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20대 담론’이 지난 몇 년간 유행했지만 수많은 논의들이 냉소와 한탄으로 끝난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세계 및 동아시아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급진적 무장투쟁을 통해 체제의 붕괴를 꾀하는 방법론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헌법 개정을 이루어내면서 이후 안정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꾸거나 적어도 유의미한 영향을 주려면 결국은 정치적으로 결집해야 한다.
군 입대 전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자유기고가 겸 번역가로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의해 지역가입자로 분류되어 있다. 혼자 살고 있으므로 부양가족은 없으며, 현재 월세로 살고 있는 집의 세대주이기도 하다. 물론 어찌어찌 생활은 하고 있으나,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바라본다면, 백수에 가까운 프리랜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유사 백수의 모습은, 이른바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않거나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부모와 떨어져 살며, 거주지에 제대로 주민등록을 해서 해당 지역의 투표권을 가진 젊은이의 한 표본이기도 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바로 나와 같은 이런 인원들을 지역가입자로 분류하는데, 그러면 통상적으로 같은 월수입을 얻는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건강보험료가 부과된다.
젊은이가 스스로 세대주가 되고 해당 지역의 투표권을 가지고 나면, 어깨 위에 얹히는 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방금 볼멘소리를 하긴 했지만 나는 그 책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편이다. 첫 주민세를 낼 때 매우 큰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자체 및 관공서에서 날아오는 몇 종의 고지서를 읽어보고 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1인 가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설계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가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지역가입자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검색 사이트에서 ‘대학가 원룸 시세’를 입력하면 대체로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이 표준가로 나온다. 건강보험공단의 보험료 산출 방식에 따르면, 가령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원룸에 사는 사람이나, 구하기도 힘든 3000만원짜리 전세에 사는 사람이나, 같은 금액의 임대차계약을 맺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해당 항목에서 동급 판정을 받는다.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은 젊은이의 입장에서 보지 않더라도, 전자와 후자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리고 필자처럼 미혼인 데다 아직 만 35세가 되지 않은 사람은 정부에서 보증하는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도 없다. ‘사람’이 아니라 ‘가구’가 표준 단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생활하는 지역의 유권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단지 소비자에 머물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이 바로 ‘부재자’, 즉 있지만 없는 자들이다.
서울, 그 중에서도 특정 지역은 젊은이들의 비율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다. 왜 그런 곳마저도 ‘88만원 세대’에서 말하는 ‘바리케이드’ 노릇을 하지 못할까. 그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앞서 나열한 것과 대동소이한 이유로 인해 자신의 실제 거주지 및 활동 반경이 아닌 어딘가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역에 기반한 젊은 세대의 정치가 스스로 싹틀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대학가에는 젊은 주민이 아니라 ‘부재자’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작은 단위의 지자체 선거는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 큰 선거에서는 그저 대의명분에 휘둘려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특정 지역을 자신의 표밭으로 삼아 가장 낮은 단위부터 한 단계씩 성장하는 정치인이 나올 수 있는 토양 자체가 ‘부재’하는 상황이다. 이 근본적이고도 제도적인 한계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의 정치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입력 : 2013.07.30 21:30:0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302130025&code=990100&s_code=ao051#csidx6e5435435c6fe39881b56d6cf1bd1c1
2013-07-30
2013-07-02
[2030콘서트] 노무현이 박근혜를 잡으려면
7월2일부터 45일에 걸쳐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가 시작됐다. 국정조사라는 하나의 무대를 만드는 것에는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 파동이 벌어지던 지난 몇 주를 돌이켜볼 때, 야권에서 제대로 된 ‘결정타’를 날리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여권과 국정원이 이른바 ‘NLL 포기 발언’을 폭로하면서 만들어낸 ‘안보 프레임’을 이겨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박근혜 대통령 역시 “우리의 NLL 북방한계선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로 지”킨 곳이라며 한마디 거들고 나섰지만, ‘그럼 우리나라를 지키지 말자는 거냐’는 비판 앞에서 야권은 할 말을 잃는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현 국면을 타개할 수 없다. 기껏 해봐야 ‘절차 대 안보’라는 가짜 논쟁에 휩싸여 휘청거리다, 점점 수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노무현 지지자들의 집단 분노 속에서 맴돌게 될 뿐이다. 문재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야권에 요구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대북송금특검에 대한 입장을 바꿔야 한다. 외교 문제, 그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북한 관련 사항의 뚜껑을 국내의 정치적 이유로 열어젖힌 사건이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국정원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가 먼저 열었다. 김정일을 향해 ‘외교적 수사법’을 펼치는 노무현을 옹호하면서, 김정일을 향해 ‘외교자금’을 보낸 김대중 정부를 수사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외교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외교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 기준선은 참여정부 이전에까지 적용돼야 한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갈라진 야권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일 또한 요원할 뿐이다.
둘째, 정상회담 회의록에 나온 내용 중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입장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가령 ‘평화의 공동수역’ 같은 것. 한국 해군이 NLL까지 전부 순찰을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어선 및 군함들이 경계를 넘어와 무력 충돌을 일으키곤 한다. 심지어 한국의 영토인 연평도에 북한은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정직하게 말해보자. 과연 우리가 북한과 중국을 그토록 논리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는 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긴 한가? 올해 들어 북한은 개성공단에서 벌어들이는 몇 푼의 달러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평화의 공동수역’이 소말리아 앞바다처럼 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러한 우려를 감출 수 없다. 참여정부 인사와 그 지지자들이 아닌 한, 그렇게까지 북한을 믿어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셋째, 북한에 대해 온정적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적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북 포용정책 이전에 북한이라는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해 국민들을 안심시키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연평도는 우리땅”이라고 만세라도 불러야 한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만약 일본이 독도에 포격을 했다면 지금 우리는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통일의 꽃’ 임수경을 보고 환호하던 일부 고학력 중년층이 아닌 다음에야, 특히 젊은이들에게, 북한은 그저 또 하나의 외국일 뿐이다. 한국인의 목숨보다 북한 정부와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뉘앙스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야권은 ‘안보’ 프레임에서 백전백패할 것이다.
결론을 내보자. 죽은 노무현은 살아있는 박근혜를 이길 수 있다. 노무현의 ‘유훈’을 곧이곧대로 지켜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면 가능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저들’의 비아냥을 이겨낼 수 있다. 후대의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만 한다. 북한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도 크게 달라졌고, 특히 핵실험까지 성공시킨 마당에, 이미 공개된 정상회담 회의록 속의 노무현을 지키는 것에 급급한다면, 야권에 미래는 없다.
입력 : 2013.07.02 21:27:3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022127355&code=990100&s_code=ao051#csidxf3e32beca00ad3498a755459d898f8d
이런 식으로는 결코 현 국면을 타개할 수 없다. 기껏 해봐야 ‘절차 대 안보’라는 가짜 논쟁에 휩싸여 휘청거리다, 점점 수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노무현 지지자들의 집단 분노 속에서 맴돌게 될 뿐이다. 문재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야권에 요구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대북송금특검에 대한 입장을 바꿔야 한다. 외교 문제, 그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북한 관련 사항의 뚜껑을 국내의 정치적 이유로 열어젖힌 사건이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국정원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가 먼저 열었다. 김정일을 향해 ‘외교적 수사법’을 펼치는 노무현을 옹호하면서, 김정일을 향해 ‘외교자금’을 보낸 김대중 정부를 수사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외교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외교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 기준선은 참여정부 이전에까지 적용돼야 한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갈라진 야권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일 또한 요원할 뿐이다.
둘째, 정상회담 회의록에 나온 내용 중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입장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가령 ‘평화의 공동수역’ 같은 것. 한국 해군이 NLL까지 전부 순찰을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어선 및 군함들이 경계를 넘어와 무력 충돌을 일으키곤 한다. 심지어 한국의 영토인 연평도에 북한은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정직하게 말해보자. 과연 우리가 북한과 중국을 그토록 논리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는 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긴 한가? 올해 들어 북한은 개성공단에서 벌어들이는 몇 푼의 달러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평화의 공동수역’이 소말리아 앞바다처럼 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러한 우려를 감출 수 없다. 참여정부 인사와 그 지지자들이 아닌 한, 그렇게까지 북한을 믿어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셋째, 북한에 대해 온정적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적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북 포용정책 이전에 북한이라는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해 국민들을 안심시키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연평도는 우리땅”이라고 만세라도 불러야 한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만약 일본이 독도에 포격을 했다면 지금 우리는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통일의 꽃’ 임수경을 보고 환호하던 일부 고학력 중년층이 아닌 다음에야, 특히 젊은이들에게, 북한은 그저 또 하나의 외국일 뿐이다. 한국인의 목숨보다 북한 정부와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뉘앙스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야권은 ‘안보’ 프레임에서 백전백패할 것이다.
결론을 내보자. 죽은 노무현은 살아있는 박근혜를 이길 수 있다. 노무현의 ‘유훈’을 곧이곧대로 지켜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면 가능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저들’의 비아냥을 이겨낼 수 있다. 후대의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만 한다. 북한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도 크게 달라졌고, 특히 핵실험까지 성공시킨 마당에, 이미 공개된 정상회담 회의록 속의 노무현을 지키는 것에 급급한다면, 야권에 미래는 없다.
입력 : 2013.07.02 21:27:3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022127355&code=990100&s_code=ao051#csidxf3e32beca00ad3498a755459d898f8d
2013-06-04
[2030콘서트] ‘일베충’ 대 ‘이회충’
필자는 어릴 때 불만이 많고 이것저것 따져 묻기를 좋아해, 대부분의 전래동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특히 황희 정승이 나오는 것들은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너도 옳다, 그래 너도 옳다, 아니 이런 네 말도 옳다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해줘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택해서야 쓰겠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억이 난다.
이 문제의식에는 지금껏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양비론과 양시론은 모두 제한적인 경우에만 옳다. 모든 발화 주체에게는 나름의 문제와 결격 사유가 있겠지만, 매 순간에는 주제라는 게 있는 법이고, 그것으로부터 일탈하기 위해 상대방의 자격 따위를 따져 묻기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간베스트’(일베)라 불리는 사이트에 대한 온갖 논의들을 보고 있자니, 양비론자로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꼭 해야 할 말이 생겼다.
일베 사용자들이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다른 성격을 지닌 웹사이트(‘오늘의 유머’ 등)에서 그들을 조롱할 때, ‘일베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경향신문을 포함한 몇몇 언론의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시피, 이 단어는 ‘일베’와 ‘벌레 충(蟲)’자를 합성한 것으로, 그 의미는 문자 그대로 ‘일베에 사는 벌레’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칼럼을 읽는 독자분은 혹시 ‘이회충’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최근까지 활발하게 사용되는 어휘는 아니고, 주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당시 여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을 지지하는 웹사이트에서 많이 쓰인 표현이다. 당시의 기억을 되짚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연상할 수 있다시피, 이것은 당시 노무현의 경쟁 상대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이름과, 대한민국이 못 살고 가난했던 시절 서민들을 괴롭혔던 기생충인 ‘회충’을 합성한 것이다. 그 의미는 따로 풀어서 설명하지 않기로 하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성적 지지자, 혹은 그렇게까지 뜨거운 지지자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칭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베에서 노무현을 ‘노구리’(노무현+개구리)나 ‘노운지’(노무현+운지·투신자살을 뜻하는 은어) 등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면 대단히 착잡한 기분을 느끼거나, 분노할 것이다. 나도 그런 언어 행태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양비론자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묻자. 그 ‘일베하는 애들’은 대체 그런 말버릇을 어디서 배웠을까?
적어도 필자가 이 글을 쓰는 6월4일 새벽까지는, ‘그들은 우리에게 정치의 언어를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을 단 한명도 찾지 못했다. 이회창을 ‘이회충’이라고 부르고, 이명박을 ‘쥐박이’라고 하던 그 얄팍한 ‘풍자’와 ‘해학’이 목적을 잃고 떠돌다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실망해버린 새로운 인터넷 사용자의 손에 넘어갔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정치를 분석하고 또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대신, ‘조중동’이나 ‘수꼴’ 같은 타자를 만들어서 몰아세움으로써 이쪽의 올바름을 증명하는 방식을, 왜 상대편이라고 쓰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저들이 휘두르는 칼과 망치는 우리의 것을 더욱 과격하게 만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후회하는 대신, 지금 신문 지면을 도배하는 것은 ‘대체 저들은 누구인가,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나’를 분석하는 사람들뿐이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는, 일본의 ‘일베’ 격인 재특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당신의 이웃들입니다”라는 대답을 돌려준다. ‘일베’를 분석하기에 바쁜 논객들과 언론을 바라보는 필자의 심정이 바로 그렇다. ‘일베의 정체가 뭐냐’는 질문을 들으면, “당신의 제자들입니다”라고 답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입력 : 2013.06.04 21:37: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042137165&code=990100&s_code=ao051#csidx0d0da945e93f97abb53ab2a5545bf99
이 문제의식에는 지금껏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양비론과 양시론은 모두 제한적인 경우에만 옳다. 모든 발화 주체에게는 나름의 문제와 결격 사유가 있겠지만, 매 순간에는 주제라는 게 있는 법이고, 그것으로부터 일탈하기 위해 상대방의 자격 따위를 따져 묻기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간베스트’(일베)라 불리는 사이트에 대한 온갖 논의들을 보고 있자니, 양비론자로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꼭 해야 할 말이 생겼다.
일베 사용자들이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다른 성격을 지닌 웹사이트(‘오늘의 유머’ 등)에서 그들을 조롱할 때, ‘일베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경향신문을 포함한 몇몇 언론의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시피, 이 단어는 ‘일베’와 ‘벌레 충(蟲)’자를 합성한 것으로, 그 의미는 문자 그대로 ‘일베에 사는 벌레’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칼럼을 읽는 독자분은 혹시 ‘이회충’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최근까지 활발하게 사용되는 어휘는 아니고, 주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당시 여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을 지지하는 웹사이트에서 많이 쓰인 표현이다. 당시의 기억을 되짚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연상할 수 있다시피, 이것은 당시 노무현의 경쟁 상대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이름과, 대한민국이 못 살고 가난했던 시절 서민들을 괴롭혔던 기생충인 ‘회충’을 합성한 것이다. 그 의미는 따로 풀어서 설명하지 않기로 하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성적 지지자, 혹은 그렇게까지 뜨거운 지지자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칭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베에서 노무현을 ‘노구리’(노무현+개구리)나 ‘노운지’(노무현+운지·투신자살을 뜻하는 은어) 등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면 대단히 착잡한 기분을 느끼거나, 분노할 것이다. 나도 그런 언어 행태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양비론자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묻자. 그 ‘일베하는 애들’은 대체 그런 말버릇을 어디서 배웠을까?
적어도 필자가 이 글을 쓰는 6월4일 새벽까지는, ‘그들은 우리에게 정치의 언어를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을 단 한명도 찾지 못했다. 이회창을 ‘이회충’이라고 부르고, 이명박을 ‘쥐박이’라고 하던 그 얄팍한 ‘풍자’와 ‘해학’이 목적을 잃고 떠돌다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실망해버린 새로운 인터넷 사용자의 손에 넘어갔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정치를 분석하고 또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대신, ‘조중동’이나 ‘수꼴’ 같은 타자를 만들어서 몰아세움으로써 이쪽의 올바름을 증명하는 방식을, 왜 상대편이라고 쓰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저들이 휘두르는 칼과 망치는 우리의 것을 더욱 과격하게 만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후회하는 대신, 지금 신문 지면을 도배하는 것은 ‘대체 저들은 누구인가,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나’를 분석하는 사람들뿐이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는, 일본의 ‘일베’ 격인 재특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당신의 이웃들입니다”라는 대답을 돌려준다. ‘일베’를 분석하기에 바쁜 논객들과 언론을 바라보는 필자의 심정이 바로 그렇다. ‘일베의 정체가 뭐냐’는 질문을 들으면, “당신의 제자들입니다”라고 답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입력 : 2013.06.04 21:37: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042137165&code=990100&s_code=ao051#csidx0d0da945e93f97abb53ab2a5545bf99
2013-05-15
어떤 분기점
나는 진중권이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부분적으론 아무래도 그가 인터넷 매체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진중권은 자신이 이용하는 매체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전술을 구사한다. 물론 이는 나를 포함하여 모든 글쟁이들이 써먹는 전술이다. 그런데 진중권의 경우엔 인터넷에서도 익명의 네티즌들과 멱살 잡고 싸우는 희귀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름깨나 있는 논객 가운데 그런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진중권이 유일하다. 나는 진중권의 그런 활동에 대해 찬탄을 표한 바 있다.
그런데 비극은 진중권이 자신의 그러한 희귀한 행태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중권의 독특한 텍스트주의는 상황에 둔감하다. 그는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 '썩어빠진 정치'라고 욕하는 것이나 정치인들의 면전에서 '썩어빠진 정치인'이라고 욕하는 것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강준만, 『인물과 사상』, 23권, (서울: 개마고원, 2002년 7월), 140쪽.
2013-05-12
단상
초자아를 극복하고 내놓은 결과물과, 초자아의 눈을 피해서 내놓은 결과물은, 같을 수가 없다. 전자의 창작자에 대해, 우리는 그에게 엄연히 초자아가 있으며, 그 초자아와의 관계를 주체적으로 재설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반면, 후자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단지 '남들 시선', '엄마가 볼까봐', '우리 아빠가 좀 엄하셔서'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뿐일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도피 과정, 스스로를 (말하자면) 하위 주체로 설정하는 과정에서 (2차) 창작의 동력을 얻는 경우라면 사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숨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대상이, 본래의 위엄 혹은 아우라를 유지한 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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