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2

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노정태의 뷰파인더] 시상식의 웃음거리와 권위주의

● 美 여론조사, 83%가 윌 스미스 비판
●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둬
●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 조크에 관대한 美 문화적 전통, 왜?


배우 윌 스미스(오른쪽)가 3월 27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아내에게 과도한 농담을 한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쳤다. [AP 뉴시스]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 제94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한창이었다. 진행자는 유명 코미디언 크리스 록. 록은 여러 참석자를 향해 끊임없이 ‘선 넘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던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수, 배우, 최근에는 유튜버로 큰 성공을 거둔(4월 2일 현재 구독자 986만 명, 즉 1000만에 가깝다) 윌 스미스가, 무대에 올라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록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짧은 머리를 두고 “‘G. I. 제인’ 속편이 기대된다”고 농담한 게 화근이었다. ‘G. I. 제인’은 ‘제인’이라는 여성이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데미 무어가 삭발하고 나와 화제를 끈 영화다. 제이다 핀켓 스미스도 그 자리에서 삭발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이다가 윌 스미스의 아내였다는 것, 그리고 제이다의 탈모는 일종의 면역성 질환으로 인한 것이라는 데 있다.

아카데미상은 거의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다. 당연히 여러 해프닝이 있었지만 참석자가 진행자의 뺨을 때리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카데미상뿐 아니라 세계 방송의 역사를 모두 짚어 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건이다.

더 놀라운 일도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국내 반응이다. 공식 여론조사가 진행된 바 없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을 대략 확인해보면 ‘윌 스미스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크리스 록이 심했다’ ‘내가 윌 스미스의 처지여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등의 반응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온정적 반응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으나 미국 현지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미국 연예 매체인 TMZ가 3월 28일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미스가 록의 뺨을 때린 행위에 대해 “록이 맞을 만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 134000여명 가운데 17%에 그친 반면, 그러한 행위를 폭행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의견은 83%에 달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폭력을 썼다는 윌 스미스의 해명에 대해서도 오직 15%만이 동조했다.

병 때문에 탈모를 겪고 있는 제이다 스미스를 향한 농담이 설령 지나치다 해도, 그런 농담을 하는 코미디언을 때리는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미국 사회에 두루 퍼져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건 발생한 직후 ‘미국인들이 윌 스미스에게 동정적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 미국 문화는, 현실 속의 미국 문화와 전혀 달랐다.

페미니즘으로 폭력을 변호?
배우 윌 스미스(왼쪽)와 그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뉴시스]
윌 스미스는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렸다. 너 댓살짜리 아이가 해도 혼날 짓인데, 50대 중반의 성인이다. 대체 이런 행동을 어떻게 옹호할 수 있단 말인가?

여성주의적 관점을 둘러대며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 본인부터가 그랬다. 그는 이번에 영화 ‘킹 리처드’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테니스의 전설인 윌리엄스 자매를 길러낸 아버지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그는 그런 영화를 찍으며 가족의 가치를 절감했는데, 아내를 조롱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폭력을 휘둘렀다고 수상 소감에서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했다.

그러한 주장은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 아니, 정반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와 자식 등 가족의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가부장의 의무가 있다며 다른 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발언이다.

이러한 주장은 엉터리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내가 집 밖에서 명예를 잃었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가부장의 행태를 용납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살펴보면 그 위험성을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인도, 파키스탄, 그 외 여러 곳에서 바로 그런 이유로 ‘명예살인’이 벌어진다. 아내나 딸이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나거나 연애를 하거나 혹은 눈만 마주쳐도 ‘가문의 명예’가 실추됐다는 이유로 상대방 남자뿐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인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는 그런 사회의 가부장들과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설적인 NBA 선수이며 미국 흑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인 카림 압둘 자바 역시 윌 스미스의 발언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메일 뉴스레터 서비스 ‘섭스텍’을 통해 3월 29일 공개한 글에서, 압둘 자바는 윌 스미스의 변명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진정 여성을 보호하는 남자들은 1500만 명의 시청자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거들먹대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있다. (...) 여성 보호를 앞세워 자기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말하면서, 윌 스미스는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 그 여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 연설은 그저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부 페미니스트의 견해는 다를 수 있다. 국내에도 ‘나쁜 페미니스트’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작가 록산 게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3월 29일 ‘뉴욕타임스’에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분명히 한 후, 그는 ‘농담’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고 약자를 조롱하는 짓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록산 게이의 말에도 귀담아 들을 점이 있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리는 것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놓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가족을 위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에게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페미니즘, 더 나아가 모든 정치적 진보는 이런 폭력과 선을 긋는 것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슈퍼스타라는 어떤 웃음거리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 장편 영화상 시상 전 입담을 펼치고 있다. [AP 뉴시스]
크리스 록은 대체 왜 그런 농담을 한 걸까? 원래부터 ‘정치적 올바름’의 선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농담을 해왔던 코미디언이지만, 그가 제이다 스미스를 농담거리로 삼은 것은 본인의 스타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코미디언이 사회를 보았더라도 여러 출연자들을 향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농담을 했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미국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윌 스미스의 집안은 여러모로 복잡한 속사정을 지니고 있다. 두 자녀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소수자로 밝힌 바 있으며, 자녀들은 스미스의 아내와 함께 ‘폴리아모리’를 선언한 상태다. 폴리아모리란 가부장적인 일부일처제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동시에 성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애정 관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제이다 스미스의 폴리아모리는 단지 선언에 머물지 않았다. 제이다는 어떤 남자와 연애했는데, 그는 제이다보다 21세나 어렸을 뿐 아니라, 실은 윌 스미스의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의 친구였다. 아들의 친구와 바람이 난 아내. 윌 스미스는 ‘아내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대범한 모습을 연출했는데, 물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판받을 일이 아니지만 대중적 시각에서 보면 충분히 농담거리로 삼을만한 일이며, 어김없이 그 또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방아에 오르고 말았다.

미국의 연예인과 셀레브리티들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산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파파라치들이 따라붙어 그들의 사생활을 취재하고 팔아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공개 석상에서 혹독하게 조롱당하기 일쑤다. 사생활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이게 무슨 일일까? 미국은 자유의 나라 아닌가?

미국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조크에 관대하다는 것이다. 엄격하고 근엄한 자리일수록 농담을 섞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전통은 미국 영화산업과 대중문화의 큰 축제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도드라졌다. 지금껏 수많은 코미디언들이 진행자가 되어 무대 위에 올랐다. 지금껏 아카데미 시상식은 늘 그랬다. 그 하루를 위해 굶고 꾸미고 갖춰 입은 영화계의 슈퍼스타들을 두고, 그들의 치부를 한껏 드러내고 까뒤집으며 웃음거리로 삼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 사회가 권위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정반대로,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의 권위가 드높기 때문에 출연자들에게 망신을 주는 농담을 허용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삶을 생각해보자. ‘스타’라는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시피, 평소에는 저 하늘의 별처럼 고고하게 떠 있는 존재다. 대중은 그들의 삶에 대해 그저 엿보기만 할 뿐 다가갈 수 없다. 스타들은 그런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바탕으로 천문학적 출연료를 받고 상상하기 어려운 라이프 스타일을 즐긴다.

애정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인들이 아무리 ‘쿨’하다 해도 이렇듯 공공연한 특권층의 존재는 어딘가 배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자리를 빌려 한 번쯤 적나라하게 치부를 드러내고 비웃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가끔 벌어지는 탈춤을 금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줘가며 광대를 불러 춤판을 벌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말뚝이 탈을 쓴 광대가 양반탈을 쓴 광대를 조롱하고 비웃고 골탕 먹이도록 하는 것은 양반의 권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피지배층의 억압된 불만을 해소하면서, 현실 속 신분 차이를 더욱 확실히 느끼게끔 한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권위주의’를 내려놓음으로써 ‘권위’를 공고히 다지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조크 통해 해악 줄이다
권위 그 자체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세상을 경직시킨다. 미국은 이렇게 조크를 통해 권위주의의 해악을 줄이면서 권위에 힘을 실어주는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이다 스미스에게 크리스 록이 던진 농담은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다. 또한 한국은 미국과 다른 나라이며, 미국의 모든 것을 쫓아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화와 교양을 중시하며 ‘정치적 올바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왜 이렇게 과격한 농담을 전통으로 유지하는지, 그 의미를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아름다운 작별은 없다… 죽음의 존엄마저 농락한 K방역

아름다운 작별은 없다… 죽음의 존엄마저 농락한 K방역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대선 직전 방역 고삐 푼 文정권
장례대란으로 고통받는 유족들

첼리스트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는 악단 해산으로 갑자기 실업자가 됐다.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집이 있으니, 생활비가 저렴한 시골에서 어찌어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향인 야마가타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자리를 구하던 다이고의 눈에 구인 광고 하나가 들어왔다. 연령 제한 없음, 고수익 보장, 실질 노동 시간 짧음. 게다가 정규직이다. 평생 음악만 하고 살았던 그는 이렇게 좋은 말만 쓰여 있는 일자리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NK 에이전트’의 문을 두드린다. ‘여행의 도우미’라던 그 회사의 일은 납관, 고인의 몸을 닦고 잘 단장하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장례는 매우 다르다. 한 사람이 생을 마치고 떠나는 자리에 다들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마시며 고인을 추억하는 것이 한국의 장례 문화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장례식을 ‘축제’로 여겨온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장례를 치르는 전문 인력을 사회적으로 천시하지 않았다. 오늘날은 국가에서 공인하는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로 존중받는다.

일러스트=유현호

반면 일본은 고인을 잘 씻기고 곱게 단장하여 유족과 대면하는 절차를 갖는다. 슬픔과 엄숙이 지배하는 장례식의 분위기 때문인지, 고인을 염하고 화장하는 이들을 천시하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내(히로스에 료코)가 질겁하고 사장인 이쿠에이(야마자키 쓰토무)에게 매일 혼나지만, 다이고는 얼결에 갖게 된 직업을 통해 인생의 깊이를 배워나간다. 한 차례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던 영화 <굿’바이: Good&Bye>의 내용이다.

우리는 삶의 존엄과 죽음의 존엄을 함께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논란이 되는 죽음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존엄사와 안락사로 나누어진다. 존엄사는 지난 2009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9대4로 첫 허용 판결이 나온 후, 10여 년의 논의를 거쳐 2018년부터 법에 따라 시행 중이다. 본인과 가족의 의사에 따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약하면 심폐소생술, 항암제, 수혈 등 몇 종의 제한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소극적인 개념이다.

반면 안락사(Euthanasia)는 보다 적극적이다. 환자의 소생 가능성을 염두에 두긴 하나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생을 마감할 권리, 그 또한 양보할 수 없는 인권이라는 철학적 논의를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프랑스의 배우 알랭 들롱은 안락사 결정을 밝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2019년 뇌졸중 수술을 받은 후 투병 중일 뿐이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면서 본인의 결정하에 세상을 뜨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존엄사와 안락사의 논의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존엄사는 현대 의학의 연명 치료가 고도로 발달한 탓에 생긴 부수적 현상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효와 가족을 중시하던 한국에서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적극적 안락사는 다르다. ‘생명’이 지속되면서 내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행복하며 바람직한 ‘삶’을 망가뜨릴 때, ‘삶’을 위해 ‘생명’을 포기할 권리가 개인에게 있다는 발상의 산물이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에 둔다.

안락사 옹호론은 얼핏 보면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 등 많은 이성주의자들이 소극적인 존엄사를 넘어 적극적 안락사를 옹호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안락사의 허용은 결국 의사의 도움을 받아 고통 없이 자살할 권리를 주는 셈이다. 의사에게 죽음의 서비스를 제공할 권리를 허락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수천 년 넘게 유지해온 가장 기본적인 도덕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이 쉽게 끝나지 않는 이유다. 나의 존엄한 삶을 위해 내 생명을 스스로 빼앗는 것은 정당한가? 자살을 할 때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마련한다면, 사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는 것. 그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좋은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추로서 우리는 ‘좋은 죽음’을 열망한다는 것. 모든 철학과 윤리의 고민이 결국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로 향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문재인 정권은 공교롭게도 대선을 앞두고 방역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고작 수백 명의 확진자가 나와도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게 하던 그들이, 이제는 수십만의 확진자와 함께 매일 수백 명씩 사망자가 쏟아져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4월 2일부로 현행 거리 두기를 중단할 예정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K방역 홍보 대신 백신 확보부터 했어야 한다. 치료제를 충분히 구비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은 최대한 아름답게 유족과 작별할 수 있도록 대비했어야 마땅하다. 현실은 정반대다. 코로나 사망자를 화장 대신 매장해도 된다고 규칙을 바꿔놓고 2개월간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다. 이는 3일장이 6일장, 7일장으로 늘어나 고통받은 유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망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너무도 원통하다. 자녀들에게 더 큰 부담을 안겨주는 작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 말이다.

코로나 사망자의 대부분은 고령층이다. 한국·전쟁을 직접 겪었거나 잿더미가 된 조국에서 맨주먹으로 태어난 이들이다. 황무지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어낸 주역들이, 생의 마지막에 아름다운 작별을 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대체 무슨 권리로 이러는가. 왜 마지막까지 국민의 삶의 존엄을, 심지어 죽음의 존엄까지 농락하는가.

<굿바이>로 돌아와 보자. 익숙지 않은 일을 배우며 힘들어하던 다이고는 어느 날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를 보고 말한다. “죽기 위해 강을 거스르다니 서글프네요. 어차피 죽을 거면 편하게 죽지.” 어리석은 질문에 이쿠에이가 던지는 현명한 답. “돌아가고 싶겠지, 고향으로!” 다이고의 인생도 마찬가지. 고향으로 돌아와 납관이라는 일본 사회가 천시하는 일을 하며 스스로의 인생을 되찾았다. 태어난 곳에서 미래의 씨앗을 뿌리고 숨을 거두는 삶과 죽음의 존엄을 회복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22-03-26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정신이 물질을 이기지 못할 때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슬픈 전시다. 푸틴이 전쟁을 시작한 후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면서 4월 중순으로 예정된 전시를 앞당겨 종료하네 마네 하는 맥락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차원이 아닌 내부 맥락만 놓고 보더라도,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서글퍼지는 전시다. 물질적 영역, 다시 말해 현실에서의 공허와 빈곤을 정신으로 승화시켜 극복하고자 하던 이들의 발버둥은, 결국 초라한 물질적 형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가령 그 유명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보자. 도판이나 화면상의 이미지로 접할 때와 달리, 실물을 보면 인상이 완전히 다르다. 보존 상태가 너무 나쁘기도 하고, 이전에 '물질'적 측면에서 너무 작품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미술 작품은 실물을 볼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좋은 의미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유화가 그렇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그 역사적 의의나 화면상의 이미지에 익숙한 채로 들어가 실물을 보면 실망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물감, 캔버스, 기타 여러 측면에서, 작품을 통해 '초라함'을 느끼고야 말았던 것이다.

물질적 에너지와 풍요의 과잉이 낳은 정신주의가 아니라, 물질의 세계가 빈곤하고 빈약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살 수밖에 없는 변방인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택하지만 본인은 내가 정말 이걸 원해서 택하고 있다고 자기 기만을 거듭하는, 그런 정신주의랄까.

우리 현대 한국인, 특히 20세기 출생자들은 그 변방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변방인이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개인적인 행복을 달성하고자 할 때, 변방적 특질과 줄타기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다.

(그래서 최근 1960-1970년대생들이 '눈떠보니 선진국 이얏호' 꼴값을 떠는 게 우려스러웠으나, 그들 대부분은 민주당 지지자이며, 정권을 뺏겼으니 이제 그들은 다시 헬조선 타령을 할 것이다. 이런 정치 과몰입 또한 변방성의 특징 중 하나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변방의 인간들이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다.)

제대로 설명을 못 하겠는데,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이라는 것은 러시아 문학과 마찬가지인, 그런 맥락을 놓고 보면 잘 이해된다는 뜻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좋은 전시라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러시아'에 방점을 찍고 보면 분명히 그렇다. 세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법칙 중 가장 슬픈 법칙인 '원판 불변의 법칙'을 뼈저리게 가르쳐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왜 사회주의라는 서구 사상의 뉘앙스 대신 뭔가 토속적이고 구린 느낌 일색인가?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1부에 등장하는 여러 그림들을 보던 나는 왠지 그 뿌리가 결국은 러시아적 향토성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걸 떨쳐내고 좀 어케어케 해보려던 머리 좋고 예민한 자들은 소련이 된 러시아에서 살지 못해 망명하거나(칸딘스키), 소련에서 두 번이나 간첩죄로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다가 일찍 죽었다(말레비치).


이 전시에서 가장 큰 감명을 준 작품은 따로 있다. 알렉산드르 티실레르가 그린 <장애인들의 시위>다. 야만적인 나라에 사는 이가 그 야만성을 직시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에너지가 있다. <장애인들의 시위>가 각별하게 느껴진 건, 물론 어제 오늘 내가 경험한 어떤 맥락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월 17일까지 예정되어 있으나 언제 휙 돌아가버릴지 모르는 전시.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 입장료 2만원, 전시기간중 휴무.

노무현의 라면, 윤석열의 김치찌개는 경호 대상인가

노무현의 라면, 윤석열의 김치찌개는 경호 대상인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위에 있는 경호처

● 尹 스텐팬 계란말이의 운명
● 구중궁궐에서 외로웠던 盧
● 무소불위 차지철이 빚은 실패史
● 민주화 이후에도 ‘밀착권력’
● 뻔한 무속 공세나 펴는 민주당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 앞에 설치된 프레스다방을 찾아 취재진과 즉석 차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의 스텐팬 계란말이.’ 대선 과정에서 방송을 통해 공개된 후 많은 이를 놀라게 한 ‘사건’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미 겸 특기는 다름 아닌 요리. 오랜 세월 독신으로 살면서 술을 즐겨온 중년 남자답지 않게, 그는 본인과 배우자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식사를 직접 준비해왔다. 깊은 맛이 나도록 끓인 김치찌개에 각 잡힌 계란말이. 누가 봐도 소주 안주 같지만 공깃밥을 놓으니 그럴듯한 가정식 정찬이 됐다. 윤석열을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도 감탄한 ‘윤식당’이다.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윤석열은 임시로 마련된 기자실에서 잠깐 티타임을 가졌다. 요즘도 ‘혼밥’ 안 하느냐는 질문에 “아침은 혼자 먹지만 개들이 먹던 걸 달라고 해서 나눠준다”고 답한 윤석열은, 서울 용산에 대통령실이 열리면 구내식당을 이용해 김치찌개를 대량 조리해 기자들에게 대접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물론 그 많은 양을 손수 할 수는 없을 테고, 말하자면 본인이 조리장이 돼 감독한다는 뜻이겠지만, ‘윤식당’을 재개장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후보 시절에도 직접 만든 음식을 시민에게 대접하는 콘셉트의 유튜브 콘텐츠 ‘석열이형네 밥집’을 공개한 바 있다.

만약 윤석열이 통상적인 경로를 밟아 청와대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윤식당’ 재개장은 불가능하다. 아니, 당분간 폐업이다. 윤석열의 스텐팬은 5년간 계란말이뿐 아니라 그 어떤 요리도 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업무가 과중하고 바빠서가 아니다. 대통령과 그 가족은 취사를 위해 불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요리는 고사하고 라면조차 끓이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법으로 금지돼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단, 대통령경호처의 경호 규칙에 위반된다. 경호처는 대통령과 가족이 불을 쓰지 못하게 한다. 이유는 늘 그렇다시피 ‘대통령 경호 목적’이다. 대체로 열 살 정도면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이기 시작하는 것이 한국인의 인생이지만, 국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오른 사람과 그 가족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냄비에 물 붓고 불 켜는 단순한 행동조차 하면 안 된다. 오늘은 바로 이 문제, 경호와 민주주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경호실에 사정했지요, 한번만 봐달라고…”
2003111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의 배웅을 받으며 관저를 나서고 있다. [동아DB]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대통령 경호 규칙.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것 같지만, 이는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심지어 군인 출신 대통령 전두환도 그랬다. ‘신동아’ 2007년 5월호에 실린 ‘전직 경호원들이 털어놓은 대통령 경호 비화’의 내용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관사는 호텔 객실처럼 취사시설을 갖추지 않았다. 대통령 가족은 검식관이 마치 조선시대 기미상궁처럼 검식을 마친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요리사와 검식관이 퇴근하고 난 후에는 무엇도 먹을 수 없어서, 전두환의 자녀들은 하교하자마자 청와대로 와야 했지만 밤에는 라면조차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서민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 그는 라면 마니아였다. 출출해도 라면, 심심해도 라면, 해외에 나가서도 라면을 먹었다. 200610월도 그랬다. 경북 김천에 갔다가 대통령 전용 KTX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는 수행참모들에게 ‘특별 메뉴’가 준비돼 있다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온 음식은 라면. 실망하는 이들에게 대통령은 이런 설명을 들려줬다.

​​“달리는 열차에서 먹는 라면 맛이 어떻습니까? 맛있지요? 대통령 빽 아니면 이런 맛 볼 수 없어요! 오늘따라 라면이 먹고 싶어서…. 서울 올라올 때에는 열차에서 저녁식사로 라면 먹을 수 없냐고 물었더니, 경호실에서 안 된대요. 그래서 사정했지요. 한번만 봐달라고….”

경호실에 따르면 달리는 열차에서 컵라면 정도는 괜찮지만 우리가 흔히 먹는, 냄비에 면을 넣고 삶는 라면은 안 된다. 안전 문제 상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독자 여러분은 이 설명이 납득이 되시는가. 물론 열차에서 부탄가스 등 직접 불을 사용하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식사를 하는 공간은 조리를 하는 공간과 떨어져 있다. 불꽃이 발생하지 않는 전열 조리기구를 사용해 라면을 끓인다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설마, 누군가 대통령에게 뜨거운 라면을 끼얹는 테러를 저지를까봐 안 된다는 걸까.

실제로 경호처는 대통령과 그 가족이 요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노무현 스스로가 그러한 처사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내 손으로 라면 하나 못 끓여먹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불만을 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들은 바 있다.

물론 최근 한 전직 청와대 요리사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무현이 주말이나 일과 시간 후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임기 말에 이르러 경호처가 다소 느슨한 태도를 취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자기 손으로 편하게 라면 하나 끓여먹지 못했던 노무현은 큰 불만을 느꼈고, 이는 분명한 사실로 남아 있다. 마치 구중궁궐에 갇혀 있던 ‘마지막 황제’의 푸이처럼,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비서 노릇까지 겸하는 경호원?
대통령을 쥐락펴락하는 대통령경호처의 힘. 이 권력의 기원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다.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전쟁을 통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전 이후에도 북한과 지속적으로 대치했고, 북한은 여러 방향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다.

육영수 여사의 시해로 마무리된 문세광의 1974년 광복절 저격을 놓고는 그 배후에 대해 논란이 있다. 하지만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산을 타고 넘어왔던 사건이라거나, 전두환을 노리고 벌어졌던 아웅산 테러 사건 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북한이 일종의 비정규전투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을 살해하려 든 것이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자신의 심복을 경호실에 앉히고 일종의 호위부대 격으로 굴리면서 경호실이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다. 북한으로부터의 직접적 위협이 크게 줄어든 후에도 경호실의 권한과 역할은 줄어들지 않았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의 차지철 경호실장처럼 대놓고 권력을 휘두르는 경호실장이 나오는 세상이 끝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라면 끓이기’의 사례처럼, 대통령경호처는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명목 하에 대통령의 동선과 행동을 미시적으로 통제하는 일종의 ‘밀착권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신동아’ 기사를 조금 더 읽어보자. 한 전직 경호원은 한국과 미국의 경호 시스템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 경호원은 오로지 경호만 합니다. 우리나라 경호원은 비서(의전) 노릇을 겸하거든요. 가령 대통령이 악수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악수를 하려 하면 경호원이 대통령의 손을 터치할 수 있어요. 하지만 미국은 절대 안 됩니다. 말 그대로 경호만 하는 거죠.”

이 말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2007년 당시, 한국의 대통령 경호원은 ‘대통령이 악수해야 할 사람’과 ‘악수하면 안 될 사람’을 판단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둘째, 대통령이 ‘악수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악수하려 할 경우, 경호원은 그 엉뚱한 사람 대신 대통령을 제재할 수도 있었다. 셋째, 전 세계 모든 민주국가가 표준으로 삼고 있는 미국에서도 대통령을 이런 식으로 경호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측면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미국은 지금까지 총 46명의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그 중 4명이 암살당한 나라다. 누군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일하다가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8.69%나 된다. 최전방 전선에 투입된 군인이 아닌 다음에야 경험하기 힘든 사망률이다. 그런 미국에서조차 경호원이 대통령의 손을 터치 못 하는데, 한국에서는 왜 가능한가.

경호 목적으로 대통령과 가족이 요리를 못 하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퇴근 후 마트에 들러 장을 보는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다. 반면 우리나라 대통령은 자기 손으로 식칼도 못 잡고 가스레인지도 못 켠다. 대통령경호처가 ‘대통령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대통령과 그 가족이 먹는 음식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대통령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하에, 대통령 가족을 과잉보호하며 ‘가스라이팅’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주지 않는가.

지난해 1229일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직접 만든 음식을 시민에게 대접하는 콘셉트의 유튜브 콘텐츠 ‘석열이형네 밥집’을 공개한 바 있다. [국민의힘]
용산 시대의 ‘윤식당’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말해두자. 나는 한국인이다. 우리의 대통령이 안전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경호 시스템이 과연 대통령에게 유익한지 의문을 표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가운데 대통령 박정희는 현실감각을 잃어갔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총을 뽑아 쏠 때 차지철은 박정희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악의 경호 실패 사례는, 대통령 경호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벌어진 것이다.

단 하루도 청와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윤석열을 두고 뻔한 무속 공세나 펴는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층의 태도를 보면 더욱 한심하다.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이 ‘도사가 청와대에 가지 말라고 해서 안 가는 것 아니냐’는 식상한 흑색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실은 정반대다. 최순실 사건을 보면 분명하다. 소중하게 끌어안아야 할 무속인 혹은 비선실세가 있다면 청와대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대통령경호처를 설득해서 그 비선 실세가 원할 때 ‘프리패스’로 청와대에 들락거리게 해주면 아무도 모른다. 지난 정권 시기에 벌어졌던 대통령경호처의 방만한 행태는 결국 박근혜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말았으니, 이 또한 대통령 경호 실패 사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 시절과 마찬가지로 경호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문고리 권력의 일부로 작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대통령 됐다고 가스레인지에 불도 못 켜게 하는 식으로 ‘탈인간화’하는 경호 체제는 민주주의적이지 않다. 대통령은 많은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대통령이 야근하다 1층 매점으로 내려와 직원들과 함께 전자레인지에 삼각김밥 돌려서 컵라면을 곁들여 먹으며 일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다. 용산 시대의 개막과 함께 ‘윤식당’이 성공리에 재개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22

인수위에 여성가족부 포함시켜야

2017년 대선 당시의 일. 홍준표 후보의 자서전에서 '돼지발정제' 운운했던 대목의 논란이 커지자, 다른 후보들이 일제히 비난했다.

그 중 가장 수위가 셌던 사람은 안철수. '나는 홍준표 후보와 대화하지 않겠소'라고 TV 토론에서 선언했다.

수세에 몰려 있던 홍준표는 안철수의 그런 대응에서 활로를 찾았다. '안 후보님? 정말 나랑 이야기 안 할 거에요? 응?' 이러면서 어린아이 놀리듯 가지고 놀았고, 오히려 안철수가 외통수에 몰렸다.

여성가족부를 대하는 인수위의 모습을 보며 문득 그 무렵 생각이 든다.

여성가족부는 신뢰를 잃었다. '피해호소인' 운운하는 모습을 보며 등을 돌린 여성들도 많다.

하지만 여성가족부가 진행하던 사업 중에는 여성들에게 필수적인 것이 많다. '여성부'가 아닌 '가족부'로서 집행하던 예산도 상당하다.

그런 것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 재편성해야 한다. 또 어제 오늘 거론되고 있는 여성가족부 홈페이지 예산 등 석연찮은 대목을 확인하고 교정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인수위 테이블에는 여성가족부 자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성가족부를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여성가족부를 불러야 하지 않나?

'여성가족부 해체'라고 썼으니 인수위 단계에서 아예 포함도 안 시킨다! 이런 태도가, '나는 홍준표 너님과는 토론 안해!' 해버리던 2017년 안철수의 미숙한 태도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지난번에도 말했듯 이런 태도를 취하면 대외적으로 '안티페미 행정부'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게 될까? '석유 대신 반도체가 나오는 사우디' 정도로 취급당할 것이다. 나라망신이다.

윤석열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원장, 그 외 관계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