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23

안녕? 허 대짜 수짜님

8월 21일 목요일, 저녁에 있었던 약속이 끝난 후 한성대입구역에서 출발해 서울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내렸다. 금천03 마을버스를 타고 잠깐 달리니 충남슈퍼 정거장이 나왔다. 몇몇 젊은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서 내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기륭전자 가는 길이 그렇다.

기륭전자에 대해 한 마디 언급을 하고 싶을 때마다 꾹 참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직접 본 것, 직접 겪어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강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은 분명 월권이다. 나는 종종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곤 한다. 도착한 시각은 9시 30분 경이었고, 기륭전자 정문으로 향하는 골목에는 전경들과 교통경찰들이 두어 소대 정도 있었다.

뭔가 문화제 비슷한 걸 했는데 이미 끝난 것 같았다. 근처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입에 물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화 '안녕? 허 대짜 수짜님'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다들 철푸덕 앉아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길래, 나도 그냥 은박 돗자리 조각을 깔고 앉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영화 상영이 끝나면 행사가 마무리될 듯했다.

'안녕? 허 대짜 수짜님', 제목 참 길군, 아무튼 이 영화의 강점은 이른바 '대기업 노조' 사람들이 대체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대강이라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한 다리 건너면 다 친구고, 선배 후배고, 혈연과 친분으로 얽혀 있다. 허대수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조연은 허대수의 처남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것은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현대자동차 공장으로 먹고 사는 울산이라는 도시의 풍경마저도 다소 손에 잡힐 듯하다. 현대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고, 현대차에서 일하지 않거나 비정규직인 사람들은 시 외곽 허름한 주택가에 산다. 이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영화를 통해 충분히 감지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봐야 할 진정한 이유가 된다. 울산 노동자들이 만든 울산 영화라서 그런지,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울산이 보인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성취된 이러한 리얼리즘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작위적인 줄거리 전개로 인한 단점을 다 가려주지는 못한다. 아빠의 꾀병 -> 딸이 알아채고 분노 -> 아빠가 진짜 병으로 쓰러짐 -> 병원에서 비정규직 사윗감이 정규직 아빠에게 감명을 줌 -> 비정규직 해고자 20명을 위해 정규직이 으쌰으쌰 -> 투쟁! 승리! 로 이어지는 후반부의 스토리라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 네가 한 번 써보지 않겠느냐'라고 말한다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이것은 한국어권에서 개발된 서사 양식 자체가 지나치게 협소하기 때문에, 바꿔 말하자면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는 않은 채로, 하지만 뭔가 결말이 나는 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쉽사리 떠올릴 수가 없다(켄 로치의 '아름다운 세계'가 이런 종류에 속하지만, 켄 로치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니 더 서술하지는 않기로 하자). 따라서 한국의 수용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작위적이고 실은 아무 것도 해결된 바 없다고 할지라도(이 영화 속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는 전혀 해결된 게 아니니까), 일단 '좋은 결말'을 내야 하고 그것도 가급적이면 갓 태어난 아기의 입을 통해 읊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도리어 희망은 저 먼 곳으로 사라져만 간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간 후 사람들은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동안 진보신당 칼라TV가 와서 몇 명을 인터뷰했고, 촛불다방에서는 누룽지를 나눠줬고(먹다가 입 천장을 살짝 데였지만 맛있었다), 저 구석에 있는 컨테이너 안에서는 누군가 계속 굶고 있었을 것이다. 기륭전자에 정규직 노조가 있을까? 있다고 해도 과연 그들이 이 영화처럼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는 걸까?

'노동문제가 중요하다'라고 강조하던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대한국민 안중근' 같은 국가주의의 기표를 티셔츠로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기륭전자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말 한 마디에 목숨을 걸 것이고, 일본은 악이며 일제시대의 조선은 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견지하고 있을 터이지만, 정작 기륭의 옆에 서 있는 건 그런 사람들이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고, 집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나는 충남슈퍼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향했다. 공단 지역의 유흥을 책임지는 역전가의 불야성을 헤치고, 내가 탄 2호선 열차가 출발했다. 시위하러 갔다가 영화만 보고 돌아왔다. 해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더 많은 질문들과 함께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2008-08-18

떡볶이 민주주의

8월 15일 경찰은 역시나 무차별 연행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종로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던 사람도 잡아갔다는 기사가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다. 프레시안은 경찰이 촛불 연행자 여성에게 브레지어를 벗어서 내놓으라고 강요했다는 기사를 터뜨렸는데, 놀랍게도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도 않다. 다만 자살 방지를 위해 '본인에게 요구'했다는 변명을 내놓았다.

대체 왜 경찰은 무자비한 연행과 지독한 인권 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일까? '혁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경찰이 강경하게 나오면 강경하게 나올수록 이른바 '전민항쟁'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것과 정 반대이다. 현재 경찰이 펴고 있는 무차별 연행 전략은, 버마 군부가 8888 혁명 당시 자국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던 그것과 같은 행동 유형이다.

1988년 8월 8일 터졌던 버마의 인민 봉기, 즉 '8888'의 2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가 이코노미스트 온라인 에디션에 8월 12일 게재되었다. 이 기사에서 이코노미스트는 '인민의 힘'이 갖는 명백한 한계를 탐색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8888이 실패한 원인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부재도, 국제 사회의 지지 결여도, 일반적인 대중들의 지지 부족도,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핍도 아니었다. 아웅산 수지와 그의 정당은 80%에 가까운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문제는 군부가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죽이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당시 사망자 숫자는 공식적으로 3000여 명이지만 그것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중화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거리에 뛰쳐나온 시민들에게 닥치는대로 발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후, '전민항쟁'은 진압되었다. 아웅산 수지는 가택 연금되었고 버마는 아직까지도 군부 독재에 시달리고 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도 같은 경로로 실패한 민주화 투쟁이다. 탱크가 출동했고, 시위는 진압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놓을 의향 따위 전혀 없으며, 폭력적인 진압의 도구가 되는 관료 조직(즉 경찰 혹은 군대)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독재 권력 앞에서, 사실 '국민의 힘'이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인간에게는 생존을 향한 본능이 있기 때문에, 죽이겠다고, 잡아 가두겠다고 협박하며 그 의지를 매일같이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는 한, 겁을 먹고 움추려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청수의 목줄을 움켜쥔 채 숨을 식식거리며 광화문과 종로 일대를 헤매고 다니는 이명박의 '미친놈 되기 전략'은, 불행하게도 성공적이다.

버마의 민주화에 대한 가능성을 이코노미스트는 대단히 낮게 평가한다. 버마의 국민들이, 군부가 무슨 짓이건 하고야 말리라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는 한 군부 독재는 유지될 수밖에 없다. 뜨겁게 몰아치는 민중의 함성보다는, 군부 내에서 이탈 세력이 발생하는 쪽에 기대를 거는 것이 낫다는 것이 이코노미스트의 평가다. 이건 이 매체를 보는 사람들이 서구 사회의 정책 결정자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다소 섬뜩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현실 또한 객관적으로 되짚어볼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브레지어를 빼앗는 경찰에게 무차별 연행될 우려가 있다면, 촛불시위의 가장 큰 동력 중 하나였던 '일반 대중들의 참여'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권, 특히 한나라당 내에서 강력한 이탈 세력이 발생하고, 그들이 이명박의 독주를 견제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낼 수가 없다. 그 집단의 수장이 다름아닌 복당 박근혜 여사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어떤 해법을, 적어도 이 짧은 글에서 도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동성을 앞세운 촛불시위를 넘어선 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촛불을 계속 들되, 다음 아고라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다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 하지만 진보신당을 포함한 대안 정치세력들이 과연 현재의 움직임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면, 그 답 또한 불투명하다. 떡볶이 먹던 사람도 체포해가는, 그런 민주주의의 위기다. 하지만 그 절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도 없을 것이다.

2008-08-14

마감과 납기

《판타스틱》 9월호에 실릴 원고 두 편을 모두 털어냈다. 그 외에도 이번 달에는 흔히 말하는 '외고'를 많이 맡아서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떠오른 생각 하나를, 집에 가기 전에 후딱 적어놓는다.

사람들은 흔히 '마감'이라는 단어에 대해 모종의 환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마감이 존재하지 않는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혹은 아직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20대 초중반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간혹가다 정말 컨텐츠를 생산하면서도 '마감'이라는 단어를 말랑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목격할 수 있긴 한데, 그것도 결국 후자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이쯤에서 논의를 진전시켜 보도록 하자.

특히 만화가의 마감에 대해 여러 가지 판타지가 존재한다. 만화가가 마감을 맞추기 위해 며칠 밤을 새고, 편집자에게 오는 전화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교묘하게 회피하고, 그래도 결국에는 어찌 어찌 일자를 맞춰서 원고를 보낸 후 '하얗게 불타버리는' 그런 장면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젊은 세대들의 경우, 앞서 말한 것처럼 본격적인 사회 생활을 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마감'에 대한 판타지에 더 쉽게 휩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마감은 만화가들이 편집후기에 그려놓는 것처럼, 남에게 쉽사리 징징거리면서 자기 일을 한 없이 미루고, 창조적인 생각이 안 떠오른다는 핑계를 대며 술이나 퍼마시고, '빈 문서 1' 앞에서 한없이 한숨을 내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마감일은 그저 그때까지 원고가 넘어가야 다음 공정 진행에 차질이 없음을 나타내는 최후의 데드라인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 공정'이다. 글쓰는 이가, 혹은 만화를 그리는 이가 원고를 생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출판 산업의 큰 맥락에서 원 재료를 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원고 안에 세계를 벌벌 떨게 할 놀라운 무언가가 담겨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만들어지는 순간에 그것은 다른 수십억의 원고와 전혀 다를 바 없는 '1차 재료'일 뿐이다. 그것을 받아서 편집, 즉 가공하고, 디자인 과정을 거쳐 필름 출력, 인쇄하는 모든 공정을 거쳐야 비로소 책이 나온다.

자본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지 말고, 자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출판 산업의 차원에서 보면, 내가 쓰고 있는 글은 이 광대한 산업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당연히 재가공되고, 편집되며, 디자인 과정에서 눈 베리는 무언가로 전락할 수도 있고, 제책 과정의 실수로 앞뒤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 광부가 광산에서 캐낸 원광석이 장신구가 될 수도 있고 자동차가 될 수도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글은 인간 정신의 산물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되는 글은 모듬살이하는 인간들의 사회적 산물이다.

마감의 고통을 토로하는 천편일률적인 말은 이제 그만 나와야 한다. 글 쓰는 이는 그저 납기에 맞춰 1차 생산물을 뽑아내는 것일 뿐이다. 편집자가 바라는 대로 투덕투덕 아무렇게나 써서 줘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글에 담기는 극도로 내면적이고 사밀한 그 무언가를 구태여 '마감의 고통'으로 치환시키지 말자는 뜻이다. 글은 정신의 산물이지만 원고는 산업의 일부분이다. '마감'이라는 닳고 닳은 단어 대신 '납기'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그 차이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대 문제에 대해 사고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나'를 한가운데 놓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어떤 산업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짚어보는 그런 종류의 객관화가 필요하다. 보름 넘게 품고 있던 원고를 털어낸 후 잠시 든 생각이다.

성조기와 태극기

이명박의 태극기 사건 이후, 조지 부시도 성조기를 거꾸로 들었다며 '유유상종' 같은 말이 나돌았다. 이명박이나 부시나 똑같은 놈들이다, 이런 식의 비아냥이 인터넷 공간을 잠시 휩쓸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진을 놓고 보면 그 둘의 '실수'는 전혀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다. 순수한 의미에서 '멍청함'은 오직 부시만의 것이고, 이명박의 실수는 멍청해서가 아니라 무관심해서 벌어진 것이다.



사진=한겨레


두 사람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확인해보자. 부시는 성조기의 좌우를 혼동해서 들고 있다가, 딸이 지적하자 얼른 바꿨다. 그것은 그가 카메라에 찍힐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올바른 방향으로 성조기를 들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건 똘똘하지 못한 초등학생이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놀리겠다는 심산 하에, 버스 좌석에 앉아 하얗게 김이 서린 차창에 '바보'라고 똑바로 써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보'라는 글자를 상대가 읽을 수 있도록 좌우를 바꿔야 한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부시의 멍청한 짓에는 이처럼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이명박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국기의 상하가 바뀌었다는 것은 그가 태극기를 손에 받아 휘두르기까지 단 한 번도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조기를 펄럭이는 부시의 해맑은 바보짓과 비교해볼 때, 이명박의 거꾸로 된 태극기는 다소 섬뜩한 인상까지 준다. 부시에게 애국심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이명박에게 그럴 수는 없을 것만 같다. 단언하건대, 멍청한 대통령보다 더 나쁜 것은 무관심한 대통령이다.

2008-08-13

작은 언론, 큰 언론

[세상 그리고 사람]“20대 문제는 모든 세대의 문제… 20대만 욕하지 말라”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노정태(경향신문, 2008년 8월 14일자 섹션 4면)

최근 경향신문의 김후남 기자님을 통해 지면을 얻고 또 인터뷰까지 하게 되면서, 언론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2시간 40분 넘게 손동우 사회부 부국장님과 마주앉아 별별 이야기를 다 했는데, 그 중 꺼내지 못한 게 있다면 이런 것이다. 대한민국의 일간지, 즉 메이저 출판 매체가 취약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을 뒷받침해줄 튼튼한 전문지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관계의 오류 등을 화끈하게 질타하면서 정정해줄 그런 전문 매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출판 매체 시장에 다양한 전문지가 강인하게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언론에서 '정보'가 아닌 '내 편'을 찾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드라마 전문 매체인 드라마틱에서 일할 때 특히 강렬하게 느꼈던 것이다. 사람들은 드라마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그 한 편의 드라마의 팬인 내 편을 들어줄 그런 매체를 원한다. 사실 촛불 정국에서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구독자가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촛불 시민'들은 '우리 편'이 되어줄 그런 신문을 원했지, 종합 일간지답게 사회의 다양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는 신뢰할만한 언론을 원한 게 아니다.

작은 언론들이 많이 등장할 수 있어야 큰 언론들도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언론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큰 언론들 또한 조화로운 언론 생태계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것은, 인터뷰에 언급된 것처럼, 사실과 의견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언론 문화를 정착시켜 나가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원론적으로는, 경향신문이 미국 축산농민협회의 의견 광고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현재의 분위기를 감안해볼 때 그런 광고 제의를 거절한 것은 당연하며 또한 잘 한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 두 선택지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안을 과연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FP 9/10월호 제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아직 커버 타이틀 등을 공개할 수는 없는데, 이번호 타이틀은 지난호보다 훨씬 '핫'하다. 앞서 나는 작은 언론과 큰 언론을 구분지으면서, 전문지를 작은 언론으로, 종합 일간지를 큰 언론으로 대강 분류했다. 하지만 미디어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그런 구분은 희미해진다. Foreign Policy와 Foreign Affairs는 모두 외교 전문지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두 매체를 '작은 언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는 '작은 언론'과 '큰 언론'의 경계선 또한 지금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어져야 할 일이다. 물론 나는 FP 한국어판이 한국 내에서도 '큰 언론'이 되기를 바란다.



근 세 시간을 떠들고도, 인터뷰를 읽어보니 덧붙이고 싶은 말이 생겨서 후기를 적어보았다. 방문자들께서는 인터뷰에 대한 코멘트를 이 게시물에 달아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