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8

[별별시선]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한 장면을 펼쳐보자. 백정인 꺽정이는 양반인 덕순이와 죽이 좀 맞는 편이었다. 하지만 서로 존대와 하대를 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일 임꺽정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존대와 하대에 대해 논쟁이 오가던 중, 머리 깎고 병해대사가 된 갖바치 선생이 꺽정이의 성정을 좀 다스려 보려 한다. “우리말에 층하가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겠지. 그렇지만 어른 아이는 고사하고 양반이니 상사람이니 차별이 있는 바에야 말이 자연 그렇게 될 것 아닌가.”

계급 차별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꺽정이의 반론에 대해 병해대사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응수한다. “벌써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에 차별이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임꺽정이 아니다. “못쓸 차별을 없애려면 영을 내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설령 영을 내린다 한들 그 차별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겠는가? 그러자 결국 임꺽정은 본인의 명성에 걸맞은 대답을 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면 될 것 아니오.” 병해대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대화는 마무리된다.

이 대화에서 임꺽정과 병해대사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 사이에 차별이 없다. 그게 바로 민주공화국의 본질이다.

우리 대한국민은 모두 같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 차별적 특권 계급의 존재는 용인되지 않고, 모든 이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누리며 동시에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할 의무를 진다. 그리고 그 법은 국민의 대표 기관인 입법부에서 만들고, 행정부에서 실행에 옮기며, 사법부를 통해 갈등을 법적으로 해결하도록 되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은 결국 동일하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결합된 법치주의의 핵심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박근혜 게이트는 왜 문제인가? ‘민주적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는 믿음을 뒤흔들었다는 점이 가장 심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가정을 깨뜨렸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 사건이 아니다. ‘선출된 권력’ 박근혜의 뒤에 ‘선출될 생각도 없었던 권력’인 최순실 일당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설령 최순실이 ‘착한 비선 실세’였다고 해도 사안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국민은 박근혜를 뽑았지 최순실을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다. 그러므로 최순실이 기밀로 취급되는 대통령 연설을 주무르고, 온갖 인사에 개입한 것은, 그 자체가 민주공화국의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는 법의 지배를 ‘당하는’,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복종’하는 임꺽정 같은 신분사회의 피지배계층이 아니다. 우리는 울화가 터진 꺽정이처럼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는 식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헌법, 법률, 조례, 규칙 등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움직이고, 필요하다면 유권자를 대의하는 기관인 의회에서 법규를 바꾸거나 새로 만든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국민의 뜻이 아니라 ‘비선 실세’의 뜻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으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그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은 그러므로 혁명이 아니다.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적 법치주의의 근본 원리가 온전히 작동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민란’이나 ‘혁명’보다 급진적인 사건이다. 드디어 우리는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입력 : 2016.12.18 20:37:01 수정 : 2016.12.18 20:43:39

2016-12-13

[북리뷰] 박근혜를 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조성주 지음·후마니타스·9000원

광장에는 논쟁이 피어난다. 11월 26일 제5차 촛불문화제 무대에 오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왕년의 '악동' 힙합 그룹 DJ DOC를 둘러싼 논란이 그것이다. "수취인불명"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 박근혜를 '미스박'이라 칭할 뿐 아니라, '문고리 삼인방'에 대해서는 국민에겐 사과없이 fuck그네만 / 챙겨 양심팔아 돈을 땡겨"라는 식의 원색적인 욕설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미스박'이라는 표현이 여성비하적이라는 것을 굳이 설명해야만 하는가? 놀랍게도 적잖은 사람들, 특히 남성들은 목청높여 '상대가 대통령이니까 괜찮다'느니, '원래 '미스'라는 말은 존칭의 의미로 쓰인다'느니,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을 늘어놓았다. 조성주의 책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을 펼쳐들 때다.

조성주는 칼 세이건을 읽고 천문학자의 꿈을 꿨던, 하지만 막상 천문학과에 진학해보니 자신의 관심사는 먼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있음을 깨달은 청년 정치인이다. 그는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3위를 기록하며 많은 이들에게 적잖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 그가 2015년 정치발전소에서 강연한 내용을 묶어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렇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보다 '앞으로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그 시기에 필자의 고민을 많이 정리해준 책이 바로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었다."(9쪽)

조성주의 강의에 귀를 기울여보자. "알린스키가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폭력 사태였다."(38쪽) 노동조합, 이민자 중하층 계층, 지역사회 운동가, 흑인 민권운동가, 반전 운동가 등 한데 묶기 어려운 진보 세력을 규합해낸 로버트 케네디가, 그의 형 존 F. 케네디처럼 암살당하고 난 후 치러진 전당대회였다. 충격과 좌절에 빠진 급진주의자들은 폭력 혁명 노선에 경도되거나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때문에 알린스키는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통해, 실망하고 좌절한 젊은이들에게 정치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끈질기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자고 설득하고 용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42쪽)

알린스키의 입장은 이상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철저한 현실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마치 저 먼 곳의 수평선같은 이상으로서의 진보를 제시하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근접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룰에 맞춰 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알린스키의 투쟁론은 '당위로서의 정치'가 아닌 '윤리로서의 정치'를 제시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도 맞닿아 있다는 것이 조성주의 설명이다.

알린스키의, 혹은 알린스키를 사숙한 조성주의 현실주의는 그러나 '윤리적 기준을 내던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적 기준마저도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 인식하고 궁극적으로는 지켜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조성주는 한탄한다. "알린스키가 50여 년 전에 지적한 미국의 모습은 어쩐지 2015년 한국 진보 진영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닭그네' '쥐새끼' '견찰' '색검' 따위의 단어는 풍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여성에 대한 비하를 서슴치 않는 경우도 많다."(67쪽)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증오의 표출이 우리 편이 승리할 가능성을 높이거나 단결을 강화해 주는 것도 아니"(67쪽)라는 것을 말이다.

'쥐박이'라고 이명박을 욕했고,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이제 박근혜를 욕하지 않으면서 이겨내기 위해, 알린스키의 실용주의로 맞서야 한다.

2016.12.13ㅣ주간경향 1205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12061009171&code=116

2016-12-12

페미니즘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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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공부, 이럴 거면 하지 마라


요즘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남자들이 늘어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아주 원론적으로 보자면 누가 됐건 자신이 모르던 것을 배우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남자'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보다 좀 더 복잡한 맥락 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남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책을 집어든 사람, 특히 남자 독자라면, 아마도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책에 "페미니즘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제목을 단 글이 한 꼭지 실려있다는 것은 일종의 독자 기만, 사기, 배신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본인이 남자가 아니지만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던, 혹은 내용을 검토해본 후 자신이 아는 다른 남자에게 권해주고자 하는 여자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몇 가지 조건이 먼저 갖춰지지 않는 한,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 글은 그 몇 가지 조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늘과 쑥, 그리고 페미니즘


단군 신화를 떠올려보자. 환웅은 일단 호랑이와 곰에게 마늘과 쑥을 100일간 먹인 후, 그 중 그 고통의 시간을 참고 견뎌낸 곰이 웅녀로 변신하자 결혼을 했다. '있는 그대로의 호랑이', '꾸밈과 가식 없는 곰'은 포용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해도 되는 사람인가? 남자인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만큼 최소한의 성숙함과 자의식을 갖추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된다면, 이제 마늘과 쑥을 먹어보자.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하는 여성들이 무언가에 대해 설명할 때,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은 후 자연스러운 태도로 다음 문장을 발화하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꼭 "아, 그렇구나"가 아니어도 된다. 상대가 손윗사람이면 적당한 존댓말 표현으로 바꾸고, 손아랫사람이면 정중한 느낌을 잃지 않는 평어체로 바꿔서 말해보자. 핵심은 상대방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동의하는 것이다(단, 학교 선생님이나 어머니, 할머니처럼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기만 해도 상대방의 말을 고분고분 듣게 되는 상대는 논외로 한다). 아니, 네 말이 맞긴 하지만, 근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말야,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같은 소리를 절대 하지 않고 '여자의 말'에 동의하는 것. 이것이 마늘이다. 100일간 먹어보도록 하자.

장난하는 게 아니다. 많은 남자들이 이 관문을 넘지 못한다. 상대가 여성임을 본인이 알고 있을 경우, 그 상대방의 지적 수준이나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 등과 무관하게, 남자는 자기가 설명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그것을 전문 용어로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고 부른다. 맨스플레인을 끊고 여자인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 그것이 페미니즘을 공부할 자격을 얻기 위한 첫 단계인 것이다.


100일간 맨스플레인 끊어보기


여자들의 말을 끊지 말라고? 그게 그렇게 대단한 문제란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페미니즘 공부의 첫 단추일 뿐 아니라, 한 사람의 '한국 남자'가 보편적 차원에서의 '사람'으로 진화하기 위한 첫 걸음이기도 하다. 여자들의 말을 끊는 남자,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얕잡아보면서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맨스플레인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는 최소한 빨간색 초록색 신호등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맨스플레인이란 남자를 뜻하는 man과 설명한다는 뜻의 explain을 합성한 것으로, 『옥스포드 사전』의 온라인판에 정식으로 수록되어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리베카 솔닛의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표제작인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영감을 받아 태어난 그 단어는, 일상화된 여성혐오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다. 솔닛의 책을 펼쳐보자.

그는 자신이 파티에서 겪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라는 19세기의 사진가가 있다. 달려가는 말의 모습을 연속 촬영한 작업으로 유명한 그는, 사진의 발전 뿐 아니라 영화의 탄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리베카 솔닛은 바로 그 마이브리지에 대한 책을 한 권 썼고, 《뉴욕 타임스》의 서평란에 자신의 책이 소개되어 흐뭇해하던 참에, 친구의 손에 이끌려 그다지 내키지 않는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솔닛은 한 부유하고 나이 많은 남자와 대화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쓴 예닐곱권의 책들이 다룬 주제는 상당히 다채로웠지만, 나는 2003년 그해 여름에 나온 최신작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림자의 강: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기술의 서부시대』(River of Shadows: Eadweard Muybridge and the Technological Wild West)라는 책으로, 시공간의 소멸과 일상의 산업화를 다룬 내용이었다.
내가 마이브리지를 언급하자마자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올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책이 나왔다는 거 압니까?"[1]

그 남자는 솔닛에게 무슨 책을 썼는지 "친구의 일곱살 난 아이에게 플루트를 얼마나 배웠는지 이야기해보라고 구슬리는 사람처럼"[2] 물어보았다. 그런데 자기가 아는 이름인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나오자 곧장 솔닛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당연히 자기가 상대보다 더 잘 안다는 투로, 올해 나온 아주 중요한 책의 존재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문제는 그 책이 바로 솔닛의 책이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솔닛에게 '당신이 쓴 책에 대해 말해보라'고 했으니 말이다. 솔닛이 이야기하는 주제는 자신이 책을 쓴 것들이다. 게다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에 대한 책이 그렇게 자주 출간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올해 나온 아주 중요한 책은 바로 내 앞의 이 여자가 쓴 책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러나 그 남자는 이렇게 상식적인 사고를 전혀 하지 못하고, 속담을 빌어 표현하자면 뻔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고 돼지 앞에서 코를 뒤집고 있었다. 보다 못한 솔닛의 친구가 끼어들어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이 친구입니다'라고 몇 차례 가르쳐 주었지만 그 남자의 뇌는 그 정보의 수용을 단호하게 거부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구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알고 보니 그가 직접 읽은 것은 아니고 몇달 전에 《뉴욕 타임스 북리뷰》에서 서평만 읽었을 뿐인 그 아주 중요한 책의 저자가 나란 사실은 깔끔한 범주들로 분류되는 그의 세상을 몹시 교란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아주 잠깐. 그러고는 이내 다시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여자인 우리는 조신하게도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곳까지 벗어난 뒤에야 웃음을 터뜨렸고, 한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3]

자신의 눈 앞에 바로 그 중요한 책, 본인은 《뉴욕 타임스 북리뷰》에서 서평만 읽었을 뿐인 그 책의 저자가 서 있었고, 그 사실을 알려주기까지 했음에도 그 남자는 끝내 리베카 솔닛을 가르치려 들다가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더 끔찍한 것은 본인이 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소개한 후 솔닛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4]

남자는 무슨 말도 못 하나?


남성 독자의 불만이 들려오는 것 같다. 이 사소한 에피소드와 그로부터 영감을 얻은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냥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이건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전문가가 전문가 앞에서 지식 자랑을 하다가 된통 당하는 그런 이야기일 뿐 성별과는 무관한 일 아닌가?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소개된 후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했다. 이것은 성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 대 무식, 혹은 잘 모르면서 용감한 사람과 잘 알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사람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맨스플레인이란 불필요한 성별 갈등을 부추기는 잘못된 개념일 뿐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남자들은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이 한국에 전래된 후, '우먼스플레인'도 있다는 둥,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남성과 여성 사이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둥, 온갖 볼멘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려 하는 남자들. 여기에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다. 왜냐하면 맨스플레인이란 '남자들은 여자들이 하는 말을 동등한 인간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향해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을 제시할 때, 남자들이 그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려 든다면, 그들은 그러한 반응을 통해 맨스플레인이라는 현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셈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아니 차라리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그런 실수를 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오지 않았다'는 여자들의 항변을 부정하고 드는데, 더 이상 여자들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내가 방금 설명한 내용을 리베카 솔닛의 표현으로 다시 한 번 들어보자.

어떤 남자들은 남자들이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것은 사실 젠더화된 현상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대개 여자들은 지적했다. 여자들이 제 입으로 직접 겪는다고 말한 경험을 기각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우긴다는 점에서, 그 남자들이야말로 내가 그들이 종종 그런다고 말한 바로 그 방식으로 여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셈이라고. (확실히 밝혀두는데, 여자들도 이따금 남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든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젠더 간 엄청난 힘의 격차가 악랄한 형태로 표출된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거니와, 젠더의 사회적 작동방식에 드러나는 거시적 패턴을 반영한 현상도 아니다.)[5]

그러므로 '남자들은 그저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가르치려 든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이 책뿐 아니라 그 어떤 페미니즘 서적도 읽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배움은 불가능하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등 모든 인류의 성현들이 한번씩은 비슷하게라도 이야기한 진리 아닌가. 그런데 적잖은, 어쩌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들이 여자들의 말을 단지 상대방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낮잡아 본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이 과연 '여자들의, 여자들을 위한, 여자들의 사상'인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을까?


"남자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부부싸움 같은데"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 기특한 결심을 한 남자는 반드시 '경청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리고 그 훈련은, 남자로 태어나고 자란 모든 사람이, 평생토록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100일간 먹어야 하는 마늘의 주 성분이다. 여자들의 말을 자르지 않고, 내가 상대보다 잘 알 것이라는 식으로 지레 넘겨짚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것 말이다.

여자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말은 본인의 성별 때문에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여자들은 참고, 포기하고, 스스로 분노를 삭히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여성 억압의 역사이며, 그것은 여성의 발언권에 대한 억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자.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실로 '인간적인 삶'의 거의 모든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우리는 그 집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고 지식을 주고받으며 감정적 교류를 한다.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몸을 부비고 따스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 정도의 교감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충분히 벌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고도로 훈련된 침팬지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인간 외의 그 어떤 동물과도 '할 말이 있으니까 방과 후에 학교 옥상에서 만나자'며 러브레터를 주고받을 수 없다. 언어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고, 특별하게 하며, 그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거의 모든 것이다.

신체 장기 중 하나인 성대를 울려 음성 언어를 전달하는 협소한 행위를 넘어서 '말하다'의 의미를 확장해보면 그 중요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단적인 예로, 투표권이란 무엇인가? 유권자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의사를 말할 수 있는 권리다. 단, 그 말하기의 방식이 객관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바로 그 투표권을 얻기 위해 19세기 말 영국의 서프라제트들은 우체통을 폭파하고 골프장의 잔디를 황산으로 태워 죽였으며 유리창을 깨고 심지어 건물을 폭파하기도 했다. '나는 이 후보를 지지한다'라는, 오늘날 우리에게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그 의사 표현의 권리를 위해 말이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해서 경찰에 신고를 한다고 해보자. 상식적인 경우라면 경찰은 당신의 말을 경청할 것이고, 그 증언에 기반하여 용의자를 특정하고 수사에 착수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남자들'에게는, 이런 '공적인 차원에서의 말하기'가 무시당하고 묵살당하지 않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다.

예컨대 일명 '오원춘 사건'을 떠올려보자. 피해자는 성폭행을 당하는 와중에도 112에 신고하고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정확히 밝혔지만, 전화를 받던 경찰들은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여보세요, 주소 다시 한 번만 알려주세요." "여보세요, 주소가 어떻게 되죠?" 같은 질문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던 경찰들은, 심지어 "아는 사람인데, 남자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부부싸움 같은데"라고 자기들끼리 중얼거리고 있었다. 피해자가 살해당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나는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경찰들은 듣지 않았다. 소쉬르의 구분법을 빌자면, 시니피앙은 전달되었지만 시니피에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인지 똑똑히 알아들었으면서도 그것을 '말'로서 존중하며 인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있고, 살해 위협에 처한 여성의 말은, 사람 말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잘못된 대응이 이루어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 여자가 부부싸움을 하고 있을 뿐인데 경찰에 신고해 '괜한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닌지, 경찰이 의심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했을까?

더 끔찍한 것은 그 경찰들이 전화를 통해 전해오는 폭력적인 상황을 잘 인지하면서도 '부부싸움'을 떠올리고 입 밖에 꺼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고통을 당하는 소리, 가해자가 분노에 차서 내뱉는 소리,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테이프를 찢는 소리 등이 모두 112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극단적 폭력을, 경찰은 '부부싸움'이라고 뭉뚱그리고, 자기들끼리 안심하기 위해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게 '부부싸움'이었다면 어떤 남편이 부인을 살해하거나 심각하게 구타하는 상황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에도 말이다.

세상이 여자들의 말을 쉽사리 묵살하고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건 이런 뜻이다. 강간을 당해서 신고를 해도 '네가 먼저 꼬리친 게 아니냐'고 경찰이 되묻는다. 고장난 보일러를 수리하기 위해 기사를 부르면 '집 주인분 안 계세요?'라고 물어본다. 전화해서 부른 사람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진짜 집 주인'이 아니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택시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상황들은 또 어떠한가. 여자들의 말이 무시당하는 세상은, 여자들의 존재 그 자체가 지워지고 있는 곳, 다시 말해 생명과 안전이 직접적으로 위협당하는 곳이다.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구체적인 여성의 경험들을 엮어 만들어낸 다양한 사고 체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남자가 경험하는 세상과 여자가 살아야 하는 세상은, 때로는 흡사하겠지만 많은 경우 심각하게 다르다. 그러니,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무시해 왔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모든 여자들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어떤 여자들은 112에 허위 신고를 할 것이고, 어떤 여자는 남자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흉계를 꾸밀 수도 있다. 어떤 여자는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어떤 여자는 본의 아니게 횡설수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들의 경우와 달리, 모든 여자들은 자신의 발언이 공적으로, 또 사적으로 평가절하당하고 무시당하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자 하는 남자들은, 일상의 영역에서 여성의 발언을 '일단' 긍정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물론 계약서를 쓴다거나 범죄 피의자를 심문하거나 변호사로서 이혼 소송 당사자와 상담하거나 하는 중이라면,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요구되는 직업적 상황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겠다. 지금 나는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하는 여성들과의 대화 속에서 실천해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숨쉬듯 자연스럽게 누려왔던 '남자인 내가 옳고 여자인 네가 틀렸다'의 기득권을 내려놓아보자.

가령 '아까 택시 타고 오는데 기사 아저씨가 현금으로 계산 안 했다고 욕했어'라고 말하는 주변의 여성에게, '뭐야, 나는 그런 일 겪은 적 없는데, 그건 택시 기사에 대한 너의 편견 아니야?'라는 식으로 되묻거나 쏘아붙이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까지만, 동의하는 표정으로, 대답해보자. 그런 반응을 돌려주는 것만으로도 남자인 당신은 '평범한 남자'와는 사뭇 다른 존재로 취급될 가능성이 크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 그렇구나'라는 담담한 동의의 표현. 상대가 여성일 때, 일단 그렇게 동의하고 공감하는 표현을 하는 남자가 되는 연습. 그렇게 마늘을 먹고 있는 남자라면, 이제 쑥을 먹어볼 차례다.


세상에 뿌려진 폭력만큼


남자인 당신과 어떤 여성이 있다고 해보자. 당신에 대한 그 여성의 인간적 신뢰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지표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만약 그가 당신에게, 본인이 겪었던 성추행이나 성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적어도 지나가는 남자1보다는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종종 SNS를 통해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이 겪었던 성폭력을 이야기하는 경우라거나, 가해자를 고발하기 위해 성폭력 피해를 공개하는 것을 당신이 엿듣는다거나, 그런 경우는 모두 제외한다. 오직 사적인 대화로만 범위를 좁힌다. 남자인 당신은 주변의 여자가 겪었던 성폭력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또 어떤 남자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 주변에는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겪은 사람이 없다'라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남자인 당신에게 본인의 성폭력 경험을 이야기해준 사람이 있는가'라는 것은 굉장히 좋은 지표가 된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단 한 번의 성추행도 당하지 않고, 성차별을 경험해본 적도 없는, 그런 여자는 말하자면 유니콘과도 같다. 어딘가에 있다고도 하지만 그 실체를 목격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리고 내가 아는 여자들이 아는 여자들 중에는, 전혀 없었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는 넓은 의미의 성폭력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여성이 한 명 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임의의 한 남자를 골랐을 때 그 남자 주변의 모든 여자들이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들었던 사례들만 해도 이렇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떤 남자가 '뭐 묻었는데요'라고 해서 자신의 치맛자락을 보니 알 수 없는 흰 액체가 발라져 있었다. 그걸 닦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 남자가 따라들어와서 가슴을 만지며 협박을 했는데 너무 심하게 울었더니 도망갔다. 늦은 밤 주택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큰 길가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자 어떤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쫓아오더니 성폭행을 시도했다. 기타등등…

여자들이, 혹은 여성의 편에 서는 남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여기는 '대다수의 남자'들은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한다. 그건 일부 또라이 범죄자들이 하는 짓 아니냐고, 대체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강간범 취급해서 얻는 게 뭐냐고 화를 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자신들의 겪는 일상적인 젠더 폭력과 사회적 압력에 대해 '어지간한 남자들'에게는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다만 여자들끼리 모였을 때, 그리고 상대가 '명예 남성'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을 때, 이야기가 나오면 그제서야 서로의 고통을 위로할 뿐이다.

남자들은 절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여성들에게는 이것이 '보편적 경험'이다. 여성의 일상에는 폭력과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여성가족부의 연구 용역을 받아 "2013 성폭력 실태조사"를 출간했는데, 그에 따르면 한국의 여성 중 19.5%는 평생 신체적 성폭력, 즉 가벼운 성추행, 심각한 성추행, 강간미수, 강간 중 하나의 범죄를 경험한다. 그렇다면 비신체적 성폭력의 경우는 어떨까? 여성들은 평생 10.1%가 성희롱을, 52.3%가 음란 전화 등에 의한 성폭력을, 36.8%가 성기 노출 목격을, 2.9%가 스토킹을 경험한다.[6]

위에 언급된 수치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미 19.5%, 다시 말해 거의 5명 중 1명이 강간, 강간미수, 성추행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온다. 음란 전화 등 통신 수단을 이용한 성폭력을 겪었다고 응답한 여성은 조사 대상자의 절반이 넘고, 성기를 노출하는 이른바 '바바리맨'을 목격했다는 사람 역시 3분의 1을 넘는다. 이상하게도 이 연구보고서에는 '신체적 혹은 비신체적 성폭력의 평생 경험 빈도'가 나와있지 않다. 이런 저런 수치를 다 합치면 100%를 넘기기 때문에, 즉 신체적이건 비신체적이건 어떤 방식으로건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굳이 그 수치를 제시하지 않은 게 아닐까.

물론 이 조사는 여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3500명의 표본 집단을 선정하여 진행한 것으로, 흔히 말하는 '통계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치가 너무 높아서가 아니라 너무 낮아서 말이다. 가령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이른바 '신안 섬마을 교사 성폭행 사건'이 벌어진 후 자체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0.7%가 교직 생활 중 성희롱·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었다고"[7] 응답했던 것이다.

가장 많은 피해 경험은 술 따르기·마시기 강요(53.6%)였다. 이어 노래방 등 유흥업소에서 춤 강요(40.0%), 언어 성희롱(34.2%), 허벅지나 어깨에 손 올리기 등 신체 접촉(31.9%) 순이었다. 상대적으로 교장·교감 등 관리자들이 많은 권한을 갖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피해 경험이 많았다. 또한 응답자 2.1%는 키스 등 심각한 성추행 피해를 경험했으며, 강간과 강간 미수 등 성폭행 피해 비율도 0.6%(응답자 중 10명)로 나타났다.[8]

2016년 5월 20일, 강남역 공용화장실 살인사건과 10번 출구에서의 추모 열기가 불타오르던 그때, 신촌에서는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가 개최되었다. 필리버스터는 본래 의회에서 의사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무제한 토론을 벌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혹자는 '대체 그게 왜 필리버스터인가? 여자들이 떼로 모여서 하소연 할 뿐이지 않은가?'라고 빈정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와 달랐다.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졌던 그 살인사건을 여성혐오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우발적'인 '묻지마 살인'으로 치부하고자 하는 사회적 의제 날치기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해의 목표물이 될 여자를 일부러 기다렸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했고, 피의자의 입에서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증오심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경찰은 꿋꿋하게 '묻지마 살인'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상당수의 언론은 반성도 고민도 없이 그것을 받아적고 있었다. 여성혐오인가, '묻지마 살인'인가? 후자를 주장하는 남성 기득권 세력들의 사회적 의제 날치기가 진행중이었다. 그에 맞서는 여성들의 발언은 명실상부한 필리버스터였던 것이다.

언론에 보도된 사례들만 다시 인용해보자. "지하철 여자화장실 옆칸에 한 남성이 화장실 바닥으로 몸을 눕혀 보고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친 뒤 한동안 지하철 화장실을 못 갔다."[9] "새벽 1시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술에 취해 이상한 소리를 연거푸 내뱉는 낯선 남자가 두려웠다."[10] "12세 때 학원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상가 공용화장실에 갔다가 술 냄새가 나는 남성 두 명이 흉기로 위협해 그 일(성폭행)을 당했다."[11]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이렇게 범죄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확실한 이야기만 나왔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겪는 수많은 성차별, 성'희롱', 위계에 의한 성적 행위 강요, 감정노동, 일상적 차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수의 남자들이 연단에 올라 '나는 남자인데 여자들의 세상이 이런 줄 몰랐다'고 고백하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여성혐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오직 여자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할 차별과 폭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을 이야기였을지 모르지만, 현장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가 복받쳐올라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여자들의 세상과 남자들의 세상은 너무도 다르다. 그리고 여자들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범인의 성별은 대부분 남성이며, 그 남자들은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에 강간하고 성추행하며 '농담'을 지껄이고 있다.


악어 가죽 속의 남자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을 읽고 있는 남자인 당신이 다짜고짜 어떤 여자에게 '네가 겪은 성폭력의 경험을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까지 당신이 여자들로부터 직접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은, 미안하지만, 그만큼 당신이 여자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남자'로 인정받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니 말이다. 전화번호 알려달라고 하는 것도 짜증나고 때로는 두려운데, 성폭력 경험을 들려달라고 어떤 남자가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폭력의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여성이 먼저 말할 때까지, 남자는 상대에게 성폭력의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남자는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할 자격도 없고 알 권리도 없으니 그냥 여자들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옳다고 하고 입 다물고 살라는 뜻인가? 이런 식으로 발끈하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책을 덮길 바란다. 친구에게 선물로 주거나 중고 서점에 팔아도 좋다. 페미니즘을, 아니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기본적 태도가 갖춰지지 않은 남자가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만을 쌓는다면 그것은 여성들에게 더욱 해로운 결과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편에 서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고, 그래서 페미니즘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남자, 맨스플레인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맨스플레인하는 다른 남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하기 위해 공부하고 싶어하는 남자라면, 다 떠나서 일단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토마 마티외, 맹슬기 옮김, 『악어 프로젝트』(서울: 푸른지식, 2016)

프랑스의 그래픽 아티스트 토마 마티외는 자신의 친구들 중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일상적 성폭력의 사례를 수집했다. 인터뷰를 통해 모은 사례들을 만화로 그려내면서, 그는 남자들을 초록색의 악어로 형상화하고, 여성들에게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남겨주었다. 요컨대 남자는 모두 잠재적 가해자인 악어로 그려져 있고, 그 남자들이 뱉는 침, 싸고 도망가는 정액, 불쾌한 손길 등등도 모두 마치 방사능 폐기물이라도 되는 양 초록색으로 그려진다.

2015년 이후 국내 출판계에 페미니즘 열풍이 불고 있고, 다양한 서적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현학적이고 복잡한 이론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고, 또 어떤 책은 남자들의 긍정적 변화와 발전을 촉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악어 프로젝트』처럼 철두철미하게 여자들이 겪는 세상, 모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세상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다룬 책은 없다.

만약 남자인 당신이 『악어 프로젝트』를 읽어봤는데 너무 불쾌하고 화가 나서 그 책장을 끝까지 넘길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이 책도 끝까지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여자들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평생 한 차례 이상의 강간, 강간미수, 성추행을 당한다는 사실을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렇기에 여자들은 남자들을 '잠재적 강간범' 취급해도 우리 남자들은 그저 부끄러워하는 것 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페미니즘 '공부'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당신은 계몽과 설득의 대상이 되기에는 기본적인 공감력이 모자라다. 곰과 호랑이가 변신하지 않는다면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치 단군 신화가 그랬던 것처럼, 『악어 프로젝트』 역시 일종의 변신으로 마무리된다. 한 악어가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악어 가죽을 벗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 책의 지향점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함으로써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임으로써 변화의 첫 단추를 간신히 꿸 수 있을 따름이다.


마늘과 쑥, 그리고 사람


남자인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혹은 알면서도, 여성들의 발언을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저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이 맨스플레인의 주체였음을 알아차리고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한국 남자'라는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 위해 먹어야 할 마늘이다.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남자들의 그것과 달리 강간과 성폭력과 성희롱과 불쾌한 '농담'으로 가득차 있음을 이해하고, 여성들이 그런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를 얻는 남자가 되는 것, 그 쑥을 먹지 않는 한 '한국 남자'라는 곰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언어를 쓰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여자인 그들의 세상과 남자인 '우리들'의 세상은 그토록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가 페미니즘 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을 우리는 아래와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여자들의 세상과 남자들의 세상은 너무도 다르다. 둘째, 여자들의 세상이 엉망진창인 것은 나와 같은 종족인 남자들이 저지르는 폭력과 억압 때문이다. 셋째, 나는 한 사람의 남자로서, 나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기득권에 속하며 따라서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고통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페미니즘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일단 페미니즘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여자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많은 경우 남자인 나보다 옳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동시에, 그 여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을 싫어할 수도 있고 당신의 데이트 거절이나 메시지를 무시할 수도 있으며,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며, 진심으로 남자를 혐오할 수도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남자인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모든 장점만큼이나 단점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라.

여자도 사람이다. 이 당위적 명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남자도 사람이다. 우리를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인 것이다.



[1] 리베카 솔닛, 김명남 옮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12쪽.
[2] 같은 곳.
[3] 같은 책, 14쪽.
[4] 같은 책, 15쪽.
[5] 같은 책, 27쪽.
[6] 황정임, 윤덕경, 이미정, 김영란, 주재선, 김동식, 이인선, 정수연, 김현정. “2013 성폭력 실태조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3년 12월 15일. 연구보고 2013-49. 125쪽 참고.
[7] 배문규, "여교사 70% 성폭력 경험했다···“가해자는 주변사람”", 경향신문, 2016년 6월 15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151130001&code=940100 
[8] 같은 곳.
[9] 이승준, 박수지, “너무나 오싹했지” 꾹꾹 눌렀던 경험 털어놓다…옆집 여성들의 ‘필리버스터’, 한겨레, 2016년 5월 20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44765.html 
[10] 같은 곳.
[11] 신혜정, "“폭행 당하고도 내 잘못인 줄 알았다” 눈물의 증언 봇물", 한국일보, 2016년 5월 21일. http://www.hankookilbo.com/v/9c41cf18938145f9bc648906ab418042 

2016-12-11

20161204 - 20161210: 이탈리아 레퍼렌덤 실패,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앙겔라 메르켈의 연설

* 12월 4일, 이탈리아에서 치러진 국민투표가 부결되었다. 상원과 하원 동수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의 양원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상원의 숫자를 3분의 1로 줄이고, 총리가 갖는 권한을 대폭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투표에서, 마테오 렌치 총리가 이끄는 국민투표 찬성파는 참패를 당했다. 투표 결과는 찬성 40%, 반대 60%. 무려 20%p 차이가 나는 엄청난 패배다.

이탈리아는 하나의 국민국가를 이루고 있지만 대단히 강한 지역색과 역사와 문화를 가진 지방들의 연합체이다.  그렇게 분열적인 문화적 바탕 위에, 상원과 하원이 동수로 구성되어 법안 발의권과 부결권을 동시에 갖고 있다보니,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간 63차례나 정권이 바뀌는 극도로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인 정치 체계가 유지되어 왔다. 마테오 렌치 총리는 그러한 구조를 개혁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결국은 자신이 가장 큰 권력을 쥐게 되는 개헌안을 추진했고, 실패했다.

문제는 반대파를 주도한 것이 이탈리아에서 포퓰리즘을 주도하고 있는 오성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번 승리를 계기로 오성운동이 더 큰 영향력을 얻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유럽연합으로부터의 탈퇴를 이끌어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었다.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투표에 참가했으며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집계되었다. 오후 3시부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롭게 진행된 탄핵소추의결서가 오후 5시 넘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되면서, 현재 그의 국가원수 및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권한은 정지되어 있는 상태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그의 탄핵을 지지하던 70% 이상의 한국인들은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음식 쿠폰 등을 선물하고, 탄핵안 가결을 기념하여 외식을 하러 가는 등, 그야말로 '창조경제'의 한마당이 펼쳐졌다.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지지층의 반감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표정 관리에 들어갔으며, 이후 펼쳐질 조기 대선 정국을 준비하고 있다.

만약 12월 9일이 아니라 12월 2일에 표결을 했다면, 비박계가 마음을 굳히고 돌아올 시간이 없었을 것이므로, 탄핵안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인들의 정신 세계에 깊고도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 분명하다. 이 글에서 설명했다시피 이 결과는 박지원이라는 한 정치인의 과감한 희생적 결단과, 그렇게 얻어진 시간동안 정치권을 압박해낸 유권자들의 합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한 고비를 넘겼다.


* 4선에 도전하는 독일 총리 앙겔레 메르켈이 '문화적 관용주의'의 종언을 선포했다. 12월 6일, 그는 기독민주당 당원 대회에서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독일 내의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2015년 전격적으로 시리아 난민들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89만명이 한꺼번에 입국하도록 하였던 메르켈이기에 이러한 결정은 큰 변화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서구권을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적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다. 이전과 같은 이민자 포용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한 다음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프랑스의 중도 우파가 전신을 덮는 수영복인 '부르키니'를 금지했던 것처럼, 유럽의 기존 우파들은 스스로 타협 가능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양보하고 있는 셈이다.

종교의 자유는 다른 자유와 마찬가지로 상황에 따라 합리적 근거 및 절차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 여성들에게 스스로 원하는 옷을 입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과연 메르켈의 이러한, 극우 세력을 향한 유화적 움직임이, 다른 자유의 침해를 최소화하며 극우파의 부상을 억누를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2016-12-10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형량 계산기' 김기춘 vs. '표결 계산기' 박지원

'성지 순례'를 위한 기사를 먼저 하나 소개해보겠다. 11월 27일,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오늘 아침까지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과 접촉했다"며 "탄핵 공조자들이 60명을 훨씬 넘었다는 통화를 했다. 탄핵안은 확실히 가결된다"고 강조했다."

이미 탄핵안이 통과된 이 시점에 우리는 박지원의 표 계산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 1명 기권, 234명 찬성, 56명 반대, 7명 무효. 새누리당의 이탈표는 총 62명으로 예상된다. 박지원이 옳았다. 그의 표 계산이 정확하게 맞았다. 11월 27일 현재, 그 시점까지만 해도 탄핵은 예정된 수순처럼 보였다.

그리고 11월 28일, 박지원은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두고 "대한민국 법 미꾸라지이자 즉석 형량 계산기"라며 구속수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의 지시로 차은택을 만났다고 언론에 밝힌 그가, 본인에게 돌아올 죄책을 박근혜에게 덮어씌우고 자기만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정국을 뒤흔들었다. 박근혜 본인을 향한 모든 혐의를 부인하면서, 본인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그의 말은, 탄핵을 향해 치닫던 비박계의 기세를 꺾고 주저앉히는 것이었다. 이 묘수를 박근혜 본인이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특히 형사법체계에 통달한 누군가가 대신 내준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굉장한 한 수였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탄핵의 칼날이 순식간에 무뎌졌기 때문이다.

현실을 현실로서 좀 받아들이고 논의를 시작하자. 야3당의 의석을 전부 더해도 167석이다. 탄핵에는 200표가 필요하다. 33표를 어디에선가 가져와야 하는데, 그 '어딘가'는 당연히 새누리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11월 29일의 3차 대국민담화는 그 33표를 가진 새누리당 비박계를 뒤흔들었다. 그대로 탄핵 절차가 진행된다면, 과반수 의석을 가진 야3당에 의해 발의는 가능하지만, 200표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인'이라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박지원이 택한 경로는 당연히 '이길 수 있는 확률을 최대화'하는 것이었다. 1일에 발의하고 2일에 표결하기로 했던 일정을 수정하여, 9일에 표결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일주일 미룬다고 해서 백퍼센트 탄핵안이 가결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야 없다. 하지만 그렇게 확보된 일주일동안 어떤 변수가 등장하여 비박계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얻으려면 일단 탄핵안 발의를 멈추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민주당, 혹은 민주당의 주류 세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가 터져나온 후에도, 우상호 원내대표는 탄핵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비박과 친박을 가리지 않고 '새누리당'을 향해 강경한 비난의 어조를 높이면서, 그들의 표를 얻어내기 위한 다른 방안을 마련하지는 않은 채, 그냥 표결을 하자고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가결이 아니라 부결을 향해 달려가는 질주와도 같았다.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가? 이것은 3000만명이 아니라 300명이 하는 투표다. 누가 무슨 표를 던질지 투표 개시 전에 미리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한다. 그 모든 정치적 불이익과 야당 강경파들의 야유를 무릅쓰고 양심적인 비박계 및 새누리당 탈당파 33명이 표를 던져주기를 염원하면서 2일에 탄핵안을 표결한다는 것은, 낙하산을 매지 않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묻지마 표결 강행이었을 뿐이다.

다행히도 '이쪽'에는 '형량 계산기'에 맞설 수 있는 '표결 계산기'가 있었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난과 인신공격, 혐오발언 등에도 굴하지 않고 9일 표결안을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벌었고, 그동안 탄핵 정국을 둘러싼 '게임의 법칙'이 바뀌어, 새누리당에서 62명의 이탈표가 나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만약 2일에 그대로 표결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건 박근혜, 혹은 '형량 계산기' 김기춘의 뜻대로 정치권이 놀아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야권 일각에서는 그렇게 '망하는' 결과가 벌어졌을 때, 국민들이 분노하여 '촛불 민심'이 더욱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는 탄핵당하지 않고, 하야하지도 않고, 내년 대선까지 쭉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안정국을 강화해나갔을 것이다. 국민들은 광장에서 경찰에게 쫓기고, 탄압당하고, 얻어맞고,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져간다. 그렇게 쌓이는 불만의 목소리를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세력은 미래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박근혜에 대한 국민적 반감에 기대어 손쉬운 대선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12월 1일까지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치권이 갇혀 있었던 '죄수의 딜레마'

'죄수의 딜레마'라는 개념을 꺼내는 것도 요즘은 좀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이 그랬다. 탄핵안이 부결되어도 상관 없다는 민주당 주류의 입장은 진정 솔직한 것이었고, 또 합리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민주당 주류, 즉 친 문재인 계열은, 문재인을 제외한 다른 대선 주자가 부상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탄핵안 가결'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현재의 탄핵 정국을 2004년의 그것과 1:1로 대조하는 사람들이 현 정국의 초반에 탄핵 절차 진행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 탄핵과 이 탄핵은 완전히 다르다. 여당을 탈당하고 미니 여당을 차린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박근혜는 아직도 거대 여당 소속 대통령이며, 노무현의 선거법 위반과 박근혜의 온갖 비리 혐의는 애초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대통령의 온갖 비리와 국정농단 등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이 탄핵에 동참하는 것은, 일종의 속죄 의식으로 작동한다. 박근혜를 탄핵함으로써 비박계,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구 친이계는 박근혜와의 선긋기에 성공하고 오명을 조금이나마 벗을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근소한 차이로 탄핵에 성공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비박계가 심지어 새누리당을 탈당하지도 않은 채로 압도적인 탄핵 찬성표를 끌어올 수 있다면, 그들은 새누리당 내의 헤게모니 투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것이고, 새누리당의 자산을 잃지 않은 채 조기대선 국면에 임할 수 있다.

대체 왜 민주당의 주류는 탄핵 정국에서 계속 한 발씩 늦게 움직이고, 불필요한 돌발 행동과 강경 발언으로 비박계를 위축시키고, 심지어 12월 3일 촛불집회에서까지 '탄핵'이 아니라 '하야'를 외치고 있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지렛대삼아 비박계가 부활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적은 표 차이로 탄핵이 가결되어 도덕적 면죄부를 얻었지만 새누리당 내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게 된 비박계가 집단 탈당하여 '제3지대'를 형성하는 것도 원치 않고, 지금처럼 비박계가 세력을 과시하며 새누리당을 재접수하는 것도 민주당 주류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그저 '지금처럼', 인기 없는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대선이 치뤄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므로 탄핵안은 안타깝게 발의되지 못하거나, 발의된 후에 부결되어야 하거나, 부결되어도 상관 없다.

국민의당의 셈법은 좀 더 복잡했다. 가결되되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어, 친박과 비박의 싸움이 좀 더 커지고, 이른바 '제3지대'가 넓어질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속죄 의식을 제대로 치렀지만 그 결과 갈 곳을 잃어버린 구 새누리당 의원들을 하나씩 포섭해가며 '합리적 중도'로서 외연을 넓힌다거나, 아니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안철수 외의 다른 대선 주자를 수용할 여지를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비박계가 아예 새누리당 내에서 이겨버리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므로 그다지 이익을 볼 수가 없다. 반면 탄핵안을 발의하지만 실패한다면 애초부터 탄핵론을 펼쳐왔던 안철수의 입지가 더욱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반드시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죄수의 딜레마가 발생했다. 국민의당은 일단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할 상황이지만, 너무 많은 표 차로 탄핵에 성공하면 그렇게까지 즐거운 상황은 되지 못한다. 반면 민주당은 지지층을 향한 강경 발언과는 별도로, 탄핵을 통해 비박계가 속죄하는 것도 원치 않으므로, 우상호 원내대표의 말마따나 탄핵이 부결되어도 상관 없는 쪽이다. 비박계는 탄핵을 하면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성공한다면 최대한의 표를 이끌어내어서 승리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각 정당이 얻게 되는 보상의 상대적 선호도를 -1, 0, 1로 놓고 표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민주당국민의당비박계
큰 표차001
작은 표차-110
부결1-1-1

민주당 입장에서는 작은 표차로 이기는 것보다는 부결되는 게 훨씬 낫다(2점 차이). 국민의당은 작은 표차건 큰 표차건 일단 탄핵안을 가결시켜야 1점의 손해를 안 볼 상황이므로, 새누리당이 4월 퇴진을 당론으로 정하기까지 한 상황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비박계는 작은 표차건 큰 표차건 탄핵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아예 참여를 하지 말아야 마이너스 1점의 손해를 피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부결되는 것이 이득인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죄수의 딜레마였다. 무기명투표를 이용해 민주당에서 이탈표가 나오면 그 비난은 민주당이 아니라 비박계, 더 나아가 국민의당으로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12월 1일과 2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보수 성향의 일간지 뿐 아니라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진보 계열 언론에서도 행간에 녹여 계속 언급하던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정작 간절하게 탄핵의 성사를 원하는 쪽은 국민의당과 비박계이지만, 그들은 민주당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다. 반면 민주당은 굳이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할 간절한 이유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급격한 여론 변화와 보상 매트릭스 변동

12월 3일의 촛불시위 이전까지의 계산이 그랬다. 그 후 지역구 의원들에게 쏟아진 전화, 문자, 메신저 등 또한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욱 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반성을 해야 한다. 총선이 무려 3년이나 남았고, 다음 총선은 다음 총선의 이슈를 가지고 진행될 것이므로, 국회의원들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 전방위적으로 쏟아지는 여론의 압박이 정치권의 보상 매트릭스를 바꿔놓았다.

일단 민주당은 더 이상 탄핵 여론의 발목을 잡으며 한 템포 늦게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온라인 여론전에 힘입어 직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었으나, 문제는 문재인의 지지율이었다. 성난 탄핵 찬성 여론을 이재명이 모두 쓸어가면서, 물론 경선을 하면 어떻게든 문재인이 이길 테지만, 불안감이 커진 것이다. 탄핵안이 부결되고 '촛불정국'이 이어진다면 문재인이 아니라 이재명만 좋은 일이 되어버린다. 탄핵에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국민의당과 박지원은 2일로 예정된 탄핵 투표를 9일로 미루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주장을 해놓고도, 탄핵안을 통과시키라는 국민 여론의 불만을 한 몸에 떠안았다. 부결되고 나면 대선 국면을 거치면서 국민의당의 존속 자체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변함이 없지만 손해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여기서 빠진 변수가 있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4월 30일 18:00를 기해 나는 모든 권한을 여야가 합의한 총리에게 넘겨주마' 같은 4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면 탄핵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그런 수를 두지 않았다. 이유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다. 헌재로 가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비박계와 접촉을 했는데 이빨이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해버렸을까?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고 책상을 두드리다 보니 시간이 다 지나갔을까? 내게 주어진 정보 하에서는 알 수가 없고, 결론에 영향을 주지도 않으므로, 일단 넘어가자.

비박계의 셈법은 변함이 없었다. 표결에 참여했는데 부결되면 곤란하다. 표결에 참여한다면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그런데 이제 민주당에서 배신표가 나올 여지가 사라졌고, 너무도 이상하게도 청와대에서 침묵을 지키면서, 거리낌없이 투표장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공적 용어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이른바 '촛불 민심'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의원 압박의 결과로 변경된 보상표를 다시 그려보자.

민주당국민의당비박계
큰 표차001
작은 표차-110
부결-2-2-2

이제 죄수의 딜레마는 해소되었다. 부결되는 것은 모두에게 확실한 손해를 안겨준다. 작은 표차로 가결되어서 국민의당이 이익을 보는 상황이 생긴다 해도 민주당으로서는 감수해야 한다. 부결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박계는 일종의 꽃놀이패를 쥐고 탄핵안 표결에 나서게 되었다.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혹자는, 아니 적잖은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이, '여론조사 결과와 딱 맞아떨어진 국회 표결 결과'를 두고 감탄하는 모양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다. 대의민주주의는 국회의원을 리모콘 삼아 국민의 여론조사 그대로 움직이는 정치체제가 아니다.

만약 12월 1일 '여론' 그대로 탄핵안을 발의하고 12월 2일 표결했더라면, 국민의 여론과는 완전히 다른 국회 표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12월 9일의 탄핵안 투표가 여론조사와 우연히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12월 1일에 어떤 정치인이 '여론을 거슬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꿋꿋이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 정치인의 이름은 박지원이다.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른다면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박근혜 게이트를 두고 박영선 의원에게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자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고 일갈했던 박지원의 성차별적 의식과 발언을 나는 여전히 규탄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모두 남자들이다. 게다가 박근혜는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박정희의 자식'이기 때문에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온 정치인이다. '여성 대통령' 박근혜의 실패를 보상하는 방법은 다음 대통령도 여자가 하고, 그 다음 대통령도 여자가 하는 것 뿐이다. 나는 성차별주의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한, 구시대 정치인 박지원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하지만 2016년 12월의 탄핵 정국 속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한 명 선정하면, 그건 당연히 박지원이다. 그가 홀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가며 '1일 발의 2일 표결'안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12월 3일의 촛불 시위대는 앞으로 벌어질 표결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이미 실패로 돌아간 표결의 절망을 안고 거리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특정 정치세력에게는 이득이 될 수도 있었겠으나, 국민들이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미 정치 외의 다른 영역에서 충분히 '이기는 경험'을 해온 사람들이다. 2002년 월드컵으로 '세계의 벽' 앞에 무릎 꿇는 비루함이 극복되었다. 김연아 선수를 대표로 한 여러 스포츠인들의 활약은 오늘도 계속된다. 이제 한국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문화 수출국이며 경제 강국이다. 그런데 왜 유독 정치에서만큼은 '우리 정치권이 힘이 약해서 저 악당들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찌질한 서사가 아직도 통용되어야 하는가?

정치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 국민 여러분이 힘을 모아주시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정치 세력, 적어도 나는 절대 사절한다. 욕을 먹을 때 욕을 먹더라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정치권 내부의 논리에 부합하는 행보를 하는 그런 정치인과 정치 세력을 나는 원한다. 합법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키는데 성공한 기쁜 날, 앞으로 대한민국의 정치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긴 글을 써 보았다. 이것은 국민의 승리이며 정치의 승리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계속,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