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22

『마르부르크 강령』에 대해 몇 가지





이와 같이 트위터에 쓰자, 다음 답변이 돌아왔다.


뭔가 취지가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서 첨언을 한다. 내 논점은 다음과 같다.

  1. 리스트의 목적사상이 형법과 법철학에 대단히 큰 자취를 남긴 업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차병직이 해제에 쓴대로 그것은 오늘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그러나 국내에서는 목적론적 입법론에 기반하여 사회보호법과 보호감호를 시행하게 되었고, 그것은 한국 법의 역사상 큰 치욕 중 하나로 기억된다.
  3. 2의 맥락을 소개하지 않고 오직 1에만 치중하는 차병직의 해제는 (고종석 등 일부의 찬사와 달리) 비판적으로 독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형법이 특정한 법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하며, 법익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가령 동성애에 대한 차별법 등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논리 전개가 리스트의 법철학에서 도출된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가 법익을 침해할 경우, 그것도 '상습적'으로 침해할 경우, 리스트의 법철학이 지니는 '인간적' 풍모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리스트는 범죄자를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눈다.

1) 개선이 가능하고 개선을 필요로 하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개선.
2) 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위하.
3) 개선이 불가능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무해화. (98쪽)

그렇다면 '개선 불가능한 범죄자'는 어떻게 정의되고 또 어떤 대우를 받는가? 리스트는 요즘 유행하는 '사이코패스' 따위가 아니라, "걸인, 부랑자, 매춘부, 알코올중독자, 사기꾼, 뚜쟁이, 정신이나 육체가 퇴폐한 자" 등을 "모두 사회질서에 철저히 반하는 무리들이고, 그들 가운데 우두머리 집단이 바로 상습범들"(100쪽)로 바라본다. 그런데 범죄통계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누범자가 범죄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또 개선 불가능한 자가 누범자의 다수를 차지"(101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상습범에 대한 리스트의 궁극적 해법은 다음과 같다.

개선 불가능한 자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사형을 원하지 않고, 범죄자를 귀양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평생 동안(또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감금하는 것뿐이다. (104쪽. 굵은 글씨는 원문, 밑줄은 인용자)

우리는 사형을 '원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형제가 언젠가는 폐지될 수 있겠지만, 리스트가 '개선이 불가능한 상습범'으로 몰아붙이던 이들의 자리에 '인간이 아닌 사이코패스'가 자리잡음으로써, 그들을 죽여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더 힘을 받고 있는 것이다. 범죄자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발상은, 물론 그 말을 하는 사람이나 그 주장을 이어받는 이들의 개별적인 도덕성으로 인해 중화될 수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보호감호 사례를 하나만 들어보자. 절도 혐의로 구속된 지강현은 징역 10년에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았다. 당시의 사법기관들은 그를 "개선 불가능한 자들"의 일부로 보았고, 그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강현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그는 외쳤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한국 사회에 목적론적 법철학이 소개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것이 없거나 부족해서 문제가 생겼던 것도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도 좋고 훌륭한 (법)철학들이 한꺼번에, 그 논쟁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일종의 우상(idol)으로 수입되는 것이 문제이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우상을 숭배하는 사제들이, 정작 '원문'을 번역해서 제공하지는 않고, 자신들이 유학 시절 떼어온 책을 찔끔찔끔 찢어서 논문만 쓰는 식으로 전반적인 지성계를 소외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논의는 더욱 추잡해진다.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칸트, 들뢰즈, 헤겔, 스피노자가 무엇인지 '보여주지'는 않고, 대신 '가르치려'고만 드는 것이다.

『마르부르크 강령』의 재출간은 바로 그 구태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사건이다. 목적론적 법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번역해 출간함으로써, 법학을 배우거나 법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도 이제는 그 실체를 어느 정도는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만족해도 되는 것일까? 차병직의 해제를 읽으며 새삼스러운 실망감을 느낀 것은,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지적한 거의 모든 논의를 그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맥락에서 목적사상이 어떤 식으로 오용되어왔는지, 그에 대한 한국과 독일 및 기타 대륙법계 국가에서의 지적 반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82년의 리스트가 한국어로 출현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1882년의 리스트가 1988년의 지강현에게 도합 17년의 수감생활을 선고하게 된 그 맥락을 설명하고, 바로 그런 문제로 인해 리스트의 법철학조차 '문명화'되는 과정을 또 거쳐야 했다는 것을 말했어야 한다. 그런 고민과 배려 없이 학생과 대중들에게 그저 '쉽고', '재미있게', '고전'을 소개하려고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적 태만의 증거일지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싶다.

프란츠 폰 리스트 지음, 차병직 옮김, 『마르부르크 강령』(서울: 강,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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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리스트의 법철학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한계를 해제에서 전적으로 지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리스트의 견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위험한 면도 포함되어 있다. 교화의 필요성에 따라 형벌이나 보안처분이 지나치게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무용한 인간은 사회에서 완전히 쫓아내야 한다는 단호한 생각도 그대로 수용하기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는 알게 모르게 나치 정권에 이용되기도 했다. (161쪽)
그러나 '단점'을 지적하는 것과, '역사적' 텍스트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오히려 전자의 활동을 통해, 특정 시대의 어떤 텍스트가 탈역사화되고, 우상이 되는 경우를 적어도 나는 너무도 많이 봐왔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이 글에서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이미 그러하다고 결정지어져 있는) '좋은' 글을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과연 얼마나 타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국 지성계의 오랜 관성이며, 그 관성에 거스르고자 하는 자는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당하고 매도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누군가 그것을 하지 않거나 못한다고 해서 '지적 태만'등의 용어를 쓰는 것은, 내 강퍅한 심성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

2012-10-25

"저의 모든 경향은,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저에 반대하여 강력히 제기될 때, 저는 마치 전광석화처럼 즉시 명료하게 봅니다 -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기술도 제가 절대적 가치로 의미하는 것을 기술하기에 좋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혹시 제안할 수 있을지 모르는 모든 유의미한 기술을 그것의 유의미성을 이유로 처음부터 제가 물리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즉, 저는 이제 이 무의미한 표현들은 제가 아직 올바른 표현들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의미성이 바로 그것들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했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들을 가지고 하기를 원한 것은 그저 세계를 넘어서는 것, 즉 유의미한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든 경향은,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새장 벽에로 이렇게 달려가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입니다. 윤리학이 삶의 궁극적 의미, 절대적 선, 절대적 가치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한, 윤리학은 과학일 수 없습니다. 윤리학이 말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도 우리의 지식을 늘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정신 속의 한 경향에 대한 기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정신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어도 그것을 비웃지 않을 것입니다. (36쪽)

비트겐슈타인, “윤리학에 대한 강의”, 소품집

2012-10-24

[2030콘서트] 내곡동 특검은 경제민주화 시험대

‘경제민주화’란 대체 무엇인가? 모든 대선 후보가 앞다투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보니 사회적으로도 ‘프랜차이즈 빵집도 동네 빵집이다’라는 식의 공허한 말장난이나 오가고 있을 뿐, 내실 있는 토론을 찾아볼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시장경제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회의 이견들을 수렴, 조절, 집행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가 의미 있는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확고한 의지와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후 거주할 사저 부지 구입을 둘러싸고, 이광범 특별검사가 지휘하는 특검팀이 한창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5일에는 대통령의 아들인 시형씨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을 예정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이 사저 부지 구입건은 대통령의 친·인척이 깊숙이 연루되어 있는 개발 비리 사건이다. 대통령 사저가 건설되면 당연히 그 일대 토지와 건물의 가격이 동반 상승한다. 문제는 그러한 ‘개발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주체, 즉 대통령 혹은 청와대 비서실 등이, 대통령의 친·인척 혹은 본인이 그 이익을 집어삼킬 수 있도록 모종의 ‘배려’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형 개발 비리’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경제민주화를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일요일에 대형마트가 장사를 하냐 안 하냐, 프랜차이즈 빵집이 가맹점에 뜯어내는 돈이 얼마냐 등도 중요하지만, 부동산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세습하는 이 과정이야말로 대한민국을 급격하게 신분제 사회로 되돌려놓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2005년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토지 자산 지니계수는 0.689로 나온다. 지니계수가 0에 가까우면 평등한 것이고, 1에 가까우면 불평등한 것인 만큼, 한국에서의 토지 분배는 대단히 불평등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상위 1%가 땅값 기준으로 45.3%를 소유하고 있으니만큼 저 수치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땅 위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동네 빵집을 하건 과일장사를 하건 농사를 짓건, 나름의 방식으로 땀흘려 일하고 돈을 번다. 그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젊은 남성들은 군대에 가고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들의 청춘을 바친다. 군대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유지되고, 징병제를 유지하는 사회적 비용 또한 결국은 평범한 사람들이 부담하고 있다. 상위 1%가 절반 가까이, 혹은 절반이 넘도록 소유하고 있는 ‘그들만의 땅’에서, 우리는 일하고 그들에게 임차료를 바치고 심지어 그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은 자신의 아들을 조금 더 부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국고를 유용해 땅장사를 시도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입장이다. 하지만 그는 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특검의 직접적 수사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경제민주화를 운운하는 것은 질 낮은 농담처럼 보인다. 권력을 이용해 부당하게 축재하는 행위를 처벌하지도 않으면서 재벌 개혁은 또 무슨 헛소리인가.

지금은 대선 정국이다.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할 사람을 선출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그만큼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을 형성해내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는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이라고. 하지만 지식인들의 담론은 ‘재벌 빵집 대 동네 빵집’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그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누군가는 친·인척을 동원한 땅투기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특검의 수사 대상에까지 오르내린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 의혹 사건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경제민주화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또 실천하려 하는지, 그 인식 수준과 집행 의지가 총체적으로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범죄 사실이 확인되면 대통령을 탄핵할 수도 있다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민주화는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입력 : 2012.10.24 21:28:3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0242128385&code=990100&s_code=ao051#csidxa0dfb0dbe5c609bb447d348b9d922fe

2012-10-16

인용: '유학'의 의미

‘유학’이란 말엔, “구미의 유명 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유명 건축가 아래서 잠시 도제로 일하며 선진 방법론을 체득한 뒤, 한국에 돌아와서 스승과 비슷한 건물 좀 짓고, 교수되고, 제자 키우고, 더 큰 건물 짓고, 나중에 노년기에 접어들면 자신이 키운 파벌을 기반으로 조선 시대의 낙향 선비처럼 정치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뜻이 숨어있다. - 임근준(aka 이정우)

2012-10-11

실수, 기록, 실험실

이처럼 실수의 수를 늘림으로써 힘을 얻는 기술적 장치로 실험실을 바라보는 것은 정치인과 과학자의 차이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들간의 차이는 인식적 기반이나 사회적 기반에서 설명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치인은 탐욕스럽고, 자기 이해관계로 가득차 있으며, 근시안적이고, 혼란에 빠져 있으며, 항상 협상할 태세가 되어 있고,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라고들 하는 반면, 과학자는 사욕이 없고, 멀리 내다보며, 정직 내지는 최소한 엄격하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며, 확실성을 추구한다고들 한다. 이러한 많은 차이들은 모두 하나의 간단한 물질적 차이를 인위적으로 투사한 것일 뿐이다. 그것인즉, 정치인은 실험실을 갖고 있지 않고 과학자는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실물 규모에서 한 번에 한 건씩 작업하며, 지속적으로 세상의 이목에 노출되어 있다. 그는 이런 일들을 그럭저럭 해내며 “저 바깥에서” 성공을 거둘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반면 과학자는 축소 모형을 가지고 작업하며, 자신의 실험실 내에서 실수의 수를 늘리면서도 대중의 눈으로부터는 감추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많은 시도를 해볼 수 있고, 모든 실수를 해봄으로써 “확실성”을 얻기 전까지는 실험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중 한쪽은 잘 “모르는” 반면, 다른 한쪽은 잘 “안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차이는 “지식”에 있지 않다. 만약 우연히 이들의 위치를 역전시킬 수 있다면, 이제 실험실에 있게 된 바로 그 탐욕스럽고 근시안적이던 정치인은 정확한 과학적 사실들을 뽑아낼 것이고,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실물 규모의 정치구조의 키를 잡게 된 정직하고 사욕이 없으며 엄격하던 과학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지고 불확실하며 약한 존재가 될 것이다. 과학의 특수성은 인식적, 사회적, 혹은 심리적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규모를 역전시켜 대상을 읽을 수 있게 만들고 시험을 더 자주 해볼 수 있게 함으로써 많은 실수를 하고 이를 기록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실험실의 특수한 구성에 있다.

나에게 실험실을 달라, 그러면 내가 세상을 들어올리리라(브루노 라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