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02

[별별시선]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어린 시절의 내게 신해철은 넥스트의 신해철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라는 노래를 쓰고 부른 바로 그 신해철이었다. 그는 동성동본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의 인습에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가 그런 시대이기도 했다. 서태지는 북한을 향해 “시원스레 맘의 문을 열”자고 노래했고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리들을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있는 공교육을 비판했다. H.O.T.의 데뷔곡은 ‘전사의 후예’인데, 학교폭력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아 “그들은 나를 짓밟았어”라고 노래한다. 젊은이들이 소비하는 대중문화는 이른바 ‘기성세대’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1990년대는 ‘문화 전쟁’이 한창이었다. 연세대학교의 마광수 교수가 소설 <즐거운 사라>를 썼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직을 잃은 것이 1992년의 일이었다. ‘무한궤도’를 통해 혜성처럼 데뷔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마초 사범이라는 딱지를 달게 된 신해철은 1995년에 동성동본 연인들을 위한 송가를 불렀다.

신해철의 저항은 구체적이었다. ‘이 사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식의 추상적인 내용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동성동본 연인들의 결혼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학생들에 대한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한국 사회는 “대마가 가지고 있는 환각 증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과장함으로 인해서 예술가들에게 인격적 모욕을 주고 인간 쓰레기로 만든다”고,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까지 목청을 높였다. 가수로서, 또 라디오 DJ로서 활동하면서 그는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것을 기꺼이 자신의 두 번째 이름으로 삼았다.

그의 느닷없는 죽음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당시 신해철에게 쏟아졌던 온갖 비난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처럼 낭만적인, 요즘 말로 ‘중2병’스러운 가사는, 그가 감당해야 했던 사회적 반감과 비판을 염두에 두고 음미되어야 한다.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로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다는, 철들지 않는 소년과 같은 순수함이 없다면, 스스로를 동성동본 연인을 앞에 둔 누군가로 상정하고는 “아직 단 한번의 후회도 느껴본 적은 없”다고 외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다.

그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구체적인 사안을 두고 사회와 대립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번 구체적인 욕망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비록 동성동본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망. 비록 학생일지라도 학교에서 ‘사랑의 매’를 맞지 않고 싶은 욕망. 비록 법으로 금지된 대마초를 흡입한 사람이라 해도 사회적으로 멸시당하고 싶지 않은 욕망. 소년의 꿈과 희망은 현실의 벽 앞에 자주 부딪쳤다. 우리는 언젠가 그 벽이 깨질 것이라 믿었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어느 날, 그는 얄리를 따라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1997년 7월16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의해 동성동본의 결혼을 금지하는 민법 제809조 제1항이 효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승리를 제외하고 나면, 신해철이 지지했던 구체적인 욕망들은 아직도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2008년 헌법재판소는 한 표 차이로 간통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이미 합법화 혹은 비범죄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대마의 재배와 사용이 엄격하게 처벌되고 있다. 학생들의 인권 보호는 학부모가 선출하는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좌우된다.

한국은 아직도 개인과, 그 개인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 너그럽지 않은 나라다. 공개적으로 동성 연인과 결혼식을 올렸지만 김조광수 감독이 제출한 혼인신고서는 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욕망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무죄다. 모든 사랑은 합법이다.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1995년의 신해철이 만들었던 노래를, 그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022043065&code=990100&s_code=ao122

2014-10-28

[북리뷰]무차별 ‘인터넷 사찰’의 막전막후

[북리뷰]무차별 ‘인터넷 사찰’의 막전막후
2014.10.28ㅣ주간경향 1098호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글렌 그린월드 지음·박수민, 박산호 옮김·모던타임스·1만5000원

카카오톡을 사용하지 않는 나는 처음 ‘사이버 망명’ 이야기가 나왔을 때 비교적 무덤덤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텔레그램’이라는 메신저가 있는데, 그것은 국내 서버에 메시지를 저장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지난 9월 이후 텔레그램을 설치한 사람들은 대략 200만 명을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쯤 되면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이렇듯 대중들이 인터넷과 사이버 프라이버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은 반대로 인터넷을 통해 국민들의 정보를 추적하려 드는 오늘날을 일컫는 용어가 있다. ‘포스트-스노든 시대’(Post-Snowden Era)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 국가안보국 NSA의 전산시스템 관리자였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글렌 그린월드와 접선하여, 자신이 빼온 고급 정보를 전달하고, NSA가 무차별적으로 인터넷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 바로 그 사건 이후, 인터넷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바로 그 역사적 폭로의 당사자 중 한 사람인 글렌 그린월드가 스노든의 폭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행동의 전후 맥락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킨키나투스’라는 익명으로 그린월드에게 스노든이 이메일을 보냈지만 처음에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제보를 받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던 일화에서 출발해, 그린월드는 스노든의 폭로가 이루어진 과정, NSA의 무차별적 도·감청이 수행된 방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더 안전하고 개방적인 인터넷을 만들 수 있을지 등 다양한 주제로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사실 NSA의 감청과 현재 우리가 처한 문제는 사뭇 다르다. NSA는 적법하게 영장을 발급받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이라 예상하여 국민들의 메시지를 기술적으로 뚫고 들어갔다. 반면 한국의 검찰과 경찰은 수사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감청영장과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그러한 청구를 받아들여 ‘영장 자판기’ 노릇을 한 듯하다. 미국의 법원이 한국처럼 영장을 남발했다면 NSA는 굳이 스노든 같은 IT 전문가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즉, 한국에서의 문제는 IT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법적 절차의 작동방식 그 자체다.

하지만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국민을 사찰하는 ‘정보기관’이 움직이는 방식은 동일하다. NSA가 수집한 정보는 테러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수집한 정보 중에는 적어도 ‘미국인’ 한 명의 온라인 성생활과 인터넷 상에서의 ‘방탕한 행위’, 예컨대 포르노 사이트 방문과 배우자가 아닌 여성과의 은밀한 채팅 섹스에 관한 세부 내용이 있었다. NSA는 목표 대상의 명성과 신뢰성을 훼손하기 위해 이런 정보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한다.”(244쪽) 사생활을 수집해 반체제인사, 혹은 반정부인사를 물밑으로 협박하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다. 검찰은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말에, ‘왜 위축되나, 아무 문제없는 글을 쓴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NSA가 미국인들의 성생활까지 감시하는 데서 알 수 있다시피, 어떤 글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그들’이 정한다. ‘사이버 망명’이 아닌 민주주의의 회복만이 유일하고 확실한 해법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0211421211&code=116

2014-10-14

[북리뷰]성장보다 분배, 조세정의 확립을

[북리뷰]성장보다 분배, 조세정의 확립을


21세기 자본
토마 피케티 지음·장경덕 옮김·글항아리·3만3000원

지난 9월 19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그의 경제정책, 이른바 ‘초이노믹스’를 ‘아베노믹스’와 비교 설명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최근 한국의 경제정책은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등 세계적 경제학자들의 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폴 크루그먼 교수는 진보적, 혹은 ‘리버럴’한 경제정책을 대변하는 이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옹호하는 폴 크루그먼이 대체 어떤 맥락에서 ‘초이노믹스’의 이론적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일까?

다소 분명하지 않게 경제학자들을 그저 성향에 따라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로 나눈다면 토마피케티와 크루그먼은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진보’에 속한다. 하지만 그들 각각이 현재의 문제를 해석하여 내놓는 답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피케티는 <21>에서 대규모 공공부채에 대해 크게 세 가지 해법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자본에 대한 세금, 인플레이션, 긴축재정이다. 민간자본에 대해 파격적인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가장 공정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한다면 인플레이션이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공정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최악의 해결책은 지속적인 긴축재정인데, 이것이 바로 현재 유럽이 따르고 있는 방식이다.”(650쪽)

이것은 비단 공공부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공공부채 문제는 “부의 분배, 특히 공공부분과 민간부문 사이의 문제이지 절대적인 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는 부유하지만, 부유한 국가의 정부는 가난하다.”(같은 곳)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소득 하위 50%는 대부분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므로 결국 부유한 국가의 공공부채 문제는 상류층이 민간부문의 자본을 독점하는 문제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세 번째 해답, 즉 공공자본의 민영화를 골자로 한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실패로 판명되었으니, 문제는 과세 정책이냐, 아니면 재정 확장을 통한 경기 부양이냐의 선택이다. 최경환이 자신의 경제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인용하는 폴 크루그먼은 미국 내의 재정 축소론자들에게 맞서 ‘돈 뿌리기’를 주장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아베노믹스에 대해 ‘소득세를 높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제언을 덧붙인다는 점이다. 증세 없이 재정지출을 늘려 경기를 살리면 장기적으로 볼 때 경제가 회복되고 불평등도 줄어든다는 일종의 낙관론이다. <21>에서 피케티가 주장하는 바는 그와 궤도를 달리한다. “공공부채에 대한 이러한 ‘진보적’인 관점은 인플레이션이 오래 전부터 19세기보다 그리 높지 않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재분배 효과가 비교적 불분명한데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161쪽) 피케티는 경제성장보다 분배 그 자체를 목표로 삼고, 더욱 확실한 조세 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정부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간접세 중심으로 세수를 늘리면서, 동시에 재정 지출을 확대한다. 크루그먼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크루그먼의 말도 듣지 않고, 피케티의 조언에는 등을 돌린 셈이다. <21>에 대한 논의들은 바로 이 각도에서 우리의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정태 ‘논객 시대’저자/번역가>

2014.10.14ㅣ주간경향 1096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0071119071&code=116

2014-10-12

The physical amount of nuclear waste

Nuclear waste has, for many years, seemed an almost insoluble problem, at least politically in the United States. But when seen in relative terms, the problem of nuclear waste starts to look very different. The physical amount of nuclear waste that would have to be managed and injected underground with a mojor carbon-storage program. All the nuclear waste generated by the entire civilian nuclear program would fill no more than a single football field[인용자 주: 120 yards * 53.3 yards = 109.3m * 48.7m = 5322.9m^2]to the height of ten yards[인용자 주: 9.14m]. By comparison, the output of CO2 from a single coal plant, put into compressed form, would require about 600 football fields--and that would be just one year's output. 

Daniel Yergin, The Quest, Chapter 20, Kindle location 6792

2014-10-05

[별별시선]성역 없는 진상규명, 진상 없는 성역규명

세월호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하면서 이른바 ‘세월호 정국’이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건 초기부터 넓은 의미에서 야권과 적잖이 다른 입장을 표명해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 결말 앞에 한없이 착잡한 심정이다.

야권은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입장을 대변해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로 인해 세월호특별법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그 중에서도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가 논의의 쟁점이 되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다면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낱낱이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 야권의 설명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이미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있는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성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역을 수사하고 기소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특검이 됐건 진상조사위원회가 됐건, 수사를 하고 기소를 하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많은 경우 공소가 기각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그러므로 세월호특별법에 부여하고자 하는 수사권과 기소권은 ‘성역’을, 다시 말해 청와대를 겨냥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까지 왔으니 부디 아니라고 하지 말자. 굳이 범위를 더 넓히자면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정도가 기존 합동수사본부의 수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셋째, 그렇다면 야권은 세월호특별법을 통해, 청와대를 수사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청와대에 요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요구를 상대방이 받아줄 턱이 없다. 설령 야권이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을 모두 압승했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선거에 졌기 때문에 세월호특별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다기보다는, 통과시킬 수 없는 법을 선거의 쟁점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에 선거에서 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전국 단위의 지방선거라 해도 지방선거는 어디까지나 지방의 살림을 책임질 사람들을 선출하는 선거다. 제아무리 규모가 커도 재·보선은 국회의 빈자리를 채워넣기 위한 선거다. 하지만 야권은 이 각각의 선거에 세월호특별법의 명운이 달려 있다는 뉘앙스를 한껏 깔았다.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세월호특별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바는 다를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 ‘성역’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 대해서는 이미 수사가 진행 중이므로, 여권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보장하는 세월호특별법’을 ‘박근혜 특별법’쯤으로 받아들인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논의의 초점은 어느새 세월호에서 박근혜로 넘어가 버렸다. 닳고 닳은 표현을 빌리자면 ‘프레임’을 빼앗긴 셈이다. 경제학자 우석훈이 <내릴 수 없는 배>에서 말한 것처럼, 세월호가 침몰한 후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정작 사람들은 여객선이 아니라 박근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 27년 된 노후 선박 바캉스호가 세월호 참사 다음날 안전검사를 통과해 운항하고 있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특별법’에 정신이 팔려 ‘세월호’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의원을 포함해 야권의 주요 정치인들이 단식까지 해가며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진상 없는 성역 규명’뿐이다. 우리는 세월호라는 배에 대해, 그 배의 침몰 원인 등에 대해,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이번 세월호 정국을 통해, 박근혜라는 한 정치인이 한국 사회의 성역으로 올라섰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졌다.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인신공격과 비방을 삼가라고 대통령이 국민들을 향해 직접 훈계하는 시대가 열리고 만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한, 스스로를 성역으로 규정하는 성역의 존재는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권위주의적·구시대적 사고방식에 맞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권과 시민들의 몫이다. 가족과 친지를 잃고 형언할 수 없는 비탄에 빠진 세월호 유족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한 것부터가 큰 잘못이라는 말이다. 세월호 유족을 앞세웠던 야권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통렬한 반성과 자기 비판을 요구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052105485&code=990100&s_code=ao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