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6
2019-07-01
어딘가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한 이야기의 편집본
북한 비핵화는 이제 물 건너갔습니다. 설령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를 포기할 의향이 생겨도, 평범한 북한 인민들에게 핵무기란 민족적/국가적 자존심의 상징물이 되었기에,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트럼프의 무계획적 충동과 그에 발맞춘 대한민국 청와대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습니다.
북한 인민들에게 핵무기 보유란, 자신들이 경제 제재를 견뎌가며 얻어낸 일종의 보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박정희 하면 한국인들이 좋건 싫건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을 떠올릴 수밖에 없듯, 북한 인민들은 이제 아무리 김정은이 미워도 핵무기에 대해 애증 섞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이제 북한의 핵 포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내에서는 자체 핵무장을 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것이며, 저처럼 원론적인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한국의 핵무장이 가져올 군비 경쟁의 심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대항할 논리가 마땅치 않게 됩니다. 일본도 무장을 가속화해나갈 것이고, 동북아 군비 경쟁은 점점 치열해져, 현 정권의 레토릭과 달리 평화는 더 멀어질 전망입니다.
미국 대선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달린 일이긴 하지만, 이란과 북한은 좋은 반대 사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란처럼 평화적으로 핵을 내놓으면 더 큰 수모를 당하지만, 북한처럼 핵을 들고 버티면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로 번개 하자고 하고 와서 사진 찍고 농담따먹기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모든 Rogue States에게 아주 좋은 선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판문점을 통해서건 중국을 통해서건 북한 영토에 잠깐 들어가는 게 어려운 일이어서 지금까지 미 대통령들이 안 하고 있던 게 아닙니다. 해봐야 미국이 얻을 국익 상 이득이 없고, 북한에게는 미국 대통령이 들어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홍보 이득이 되기 때문에, 제정신을 가진 미국 대통령은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트럼프가 하고, 한국 대통령이 enabling 하는군요.
실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 역사 속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승자가 아닌 패자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북한 인민들도 깨달았겠죠. 90년대 이후 겪은 그 모진 가난과 배고픔이 이 승리를 위한 것이었구나! 굶더라도 핵을 갖길 잘했다! 앞으로 저들이 어떤 감언이설로 꼬드겨도 절대 내놓지 말자! 이런 인식이 깔리면 설령 독재국가라 해도 민의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북한 비핵화는 종결됐습니다. 경제 제재를 백날 천날 해봐야 소용 없고, 만에 하나 전쟁을 해도 애국심 넘치는 북한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핵을 감춰줄 것입니다. 정말이지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역사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기분임을 실감합니다.
'김정은은 핵을 원하지만 인민들은 쌀을 원한다' 같은 한국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본다면, 어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사람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닙니다. 목적 없는 고통입니다. 어제 트럼프의 깜짝 방북으로 인해, 대북 경제 제재를 감내하는 북한 인민들에게도 '경제 제재를 참아야 할 목적'이 생겼습니다.
트럼프가 북한에 얼마나 큰 승리를 안겨줬는지, 그리고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암담할 뿐입니다.
북한 체제의 기본 정당성 원리는 '배는 고파도 자존심을 세워준다'입니다. 한국 대통령을 꾸짖고, 한국 대통령은 찍소리도 못하고, 트럼프와 만나라고 중간에 다리 역할만 해주었으며, 미국 대통령까지 만났는데, 이 모든 것이 핵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북한 체제는 정당성을 얻었습니다. 수십만을 굶기건 수만명을 수용소에 보내건 말건, 북한의 내적 붕괴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었다고 해석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게 이념적/이데올로기적/종교적 장치가 국가의 기층 단위에서 한번 작동하면, 설령 상부구조를 무력으로 무너뜨려도 해당 지역을 평정하고 지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어려워집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이슬람교에 기반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그것이 기층에서 수용되고 나니, 미국이 아무리 애를 써도 밑에서부터 저항이 들끓고 진압이 안 되는 것을 연상해보시면 될 것입니다. 북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체사상이라는 유사종교가 그렇게 된 거죠.
지금까지 한국 경제란 미국의 군사적 보호와 핵우산을 전제로 해도 위험하다는 것, 그래서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적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의 초기 출범 당시 북한 위험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에 주식시장이 쭉 렐리를 했는데, 이제 북한 비핵화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두루 퍼지기 시작하고, (적어도 트럼프의) 미국은 이전처럼 한국을 군사적으로 보호할 의향이 없거나 매우 적다는 것도 잘 알려지고 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어찌 될까요?
2019-04-15
저신뢰사회의 문학: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작가가 트위터를 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는 책을 소개하면서 5점 만점의 '일독 권유지수'를 매기고 있었다. 매사 불만이 많은 나는 그 '일독 권유지수'에 대해서도 불만을 느꼈다. 차라리 그냥 '별점'이라고 하던가, '일독 권유지수'라니 그 명칭은 무엇인가. 그는 이미 그 시점에 여러 문학상을 두루 휩쓴 폭풍같은 신예 작가였는데, 그런 분께서 책에 별점을, 아니 '일독 권유지수'를 매기고 있다니. 나는 불평했었다.
제법 오래 전 일을 떠올린 이유는 그의 책 『당선, 합격, 계급』을 읽었기 때문이다. 별 생각 없이 집어들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있다. 재미있을 뿐 아니라 문학을 넘어 사회 전반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지점을 정확하게 짚었으며, 그것을 잘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당선, 합격, 계급』은 문학'만'에 대한 책이 아니다. 물론 문학상과 공채, 그리고 '등단'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 중 하나인 '입시'(入試)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책을 펼치면 곧 나오는 핵심 문단 두 개를 인용해보자.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일부다. 입시(入試)가 있는 시스템.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한쪽은 합격자의 세계인 것이다. 문학공모전이 바로 그 시험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 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극히 한국적이다. 지원자는 모두 한 시험장에 들어가 동일한 문제로 시험을 친다.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17쪽]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장강명은 이러한 '입시'의 성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나름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법고시를 폐지하고 로스쿨로 대체하는 것 같은, 말하자면 '동쪽 문을 닫고 서쪽 문을 여는' 것은 진정한 해법이 되지 못한다. 현재 변호사시험의 난이도와 합격률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을 떠올려보자. 변호사시험을 통과한 '로변'들은, 마치 사법시험 출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문을 최대한 조금만 열어두고 싶어한다. 자신들이 받았던 차별은 지난 일이고, 이제는 성에 들어왔으니 성문을 걸어닫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폐쇄적인 성벽이 생겨나는 이유는 정보의 격차 때문이다. 성 안 사람들은 성 밖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지 않는다. 가령 '문단'은 정부로부터 내려오는 온갖 지원금과 해외 연수 등의 정보를 독점하며, 문인들의 추천권을 행사한다. 그러니 젊은 작가들은 문단의 눈치를 본다. 또한 한국 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 그런 독자들에게 소설을 소개해야 하는 기자들은, 책값보다 귀한 시간을 허공에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창비,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등으로 대변되는 주요 출판사의 책에 관심을 기울인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입시의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 르포 작가 장강명의 분석이다.
간판의 본질적인 힘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야 간판의 중요성이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낮아진다. 간판의 힘은 정보 부족에서 나온다. 독자나 출판사가 등단 작가를, 구직자가 대기업을, 기업이 명문대 졸업생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게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다. 글 잘 쓰는 미등단 작가, 연봉도 높고 복지 혜택도 다양한 중소기업, 일 잘하는 비명문대 졸업생이 분명히 있지만, 찾기가 너무 어렵다. 잘못된 선택을 내렸을 때 져야 할 부담도 너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억지로 모험을 강요할 수는 없다.
모험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지도를 그려 제공하자는 게 나의 제안이다. 지금 한국의 독서 생태계나 노동시장은 너무 깜깜하다. '무슨 무슨 시험에 합격했다'는 간판들만 빛나는 어두운 거리 같다. 안내소에 있는 지도는 부정확하거나 누락된 정보가 많다. 얼마간은 그런 지도를 그리는 일 자체가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다. 부분적으로는 간판으로 득을 보는 이들이 정확한 지도 제작과 보급을 반대하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429쪽]
나는 이 분석에 동의한다. 그냥 동의하는 차원을 넘어, 장강명의 '일독 권유지수'도 뒤늦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사는 돈보다 책을 읽느라 들어간 시간을 더 아까워하는 수많은 독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상대적으로 책 많이 읽고 작가로서의 권위도 가지고 있는 장강명이 책을 소개하고 읽을지 말지 미리 판단해주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꼭 그렇게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는지, 몇 년 전의 나를 꾸짖었다. 『당선, 합격, 계급』은 이렇게 문단이라는 느슨한 '취향의 공동체'를 출발점으로 삼아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내놓는, 최근 보기 드문 훌륭한 논픽션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열렬하지 않았다. 아니, 독자들의 외면을 받거나 했다는 말은 아니다. 많이 팔렸고, 지금도 꾸준히 좋은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한국 문단이 발칵 뒤집혔다거나, 장강명이 한국 문학의 '젊은 신예'를 넘어 어떤 권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 때문이다.
누구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선, 합격, 계급』은 기자가 쓴 책이다. 어떤 입장을 가진 사람을 취재했다면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의 말도 들어보는 훈련이 확실히 되어 있는 저자가, 바로 그런 식으로 사안에 접근해가는 책이라는 말이다. 바로 위에 인용한 '간판과 정보 격차'에 대한 문단만 봐도 그렇다. 간판으로 득을 보는 이들이 지도 제작을 가로막고 있는 현황을 실컷 지적했지만, 장강명은 비분강개하지 않는다. '물론 지도 제작이 어려울 수도 있다'며 다른쪽의 입장에서도 한 마디 덧붙여준다.
바로 이런 균형감각이 『당선, 합격, 계급』을 좋은 책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균형감각으로 인해, '이 썩어빠진 문단'에 침을 뱉고 싶거나, 반대로 '문단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게 아니다 우리의 한국 문학 화이팅'을 외치고 싶은 사람들 중 그 누구로부터도 열화와 같은 성원을 끌어내지는 못한다. 어떤 이들은 문학상을 휩쓴 장강명이 불현듯 개심하여 '문단권력과 맞서는 레지스탕스'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을 테고, 다른 이들은 문학상을 휩쓴 장강명이 아주 세심하고 꼼꼼하게 '꿀팁 대방출'을 해주리라 기대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장강명은 아주 공들여서 양쪽 모두를 적당히 실망시켰다. 반대로 나처럼 한국 문학에 큰 관심이 없는, 비소설 분야를 주로 읽는 독자를 만족시켰고 말이다.
물론 이 책이 완벽하지는 않다. 특히 '객관식 시험'에 대한 한국인의 사랑이 왜 생겨났는지 그 이유에 대해 저자가 알면서도 다소 박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이 시험 성적을 믿는 것은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력직 중심의 채용 구조가 돌아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채용 담당자가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뽑는 대신, '본인이 꽂아넣고 싶은 사람'을 뽑을 거라 생각한다. 대학의 입시 과정을 각 대학에 자율로 맡기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한국은 '모든 정보를 최대한 공개하여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사회에 속한 각 개인의 복리를 최대한 증진하는 방법이다'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나라다. 그래서 자그마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면 '라인'을 만들고, 학연 지연 혈연 흡연으로 패를 갈라 똘똘 뭉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뒤쳐지고 만다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이다. 경제 수준은 세계 10위권이지만 대단히 낮은 수준의 저신뢰사회이기에, 사람들은 '좋은 전문가'를 찾기 이전에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직에 앉아있는 전문가'를 피해야 한다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렇게 말이다.
나는 어떤 선생님이 아무리 학생들과 소통을 잘 하고 훌륭한 교수법과 교육 철학을 갖췄다 하더라도 토익 점수가 400점대라면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걸러내지 못하는 게 지금 한국의 교육 현실이다. 대한민국 교육행정은 교단에 그런 교사가 얼마나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318쪽, 강조는 인용자]
입시를 통해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 말고, 성 밖에 있는 사람들도 왜 입시에 찬성하는가? 숫자로 환원되는 객관식 시험의 결과는 누군가가 '최고, 최선'의 인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장강명 스스로가 위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다시피, 객관식 시험은 어떤 이가 완전히 부적격한 존재라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할 수도 있다. 한국이 저신뢰사회라는 점을 인식하고, 얼마나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은지 파악하여 대응하지 않는 한, 입시라는 체제에 대한 한국인 전반의 선호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장강명의 프로젝트성 전자책 출판물인 『한국 소설이 좋아서』를 접했다. 그가 『댓글부대』를 통해 얻은 두 번째 상금을 출원하여, 책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한국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원고를 청탁하고 취합하여 내놓은 서평 모음집이다. 앞서 말했듯 한국 소설에 큰 관심이 없는 독자인 나도 퍽 재미있게 읽고 있다. 이건 찾아봐야지 싶은 책도 몇 권 건졌다. 저신뢰사회는 바로 이런 식으로 극복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장강명이 작가로서 꾸준히 활동하는 것만큼이나, 『한국 소설이 좋아서』를 계속, 가급적이면 한 해에 한 번이라도 정기적으로 내주면 좋겠다. 종이책을 내면 제작비와 재고 부담이 크니, 뜻이 맞는 출판사를 통해 전자책 전용으로라도, 이번에는 단돈 삼천원이라도 받고 팔면서 똔똔이라도 맞추면 좋겠다. 나는 사서 볼 생각이 있다. 그러다보면 더 많은 독자들이 한국 문학을 읽을 것이고, 문단이라는 입시의 성 바깥에서 자생력 있는 취향의 공동체가 싹틀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9-04-02
도올 김용옥과 안아키즘
94. 의학이 발달할수록 인류의 건강은 퇴보하고 인간이라는 종자(human species)는 퇴행한다.
홍역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홍역이라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든지 앓았던 것이요 어릴 때 앓을수록 좋았고 또 이삼일내로 꽃이 활짝 피면 좋았던 것이다.
우리는 밭에 씨(종자)를 뿌릴 때 수확을 거둘 정확한 량의 종자를 뿌리는 것이 아니다. 씨는 많이 뿌리되 싹이 돋아나면 어릴때 그것을 솎는다. 그래야 불량한 싹은 도퇴[sic.]되고 건강한 종자가 살아남으며 자양에 필요한 공간이 확보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자라면 누구든지 홍역을 앓는다는 사실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최소한의 통과의례였다. 자연은 매우 잔혹한 것 같지만 그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였다. 그래서 라오쯔는 "天地不仁"(대자연은 잔인하다)이라 한 것이다.
옛날에 홍역이 돌면 많을 때는 반이상의 어린아이가 죽었다. 옛날에 유아사망이 많았던 가장 큰 가장 지속적인 이유가 홍역이었다. 인간은 홍역을 앓고 또 살아남음으로서만 인간이 인간이라는 개체로서 존립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았다. 그래서 열악한 종자는 일찍이 도퇴[sic.]되고 그 통과의례를 거친 강건한 개체만이 문명의 주역으로서, 그 면역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의학의 발달은 이러한 자연의 통과의례를 없애버렸다. 온갖 백신이 쏟아져나와 이러한 통과의례를 없애버리고 출생률과 생존률을 거의 일치시켜버렸다. 우리는 옛 왕가에서 제한된 계보내에서 혼인(생식)을 계속하면 할수록 그 왕가의 종자가 생물학적으로 열성화되어간 예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인브리딩(inbreeding)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마찬가지로 의학의 발달은 인종을 같은 방식으로 위협한다. 의학이 발달되면 될 수록 인간종자는 퇴화할 수밖에 없으며 필요한 자연능력의 상실로 고통을 받게될 것이다.
김용옥, 『기옹은 이렇게 말했다』(서울: 통나무, 1994), 100-101쪽
일러두기: 인용자는 이와 같은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2019-02-28
3.1 운동을 기념하여 고종의 장례 행렬을 재연한다?
'3.1 운동은 만세운동이 아니라 실은 고종 장례식이었다'는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때 한 교사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 맥락은 3.1 운동을 칭송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망국의 백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자주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 고혈을 빨아먹은 왕의 죽음을 슬퍼해서라고 비아냥거리기 위해 그는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3.1 운동은 고종 장례식이었을 뿐'이라는 말은 실제로 그렇게 활용되어 왔다. 한국의 모든 것을 비하하며 일본을 칭송하는 이들이 즐겨 입에 담는 소리였다는 말이다. 고양이가 죽었는데 쥐들이 슬퍼하며 거리에 나섰고, 그걸 나중에 독립운동인양 포장했다, 조선인들의 '민도'는 예나 지금이나 그 모양 그 꼴이며 그렇게 선동에 놀아나는 우매한 것들이다, 이따위로 찍찍 내뱉는 소리. 그런 발언의 하나가 바로 '3.1절은 고종 장례식' 타령이었다.
그런데 대관절 어째서, 민족 정기 우뚝 세우기를 그렇게 좋아하고, 친일 잔재 청산에 목숨을 거는 현 정권에서, 고종의 장례 행렬을 재연한다고 나서고 있는 것일까? 한반도 거주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폄하하고 깎아내릴 때 쓰던 레퍼토리를 왜 대한민국의 정부가 앞장서서 재연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역사인식'이란 무엇인가?
3.1 운동은 기념할만한, 기념해야 할 사건이다. 죽은 왕의 시체를 밟고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탄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내내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평안도 사람 함석헌이 회고했던, 왕이 아닌 국민이 주권자로 재탄생한 날이 바로 3.1절이다.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함석헌의 이야기를 꺼낸 건 국가나 민족과는 다른 차원에서 만세운동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도 그때 들었어. ‘여러분이 다 나라의 주인이니까 누굴 믿지 말고 다 일어서서 만세를 불러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독립이 됩니다.’ 그런 말 사천 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들어본 소리거든요. 단군이 계실 땐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국가라고 이름을 걸고 한 이후에 언제 그런 말을, 더구나 평안도 놈들이 들어봐요?” 함석헌은 당시 이승훈의 연설에서 사람들이 받은 충격을 그렇게 요약했다. 그때 사람들이 처음 들어본 것은 ‘나라의 독립’이 아니라 ‘당신이 주인’이라는 말이었다.
고병권, "함석헌이 겪은 3·1운동", 《경향신문》, 2019년 2월 24일.
3.1절에 고종의 장례 행렬을 복원하겠다는 사람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4.19 기념 행사에서 이승만을 추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919년 3월 1일은 한반도의 거주민들이 왕정을 떨쳐내기 시작한 날이다. 그걸 '죽은 왕을 기억하는 행사'로 바꾸고 싶어하는 자들은, 민주주의자 행세를 하는 왕당파에 불과한 것 아닌가.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며, 왕족과 귀족을 용납할 수 없는 평민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만 '대한독립만세'는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