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미 대통령이 ‘중도주의의 덫’에 걸렸다. 의료보험 개혁과 관련하여 보수층과 진보층 양쪽으로부터 비판의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전 세계인의 대통령으로 환영받았던 그의 지지율은 현재 50% 선에서 오가고 있다(국내 상황 때문에 이게 ‘높은’ 지지율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초기임을 감안했을 때 유례가 없이 낮은 수준이다). 대선과 총선 모두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당은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공히 다수당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오바마의 개혁은 시작부터 높은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놀라울 정도의 카리스마와 연설 능력 및 매력을 지닌 정치인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드라마틱한 경선을 통해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높은 기대를 받으며 대권을 탈환해낸 모습은 여러 모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케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측면이 적지 않다. 오바마는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누어진 미국을 ‘하나의 미국’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노무현은 영남과 호남의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과제임을 천명했다. 양자 모두 기존의 ‘정치권’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했고,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노무현과 오바마 모두 사회적으로 볼 때 비주류 출신이며 그들의 당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차별 구조가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의미를 지닌다.
▲ 경향신문 8월 18일자 9면.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의료보험 개혁을 둘러싼 난맥상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장점이나 특징 뿐 아니라 단점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중도주의’라는 막연한 이상에 대한 집착이 그 단점으로 꼽힐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노 정부에 온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주요 개혁 법안들을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이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변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마찬가지 현상이 오바마의 민주당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 민주당은 현재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이며, 지지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열성적인 지지자 그룹을 일구어낸 대통령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의료보험 개혁 법안의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국내 매체에서는 이 사안을 두고 ‘세금 내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미국인들의 정서’ 등을 이유로 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바마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사태 자체를 이해하는데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설명이다. 미국인들은 원래부터 세금 내기를 싫어했지만, 강력한 국세청 덕분에 성실한 납세가 몸에 베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극성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이 정부에서 추진하는 ‘타운홀 미팅’을 방해하고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지만, 애초에 이런 법안을 처리하고자 했다면 그정도 저항은 예상했어야 하는 것이었지 그것 ‘때문에’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원인은 개혁을 추진하고 성사시킬만한 오바마측의 동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바마가 ‘초당적 협력’, ‘중도주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비판을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의료보험 개혁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몰아붙이는 보수진영의 공세에 맞서 굳건한 신념을 보여주지 못하고, 공화당과 민주당 내 보수파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실정이다. 적어도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보인다. 본인이 빌 클린턴처럼 탁월한 사교술을 바탕으로 의원 개개인에게 접근하여 세부적인 주고받기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화당의 이탈표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중도주의’의 이상을 빨리 포기해야 한다.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 공화당 의원과 민주당 의원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중도주의는 없다
여러 진영의 눈치만 살피며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풀뿌리 자원봉사자들의 조직력과 단결력이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 ‘버락’이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운동원들 사이에서는 선명성 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대통령이 된 그에게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런 이들의 목소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타남으로써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힘을 모아야 할 시점에 내부의 정치 투쟁이 불거지는 것이다. 이 모든 광경을 우리는 이미 지난 정부 기간 동안 충분히 보아 왔다.
그렇게 해서는 소수파 출신 정치인이 살아날 수가 없다. 자신보다 강한 세력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하나의 생존술이 될 수 있겠지만, 이미 대통령이라는 자리까지 얻어내었다면 자신의 지지층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세상이 두 쪽 나도 나는 내 진정성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야 할 때이다. ‘중도주의’를 외치며 이쪽의 정책과 저쪽의 정책을 절충하겠다는 발상은 양쪽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본거지 역할을 해야 할 기존 지지자들마저 이탈시키는 효과를 불러온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와 『프레임 전쟁』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와 그가 만든 로크리지연구소의 정치 전략 제언에서 따온 것이다. ‘중도주의’는 없다.
가령 낙태에 대해 정치적 논쟁이 발생했다고 해보자. 한 아기를 ‘중간 정도’만 낙태할 수는 없다. 결국 모든 해답은 0 아니면 1, 도 아니면 모로 나누어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진보진영에 속한 누군가가 ‘중도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어중간한 합의책을 도출하거나 그런 제안을 어물쩍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견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보수층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미 노무현 정부의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시피, 기존의 지지층이 대폭 이탈하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중도주의 덫에는 미래가 없다
레이코프 교수와 로크리지연구소는 ‘중도주의’를 추구하지 말고, 대신 지지층과 반대자에게 강력한 ‘진정성’을 보여줄 것을 권한다. 사람들이 정치인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특정 정책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믿고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맡길 수 있는지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의료개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정책적인 차원에서 이것 저것을 뒤섞는 것보다, 현재 추진되는 의료보험 개혁이 어떻게 ‘미국적 가치’와 부합하는 것인지를 진정성 있게 설득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에게는 탁월한 대중 설득력과 카리스마가 있지만 그것을 얼마나 활용해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에서도 우리는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통일에 대한 그의 신념은 그를 평생 빨갱이라는 족쇄에 묶어놓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중도적’으로 뒤섞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 반대로, 국민들이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진정성’을 갖고 때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입장을 다져나갔다. 70년대의 김대중과 2000년대의 김대중은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취할지 모르지만, 통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초지일관 같은 편에 선다. 그것이 바로 진정성이다.
연이어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영원히 떠나보내며, 그 유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키워나갈 것인지를 놓고 이른바 ‘진보 진영’ 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진정성’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중도주의자’로 포장하려고 하며, 계파 내의 이합집산에만 집중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잡탕밥같은 정책을 내놓는 일에만 골몰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중도주의는 덫이다. 그것은 권력을 이미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이 여타의 정치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은 워낙 중간을 좋아한다고?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고 외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중도주의의 덫에 빠져 있는 한,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