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의 트위터에 실망스러운 속보가 떴다. 5월 28일로 예정된 선관위 주최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세훈 현 서울시장이 발목을 잡았다. 직전 전국선거 득표율 10% '이상', 또는 5석
이상 원내정당의 후보, 그도 아니면 언론사 여론조사 평균 지지율 5% '이상'이어야 선관위 주최 TV 토론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규정 때문에 노회찬은 다른 후보들의 동의가 있어야 TV 토론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당의 한명숙 후보,
자유선진당의 지상욱 후보가 모두 동의하였지만, 오세훈 현 시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TV
토론이라는 것이 생긴 후 가장 많이 초대받은 정치인인 노회찬이, 정작 본인의 선거를 위한 TV 토론에는 참석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다. 대체 왜 오세훈은 노회찬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것일까? 노회찬의 지지율은 앞서 말했듯 현재 5%가 되지
않는다. 노회찬의 지자자 분포는 오세훈의 지지자 분포와 거의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지지율, 당선 가능성,
지지자 분포 등 모든 요소를 다 따져봐도 노회찬은 오세훈의 당선을 방해할만한 요인이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공정한 토론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비판을 받게 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세훈은 노회찬의 마이크를 빼앗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5월 18일 백분토론에 출연한 노회찬은 늘 하던대로 능숙한 화술과 현란한 비유를 구사하며 오세훈을
몰아붙였다. 복지 예산 증가율이 도로 건설비 증가율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사실, 무상급식이 비현실적이라고 오세훈이 말하지만 이미
그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에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 등을 조목조목 짚었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드문드문 폭소가 터졌고,
오세훈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갔다. 노회찬이 다섯 사람, 아니 여섯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그들을 기억하냐고 물었을 때,
그리고 오세훈에게 "서울 시장으로서 서울 시민들에게 사과할 용의는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오세훈은 대답했다. "용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오세훈이 노회찬과의 TV 토론을 회피하는 정확한 이유를
우리가 알아낼 수는 없다. 소수 정당의 후보자를 괄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TV 앞에서 자신의 정책과 공약의 허점이 드러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토론에 약한 한명숙 후보와 1:1로 대결하는 구도가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노회찬이 TV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는 작년 1월 20일 우리의 양심을 뒤흔들었던
한 사건에 대해, 서울 시장의 공식적인 입장을 다시 한 번 물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회찬이 없는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에는 용산 참사도 없다. 그는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현직 시장에게 사과를 요구한 유일한 야당 후보인
것이다.
나는 선거가 이기고 지는 것을 판가름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거는 누군가를 투표로 심판하고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파악해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오세훈을 이기기 위해 노회찬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 선거를 전략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지만, 서울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용산 참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나는 실존적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를 대할 수밖에 없다.
오직 노회찬만이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TV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런 노회찬이 아닌 다른 그 누구를
찍는다면, 우리는 용산 참사를 흘러가는 세월 속에 흐려져가는 기억 속에 묻어버리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삶보다 건설 자본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대놓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자본의 힘에
짓눌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은 후 차가운 시신보관소에서 영겁처럼 긴 시간 갇혀있었던 약자들의 눈물을 기억하고 그것이 서울
시장으로 대표되는 이 도시 자체의 문제임을 굳이 상기시키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노회찬을 지지하는 것은, 그래서 적어도
내게는, 실존의 문제다. 나 역시 용산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용산 참사의 유가족, 제2의 제3의 새로운 용산
참사의 현장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철거민들과 연대하는 방법은, 용산 참사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발언 기회를 빼앗은 오세훈의 정치적 행위를 비판하며, 한 사람의 서울 시민으로서 노회찬을 지지한다.
2010-05-28
2010-05-25
정치꾼이 되어버린 삼류 시인처럼
조선일보는 때로 정치꾼이 되어버린 삼류 시인처럼 보인다. 우스꽝스러운 운율, 싸구려 감수성, 너무도 명백한 정치적 의도. 벤야민이
말한 '정치의 예술화'를 실현하고 있는데, 그 정치와 예술 모두 저질스럽게만 보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조선일보가 딴 건
몰라도 미다시는 잘 뽑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의 정치적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미적으로 허름한 헤드라인을 '잘
뽑는 것'으로 보는 미적 판단 수준이 한국 사회의 정치적 의식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역으로 따져 묻고 싶어진다.
2010-05-17
스타리그 승부조작 사건을 보며 한 가지….
놀랍다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일단 사건에 대해 보도된 내용부터 살펴보자.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들을 매수해
승부를 조작하게 하고 배당금 이익을 챙긴 사람은 두 명이다. 구속당한 박모(25)씨와 불구속기소된 정모(28)씨. 누군지 모를
수가 없는 프로게이머 마모(23)씨는 원모(23)씨와 함께 이 매수자들과 프로게이머들을 연결시켜준 혐의를 받고 있다. 참고기사
문제는 이 박모 씨의 직업이 뭐냐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지점에서 실로 큰 충격을 받았다. "검찰에 따르면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인 박씨는 조직폭력배 김모씨(지명수배)와 함께 작년 9월부터 올 2월까지 원씨 등을 통해 경기에 출전하는 게이머들에게 건당 200만~650만원을 주고 경기에서 고의로 지도록 사주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 그게 승부조작에 관여한 주범의 직업이다.
저런 게 다 있나 싶어서 검색해보았더니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인용된 기사에 따르면 "`키주 아카데미'(kizoo.co.kr)로 알려진 이 학원에서는 프로게이머를 희망하는 학생 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게임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부터 경기 분석과 같은 다양한 코스를 이수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고 한다. 박모 씨가 운영하던 학원이 과연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학원과 동일한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쨌건 이런 종류의 학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누군가가 사회에 진출해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돈을 내고 배우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일상화되어 있다. 일하면서 일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학원에서 대충 배워온 다음 직장에서 단물 빨리는 구조로 몇몇 직업군이 유지된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 직업군의 반열에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도 속해 있었던 것이다. 요점 정리의 왕국, 사교육의 본고장, 이곳은 대한민국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죽어서도 심판받기 전에 기출문제집 찾을 사람들이다. 정말이지 징그럽다.
나는 한때 누군가와의 술자리 혹은 전화통화에서 '스타리그만큼은 한국 최강자가 세계 최강자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종목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은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종주국이며, 경쟁자가 없기 때문에 최강국이다. 따라서 '외부'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스타크래프트의 팬들은 자생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영국인들이 '본토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먹히지 않을 텐데'라고 힐끔거린다면 과연 락의 종주국이 될 수 있었을까?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이런 노래는 리얼 간지가 아니야'라면서 재즈의 '원본'을 수입해 듣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한국의 청년들에게 주어진 바로 그런 종목 하나가 스타크래프트 리그였다. 스타리그만큼은 우리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원본'이고 '진짜'였다. 그런데 그것이 왜,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뭐든지 붙잡고 쓸데 없는 수준까지 열심히 하는 한국, 혹은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가 한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몇 명의 용병들은 한국 선수들처럼 죽어라 연습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요컨대 스타리그의 성립은 지극히 한국적인 풍토 때문에 가능했다. 미시적으로 파고들고, 뭐든지 기술적으로 끝까지 연마하는 풍토. 그리고 지금 '스타크래프트 학원'의 원장에 의한 승부조작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의 치명적인 약점 역시 한국적인 무언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학원에서 돈을 주고 배운 선수들은, '박은 돈'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말이다. 착잡한 마음에 단상을 한 구절 적어 보았다.
문제는 이 박모 씨의 직업이 뭐냐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지점에서 실로 큰 충격을 받았다. "검찰에 따르면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인 박씨는 조직폭력배 김모씨(지명수배)와 함께 작년 9월부터 올 2월까지 원씨 등을 통해 경기에 출전하는 게이머들에게 건당 200만~650만원을 주고 경기에서 고의로 지도록 사주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 그게 승부조작에 관여한 주범의 직업이다.
저런 게 다 있나 싶어서 검색해보았더니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인용된 기사에 따르면 "`키주 아카데미'(kizoo.co.kr)로 알려진 이 학원에서는 프로게이머를 희망하는 학생 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게임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부터 경기 분석과 같은 다양한 코스를 이수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고 한다. 박모 씨가 운영하던 학원이 과연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학원과 동일한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쨌건 이런 종류의 학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누군가가 사회에 진출해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돈을 내고 배우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일상화되어 있다. 일하면서 일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학원에서 대충 배워온 다음 직장에서 단물 빨리는 구조로 몇몇 직업군이 유지된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 직업군의 반열에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도 속해 있었던 것이다. 요점 정리의 왕국, 사교육의 본고장, 이곳은 대한민국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죽어서도 심판받기 전에 기출문제집 찾을 사람들이다. 정말이지 징그럽다.
나는 한때 누군가와의 술자리 혹은 전화통화에서 '스타리그만큼은 한국 최강자가 세계 최강자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종목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은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종주국이며, 경쟁자가 없기 때문에 최강국이다. 따라서 '외부'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스타크래프트의 팬들은 자생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영국인들이 '본토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먹히지 않을 텐데'라고 힐끔거린다면 과연 락의 종주국이 될 수 있었을까?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이런 노래는 리얼 간지가 아니야'라면서 재즈의 '원본'을 수입해 듣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한국의 청년들에게 주어진 바로 그런 종목 하나가 스타크래프트 리그였다. 스타리그만큼은 우리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원본'이고 '진짜'였다. 그런데 그것이 왜,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뭐든지 붙잡고 쓸데 없는 수준까지 열심히 하는 한국, 혹은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가 한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몇 명의 용병들은 한국 선수들처럼 죽어라 연습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요컨대 스타리그의 성립은 지극히 한국적인 풍토 때문에 가능했다. 미시적으로 파고들고, 뭐든지 기술적으로 끝까지 연마하는 풍토. 그리고 지금 '스타크래프트 학원'의 원장에 의한 승부조작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의 치명적인 약점 역시 한국적인 무언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학원에서 돈을 주고 배운 선수들은, '박은 돈'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말이다. 착잡한 마음에 단상을 한 구절 적어 보았다.
2010-05-09
이명박 경례 논란
국군통수권자가 될 수 있는 자격 여부와 군필 여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미국은
모병제 국가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베트남전과 관련해 징집 영장을 받은 경험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미국이어서 옳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군대를 갔다 왔냐 아니냐로만 따지는 것은 유치한 소리라는 것이다.
요점은 누군가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느냐, 그 책임 의식이 적절한 실천으로 뒷받침되고 있느냐 여부이다. 군대에 갈 수 있는 사람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 회피를 나타내는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물론 고의적인 병역 회피는 나쁘다. 그러나 오직 그것만을 놓고 이명박을 비판한다면, 이명박 비판자들의 논리는 금새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대에 갔다 왔냐 아니냐 같은 말초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한, 여성 대통령도 장애인 대통령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했느냐를 놓고 한 사람의 공적 인생을 평가해야 하며, 오직 하나의 징표인 '군필 여부'만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현명한 담론 전략이 되지 못한다.
이명박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 혐오로 문제를 끌고 들어갈 경우, 적지 않은 수의 고연령층은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비아냥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삶이 그리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겪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이명박의 추한 외모와 그 위에 뒤덮인 명품들은, 언벨런스가 아니라 차라리 '가능성'이며 '희망'이다. 이명박을 비판하는 당신보다는 차라리 이명박에게 더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 그것이 현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명박이 경례를 AM으로 한다'며 비판하는 것과, '이명박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굳이 어떤 가치를 표방하고 찾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저 새끼는 미필'이라고 말하면 그만인데, 그렇게 말하는 군필자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대한민국의 군대 혹은 그 군대에서 보낸 자신의 지난 몇 년을 긍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라는 추상적인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을 인권의 이름으로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 정부의 여러 행태는 반인권적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재수 없는 인권단체 나부랭이'의 일부로 내가 되려 비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무릅써야 한다. 하지만 군대 문제에 있어서 적지 않은 수의 남성은, 자신이 대한민국의 군대를 사랑하고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군대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욕한다. 그것은 자가당착이며, 듣는 이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화법이다.
이명박을 미워하고 싶다면 다른 무언가를 사랑하라.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명박이 그렇게 온갖 부정적인 가치를 현현하고 있는 존재라면,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사랑하고 있는 한 당신은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 미움은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비판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명박을 미워하기 위해 이명박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치와 지향을 지니고 사는 삶, 그러한 가치 하에 이루어지는 비판, 나는 그런 것을 보고 싶다.
요점은 누군가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느냐, 그 책임 의식이 적절한 실천으로 뒷받침되고 있느냐 여부이다. 군대에 갈 수 있는 사람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 회피를 나타내는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물론 고의적인 병역 회피는 나쁘다. 그러나 오직 그것만을 놓고 이명박을 비판한다면, 이명박 비판자들의 논리는 금새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대에 갔다 왔냐 아니냐 같은 말초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한, 여성 대통령도 장애인 대통령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했느냐를 놓고 한 사람의 공적 인생을 평가해야 하며, 오직 하나의 징표인 '군필 여부'만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현명한 담론 전략이 되지 못한다.
이명박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 혐오로 문제를 끌고 들어갈 경우, 적지 않은 수의 고연령층은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비아냥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삶이 그리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겪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이명박의 추한 외모와 그 위에 뒤덮인 명품들은, 언벨런스가 아니라 차라리 '가능성'이며 '희망'이다. 이명박을 비판하는 당신보다는 차라리 이명박에게 더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 그것이 현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명박이 경례를 AM으로 한다'며 비판하는 것과, '이명박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굳이 어떤 가치를 표방하고 찾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저 새끼는 미필'이라고 말하면 그만인데, 그렇게 말하는 군필자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대한민국의 군대 혹은 그 군대에서 보낸 자신의 지난 몇 년을 긍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라는 추상적인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을 인권의 이름으로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 정부의 여러 행태는 반인권적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재수 없는 인권단체 나부랭이'의 일부로 내가 되려 비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무릅써야 한다. 하지만 군대 문제에 있어서 적지 않은 수의 남성은, 자신이 대한민국의 군대를 사랑하고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군대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욕한다. 그것은 자가당착이며, 듣는 이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화법이다.
이명박을 미워하고 싶다면 다른 무언가를 사랑하라.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명박이 그렇게 온갖 부정적인 가치를 현현하고 있는 존재라면,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사랑하고 있는 한 당신은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 미움은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비판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명박을 미워하기 위해 이명박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치와 지향을 지니고 사는 삶, 그러한 가치 하에 이루어지는 비판, 나는 그런 것을 보고 싶다.
2010-04-26
김예슬 vs 故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공통점은?
4월 9일에 프레시안에 실린 기고문입니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블로그에 올린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게재된 후 시간이 한참 되었으니, 전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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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vs 故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공통점은?
[기고] 대학생 문제인가, 20대 문제인가
기사입력 2010-04-09 오전 10:00:49
나는 현재 이른바 '20대 담론'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그 위기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명목상으로는 '20대 문제'지만 전체적인 프레임은 '대학생' 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대학생이 아닌 20대가 소외되고 있다. 둘째, 그 과정에서 아직 사회적으로 미성년자 취급을 받는 대학생이 20대를 위한 일종의 '시혜적' 정책을 요구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 가고 있다. 셋째, 앞서 말한 두 가지 문제가 종합되어, '20대 담론'이 사회 보편의 문제로 인정받고 자리 잡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한 가지 특징적인 사례 비교를 통해 이 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3월 10일, 고려대학교 3학년 김예슬 씨가 학교 안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여 '자발적 퇴교'를 선언했다. 대학생이 뭔가 '젊은이'의 패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회적 수요와 맞물려 이 선언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경향신문>은 바로 다음날 1면의 일부를 할애하여 이 소식을 보도했고, 여러 사회적 명사가 지지와 격려의 뜻을 표했다. 서울대학교 08학번 채상원 씨는 김예슬 씨의 선언에 동참해 자신도 대학과 싸우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 역시 <프레시안>을 비롯한 여타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한편, 지난달 31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반도체 검수 업무를 맡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뒤 2년간 투병 중이었던 박지연 씨가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삼성의 눈치를 보는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건을 다루지 않고 넘어갔지만, <프레시안>을 비롯한 이른바 '비판 언론'은 사태의 추이를 비교적 면밀하게 추적·보도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박지연 씨의 문제를 '20대의 문제'로 바라보고 다룬 기사는 없는 듯하다. 박지연 씨의 투쟁과 사망을 다룰 때, 그가 2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는 엄연한 사실은 동정의 소재가 될 뿐이다.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비윤리적 기업의 희생자'로 묘사될 따름이었다.
그는 '노동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젊은 노동자'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20대에 대한 과도한 예찬과 기대와 비판에 사용되는 온갖 수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대신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는 삼성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대한 보도 등이 주를 이루었을 따름이다.
언론이 고 박지연 씨의 죽음을 다루고 있을 때조차 그 '젊은 노동자'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거대한 악당 삼성이 주인공이고, 박지연 씨는 순결한 희생자일 뿐이다.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외친 김예슬 씨가 언론에서 다루어질 때와는 사뭇 다르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다보면 분명해진다. 우리 사회가, 우리 언론이 기대하는 '실천하는 20대', '사회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젊은이'는 절대 노동자여서는 안 된다. 무조건 '대학생', 그것도 명문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어야 한다. 사실 박지연 씨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다른 산업 재해 피해자와 함께 법원에 자신의 질병을 산업 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소송을 걸고 있었다.
박지연 씨는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박지연 씨를 '투쟁하는 20대'로 보지 않는다. 김예슬 씨의 자발적 퇴교는 '대학'이 아닌 '20대'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만, 박지연 씨의 싸움과 죽음은 '20대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그에게 우호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조차, 그것을 오로지 '삼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가령 4월 5일자 <한겨레>의 '왜냐면'에 실린 한 독자 의견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박지연 씨의 죽음은 삼성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과 노동자의 건강권의 문제와 그리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삼성'은 원래 그랬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드러내고 반성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4월 1일 발표된 민주노동당의 논평 역시 삼성에 대한 규탄이 주를 이루고 있다. 스물세 해를 살다 떠난 젊은이의 못다 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검색해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20대 담론'이 철저하게 대학생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과연 또 있을까? 명문대에 다니는 대학생은 자퇴만 해도 화제가 되고 저항하는 20대로 승격된다. 고등학교만 나오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은 젊은이는 죽어서도 투쟁의 주체가 아닌 산업 재해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김예슬 씨의 용감한 결의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현재, 세상의 시선은 대단히 불공평하다. '세상을 바꾸자'고 떠드는 바로 우리들의 시선이 불공평하다.
이렇듯 현재 논의되고 통용되는 '20대 담론'은 사실상 '대학생 담론'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20대 담론'의 의제가 '청년 실업 해소'와 '대학 등록금 인하'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각각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고, 두 측면 모두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대의 삶과 인권이 피폐해지는 이유는 비싼 등록금과 대기업 사무직 취업난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20대의 수많은 문제를 과연 '20대 담론'이 포용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박지연 씨의 죽음도 그렇거니와, 가령 이번에 침몰한 천안함 사건을 되짚어보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남성들은 군대에 간다. 그 군대는 지금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권의 사각지대이며 누군가가 애꿎은 생명을 잃어도 속 시원한 해명 한마디 내주지 않는다.
도리어 생존한 장교들(그 중에는 다수의 20대 사관들이 속해 있다)에게 병원복을 입고 목발을 짚고 나오는 '쇼'를 강요한다. 20대 남성의 대부분이 저런 군대에서 2년간 청춘을 바치는 것이, 20대가 아파트가 없어서 모텔에 가야 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 아닐까?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20대 담론'은 저런 지점을 수용할 수 없다. 세대론의 덫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386 세대가 20대의 몫을 가져간다'는 식의 괴담이 횡횡한 가운데, 정작 20대와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 운동의 과정에서 '20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사실상 실종되어버렸다.
대신 20대'를 위해' 등록금도 내려야 하고 아파트도 지어줘야 하고 낮은 학점을 받아도 대기업과 안정된 사무직 직장에 취직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들이 떠돌아다닌다. 전체 사회와의 접점을 찾지 못한 세대론은 결국 정부 혹은 권력자들이 배푸는 '시혜적 정책'에 대한 요구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형태의 20대 담론은 점점 범사회적인 공감대를 잃어가고, '너희만 힘드냐?'는 식의 비아냥거림을 불러온다. 심지어 20대, 혹은 대학생 사이에서도 그러한 상호 불신과 냉소가 그득하다. 세상을 바꾸고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한 운동으로 스스로를 위치 짓고 있는 한 그러한 상호 불신과 전망의 결여는 필연적이다.
가령 우석훈 박사는 20대 미디어 <이빨을 드러낸 20대>와의 대담에서 "교수를 비롯한 교직원의 급여가 너무 과다하다는 것과 제2캠퍼스나 건물 신축에 투자되는 비용이 절약 가능하다"는 것을 근거로 "연간 등록금 100만 원 이하 책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과연 이런 주장을 통해 대학을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을까? 교수와 교직원의 월급을 깎아서 대학생의 등록금으로 달라는 주장을 하면서 대학 사회 내에서 폭 넓은 공감과 정치적 동의를 확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내 또래의 누군가는 아직 차디찬 서해 바다 속에 갇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 백혈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그 속에서 청년 실업의 불안을 이야기하고 스펙 쌓기의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을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20대 노동자가 죽어가고, 20대 군인이 학대당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20대 대학생이 '20대 문제'를 '등록금 인하'와 '청년 실업 해소'로 한정짓고 있다면, 부끄럽고 비도덕적인 일이다. 대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듯, 대학생이 20대의 전부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기존의 '20대 담론'은 사회적 효용을 다해가고 있다.
김예슬 씨와 고 박지연 씨 모두를 위해, 이제는 그 폭을 좀 더 넓히고, 더 많은 주제를 함께 다루며 싸워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노정태 전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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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4월 9일 내 기고문이 나가고, 4월 10일 경향신문 만평 장도리에는 이런 내용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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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vs 故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공통점은?
[기고] 대학생 문제인가, 20대 문제인가
기사입력 2010-04-09 오전 10:00:49
나는 현재 이른바 '20대 담론'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그 위기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명목상으로는 '20대 문제'지만 전체적인 프레임은 '대학생' 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대학생이 아닌 20대가 소외되고 있다. 둘째, 그 과정에서 아직 사회적으로 미성년자 취급을 받는 대학생이 20대를 위한 일종의 '시혜적' 정책을 요구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 가고 있다. 셋째, 앞서 말한 두 가지 문제가 종합되어, '20대 담론'이 사회 보편의 문제로 인정받고 자리 잡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한 가지 특징적인 사례 비교를 통해 이 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3월 10일, 고려대학교 3학년 김예슬 씨가 학교 안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여 '자발적 퇴교'를 선언했다. 대학생이 뭔가 '젊은이'의 패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회적 수요와 맞물려 이 선언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경향신문>은 바로 다음날 1면의 일부를 할애하여 이 소식을 보도했고, 여러 사회적 명사가 지지와 격려의 뜻을 표했다. 서울대학교 08학번 채상원 씨는 김예슬 씨의 선언에 동참해 자신도 대학과 싸우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 역시 <프레시안>을 비롯한 여타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한편, 지난달 31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반도체 검수 업무를 맡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뒤 2년간 투병 중이었던 박지연 씨가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삼성의 눈치를 보는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건을 다루지 않고 넘어갔지만, <프레시안>을 비롯한 이른바 '비판 언론'은 사태의 추이를 비교적 면밀하게 추적·보도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박지연 씨의 문제를 '20대의 문제'로 바라보고 다룬 기사는 없는 듯하다. 박지연 씨의 투쟁과 사망을 다룰 때, 그가 2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는 엄연한 사실은 동정의 소재가 될 뿐이다.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비윤리적 기업의 희생자'로 묘사될 따름이었다.
그는 '노동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젊은 노동자'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20대에 대한 과도한 예찬과 기대와 비판에 사용되는 온갖 수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대신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는 삼성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대한 보도 등이 주를 이루었을 따름이다.
언론이 고 박지연 씨의 죽음을 다루고 있을 때조차 그 '젊은 노동자'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거대한 악당 삼성이 주인공이고, 박지연 씨는 순결한 희생자일 뿐이다.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외친 김예슬 씨가 언론에서 다루어질 때와는 사뭇 다르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다보면 분명해진다. 우리 사회가, 우리 언론이 기대하는 '실천하는 20대', '사회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젊은이'는 절대 노동자여서는 안 된다. 무조건 '대학생', 그것도 명문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어야 한다. 사실 박지연 씨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다른 산업 재해 피해자와 함께 법원에 자신의 질병을 산업 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소송을 걸고 있었다.
박지연 씨는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박지연 씨를 '투쟁하는 20대'로 보지 않는다. 김예슬 씨의 자발적 퇴교는 '대학'이 아닌 '20대'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만, 박지연 씨의 싸움과 죽음은 '20대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그에게 우호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조차, 그것을 오로지 '삼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가령 4월 5일자 <한겨레>의 '왜냐면'에 실린 한 독자 의견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박지연 씨의 죽음은 삼성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과 노동자의 건강권의 문제와 그리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삼성'은 원래 그랬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드러내고 반성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4월 1일 발표된 민주노동당의 논평 역시 삼성에 대한 규탄이 주를 이루고 있다. 스물세 해를 살다 떠난 젊은이의 못다 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검색해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20대 담론'이 철저하게 대학생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과연 또 있을까? 명문대에 다니는 대학생은 자퇴만 해도 화제가 되고 저항하는 20대로 승격된다. 고등학교만 나오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은 젊은이는 죽어서도 투쟁의 주체가 아닌 산업 재해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김예슬 씨의 용감한 결의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현재, 세상의 시선은 대단히 불공평하다. '세상을 바꾸자'고 떠드는 바로 우리들의 시선이 불공평하다.
이렇듯 현재 논의되고 통용되는 '20대 담론'은 사실상 '대학생 담론'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20대 담론'의 의제가 '청년 실업 해소'와 '대학 등록금 인하'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각각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고, 두 측면 모두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대의 삶과 인권이 피폐해지는 이유는 비싼 등록금과 대기업 사무직 취업난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20대의 수많은 문제를 과연 '20대 담론'이 포용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박지연 씨의 죽음도 그렇거니와, 가령 이번에 침몰한 천안함 사건을 되짚어보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남성들은 군대에 간다. 그 군대는 지금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권의 사각지대이며 누군가가 애꿎은 생명을 잃어도 속 시원한 해명 한마디 내주지 않는다.
도리어 생존한 장교들(그 중에는 다수의 20대 사관들이 속해 있다)에게 병원복을 입고 목발을 짚고 나오는 '쇼'를 강요한다. 20대 남성의 대부분이 저런 군대에서 2년간 청춘을 바치는 것이, 20대가 아파트가 없어서 모텔에 가야 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 아닐까?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20대 담론'은 저런 지점을 수용할 수 없다. 세대론의 덫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386 세대가 20대의 몫을 가져간다'는 식의 괴담이 횡횡한 가운데, 정작 20대와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 운동의 과정에서 '20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사실상 실종되어버렸다.
대신 20대'를 위해' 등록금도 내려야 하고 아파트도 지어줘야 하고 낮은 학점을 받아도 대기업과 안정된 사무직 직장에 취직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들이 떠돌아다닌다. 전체 사회와의 접점을 찾지 못한 세대론은 결국 정부 혹은 권력자들이 배푸는 '시혜적 정책'에 대한 요구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형태의 20대 담론은 점점 범사회적인 공감대를 잃어가고, '너희만 힘드냐?'는 식의 비아냥거림을 불러온다. 심지어 20대, 혹은 대학생 사이에서도 그러한 상호 불신과 냉소가 그득하다. 세상을 바꾸고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한 운동으로 스스로를 위치 짓고 있는 한 그러한 상호 불신과 전망의 결여는 필연적이다.
가령 우석훈 박사는 20대 미디어 <이빨을 드러낸 20대>와의 대담에서 "교수를 비롯한 교직원의 급여가 너무 과다하다는 것과 제2캠퍼스나 건물 신축에 투자되는 비용이 절약 가능하다"는 것을 근거로 "연간 등록금 100만 원 이하 책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과연 이런 주장을 통해 대학을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을까? 교수와 교직원의 월급을 깎아서 대학생의 등록금으로 달라는 주장을 하면서 대학 사회 내에서 폭 넓은 공감과 정치적 동의를 확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내 또래의 누군가는 아직 차디찬 서해 바다 속에 갇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 백혈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그 속에서 청년 실업의 불안을 이야기하고 스펙 쌓기의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을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20대 노동자가 죽어가고, 20대 군인이 학대당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20대 대학생이 '20대 문제'를 '등록금 인하'와 '청년 실업 해소'로 한정짓고 있다면, 부끄럽고 비도덕적인 일이다. 대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듯, 대학생이 20대의 전부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기존의 '20대 담론'은 사회적 효용을 다해가고 있다.
김예슬 씨와 고 박지연 씨 모두를 위해, 이제는 그 폭을 좀 더 넓히고, 더 많은 주제를 함께 다루며 싸워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노정태 전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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