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0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 일러두기: 이 글은 『무엇이 정의인가?: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마티, 2011)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아직 절판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마이클 샌델의 새 책이 나오는 시점이므로, 블로그에 공개해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외에 박홍규, 장정일, 이권우, 김도균, 이양수, 최원, 박원익, 이택광, 서동진, 이현우 등 훌륭한 필자분들이 참여한 책입니다. 다른 필자들의 논의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참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1.

학자나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상인들과 부인들이 동석해 있는 사교 모임들에서 대화가 진행되는 모습을 주의해 보면, 거기에는 이야기와 농담뿐만 아니라 또한 환담, 곧 수다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야기는 새로운 내용과 함께 흥미 있게 이끌어가려 하면 이내 소재가 고갈되고, 농담은 쉽게 김이 빠지기 때문이다. 모든 수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의 성격을 결정짓는 이런 저런 행위의 윤리적 가치 에 관한 수다보다도 더 그 밖의 머리 쓰는 일에서는 이내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의 참여를 촉발하고 모임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없다. —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O273/V153

임마누엘 칸트는 사교계의 총아였다. 그는 키도 작고 얼굴도 과히 잘생긴 편이 아니었지만, 특유의 영민함과 해박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 밖으로 떠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런던, 제노바, 베니스 등 세계의 주요 도시에 대한 '구라'를 풀어놓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많은 경우 그의 이야기는 실제로 해외를 다녀온 사람의 것보다 정확하고 세밀했다. 칸트는 당구를 매우 잘 쳤고, 학창시절에는 내기당구를 통해 학비를 벌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쾨니히스부르크 대학교의 교수가 된 이후로 사교계에서 발을 끊고 이른바 '비판철학'의 구상과 완성에 돌입한다. 그 작업을 끝냈을 때, 이전까지 사람들이 알던 사교적이고 유쾌한 칸트 씨는 사라지고, 대신 우리가 아는 철학자 칸트가 탄생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지난 시절을 잊지 않았고, 도덕철학을 다루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위 인용구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윤리적 가치에 대해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한다고. 저 말은 칸트 자신의 사교계 경험에서 우러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윤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좋아한다. 누군가가 진정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를 반드시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가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만큼은 그 누구라도 즐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것은 근본적인 '인간적 현상'이며,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왜 『정의란 무엇인가』가 40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를 내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하버드 명강의'라는 단어가 수많은 이들을 솔깃하게 했고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이 탁월한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윤리적 딜레마'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섬세한 독해를 할 필요가 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이 보수주의적 입장, 즉 공동체주의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책의 도입부에서 던져놓는 딜레마 자체가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가 책에서 설명하는 공동체주의의 근본적인 한계와 맞닿아있기도 하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설령 그 책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의 도입부에서 제시하는 딜레마가 무엇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열차가 있고, 브레이크는 고장났다. 당신은 그 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인데 이 철로를 쭉 달리다보면 공사중인 인부 다섯 명이 치여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편 선로를 바꾼다면 한 사람의 인부만 치여 죽는 것으로 사고를 마무리지을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딜레마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첫 번째와 유사한 듯 하면서도 상당히 다르다. 역시 폭주하는 기관차를 타고 달리고 있고, 다섯 명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런데 철로 위의 어딘가에, 열차를 멈출 수 있을만큼 뚱뚱한 사람을 선로 위로 떨어뜨리면 그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 당신이라면 그 뚱뚱한 사람의 등을 밀어서 그를 철로 위로 떨어뜨릴 것인가?

샌델은 말한다. 공리주의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편을 택한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 사조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 특히 칸트적 자유주의자라면 선로를 바꾸거나 뚱뚱한 사람을 밀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오직 목적으로 예우하라'는 정언명법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자는 그와 같은 추상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나'의 삶의 맥락과 공동체의 가치 기준 속에서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샌델은 앞서 제시한 추상적인 비유를 현실 속으로 과감하게 옮겨놓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은신처를 찾아다니는 미군 척후병. 그들은 중간에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을 만났다. 미군들은 이 민간인들이 탈레반 협력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한다. 만약 그들이 협력자라면, 척후병 뿐 아니라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수많은 미군들의 위치가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들은 민간인들을 풀어주었고, 몇 시간 후 미군 전체가 탈레반에게 포위되었다. 세 사람의 목숨을 살린 댓가로 총 열아홉명의 미군이 죽어야 했다. 민간인들을 그냥 보내주겠다는 결정을 내린 미군은, 그 역시 전투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자신이 내린 판단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도입부를 제시한 후 샌델은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개략적인 해설을 제시한다. 각각 3장씩, 그 내용들이 이 책의 나머지 9장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서평들을 살펴보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는 듯 하다. 쉽고 재미있게 정의와 윤리의 문제를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는 평가가 있고, 샌델이 말하는 공동체주의가 결국 보수주의적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나는 두 가지 견해 모두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샌델이 말하는 내용, 공동체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말을 하기 위해 꺼내드는 사례가 이 책을 진정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철로에서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혹은 폭주하는 열차를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윤리적 토론을 위한 화두로 꺼내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윤리적 판단이다. 칸트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

2.

사례들이 판단력을 예리하게 해준다는 것은 사례들이 가진 유일하고도 큰 효용이다. 지성의 통찰력의 정확성과 정밀성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사례들은 보통 그런 것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니 말이다. 왜냐하면 사례들이 규칙의 조건들을 (限界의 境遇로서) 충전하게 만족시키는 일은 매우 드물고, 게다가 규칙들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경험의 특수한 상황과는 독립적으로, 충분하게 통찰하려는 지성의 노력을 흔히 약화시키며, 그리하여 종국에는 규칙들을 원칙이라기보다는 공식처럼 사용하는 버릇이 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례들이란 판단력을 위한 보행기로서, 판단력의 천부적인 재능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판단력 일반에 관하여'에서.

"사례들이란 판단력을 위한 보행기"이며 "판단력의 천부적인 재능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칸트 자신을 포함하여 위대한 철학자들 역시 까다로운 도덕적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끝없이 가설적 사례를 만들고 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례들은, 칸트의 비판처럼 "규칙의 조건들을 충전하게 만족"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불필요하지만 유의미한 어떤 '맥락'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선 플라톤의 경우를 살펴보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체계적으로 대답을 시도한 최초의, 그리고 어쩌면 가장 위대한 작품은 플라톤의 『국가』일 것이다. 플라톤의 대변자로 등장한 소크라테스는 먼저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따르는 것',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과 같은, 당대에 통용되고 있던 규정들을 하나씩 논파한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을 찾아내기 위해 개인의 삶이 아닌 공동체의 구성과 그 속에서의 삶으로 논의의 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의 도입부와 그 나머지를 가르는 기준선이다.

바로 그 도입부에서, 등장인물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당대의 통념에 맞서 한 가지 딜레마를 제시한다. 당신에게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성정을 이기지 못해 난폭한 행위를 저지르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정신일 때 당신에게 자신의 무기를 맡겨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상태가 안 좋아진 그가 나타나 자신의 무기를 돌려라고 한다. 당신은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순간 그가 그것을 들고 가서 어딘가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올바름이란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개념에 따르자면 당신은 그 무기를 돌려줘야 한다. 무기의 주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 그게 바로 '올바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누구도 그러한 행동이 올바른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와 같은 딜레마를 몇 개 더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통념적인 정의관에 도전하고 자신의 새로운 입장을 펼쳐나갈 토대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플라톤이 만들어낸 사례의 맥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시민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민이라는 것은, 전쟁이 나면 자신이 소유한 무기를 들고 폴리스를 위해 전쟁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맡겨놓은 무기'라는 말은 바로 그런 맥락을 전제로 할 때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인 내게는, 우발적인 경우 흉기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은 있을지언정, 본격적인 '무기' 따위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시민들이 곧 군인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의 무장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내가 책 한 권을 친구에게 맡기는 것과 완전히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내가 이 도시국가 속에서 한 사람의 시민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가 가진 창과 방패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의 무장을 맡아놓고 있다가 돌려주지 않는 행위가 지니는 맥락 역시 결코 간단한 게 아니다. 친구에게 빌린 청바지를 돌려주지 않는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플라톤이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모두가 시민이고 전우이기도 한 고대 그리스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온전히 이해 가능하다. 서로가 서로를 시민으로서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혹은 어떤 경우에 우리는 누군가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을 것인가. 명시적으로 서술되고 있지는 않지만, 플라톤이 만들어낸 딜레마는 이와 같은 맥락을 추가적으로 머금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칸트 자신이 '사례'를 통한 접근을 '판단력의 부족을 매꾸기 위한 것'이라고 낮게 평가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상적인 사례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살인자에게 쫓기는 누군가를 집에 숨겨주고 있다. 그런데 그 살인자가 찾아와 당신에게 묻는다. '그 사람이 여기 있는가?' 칸트 자신이 말하는 정언명법에 따르면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므로 '그렇다'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저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딜레마가 전제하고 있는 상황의 맥락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샌델 본인이 곧장 그 예시를 현실 속의 것으로 치환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듯, 칸트가 말하는 저 '살인자'는 사실상 공권력에 해당하는 그 무언가에 가깝다. "우리는 나치 돌격대원에게 안네 프랑크의 가족이 다락방에 숨어 있다고 말해줄 도덕적 의무는 분명 없다."(185쪽) 칸트가 말하는 '살인자'는 살인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거나 저지르게 될 한 사람의 개인이라기보다는,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처형'하겠다고 나선 어떤 공권력에 가까운 개념인 것이다. 적어도 문맥상으로는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사례의 맥락은 독특한 뉘앙스를 지니게 된다. 칸트가 살던 시대에는 국가에 의한 출판물의 검열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유를 논하면서도 계몽군주의 자비와 관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칸트는 동료 지식인들에게 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혹은 네가 사상 검열을 당하고 국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 때, 네가 나를 감싸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일까?

즉 칸트가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국가 권력'을 상대로 하여 '시민'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윤리적일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플라톤의 경우와 달리 칸트는 국가 권력이 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 속에서 윤리적 행위의 문제를 검토하고자 했다. 반면 플라톤은 언제라도 다른 도시국가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 고대 그리스의 분열된 정치 상황을 전제한다.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입장이 있고 각자의 생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철학자 모두 어디까지나 '시민'의 눈높이에서 딜레마를 고안하여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또 창과 방패를 들고 밀집대형을 만들어 적과 싸워야 하는 고대 그리스의 시민, 혹은 왕의 검열을 피해 계몽주의를 설파하고 만들어나가야 할 18세기 프러시아의 시민. 이 딜레마를 만든 사람들과 그것을 듣고 고민한 사람들 모두, 시민의 눈높이에서 윤리를 고민했다.

샌델이 제시한 철도 기관사의 딜레마와 그것의 현실적 적용으로 돌아가보자. 이제 그것이 왜 문제적인지 그 이유가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쏘아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때, 샌델의 눈높이는 결코 시민들의 그것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그는 미군의 시각으로, 자신과 비교했을 때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민간인들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채 그들을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고민한다. 샌델은 집 앞에 찾아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을지 여부를 실천이성의 원칙에 따라 검토하는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이 아니다. 그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이 윤리적일지 아닐지 하버드 학생들과 토론하며, 민주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의 눈높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3.

공법적 협약하에서의 비밀 조항은 객관적으로는—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는—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즉 비밀 조항을 명령하는 사람들의 인격의 자질에 따라 판단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확실히 비밀은 성립할 수 있다. 즉 그들이 비밀 조항의 초안자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 인격적 존엄성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밀은 성립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조항은 오직 하나뿐이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명제에 포함되어 있다. 공적인 평화의 실현 가능한 조건에 대한 철학자들의 준칙을 전쟁을 위해 무장한 여러 국가들은 충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 임마누엘 칸트, 『영구 평화론』(서울: 서광사, 2008), 개정판, 58쪽.

시민의 딜레마와 점령군의 딜레마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시민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딜레마를 통해 윤리적 문제를 숙고하는 것과, 점령군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딜레마를 검토하는 것 역시 완전히 다른 차원을 형성한다. 전자를 고민할 때 우리는 도덕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동료 시민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진실을 말하는 누군가, 혹은 전쟁에서 동고동락한 전우의 명예를 훼손시키면서까지 그가 벌일 수 있는 위험한 사태를 막아내고자 하는 누군가가 된다. 반면 후자의 상황을 가정하며 토론할 때, 우리는 그저 '이 사람들이 탈레반 협력자일지도 모르니까 죽이자'라는 결론에 도달한 미군이 되어버릴 뿐이다. 전자에는 윤리와 가치가 이미 딜레마 속에 내재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선택이 더 '전략적'으로 타당한가 뿐이다. 윤리적 책임과 도의적 갈등은 그것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판단의 요인으로 전락한다.

샌델이 제시한 딜레마에서 행위의 주체는 곧 '초법적 주권자'이다. 재판 없이, 그 어떤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쥔 채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주체 말이다. 샌델은 독자로 하여금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그저 서류에 사인을 했을 뿐인 아우슈비츠의 아이히만이 될 것을 권유한다. 구체적인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의 목숨을 직접 빼앗는 게 아니라 그냥 '결정'을 내릴 뿐인 상황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구경꾼인 당신은 옆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를 직접 밀지 않고도 철로 아래로 떨어지게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맨홀처럼 아래로 통하고, 당신은 핸들을 돌려 뚜껑을 열 수 있다고"(39쪽)까지 상상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이토록 기계적인 살인을 상상하는 행위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사고실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순간, 우리는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열차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비곗덩어리'를 죄책감 없이 철로에 처박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 뿐이다.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그것을 어떤 더 큰 뜻, 대의에 따라 행사하는 초월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찾아 헤매이는 미군, 혹은 그 미국의 패권적 지배에 맞선다는 명분 하에 온 몸에 폭탄을 칭칭 감고 뛰어드는 자살 테러범. 양자의 논리는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당신이 이라크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라고 가정해보자. 나 한 사람의 목숨과 더불어 미국인 수십 명을 죽임으로써 '우리 편'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올바른 것일까? 샌델이 제시하는 논리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포함하여 몇 사람쯤 희생시키겠다는 자살테러범을 설득할 수가 없다. 미군들이 미국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을 정의롭게 죽일 수 있듯, 자살테러범은 이슬람 공동체를 위해 미국의 민간인을 정의롭게 죽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살테러범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목숨을 바쳐 미국인들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할 수 없는 것도 물론이다. 하버드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지 토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반대편에서 같은 주제를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게 안 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죄책감을 덜어주는 복잡한 장치를 이용해 열차를 막기 위해 뚱뚱한 사람을 철로에 떨어뜨리는 사람과 자살테러범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일 뿐이다. 전자의 경우 무슨 요절복통 기계처럼 생긴 장치 덕분에 살인의 주체가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그 책임감으로부터 도피한다면, 후자는 아예 폭탄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날려버림으로써 도덕적 책임의 소재를 지워버린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각자의 정의(正義)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대체 그들은 어떤 원칙과 논리에 따라 서로를 설득하여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을까?

각자의 이익과 도덕과 관습이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영원한 평화를 획득하기 위한 이성적인 방안을 도출해내기 위하여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썼다. 그리고 그는 본문의 부록에 위 인용구와 같은 단서 조항을 덧붙여 놓았다. 국경과 문화를 넘어서 통용될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인 철학자의 말에 정치가들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바로 그렇게, 초월적 관점을 통한 보편성에의 추구가 결여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한 한국인 독자가 대단히 자의적으로 '공정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놓고 보면 상황은 훨씬 비관적인 것 같다.

2020-11-14

[신동아] 느려터진 美대선 개표야말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느려터진 美대선 개표야말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14.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⑨] 실리콘밸리의 나라가 원시적으로 개표하는 까닭

●189년 전 미국 여행한 뒤 토크빌이 남긴 통찰
●‘미국 국민’에 앞서 ‘우리 타운’ 주민
●주 정부·연방 정부가 타운 권력 빌려 쓸 뿐
●인력 ‘갈아 넣어’ 개표하지 않는 이유, 주권자여서!
●며칠 걸리든 세계가 궁금해 하든 말든 신경 안 써
●개표 중 승복 선언해 지지자 달래는 전통, 트럼프가 깨
●신속·정확한 선거 사무, 한국적 능률이자 하향식 민주주의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미국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11월 3일(현지시간) 뉴햄프셔주 북부 딕스빌노치 마을에서 투표를 마친 뒤 개표가 이뤄지고 있다. 뉴햄프셔주 법률에 따라 100명 이하의 마을은 0시에 투표를 시작하고 그 결과를 투표 종료 직후 바로 공개할 수 있다. [딕스빌노치=AP뉴시스]
세상 어디가 안 그렇겠냐만 미국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나라다. 정보통신 기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가 있는 나라인데, 대통령선거는 아주 원시적이고 답답한 방식으로 치른다. 선거인단과 승자독식제라는 특이한 제도는 그렇다 치자. 여론조사와 출구조사 등이 안 맞는 것도 땅이 넓고 인종 구성 등이 다양하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해보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체 무슨 선거 개표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단 말인가. 미국이 초강대국인 건 알겠는데,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까닭은 민주주의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정치 체제다. 그러나 그 구현 방식은 국가별·지역별·문화별로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특성을 살펴보는 것은 미국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흔히 미국을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짧은 역사를 지닌 국가'라고 하지만, 근대 이후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이기도 하니 말이다.

‘타운'에 감명 받은 189년 전의 토크빌

프랑스의 젊은 귀족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1831년 5월 미국 땅을 밟았다. 미국의 감옥 제도를 연구하라는 임무를 받고 프랑스 정부의 후원을 받아 견학 여행을 온 것이다. 9개월간 미국 전역을 두루 훑으며 관찰하고 기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고국에 돌아가 형벌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것도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더 큰 호응을 얻은 저술은 미국의 정치 전반을 고찰한 불후의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분명한 주제를 명료한 문체로 다룬 저작이다. 정치학 및 행정학 분야에서 중요한 고전이다. 그 내용을 모두 전할 수는 없고 논의에 필요한 부분만 중점적으로 다뤄보자. 

오늘날 메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로 나누어진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토크빌은 특히 큰 감명을 받았다. 연방 정부도 주 정부도 아닌, 그보다 작은 단위인 '타운'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지방자치가 그의 이목을 끌었다. 영어 단어 타운은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토크빌이 보아온 프랑스나 다른 유럽 국가의 마을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뉴잉글랜드의 타운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하는 독립적 정치 단위였다. 

"뉴잉글랜드의 정치생활은 타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타운 하나하나는 본래 독립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뒷날 영국 왕들이 지배권을 주장했을 때도 그들은 국가의 중앙권력을 떠맡는 데 만족했다. 그들은 타운들을 있던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현재 타운들은 뉴잉글랜드주에 종속돼 있으나 처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며 그렇다 해도 약간에 그쳤다. 타운들은 그 권력을 중앙권위(the central authority)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네들의 자주성의 일부를 주에게 양보했다." 

토크빌이 묘사하는 뉴잉글랜드의 타운 중심 정치는 우리가 아는 '지방자치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가나 주 같은 상위 정부에서 주민들에게 '자치'를 '허락'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의 타운들은 수천만 명이 아닌 수천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친하거나 가깝지는 않더라도, 한 두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일 수밖에 없는 규모의 공동체가 정치의 기본 단위로 작동했다. 

주민들은 신대륙으로 건너오면서 신분과 계급 등 구시대적 유산을 버렸다. 모두가 평등한 상태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생활 곳곳을 지배하는 권리가 스스로의 손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토크빌이 방문했을 당시는 주 정부와 연방 정부가 모두 성립해 있던 19세기 초였다. 하지만 신대륙 아메리카의 주민들은 '미국 국민'이기에 앞서 '우리 타운'의 주민이었다. 

앞서 인용한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음미해보자. 타운의 권력은 중앙의 높은 권위에서 내려온 게 아니다. 주 정부와 연방 정부가 필요에 따라 타운으로부터 잠시 권력을 빌려 쓰는 셈이다. 프랑스의 경우 절대왕정 시기가 대혁명으로 귀결됐으나 나폴레옹이라는 황제가 집권하고 7월 혁명 이후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다. 프랑스 출신 토크빌이 보기에 뉴잉글랜드의 타운 중심 민주주의는 이질적 차원을 넘어 외계의 관습처럼 보였을 테다. 토크빌은 거의 감탄하듯이 말한다. 

"프랑스에서는 국가징세관이 지방조세를 거둔다. 아메리카에서는 타운징세관이 주의 세금을 거둔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정부관리들을 지방에 파견하는 것이지만 아메리카에서는 타운이 그 관리들을 정부에 빌려주는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두 나라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정반대의 길로 간 미국과 프랑스

미국 대선이 치러진 11월 3일(현지시간)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한 개표소에서 담당 인력들이 투표함에 담긴 우편투표 용지를 책상 위로 들이붓고 있다. 오리건주는 1998년 11월부터 모든 공직자 선거를 100% 우편투표로만 진행하고 있다. [포틀랜드=AP뉴시스]
미국의 민주주의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민주주의다. 이는 건국 이후 연방을 수립한 시점부터 분명한 사실로 미국 민주주의의 DNA에 새겨져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권력은 처음부터 국민, 아니 인민에게 있다. 인민의 주권이 모여 타운이 되고 타운에서 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주 단위로 올라가며, 주가 모여 연방 국가를 이룬다. 국민이라는 단위는 그때서야 생긴다.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주를 형성한 후 국가가 만들어지는 세계관이다. 

프랑스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절대왕정뿐만이 아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파리에 모인 지식인과 야심가들이 내세운 계몽 프로젝트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내는 하향식 혁명이었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은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선언문을 인쇄해 '계몽되지 않은' 이들에게 가르쳤다. 

민주주의의 두 원형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이 글을 시작할 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보자. 미국 대통령선거 개표는 왜 이런 식일까. 왜 이렇게 답답하고, 느려 터졌을까. 온 미국인, 심지어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돼 있는데 개표하다 멈추고 다음날 아침 개표를 다시 시작하는 곳도 있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이제 독자 여러분도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말이 된다.' 왜냐하면 대선이란 기층 단위, 더 나아가 개인이 갖고 있는 주권을 연방 정부와 대통령에게 '빌려주는' 절차를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마다 우편투표 규정도 다르다. 언제까지 들어온 표를 어떻게 처리할지 각자의 기준이 있다. 가령 이번 대선의 최대 접전지 중 하나였던 펜실베이니아는 대선 당일까지 우편투표를 개봉하지 않는다. 사전투표를 미리 집계해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22개 주는 심지어 선거 당일 소인이 찍힌 우편투표도 유효표로 인정한다. 이번 선거처럼 우편투표가 쏟아진 경우 개표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더 중요한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미국 대선은 한국처럼 인력을 '갈아 넣어서' 개표하지 않는다. 그 지역 사람으로 이루어진 개표원들이야말로 진정한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중요한 공직이긴 하나, 공복(public servant)을 뽑기 위해 주권자가 혹사당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선거란 지역 주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며칠이 걸리든 말든, 보는 사람들이 답답해하든 말든, 미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주권자인 지역 주민들이 그걸 왜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상향식 민주주의'라는 키워드 하나로 이번 대선 개표 지연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일단 우편투표가 너무 많이 쏟아져 들어왔고, 일부 지역에서는 수도관에 물이 새서 개표 작업이 지연되는 등의 악재가 겹쳤다. 하지만 왜 한국처럼 서두르지 않느냐는 '우문'에는, 주민들의 상황, 역량과 자체 규정에 따라 개표를 진행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현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세계에 건네는 피로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월 8일(현지시간) 자신이 소유한 버지니아주 스털링의 ‘트럼프내셔널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긴 후 떠나면서 차량 밖 지지자를 향해 양손 엄지를 치켜들었다. [스털링=AP 뉴시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의 대선 투표 개표 속도가 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면 대체 왜 지난 대선은 결과가 그토록 빨리 나왔나. 소송전으로 이어진 2000년 대선은 논외로 하자. 이번 대선은 무엇이 달랐던 걸까. 

지금까지 미국 대선은 전체 판세가 결정되면 패자가 승자에게 전화를 걸어 패배를 인정하고 향후 국정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중요한 건 그 시점이 언제냐다. 미국의 대선 투표 개표가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는 언제나 며칠이 걸렸다. 2016년에도, 2012년에도,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패배자들은 마지막 한 장까지 세도록 기다리지 않고, 뒤집을 수 없겠다 싶으면 패배를 시인하는 연설을 해 지지자를 달래는 한편 승자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것이 미국 대통령 선거의 오랜 전통이다. 

2020년 대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도널드 트럼프가 출마했고, 선거에서 졌다는 점이다. 그는 소송전을 불사해가며 버티겠다는 뜻을 밝힌 상태다. 오직 플로리다 주의 개표 결과만으로 전체 대선이 뒤집힐 수 있었던 2000년과 달리, 지금은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트럼프는 그냥 버티고 있다. 관례대로라면 거의 모든 주의 개표 결과가 확인된 지난 주말쯤 했어야 할 낙선 인사를 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미국의 민주주의는 또 한 차례 시련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은 각 지역 주민의 의사에 따라 상향식으로 운영되는 민주주의 국가다. 한국이나 프랑스처럼 치밀한 계획을 세워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내는 식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가 상대적으로 완벽해 보이지 않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결여를 보충해주는 사회적 신뢰가 있어야 원활하게 작동하는 체제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재임한 4년의 마지막을 선거 제도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중이다. 미국 대선이 완료되고 정권 인수가 진행되기를 바라는 전 세계인에게 큰 피로감을 안겨주고 있다. 이 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하고 상향식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인 스스로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바이든 정권의 첫 번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상향식과는 거리 먼 소용돌이 한국정치

상향식 민주주의가 반드시 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론장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의 이상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완전하게 실현된 적이 없다.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 이후 매끄럽게 국왕의 권력을 줄이고 의회정치로 나아갈 수 있었다. 토크빌이 연거푸 강조하듯 미국은 천혜의 지정학적 조건 덕에 외적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고 특유의 느긋한 지역 공동체 기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두 나라에서조차 상향식 민주주의의 이상은 꾸준히 도전받고 있다. 

오랜 세월 전제군주의 압제에 시달린 프랑스에서는 민주적 이념의 확산이 다소 비민주적 방식, 즉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시대와 군사독재를 겪은 우리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하향식 민주주의의 경우 수많은 이론적 고민과 제도적 모색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빠르고 정확하게 선거 관련 사무를 처리해내는 한국적 능률은 국가 중심 하향식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민주주의라는 정치 형태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상향식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 공동체와 함께하는 민주주의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민주주의에 대한 찬사는 상향식 민주주의를 이데아로 삼고 있다. 현실은 상향식 민주주의에 대한 공허한 말잔치만 가득할 뿐, 실제로는 하향식 민주주의가 더욱 강화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지역 주민들이 타운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 혹은 서울시처럼 돈과 힘을 가진 큰 지자체가 '마을 만들기' 예산 따위를 책정해 나눠주는 나라다. 각 지역 국회의원과 지자체장은 정부 예산을 끌어다 지역에 얼마나 뿌릴 수 있느냐로 정치적 승부를 겨룬다.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정치담당 자문을 맡았던 그레고리 헨더슨의 말처럼 중앙을 향한 '소용돌이'가 늘 몰아치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미국의 대선 제도를 비난하거나 폄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정치 풍토와 문화 역시 매도하거나 비하할 수는 없다. 중앙을 향한 소용돌이의 열기 덕분에 우리는 군사독재를 이겨냈고 민주화 이후 여러 차례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다만 가끔은 우리의 정치 풍토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고민을 해볼 필요도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건투를 빌며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14. 03:04 수정 2020.11.14. 19:17
[아무튼, 주말] 영화 '그랜 토리노'와 보수주의
일러스트= 안병현

월트 코왈스키는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쇠락한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 디트로이트에 사는 성격 나쁜 독거노인이다. 입만 열면 인종차별적인 말과 함께 침을 뱉어댄다.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었지만 아내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성격은 더욱 삐뚤어졌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죽거나 이사를 갔고, 이제 그의 이웃에는 베트남 근처 어딘가에서 왔다는 몽족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이웃집에는 타오라는 이름의 소년이 살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기 센 누나와 엄마에게 찍소리도 못하는 순한 녀석이다. 문제는 몽족 이민자들이 갱단을 만들어 타오를 끌어들이려 들고 말을 듣지 않자 괴롭힌다는 것이다. 몽족 갱단은 월트가 아끼는 1972년산 명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라고 타오에게 강요하다가 월트에게 걸려 혼쭐이 났다. 타오의 엄마와 누나는 사죄의 뜻으로 타오를 일꾼으로 부려먹어 달라고 부탁한다. 월트는 내키지 않지만 타오에게 일을 가르치면서 남자로서 역할 모델을 제공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배우로서 출연한 마지막 영화 ‘그랜 토리노’의 줄거리이다. 민주당 지지자 일색인 미국 영화계에서 드물게도 공화당 지지자인 그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성찰을 잔잔한 이야기에 담아낸 이 작품을 끝으로 배우 경력을 정리해 나갔다. 10년도 더 된 작품이지만 다시 봐도 진한 감동을 준다. 특히 2020년 대선이 끝난 지금, 대를 이어 전승되는 가치와 보수주의에 대해 곱씹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프랑스 혁명이 갓 벌어지던 무렵,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성의 빛으로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한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차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각을 거두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영국 하원 의원 에드먼드 버크였다.

아직 자코뱅 일당이 혁명의 이름으로 피의 숙청극을 벌이기도 전이었지만 그는 프랑스 혁명이 혼돈과 비극으로 빠져들 것임을 단박에 예견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의 내용대로 사태가 흘러가면서 그는 일약 지성계의 스타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보수주의의 비조(鼻祖)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주체들은 오랜 세월을 버텨온 제도와 관습 등을 단번에 갈아엎으려 들었다. 하지만 권력이 있다 해서 추상적 이론만으로 사회를 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물려받은 삶의 방식을 신뢰하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삶의 방식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 관습, 도덕, 적절한 물질적 풍요 등이 그런 요소에 해당한다. 홉스, 로크, 루소 같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회계약’은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을 읽어보자.

‘사회는 실로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계약은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죽은 자, 그리고 태어날 자와도 맺는 것이다. 국가를 하루아침에 들어엎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세대를 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이 여름날의 하루살이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보수주의의 정수가 바로 여기 담겨 있다. 우리는 과거에서 물려받은 유산 위에 살아가며 그것을 후대에 넘겨줄 의무를 지닌다. 따라서 추상적 이념을 들이밀며 세상을 단번에 통째로 들어엎을 권리가 없다. 지금보다 한 발 나아진 세상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렵다.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과거를 받아들이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도모하는 것. 고인을 존중하고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보수주의다.

바이든이 이기고 트럼프가 진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트럼프가 보수주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우롱하고 능멸하는 모습에 ‘스윙 스테이트’의 부동층이 등을 돌린 것이다.

미국은 군대가 문민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대신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다. 존 매케인 같은 월남전 참전 용사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파병 군인들을 ‘패배자’ ‘호구’라고 부르며,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다 목숨을 잃은 자들을 우롱하기까지 했다. 매케인의 선거구인 애리조나주가 ‘레드’에서 ‘블루’로 바뀐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언어, 관습, 도덕 같은 무형의 자산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트럼프는 더더욱 보수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미국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도 트럼프처럼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발언과 행동을 일삼는 이는 없었으니 말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기후변화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는 각계각층의 요구마저 모르쇠로 일관했다.

트럼프의 머릿속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었다. 그저 오늘 벌어질 정치 이벤트와 쇼만 가득했다. 한번은 재미로 봐줄 수도 있겠지만 그걸 4년 더 볼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부동층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의 낙선은 진보의 승리라기보다 보수의 패배에 더욱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랜 토리노’로 돌아가보자. 월트는 자신이 낳고 기른 자식이 아닌, 머나먼 이국에서 온 아시아계 이민자 소년에게 부정(父情)을 느낀다. 보수적인 사람으로서 평생 지켜온 남자의 길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이대로 몽족 갱단의 괴롭힘을 당하고 사는 한 이 소년의 앞날은 어둡다. 갱단에 휩쓸리거나 희생당한다면 그가 가르친 올바른 가치는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폐암이 번진 늙은 몸을 이끌고 월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러 간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다. 앞으로도 이민자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미국적 가치를 보수적으로 지키면서 미래를 향해 진보적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그랜 토리노’에 남긴 채 할리우드에서 존경받는 유일한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 경력을 마무리지었다. 2009년 초 국내 개봉한 작품이지만 지금도 큰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물려받았는가? 어떤 문화와 관습이 우리를 지탱해주는가?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보수도 성찰해야 할 때다.

 

-----------------

 

[바로잡습니다] 14일 자 B5면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에서

입력 2020.11.18. 03:04

14일 자 B5면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작 출연 영화를 ‘그랜 토리노’(2008)에서 ‘라스트 미션’(2018)으로 바로잡습니다. 또 같은 기사에서 고(故) 매케인 의원의 선거구를 인디애나주에서 애리조나주로 정정합니다.

2020-11-07

[신동아] 괴상망측한 美선거제도 탓 트럼프 불복? 어불성설!

 

괴상망측한 美선거제도 탓 트럼프 불복? 어불성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07. 10:01 수정 2020.11.07. 12:47
[노정태의 뷰파인더⑧] 韓 '선거법 날치기' 수준 퇴행 아냐.. 우리가 진짜 위기

●승자독식제, 바꿀 수 있어도 안 바꾸는 까닭
●선거인단 통한 간접 선출, 역사적 맥락과 합리성 지녀
●각 주 대표성 보장, 인구 적은 내륙주에 가중치
●민주·공화 양당 처지에서도 現제도 합리적
●집권당 중심 선거법 개정 韓, 법적·민주적 정당성 팽개쳐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11월 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그는 “우리가 이번 선거에서 이겼다”고 말했다. [AP=뉴시스]
전 세계인이 4년에 한 번씩 하게 되는 질문이 있다. 여기서 '전 세계인'에는 상당수의 미국인도 포함되는데, 아무튼 그렇다. 대체 왜 미국의 대통령선거 제도는 이런 식인가? 무슨 이유로 미국 건국 당시 만든, 낡아빠졌고 사람 헷갈리게 하는 제도를 여태 유지하고 있는가? 심지어 2016년 대선에서와 같이 전체 득표수에서 앞선 후보자가 선거인단 숫자에 밀려 떨어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이상한 선거 제도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지 않은가? 

사람들이 흔히 내놓는 대답은 이렇다. 물론 그 제도가 완전히 민주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미국은 연방국가다. 대통령은 50개 주로 이뤄진 연방국가 미합중국의 수장이므로 인구가 적은 주를 소외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이유와 역사성이 있으므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 제도는 그 나름의 정당성을 지닌다. 

2000년대까지의 나도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2010년 10월 군 입대를 하고, 2011년부터 경기 동두천시 소재 미 육군 2사단 1여단에서 카투사로 군복무를 하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결론이 바뀐 건 아니다. 달라진 건 그 결론을 이끌어낸 과정이다. 전역 후 2016년 미국 대선을 지켜보며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4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이 괴상망측한 선거 제도와 그것이 운영되는 방식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에 가까울지 모른다.

‘플라이오버 스테이츠'라는 멸칭(蔑稱)

11월 4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가 델라웨어주 윌밍턴의 한 행사장에서 연설 전 마스크를 벗으며 미소 짓고 있다. 이날 그는 “우리가 승자가 되어 있을 것으로 확실히 믿는다”고 말했다. [AP=뉴시스]
초강대국 미국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 LA의 영화와 TV 산업, 실리콘밸리의 IT(정보기술)를 떠올리는 건 쉽다. 하지만 텍사스의 석유와 중부 평원의 엄청난 농업 생산량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미국은 초강대국일 수 없다. 옛 소련도 중국도 오늘날의 러시아도, 식량과 에너지를 모두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다. 

동부와 서부 해안에 사는 미국인, 그리고 미국 중상류층의 눈높이로 미국을 바라보는 일부 한국인이 쓰는 표현이 있다. '플라이오버 스테이츠(fly-over states)'.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때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곳일 뿐, 실제로 그곳에 내릴 일 따위는 전혀 없다는 뉘앙스가 깔린 멸칭(蔑稱)이다. 

그러나 미국의 진정한 힘은 캘리포니아나 뉴욕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플라이오버 스테이츠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자원, 그런 '촌 동네' 출신 군인들이 연방국가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고 유지해주고 있다. 미국이 미국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수많은 '플라이오버 스테이츠' 덕분이다. 군대에서 수많은 '레드넥'(Redneck·미국 남부의 빈곤한 백인 농민, 노동자를 칭하는 말)과 '힐빌리'(Hillbilly·미국 중부의 쇠락한 공업지대 '러스트벨트'에 사는 백인 하층민을 칭하는 말)들을 만나본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미국 민주당에 정서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고학력 한국인들은 본인도 뉴요커나 LA의 셀레브리티라도 된 것처럼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진보 성향의 고학력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주류 언론을 통해서만 미국을 이해한다면 편향성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50개의 주로 이뤄진 연방국가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강력하다. 각 주의 대표성을 최대한 보장할 수밖에 없다. 각 주에서 상원 및 하원의원 수에 따라 선거인단을 배정받고 주민들의 투표에 따라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간접 선출하는 것은 그 나름의 역사적 맥락뿐 아니라 합리성 또한 지닌다. 

그럼에도 2016년 대선처럼 더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떨어지는 일은 부당하지 않을까? 나는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되기를 바라던 사람이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클린턴의 패배(즉 트럼프의 승리)는 단 한 표라도 이기면 그 주 전체의 선거인단을 가져가는 '선거인단 승자독식제'의 폐해가 극에 달한 사례였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2020년 발표한 바에 따르면,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61%가 선거인단 제도의 폐지를 원하고 있다고 한다. 민주당원 중에는 89%가 선거인단 제도의 폐지를 원한다. 그래도 각 주별로 선거인단을 뽑는 간접선거제와 선거인단 승자독식제를 민주적이지 않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승자독식제, 바꿀 수 있어도 안 바꾸는 까닭

11월 4일(현지 시간) 미국 시카고에서 반(反)트럼프 성향 시민들이 ‘모든 표를 집계하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든 채 시위를 벌였다. 이들 뒤로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간판이 보인다. 같은 날 트럼프 캠프는 펜실베이니아와 미시간, 조지아 등에서의 개표 중단을 요구하며 잇달아 소송을 제기했다. [AP=뉴시스]
선거인단 승자독식제를 비판하기에 앞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선거인단을 통한 대통령 선출은 헌법에 규정돼 있지만, 승자독식제는 헌법 규정 사항이 아니다. 네브라스카 주와 메인 주는 완전 승자독식제를 버렸다. 상원의원에 해당하는 선거인단은 주 전체 득표 승자가 가져가되, 하원의원에 해당하는 선거인단은 해당 하원 선거구의 승자가 가져가게 돼 있다. 메인은 1969년, 네브라스카는 1992년 제도를 변경했다. 

즉 승자독식제는 주 단위로 수정 가능하다. 실제로 두 군데는 승자독식제를 폐지했다. 2004년 11월 콜로라도에서 승자독식제 폐지를 두고 투표가 벌어졌지만 결과는 승자독식제 존속이었다. 외부의 눈으로, 혹은 미국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비합리적인 그 제도를 정작 해당 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유지하길 원했다. 

게다가 현 상황에서는 승자독식제 유지가 정치인이나 정당의 처지에서 더 합리적이다. 뉴욕이나 캘리포니아처럼 민주당의 텃밭으로 여겨지는 곳, 혹은 텍사스처럼 공화당의 아성으로 여겨지는 곳 또한 실제 득표를 보면 한 정당을 향한 지지가 60% 선에서 오가는 게 보통이다. 승자독식제를 포기하면 100%를 가져갈 수 있던 것을 60%만 취하고 나머지 40%는 상대방에게 넘겨준다는 말과 같다. 차라리 승자독식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격전지 스윙 보터의 마음을 사로잡아 오늘은 졌지만 내일은 승리자가 되는 길을 도모하는 편이 낫다. 

헌법을 만들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후보자와 유권자 모두 주어진 조건으로 받아들인 채 선거에 임하고 있다면 그 제도를 '민주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선거의 정당성은 특정 제도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선거에 참여하는 정치인뿐 아니라 유권자 스스로가 기존의 선거 제도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은 특유의 복잡한 방식을 통해 인구가 적은 내륙주에 더 큰 가중치를 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은 보통의 경우 8년 주기로 계속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 규칙에 적응함으로써 민주적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비례대표 없는 영국의 역동성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하원 선거가 시작된 이래 지금껏 단 한 명의 비례대표도 없이 오직 단순다수제 소선거구제로만 총선을 치른다. 한국의 정치학자, 정치인,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 중 상당수가 비난하는 바로 그 소선거구제다. 

영국의 정치는 비례대표제가 있는 한국을 포함해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역동적이다. 20세기 들어 보수당은 2020년까지 120년 중 67년을 집권했다. 나머지 53년 동안 노동당이나 그 밖의 정당이 집권에 성공했다. 보수당을 전통적인 여당의 위치에 놓는다면 여야 간 정권 교체가 거의 동등하게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영국독립당(UKIP)이나 스코틀랜드국민당(SNP) 같은 신흥 세력이 등장해 제3당의 위치를 위협하거나 빼앗는 일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선거란 기본적으로 경쟁이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선거가 끝난 후 규칙이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주식을 사놓고 가격이 오르지 않았다며 환불해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016년 대선에서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의 승복 연설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선거인단 제도와 승자독식제가 민주당에 불리하게 작동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제도 하에서 승리했다면 대통령에 취임했을 사람이, 자신이 졌다는 이유로 제도의 불합리성을 비난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로 압축될 수 없다. '우리 편이 더 많으니 우리 편 뜻대로 하겠다'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승자 못지않게 패자 역시 동의할 수 있는 규칙에 의해 선거를 치르고, 승자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갖지만 패자에게도 다음 선거에서 부활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제공할 때 민주주의는 정상 작동한다. 법의 지배(rule of law)가 뒷받침돼야 민주주의도 제 기능을 한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 탓에 '독재'라는 말을 들으면 군사독재만을 떠올리지만 세계 각국에는 문민독재의 사례가 숱하게 존재한다. 독립운동가에서 독재자로 변신하고 죽을 때까지 군림한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정권, 대를 이어 집권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정권, 결국 쿠데타로 쫓겨난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이 대표적이다. 이들 모두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투표를 통한 다수 지지의 확보가 민주적 정당성의 전부는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제도를 통해 선거를 하느냐도 민주주의의 본질과 필연적 관련이 없다. 참여자가 동의하는 규칙, 승자에 대한 존중, 패자에 대한 배려. 이 세 요소가 작동할 때만 선거는 민주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절차로 제 기능을 한다. 세 요소가 살아있다면 아무리 낡고 '사표'가 많이 나오는 제도라고 해도 선거는 민심을 반영하고 새로운 국가적 방향을 제시하는 정치적 사건으로 올바로 작동할 수 있다.

美대선 보며 농담 주고받을 때 아니다!

한국은 어떤가. 미국보다 한국의 선거와 민주주의가 더 큰 위기에 빠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21대 총선 과정을 보며 든 생각이다. 

심상정 정의당 당시 대표는 비례대표 의석이 늘면 정의당이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계산 하에 '민심 그대로 비례대표제'라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추진했다. 정치부 기자들도 혼란스럽게 하는 복잡한 수식으로 가득한 선거법이었다. 거대 양당은 선거용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심상정은 결국 선거가 끝난 후 눈물을 쏟았다. 

20대 국회의 문희상 의장은 선거법을 '패스트 트랙'에 올렸다. 선거법은 게임의 룰이다. 모든 참여자의 동의하에 바꿔야 마땅하다. 그것을 집권 여당과 여당의 편을 들어 이득을 보려는 군소 야당의 동의만으로 개정해버린 것이 현행 선거법이다. 우리 헌정사에서 '사사오입 개헌'에 버금갈 만큼 황당한 일이다. 비례대표를 늘려 민심을 반영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선거의 법적·민주적 정당성을 내팽개쳤다. 

이 엉터리 선거법으로 22대 총선을 또 치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 어떻게 개정할 것인지, 21대 국회는 아무런 고민이 없는 듯하다. 제1야당에 법제사법위원장을 양보한다는 관례도 내다버렸다. 멋대로 만든 선거법으로 선거를 치르고, 소수자를 보호하며 의견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관례마저 무시한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를 통한 다수의 독재에 더욱 가깝다. 

미국 대선을 보며 우리가 비웃거나 농담을 주고받을 때가 아니다. 우편투표를 비롯한 다양한 잡음이 있긴 하나, 미국의 민주주의는 선거를 앞두고 선거법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수준으로까지 퇴행하지는 않았다. 영국은 선거법을 바꾸는 대신 각 정당이 인적·지적·담론적 쇄신을 거듭하며 역동적 정치 지형을 만들어나간다. 미국 대선을 바라보며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이유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11-02

[신동아] 中아이돌, '항미원조' 기념하는 한 BTS 못 된다

 

中아이돌, '항미원조' 기념하는 한 BTS 못 된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02.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⑦] 추석 안방 뒤흔든 나훈아 일침이 대한민국 대중문화 경쟁력

●SNS에 일제히 ‘항미원조’ 기념 글 올린 중국 스타들
●자유 없는 땅에서 문화 산업 고사하는 이유
●국가 눈치 보는 국민, 해외 팬에게 매력 없어
●中, 서구 유명 게임 개발사 인수해도 성과 바닥
●韓정치권, 잘나가는 케이팝에 숟가락 얹지 마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케이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은 8월 발표한 디지털 싱글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빌보드 메인 차트인 ‘핫 100’ 1위를 차지하는 등 정상급 인기를 누리고 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케이팝의 경쟁력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다짜고짜 악담하는 게 아니다. 방탄소년단(BTS)을 비롯한 케이팝 아이돌 그룹에 큰 관심도 없고 이해관계는 더더욱 없다. 다만 문화산업의 속성을 놓고 볼 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중이 관심을 갖고, 즐기고, 그래서 빠른 속도로 현금이 모이는 것이 대중문화다. 하지만 그만큼 대중은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 이것이 아닌 저것을 즐기며, 대중문화 산업의 판도는 순식간에 뒤집어진다. 

필자가 청소년기를 보낸 1990년대로 돌아가 보자. 당시 미국에서는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커트 코베인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밴드 너바나를 중심으로 펄 잼이나 REM 같은 밴드가 세계 우울한 청소년의 우상 노릇을 했다.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자 갑자기 오아시스와 블러로 대표되는 브릿팝이 대두했다. 영국 록음악 씬에 무슨 화학적 변화가 벌어졌는지 갑자기 명반이 쏟아졌다. 당시 미디어는 '2차 브리티시 인배이전(영국의 공습)'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비틀즈 이후 다시 한 번 영국 밴드가 미국과 세계 대중음악계를 재패한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음악적 유행은 10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X Japan이 이끈 제이팝의 흥망성쇠

영미권 대중문화뿐 아니라 일본 대중문화 역시 뜨고 지는 흐름이 있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강렬한 비주얼로 국내 대중음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일본 록 밴드 X Japan 같은 경우,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지 않았던 시점에도 한국 청소년들을 들었다 놓았다고 할 정도였지만, 멤버가 비극적인 사고로 목숨을 잃고 내부 갈등이 불거지면서 몇 년의 전성기를 마무리지었다. X Japan의 시대는 곧 제이팝의 시대이기도 했는데 그 또한 2000년대 초반 정도까지가 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케이팝이 이런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 아닐까. 소녀시대가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 2010년대 초의 일이므로 2020년 현재 케이팝이 '반짝 유행'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폄하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한국 대중문화가 영원토록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대중문화는 원래 그런 것이다. 매일 새로운 스타가 떠오르고, 왕년의 스타는 쓸쓸히 퇴장한다. 케이팝도 언젠가는 유행의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문화산업은 한 국가의 경상 수지 전체를 장기간에 걸쳐 책임져주지 못한다. 1970년대 세계는 스웨덴 혼성 보컬 그룹 아바(ABBA) 열풍에 휩싸였다. 스웨덴 양대 수출품은 아바와 사브(SAAB·항공기, 자동차 메이커)라는 농담까지 오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스웨덴이 음악으로 먹고 사는 나라인가? 그렇지 않다. 케이팝도 예외일 수 없다. 수출 측면에서 보자면 BTS뿐 아니라 그 어떤 아이돌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등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대중문화와 국력의 느슨한 상관관계

케이팝 그룹 블랙핑크가 10월 초 발매한 정규 1집 ‘디 앨범(THE ALBUM)’은 미국 빌보드 200 앨범차트 2위에 올랐다. [YG엔터테인먼트 제공]
대중문화 생산과 수출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며 국가 경제에서 작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미국과 일본에 국한된 일이다. 미국의 경우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선점했다. 현실 속 피사체를 연출하고 찍는 문화산업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점한 것이다. 반면 일본은 게임, 캐릭터, 애니메이션 등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만들고, 이야기를 짜고, 게임으로 제작해 판매하는 산업에서 다른 나라가 따라오기 어려운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물론 세상만사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므로, 케이팝 혹은 케이팝에서 비롯한 새로운 문화 산업의 문법이 출현할 수도 있다. 그 새로운 문화 산업이 한국을 종주국으로 삼아 할리우드 영화 산업처럼 100년이 넘도록 순항해 한국이 그 중심지 노릇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가능성을 보고 국가 정책을 세워서는 안 된다. 케이팝의 성공은 해당 업계 종사자들에게는 노력의 산물이지만 국가 전체를 놓고 보면 그저 행운일 뿐이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어떤 가수는 왜 뜨는가? 외모도 비슷하고 심지어 노래는 더 좋은데 내가 좋아하는 스타는 왜 각광받지 못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한국 가수가 빌보드 차트 1위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해상도를 좀 낮춰보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대중문화와 국력 사이에는 느슨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의 대중문화가 사랑받는 것은 그 나라에 방문하고 싶어 하는, 혹은 가서 살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대중문화가 폭발하고 중흥하는 시점에 해당 국가의 경제력은 인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경우가 많다. 

예외가 없지는 않다. 구소련의 록 가수였던 빅토르 최의 음악을 좋아한다 해서 그 시절 소련에서 살고 싶어 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관관계는 대체로 사실이다. 가령 홍콩의 경우 언제나 한국인이 동경하는 곳 아니었던가.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영화와 음악에서 잘나가던 1980년대는 홍콩 경제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당시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답답함을 느끼던 많은 한국인은 홍콩의 자유와 개방적인 문화를 동경했다.

자유와 풍요라는 두 기둥

요컨대 잘 사는 나라에 사는 예쁘고 잘생긴 멋쟁이가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모습을 볼 때, 동경하는 마음이 들고, 그래서 그 나라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사랑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외를 찾자면 이 또한 얼마든지 반박 가능할 주장이다. 하지만 적어도 케이팝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호응을 얻는 현상의 바탕에 이런 이유가 깔려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이 1980년대에 홍콩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던 바탕에는, 한국보다 잘 살고 또 자유로운 홍콩에 대한 동경이 깔려 있었으니 말이다. 

자유와 풍요가 대중문화 성공을 이끌어내는 두 개의 원인이라고 우리는 이야기해볼 수 있다. 어떤 나라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가수가 성공할지, 무슨 영화가 흥행할지 맞히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어렵지만, 어떤 나라의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전반적인 인기를 끌지 예상하는 것은 훨씬 난도가 낮은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보다 잘 살고 자유로운 나라의 대중문화 콘텐츠를 좋아한다. 

여기서 잠시 자유와 풍요라는 두 요소의 관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양자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흔히 믿어왔다.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나라 중 경제적으로 낙후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켜주고 미국 시장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던 미국의 리버럴 엘리트들 역시 그랬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저절로 자유로운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됐다. 중국은 부유해졌지만 자유로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시아의 진주' 홍콩을 입에 넣고 으스러뜨리고 있는 중이다. 언제까지 지금 같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면서도 경제적 풍요를 이루는 일에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국가가 무서운 국민의 나라

10월 23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항미원조 전쟁 참전 70주년 기념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베이징=AP 뉴시스]
대중문화 영역에서 중국은 여전히 수입국으로 남아 있다. 창의성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분야, 꿈을 가지고 도전하는 이들이 최선을 다해 수도 없이 실패해야 겨우 하나의 성공작이 나오는 그런 분야는, 자유 없는 풍요로 국민을 억압하는 중국에서 온전히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중국이 산업으로서의 케이팝을 모방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중국 스타가 홍콩 영화 스타처럼 인기를 끈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벌어지기 어려울 듯하다. 

대중음악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게임 시장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중국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력으로 블리자드를 비롯한 서구 주요 게임 개발사를 인수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개발한 자체 콘텐츠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왜 재미가 없을까? 상상력을 펼치는 대신 정권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게임 규제는 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놀랄 수준이다. 중국인들은 오직 중국인만 접속하는 서버에서 게임을 해야 한다. 외국인과 게임 내 채팅으로 대화하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다. 감염병이나 좀비 등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 등장해도 안 된다. 

심지어 게임에 맵을 편집하는 기능도 넣을 수 없다. 조슈아 웡을 비롯한 홍콩 민주화 투사들이 닌텐도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 게임 내 디자인 기능을 활용해 "광복 홍콩, 시대 혁명(光復香港 時代革命)"이라는 문구를 넣어 퍼뜨렸는데 앞으로는 그런 것도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게임 내 조직 결성 등도 당연히 금지돼 있다. 

중국이 지금의 풍요를 이뤘는데도 문화산업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 게임 개발자는 좀비도 감염병도 게임에 넣지 못하지만, 영국 게임 개발자는 플레이어가 감염병이 돼 온 인류를 감염시키면 승리하는 게임을 만들어냈다(전염병 주식회사‧Plague inc). 풍요만 있고 자유가 없는 땅에서는 그 어떤 기발한 콘텐츠도 나올 수 없다.

SNS에 '항미원조' 기념한 중국 스타들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 출신 빅토리아의 중국 웨이보 화면 캡처. ‘항미원조 전쟁 70주년’을 기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제아무리 예쁘고 잘생기고 재능 넘치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중국 연예인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을 듯하다. 10월 23일 벌어진 어이없는 촌극을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엑소의 레이, 에프엑스의 빅토리아, '프로듀스 101' 출신 중국인 가수 주결경과 걸그룹 우주소녀의 중국인 멤버 성소·미기·선의 등이 '항미원조' 기념일을 축하하는 게시물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게시하면서 논란이 발생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연예인이, 과거 중국이 한국을 침략했던 것을 기념하고 축하한다고 SNS에 게시물을 올린 것이다. 

한국인 처지에서는 극히 황당한 사건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바로 이런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은 앞으로도 한국 대중문화를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다. 해외에 나가 활동하면서도 정부 방침에 따라, 중국 팬들 눈치를 보며 SNS에 게시물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연예인이 어떻게 세계 대중의 우상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국민이 국가를 두려워하는 나라, 알량한 풍요로 자유의 박탈을 정당화하는 나라에서, 대중문화는 꽃필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자니 기분이 석연치 않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은 자유와 풍요를 서서히 잃어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 감사원에 따르면 월성 1호기의 경제성은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했다. 그렇게 낮은 평가를 한 이유는 청와대, 달리 말하면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맞춰 어떻게든 월성 1호기를 폐쇄하라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우리의 경제적 풍요를 지탱하는 에너지 산업, 그 척추와도 같은 원자력 산업을, 임기 5년짜리 대통령이 으스러뜨리고 있다. 과연 우리가 풍요를 지킬 수 있을까? 

자유라는 측면으로 넘어오면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해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걸핏하면 한류 스타를 불러 들러리로 세웠다고 비판하던 당시의 야당이, 권력을 잡자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본인들은 군대 가겠다는데 빌보드 차트 1위를 했다고 BTS 군 복무를 면제하자는 소리를 정치권에서 들먹인다. 정치가 문화·연예에 너무 간섭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숟가락을 들이대다 보면 케이팝과 한국 대중문화가 외국인에게 점점 중국 비슷해 보이지는 않을지 우려된다. 

한국과 중국을 확실히 차별화하는 무언가를 우리는 추석을 하루 앞둔 날 TV를 통해 목격할 수 있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초청해도 가지 않는 배짱과 뚝심의 대중예술가 나훈아. 코로나19에 지친 국민을 위로하고자 오래간만에 방송 무대에 선 그는 당당히 권력을 향해 일침을 놓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유. 이것이 한국 대중문화의 진정한 원동력이다. 

케이팝의 인기는 영원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가기를 바란다면 정치는 문화 예술에서 손을 떼야 한다. 온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풍요를 보장하는 일에나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한국인 스스로도 '억울한 희생자' 역사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책임 있는 세계 시민으로 스스로를 성장시키고자 힘써야 할 때다. 이렇게 우리가 더 나은 나라를 만든다면, 제2의 BTS와 블랙핑크는 자신들의 힘으로 나타날 것이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