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17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

"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17일)라는 글을 통해, 한윤형은 라캉 컬트에 대한 아이추판다님의 문제 제기에서 출발한 논쟁의 방향을, 과학 자체에 대한 것으로 전환시켰다. 이 글을 곰곰히 읽어나간 후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던 과정에서, 나는 과학이 무엇인가, 혹은 과학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착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본격적으로 서술함에 앞서, 한윤형이 말하는 바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을 먼저 하는 편이 논지의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어떤 사람은 라캉이 심리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라고 하겠지만, 철학은 메타 학문이기 때문에 개별 학문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내용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는 아이추판다님의 말을, 한윤형은 "논변적 오류"라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분과 학문인 심리학에서 인정받는 내용이 심리에 관한 메타 학문을 구성해야 한다면, 현재의 심리학은 어떤 메타 학문을 구성할 수 있는가? 심리학은 라캉의 이론과 다른 그들의 방법론을 가지고,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에 주석을 다는 메타 학문을 구성할 수 있을까?"

두 문장을 가만히 읽어 보면 서로 뜻하는 바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내 알 수 있다. 전자는 '올바른 철학이라면 올바른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야 한다'라는, 철학에 요구되는 당위에 대한 진술이다. 반면 후자는 '올바른 과학적 지식이라면 철학적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추판다님의 문제제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이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에 주석을 다는 메타 학문을 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윤형은 과연 심리학자들이 그런 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을 우선 던져놓은 다음,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a) 분과학문인 심리학의 메타화로 나오지 않는 철학 이론들, 특히 인간의 의식이나 심리에 대한 철학 이론들은 모두 말이 안 된다. 특히 주체 철학 혹은 의식 철학이라 부르는 분류에 들어가는 학자들, 데카르트, 칸트, 독일 관념론, 헤겔, 훗설은 철학이라 볼 수 없다.

b) 우리는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


한윤형과 같이 나 또한 b)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그는 현재의 심리학이 반드시 철학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과학으로서의 심리학과 철학이 서로 무관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윤형의 글의 논지를 미리 요약해보자. 그는 1. 심리학은 올바른 메타 이론, 즉 철학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고, 2. 그것은 심리학이 과학으로서 확실하거나 단일한 방법론을 구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3. 그러므로 그들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는 과학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없고 따라서 정신분석에 대해 '과학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전제가 되는 명제인 1.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심리학이 확실한 과학이라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철학적으로 메타화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은 더욱 정밀한 방법론을 확보할수록 그것이 의지하고 있던 형이상학적인 전제들로부터 벗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만약 한윤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체물리학은 각각 어떤 철학적인 입장을 낳을 수 있을까? 지질학은? 곤충학은? 정보경제학은?

철학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과학적 지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비약'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하나의 집단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논리적 반박'으로 이해했던 비엔나 학파가 바로 그렇다. 그들은 그 어떤 과학적 지식도 그것이 철학적인 차원으로 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많은 수의 철학도들은 비엔나 학파의 반 형이상학에 대해 '그것도 형이상학'이라는 식으로 응수한다. 그 입장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과학에는 철학적 비약이 필요 없다'는 주장도 어쨌건 과학철학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학 연구 종사자들은 그러한 입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과학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윤형이 주장하는 바 중 두 번째 것도 자연스럽게 참이 아니게 된다. 심리학이 어떤 확고한 심리철학에 기반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방법론이 난삽하고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아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럴 필요가 없어서이다. 과학적 연구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부분적인 탐구에서 출발한다. 물론 모든 물리학자들의 이상은 세계의 모든 법칙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또한 모든 물리학자들은 그것이 거의 달성 불가능한 꿈임을 잘 알고 있다. 단일한 철학적 입장으로 환원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학문의 존립을 가르는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신경생리학이 환원론적 물리주의를 전제한다고 말하지만 그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환원론적 물리론자들이 신경생리학의 연구 결과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를 가져다 쓰는 것이 참이고, 또한 신경생리학자들이 인간의 마음 문제에 대해 전제하는 입장이 환원론적 물리주의라고 하더라도, 신경생리학이라는 분야의 발생과 발전은 환원론적 물리주의와 거의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신경생리학은 말 그대로 인간의 신경에 대한 연구로부터 출발하여, 그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축적하고 있는 생리학의 한 분야일 뿐이다. 반면 물리론적 환원주의는, 분석철학의 맥락을 벗어나 그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현대적인 생물학이 출발하기 훨씬 전부터 출발하고 있는 철학적 사조이다. 그러므로 양자에 대해 무엇이 무엇의 전제 조건이라는 식의 표현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두 가지 입장 모두 각 분야에서 존중받을만한 업적을 내고 있다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환원론적 물리주의같은 지배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심리학은 과학으로서 미흡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 포함된다.

한윤형은 과학적 방법론의 확립을 그 학문으로부터 추상화된 철학적 입장과 혼동하고 있다. 그에 따라 그가 상정하고 있는 논적에게 "당연히 하나의 학문 안에는 여러 가지 입장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입장들은 하나의 보편화를 추구합니다."라고 답변을 하며, 경제학이나 사회학에 비해 심리학은 "삼선짬뽕"처럼 얽혀 있지 체계가 잡혀있는 학문이 아니라는 위험천만한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여기서 "게다가 주류 경제학은 여러분의 친구인 친애하는 심리학은 물론 사회학보다도 훨씬 엄밀한 학문 체계를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학문의 도입부에서 그들이 가정해야 하는 열 가지 정도의 원칙을 상정하고, 그 후로는 이 원칙의 안쪽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법칙만을 수립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말과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한윤형의 과학에 대한 오해가 어디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과학을 과학이게끔 해주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어림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논거가 빈약한 추측이지만, 아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한윤형이 경제학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학문의 도입부에서 그들이 가정해야 하는 열 가지 정도의 원칙을 상정하고, 그 후로는 이 원칙의 안쪽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법칙만을 수립"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맨큐의 경제학의 1장에 나오는 경제학의 열 가지 법칙을 염두에 두고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그 책을 직접 펴서 읽어보면 알 수 있다시피, 맨큐가 말하는 열 가지 법칙은 강학상의 편의를 위해 잠정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저 법칙들이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님을 맨큐 본인도 알고 있고, 그래서 유력한 경제학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여 대체로 90% 이상이 찬성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보여주기까지 한다. 맨큐가 꼽은 열 가지의 원칙이 경제학자들을 위한 '사람은 죽는다'라고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 열 가지 "원칙의 안쪽에서 논리적으로 합당한 법칙만을 수립"하는 식으로 경제학 연구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심리학도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는 3단 논법의 대전제를 심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부당한 질문이 된다. 하지만 심리학 뿐 아니라 경제학, 아니 그 어떤 과학에 있어서도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뉴턴이 세워놓은 고전 물리학의 체계도 아인슈타인의 연구와 양자물리학자들의 반란에 의해 논박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과학철학의 여명기, 혹은 혼란기가 도래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내가 남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하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무리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 과학이라고 해도 어떤 철학적인 원칙을 전제로 삼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또한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 과학만이 철학적으로 단일한 입장의 추상화를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철학적인 비약은 가령 정신분석처럼 과학으로 제대로 성립하지 못한 학문 분야에서 더욱 자주 일어난다.

과학적인 인식이 '모든 것'을 동시에 다루지 않는다는 주장은 참이다. 하지만 그것을 '진공 상태에서만 갈릴레오의 법칙은 참이다', 그러므로 '고전물리학은 마찰이 없는 상태를 가정하여야만 성립한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곤란하다. 마찰이 없는 상태를 가정한 것은 최초의 논의를 시작하기 위한 첫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학자들은 공기나 물 같은 흐르는 유체 속에서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예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말이 들려오지는 않는다. 과학에 대한 불투명한 논박들은, 이렇듯 대체로 정확하지 않은 그림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제한된 분야에 대해서만 판단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합리성을 지켜낸다. 물리학의 법칙은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신경생리학자는 생명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한다. 과학적 인식이 제한적인 것은 이렇듯 그 대상을 좁히는 일이지, '우리는 모든 인간이 인센티브에 따라 움직인다고 본다'는 식의 교의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가설은 사고의 도구로서 기능하지만, 또한 경제학의 경우 그러한 원칙을 다른 분야에 적용함으로써 학문적인 성취를 이루는 스티븐 레빗 같은 학자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진정 과학적인 발전은 그와는 정 반대로 사고의 편의를 위해 도입된 전제를 벗어던질 수 있게 해주는 발견을 통해 이루어진다. 뉴턴 물리학에서는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는 두 행성 사이에서 동시에 작용하는 중력의 원리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공리로서 전제되었다. 시공간의 일그러짐을 수식으로 표현함으로써, 드디어 아인슈타인이 그 불필요한 전제로부터 물리학을 해방시켰을 때 물리학자들은 새 시대의 문을 연 천재의 도래를 환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다루는 대상의 범위를 한정지음으로써, 그 안에서 합리적인 추측과 논박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검증 가능하도록 연구된 결과들은, 심리학자들의 저널에서 공유되고 또 철저하게 비판받는다. 과학을 과학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검증과 비판의 기제이다. 과학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검증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처음 이 논의를 촉발시킨 라캉의 정신분석 같은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라캉이 남겨놓은 유고들이 전부 공개되어 있지도 않다. 황우석이 벌인 사기극의 경우에도 그렇다. 그것은 과학적인 대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위세에 눌리거나 상식 밖의 기만에 넘어간 이들 외의 누군가에 의해 반박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오만하다'는 식의 비판을 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과학자들이 '이것은 과학적이지 않다'는 말을 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지식과 과학적이지 않은 지식을 구분하는 그러한 기능이야말로 과학을 과학으로 성립하게 해주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다. 황우석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바와 같이, 그러한 자체적 비판 기능이 살아있을 때 과학은 사회적으로도 건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이 정신분석을 과학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이 아닌 것에 대한 인식은 과학인 것에 대한 인식에 선행한다. 그리고 대체로 과학자들이 '과학이 아니다'라고 판정짓는 대상은, 스스로 과학이라고 주장하며 그 아우라를 누리고자 하는 유사 과학들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범위 이상에 대해 진지한 판단을 하려 들지 않는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현대 과학은 풀뿌리 하나가 자라나는 현상조차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일거에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제한적'이라고 주장하며, '과학적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테제를 과학자들이 모두 떠안고 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학에 대한 피해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과학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과학자들이 잘 안다. 오히려 과학자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굳이 그 사실을 복창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과학의 한계를 구태여 부르짖는 이들이야말로, 마치 '신은 자비롭지 않다'고 외치는 '무신론자'들처럼, 그 어떤 절대적인 지식이나 권위과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댓글 6개:

  1. 수동 트랙백이오.
    http://weirdhat.tistory.com/5

    굽신굽신.. 노정태 선생님. 예고한대로 '반론'성격의 글은 아니지만, 일종의 참고글로 붙여 놓습니다. 저를 어여삐 여겨 주시고.. 굽신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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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뭐랄까요. 잘 다듬어진 과학철학도?를 만날 때면. 할 수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꽤나 잘 구분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한없이 겸손한 태도를 보이지만, 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보다도 단호한 태도를 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학문쟁이들 중에는. 과학철학도가 꽤 많았지요.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건, 늘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현대 사회에서 자연 과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 성과물의 축적 속도가 훨씬 빠르고, 방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타당한 면도 있고, 불편한 면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저는 과학도가 아니고, 수식이나 도표 보는 것을 특별히 즐기지 않는 평범한 인문학도입니다.

    오래전에 읽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칸트가 수학과 논리학과 자연과학을 보며. 체계적으로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잘 갖춰진 방법론을 갖춘 이 학문들을 부러워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 언어학 정도가 독자적인 방법론을 구축하며, 체계적인 지식을 생산하고 있는 정도일까요? 하지만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것 또한, 수학. 개념화. 이론화 등. 조금 더 근본적으로 치고 들어가면, 기존의 학문이 행하였던 방법론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론, 과학적 방법론도 대단히 독특하고 유니크하지는 않습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물론 제가 과학적 방법론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 과학을 전공하신 분께서, 과학적 방법론이 다른 학문의 방법론에 비해 탁월한 점을 설명해주신다면, 경청을 하겠습니다. 저는 과학적 방법론이 다른 인문학에 비해 지식축적의 속도가 빠른 이유를 첫째로 ‘언어’의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과학의 언어는 보편적인 언어이지요. 전 세계의 과학자가 하나의 주제에 동시다발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인문학의 경우. 언어와 언어가 상충할 때. ‘번역’의 문제가 반드시 발생하게 됩니다. 학문간 유통의 속도가 과학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이는 인문학의 단점이 아닙니다. 번역의 문제는 오히려 기존의 언어체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탐구의 영역을 개척하여 주기 때문이지요. 번역은 그것 자체로 새로운 지적 가능성을 담보하는 행위입니다. 과학의 보편적인 언어가 하나의 주제에 대한 연구를 통합적으로 집대성 할 수 있게 한다면, 인문학의 경우 끊임없이 지적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문제도 문제지만, 사실 자연과학이 이렇게까지 독보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기업/대학이 함께 맞물려가며 발달한 자본주의 생산체제와 깊게 관련이 있지요. 두 번의 세계전쟁과, 자본주의 발전에 테크놀로지가 고도로 결합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과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합니다. 중세에 신학이 발전했듯, 조선시대에 유학이 발전했듯. 과학의 발전 또한 당대의 ‘권력’과 함께 맞물려 가는 면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과학은 여러 가지 요건과 맞물려 현대 사회에서 고도로 발달할 수 있었던 하나의 학문분과 이며, 저는 지적인 성과와는 별개로, 저는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이 철학이 지배하는 세상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학문의 태도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탐구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반성’이 필요하지 않은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철학은 또 다른 문제영역을 개척해나갈 수 있겠지요.

    괜히 논쟁에 끼어들어, 불필요한 논점만 나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누시고 계신 대화가 꽤나 흥미로워서, 넌지시 끼어들어보았습니다. 무례였다면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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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학문이 바로 과학철학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분과철학들이 그러하듯이 언제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고요. 그래서 저는 과학적 방법론을 어떤 지식이나 철학적 입장의 소유가 아닌 '태도'에 가까운 무언가로 우선 생각하고 있는 편입니다.

    과학의 지식 유통 속도가 유난히 빠른 것은, 수학이라는 보편 언어를 사용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지식의 공개와 정보의 유통을 위해 별도의 노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The Wealth of Networks》라는 책을 보니, 아카데미즘의 영역에서는 이미 선도적으로 저작권 개념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도드라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런 투명성과 명료함 때문에, 비록 그냥 관심 수준이긴 하지만, 과학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과학적 지식이 권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비판'에 큰 공감을 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인문학자들이 권력과 불화를 빚어왔던 것도 아닐 뿐더러(군주론의 서문을 펼쳐보면 이건 뭐...) 유독 인문학, 혹은 과학이 아닌 학문에만 자기반성적 기능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도 근거가 빈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직 철학만이 자기 자신과 다른 학문의 근거를 캐묻지, 다른 학문들은 그런 것보다는 그것이 다루는 대상 자체에 집중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이 근대 이후의 지식 체계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기하신 논점과 그에 대한 저의 대답 모두가 이 논쟁과는 크게 상관이 없으므로, 불필요하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부분들은 별도의 논의를 구성할 수 있겠지만, 다른 기회에 더욱 진지하게 토론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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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노정태님. 저는 그저 노정태님의 종일 뿐입니다. 헤헿.. 나중에 책이나 몇 권 빌려주시져.. OTL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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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노정태님이 말씀하신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학문이 바로 과학철학입니다... 다른 분과철학들이 그러하듯이 언제나 실패를 거듭하고 있고요"라는 말을 보니 과학과 과학철학을 다른 존재로 보시는것 같습니다.

    과학철학과 과학을 동떨어진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방법론이 과학철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실험주의자 (experimentalist)--실험만이 최고야 들--의 관점에서도, 과학이란 실험을 통해 인과관계를 발견하고 (internal validity), 이를 일반화 (external validity) 시키는 것이라 합니다. (Campbell이나 Cronbach 같은 이들).

    그런데, 여기서 실험에서 발견된 것들이 "인과관계가 있다"라고 선포하기 위한 논리가 필요합니다. 많은 연구방법론 책들을 보면 이를 Mill의 인과론에서 출발시킵니다. 사실, 이런 논의들--인과관계와 일반화--이 "과학철학"의 기본구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위에 보이는 두가지 validity도 이러한 논의속에서 나오고 발전되었습니다.

    과학과 과학철학이 동떨어져 보일지 모르지만, 실험에 들어가보면 이게 상당히 유용하고 없어서는 안됩니다. 무엇을 빼고 무엇을 넣을지 (실험설계), 무엇을 측정할지 (조작적 정의),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인지 (측정), 그리고 결과해석에서, 우리는 저 과학철학 (방법론)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에 충족 될때 이를 established된 과학적 절차라고 하지요.

    참고로, 제가 많은 도움을 받았던 Mexwell의 "Qualitative research design"을 보면, 자신의 논문의 주제가 결정되면 이와 가장 근접한 paradigm을 찾으라고 합니다 (p.36). 물론, 이 책은 지금도 자연과학도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높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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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과학적 방법론이 과학철학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을 설명하거나 추가하기 위해 과학철학이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직은 전거를 찾을 수 없지만 발생사적 맥락을 놓고 볼 때 그러리라 봅니다.

    실험에서 자의적인 선택이 개입된다고 하여 그것이 과학적인 판단이 아니지는 않다, 혹은 모종의 '철학적'인 입장과 개입하여 있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아이추판다님이 "과학학은 반과학주의인가?"라는 글을 통해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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