계를 넘어서는 것, 즉 유의미한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든 경향은,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새장 벽에로 이렇게 달려가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입니다. 윤리학이 삶의 궁극적 의미, 절대적 선, 절대적 가치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한, 윤리학은 과학일 수 없습니다. 윤리학이 말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도 우리의 지식을 늘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정신 속의 한 경향에 대한 기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정신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어도 그것을 비웃지 않을 것입니다. (36쪽)

비트겐슈타인, “윤리학에 대한 강의”, 소품집

2012-10-24

[2030콘서트] 내곡동 특검은 경제민주화 시험대

‘경제민주화’란 대체 무엇인가? 모든 대선 후보가 앞다투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보니 사회적으로도 ‘프랜차이즈 빵집도 동네 빵집이다’라는 식의 공허한 말장난이나 오가고 있을 뿐, 내실 있는 토론을 찾아볼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시장경제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회의 이견들을 수렴, 조절, 집행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가 의미 있는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확고한 의지와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후 거주할 사저 부지 구입을 둘러싸고, 이광범 특별검사가 지휘하는 특검팀이 한창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5일에는 대통령의 아들인 시형씨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을 예정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이 사저 부지 구입건은 대통령의 친·인척이 깊숙이 연루되어 있는 개발 비리 사건이다. 대통령 사저가 건설되면 당연히 그 일대 토지와 건물의 가격이 동반 상승한다. 문제는 그러한 ‘개발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주체, 즉 대통령 혹은 청와대 비서실 등이, 대통령의 친·인척 혹은 본인이 그 이익을 집어삼킬 수 있도록 모종의 ‘배려’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형 개발 비리’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경제민주화를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일요일에 대형마트가 장사를 하냐 안 하냐, 프랜차이즈 빵집이 가맹점에 뜯어내는 돈이 얼마냐 등도 중요하지만, 부동산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세습하는 이 과정이야말로 대한민국을 급격하게 신분제 사회로 되돌려놓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2005년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토지 자산 지니계수는 0.689로 나온다. 지니계수가 0에 가까우면 평등한 것이고, 1에 가까우면 불평등한 것인 만큼, 한국에서의 토지 분배는 대단히 불평등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상위 1%가 땅값 기준으로 45.3%를 소유하고 있으니만큼 저 수치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땅 위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동네 빵집을 하건 과일장사를 하건 농사를 짓건, 나름의 방식으로 땀흘려 일하고 돈을 번다. 그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젊은 남성들은 군대에 가고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들의 청춘을 바친다. 군대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유지되고, 징병제를 유지하는 사회적 비용 또한 결국은 평범한 사람들이 부담하고 있다. 상위 1%가 절반 가까이, 혹은 절반이 넘도록 소유하고 있는 ‘그들만의 땅’에서, 우리는 일하고 그들에게 임차료를 바치고 심지어 그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은 자신의 아들을 조금 더 부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국고를 유용해 땅장사를 시도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입장이다. 하지만 그는 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특검의 직접적 수사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경제민주화를 운운하는 것은 질 낮은 농담처럼 보인다. 권력을 이용해 부당하게 축재하는 행위를 처벌하지도 않으면서 재벌 개혁은 또 무슨 헛소리인가.

지금은 대선 정국이다.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할 사람을 선출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그만큼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을 형성해내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는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이라고. 하지만 지식인들의 담론은 ‘재벌 빵집 대 동네 빵집’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그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누군가는 친·인척을 동원한 땅투기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특검의 수사 대상에까지 오르내린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 의혹 사건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경제민주화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또 실천하려 하는지, 그 인식 수준과 집행 의지가 총체적으로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범죄 사실이 확인되면 대통령을 탄핵할 수도 있다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민주화는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입력 : 2012.10.24 21:28:3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0242128385&code=990100&s_code=ao051#csidxa0dfb0dbe5c609bb447d348b9d922fe

2012-10-16

인용: '유학'의 의미

‘유학’이란 말엔, “구미의 유명 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유명 건축가 아래서 잠시 도제로 일하며 선진 방법론을 체득한 뒤, 한국에 돌아와서 스승과 비슷한 건물 좀 짓고, 교수되고, 제자 키우고, 더 큰 건물 짓고, 나중에 노년기에 접어들면 자신이 키운 파벌을 기반으로 조선 시대의 낙향 선비처럼 정치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뜻이 숨어있다. - 임근준(aka 이정우)

2012-10-11

실수, 기록, 실험실

이처럼 실수의 수를 늘림으로써 힘을 얻는 기술적 장치로 실험실을 바라보는 것은 정치인과 과학자의 차이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들간의 차이는 인식적 기반이나 사회적 기반에서 설명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치인은 탐욕스럽고, 자기 이해관계로 가득차 있으며, 근시안적이고, 혼란에 빠져 있으며, 항상 협상할 태세가 되어 있고,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라고들 하는 반면, 과학자는 사욕이 없고, 멀리 내다보며, 정직 내지는 최소한 엄격하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며, 확실성을 추구한다고들 한다. 이러한 많은 차이들은 모두 하나의 간단한 물질적 차이를 인위적으로 투사한 것일 뿐이다. 그것인즉, 정치인은 실험실을 갖고 있지 않고 과학자는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실물 규모에서 한 번에 한 건씩 작업하며, 지속적으로 세상의 이목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이런 일들을 그럭저럭 해내며 “저 바깥에서” 성공을 거둘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반면 과학자는 축소 모형을 가지고 작업하며, 자신의 실험실 내에서 실수의 수를 늘리면서도 대중의 눈으로부터는 감추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많은 시도를 해볼 수 있고, 모든 실수를 해봄으로써 “확실성”을 얻기 전까지는 실험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중 한쪽은 잘 “모르는” 반면, 다른 한쪽은 잘 “안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차이는 “지식”에 있지 않다. 만약 우연히 이들의 위치를 역전시킬 수 있다면, 이제 실험실에 있게 된 바로 그 탐욕스럽고 근시안적이던 정치인은 정확한 과학적 사실들을 뽑아낼 것이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실물 규모의 정치구조의 키를 잡게 된 정직하고 사욕이 없으며 엄격하던 과학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지고 불확실하며 약한 존재가 될 것이다. 과학의 특수성은 인식적, 사회적, 혹은 심리적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규모를 역전시켜 대상을 읽을 수 있게 만들고 시험을 더 자주 해볼 수 있게 함으로써 많은 실수를 하고 이를 기록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실험실의 특수한 구성에 있다.

나에게 실험실을 달라, 그러면 내가 세상을 들어올리리라(브루노 라튀르)

2012-10-10

'한글과 한국어는 다르다고요'에 대하여

한글날도 지난 마당에 굳이 한마디 덧붙여본다. 꼭 한글날이 되면 ‘한글과 한국어는 다른데, 이런 날만 되면 방송에서 ‘한글 파괴’라고 떠들어댄다’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직 그 표현만을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하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차피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다. 그리고 찌아찌아족인지 뭔지 하는, 이제 정신 차리고 한글을 버린 어딘가의 소수민족을 빼고 나면, 한글을 자국어의 표기 체계로 쓰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사적인 맥락을 제거하고 보더라도, 한국어 외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것은 그리 효율적인 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글과 한국어는 1:1 대응 관계를 이룬다. 세종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혹은 한자를 한국인들이 정확하게 발성하게 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당연히 한글로 창작된 문헌이 없었으므로, 한자 발음 표기를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한들 어쨌건 그것은 ‘한국어 전용 문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글과 한국어는 별개의 객체지만, 한국어가 없는 한글은 우리가 아는 ‘한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글이 없는 한국어는 어떨까? 한글은 직접적으로 한국어의 형성에 영향을 미쳐온, 사실상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다. 한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현대 한국어가 발전했다면, 그것 역시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바로 이 언어일 수는 없다. 한글과 한국어를 떼어서 생각하는 것은, 한글날을 전후로 많은 이들이 목놓아 외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글과 한국어를 억지로 분리시켜서 사고하고, 그 이면에 제국주의적 욕망을 깔면, 오히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앞서 말한 찌아찌아족에 대한 ‘한글 전파’라던가, 한국에서 주최하고 한국인이 심사하는 ‘세계 문자 올림픽’인지 뭔지 하는 병신같은 이벤트 따위가 다 그렇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 사용자에게도 한글이 ‘과학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한글이 한국어를, 한국어만을 위한 문자 체계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발상이다.

물론 매체들이 ‘한글 파괴’라고 거들먹거리는 현상 중 대부분은 ‘한국어의 비관습적 사용 양태’이며, 그런 호들갑에는 좋게 이해해줄 구석이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대 논리가 ‘한글과 한국어는 다르다고요’에서 하염없이 맴돌 뿐이라면,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담론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불공평한 일이지만, 이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더 깨어있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 노력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