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17

[별별시선]청년들의 미래를 위한 투쟁

▲ “법적으로는 미성년자 벗어났지만
경제적으로 미성년자 취급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청년이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인생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시간 동안, 나는 ‘20대 논객’ ‘청년 논객’으로 살아왔다. 2010년에는 뒤늦은 입대를 했는데, 제대할 무렵이 되면 더 이상 20대가 아니므로 ‘20대 논객’ 꼬리표를 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착각이었다. ‘20대’를 위한 지면은 ‘2030’을 위한 것으로, 혹은 청년세대 전체의 것으로 탈바꿈했다. 이등병이 예비역 병장 되듯 나는 20대 논객에서 청년 논객으로 진급했다.

이러한 제자리걸음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에서 청년을 29세까지로 한정하자 30세를 넘긴 미취업자들의 반발이 쏟아진 사례를 생각해보자. 결국 대상 연령을 34세까지 늘리면서 불만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지만, 대체 몇 살까지가 ‘청년’인가.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청년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최근 국민연금 개혁안을 놓고 벌어진 논란을 지켜보며 나는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몸은 다 컸고 법적으로도 미성년자에서 벗어났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미성년자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청년이다.

여기서 ‘미성년자 취급’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청년들은 취업준비생이거나 갓 취업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옳은 것으로 인정된다. 청년들을 ‘위한’ 정책들은 지금도 수없이 연구되고 또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청년들은 어디까지나, 특히 경제적 영역에서 미성년자에 불과하기에, 청년들을 ‘위한’ 정책은 있을지언정 그들에 ‘의한’ 대안은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청년들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그들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기성세대와 대립하는 경우가 문제다. ‘착한 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면 곧장 의심의 눈초리가 날아든다. 젊은이들의 반발은 공포와 괴담에 휩쓸린 비이성적 여론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국민연금 개혁안에서, 지금부터 보험료율을 어디까지 끌어올려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 없이, 일단 소득대체율부터 50%로 못박아야 한다고 야권은 요구했다. 적잖은 청년들은 반발했다. 야권 성향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러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보수 언론의 선동에 놀아난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린다 해도 당장의 노인 빈곤 문제와는 무관하다. 빈곤 노인들은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개혁 진보 세력은 세대 간 연대니 공동체의 의무니 하는 원론적인 정답만 되풀이할 뿐이다.

한국은 복지예산 비중이 너무 낮은 나라다. 또한 지나치게 많이 쌓인 연기금이 주식시장에서 주가 방어에 쓰임으로써, 결국 저소득층의 돈으로 자산시장을 지탱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야권은 ‘2060년쯤 되면 적립금이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며, 쟁여둔 곶감은 자신들이 다 빼먹는다는 전제하에, ‘그때까지는 보험료율을 1%포인트만 올려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과연 청년들이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2008년 이후 언론 지면에 등장한 젊은 논객들에게는 나름의 자체적 가이드라인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청년들의 문제를 가시화하되 기존의 진보적 가치, 조직, 여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은 단지 논객들뿐 아니라 청년층 전반의 지배적 기조이기도 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그토록 ‘20대 개새끼론’이 횡행했음에도, 지난 대선에서 야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당장은 보답을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진보 개혁 세력에게 좋은 것이 청년에게도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청년들 또한 진보 개혁 세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지성을 사용해야 할 때다. 늙은 진보의 편에서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대신, 비난받는 한이 있더라도, 독자적 이해관계를 더 명확히 드러내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대립할 필요가 있다. 청년들 스스로 감히 생각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투쟁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172109495&code=990100&s_code=ao122

2015-05-14

팩트체크를 체크해본다

JTBC 뉴스룸의 인기 코너(라고 팟캐스트로 '5시 정치부회의'를 들으면 광고가 나오는) '팩트체크'를 진행하는 김필규 기자는, 트위터에서 "[팩트체크] 한국 남녀평등 지수 117위…정말 최하위국?"(2014년 10월 방송분)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직접 해명의 말을 남겼다. 자신의 해명이 일부 편집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당 내용이 담긴 이미지 파일을 첨부하여 트윗을 올렸던 것이다.



@FeFeFe2015 @moonformee @resist8765 따가운 지적 직접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의 글이 답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적해 주신 부분은 잘 염두에 두겠습니다.
https://twitter.com/jtbcfc/status/598350930543706112






자신이 지난 150회 동안 팩트체크를 어떻게 진행해왔는지, 그 속에서 성평등과 관련된 내용들을 언제 어떻게 다루었는지 해명한 앞의 두 문단을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회차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다시 한 번 인용해보자.

마음에 안드셨던 해당 방송의 경우 WEF 발표가 막 나온터라 궁금증을 풀어준다는 차원에서 지수산정방식을 분석한 것이며, 역시 결론에서는 기업임원의 남녀 비율, 사회진출비율 등으로 볼 때 양성평등의 길이 멀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부분적인 내용만 발췌된 것은 아닌지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시청자분들께 그런 오해의 소지를 만들고 서운함을 드린점은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성평등 문제에 있어선 어떤 바이어스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도권 언론에서 활동하는 언론인 중 적잖은 이들은 여성들이 성평등과 관련해 보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 그냥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김필규 기자는 이 문제제기가 큰 논란으로 번지거나 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해당 꼭지를 만드는 취지와 비판에 대한 소회를 정직하게 밝혔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대응이지만 최근 언론과 방송계의 소수자 인권 감수성이 비상식적 수준을 노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과 대조했을 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김필규 기자는 자신이 WEF의 통계를 지적한 방식이 왜 잘못되었는지 명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 제기를 한 많은 사람들은 팩트체크의 해당 꼭지를 방송으로, 혹은 재방송으로 전부 본 사람들이다. 일부 화면만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걸 보고 트집을 잡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부분적인 내용만 발췌된 것은 아닌지" 아쉬워하기 전에, WEF의 통계에 대한 자신의 분석 방법을 검토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블로그에 글을 하나 쓴다.

그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지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트위터 사용자 코르기에르고숨(https://twitter.com/corgit_corgit)님이 정확한 지적을 해주셨으므로, 그 트윗들을 길게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하기로 하자.

1. GGI는 실제로 여성이 누리는 사회적 자원과 기회의 "수준"을 반영하지 못한다. 예컨대 프랑스(16위)의 여성은 필리핀(9위)의 여성보다 더 높은 수준의 교육, 의료복지를 누리지만 그런 국가별 수준이 반영되지 않는다. 단지 "격차"만을 반영한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370333765632

2. 또한 국가별 고유한 정책이나 문화, 관습 예컨대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나 여성 성기절제 등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한 한계가 있음은 인정하지만 jtbc 김필규 기자의 지적은 문제가 있다.
/https://youtu.be/zrpxhvz8Jj0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422796128256

3. 먼저 WEF는 4개 부문(경제, 교육, 건강, 정치), 14개 항목을 바탕으로 GGI를 산출한다. 각 항목별 가중치는 존재하고 부문별 가중치는 없다. 예컨대 건강부문에서 남성대비 기대수명(0.307)보다 낙태되지 않을 확률(0.693)이 두 배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499186978816

4. 넘는 가중치를 가진다. 하지만 "각 부문별 지수는 가중치가 없이" 더해서 4로 나눈다. 그럼 국가별 GGI가 나온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558418939904

5. 김기자가 지적한 대학진학률을 포함하는 교육부문은 26개 국가가 만점인 1점을 받고 100위 국가가 0.9693점을 받는다. 즉 다른 부문에 비해 격차가 매우 좁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637871710208

6. 한편 건강부문 역시 격차가 좁은데 35개 국가가 0.9796점으로 공동 1위이고 100위인 국가가 0.9694점을 받는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723401887744

7. 이에 반해 정치부문은 국가별 격차가 심하고 이 부문 상위8개 국가가 순서만 바뀌면서 종합 8위를 모두 차지한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808667897856

8. 경제부문은 가장 고르게 분포하는 편이다. 즉 "정치, 경제부문"에서 종합순위가 판가름 난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908899176448

9. 결론: 한국의 교육부문 순위를 핑계로 WEF의 신뢰도를 문제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국의 GGI 순위가 매우 낮은 것은 교육부문의 평가방식이 아니라 "정치, 경제부문"의 순위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5552405471232

10. 웃픈 점은 정치부문에서 가장 가중치가 높은 '50년간 여성 국가원수 재임기간'항목에서 39위를 했음. 박근혜에게 모든 영광을~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5608701423616



학교에서의 시험에 비교해보자. GGI는 각 과목별로 개별 석차를 구한 후, 그 석차를 모두 더한 후 과목 수로 나눠서 전체 석차를 내는 방식이다. 국어, 영어, 수학, 기술, 가정 이라는 다섯 과목이 있다고 한다면, 국영수는 단기간에 성적을 내기 힘든 중요 과목이지만, 기술과 가정은 시험 전날 교과서를 잘 외우기만 해도 괜찮은 점수가 나오는 단순 암기 과목이다.

여기서 김필규 기자는 '국영수 못하는 애들이 기술과 가정 달달 외워서 높은 순위 받아서 전체 석차 높이는 경우도 있는데, GGI는 그런 맹점을 가진 통계'라는 논점을 제기한 셈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며, WEF에서도 그러한 문제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위에 인용된 코르기에르고숨님의 트윗 중 5번과 6번에서 잘 설명된 것처럼, 말하자면 기술과 가정에 해당하는 교육 및 건강 부문은 원래 그렇게 남들도 다 잘 보는 과목이다. 그건 우리가 어쩔 수가 없다.

결국 높은 점수를 받고 성적 상위권에 오르기 위해서는 국영수에서 고루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나름 우등생 그룹에 속하는 나라고, 국영수 포기한 채 기술과 가정에 올인하는 학생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기준이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된 교육 및 건강 부문을 제외하고 봐도, 한국의 순위는 말하자면 '심해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은 기술과 가정에서 특별히 이익을 보지 못했지만, 국영수에 속한다 할 수 있는 경제활동참가율에서 124위, 정치 참여에서 93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교육은 103위, 건강은 74위다. 오히려 국영수에서 깎아먹는 점수를 미약하게나마 암기과목으로 땜빵하고 있는 그런 나라인 셈이다.

출처: Gender Gap Index 2014, Rep. Korea

다이아몬드 그래프에서 파란 선이 한국의 점수, 검은 선이 전체 평균이다. 한국의 순위가 떨어진 건 경제와 정치에서 깎아먹은 탓이지, 건강과 교육이 '잘못 채점된' 탓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레소토의 예를 들어 '우리가 억울하게 비교당하고 있다'는 김필규 기자의 말은, 본인의 의사야 어찌됐건 '한국은 남녀평등이 이미 실현되었다'거나 '이미 여성상위 사회인데 왜 여성가족부 해체 안 하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남자들에게 악용될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트위터에서 지적하고 우려를 표한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유튜브에 올라온 해당 회차 팩트체크의 리플을 살펴보자. 인터넷 공간에서 남자들의 여성혐오가 과대표현 혹은 과다대표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하나같이 일관되게 해당 방송 회차의 결론과는 거리가 먼 소리만 하고 있다. 여자들은 별로 억울할 일이 없고, 당한 것도 없는데 남자들의 몫을 과도하게 빼앗아가려 한다는 식의 볼멘소리만 가득하다. 이것이 기본적인 여론 지형이다. 그다지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통계의 오류를 지적할 때에는 '후진국이 우리보다 순위가 높다'는 식의, 어떤 면에서는 다소 '아프리카 후진국'에 대한 편견에 기대고 있다고 의심받을 수 있는 논의를 지양해야 했다. 또한, 그 통계의 오류를 바로잡더라도 한국의 성 격차는 여전히 심해권이고 노답 수준이라는 것을 보다 명확하고 강렬하게 표현했어야 한다. KBS 9시 뉴스를 보다가 종종 리모콘을 돌려 팩트체크 코너를 확인하는 한 사람의 시청자로서, 앞으로도 보도 방향과 개별적 사항에 대한 검증 방식을 관심있게 지켜볼 예정이다.

2015-05-05

[북리뷰]참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
노다 마사아키 지음·서혜영 옮김·펜타그램·1만7000원

사건 발생 후 1년이 지났다. 하지만 적잖은 이들은 세월호 참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들이 있고, 대한민국이 더 안전한 나라가 된 것도 아니며, 일각에서는 세월호 침몰의 진짜 원인이 밝혀지지도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연안여객선들의 위험한 항해는 계속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정신과 의사 노다 마사아키가 지은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를 꺼내 들어 보자. “1985년 8월 12일 JAL 점보기가 군마 현 우에노무라 산중의 오스타카 산등성이에 추락하여 520명이 사망(4명 생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3쪽) 단순히 숫자로만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세월호 참사보다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세상을 떠나게 된 그런 사건이었다. 고속으로 날아가던 항공기가 추락했기에 총 탑승자 중 살아남은 이들은 고작 4명뿐이었다. 더 끔찍한 것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온전히 수습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조난자 520명 중 오체가 다 갖춰진 시신은 177구였고, 그 밖의 시신은 모두 이단(離斷)된 상태여서 2065부분으로 분리되어 수용되었다.”(28쪽)

JAL과 일본 사회는 이 문제를 그저 대충 수습하고 싶어했다. 주인을 못 찾은 조각난 시신들을 사고 발생 후 반년 만에 한꺼번에 화장하기로 결정했다. “합동 화장은 서둘러 진행됐다. 그것은 죽은 사람과 유족의 시간이 아니라, 일상의 업무 속에 사는 사람들의 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진행된 것이다.”(83쪽)

저자는 해당 사고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만나며 그들이 어떻게 슬픔을 극복해왔는지를 기록한다. 그중 눈에 띄는 사례를 꼽아보자. 평범한 주부였지만, 남편이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었던 덕분에 의학계의 맥락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K씨는, “혼자서 시신 확인 투쟁―그것은 적과의 싸움이라기보다 자신의 견디기 힘든 운명과의 싸움이었다―을 하는 과정에서, 시신 확인을 맡았던 의사 대부분이 법의학 지식이 없는 내과나 외과의 임상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48쪽) 그는 사람들을 조직하여 법의학자들을 파견하도록 JAL과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 그렇게 법의학 전문의 파견 약속을 얻어낸 것이 1985년 12월 1일. 하지만 JAL은 미확인 시신을 모두 화장하겠다고 발표해버렸다. 화장 예정일은 12월 13일. 실제로 화장이 집행된 것은 12월 20일이었다.

‘일본도 그랬듯 한국에서도 사건을 덮는 데 급급했다’는 식의 결론을 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부는 세월호 실종자들을 수색하기 위해 무리할 정도로 잠수부들을 투입하여, 현재 수많은 현장 인력들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비용이 얼마가 들건 세월호를 인양하기로 정부는 공식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일본 정부와 JAL에 비교해보자면, 한국 정부는 훨씬 더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를 둘러싼 논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는 작별에 대한 책이다. 불현듯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되찾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 책을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도 그들처럼 떠나보내면서 우리의 삶을 되찾고, 올바른 정치적 방향을 회복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4281459481&code=116

2015-04-21

[북리뷰]페르세폴리스 1·2-해외파 이란 여성이 본 모국

페르세폴리스 1·2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김대중 옮김 새만화책·2만2천원

현지시간으로 4월 2일, 미국을 필두로 한 국제사회는 이란과의 핵협상을 타결했다. 이란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그간 부과되었던 경제제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했다. 이란과 오랫동안 반목해온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 사우디아라비아뿐 아니라, 중동국가들과 뿌리 깊은 갈등상태인 이스라엘 등도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바야흐로 세계사적 전환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사건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이란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페르세폴리스>를 읽어야 할 이유다. 저자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란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오스트리아 유학을 거쳐, 다시 고국에 돌아간 후 프랑스로 건너가 정착한 여성이다. 그는 아트 슈피겔만의 걸작 그래픽노블 <쥐>를 읽고, ‘나도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이렇게 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고국인 이란이 테러범을 지원하는 나라로만 취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동시에 그 이란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억압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마르잔의 눈높이에서 진행되는 이 그래픽노블은 그가 10살이던 1980년에서 출발한다. 1979년의 이란 혁명으로 인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이란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마르잔이 다니던 프랑스계 남녀공학 학교는 폐교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구식 복장을 입고 자유를 누리던 소녀들은 이제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을 두르고 종교교육을 받아야 한다. 저자의 부모는 모두 유복한 교양인이며,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 해도 자신들의 하나뿐인 딸에게 그 억압을 고스란히 느끼게 할 생각이 전혀 없는 좋은 부모였다. 유달리 반항심이 강하고 재능이 특출난 딸을 혁명과 전쟁의 혼란에서 구출해내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보냈다. 예측 가능하게도, 사춘기 10대 소녀는 유럽에서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자유의 맛을 알아버린 마르잔은 이란에서도 적응할 수 없고 소외되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한다. 경제적 여건과 가정환경 등에서 마르잔 사트라피는 분명 평범한 이란 사람들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독재가 심화되면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질 것을 은연중에 직감한다 한들, 딸을 데리고 3개월간 해외여행을 하는 것은 1980년의 이란 사람들 중 극히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을 것이다.

근본주의는 자유를 어떻게 억압하는가? 특히 그 억압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강요되는가? 오스트리아 유학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이란에 돌아온 마르지는, ‘집을 나서면서 베일을 제대로 썼는지 고민하고 있는 여자는 더 이상 자신의 발언의 자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됨’을 깨닫는다. 서구 친화적이었지만 비밀경찰에 의한 공포정치를 택했던 팔레비 국왕이 물러난 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자, 일군의 여성들은 베일로 머리를 가리지 않을 자유를 위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스카프 아니면 몽둥이”뿐이었고, 남자들 역시 원하건 원치 않건 턱수염을 길러야만 하며 청바지를 입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이 사소한 자유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페르세폴리스>를 통해 우리는 이란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자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4131655111&code=116

2015-04-19

[별별시선]대통령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다. 동시에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한국뿐 아니라 대통령제를 택한 수많은 나라들의 헌법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국왕이 없는 나라를 만들 때 논란이 있었던 대목이다. 누군가가 행정수반이면서 동시에 국가원수라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계몽주의자들과 미국 헌법의 작성자들은 입법권과 사법권을 독립시킴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지만, ‘민주주의임에도 선거로 왕을 뽑는다’는 대통령제의 근본적 결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은 대통령제만의 결함이 아니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국가원수를 선출하거나, 세습된 국왕을 국가원수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21세기에도, 모든 국가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단 한 사람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경우,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이다.

지난 4월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인 바로 그날, 박근혜는 팽목항에 들러 문자 그대로 ‘쓱 둘러본’ 후 다시 차량에 탑승하여 청와대로 발길을 옮겼다. 만약 청와대가 세월호 피해자 및 유족들과 사전에 성의껏 만남을 갖고 일정을 조율했다면, 팽목항 분향소가 임시 폐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고, 먼 길을 달려온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모든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 향을 피우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혹은 박근혜를 ‘모시는’ 청와대는, 그런 결과를 애써 구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단둘이 만났고, ‘국정 현안’을 논의한 후, 중남미 해외 순방에 나섰다.

지금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박근혜는 해외 순방 중이다.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국가의 대표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할 자격을 지닌 단 한 사람이다. 거대한 참사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그날 이후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국민들을 진정시켜야 한다. 국민이 대한민국에 손가락질하면 자신의 왼뺨과 오른뺨을 모두 대주어야 할 사람이다. 설령 사고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대통령의 책임이 전혀 없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대통령은 현재 중남미 순방 중이다. 그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임시로 권한을 대행하게 될 국무총리는 현재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족들은 겹겹이 버스로 차벽을 세워둔 전경들에게 가로막힌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희생자를 추모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시끄러운 경찰의 경고 방송과 물대포뿐이다.

이 국면에서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현장에서 물대포를 같이 맞는 게 아니다. 그 누구도 물대포를 맞지 않고 추모 행사를 평화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정부와의 입장에서 균형자 노릇을 해야 한다. 청와대로 흥분한 시민이 뛰어들어올지 모른다고 겁내는 정부와, 캡사이신 최루액에 눈물 흘리는 국민들이 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과 정치적 명운을 걸고 이들을 다독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진정 역사와 국민 앞에 책임감을 느끼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박근혜가 내팽개치고 가버린 국가원수로서의 역할을 대신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떠났고, 국무총리가 검찰의 수사 대상인 지금, 상징적 군주이며 국민의 구심점인 ‘대통령’ 자리는 사실상 비어 있다. 이럴 때 어떤 정치인이 정부, 경찰, 세월호 유족, 시민들을 설득해 광화문에서 평화적으로 추모 행사가 진행되는 장면을 이끌어낸다고 가정해보자. 국민들은 아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진정한 ‘대통령’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김무성과 유승민, 문재인, 박원순 등에게 모두 열려 있는 정치적 기회다. 세월호 참사 이후 표류하는 대한민국은 그런 선장을, 책임지고 비난을 감수하며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 대통령을 필요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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