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2

[북리뷰] '어버이'는 과연 2만원 때문에 '애국'하는가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홍신문화사, 1만2천원.



그들은 본디 놀림감이었다. 구체적인 액수가 등장하자 더욱 심한 놀림감이 되어버렸다. 어버이연합이 단돈 2만원에 보수 집회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언론 보도 이후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다. 애초부터 그 '어버이'들은 존경 혹은 존중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나, 이제는 '불쌍하되 동정할 가치가 없는' 무언가로 취급되고 있는 모습이다.

아직 의혹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보도된 바에 따르면, 어버이연합에는 국정원의 입김이 닿아 있는 듯하다. 그들은 2010년대의 중요한 사회적 논란의 현장마다 등장하여 시위를 했다. 그리고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일당 2만원'을 주었다.

그러나 이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고찰은 '일당 2만원'에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물론 변변한 소득이 없는 노령층에게 그 돈은 소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진보·개혁 진영에서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동원'하고자 했다면, 일당을 두 배로 쳐준다 한들, 그들이 과연 그렇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을까? 그 '어버이'들은 돈벌이 뿐 아니라 어떤 정신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합'의 일부가 되어 집회 현장으로 향했던 것은 아닐까?

1934년,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 에리히 프롬은 바로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왜 독일 국민들은, 혹은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히틀러를 지지하였는가?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민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무기력한 사회당, 공산당과 달리 나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고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런 '경제적'인 이유가 전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이성적인 이유를 들이대기에는 나치가 내세운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가 너무도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은 진작부터 독일 내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나치는 단 한 번도 자신들의 공격성과 약자 혐오를 감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독일 국민들은, 그런 정당에게 표를 던졌는가?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유에 대한 본유적(本有的)인 욕망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욕구가 없다면, 오늘날 어떤 지도자에 대한 복종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11쪽)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롬은 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사회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냈다. 사회 현상의 원동력이 되는 심리적 요인을 파해치고, 또한 그 심리적 요인을 낳는 사회적 변화를 짚어내는, 대범한 지적 기획이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동시에, 특히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해줄 절대적인 권위를 희구하며,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자 욕망하기도 한다. 전자와 구분짓기 위해 후자를 '권위주의적 성격'이라 이름붙인 프롬은 나치의 집권 당시 독일 국민들이 바로 그 '권위주의적 성격'을 보였음을 분석해냈다.

'어버이'들을 욕하기란 쉽다. 그들에게 값싼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말 힘든 것은 그들이 '왜', '어떻게', 무슨 선택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나치 독일을 읽어냈다. 1940년, 아직 나치가 전쟁에서 패배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다카우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인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나지도 않았던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되었다. 반면 우리는, '어버이'들을 이해하고 있는가.


2016.05.24ㅣ주간경향 117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5-08

[별별시선]트럼프, 샌더스, 대한민국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다. 버나드 샌더스 상원의원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이길 가능성은 없다. 이번 미국 대선은 힐러리 대 트럼프 구도로 전개될 예정이다.

그런데 미국 대선 경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됐다. 도널드 트럼프, 혹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을 비웃거나 비판하는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동시에 ‘버니’ 샌더스를 열렬히 옹호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트럼프는 극우적인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인기몰이를 하는 포퓰리스트이고, 반대로 샌더스는 진정성 있게 진보적인 입장을 고수해온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한쪽을 비판하고 한쪽을 옹호하는 것이 왜 ‘흥미로운’ 현상일까? 왜냐하면 트럼프와 샌더스는 모두 미국인들의 어떠한 정서를 좌우 양쪽에서 대변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두 사람의 인기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문제는 그들이 대변하는 정서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억울함’이다. 1945년 역사학자 이안 브루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0년”부터 최근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미국인들은 억울해하고 있다. 트럼프 열풍, 샌더스 열풍은 동일한 대중적 에너지가 발현된 두 개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민자와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앞세운다. 샌더스는 무슨 질문을 받더라도 ‘그것은 월스트리트가 부를 독점하고 그 밖의 99%를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전혀 만나는 지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뜯어보면 그들이 의존하는 대중적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미국의 방위력에 무임승차한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샌더스는 미국이 일본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체결해 대기업의 배만 불리려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안보건 경제건, 바깥 세계와 담을 쌓자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것을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여긴다. 전 세계의 기업들이 미국 시장 진출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은 자국 영토 외의 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잠자는 거인’이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그 거인은 깨어났고,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가 시작됐으며, 대한민국은 미국이 제공해주는 안보와 그 안보를 바탕으로 한 세계 무역 체계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방위분담금을 전부 대한민국이 지불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발언을 보며 한국인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미국은 국내에서 소비되는 공산품을 중국이나 그 밖의 저임금 국가가 아닌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샌더스의 말은 어떠한가. 전자만큼이나 후자 역시 위험천만한 발언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열강들은 샌더스의 말처럼 자국 경제 보호를 위해 식민지를 중심으로 ‘블록 경제’를 구축해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세계 경제의 파이 자체가 줄어들고 있었기에 열강들 역시 불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고작 한 세기 전의 일이다.

트럼프를 비난하고 샌더스를 응원하는 것은 마치 ‘미국의 좌파’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대부분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들이다. 샌더스가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며 월스트리트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후련한가? 그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억울해하는 미국인들의 고립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은 공포다.


입력 : 2016.05.08 20:56:03 수정 : 2016.05.08 21:02:0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082056035#csidx263ec9d886a4932b31dfcbfe1965d83

2016-04-30

파이어폭스에서 구글 독스 한글 입력 깨지는 문제

지금껏 나를 괴롭히던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파이어폭스에서 구글 드라이브 이용하기'였다. 컴퓨터 환경을 리눅스(주분투 12.04)에서 윈도우10으로 바꿨으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떤 시점부터, 위 문구를 입력하면 다음과 같이 초성 중성 종성이 해체되는 것이었다.

ㅍㅏㅇㅣㅇㅓㅍㅗㄱㅅㅡㅇㅔㅅㅓ ㄱ구ㄱㅡㄹ ㄷ드ㄹㅏㅇㅣㅂㅡ ㅇ이ㅇㅛㅇㅎㅏㄱㅣ

이게 몇 년 동안 해결되지 않아서 혹시 간단한 해법이 있고 나만 모르게 그걸 공유하나 싶었는데 답을 찾았다.

about:config에서 intl.tsf.enable를 찾아서, 기본값인 true를 false로 수정. 이후로는 구글 문서에서 한글 자모가 해체되는 현상이 사라진다.

"intl.tsf.enable"을 검색해보면, 그런 현상이 파폭 41.0부터 생겼지만 43.0부터는 해결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구글 문서는 파이어폭스의 버전이 올라가도 같은 문제를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임시방편으로 오래 묵은 문제를, 미봉책이지만 아무튼 해결하였으므로, 기록해둔다.

2016-04-28

[북리뷰] 시신이 사라져도 사람은 남는다

장성택의 길
라종일, 알마, 1만6천원


김정일이 지배하던 시절 그는 명실상부한 북한의 2인자였다. 3대 세습이 시작되자 감히 1인자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2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2013년 12월 12일 김정은은 전격적으로 장성택을 숙청해버렸다. 4신 기관총을 난사하고 화염방사기로 불태워버린 탓에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시신까지 말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장성택이 이 세상에서 남긴 마지막 메시지라곤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 현장에서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남겨진 두 토막으로 부러진 볼펜 조각뿐이었다."(267쪽)

이 죽음이 너무도 황망한 탓이었을까. 그날 이후 장성택과 그를 숙청한 김정은은 가십 혹은 농담의 대상으로 소비되고 있다. 김정은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젊은이들은 SNS를 통해, 장성택과 연배가 비슷한 중장년층은 종편을 통해, '고모부를 살해한 조카'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곱씹는다. 북한을 무조건 악마화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나니, 이제는 덮어놓고 일단 희화화부터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듯하다.

<장성택의 길>은 사뭇 다르다. 북한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독재국가에 적용될 수 있을만한 원칙을 놓고 북한을 바라본다. 다른 나라의 독재자들, 다른 나라의 권력 주변인들의 행동 패턴을 북한에 그대로 적용해본다. 그렇게 라종일은 김정은이 전면에 등장하자마자 2년 후 장성택이 숙청당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어느 권력 체제에서나 2인자의 위치는 매우 미묘하게 곤란한 것일 수 있다. 특히 권력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 그리고 권력 승계에 관한 공개적인 규칙이 결여된 체제인 경우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당시 장성택이 처한 상황이야말로 그 전형적인 유형이었다. 거의 교과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나는 생각했다.(10쪽)

"경제적인 자원 분배를 둘러싼 권력 투쟁의 결과였다거나, 혹은 장성택이 김정은과 달리 핵과 경제의 이른바 병진노선에 반대하고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등"(11쪽), 그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렇게 언론은 점점 더 선정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하지만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2인자였기 때문이다. 라종일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쉬운 답, 하지만 정답일 수밖에 없는 답을 제시한 후, 다른 이들이 바라보지 않았던 곳을 들여다본다. 장성택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쩌다가 그러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으며, 어째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권력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는가? "몇 가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세간에 알려진"(14쪽) 사실들을 모으고, 신분을 밝히기 꺼리는 "자문인"들로부터 귀중한 자료를 덧붙여, 장성택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전기로 엮어냈다. "구하기 어려운, 빈약한 단편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처신 그리고 특히 그의 내면세계를 재구성하고, 이것을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15쪽)어낸 것이다.

<장성택의 길>은 장성택이라는 북한의 핵심 인물을 온전히 '사람'으로 그려내고, 이해하고자 노력한 결과물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1인 독재체제의 잔인하고 부조리한 측면까지 일말의 악마화나 희화화 없이 바라볼 수 있다.

4월 27일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라종일은 "시신을 없앨 수는 있어도 사람을 없앨 수는 없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지워져버린 사람을 기억의 힘으로 되살리면 권력의 잔혹한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이 북한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김형욱, 그 외 수많은 의문사 희생자들을 떠올려보자. "과거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272쪽)


2016-04-23

아시아에서의 낙태 강요와 여성 인권

아시아와 서구를 비교해보면 아시아에서의 낙태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와 서유럽에서 낙태 합법화는 보통 낙태 건수의 감소로 이어진다. 이것은 보기만큼 역설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회에서 낙태법을 완화할 때는 피임도 함께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와 아울러 애당초 임신하지 않을 권리가 대두된다. 하지만 가족계획 정책이 여성의 요구에 대한 배려 없이 수립되고 낙태가 피임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속성 인구 조절 방법으로 도입된 아시아와 동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합법적 낙태는 더 많은 낙태를 의미했다. 한국여성개발원의 연구원 변화순은 "가족계획정책에는 성 인지적 관점(남성과 여성에게 미칠 영향을 중심으로 개념과 정책을 검토하는 관점--옮긴이)이 빠져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여성의 몸은 도구죠. 그래서 우리는 약 대신 낙태를 이용합니다"라고 말한다.[208쪽] 
마라 비슨달, 박우정 옮김, 『남성 과잉 사회』(서울: 현암사, 2013)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젠더사이드'는, 여성의 인권 신장 지표로 흔히 인용되곤 하는 '그 낙태'와, 의학적으로는 비슷할지 몰라도 사회학적으로는 굉장히 다른 사건이다. 그 점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글쎄, 일상생활이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