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6

‘백신 진수성찬’이라며 정권이 내놓은 밥상은 텅 비어 있었다

[노정태의 시사哲]
[아무튼, 주말] ‘백신 상상놀이’ 빠진 文 정권에 피터 팬이 말했다 “놀고 있네”

/일러스트=안병현
 

마흔 살의 M&A 변호사 피터 배닝(로빈 윌리엄스 분). 사업이 한창 궤도에 오른 시점에 뜻밖의 일을 겪는다. 런던에서 아들과 딸이 납치당한 것이다. 고아였던 그를 거두어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준 웬디 할머니의 집 안 곳곳은 갈고리로 긁은 흔적이 가득하고, 벽에는 협박 편지가 칼로 꽂혀 있다. ‘피터 팬, 네 아이들을 찾고 싶다면 네버랜드로 와라.’

네버랜드에서 맞이한 첫 번째 저녁. 식탁 위에는 빈 그릇과 식기만 가득하다. 어리둥절한 피터에게 팅커벨이 규칙을 설명해준다. ‘상상해 봐, 그럼 진짜로 먹을 수 있어.’ 아이들은 피터가 없는 동안 리더가 된 루피오의 지시에 따라 기도를 하고 열심히 먹는 시늉을 하지만 여전히 그릇은 비어 있다. 피터의 상상은 달랐다. 크림을 한 숟가락 떠서 루피오의 얼굴에 날리는 시늉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짠! 루피오는 크림을 뒤집어쓰고 갑자기 식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무에서 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음식을 가지고 ‘노는’ 상상을 통해 피터는 어린 시절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임스 매슈 배리의 소설 ‘피터 팬'을 원작으로 삼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1년 작 ‘후크'의 한 장면이다. 루피오에게 상상의 크림을 던질 때 피터는 더 이상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변호사 피터 배닝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피터 팬으로 돌아간 것이다.

네덜란드가 낳은 문화인류학의 대가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라는 현상에 주목했다. 놀이는 모든 문화의 근간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대표작 ‘호모 루덴스'를 펼쳐볼 때다.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내가 엄마 할게, 네가 아빠 해. 놀이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행위다. 스스로 역할과 규칙을 정한다. 또한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소꿉놀이가 끝나거나 놀이방을 나가면 나는 엄마가 아니고 너도 아빠가 아니다. 하지만 소꿉놀이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한없이 진지하게 엄마와 아빠가 되어 있다. 자유로운 규칙, 시공간의 한계, 진지한 몰입. 놀이를 만드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인류 문화의 근간에 깔려 있다는 놀라운 통찰이다.

놀이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다. 무언가를 흉내 내고 따라 하는 ‘모방유희’, 서로 견주고 다투는 ‘경쟁유희’가 그것이다. 모방유희는 종교, 예술, 창작의 원천이 된다. 경쟁유희는 전쟁, 스포츠, 법률, 심지어 철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토대에는 소피스트들의 말싸움과 언어유희가 깔려 있다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호모 루덴스'는 1938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은 21세기에 들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인터넷, 소셜미디어, 문화 산업의 발전 때문이다. 웹소설과 웹툰은 막대한 규모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의 영향력과 수입은 어지간한 연예인 부럽지 않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같은 대표적 K팝 그룹은 수출 기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미학자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에 따르면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피터 팬이 루피오의 얼굴에 크림을 던지면 텅 빈 테이블에 음식이 생기듯, 말 그대로 ‘상상력이 밥 먹여주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호모 루덴스의 놀이, 혹은 마법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매직 서클’ 내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치, 외교, 안보, 경제 등 다양한 분야는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의 영역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놀이와 상상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코로나 백신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다. 현재 국내에 들어온 화이자 백신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었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상대적으로 넉넉한 편이다. 그나마도 물량이 부족해 우리는 2월 25일까지 백신을 맞지 못하고 있었다. 졸지에 이란, 이집트, 터키, 브루나이, 베네수엘라, 우크라이나와 같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국민의 실망감이 차오르는 듯하자 갑자기 ‘K주사기’ 타령이 시작됐다. 국내에서 개발된 ‘최소 잔여형 주사기’를 이용하면 6인용 백신을 7명에게 주사할 수 있다는 “대박 사건”이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치약이 없어서 이빨을 못 닦는 집구석에 치약 짜주는 도구가 많다고 기뻐하는 꼴이었다. 옆 반 애들은 피자를 각자 두 조각씩 먹는데, 문재인 반장은 달랑 피자 한 판 사다놓고 잘 쪼개면 여섯 조각을 일곱 명이 먹을 수 있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2월 3일에는 백신 유통 모의 훈련을 한다며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시끌벅적한 행사를 하고 보도 자료를 뿌리는 촌극도 벌어졌다. 23일에는 백신접종센터 대테러 훈련도 있었다. 이미 세계 백여 국가에 백신이 유통되고 있다. 테러범도 그런 걸 목표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쇼 머스트 고 온(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이었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대통령이나 총리, 여왕 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앞장서서 백신을 맞았다. 비과학적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은 거꾸로 갔다. 대통령이 자기가 맞지도 않는 백신 접종을 ‘참관’하러 간 나라가 또 있을까. 결국 우리는 대통령이 ‘안티백서(Anti-Vaxxer, 백신 음모론자)’인 나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셈이다. ‘K방역’은 이렇게 끝났다.

문재인 정권은 백신 계약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원인을 정확히 밝히고 이해와 용서를 구해도 모자라다. 하지만 정부는 현실의 백신 부족을 상상력으로, 그것도 식상해진 ‘탁현민 쇼’로 때우고 있다. 국민은 피터 팬이 돌아오지 않은 네버랜드에서 억지로 맛있는 척 꾸역꾸역 먹는 시늉을 하던 어린이들 신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테이블에 백신이 넉넉하게 올라올 날은 과연 언제일까.

루피오는 ‘기도하고 밥을 먹는’ 상상을 아이들에게 강요했다. 재미가 없었고 밥그릇은 텅텅 비어 있었다. 피터가 루피오의 얼굴에 크림을 던지자 그제야 테이블은 진수성찬으로 가득 찼다. 정치는 현실이지만 때로는 ‘상상력의 예술’이 된다. 청와대의 ‘호모 루덴스’들을 향해 ‘놀고 있네’라며 통쾌하게 한 방 날려줄 피터 팬을 기다린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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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8

오용된 빌 게이츠, 오염된 원전 논쟁

 [노정태의 뷰파인더㉓] 누가 그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나

● 교과서로도 완벽한 책 ‘기후재앙’
● 목표 “세계 에너지산업 바꾸는 것”
● 그의 진심은 원자력발전소 혁신
● 국내 논의는 엉뚱한 방향 향해
● 탈원전 논의 수준에 그칠 책 아냐
● ‘탄소 제로’ 해법, 한국이 쥐고 있다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최근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원제: How to Avoid a Climate Disaster)을 펴냈다. [빌 게이츠 공식 페이스북]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이하 ‘기후재앙’)은 훌륭한 책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이며 명민한 두뇌를 가진 엔지니어가 오랜 기간 준비해서 낸 책으로 손색이 없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다양한 이슈를 공부하고 명확하게 정리해냈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 같은 제목의 대학 강의가 생긴다면 1학년 1학기 교과서로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빌 게이츠의 목표는 명료하다. 2050년까지 탄소 배출을 ‘제로(0)’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상 탄소 배출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발전된 기술과 비즈니스 및 행정을 통해 배출 탄소를 적극 제거함으로써 탄소 중립을 거의 달성한 상태를 그는 ‘제로’라고 부른다.

이 명료한 목표는 사실 대단히 무모한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이 책을 둘러싼 오해와 논쟁은 대부분 그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대한 전환 위한 ‘투 트랙 전략’
기후변화가 화제로 떠오르면서 국내에도 관련 서적이 다수 번역됐다. 국내 저자들의 책도 여럿 출간됐다. 모두 살펴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비를 줄여야 하고, 플라스틱 사용은 죄악에 가까우며, 육류 섭취는 완전히 끊거나 줄여야 마땅하고, 전기는 태양광과 풍력만이 올바르다는 그런 내용들이 담겨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물론 ‘기후재앙’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빌 게이츠가 사업에 전념하던 젊은 시절 미국 시애틀에서 가장 오래된 햄버거 프랜차이즈인 버거마스터에서 삼시세끼를 모두 해결했다거나, 그의 아버지도 버거마스터에 죽치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우편물을 버거마스터로 보낼 지경이 되었다거나, 그럼에도 이제는 환경을 위해 치즈버거를 그리 많이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162쪽)은 유쾌하고 진솔하다. 

하지만 그런 건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와 거의 무관하다.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빌 게이츠는 그보다 훨씬 크고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의 목표는 “세계 에너지 산업, 다시 말해 5조 달러 규모의 산업이자 현대 경제의 근간이 되는 산업을 바꾸는 것”(18쪽, 서문)이다. ‘제로’에 도달하기 위해 인류는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되는 산업, 에너지 산업을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 ‘기후재앙’의 주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거대한 전환은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투 트랙 전략이란 첫째로 제로 탄소 전기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데 ‘올인’하고, 둘째로 화석연료에 의존적인 지역을 포함해 자동차부터 열펌프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기화하는 전략이다.”(281쪽) 

순서를 바꿔 서술해보면 더 이해가 쉽다. 우선 세상의 모든 에너지 공급원을 전기로 바꾼다. 자동차도 전기로 몰고, 배도 (가능하다면) 전기로 운항하고, 비행기는 배터리가 너무 무겁기 때문에 불가능하므로 탄소 배출 제로인 항공유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냉방 뿐 아니라 난방 역시 화석연료를 태우는 보일러 대신 전기로 작동하는 히트펌프로 대체하며, 취사 같은 것도 전기로 바꾼다. 그리고 그 전기 자체를 탄소 제로로 생산하면 많은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 것이다.

산업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말
글로 적어놓고 보면 별것 아닌 계획 같지만 그 속에 담긴 경제적 함의는 실로 무지막지하다. 무슨 종류의 발전소를 세우고 송전탑을 짓네 마네 하는 차원을 가볍게 넘어선다. 자동차, 선박, 건축, 냉난방, 항공, 제조업, 농업 등 소규모 서비스업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산업 분야를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자동차와 운송 분야를 생각해보자. 테슬라를 필두로 한 전기차 메이커들의 공격으로 기존의 승용차 업계가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정부에서 지급하는 보조금을 빼고 나면 전기차는 여전히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충전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주행 거리가 짧으며, 배터리의 수명이 다하면 다량의 처치 곤란한 폐기물을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전기차를 충전하는 전기의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이 있다면 전기차 역시 ‘제로’를 향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량의 승객과 화물을 날라야 하는 버스, 트럭 등 대형 운송 차량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리튬 이온 배터리 전기차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배터리 자체의 무게로 인해 운송 효율이 턱없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비행기 역시 계속 탄화수소(석유)를 연소하는 엔진을 쓸 수밖에 없다. 전 세계 화물의 대다수를 운반하는 컨테이너선의 경우 벙커C유(油)를 연료로 사용한다. 벙커C유는 원유를 정제하고 나오는 잔여물인지라 그 가격이 턱없이 저렴하다. 어지간해서는 가격 경쟁이 되지 않는다. 시장에서 자동적으로 퇴출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빌 게이츠가 원자력에 우호적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 어떤 다른 청정에너지원도 원자력에너지와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더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가까운 미래에 저렴한 비용으로 전력망을 탈탄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123쪽) 

빌 게이츠는 체면치레삼아 ‘원자력 발전의 문제는 삼척동자도 안다’고 한 마디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의 진심은 이런 것이다. 

“원자력은 자동차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원자력은 그 어떤 화석연료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을 죽인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동차의 문제점을 개선한 것처럼 원자력발전소도 문제를 하나씩 분석한 다음, 혁신으로 해결하며 개선해야 한다.”(126쪽) 

일각에서는 빌 게이츠가 원자력발전소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대목이 전체 책의 분량상 얼마 되지 않는다며, 이 책을 탈원전 정책에 대한 반대 논거로 끌어들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빌 게이츠는 우리가 원자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내기를 원한다. 원자력을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더 개선하고 발전시켜가며 널리 사용하기를 바란다. 어느 정도냐면, 벙커C유를 퇴출시키기 위해 핵연료로 움직이는 컨테이너선의 활용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정도다. 중요한 대목이니 직접 읽어보자. 

“또한 핵연료로 움직이는 컨테이너선도 고려해야 한다. 핵연료 컨테이너선과 관련된 리스크는 현실적이다(예를 들어 배가 침몰한다고 해도 핵연료가 새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많은 기술적 난제들이 해결되었다. 이미 군용 잠수함과 항공모함은 핵연료로 움직이지 않는가?(211쪽)”

‘원자력 묻고 더블로 가자’
경북 울진에서 가동 중인 한울원자력발전소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원자력발전은 당연하고, 다소 철 지난 유행어를 빌리자면, ‘원자력 묻고 더블로 가자’는 것이 ‘기후재앙’의 주제다. 빌 게이츠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을 10% 줄이고, 2040년까지는 20% 줄이자는 식의 점진적 개혁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산업적, 경제적 구조를 통째로 들어 엎자는 것이다. 그 취지를 빌 게이츠는 결론 부분에서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정직하게 서술하고 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과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굉장히 다르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은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을 위한 중간 단계의 목표가 아니다. 직감적이지는 않지만 굉장히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잘못된 방식으로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감축하면 자칫 2050년까지 제로 달성을 ‘못하게’(원문에도 강조가 돼 있음) 될 수 있기 때문이다.”(280쪽) 

아직 ‘기후재앙’을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저자의 취지가 잘 와 닿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방금 언급한 요점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이 책은 기후변화에 대한 책이지만, 기후변화‘만’을 염두에 두고 쓰인 책이 아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에너지 체계와 그에 기반한 산업 구조를 만들자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빌 게이츠의 목표다. ‘기후재앙’은 바로 그 새로운 미래를 향한 청사진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국내의 논의는 실로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특히 진보 언론의 왜곡이 도드라진다. ‘경향신문’은 논설위원 칼럼에서 빌 게이츠가 만든 원자력발전소 연구 기업인 ‘테라파워’의 신형 원자로가 핵융합로라고 서술했다가 독자들의 비난을 받고 슬그머니 칼럼의 내용을 바꿨다. 

‘한겨레’ 역시 여러 차례 ‘기후재앙’을 비판했는데 그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2월 23일 공개된 ‘빌 게이츠, 친원전 진영의 구세주가 됐다고?’라는 기사를 보면, “에너지생산, 제조업, 농축산업, 교통, 냉난방 등 인류 전 영역의 변화와 재생에너지 투자·확대를 촉구했던 게이츠의 주장은 오로지 원전만이 유일한 구세주인 것 마냥 납작해졌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빌 게이츠는 세상의 모든 에너지를 전기로 통합하기를 원한다. 그 전기의 생산에서 원자력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더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원전만이 유일한 구세주인 것 마냥”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볼 때, 원전을 배제한 그 어떤 ‘친환경 정책’도 친환경이 아니라는 것 역시 명백하다. 

원자력발전과 에너지를 둘러싼 논의는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오염돼 있다. 그 현실이 ‘기후재앙’에 대한 해석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빌 게이츠가 볼 때 원자력의 사용은 너무도 당연해서 논쟁거리가 되지도 않는다. 그래야 마땅하다. 그가 원자력에 그렇게까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당연히 택해야 할 해법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통째로 바꾸는 이야기를 하는데 왜 빌 게이츠를 한국의 탈원전 논쟁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가. 빌 게이츠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는 건 과연 누구인가.

메추라기가 대붕(大鵬) 비웃듯
2017년 7월 31일 당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가운데)과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에서 2번째)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에서 탈원전 정책 긴급 당정협의가 열리고 있다. [동아DB]
‘장자’의 ‘소요유’편을 떠올려보자. 북쪽바다의 물고기가 변신한 거대한 새 대붕(大鵬)이 하늘을 난다. 그런데 메추라기가 대붕의 나는 모습을 보며 한 마디 한다. “저 놈은 어디로 가려고 저러느냐?” 구만리 창공을 나는 대붕을 보며, 기껏해야 몇 자 몇 치를 뛰듯이 날아다니는 메추라기가 비웃는 것이다. 

‘기후재앙’에 대한 국내 언론의 반응과 논란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빌 게이츠가 이 책에서 한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탈원전 논쟁과 무관하지 않다. 원전 사용을 늘리자는 것이니 굳이 분류하자면 탈원전 반대다. 

하지만 그 맥락에서 소비되고 말 논의가 절대 아니다. 인류가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생존과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구만리 상공을 나는 대붕의 눈이다. 

메추라기들의 짹짹거리는 소리는 잊고, 대붕의 눈높이에서 한국의 탈원전 논쟁을 바라보자. 현재 대한민국은 러시아, 중국과 함께 원전을 낮은 가격으로 양산해낼 수 있는 원천기술을 보유한 몇 안 되는 국가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 서방 세계의 동맹국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원전은 에너지 인프라이며 동시에 안보 자산이기 때문이다. 

2050년까지 ‘탄소 제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에 많은 원자력발전소가 필요하다. 원자력발전소를 저렴하게 빨리 짓는 것으로 정평이 난 우리의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가 진정 ‘역대급 위기’라면,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을 우리가 손에 쥐고 있다. 

현 정권이 탈원전 정책을 철회하고 적극적인 원전 세일즈 외교를 펼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빌 게이츠를 비롯해 기후변화 대책으로 원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환경주의자와 운동가들을 앞세워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에너지 산업 분야에서도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처럼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중요 플레이어를 배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역사상 두 번 오기 힘든 기회다. 

이는 경제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후 유엔과 국제사회의 도움 속에 성장하여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는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맞아 전 세계를 구원함으로써 그 은혜를 멋지게 갚을 수 있는 상황이다. 자체적인 원자력발전소 기술을 가진 중국은 논외로 해보자. 인도, 나이지리아 등 인구가 많고 경제가 성장하고 있지만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석탄화력 발전소를 늘릴 수밖에 없는 나라가 아직 지구상에는 많다. 선진국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대정전을 겪은 텍사스에 한국의 원전이 힘을 보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빠르고 안전한 원자력발전소가 빛을 안겨준다면, 우리는 돈을 벌면서 동시에 세계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문명 고민하는 호쾌한 시각
과학적으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삼중수소 논란’ 같은 것을 일으키는 탈원전 진영의 눈높이는 ‘장자’에 나오는 메추라기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위험하지 않은데도 위험하다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화들짝 놀라고 비명을 지르는 피해자의 위치에 스스로를 묶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기후재앙’은 그런 면에서 신선한 자극을 준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쇠고기를 덜 먹고 비닐봉지 대신 에코백을 들고 다니자는 ‘착한’ 운동을 넘어, 지구 전체를 바라보고 이해하며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물론 빌 게이츠의 생각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호쾌한 시각만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우리도 이제 개인과 국가를 넘어 문명을 고민해볼 때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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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7

[朝鮮칼럼 The Column] 文 대통령은 철종인가, 고종인가

 대통령이 주변 세력에 휘둘리는 허수아비?
갈등 방치해 권력 지키고 지지자 결속 다지는 효과
필요에 따라 수동적 모습 적극적으로 연출하는 것

지난 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문재인 대통령./연합뉴스
박범계 법무장관은 신현수 민정수석과 문재인 대통령을 모두 ‘패싱’하고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발표했던 것일까.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면서도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는 않고 있다. 유영민 비서실장은 중대범죄수사청 설치에 대해 ‘문 대통령이 속도 조절 당부를 했다’고 국회 운영위에서 발언했다. 하지만 박 법무장관, 김경수 경남지사, 박주민 의원 등은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다’며 반발하는 상태다.

이런 식이다 보니 일각에서는 ‘문재인 허수아비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마치 안동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 없이 휘둘리다가 일찍 세상을 뜬 ‘강화 도령’ 철종처럼, 문 대통령을 자리에 앉혀놓고 조종하는 특정 세력이 막후에서 현 정국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비선 실세’의 통제하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의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청와대 내부 인사로부터 전해들은 어떤 ‘소스’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사례와 권력의 생리를 놓고 볼 때 ‘문재인 허수아비설’은 설득력이 크지 않다.

연합군과 소련군 양쪽의 압박을 받아 함락 직전이던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돌아가 보자. 이미 상당수의 부하들이 적에게 투항했다. 일부는 아예 명령을 듣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 틀어박혀 무의미한 항전을 이어나갔다. 왜일까?

히틀러는 베를린을 떠나거나 항복 의사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무적의 천재 전략가 히틀러 총통’이라는 대중의 환상이 깨진다. 그것은 권력의 붕괴를 뜻했다. 그러니 존재하지도 않는 군대를 지휘하며 전쟁놀이를 하다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되었을 때 자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나라가 망하건 말건 본인은 총통으로서 죽을 테니 말이다.

문 대통령의 모든 것을 히틀러와 비교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외우내환과 사분오열을 방치하거나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입지와 이익을 지키는 어두운 권력의 기술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종의 사례가 좀 더 잘 와닿을지 모르겠다. 고종은 대원군과 명성왕후 사이의 갈등을 철저히 활용했다. 동학을 믿는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그 청군을 통제할 수 없으니 일제를 불러들였고, 개화파의 힘이 커지자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갔다.

결국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나라는 쑥대밭이 되어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한일합방 이후 고종과 그 일가는 일제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공족(王公族)으로 분류됐다. 황족에 준하며 일본의 귀족인 화족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얼핏 보면 무능한 고종이 아버지와 아내와 신하들, 침략하는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끌려다닌 것 같지만, 최후의 승자는 고종이었다.

대통령이 주변 세력에 휘둘리고 있다고만 볼 수 있을까. 박범계 대 신현수, 유영민 대 김경수 등의 갈등 구도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충돌할 때 드러났던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실력이다. 이게 바로 문재인 대통령의 ‘실력’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윤건영 의원의 말마따나 현 정권의 힘은 이 와중에도 40%대를 유지하는 대통령 지지율에서 나온다. 지지의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문 대통령이 능력이 부족하고 서툴 수는 있어도 나쁜 의도를 가진 건 아니라는, 선한 의지에 대한 지지층의 믿음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문재인 허수아비설’은 현 정권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믿었던 부하들조차 말을 듣지 않는 외로운 대통령을 향해 지지자들은 오히려 동정표를 보내고 결속을 다지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 틀어박힌 채 고립무원의 지도자상을 연출하며 권력을 지켰던 것과 마찬가지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국토부가 반기를 들자 당장 부산을 방문해 “조속한 입법을 희망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라. 문 대통령은 ‘패싱’당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필요에 따라 수동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연출할 뿐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일 뿐 ‘팩트’는 아니다. 문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확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오늘도 ‘패싱’당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묻고 싶을 따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철종인가, 고종인가.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2021-02-22

터키에 에스프레소 머신이 퍼지게 된 이유는?


터키는 커피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국가 중 하나. 그들이 커피를 마시는 방법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아주 곱게 간 커피 가루를 제즈베라는 구리 주전자에 넣고 끓여서 마시는 것이다. 당연히 매우 쓰기 때문에 설탕을 팍팍 쳐서 먹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터키의 거리에 에스프레소 머신이 늘어났다. 낯선 문화가 갑자기 퍼진 것이다. 그 이유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난민들이 넘어왔기 때문.

시리아 사람들이 원래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셨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시리아의 커피 문화도 오래되었고, 터키와 비슷하다. 곱게 분쇄한 커피를 추출해서, 아니 차라리 달여서 많은 양의 설탕이나 프림과 함께 마셔왔다.

하지만 시리아 난민들은 좁은 공간에 모여 살고 자연스럽게 거리에서 시간을 보낸다. 몇 시간씩 커피를 달이고 있을 공간도 시간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중고로 구입해 거리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터키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은 중고로 미화 2500달러 정도인데, 감가상각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관계로 되팔때도 비슷한 값을 받을 수 있다. 식당 같은 큰 사업을 벌이기에는 부담스러운 이들이 작은 자영업으로 하기에 딱 적당한 아이템이 되었다. 그래서 터키의 도시 중 시리아 난민이 많은 곳에는 어김없이 에스프레소 머신이 즐비하다.

그 에스프레소는 우리가 아는 '에스프레소'와 다르다. 원두를 탬핑하지 않는다. 당연히 표준적인 에스프레소보다 맛이 연한데, 그 위에 인스턴트 커피 가루를 뿌려서 더 강한 맛을 낸다. 

그럼 처음부터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아무튼 시리아 난민들은 난민 생활이라는 환경 속에서 그런 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위에 막대한 양의 설탕과 프림을 뿌려 먹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아무리 봐도 맛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커피가 맛있고 맛없고 등등은 모두 문화와 취향에 따른 것이겠지.)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건 어떤 식으로건 살아가며, 자신의 문화를 지키려 한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교훈. 최근 몇 달 간 유튜브에서 본 영상 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기에, 공유한다. 11분 정도 되니 여유 있으신 분들은 한번 직접 보시길.

2021-02-20

직업윤리 저버린 권력자들로 ‘대한민국號’가 위태롭다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美 조종사 설리가 보여준 ‘직업윤리란 무엇인가?’

체슬리 설렌버거, 일명 캡틴 ‘설리’. 40년 경력을 자랑하는 조종사다. 이 남자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두 엔진을 모두 잃고도 희생자 단 한 명도 없이 완벽한 비상착륙을 해낸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2009년 1월 15일 뉴욕에서 있었던 실화다. US 에어웨이스 1549편이 이륙 직후 새 떼에 부딪혀 동력을 잃었지만 허드슨강에 무사히 착륙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혹한에 일부 승객이 강물에 빠졌지만 전원 무사 구조되었다.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해 총 155명이 생환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은 이렇게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직업윤리란 무엇인가?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는 설리가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설리에게는 승객을 안전하게 모실 의무가 있었고, 자신의 역할을 완수했다. 직업윤리의 영웅이다. 반면 NTSB는 사고 원인과 전개 과정을 정확히 파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언론이 설리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고 해서 그를 검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승객 전원을 무사히 보호해낸 설리는 이제 NTSB 앞에서 자신의 명예와 경력을 지켜야 한다. 두 직업윤리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서 청문회에 불려나온 캡틴 설리(톰 행크스·왼쪽)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대표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펼쳐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이나 르네상스 시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은행가였던 야코프 푸거 등은 수많은 조언을 남겼다. 정직해야 하고, 친절해야 하며, 절제해야 하고, 이웃이 믿을 수 있는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신뢰받는 상인으로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돈을 뭐 하려고 벌까? 이들은 ‘적당히 벌었으니 사치스럽게 놀고 먹자’는 식의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았다. 죽는 그날까지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돈에 대한 욕심은 인류 공통이지만, 경건한 태도로 돈벌이에 임하는 것은 오직 서구의 근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들에게 일이란 윤리의 최고선(summum bonum)에 다가가는 방법이었다. 베버는 그런 사고방식을 자본주의 정신, 혹은 직업윤리라고 불렀다.

근대 이전까지는 직업으로 사람의 귀천을 나누었다. 동서양 모두가 그랬다. 조선이 사농공상 논리로 작동했다면 서양의 중세는 성직자와 기사 계급이 상공업자와 농민들을 착취하며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런 사고방식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서 뒤집혔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핵심이다. 사람은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함으로써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직업윤리의 요체다. 모든 직업이 평등하다는 것. 그러므로 어떤 일이건 성심성의껏 해나가야 한다는 것. 이는 곧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는 말과도 같다. 직업윤리는 자본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직업윤리라는 개념이 국민적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15일 조선일보에 실린 한동훈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의 인터뷰 때문이다. 특수통 검사 한동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정권을 겨냥한 소위 ‘적폐 청산’ 수사의 일선에 섰고 ‘꽃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조국 일가를 수사하면서 문재인 정권과 맞섰고 세 차례에 걸친 좌천성 인사를 감내하며 대가를 치르고 있다. 눈 딱 감고 조국 수사를 안 했다면 계속 승승장구했을 텐데 왜 사서 고생할까? 한동훈의 대답은 간명했다. “그냥 할 일이니까 한 겁니다. 직업윤리죠.”

한동훈과 그의 상관인 윤석열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무리한 수사를 해왔다는 비판도 있다. 일리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직업과 사회적 역할이 존재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검찰을 통제하는 것은 법원 몫이다. 마치 설리를 철저하게 검증하던 영화 속 NTSB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직업윤리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장은 한 사람의 판사이면서 동시에 사법부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삼권분립은 그의 직업적 소명의 핵심이다. 판사들이 정치적 외압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그러한 본분을 다하기는커녕, 정치권에서 탄핵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니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법원장을, 국민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공적 차원에서 거짓말을 했으니 판사로서도 실격이다. 사퇴해야 마땅하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과 직업윤리의 기원을 개신교에서 찾았다. 자본주의 자체는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현상이었지만 자본주의의 바탕에 소명 의식과 직업윤리를 도입한 것은 개신교 문화권의 서구에서만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벤저민 프랭클린은 대체 왜 “사람에게서 돈을 짜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아버지가 가르쳐준 성경 구절을 통해 대답한다. “네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서리라.”

이러한 서구 개신교 중심적 설명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 논쟁만 따로 떼어내도 별개 학문이 성립할 지경이다. ‘서구’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 기원이 어찌 됐건 직업윤리는 ‘우리의 윤리’다. 2021년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자본주의 체제를 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직업윤리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캡틴 설리 또한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NTSB에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부기장을 다독여준다. ‘그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US 에어웨이스 1549편의 이륙에서 착륙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8초. 캡틴 설리의 신속한 판단과 행동이 155명을 구했다. 5000만명이 탑승한 대한민국호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경건한 태도로 상공업에 힘쓰는 대신 권력을 이용해 한탕 하려는 자들, 근대적 직업윤리를 파괴하고 전근대적 사농공상 체제로 퇴행하려는 자들이 조종간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늦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도 않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