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인 자리에서건 사적인 대화에서건, 누군가 내게 존경하는 문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나는 다소 어물거리며 이렇게 답하곤
했다. 존경한다는 표현까지는 과도할 수 있지만, 고종석의 문체와 어조를 따라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그렇게 과거의 일을 기술함으로써
나는 현재에 대한 대답을 피해왔다. 사실 지금도 그런 종류의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젊은 시절의 나는, 속된 말로 고종석 ‘빠돌이’였다. 20대 초, 한창 게시판 글쓰기를 하던 무렵에는 그의 책을 놓고
고스란히 베끼는 공부를 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가난했다. 경기도 부천에서 서울의 동북부에 위치한 대학교까지 오가는 교통비와,
매달 빠져나가는 학자금 대출금 따위를 내고 나면 호주머니에 남는 돈이 없었다. 1000원짜리 길거리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면서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읽었고, 문학과지성사의 문고판으로 나와 개중 저렴했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만약 안티조선 운동이 없었다면 나는 고종석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종석이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발언하는, 이른바 ‘논객’ 노릇을 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는 ‘반독재파쇼한나라당수구꼴통’을 새된 목소리로 몰아붙이는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염치와 도리를 알고 지키는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조선일보에 기고하지 않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쪽에 가까웠다. 물론 그는 호남인이고 그것은 그의 정체성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지만, 말하자면 강준만처럼, 자신의
‘호남적 정체성’을 공적인 글쓰기의 원동력으로 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노무현은 그를 향한 지지자들의 기대를 하나씩 하나씩 꺾어나갔다. 고등학교가 최종학력이었던 그는
엘리트 사회 내에서 비주류였고, 본인을 정치인으로 발탁해준 김영삼에게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후 김대중에게 영입되면서, 야당
내에서도 비주류가 되었다.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민주당의 세를 꺾어버린 것,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하고 또 비참하게 거절당한 것
등은 모두 그 비주류 컴플렉스의 발로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동시에, 민주당을 누빔점으로 삼아 세상을 향해 발언하던
두 명의 안티조선 논객이 중심을 잃었다. 『김대중 죽이기』가 대표작인 강준만이 그 혼미에 빠져든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아하고 맵시있는 문장을 선보이며, 안티조선 필자들 중 이른바 ‘문화면’ 역할을 도맡았던 고종석 또한 그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이 끝나기도 전에, 어떤 시점부터, 고종석은 ‘논객’으로서 힘을 잃었다.
‘소통’을 제 화두로 삼고 논객으로서의 생명을 이어가려고 시도한 강준만과 달리, 고종석에게는 그런 종류의 의지가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친구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본 여자들, 오래 전에 죽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고 만날 수도 없는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더 들여다보기 위해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만난 흥미로운 젊은이들을 지면에 소개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돌아오는 마감을 쉽게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수도 있고, 이미 내면의 불꽃을 잃어버린 본인의 발언권을 활용하여
후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석훈이 역설한 ‘20대 칼럼니스트’의 필요성에 귀를 기울인 몇몇
신문사들에 의해, 마치 나이트클럽처럼 연령 제한을 두는 순회 칼럼 지면들이 생겨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다. 나 또한 그 덕을
보았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고, 나는 “
노정태라는 사내“가 되었다. 그런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종석은
절필을
선언했다. 사람들은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는 그의 말을 즐겨 인용하고 있다. 왜
이렇게 순진하냐고, 알 것 다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시냐고, 끝내 한마디씩 하는 모양이다. 어떤 ‘운동’이 ‘조직’이 되고
불가능해보였던 싸움이 승리로 끝난 게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돌’이 자신의 팬클럽을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박혀있던 돌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것도 불과 몇 년 전이다. 백낙청을 운운하며 글쓰기의 무력함을 이야기하는 고종석의
허무를 왜 이해 못하는지, 혹은 외면하는지, 나로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문인이 절필을 하면 그것은 돌아오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절필 이전의 자신과 얼마나 완벽하게 단절하느냐, 혹은 얼마나
주도적으로 그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정치적 중심을 잃었고, 자신이 알거나 아끼거나 궁금해하는 타인들의 이야기를 거의
다 풀어놓은 그다. 이제 한 사람의 산문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과연 무엇이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는 고종석의 독자로 남아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사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