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 美 여론조사, 83%가 윌 스미스 비판
●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둬
●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 조크에 관대한 美 문화적 전통, 왜?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록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짧은 머리를 두고 “‘G. I. 제인’ 속편이 기대된다”고 농담한 게 화근이었다. ‘G. I. 제인’은 ‘제인’이라는 여성이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데미 무어가 삭발하고 나와 화제를 끈 영화다. 제이다 핀켓 스미스도 그 자리에서 삭발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이다가 윌 스미스의 아내였다는 것, 그리고 제이다의 탈모는 일종의 면역성 질환으로 인한 것이라는 데 있다.
아카데미상은 거의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다. 당연히 여러 해프닝이 있었지만 참석자가 진행자의 뺨을 때리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카데미상뿐 아니라 세계 방송의 역사를 모두 짚어 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건이다.
더 놀라운 일도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국내 반응이다. 공식 여론조사가 진행된 바 없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을 대략 확인해보면 ‘윌 스미스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크리스 록이 심했다’ ‘내가 윌 스미스의 처지여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등의 반응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온정적 반응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으나 미국 현지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미국 연예 매체인 TMZ가 3월 28일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미스가 록의 뺨을 때린 행위에 대해 “록이 맞을 만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 13만4000여명 가운데 17%에 그친 반면, 그러한 행위를 폭행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의견은 83%에 달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폭력을 썼다는 윌 스미스의 해명에 대해서도 오직 15%만이 동조했다.
병 때문에 탈모를 겪고 있는 제이다 스미스를 향한 농담이 설령 지나치다 해도, 그런 농담을 하는 코미디언을 때리는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미국 사회에 두루 퍼져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건 발생한 직후 ‘미국인들이 윌 스미스에게 동정적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 미국 문화는, 현실 속의 미국 문화와 전혀 달랐다.
여성주의적 관점을 둘러대며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 본인부터가 그랬다. 그는 이번에 영화 ‘킹 리처드’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테니스의 전설인 윌리엄스 자매를 길러낸 아버지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그는 그런 영화를 찍으며 가족의 가치를 절감했는데, 아내를 조롱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폭력을 휘둘렀다고 수상 소감에서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했다.
그러한 주장은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 아니, 정반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와 자식 등 가족의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가부장의 의무가 있다며 다른 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발언이다.
이러한 주장은 엉터리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내가 집 밖에서 명예를 잃었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가부장의 행태를 용납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살펴보면 그 위험성을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인도, 파키스탄, 그 외 여러 곳에서 바로 그런 이유로 ‘명예살인’이 벌어진다. 아내나 딸이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나거나 연애를 하거나 혹은 눈만 마주쳐도 ‘가문의 명예’가 실추됐다는 이유로 상대방 남자뿐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인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는 그런 사회의 가부장들과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설적인 NBA 선수이며 미국 흑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인 카림 압둘 자바 역시 윌 스미스의 발언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메일 뉴스레터 서비스 ‘섭스텍’을 통해 3월 29일 공개한 글에서, 압둘 자바는 윌 스미스의 변명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진정 여성을 보호하는 남자들은 1500만 명의 시청자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거들먹대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있다. (...) 여성 보호를 앞세워 자기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말하면서, 윌 스미스는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 그 여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 연설은 그저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부 페미니스트의 견해는 다를 수 있다. 국내에도 ‘나쁜 페미니스트’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작가 록산 게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3월 29일 ‘뉴욕타임스’에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분명히 한 후, 그는 ‘농담’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고 약자를 조롱하는 짓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록산 게이의 말에도 귀담아 들을 점이 있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리는 것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놓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가족을 위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에게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페미니즘, 더 나아가 모든 정치적 진보는 이런 폭력과 선을 긋는 것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이번 사건을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윌 스미스의 집안은 여러모로 복잡한 속사정을 지니고 있다. 두 자녀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소수자로 밝힌 바 있으며, 자녀들은 스미스의 아내와 함께 ‘폴리아모리’를 선언한 상태다. 폴리아모리란 가부장적인 일부일처제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동시에 성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애정 관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제이다 스미스의 폴리아모리는 단지 선언에 머물지 않았다. 제이다는 어떤 남자와 연애했는데, 그는 제이다보다 21세나 어렸을 뿐 아니라, 실은 윌 스미스의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의 친구였다. 아들의 친구와 바람이 난 아내. 윌 스미스는 ‘아내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대범한 모습을 연출했는데, 물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판받을 일이 아니지만 대중적 시각에서 보면 충분히 농담거리로 삼을만한 일이며, 어김없이 그 또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방아에 오르고 말았다.
미국의 연예인과 셀레브리티들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산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파파라치들이 따라붙어 그들의 사생활을 취재하고 팔아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공개 석상에서 혹독하게 조롱당하기 일쑤다. 사생활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이게 무슨 일일까? 미국은 자유의 나라 아닌가?
미국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조크에 관대하다는 것이다. 엄격하고 근엄한 자리일수록 농담을 섞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전통은 미국 영화산업과 대중문화의 큰 축제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도드라졌다. 지금껏 수많은 코미디언들이 진행자가 되어 무대 위에 올랐다. 지금껏 아카데미 시상식은 늘 그랬다. 그 하루를 위해 굶고 꾸미고 갖춰 입은 영화계의 슈퍼스타들을 두고, 그들의 치부를 한껏 드러내고 까뒤집으며 웃음거리로 삼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 사회가 권위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정반대로,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의 권위가 드높기 때문에 출연자들에게 망신을 주는 농담을 허용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삶을 생각해보자. ‘스타’라는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시피, 평소에는 저 하늘의 별처럼 고고하게 떠 있는 존재다. 대중은 그들의 삶에 대해 그저 엿보기만 할 뿐 다가갈 수 없다. 스타들은 그런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바탕으로 천문학적 출연료를 받고 상상하기 어려운 라이프 스타일을 즐긴다.
애정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인들이 아무리 ‘쿨’하다 해도 이렇듯 공공연한 특권층의 존재는 어딘가 배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자리를 빌려 한 번쯤 적나라하게 치부를 드러내고 비웃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가끔 벌어지는 탈춤을 금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줘가며 광대를 불러 춤판을 벌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말뚝이 탈을 쓴 광대가 양반탈을 쓴 광대를 조롱하고 비웃고 골탕 먹이도록 하는 것은 양반의 권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피지배층의 억압된 불만을 해소하면서, 현실 속 신분 차이를 더욱 확실히 느끼게끔 한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권위주의’를 내려놓음으로써 ‘권위’를 공고히 다지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제이다 스미스에게 크리스 록이 던진 농담은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다. 또한 한국은 미국과 다른 나라이며, 미국의 모든 것을 쫓아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화와 교양을 중시하며 ‘정치적 올바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왜 이렇게 과격한 농담을 전통으로 유지하는지, 그 의미를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