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낚시바늘을가
지고있거든내팔뚝
핏줄에걸고쭉땡겨
보라번역투의문장
서너줄이끌려나오
고흉한가죽은주저
앉아버릴테니
-2007년 5월 모일
2007-06-06
밀양
이 영화의 서사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단순한 복선을 던져주고, 씬이 바뀌면 그 결과가 등장하는 식이다. 아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암시가 나오자 마자, 다음 에피소드에서 유괴가 발생한다. 유괴범은 처음부터 단 한번도 아이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준이가 죽었다는 사실은 납치를 당했다는 것만큼이나 명백하다.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한 부흥회를 권하는 장면이 나오면, 가슴을 부여잡고 절규하다가 신애가 그곳으로 향한다. 바람부는 날, 일부러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화면에는 먼지가 날리는 느낌이 가득했다.
신앙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신애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우겨버리는 유괴범 원장의 맨질맨질한 표정을 보며 주저앉아버린 다음 벌이는 모든 행동들은, 말하자면 제발 나 좀 봐달라는 몸부림과도 같았다. 그깟 '거짓말이야' 씨디 한 장 돈 주고 살 수도 있는 것을 굳이 훔친다. 이신애씨를 위한 철야 기도회 현장에 돌을 던지고, 예배당에 찾아가 의자를 때리며 항의하고, 급기야는 약국 아줌마 남편을 꼬셔서 들판에 누워버린다. 보이냐고, 보이냐고, 보이냐고 조용히 소리를 지르지만, 정작 상대방은 팬티까지 벗겨놓고는 (아마도 안 서서겠지만) 갑자기 회개해버린다.
못된 짓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신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버린 것만 같아서 견딜 수 없는 심리 상태라는 게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꾸준히 잘 대해주려는 사람에게 가서, '나랑 섹스 하고 싶어서 그러죠'라며 그 마음을 짓밟아버리고 히스테리컬하게 킬킬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래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니까 이제는 몸에 칼을 대는 것밖에 남는 길이 없었겠지. 애초에 세상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죽은 남편 따라 밀양에 내려온 사람이니까, 신이 자기 마음대로 그 개새끼를 용서해줬다는 걸 알았을 때의 소외감을 극복할 방법도 없는 거고.
한때 도올 김용옥 빠돌이었던 시절 그 강의를 직접 가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께서 게스트로 나오셨다. 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양귀자의 이야기를 빌어 대답을 해주었는데, 양귀자가 그렇게 독실한 신자였다는 거다. 그런데 어느날 교통사고로 아들이랑, 아마도 며느리까지도 하루아침에 세상을 뜨게 되었는데, 신부가 와서 달래는 말이고 뭐고 다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분노만이 속에 가득 차서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했는데 당신이 이럴 수 있냐고 발로 밟고 침을 뱉었다는데, 그렇게 몇 시간인지 며칠인지를 미쳐 날뛰고 나니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이렇게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고 침을 뱉기 위해서라도 신은 존재해야만 해.
그러고보니 영화 초반에 신애가 했던 짓들이 이해가 좀 되는 거라. 아무에게나 대뜸 마치 작업을 거는 것처럼,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묻고 비밀스러운 햇빛이니 뭐니 객쩍은 소리나 하고, 없는 돈 많다고 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게 인테리어 말참견하고, 설마 그 나이 먹도록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이 예수쟁이 떼어내는 법 모르지도 않을 텐데 여기에는 햇빛밖에 없다는 대꾸를 하고, 다 새어나오고 있었던 거겠지, 외로움이. 하긴 동생도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물어봤으니까 이 말이 꼭 정확한 건 아닐 것도 같지만 내 느끼기엔 그렇다고. 그 여자에게 신앙은 믿고 말고의 문제도 아니었고 어쩌면 용서보다 더 원초적인 거였을수도 있는 거고. 고, 로 끝내는 게 다, 로 끝내는 것보다 입말에 가까운 것 같다.
오락가락하는 문체를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계속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원장 딸에게 사소한 짜증을 내고 집에 와서 스스로 머리를 자르면서, 거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하겠지만, 화를 조금이라도 내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웃고 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어쩌면 그렇게 삶을, 완전히 새롭지는 않아도 어찌어찌 살아가게 된 건, 살려달라고 말한 다음 어쨌거나 살아서 그런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넘겨짚어볼 수도 있겠다. 한 줌의 햇빛같은 목숨이 붙어있기는 하니까, 아무리 초라하고 비참해도 생명은 돌려받았으니까.
작품 외적인 얘기도 조금 해야겠다. 이 이야기가 영화로 나와서 그나마 다행이다. 처음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지나치게 단순한 화법에 대해 말을 꺼냈는데 그 끈을 여기에 잇자면, 그렇게 원인과 결과로만 이어진 단순한 서사구조 하에서 작동하다보니, 그 끝없는 고통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변주가 전부 삭제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에 익숙해지고 슬픔에 단련되게 마련이어서, 아이가 죽고 텅 빈 집에서 밥을 먹다가도 그게 목에 달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 자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스스로를 더 미워하고 학대하게 된다.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을 때 정말 맛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입에 단 걸 물고 조금이라도 즐거워하는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겠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로서 굵직한 사건만을 짚어주고 넘어갔기 때문에, 보고 있던 나로서는 그런, 고통의 디테일에 시달릴 필요까지는 없어서 어떤 면에서는 고맙기까지 했다.
다시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나한테 남아있는지 의문이다. 좋은 영화였다.
신앙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신애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우겨버리는 유괴범 원장의 맨질맨질한 표정을 보며 주저앉아버린 다음 벌이는 모든 행동들은, 말하자면 제발 나 좀 봐달라는 몸부림과도 같았다. 그깟 '거짓말이야' 씨디 한 장 돈 주고 살 수도 있는 것을 굳이 훔친다. 이신애씨를 위한 철야 기도회 현장에 돌을 던지고, 예배당에 찾아가 의자를 때리며 항의하고, 급기야는 약국 아줌마 남편을 꼬셔서 들판에 누워버린다. 보이냐고, 보이냐고, 보이냐고 조용히 소리를 지르지만, 정작 상대방은 팬티까지 벗겨놓고는 (아마도 안 서서겠지만) 갑자기 회개해버린다.
못된 짓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신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버린 것만 같아서 견딜 수 없는 심리 상태라는 게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꾸준히 잘 대해주려는 사람에게 가서, '나랑 섹스 하고 싶어서 그러죠'라며 그 마음을 짓밟아버리고 히스테리컬하게 킬킬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래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니까 이제는 몸에 칼을 대는 것밖에 남는 길이 없었겠지. 애초에 세상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죽은 남편 따라 밀양에 내려온 사람이니까, 신이 자기 마음대로 그 개새끼를 용서해줬다는 걸 알았을 때의 소외감을 극복할 방법도 없는 거고.
한때 도올 김용옥 빠돌이었던 시절 그 강의를 직접 가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께서 게스트로 나오셨다. 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양귀자의 이야기를 빌어 대답을 해주었는데, 양귀자가 그렇게 독실한 신자였다는 거다. 그런데 어느날 교통사고로 아들이랑, 아마도 며느리까지도 하루아침에 세상을 뜨게 되었는데, 신부가 와서 달래는 말이고 뭐고 다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분노만이 속에 가득 차서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했는데 당신이 이럴 수 있냐고 발로 밟고 침을 뱉었다는데, 그렇게 몇 시간인지 며칠인지를 미쳐 날뛰고 나니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이렇게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고 침을 뱉기 위해서라도 신은 존재해야만 해.
그러고보니 영화 초반에 신애가 했던 짓들이 이해가 좀 되는 거라. 아무에게나 대뜸 마치 작업을 거는 것처럼,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묻고 비밀스러운 햇빛이니 뭐니 객쩍은 소리나 하고, 없는 돈 많다고 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게 인테리어 말참견하고, 설마 그 나이 먹도록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이 예수쟁이 떼어내는 법 모르지도 않을 텐데 여기에는 햇빛밖에 없다는 대꾸를 하고, 다 새어나오고 있었던 거겠지, 외로움이. 하긴 동생도 밀양이 어떤 곳이냐고 물어봤으니까 이 말이 꼭 정확한 건 아닐 것도 같지만 내 느끼기엔 그렇다고. 그 여자에게 신앙은 믿고 말고의 문제도 아니었고 어쩌면 용서보다 더 원초적인 거였을수도 있는 거고. 고, 로 끝내는 게 다, 로 끝내는 것보다 입말에 가까운 것 같다.
오락가락하는 문체를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계속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원장 딸에게 사소한 짜증을 내고 집에 와서 스스로 머리를 자르면서, 거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하겠지만, 화를 조금이라도 내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웃고 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어쩌면 그렇게 삶을, 완전히 새롭지는 않아도 어찌어찌 살아가게 된 건, 살려달라고 말한 다음 어쨌거나 살아서 그런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넘겨짚어볼 수도 있겠다. 한 줌의 햇빛같은 목숨이 붙어있기는 하니까, 아무리 초라하고 비참해도 생명은 돌려받았으니까.
작품 외적인 얘기도 조금 해야겠다. 이 이야기가 영화로 나와서 그나마 다행이다. 처음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지나치게 단순한 화법에 대해 말을 꺼냈는데 그 끈을 여기에 잇자면, 그렇게 원인과 결과로만 이어진 단순한 서사구조 하에서 작동하다보니, 그 끝없는 고통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변주가 전부 삭제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에 익숙해지고 슬픔에 단련되게 마련이어서, 아이가 죽고 텅 빈 집에서 밥을 먹다가도 그게 목에 달게 넘어갈 수도 있다. 그 자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스스로를 더 미워하고 학대하게 된다.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을 때 정말 맛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입에 단 걸 물고 조금이라도 즐거워하는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겠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로서 굵직한 사건만을 짚어주고 넘어갔기 때문에, 보고 있던 나로서는 그런, 고통의 디테일에 시달릴 필요까지는 없어서 어떤 면에서는 고맙기까지 했다.
다시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나한테 남아있는지 의문이다. 좋은 영화였다.
2007-06-05
2007-06-01
Pulp - Underwear
Why don't you close the door
And shut the curtains
You're not going anywhere
He's coming up the stairs
And in a moment
He'll want to see your underwear
[chorus]
I couldn't stop it now
There's no way to get out
He's standing far too near
How the hell did you get here
Semi-naked in somebody else's room
I'd give my whole life to see it
Just you --
Stood there
Only in your underwear
If fashion is your trade
Then when you're naked
I guess you must be unemployed, yeah?
'Cause once it's underway
There's no escaping
The fact that you're a girl and he's a boy
[chorus]
If you could close your eyes
And just remember
This is what you wanted last night
So why is it so hard
For you to touch him
For you to go and
Give yourself to him, oh Jesus!
[chorus]
Do do do do do....
Oh yeah
I want to see you
Want to see you standing in your underwear
2007-05-25
질투와 계급의식
'부자들은 착하기까지 하다'는 이야기는 결국 가진 자들이 '우리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 '진솔한' 말을 털어놓거나, 비교적 가난하게 큰 사람들이 '그게 현실이죠'라고 소소한 술회를 털어놓으며 끝나게 마련이다. 즉, 못 가진 자들의 심리가, 기껏해야 질투심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정도에서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한국에서 좌파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이 부분을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질투와 계급의식의 차이도, 혹은, 그것들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 그리하여 질투가 계급의식으로 승화되지도 못하고, 계급의식이 질투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솔직하게 드러나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급의식을 통해 질투심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강인욱은 박예진을 정재민에게 빼앗긴 후 그람시의 옥중수고 따위를 읽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 전에 이미 손을 댔었더라도, 출세하여 자기 손으로 인생을 개척하겠다는 그가 그 내용을 진정으로 흡수했을 리 없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울분을 해결하기 위해, 혹은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좌파 서적을 집어든 순간 그가 계급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진 것이기도 하다. 계급의식과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이 바로 사회 계층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인욱은 정재민보다 부유해질 수도 없고, 그의 세계를 뛰어넘는 시각을 통해 도래하지 않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도 없다. 계급의식은 깨달아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제2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러 추구하는 한 쉽사리, 어쩌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질투를 느끼기 시작한 이상, 그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계급 의식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억지로 겨우 가능하기에 어떤 경우에도 미학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좌파들이 우파로서는 어림잡을 수 없는, 특정 계급에게는 해방이고 또 다른 계급에게는 묵시록에 가까울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우파들의 자산으로부터 파생되며 그 소유권을 박탈당했을 때에는 철저하게 파산하여버릴 가치를 배가 고프지만 체면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음식을 힐끔거리듯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온당한 일이 아닐 터이다. 맑스가 확실히 말한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이 부르주아의 도덕적 가치관을 모두 폐기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면 그것들이 제1가치로서 남아있을리가 없기에, 결국 부르주아의 도덕적인 혹은 '쿨한' 모습들은 좌파에게는 일종의 사다리로서 받아들여져야 마땅하다. 달리 말하자면, 좌파들은 자본주의적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기독교적으로 희구하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질투를 느끼는 순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좌파 지망생은, 욕망의 게임에 한 발을 들여놓게 되고 결국 패배하도록 예정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르주아들의 세계를 파괴하면서 노멘클라투라로 다시 태어난다. 보드카 대신 코냑을 마시고 비스킷 위에 케비어를 얹게 되면서 역사는 조악한 형태로 다시 반복되며, 대 부르주아들이 가지고 있던 귀족적인 우아함과 소 부르주아들이 담지하고 있던 지역 공동체와의 밀착은, 대체로 유착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복구될 수 없는 지경까지 파괴된다.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있던 서구 문명이 구 공산권의 그것보다 미적으로 탁월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고목나무처럼 소련이 쓰러지고 중국이 기이하게 변태하면서 두 체제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완벽하게 해소되어버렸다.
이 과정이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좌파가 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계급적인 갈등을 해결하려는 청년은 살롱 좌파가 될 수도 없는데, 그것은 이미 '좌파'로서 거듭나버린 그에게 또 하나의 계층적 문제가 있다는 좌절감을 안겨줌으로써 모든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그러므로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테리 이글턴 같은 좌파가 된다면 부르주아 계급의 지적인 교양이나 우아함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러한 질투심을 이겨내기 위해 테리 이글턴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도 온당하지도 않다. 그 순간, 계급의 문제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주변부와 중심부의 갈등이 악몽처럼 덮쳐올 것이며, 그 유령을 이겨내기 위한 엑소시즘을 진행할만한 어떤 신성함이나 초월적인 힘이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계급의식을 통해 질투심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강인욱은 박예진을 정재민에게 빼앗긴 후 그람시의 옥중수고 따위를 읽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 전에 이미 손을 댔었더라도, 출세하여 자기 손으로 인생을 개척하겠다는 그가 그 내용을 진정으로 흡수했을 리 없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울분을 해결하기 위해, 혹은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좌파 서적을 집어든 순간 그가 계급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진 것이기도 하다. 계급의식과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이 바로 사회 계층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인욱은 정재민보다 부유해질 수도 없고, 그의 세계를 뛰어넘는 시각을 통해 도래하지 않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도 없다. 계급의식은 깨달아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제2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러 추구하는 한 쉽사리, 어쩌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질투를 느끼기 시작한 이상, 그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계급 의식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억지로 겨우 가능하기에 어떤 경우에도 미학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좌파들이 우파로서는 어림잡을 수 없는, 특정 계급에게는 해방이고 또 다른 계급에게는 묵시록에 가까울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우파들의 자산으로부터 파생되며 그 소유권을 박탈당했을 때에는 철저하게 파산하여버릴 가치를 배가 고프지만 체면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음식을 힐끔거리듯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온당한 일이 아닐 터이다. 맑스가 확실히 말한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이 부르주아의 도덕적 가치관을 모두 폐기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면 그것들이 제1가치로서 남아있을리가 없기에, 결국 부르주아의 도덕적인 혹은 '쿨한' 모습들은 좌파에게는 일종의 사다리로서 받아들여져야 마땅하다. 달리 말하자면, 좌파들은 자본주의적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기독교적으로 희구하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질투를 느끼는 순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좌파 지망생은, 욕망의 게임에 한 발을 들여놓게 되고 결국 패배하도록 예정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르주아들의 세계를 파괴하면서 노멘클라투라로 다시 태어난다. 보드카 대신 코냑을 마시고 비스킷 위에 케비어를 얹게 되면서 역사는 조악한 형태로 다시 반복되며, 대 부르주아들이 가지고 있던 귀족적인 우아함과 소 부르주아들이 담지하고 있던 지역 공동체와의 밀착은, 대체로 유착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복구될 수 없는 지경까지 파괴된다.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있던 서구 문명이 구 공산권의 그것보다 미적으로 탁월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고목나무처럼 소련이 쓰러지고 중국이 기이하게 변태하면서 두 체제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완벽하게 해소되어버렸다.
이 과정이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좌파가 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계급적인 갈등을 해결하려는 청년은 살롱 좌파가 될 수도 없는데, 그것은 이미 '좌파'로서 거듭나버린 그에게 또 하나의 계층적 문제가 있다는 좌절감을 안겨줌으로써 모든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그러므로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테리 이글턴 같은 좌파가 된다면 부르주아 계급의 지적인 교양이나 우아함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러한 질투심을 이겨내기 위해 테리 이글턴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도 온당하지도 않다. 그 순간, 계급의 문제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주변부와 중심부의 갈등이 악몽처럼 덮쳐올 것이며, 그 유령을 이겨내기 위한 엑소시즘을 진행할만한 어떤 신성함이나 초월적인 힘이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결론을 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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