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타스틱 9월호 원고입니다. 편집부의 승인을 받아 올립니다.
* 소설 《다이디타운》3부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긴 하지만, 그 결말을 알고 소설을 봐도 큰 상관이 없습니다. 3부작으로 구성된 《다이디타운》은 2부까지가 정말 재미있고, 3부는 일종의 보너스 스테이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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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를 부수는 판타지 - ‘강남 불패’와 교육감 선거지난 7월 30일 열렸던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둘러싼 두 가지 판타지가 있었다. 직접 민주주의의 힘, 그리고 잘못된 현재를 교정하려는 과거의 힘을 떠올리게 하는 그 희망찬 판타지는 ‘강남불패’의 또다른 판타지에 의해 산산조각나버렸다. 먼 길을 돌아 또다시 출발선상에 서게 된 셈이다. ‘강남 불패’를 가장 흔하게 수식하는 단어는 다름아닌 ‘신화’다. 강남의 땅값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명제는, 건조한 사회적 현상을 넘어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갖는 무언가가 되어 있다. 한국어 화자들, 특히 언론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걸핏하면 ‘신화’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가령 ‘붕대 투혼’이라거나, ‘라면 먹고 금메달 신화’라거나 등등) ‘강남 불패’만큼은 확실히 신화적이다. 7월 30일 교육감 선거를 통해 그 신화성은 다시 한 번 화려하게 입증되었다. 강남은 지지 않는다. 강남은 져도 결코 혼자 지지 않는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둘러싼 판타지7월 30일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대결 구도와 심판 구도에 의해 지배된 하나의 정치적 싸움이었다. 이명박 현 대통령에 대한 심판을 전면에 내세운 주경복 후보와, 반 전교조라는 기치를 걸고 교육 정책을 유지하려는 공정택 후보가 대결 구도를 세우고 있었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대한 기대감은 특히 촛불시위에 참여해온 시민들 사이에서 하루가 다르게 고조되고 있었다. 최초의 직선제 교육감 투표에서 승리한다면, 국민들이 이명박의 교육 정책을 반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일같이 경찰에 밀리고 전경에 쫓긴 촛불 시민들에게는 단 하나의 승리가 고프기도 했다.
여론 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팽배한 반 이명박 정서를 대변하듯, 교육감 선거 후보 지지율은 서울 시내 대부분 지역에서 주경복 후보가 앞섰다. 종합해보면 3~5% 차이로 승리한다는 결과가 나온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낙관적인 여론 조사 결과를 등에 업고 선거를 하는 일은,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투표율이 비록 15%대에서 머물렀지만 뚜껑을 열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서 ‘강남’이라는 괴물이 튀어나왔다.
강남구에서는 전체 투표자 중 61.14퍼센트가, 서초구에서는 59.02퍼센트가 공정택 후보에게 몰표를 안겨주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워낙 인구가 많은 두 지역에서, 기타 범 보수진영 후보들에게는 일절 투표하지 않고 오직 공정택 후보만을 향해 표를 던진 이것이 바로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타였다. 이 차이는 주경복 후보가 최대 득표 퍼센트를 기록한 관악구의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서 주경복 후보는 47.80퍼센트, 공정택 후보는 30.81퍼센트를 득표했다. 반면 강남구는 공정택 후보에게 61.14퍼센트를 몰아주었으며, 동시에 주경복 후보의 득표율은 고작 22.62퍼센트에 머물고 있다. 잘라 말하자면, 강남구와 서초구에는 흔히 말하는 ‘이탈표’가 없었다. 군소 후보자에게 고루 표가 갈린 다른 구와 달리, 강남구와 서초구의 유권자들은 마치 ‘보수 단일화’가 이미 진행된 것처럼 투표했다. 그것이 이번 선거의 희비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 시대가 제 아무리 탈정치적인 포스트모던 시대라 한들, 사교육 열풍을 이어나가 아파트 값을 더 올리고 싶어하는 ‘강남 아줌마’들의 집단 행동을 해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진보는 갈라졌지만 보수는 그대로 있다. 대한민국은 사분오열되었지만 강남의 성채는 공고하다. 혹자들은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을 5월 이후 촛불시위에서 찾았지만, 7월 30일의 선거는 말한다. 촛불은 강남에 졌다. 적어도 지금은.
이른바 ‘직접 민주주의’와 ‘간접 민주주의’의 대립구도를 설정한 후, 전자가 후자보다 낫네 그르네 벌어지던 수많은 논의들을 돌이켜보자. 그런 종류의 논의가 벌어지던 당시, 많은 사람들은 촛불이 통제되지 않는 거대한 민중의 에너지이며, 그것을 거스르는 자는 세상에 감히 존재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그 막대한 에너지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순진한 발상이다. 요컨대 모든 이들이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광장의 목소리가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한 판타지를 잃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업둥이’(부모로부터 버려져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하고 있던 웬디가 피라미드에 감금되어 있자, ‘업둥이’들은 드디어 햇살 아래 나와 항의를 시작한다. 그 업둥이들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수많은 ‘진민’(자연 수정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시위대에 합류하여 수백만의 물결을 이룬다. 그 모습을 보고 고민하던 다이디타운의 수뇌부는 웬디와 함께 ‘업둥이’들을 지구 밖 외행성계의 농장으로 파견하는 정치적 결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판타스틱》에도 연재된 바 있는 《다이디타운》 3부의 마지막 장면이다.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자들은 업둥이들의 함성이 더 커져야 한다는 쪽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반면 ‘간접 민주주의’의 안정성을 외치던 자들은 정치가 브로드와 저널리스트 럼이 막후 협상을 통해 ‘업둥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는 그런 기능에 주목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착상 모두가 하나의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었고, ‘강남 불패’의 신화는 바로 그 판타지를 박살내버렸다는 것이다. 민중의 함성은 헌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경찰은 헌법보다 도로교통법의 준수를 요구한다.
‘민중의 함성’이라는,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거대한 판타지가 깨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른바 ‘과거의 그림자’가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에 사라졌던 전국대학생협의회, 즉 전대협 깃발이 거리에 나부끼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 속에 묻혀졌던 과거의 힘이 살아 돌아와 현재의 질서를 재구성한다는 것 또한 일종의 판타지이다. 특히 《반지의 제왕》에서 고대의 힘인 엔트들이 긴 회의 끝에 떨쳐 일어나는 장면은 3부작 중 제2부의 절정을 이룬다.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고 마구 토목공사를 벌이던 사루만의 야욕이 파괴되고, 두 개의 탑 동맹이 깨어지며, 댐은 무너지고 숲은 생명을 되찾는다. 전대협 깃발이 뜨고, 시청 앞 광장에서 세 대의 살수차를 점령하고 부순 6월 28일만 해도 그 판타지는 실현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후 오히려 시청 앞 광장을 빼앗겼고, 8월 5일에는 명동성당 앞까지 밀려났다. 올바른 과거가 잘못된 현재를 이기는 판타지는 오늘날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
산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를 쫓듯이강남 신화는 계속된다. 강남은 불패다. 져도 혼자 지지 않는다. 맹목적인 자기 복제를 통해 생명체의 건강을 해치고 목숨을 빼앗아가는 암 세포처럼, 강남은 대한민국을 잡아먹고 있다. 이 욕망의 변증법은 흡사 괴물의 눈과도 같아서,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빨려들어가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까지 하다. D&D 계열 판타지에서 드래곤은 마법이 통하지 않는 존재다. 강남 불패의 신화가 다른 판타지를 부수는 것과도 비슷하다. 대체 우리는 이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강남’만을 바라보느라 긍정적인 가치로서의 ‘공공성’의 추구를 잃어버린, 막강한 적을 상대하느라 스스로를 잃어버린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G. K. 체스터튼의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짓도록 하자. “우리는 산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를 쫓듯이 신을 사냥해야 한다. 그 추적 중에 우리는 모든 괴물들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