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3

[2030 콘서트]레미제라블, 비참함… 우리사회의 ‘장발장’

[2030 콘서트]레미제라블, 비참함… 우리사회의 ‘장발장’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연거푸 탈옥을 시도하고 또 붙잡힌 끝에 급기야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한 남자가 있다. 청춘을 모두 감옥에서 탕진한 그는 끝없는 분노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만을 가진 채 하룻밤 몸을 누일 곳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던 미리엘 주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것은 최근 화제를 불러오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시작 부분 줄거리이면서, 동시에 그 원작이 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내용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내용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장발장은 은혜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쳐서 달아나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나는 이 그릇뿐 아니라 은촛대도 주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장발장을 구해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레미제라블>을 회상할 때, ‘미리엘 주교의 용서로 감화를 받은 장발장은 몇 년 후 막대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다’라고만 기억한다. 19세기 초 프랑스를 배경으로 19년간 징역을 살고 돌아온 장발장이라는 한 사내가 단지 ‘삐뚤어진 내면’으로 인해 세상과 불화하였노라고, 그래서 그가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빅토르 위고가 만든 이야기와 다르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가 자신을 용서해준 순간, 크게 놀랐지만 당장 개심하지는 않았다. 한 어린아이가 놓친 동전을 발로 밟아 빼앗은 후 자신은 은그릇을 훔친 것도 용서받았으면서 어린애의 돈이나 강탈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충격을 받는다.

그 이후에는 또 어떤가. 위고가 묘사하는 바, 당시 프랑스에서는 한번 징역을 살고 나면 평생토록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아예 다른 색깔의 신분증이 발급되며, 여행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범죄자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다.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요컨대 장발장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평생토록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보호관찰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발급된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감옥 밖의 세상으로부터 또 한번 탈출한다. 우리가 아는, ‘부자가 되었지만 자베르가 쫓아와 다시 도망가는 장발장’은, 애초에 그가 보호관찰로부터의 무단이탈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캐릭터이다. 지금의 현실에 억지로 대입해본다면, 전자발찌를 끊어버린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본 후 대선에서 패배한 상처가 ‘힐링(치유)’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중들을 위해 혁명을 하지만 그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쓰러져나가는 마리우스의 동료들을 보며 비감에 젖어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더 큰 바리케이드, 더 뜨거운 혁명의 모습과 함께 웅장한 목소리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울려퍼질 때, 많은 이들은 정서적 위무를 받는다.

물론 영화나 소설의 감상에 어떤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처럼 말하자면 ‘총체성’을 지니는 작품을 감상한 후 그것을 오직 갓 끝난 대선과 연결지어 생각할 뿐이라면, 그 또한 비극적인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레미제라블>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마저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범죄로 내몰고 범죄자들을 결코 다시 받아주지 않던 차가운 세상. 그 속에서 자신의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지만 계속 쫓겨다니는 선량한 사람. 이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지금의 현실에 대입할 수 있다. 파업을 해서 전과자가 되고 손해배상으로 신용불량자가 되면 그는 사회 밖으로 간단히 추방된다. 관객들이 ‘도망친 범죄자’가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에게 감정이입할 때, 그들은 또 한번 잊혀지고 있다.

빅토르 위고에게 그의 장발장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장발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들을 다시 우리 사회로 끌어안을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힐링’은 값싼 자기 위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입력 : 2013-01-02 20:54:14ㅣ수정 : 2013-01-02 22:59:56

댓글 4개:

  1. "물론 영화나 소설의 감상에 어떤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처럼 말하자면 ‘총체성’을 지니는 작품을 감상한 후 그것을 오직 갓 끝난 대선과 연결지어 생각할 뿐이라면, 그 또한 비극적인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마저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라는 구절이 인상 깊습니다.

    저는 시민들 개개인의 문제의식이 언론에 의해 조작되는 상황을 연상했습니다.

    닉네임 답게 제가 기본 소양이 딸리지만, 몇 가지 우문을 해봅니다.


    시민들의 문제의식이 여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생기게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좋겠습니까.


    그리고 좀 더 주폭 문제, 호화 결혼등의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가질 수는 없을까요.
    근래 기사들 보면 장준하 선생 등 과거사에 대한 격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과연 주제들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만 한가득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혹 따로이 인식하고 계신 사회문제가 있으시면 고견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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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일단 저는 '자생적'인 사고와 '조작된' 사고의 거리를 그렇게 크게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일단 언론을 통해, 말하자면 '프레임'이 전제되어 있다 하더라도 많은 정보와 지식을 획득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서야 그걸 자기 생각을 통해 깨거나, 보강하는 식으로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겠죠. 그러므로 특히 젊은이들은, '내 생각을 이런 놈들이 좌지우지하게 둘 수는 없는 거 아냐?'라며 아무것도 안 보고 안 읽는 쪽을 택하면 안 되고, 반대로 자신이 믿고 읽을만한 누군가를 열심히 따라가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즉 일단은 '내 생각'을 안 해야, 나중에 '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폭 문제와 호화 결혼은 모두 조선일보에서 제시한 논점인데, 그 각각에는 사람들이 미처 말하고 있지 못했던 사회적 고충이 담겨있다고 봅니다. 전자가 '치안국가'로의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에서 멈추지 않고, 값싼 소주에 몸을 절여가며 삶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밖에 없는 경제적 소외계층의 복지로 나아간다면, 후자가 '비싼 결혼식을 하면 내 자식에게 집을 못 사준다'는 중산층적 칭얼거림에서 벗어나, 문화적 토양이 매우 척박한 한국에서 '인간적인 예절'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단계까지 짚어준다면, 사실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을 저는 그리 높게 보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고요.

      개인적으로는 전지구적 차원의 기후 변화와 국내, 국제 정치의 양상에 관심이 많습니다만, 공부가 부족해서 가급적 섯부른 첨언을 아끼려고 하고 있습니다. '고견'이 아니라 '공부의 결과'를 종종 제시하고자 하니, 관심있게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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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와, 빠른답변 감사합니다. ㅎㅎ

      앞으로 이 닉네임으로 자주 들락거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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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인간적인 예절'이 참 반갑게 다가옵니다.

      아직 한국에서 경박하게 살지 않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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