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30

용산 100일, 그리고 재보선 결과

1.

하루 종일 정신 없이 돌아다녔다. 낮에는 홍대의 한 카페에서 아마미야 카린 씨와 마쓰모토 하지메 씨를 만났다.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아니고, 프레시안에서 나를 포함해 두 명의 20대를 더 붙여서 좌담회를 열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단단했고 어른스러웠다. '활동가'의 모습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신선했다.

무선 인터넷을 켜고 다시 한 번 확인차 gyuhang.net에 접속했다. 4월 29일은 용산 참사 100일이 되는 날이었고, 나는 김규항 씨의 블로그에서 관련 정보를 봤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4월 29일 시청앞 광장"이라고 써 있었다. 저녁을 잘 얻어먹고, 커피도 잘 얻어마신 다음 길을 나섰다.


2.

시청역에 내려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전경 버스만이 둥근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가, 허탕을 쳤다는 듯 시동을 걸고 있었다. 뭐야 씨발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인터넷에 접속 가능한 친구에게 연락해서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을 해달라고 했다. 서울역 광장이었다. 대체 이유가 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낚였고, 괜히 시청 앞에 갔다가 서울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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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불교, 개신교, 원불교, 천주교 등 4대 종교단체에서 번갈아가며 위령제를 치르는 것이 용산 100일 행사의 내용이었다. 나는 원불교의 위령제가 시작되기 전, 영상물이 막 상영되는 찰나에 현장에 도착했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과 땅 사이에 떠돌고 있는 동안, 벌써 100일이 흘렀다. 그들의 육신은 아직도 영안실에 고기처럼 냉동되어 있다.

그런 끔찍한 사실을 아는 것, 굳이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것,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쩌면 이상한 방식의 자기 학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침 나는 이런 구절을 읽고 있었다.

상기하기는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그 안에 자체만의 윤리적 가치를 안고 있다.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이다. 따라서 상기하기가 일종의 윤리적 행위라는 믿음은 우리도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세상 이치에 따라 우리 눈앞에서 죽은 사람들(조부모, 부모, 선생님, 오랜 친구 등)을 애도하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닌 본성 한가운데에 깊숙이 놓여 있다. 무정함과 망각은 함께 가기 마련인 듯하다. [168p.]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trans. 이재원 (서울: 이후, 2004).


3.

용산 참사 100일이 되는 날 재보선이 있었고, 진보신당은 값진 의석 하나를 얻어냈다. 나 또한 이 승리가 기쁘다. 이 승리를 통해, 진보신당과 그에 기대를 거는 이들은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진실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지지 않았다고 외치기 위해서는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최대한 버틴 것, 그리고 단일화에 결국 승복한 것은 모두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최소한의 합리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렇다. 조승수로 단일화할 경우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후보가 버티고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 조승수를 아예 떨어뜨리면 둘 다 소득이 0이니 그것은 선택지에 포함되지 않는다. 반면 너무 일찍 단일화를 해버리면, 어차피 애가 타는 쪽은 진보신당이므로, 원하는 만큼 무언가를 뜯어낼 수 있을 가능성을 포기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상하기 직전', 즉 가장 맛있는 타이밍에 열매를 수확했다고 볼 수 있다(이 표현은 어떤 분의 블로그에 달린 답플에서 줏어왔음을 밝힌다).

문제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이런 생생한 정치공학적 선택이 과연 진보신당의 지지자들에게 어떤 정서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 둘째, 이번 단일화를 통해 더욱 거세질 '진보정당 통합', 더 나아가서 '범 개혁세력 통합'의 논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셋째, 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에 제안한 '댓가'가 무엇인지 드러날 경우, 특히 진보신당의 평당원들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진보신당은 값진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독이 든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내 입장은 분열되어 있다. 한 사람의 평당원으로서, 원칙에 따라 나뉜 정당들 사이의 단일화는 말도 안 된다고 본다. 반면 진보신당을 '응원'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겼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고 싶어진다.

민주당과의 단일화건 민주노동당과의 단일화건 정당의 존재 자체가 정치적 의견의 표현이라면,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가 그러하였듯이, 모든 종류의 단일화는 이념정치의 자리를 박탈하고 대신 정치적 잇속 계산을 위한 주판알을 깔아놓게 된다. '상식'과 '희망'을 울부짖으며 시작한 노무현 시대는 숱한 방사능 낙진을 남겨놓았는데, '단일화' 또한 그 시대의 삐뚤어진 유산에 속한다. 정몽준으로 단일화 되었으면 어쩔려고 그랬나? 우리의 승부사 노무현은 그에 대해 말이 없다. 이겼으니까 됐다는 거다.

직업적 정치인들은 어느 정도 승부사 감각을 보여줄 필요가 있고, 가끔 미친 짓도 해야 하며, 술수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노무현 시대 이후 판돈이 너무 커져버렸다는 것이다. '후보 단일화'는, 그것도 이념이 판이하거나 화해하기에는 너무도 서로 주고받은 것이 많은 집단 사이에서의 단일화는, 백 년에 한 번 꺼낼까 말까 하는 그런 카드로 남아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이미 두 번의 단일화 논의를 거쳤고, 한 번은 실패했으며 다른 한 번은 성공했다.

지금 내 머리속에서는 두 개의 '원칙'이 충돌하고 있다. 진짜 '원칙'대로라면 단일화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정치를 고려해서, 정말 불가피할 경우 할 수 있긴 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굳이 말해보자면 이런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또 원칙적으로는 전쟁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진보신당이 두 번째의 원칙에 너무 자주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 이상의 단일화 논의는 없어야 한다.


4.

나 또한 한 사람의 진보신당 지지자이며, 당원이다. 선거 승리는 기쁜 일이다. 이미 한 번 당선되었다가 의석을 박탈당한 조승수가 울산에서 부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은 큰 경사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조승수가 다시 국회의원 뱃지를 얻어낸 날은, 용산에서 사람들이 불에 타 죽은지 100일이 된 날이기도 하다. 그 5명의 시신은 지금도 땅에 묻히지 못한 채 냉동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단일화라는 도박을 통해 진보신당이, 비록 승리했을지언정,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진보신당에 대해 품게될 더 큰 반감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게다가 이른바 '범 개혁세력'의 대동단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질 가능성이 있다.

용산을 잊지 않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용산의 죽음은 이른바 '개혁 세력'이 집권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싹이 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어청수는 노무현이 키웠다. 서울 시내 부동산 가격이 들썩거리게 된 것 또한 이미 지난 정권부터 시작된 일이다. 원칙을 어기며 의석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용산의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4월 30일, 오늘로 용산 참사 이후 101일에 접어들었다.

2009-04-29

The defining moment - 결정적 순간

The defining moment

결정적 순간



One addendum to today's column: the truth, which I think everyone in the political/media establishments knows in their hearts, is that the nine months or so between the summer of 2002 and the beginning of the Iraq insurgency were a great national moral test -- a test that most people in influential positions failed.

오늘자 칼럼에 한 마디 덧붙임. 내가 생각하기에, 정치/미디어 분야에 속한 모든 이들은 그 아홉 달, 말하자면 2002년 여름부터 이라크 침공의 시작까지의 기간이 국가적 도덕성 시험이었다는 것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알고 있다고 본다. 영향력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한 그 시험.

The bush ministrations was obviously -- yes, obviously -- telling tall tales in order to promote the war it wanted: the constant insinuations of an Iraq-9/11 link, the hyping of discredited claims about a nuclear program, etc.. And the question was, should you stand up against that? Not many did -- and those who did were treated as if they were crazy.

부시 행정부는 분명히 -- 그렇다, 분명히 -- 그들이 원하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긴 이야기를 읊어댔다. 이라크와 9/11 사이의 연관성을 슬금슬금 지속적으로 흘리기, 핵 프로그램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주장에 목청 드높이기, 등등. 여기서 질문은, 그것에 반대했어야만 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반대자들은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다.

For me and many others that was a radicalizing experience; I'll never trust "sensible" opinion again. But for those who stayed "sensible" through the test, it's a moment they'd like to see forgotten. That, I believe, is the real reason so many want to let torture and everything else go down the memory hole.

나와 많은 다른 이들에게 그 경험은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나는 "이성적인" 주장을 결코 다시는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험을 거치는 동안 "이성적"으로 남아있었던 사람들은, 그 순간이 잊혀진 것처럼 보이기를 바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고문과 그 밖의 것을 기억의 저편으로 내던지고 싶어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let's hope that doesn't happen.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기대해보자.


출처: 폴 크루그먼 블로그. 2009년 4월 24일, "The defining moment".
칼럼을 읽고, 블로그 게시물을 보고, 문장을 텍스트 에디터에 베낀 후, 한국어로 옮겨 이 블로그에 공개한다.

2009-04-28

삼성 직원들이 이건희를 납치한다면

프랑스에서는 요즘 '보스내핑(Bossnapping)'이 새로운 시위 문화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보스내핑이란 상사(Boss)와 납치(Kidnapping)의 합성어이다. 프랑스의 간지나는 노동자들은 촌스럽고 구질구질하게 손에 기름 냄새 묻혀가며 화염병 만들거나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측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회사 사장을 회의실이나 사장실에 감금한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빨갱이 노동운동가들 중 그 누구도 검찰에 의해 기소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월 28일 현재가지 소니, 캐터필러, 3M, 미쉐린 등의 경영진들이 보스내핑당한 바 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 결과 3M은 인원 감축안을 재고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소니 측도 실업수당에 대해 재협상에 들어갔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사장을 납치하는 일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최근 유럽 전체를 강타한 경제 위기와 그에 따른 구조조정은 해묵은 전략을 부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AP의 그렉 켈러(Greg Keller)는 보도하고 있다. 물론 직원들이 사장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납치되어 있었던 3M의 매니저 뤽 루슬리(Luc Rousselet)는 기자들에게 "다 괜찮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잘 먹고 잘 쉬고 있었다.


"납치?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우걱우걱..."
(보스내핑당했던 3M의 매니저 뤽 루슬리의 실제 감금 상황, Getty)



이러한 비상식적이며 반사회적인 노동쟁의에 대해, 프랑스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찬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달 시행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보스내핑을 포함한 반사회적 노동쟁의에 대해 응답자 중 55%가 '정당하다'는 입장을 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는 보스내핑에 대해 단 한 건의 기소도 없었다.

'법의 원칙'만을 놓고 보자면, 아무리 서로 원만하게 감금하고 있다 해도, 납치는 납치고 감금은 감금이다. 형법학 교과서에서는 누군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방문을 걸어잠궜다가 열어줬더라도 감금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학설을 가르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명백한 범법행위도 사회적으로 '용납'되고 있는 것이다. 회사에 대한 노동자들의 협상력 강화가 더 중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 4월 14일 고려대는, 2006년 출교 조치를 당했다가 2년 만에 법원의 판결을 통해 복학했던 고려대학교 학생 7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출교와 퇴학 조치로 인해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기간을 무기정학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이 고려대의 입장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졸업한 학생들에게도 그 처분을 소급해서 적용한다는 것이다. 빛나는 졸업장을 도로 뺏어서 끝내 찢어야 속이 후련하겠다는 심산이다.

이 학생들이 2006년 출교 처분을 당했던 이유도 넓은 의미에서 '보스내핑'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고려대 병설 보건대학생회의 총학생회 투표권 인정 등을 요구하다가 보직교수 9명을 가로막고 17시간동안 농성을 벌인 것이다. 교수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강제로 박탈당했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느냐를 놓고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그들이니만큼 '보스'로서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지닌다고 볼 수도 있고, 학교측은 이 행위를 통해 교수들이 이동할 수 없게 된 현상을 '감금'이라고 해석했으니, 이 사건을 일종의 보스내핑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대는 경찰에 그들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교칙상 존재하지도 않는 처분인 '출교'를 선포했다.

프레시안에 따르면, 이 출교생 7명중 6명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에 대해 항의집회를 벌이고 있었는데, 출교 처분은 바로 그에 대한 보복 징계로서의 성격이 짙다는 논란이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삼성의 눈치를 보느라 학생들에게 보복성 징계를 가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려대 자체의 '위신'을 위해 보복을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길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유야 어찌 됐건, 지금까지도 고려대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보복성 징계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득권층의 논리가 이렇다. 끝까지 분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거다.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여지는 대학생들이 이러할진대, 노동자들이 농담으로라도 '보스내핑'을 운운하는 것은 상상할수조차 없는 일이다. 삼성에는 노동조합이 있지도 않거니와, 있다고 해도 그들이 이건희 전 회장을 납치한다면 이후 그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초를 겪게 될 터이다. 삼성 직원들이 이건희를 납치한다면,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어 그 노동조합 직원들을 전부 사살한다 해도, 놀랍지 않다.

'발랄한 시위', '상큼한 투쟁' 등을 약 5초 정도 고민해본 후에 '어때, 이 아이디어 죽이지?'라고 ㅋㅋㅋ거리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특히 『가난뱅이의 역습』의 출간과 성공에 고무받은 사람들이 소수 존재한다. 그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철저하게 '해프닝'에 관대하지 않은 나라라는 것 말이다. 대통령 자리에 올라 있는 누군가를 욕하는 것은 괜찮지만,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권위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이명박이가 어쩌고 저쩌고 씹는 것은 일종의 '국민 레포츠'로 통용되고 있지만, 과연 누군가가 이런 짓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이슬란드의 한 술집. 2009년 4월 25일. 전직 은행장들의 사진이 남성용 소변기에 붙어 있다.)
AFP PHOTO OLIVIER MORIN.



신자유주의적 금융정책을 밀어붙였다가 망한 나라 아이슬란드의 한 술집 풍경이다. 남성용 소변기에 경제 위기 주범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그 얼굴에 소변을 조준하면 변기 밖으로 튀지 않을 테니, 청결한 화장실 유지와 국민들의 분풀이를 동시에 행할 수 있는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광경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1398일 뒤에 어딘가 술집 화장실에 그분의 얼굴이 붙어있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줄까, 아니면 '큰 물의'를 빚게 될까?

보스내핑을 저지르는 프랑스 노동자들이 처벌받지 않는 이유는, 프랑스 사회가 그정도 '해프닝'을 필요악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부러 가두려고 한 것도 아니고, 문 걸어잠그고 밖에서 난리치다 보니까 감금이 되어버린 경우에 대해, 대학 당국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7명의 학생들을 쫓아다니며 일일이 복수를 하고 있다. '투쟁'의 여건이 완전히 다르다. 록뽄기를 불바다로 만들자고 외치며 전골을 끓여먹고 있으면, 경찰은 차량 소통에 방해가 된다고 전경들을 끌고와서 냄비를 뒤엎고 '가난뱅이'들을 방패로 밀어내고 찍어낼 것이다.

삼성 직원들이 이건희를 납치해서 서로 열 시간 정도 푹 쉬어준 다음, 원만한 합의에 도달하는 광경 따위 상상할 수 없는 것도 그래서이다. 한국에서 '해프닝'을 발생시킨다는 것은 종종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최근 발생한 사건을 통해 반추해보자면, '운동권'들은 자신들이 기획하고 고려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수수방관하는 전략을 택하곤 한다. 의외의 사건을 통해 사태가 진전될 수 있을 원초적인 가능성은 이로써 더욱 줄어들었다. 그런 이들이 떠올리는 '엉뚱한 상상'은 십중팔구 중국산 기념품처럼 뻔하고 조잡하다.)

이명박 대 전체 국민의 구도를 상정하고, 그것을 몰상식 대 상식으로 놓는 것이 위험할 수 있는 이유도 그래서이다. 그 상식이 누구의 상식인가?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에서 '상식'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는, 그들 외의 사람들이 '몰상식'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들인 경우가 태반이다. 더구나 '우리는 상식을 위해 싸운다'라는 구호는, 일견 몰상식해보일 수도 있는, 하지만 투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거나 발생해야 하는 일탈 행위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 명박산성에 스티로폼을 쌓고 올라가려고 할 때 '비폭력'을 외치던 얼간이들로 인해 그토록 많은 시간을 빼앗긴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이미 우리가 상식의 덫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시위 선진국'에서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몰상식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유럽의 강소국 금융허브에서도, 경제 위기 후 내각의 성전환이 일어났고 변기에는 경제 개혁 전도사들의 사진이 나붙었다. 프랑스가 부럽다고만 하지 말고, 비상식과 일탈에 대한 그들의 똘레랑스를 진지하게 관찰해봐야 하지 않을까. '상식'을 붙들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의미 있는 전략이 되기 어렵다.

2009-04-15

에휴 진짜...

성공은 몇 년 동안 지속되었다. 1784년 3월 3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가오는 사순절의 마지막 3주 동안 수요일마다 정기 회원들을 위한 연주회를 세 차례 가질 예정인데, 벌써 100명이 신청했고 30명의 추가 신청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쓴다. 그 밖에도 두 차례 음악회를 열 생각인데-이 모든 것을 위해 그는 '새로운 작품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전에는 피아노 레슨을 하고, 거의 매일 밤 귀족 저택에서 연주한다고 전한다. 그의 연주회 예약자들-우리는 일부 명단을 가지고 있는데-은 역시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1789년 7월 12일에 그는 미하엘 푸흐베르크라는 상인인 새로운 연주회를 예약했지만 신청자가 단 한 명, 즉 그의 매우 친한 친지인 판 슈비이텐 씨뿐이라 취소했다고 털어놓는다. 맨 꼭대기의 황제를 포함하여 빈 상류 사회 전체가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19)

19) 전환점은 아마 <피가로의 결혼>이었던 것 같다. 모차르트가 직접 골랐던 오페라의 주제는 절대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으로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 귀족은 그 당시 일기에 이 오페라를 관람했고 'ennuyiert'했다고 적고 있다.(Hildesheimer, 앞의 책, 199쪽) 이 말은 흔히 번역되듯이 '지루했다'가 아니라 '화가 났다'를 의미한다. [47쪽]


베토벤은 모차르트보다 15년 늦은 1770년에 태어났다. 모차르트가 헛되이 추구했던 것을 베토벤은, 설령 놀이하듯이 손쉽게는 아니라 하더라도, 별 힘 안 들이고 얻을 수 있었다. 즉 궁정 귀족의 후원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래서 곡 의뢰인의 관습적 취향보다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또는 더 정확하게는 그 목소리의 내재적 일관성에 충실한-곡들을 작곡할 수 있었다. 베토벤만 해도 이미 음악 청중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할 수 있었다. 그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힘있는 고용주나 의뢰인을 위해 아랫사람이나 하인으로서 음악을 생산해야만 하는 사회적 속박을 벗어날 수 있었고, 생애의 대부분을 자유 예술가(현재 우리가 일컫는 용어로)로서 미지의 청중을 위해 창조할 수 있었다. 하나의 짧은 인용구가 그 차이를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1801년 베토벤은 친구 베겔러에게 이렇게 쓴다.

작품들은 내게 많은 수입을 안겨주었고, 만족할 정도보다 더 많은 주문이 밀려들고 있네. 한 작품마다 6명 내지 7명의 출판인들이 달라붙는데, 내가 좀 신경만 쓴다면 더 많은 작자들이 덤빌 걸세. 사람들은 이제 나와 흥정하려 하지 않네. 내가 요구하면 그들은 지불하지. 그게 얼마나 행복한 처지인지 자네는 알겠지…….


여기서 베토벤이 성취하였다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하는 것을 모차르트도 일생 동안 꿈꾸어왔다. 그가 좀더 오래 살겠다는 용기를 잃지 않았더라면 혹시 거기까지 도달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지배적인 사고 규범에 따라 우리가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은 모차르트도, 그가 좀더 넓은 층의 청중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31세의 나이에는 베토벤처럼 출판인들이 그의 작품에 달려들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일생에서 나타나는 그런 차이를 일차적으로 개인차로 돌리고 사회의 구조 변화에 기초한 설명을 무시하도록 강요하는 규범의 압력에 너무 쉽게 양보해서는 안 된다. 성공은 모차르트에게 그의 사후에조차도 부족하지는 않았다. 생시 그에게 결핍되어 있었던 것은 베토벤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고도로 발달한 출판활동이었다(동시에 초대 손님이 아니라 지불하는 청중을 위한 연주회 개최의 확산). 실로 "사람들은 이제 나와 흥정하려 하지 않네. 내가 요구하면 그들은 지불하지"라는 문장처럼 예리하게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에 일어난 결정적인 구조 변화를 밝혀주는 문장도 드물다. [59-60쪽]


노베르트 엘리아스, 『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trans. 박미애 (서울: 문학동네, 1999).
모차르트 - 10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문학동네



저는 술자리에서 얻어들은 이야기로 대충 칼럼을 쓰거나 하지 않습니다. 제 말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다 근거가 있어요. 게다가 이런 짓을 몇 년째 하고 있어서 자료도 점점 누적적으로 증가하고 있답니다. 조테로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카드를 약간 꺼내서 보여드리는 거에요. 클래식을 잘 모른다고? 물론 그렇겠죠. 뉴비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니까. 하지만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모차르트의 삶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러니 깝ㄴㄴ 플리즈.

2009-04-14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결정적 차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결정적 차이 (경향신문, 2009년 4월 14일)

빈의 중앙묘지에 가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묘지가 있다. 젊은 예술가들과 관광객들은 지금도 끝없이 그들의 위대한 음악에 꽃을 바친다. 하지만 베토벤이 영면을 취하고 있는 그의 묘지와 달리, 모차르트의 묘지는 일종의 기념탑에 가까운 것이다. 모차르트가 실제로 매장된 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모든 빈 시민들의 슬픔 속에, 수천 명의 군중의 눈물과 함께 묘역에 들었다. 반면 모차르트는 아내의 냉대와 세상의 멸시 속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고작 15세. 둘 다 천재적인 재능과 초인적인 노력을 겸비한, 전형적인 ‘아웃라이어’이다. 그런데 왜 이리 두 사람의 말년은 확연히 차이가 났던 것일까? 독일의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유작 <모차르트-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통해 그 이유에 대해 한 가지 설명을 제시한다.

당시는 귀족과 왕족 등 구 지배세력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동시에 시민계급의 힘이 성장하고 있던 일종의 전환기였다. 만년의 베토벤은 곡을 완성하는 즉시 대기하고 있던 출판업자에게 넘겨 악보를 출판했으며 그것을 통해 수입을 얻고 대중들과 직접 접촉했다. 반면 모차르트는 출판업자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요즘 말로 ‘초대권 손님’이었다. 돈을 지불하는 것은 그 손님들을 초대한 귀족이나 왕족이었다. 그런데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한 이후 귀족과 왕족들은 모차르트를 괘씸하다고 여기기 시작했고 그의 연주회에 발길을 끊었다. 우리가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봐 온 모차르트의 비참한 삶은 바로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높으신 분들’의 눈 밖에 나버렸다는 것, 그리고 시민사회의 후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모차르트가 날개를 꺾인 이유였던 것이다. 예술은 정치적이다. 하지만 예술가가 정치적인 이유로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모차르트가 좀더 오래, 좀더 많은 작품을 써주었더라면 인류의 문화가 얼마나 더 풍성해질 수 있었을까. 그러나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 모차르트와 인류의 문화에 대한 고민은 사치에 불과하다.

3월 31일,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립오페라합창단을 정식으로 해체했다. 이미 몇 차례의 해고가 있었고, 그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지만, 대통령이 바뀐 후 새로 취임한 이소영 국립오페라단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그는 “규정에 없는 합창단을 운영할 수 없다”며 해체를 통보했고, 결국 4월은 합창단원들에게 가장 잔인한 달이 되고야 말았다.

국립오페라단은 2002년 합창단을 만들고 단원을 뽑으면서 언제나 ‘상임화’를 약속해왔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적은 없다. 그 희망이 없었더라면, 또한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없었더라면, 한국 최고 수준의 성악가들이 문자 그대로 ‘88만원 세대’로 살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부는 언제나 기대를 배신했고, 이제는 아예 합창단을 없애버렸다. 그 빈자리는 1년 계약직으로 충당하겠다고 한다.

18세기의 빈에서와 마찬가지로, 21세기 서울에서 벌어지는 예술가의 비참함 역시 ‘높으신 분들’의 입김과 무관하지 않다. 정은숙 전 국립오페라합창단 전임 단장은 노무현 정권의 유력 인사였던 문성근의 형수이다. 진작 합창단을 상임화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부는 계속 그들을 비정규직으로 유지했고, 결국 현 정부의 ‘노무현 지우기’와 함께 합창단은 소멸하고 말았다.

우리는 합창단원들에게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공연해달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모차르트의 비참한 삶까지 강요할 수는 없다. 매주 수요일 문화부 앞에서는 시위 겸 콘서트가 벌어진다. 황사 섞인 모래에 성악가들의 성대가 상하고 있다. 이 카나리아들이 피를 토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문화부는 당장 협상에 나서라.

<노정태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