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05

천안함 문제를 보며, 단상 하나

천안함 침몰 사태와 관련해서, MBC를 비롯한 일부 언론은 '군(軍)이 청와대에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이미 노무현 시대부터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관료 집단은 통제가 되지 않기 시작한 것 아닌가. 가령 이런 경우.


노무현 대통령이 실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지금도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근무하며 이 과정을 지켜 본 김종대 씨의 최근 책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김종대 지음. 나무와숲 펴냄)를 보면 노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하고도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5월 20일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 있는 사람 아무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 전부가 나에게는 진실로 들리지 않아요. 이게 대책회의 맞습니까?"

참고 링크


가히 폭력적인 인사 개혁을 통해 하나회를 물갈이한 김영삼의 군에 대한 카리스마와 통제력이, 김대중 시절을 거쳐 조금씩 약화되다가,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본다면, 현재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노무현은 '희망의 군국주의자'로 떠받들고 이명박은 '미필 씹새끼'로 몰아붙이는 그런 도식화를 통하지 않고도.

요컨대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인간으로 구성된 기계, 즉 관료 집단과의 알력싸움에서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가의 문제. 이명박 정부가 특별히 외교에서 무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이미 노무현 시절부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 권력은 관료 집단의 정보 독점과 의사 결정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연속성을 지니는 정책들, 특히 외교부가 관할하는 분야는 한결같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민주주의'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명박은 반민주주의고 노무현은 민주주의고 이런 차원이 아니라, '선출된 권력'이 '기존의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부재한 것. 노무현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대통령과 지지자들 모두 '조선일보 때문이다'라는 편리한 모범답안을 가지고 그 변명을 스스로에게까지 남발했다는 것 아닐까.

2010-04-01

이성은 정념의 노예

Reason is, and ought only to be the slave of the passions, and can never pretend to any other office than to serve and obey them.

- Hume, David. A Treatise of Human Nature


너무도 유명한 인용구. 흄이 '이성은 정념(passion은 철학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열정'이 아니라 '정념'으로 번역됨)의 노예'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행위나 판단을 낳지 못하며, 그것들을 억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성 혹은 지성과 판단이 인간의 같은 사고 기능이 아니라는 인식은 칸트에게도 이어져, 말년의 그가 『판단력 비판』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판단력의 결여는 사람들이 본디 천치[天痴]라고 일컫는 것으로, 이러한 결함은 전혀 구제할 수가 없다. 둔한 머리나 편협한 머리는 다름아니라 보통 정도의 지성과 지성 고유의 개념들을 결여한 것으로, 이러한 머리는 배움을 통해 충분히 보강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박식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보통은 (페트루스의 제2부의) 저것을 결여하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대단한 학자들이 그들의 학식을 사용할 때 결코 개선될 수 없는 판단력의 결함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A134=B173, 375쪽. 『순수이성비판』,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판단 자체가 이성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파악된 현실 속에서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은 자꾸 이런 것들을 혼동할까. 왜 자신들의 판단이 '이성적'이고, 다른 사람들은 '정념'에 의해 판단하고 있다고 성급한 단정짓기를 서슴치 않을까. 그런 판단은 대체 어떤 정념에 의존하고 있는지, 관찰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0-03-31

뜨거운 머리, 차가운 가슴

세상에는 자신(들)을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이 '차가운 이성'을 유지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종종 그것을 상실하곤 한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컨대 '차가운 머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차가운 것은 그들의 가슴이며, 본인들이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냉혈한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들의 머리는 곧잘 뜨거워지곤 한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은 사실 '뜨거운 머리, 차가운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인 것이다. 심장이 뛰는 순간 두뇌가 멈춘다고? 현실은 그와 정 반대 아닌가? 심장이 멈추는 순간 두뇌도 멈춘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는 살아 숨쉬는 인간이다.

2010-03-24

계층 이동 없는 한국

한 가지 기본적인 질문. 계급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사회,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1950년대부터 1990년대 무렵의 대한민국처럼 사회 내 계층 이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사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 20세기 중반 이후 대한민국이 겪은 급격한 경제 발전은 세계적으로 드문 현상이며(경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한 유일한 경우),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은 바로 그 '비정상적' 상황에 기반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질문. 대학 교수 자식들이 대학 교수가 되고, 노동자의 자식들은 노동자가 되는 나라. 필리핀과 동남아시아만 그럴까? 영국을 포함한 서구 선진국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동자의 아들 테리 이글턴이 영문학 교수가 되었을 때 그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와 계층이 전부 파괴된 채 혼돈 속에서 출발한 대한민국같은 나라가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사회적 계층이 어느 정도 분화되어 있고 그것이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지금과 같은 식의 계층 이동과 신분 변화가 가능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한국도 이제 필리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계층에 따라 주거지가 나누어져 있고 입는 옷이 다르고 생활하는 문화가 다른 것은 필리핀만 그런 게 아니다. 영국도 그렇고 독일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다. 물론 '현재'의 한국인들은 그런 사회가 도래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계급의 차이가 생긴다고 해서 사회가 바로 극단적인 불평등 사회로 치닫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어폐가 있다.

이 글(에서 퍼온 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하고 있다. 한국이 그런 식으로 망하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묵시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 대답을 내놓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계층간 이동이 원활하지 않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결국 노동운동과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의 출현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의 글은 '경제'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치'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동 없는 정치' 말이다. 지금처럼 여야를 막론하고 조직적으로 '기존 정치권'이 노동운동과 노동정치를 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야 모르겠지만,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한심스럽게 진행되어오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다.


덧말) 여담인데, '사회를 지배하는 1%'라는 표현은 좀 이상하지 않나 싶다. 현재 인구를 5천만으로 잡으면, 그것의 1%는 50만이다. 수능 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수능 1%로는 SKY라고 하는 곳에 들어가기도 힘들다. 그런데 어떻게 'SKY 나와도 대한민국 1% 안에 못 낀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한 해 SKY 졸업생들의 숫자는 같은 연령대에 속하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보다 당연히 더 적다. 사소한 레토릭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나는 '대한민국 1%'라는 헐거운 표현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네티즌과 대중들의 진지하지 못한 시선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2010-03-21

법정 스님의 유언에 대하여

다음 두 문장은 완전히 다르다.

① 나는 내 제자들 중 그 누구도 내가 남긴 책의 저작권으로 인해 경제적 이익을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② 나는 내 이름을 단 출판물이 더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법정 스님의 유언은 분명히 ②를 의미하고 있다. 워낙 돈에 미쳐 있는 세상이라 그런지, 저작권자에게는 인세를 받을 수 있는 권리 외에도 '저작물에 대한 인격권'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 책을 절판시켜라'라는 말은 말 그대로, 자신의 책을 더 찍어내지 말고, 어떤 식으로건 공개하지 말라는 뜻이다.

한 저자가 자신의 책을 절판시키고 싶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제자들이 추가적인 이권을 놓고 큰 다툼을 벌이거나 그에 준하는 추문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은 것도 그중 일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본인의 이름을 단 책이 더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고, 말 그대로 무(無)와 공(空)으로 사라지고 싶어서 그런 유언을 남겼을 수도 있다.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 등을 읽어본 사람으로서, 나는 법정 스님이 애초부터 '완전한 소멸'을 원해서 본인의 저서를 절판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쪽에 속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돈에 미쳐있는지, '절판시키라고 유언을 남겼어? 그렇다면 인터넷에 공짜로 뿌리면 되겠네?'라며 눈을 희번덕거릴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책은 상품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사상과 인격의 표현이기도 하다. (만약 가능하다면 '내 책을 전부 태워버려라'고 유언을 남기시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추측한다.) 평생 '무소유'를 설파한 한 스님이 자신의 인격을 위해 더 이상의 출간을 멈추라고 유언을 남겼을 때, 그것을 '공짜로 만들어라'고 해석할 만큼 우리 사회가 돈에 미쳐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