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17

저널리즘에 대하여

붙들고 있던 번역을 하나 끝냈다. 색인 등 몇가지 자잘한 부분들을 해서 넘기고, 역자후기를 쓰고 나면 내 역할은 끝난다. 내가 번역한 책의 이름은 Outliers다. 그 책을 번역하게 되어 개인적으로 영광이다. 김영사에서 내게 좋은 기회를 주었고,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나는 그 원고를 받아들었다. 1장을 읽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자 후기를 써야 하는데,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리에서 오가고 있어서 손에 잘 잡히지가 않는다. 이 책은 말콤 글래드웰의 이전 저작들에 비해 훨씬 '정치적'이다. 이 책이 '각하'의 손에 들어가고 '오해'를 유발한다면,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최대한 신중하게 역자 후기를 써야 한다. 월요일 저녁부터 지금까지 고심중인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으니 곧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

이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저널리즘'의 가치에 대해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자신이 특정 분야의 새로운 지식을 창출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대해,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재조명함으로써 물음표를 던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저널리즘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적인 지식을 생산하거나 그것에 대해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관점'을 창출해내는 창조적 작업이라고 말이다.

내가 스스로를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칭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 맥락에서이다.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나와 같지 않다. 하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문제삼고 싶다. 그렇다면, 철학과에 다니면서 칸트를 공부하고 있더라도, 어떤 순간마다 저널리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성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지적인 담론들을 충실하게 소화해내어 평이한 언어로 전달해줄만한 저널리즘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볼 경우,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의 보완물이 된다.

가령 뉴욕타임즈의 유명 저널리스트들을 살펴보자. 폴 크루그먼도 크루그먼이지만, 데이비드 레온하르트(David Leonhardt)라는 탁월한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가 매주 한 번씩 복잡한 보고서와 그래프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준다. 생물학과 진화론에 관한 지식은 올리비아 저드슨(Olivia Judson)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언어로 번역된다. 내가 좋아하는 가디언의 조지 몬비오 같은 경우도 그렇다. 이들은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통속의 언어에 달통한 이들이다.

훌륭한 저널리스트들이 글을 쓰는 매체를 읽고 있으면, 따라서, 해당 분야의 논의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어떤 주장에는 무슨 헛점이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한국에 '지성계'를 출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저널리즘이다.

이런 저런 전문가들은 지금도 많다. 하지만 그 전문가들 또한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저널리스트들이 저널(학술지)을 읽고, 그것을 저널리즘의 영역 안에서 소화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저널리즘이다. 이러한 하나의 순환 주기가 완성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지성계'의 존재를 논할 수 있게 된다. 대중과 지식인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래야 지식인과 지식인 사이의 거리도 좁혀질 수 있다.

《아웃라이어》의 참고문헌을 보면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말콤 글래드웰이 정보를 얻는 1차적인 경로는 책과 과학 저널들이다. 말콤 글래드웰이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또한 과학적인 논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원이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하나의 완성된 시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말콤 글래드웰같은 탁월한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그와 나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요인은, 그는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반면, 나는 (특히 과학 분야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저널리즘은 외국의 저널리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국내에는 그 정도 논의도 못 따라오는 사람들,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 몰상식한 소리를 너무도 쉽게 하면서 진보입네 좌파입네 하는 사람들이 참 많지만, 그들과 견주어 자신의 단점을 외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번역해야 할 책이 한 권 더 있고, 이미 쓰겠다고 계약서를 작성한 책도 한 권 있다. 하반기에 작업하게 될 다른 책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행중이다. 일정이 미칠 듯이 돌아간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도전에 진지하게 대응해야 할 시점이다.

《아웃라이어》를 옮기면서, 장차 써야 할 책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용과 구성 뿐 아니라 편집이나 문체,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 등 많은 것을 배웠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지만, 약속이 있어서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GQ에서 파티에 초대해줬다. 좋은 저널리스트들이 만드는 훌륭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이제 노트북을 덮고 슬슬 일어나야 한다.


덧. Outliers는 현재 3주째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하드커버 논픽션 1위를 달리고 있다. 자랑하고 싶어서 한 줄 더 남겨본다.

2008-12-13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않은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곳곳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104쪽, 《정본 백석 시집》,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2007)
정본 백석 시집 - 10점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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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도를 논하기 이전에, 말 그대로 '청춘'에 대한 시인 듯. 오늘 밤도 일하다가 문득 손에 잡혀서, 잠시 적어 본다.

2008-12-11

SDE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오늘자 경향신문에, 다음 아고라에서 SDE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는 인터넷 논객의 인터뷰가 실렸다. 안티조선 우리모두 사이트에 들락거려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그는 '서지우'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고, 또 오랜 기간 눈팅을 해봤다면 그의 본명도 결국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걸 굳이 써놓을 필요는 없겠다. 아무튼, 인터넷에서 아이디로만 접하던 사람의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을 실제로 보니 놀랍고 반가웠다.

그는 안티조선 우리모두의 '소칼의 지적사기 논쟁'이라는 토론방에서도, 비선형 확률제어론에 입각하여 IMF를 금융위기로 정의하고 이런 저런 논의를 해왔다. 사구체논쟁과 관련해서는 주로 NL 진영에서 옹호하는 입장인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하여 나름 큰 충격을 불러왔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그가 꾸준히 주장하는 '기준금리 대폭 인상'에 대해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어떤 식으로건 결국 대출금리도 올라간다. 현재 거품이 낀 아파트 가격의 절반 가량이 가계에서 대출을 받은 금액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인상분에 대한 이자 부담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주장하는대로 금리를 높이고 '자발적 구조조정'을 조장하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충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바꿔 말하자면, 아파트 가격 거품이 꺼지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빚 내서 아파트를 샀다가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져 죽는 것이 먼저가 될 수 있다. 금리를 확 인상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이너스 5% 경제성장으로 1년을 지나"는 극약처방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가 너무 쉽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게 무슨 중학생 용돈 5% 깎는 것도 아니고.

SDE님뿐 아니라 그의 금리인상론에 동의하시는 분들께 정말이지 묻고 싶다. 엄연히 자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행정부와 중앙은행이, 환율을 지키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한국에서 금리를 1%나 전폭적으로 내렸는데, 오늘 원달러 환율은 35원씩이나 뚝 떨어졌다. 기준금리와 환율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부터가 오류일 가능성을 그는 배제하고 있는 것 아닐까?), '마이너스 5% 성장'을 목표로 삼고,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을 유발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게다가 그런 충격요법을 쓰면 결국 '큰 놈'만 살아남게 된다. 즉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이 반드시 바람직한 경재 구조를 낳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굳이 충격요법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의문은 끊이지 않지만,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일단 여기까지만 쓰도록 한다.



*덧말: 손동우 사회에디터의 인터뷰였다. 이번에도 취재수첩에 새까맣게 필기를 하셨으려나. SDE님을 인터뷰한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지금 내가 적어놓은 이 질문을 전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주한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취재 포인트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2008-12-10

디플레이션 인덱스

Economist.com에서는 매일 도표를 하나씩 업데이트해준다. 대체로 당일 발간된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소재로 삼을 때가 많지만, 워낙 업데이트가 잦다보니 별 희한한 것들을 다 통계로 만들어서 보여주곤 하는데, 오늘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다(정확히 말하자면 Factiva.com의 자료를 그래프로 만든 것이지만, 아무튼).

월스트리스 저널, 인터네셔널 헤럴드 트리뷴, 타임즈 세 신문에서 '디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등장했는가를 세서 그래프로 만든 자료인데,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올해 초부터 9월까지는, 많으면 25회, 적으면 5회 선에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언급 빈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사진 오른쪽이 잘렸습니다만 그냥 참고 보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그래프는 더 잘 보이는군요).



(이건 여담인데, 이렇듯 '일정하게 유지되다'라는 말은 세부적인 변동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사용될 수 있다. 결정적인 변인이 개입하기 전까지 어느 정도 제한된 폭 안에서 수치의 변동이 발생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경향신문 칼럼에 대한 내 설명을 놓고,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일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트집잡기에 불과하다. 나는 인류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즉 빙하기나 이런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고),화석연료 사용 이전과 이후를 비교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체온은 하루 종일 미세한 변동을 보이지만, 감기에 걸린 상태와 비교한다면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러다가 10월부터 금융위기가 본격화되면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세 언론의 언급은 급증한다. 10월만 해도, 이전까지 가장 높은 수치였던 3월의 그것에 두 배에 달하는 '디플레이션'이 등장하고, 11월의 경우 11월 20일까지의 통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50번을 채우고 있다. 전 세계가 'D의 공포'에 휩싸여있다는 말은 괜한 표현이 아닌 것이다.

"War Room"에 준하는 국가종합상황실을 운영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발상이 가당찮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이다. 전시에는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가 전쟁으로 집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내 소비를 최대한 줄이고 그것을 전선으로 옮겨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경제에 시급한 것은 국내 소비를 증진하여 디플레이션의 위험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므로, 그 비유는 전혀 옳지 않다.

사람들의 소비를 부추겨야 할 판에, 최저임금을 깎고(당연히 국내 소비가 줄어든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을 때'라지만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한다면(밤에 장사하는 동대문 옷가게들은 문 닫으라는 소리?), 경기 회복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요소까지 함께 생각해보면, 'D의 공포'로 인해 정말이지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다.

2008-12-08

국가주의-국제주의-세계주의

In short, if the world economy is to get through this crisis in reasonable shape, creditworthy surplus countries must expand domestic demand relative to potential output. How they achieve this outcome is up to them. But only in this way can the deficit countries realistically hope to avoid spending themselves into bankruptcy.

Some argue that an attempt by countries with external deficits to promote export-led growth, via exchange-rate depreciation, is a beggar-my-neighbour policy. This is the reverse of the truth. It is a policy aimed at returning to balance. The beggar-my-neighbour policy is for countries with huge external surpluses to allow a collapse in domestic demand. They are then exporting unemployment. If the countries with massive surpluses allow this to occur they cannot be surprised if deficit countries even resort to protectionist measures.

We are all in the world economy together. Surplus countries must willingly accommodate necessary adjustments by deficit countries. If they decide to sit on the sidelines, while insisting that deficit countries deserve what is happening to them, they must prepare for dire results.
Martin Wolf, "Global imbalances threaten the survival of liberal trade", The Financial Times, 2008년 12월 2일


'수출이 살아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보다 이 시점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수출을 살려야 한다'는 그 주장에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마틴 볼프의 이 칼럼은 그 점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마틴 볼프의 칼럼 자체가 아니라, 여기서 주장하는 바의 통속화된 형태가 횡행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끔직한 일이 될 것이다. 일종의 중상주의적 관점이 회귀할 수 있고, 그것은 곧잘 (극단적인) 네셔널리즘과 손을 잡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수출국가들)이 현 국면에서 자국 내 소비 비중을 높여야 하고, 수출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것은 다 맞다. 하지만 그것을 '권고'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런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감정 상하기 시작하면, 국제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간단한 도식을 그려보자. '국가주의-국제주의-세계주의'를 하나의 직선 위에 놓고 바라본다면, 최근 10년 동안은 '세계주의'가 득세해왔다고 볼 수 있다. 토마스 프리드먼 같은 '평평한 지구'론자들이 자유무역이 킹왕짱이고 전 지구적 분업을 하면 효율이 높아지고 금융 시장이 팽팽 돌아가서 쿨하고, 등등을 외치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의 세계도 그랬다. 벨 에포크 당시, 크루그먼이 케인즈를 인용하며 말하듯, 세계는 지금보다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의 일상을 구성하는 그 고리가 그렇게 쉽게 깨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요컨대 세계주의가 졸지에 국가주의로 처박히고 만 것이다(여기서 국가주의는 nationalism의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다).

국가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는 지금, 100년 전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중요하지만, 국민국가의 역할과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최대한 치밀하게 짜여진 국제적 공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철학적, 제도적 기반 또한 절실해지고 있다. 케인즈주의의 복귀를 둘러싼 논의만큼이나 이 또한 중요할 터인데, 아직까지 본격적인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두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