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17

스타리그 승부조작 사건을 보며 한 가지….

놀랍다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일단 사건에 대해 보도된 내용부터 살펴보자.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들을 매수해 승부를 조작하게 하고 배당금 이익을 챙긴 사람은 두 명이다. 구속당한 박모(25)씨와 불구속기소된 정모(28)씨. 누군지 모를 수가 없는 프로게이머 마모(23)씨는 원모(23)씨와 함께 이 매수자들과 프로게이머들을 연결시켜준 혐의를 받고 있다. 참고기사

문제는 이 박모 씨의 직업이 뭐냐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지점에서 실로 큰 충격을 받았다. "검찰에 따르면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인 박씨는 조직폭력배 김모씨(지명수배)와 함께 작년 9월부터 올 2월까지 원씨 등을 통해 경기에 출전하는 게이머들에게 건당 200만~650만원을 주고 경기에서 고의로 지도록 사주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 그게 승부조작에 관여한 주범의 직업이다.

저런 게 다 있나 싶어서 검색해보았더니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인용된 기사에 따르면 "`키주 아카데미'(kizoo.co.kr)로 알려진 이 학원에서는 프로게이머를 희망하는 학생 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게임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부터 경기 분석과 같은 다양한 코스를 이수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고 한다. 박모 씨가 운영하던 학원이 과연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학원과 동일한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쨌건 이런 종류의 학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누군가가 사회에 진출해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돈을 내고 배우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일상화되어 있다. 일하면서 일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학원에서 대충 배워온 다음 직장에서 단물 빨리는 구조로 몇몇 직업군이 유지된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 직업군의 반열에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도 속해 있었던 것이다. 요점 정리의 왕국, 사교육의 본고장, 이곳은 대한민국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죽어서도 심판받기 전에 기출문제집 찾을 사람들이다. 정말이지 징그럽다.

나는 한때 누군가와의 술자리 혹은 전화통화에서 '스타리그만큼은 한국 최강자가 세계 최강자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종목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은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종주국이며, 경쟁자가 없기 때문에 최강국이다. 따라서 '외부'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스타크래프트의 팬들은 자생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영국인들이 '본토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먹히지 않을 텐데'라고 힐끔거린다면 과연 락의 종주국이 될 수 있었을까?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이런 노래는 리얼 간지가 아니야'라면서 재즈의 '원본'을 수입해 듣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한국의 청년들에게 주어진 바로 그런 종목 하나가 스타크래프트 리그였다. 스타리그만큼은 우리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원본'이고 '진짜'였다. 그런데 그것이 왜,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뭐든지 붙잡고 쓸데 없는 수준까지 열심히 하는 한국, 혹은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가 한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몇 명의 용병들은 한국 선수들처럼 죽어라 연습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요컨대 스타리그의 성립은 지극히 한국적인 풍토 때문에 가능했다. 미시적으로 파고들고, 뭐든지 기술적으로 끝까지 연마하는 풍토. 그리고 지금 '스타크래프트 학원'의 원장에 의한 승부조작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의 치명적인 약점 역시 한국적인 무언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학원에서 돈을 주고 배운 선수들은, '박은 돈'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말이다. 착잡한 마음에 단상을 한 구절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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