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심한 모욕을 당하면 어이가 없어서 화를 못 내는 경우가 있다. 요 며칠 사이 출산율과 관련하여 정부와 새누리당이 내놓은 '정책'들을 보면 그렇다. 이들은 가임기 여성과 혼인 적령기 남성들을 딱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어서 너희들이 새끼를 쳐야 할텐데, 라고 혀를 차는 양돈장 주인의 눈빛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한다.
10월 18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안)을 내놓았다. 저출산의 근본 원인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비혼(非婚)·만혼(晩婚) 경향이라는 것이 그들의 분석이었다.
일단 이 분석부터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 어떤 선진국에서도 비혼과 만혼을 줄여서 출산율을 높이지는 못했다. 출산율을 회복한 나라가 없지는 않다. 프랑스가 그런데, 프랑스는 비혼여성들이 낳은 자녀들에 대한 사회적 복지와 인식 개선을 통해 출산율을 회복했다. '출산'을 '결혼'과 연결짓는 한, 현대 산업 사회의 국민들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을 꺼리게 된다. 반대로 그 연결을 끊으면 끊을수록, 자녀를 낳고 기르고 싶은 자연스러운 본능이 발휘되어, 출산율이 회복되는 경향이 있다.
정부의 판단은 정 반대다. 빨리 시집 장가 보내서 애 낳게 해야 한다는, 전지적 시부모 시점으로 청년 세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나오는 대책의 모습은 인격과 판단력을 지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이 사회의 정책결정자들은 애완견 눈 맞추는 브리더들처럼, "국가가 나서서 미혼 남녀를 위한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1]다.
"광역지자체가 복지부 소관 단체인 인구보건복지협회와 함께 '만사결통(萬事結通·만사는 결혼에서 통한다)'이라는 단체 맞선 프로그램을 마련해 총각, 처녀 사이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2]
이건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아니다. 청년들을 진정 '사람'으로 본다면, 서로 자유롭고 자발적인 만남을 갖고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사회 여건을 개선하면 될 문제다. 청년들을 단지 '일해서 세금 내고 번식해서 그 뒷세대 낳을 것들'로 바라보고 있으니까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암컷 수컷 눈 맞춰주면 번식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말이다.
내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도 그런 고민을 안 해봤던 것이 아니지만, 10월 21일자 뉴스를 보고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국회에서 열린 제3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당정협의에서, 새누리당은 "새누리당은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현행 만 6세에서 1년 정도 앞당기고 초등학교를 6년제에서 5년제로, 중·고 6년을 5년으로 줄이는 학제개편까지 중장기 과제로 검토해줄 것을 정부에 요청"[3]했다.
입학연령 1년, 초등학교 1년, 중학교 고등학교 각각 1년씩 해서 총 4년을 빨리 졸업시키겠다는 이야기이다. 현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대학 교육을 빨리 받게 하기 위해서? 절대 아니다. 어서 고등학교 졸업해서 결혼하고 애 낳으라는 소리다. 청년이라는 이름의 개·돼지들, 국민이라는 이름의 가축들에게, 어서 번식하고 새끼 쳐서 세금 내고 국민연금 납부할 장래의 또 다른 가축을 생산하라는 대한민국 축사 주인들의 헛기침 소리인 것이다.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의 말을 들어보자. "재정투입 중심의 출산과 보육대책이 축을 이루고 있어서 저출산 극복을 위한 발상의 전환과 획기적인 대책을 요구했습니다."[4] 실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긴 하다. 국민을 '사람'이 아니라 '가축'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번식의 본능이 있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빼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하며, 건강상의 이유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에는 입양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모든 여건이 바람직하다면, 적잖은 사람들은 알아서 자녀를 낳고 기른다.
높으신 분들은 안달이 나 있다. 이 국민이라는 이름의 가축들이 어서 새끼를 쳐야 자신들이 계속 지배자 노릇을 할 수 있을텐데, 왜 이것들이 번식을 안 하는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을, 청년들을 바로 그렇게 가축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다는 간단한 진실을 그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런 모욕적인 '정책'으로 출산율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심지어 동물도 여건이 안 좋으면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은 다음 기르지 않고 물거나 밟아서 죽여버린다. 나치 독일에서도 국민 강제 번식 정책을 추진한 바 있었지만 실패했다. 사람을 가축 취급하는 이 나라의 국격은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하루에 8시간 일하고, 충분한 급여를 받으며, 안정된 주거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준다면 출산율은 장기적으로 알아서 회복될 것이다. 반대로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정책을 빙자한 모욕이 쏟아진다면, 글쎄, 사람들이 과연 언제까지 참아줄 성 싶은가?
[1, 2] 연합뉴스, "<인구위기> ② 국가가 처녀총각 단체 미팅 주선한다", 2015년 10월 18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0/16/0200000000AKR20151016186900017.HTML
[3, 4] SBS뉴스, "새누리, 초등학교 조기입학 추진…"신중해야"", 2015년 10월 21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28032&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2015-10-21
2015-10-20
[북리뷰] 용인 벽돌 투척 사건, 형벌과 정의를 묻는다
마르부르크 강령
프란츠 폰 리스트, 강, 1만5천원
일군의 철학자들이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발상을 떠올리고, 세력화하여, 최종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철학의 개념과 현실의 작동 사이에는 깊고도 넓은 골이 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철학자가 법철학자라면 사정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법은 세상의 작동 방식을 추상화한 관념 체계이니 말이다.
프란츠 폰 리스트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사촌동생으로, 19세기 독일 형법학의 근본적 방향 전환을 불러온 인물이다. 이른바 형법에서의 '신파'와 '구파'의 대립 중 '신파'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구파'는 죄형법정주의라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범인의 책임 능력과 행위에 따른 예측 가능한 처벌이 형법과 형사정책의 이상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신파'는 범죄라는 행위는 범죄자라는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므로, 그 양자를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범죄자를 처벌할 때에는 그가 저지른 행위 때문에 처벌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처벌하는 것인가? 우리의 판단 대상은 행위인가 아니면 행위자인가?"(84쪽, 강조는 원문)
근대 형법의 근본 원칙들을 생각해보자. 형법은 원칙적으로 행위자가 아니라 행위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다. 살인자는 살인을 '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을 뿐, 과거에 살인을 했던 '살인자'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 게 아니다. 또한 그 행위자에게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인식과 통제력이 있을 때에만 처벌할 수 있다. 정신이상자는 살인을 저질러도 치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오직 행위시에 존재하는 법에 의해서만 처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간통을 해도 간통죄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리스트의 생각은 달랐다. 기계적으로 같은 행위에 대해 같은 형량을 부여한다면, 가령 오래도록 괴롭힘을 당하던 부인이 남편을 살해한 경우와, 가정 학대를 일삼던 남편이 끝내 부인을 살해한 경우에 같은 형량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 법 적용은 정의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일단 그는 범죄자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1) 개선이 가능하고 개선을 필요로 하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개선. 2) 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위하. 3) 개선이 불가능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무해화."(98쪽) 개선 가능한 부류에 대해 인도적 처분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리스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개선 불가능한 자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사형을 원하지 않고, 범죄자를 귀양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평생 동안(또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감금하는 것뿐이다."(104쪽)
'행위 뿐 아니라 행위자도 바라보는' 형사 체계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악한 상황에 몰린' 이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동시에, 특히 사회 내에 혹형주의에 대한 요구가 빗발칠 때, 리스트의 목적사상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 어떤 수형자들에게 구제 불능의 딱지를 붙인 후 그들을 아예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나치 독일에서, 그리고 가깝게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절도범이었던 지강현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호관찰제도로 인해 징역 10년에 보호관찰 7년을 추가로 선고받고는, 급기야 탈옥을 감행했던 것이다.
죄가 문제인가, 아니면 사람이 문제인가? 용인 아파트 벽돌 투척 사건의 범인이 만9세의 초등학생임이 밝혀지면서, 우리 사회는 다시 한 번 죄와 벌의 문제를 고민하는 듯하다. 대중적 공분과 열기 속에서 <마르부르크 강령>을 다시 읽어본다. 올바른 형사 체계와 정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시작해야 한다.
2015.11.03ㅣ주간경향 114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프란츠 폰 리스트, 강, 1만5천원
일군의 철학자들이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발상을 떠올리고, 세력화하여, 최종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철학의 개념과 현실의 작동 사이에는 깊고도 넓은 골이 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철학자가 법철학자라면 사정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법은 세상의 작동 방식을 추상화한 관념 체계이니 말이다.
프란츠 폰 리스트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사촌동생으로, 19세기 독일 형법학의 근본적 방향 전환을 불러온 인물이다. 이른바 형법에서의 '신파'와 '구파'의 대립 중 '신파'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구파'는 죄형법정주의라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범인의 책임 능력과 행위에 따른 예측 가능한 처벌이 형법과 형사정책의 이상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신파'는 범죄라는 행위는 범죄자라는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므로, 그 양자를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범죄자를 처벌할 때에는 그가 저지른 행위 때문에 처벌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처벌하는 것인가? 우리의 판단 대상은 행위인가 아니면 행위자인가?"(84쪽, 강조는 원문)
근대 형법의 근본 원칙들을 생각해보자. 형법은 원칙적으로 행위자가 아니라 행위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다. 살인자는 살인을 '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을 뿐, 과거에 살인을 했던 '살인자'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 게 아니다. 또한 그 행위자에게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인식과 통제력이 있을 때에만 처벌할 수 있다. 정신이상자는 살인을 저질러도 치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오직 행위시에 존재하는 법에 의해서만 처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간통을 해도 간통죄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리스트의 생각은 달랐다. 기계적으로 같은 행위에 대해 같은 형량을 부여한다면, 가령 오래도록 괴롭힘을 당하던 부인이 남편을 살해한 경우와, 가정 학대를 일삼던 남편이 끝내 부인을 살해한 경우에 같은 형량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 법 적용은 정의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일단 그는 범죄자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1) 개선이 가능하고 개선을 필요로 하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개선. 2) 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위하. 3) 개선이 불가능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무해화."(98쪽) 개선 가능한 부류에 대해 인도적 처분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리스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개선 불가능한 자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사형을 원하지 않고, 범죄자를 귀양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평생 동안(또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감금하는 것뿐이다."(104쪽)
'행위 뿐 아니라 행위자도 바라보는' 형사 체계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악한 상황에 몰린' 이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동시에, 특히 사회 내에 혹형주의에 대한 요구가 빗발칠 때, 리스트의 목적사상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 어떤 수형자들에게 구제 불능의 딱지를 붙인 후 그들을 아예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나치 독일에서, 그리고 가깝게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절도범이었던 지강현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호관찰제도로 인해 징역 10년에 보호관찰 7년을 추가로 선고받고는, 급기야 탈옥을 감행했던 것이다.
죄가 문제인가, 아니면 사람이 문제인가? 용인 아파트 벽돌 투척 사건의 범인이 만9세의 초등학생임이 밝혀지면서, 우리 사회는 다시 한 번 죄와 벌의 문제를 고민하는 듯하다. 대중적 공분과 열기 속에서 <마르부르크 강령>을 다시 읽어본다. 올바른 형사 체계와 정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시작해야 한다.
2015.11.03ㅣ주간경향 114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0-13
내용적 종북, 형식적 종북
박근혜 대통령의 치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내용적 종북은 철저한 탄압을 받았으되, 형식적 종북은 국정 운영의 기조가 되었다'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패기 넘치게 '박근혜 대통령 떨어뜨리려 나왔다'던 이정희 대표의 통진당은 헌정 사상 최초의 정당해산심판을 통해 공중분해되었다. 그 외에도 일일이 기억하기 힘든 '종북 사냥'의 사례가 존재한다. 심지어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이 야당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칭하기까지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형식적 종북'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국정 운영의 많은 부분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주체적인가?
가령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행사를 생각해보자. 블랙 프라이데이는 기본적으로 북미 지역의 백화점이 그간 쌓아두었던 재고를 헐값에 털기 위해 하는 행사다. 처음부터 수많은 물류 비용을 공급자가 떠안고 있으며, 물류 비용이 미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는 그런 행사가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당에서, 아니 청와대에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유통업체들은 눈물을 머금고 할인 행사를 벌였는데, 최종적으로 그 손실은 공급자가 나눠서 지게 되었다.
이것은 시장 경제가 아니다. 하다못해 북한 장마당에서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격 통제를 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공산권 국가를 조롱하기 위해서나 등장했던 그런 에피소드가, 2015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이 의사 결정의 방식, 막무가내식 상명하달, 시장 경제와 가격 결정 원리에 대한 철저한 비존중을 놓고 볼 때, 그 행사는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종북 프라이데이, 혹은 블랙 장마당데이 정도로 불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현 정부의 북한 따라잡기는 급기야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교과서화에 이르고 말았다. 전 세계적으로 국정교과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 중 우리가 '발전 모델'로 삼을만한 나라가 전혀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중에 북한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어휘라는 이유로 '동무'가 일상 언어에서 완전히 소거되어 버릴 만큼 반공은 우리의 제1국시였다. 북한에서 하는 것은 무조건 정 반대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자신들이 어떠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함에 있어서 북한의 길을 뒤따르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쉽게도 말하지만, 정작 그 통일이 되고 나면 북한의 깊은 산속에 숨어드는 게릴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나는 홀로 고민해보곤 한다. 북한은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오래도록 유지되고 있는 유사 종교적 독재 국가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고, 통일이 되고 난 후에는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 주체주의자들이 가장 큰 안보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 대한민국은 '형식적 종북'에 대해 이토록 관대한 나라가 되었을까. 우리는 북한이 하는 짓을 고스란히 따라해서가 아니라, 북한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정 반대의 방향을 택했기에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 설마 아직도 대한민국이 북한과 '경쟁'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시점에서 우리의 핵심 과제는 북한을 이기는 게 아니다. 이미 이겼다. 북한을 흡수하고도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튼튼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박근혜 정권은 정신을 좀 차려야 한다. 통진당이 해산된 이 시점,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 청와대를 능가할만한 조직이 대한민국에 없다. 동시에, 국정교과서 논란을 '역사 왜곡'으로만 몰아가는 야권 역시 역사 인식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국정교과서는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그 형식부터가 '쪽팔리는',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말해보자.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측에서는 '내용적 종북'이 들어있기 때문에 여타의 교과서를 없애고 국정교과서로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그것은 친일 독재 세력의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하면,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그 덫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끝나지 않는 논쟁을, 혹시 즐기는 게 아니라면, 이제는 피해야 한다.
어떻게? 상대방을 종북주의자로 몰아가면 된다. 위에서 우리가 이야기했다시피 현 정부는 '내용적 종북'과 거리가 멀지언정(정말 그런지도 의문이지만),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공격적인 어법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최근 시사 용어로 '미러링'이라고 한다. 종북 프레임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 너희들은 친일파라고 몰아붙이는 것, 다 해봤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지 않나.
이제는 미러링을 해볼 때다. 야권이 종북이라고? 아니다. 북한이나 하는 국정교과서를 기습 추진하는 현 정권이야말로 종북 정권이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보호해야 한다. 청와대에 종북 세력이 숨어들어 있다. 건국 70년, 공산주의와 맞서며 이룩해낸 우리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성취를 이렇게 무위로 돌릴 수는 없다. 통진당의 해산 이후, 대한민국에 조직화된 '내용적 종북'은 없다. 이제는 '형식적 종북'의 문제를 고민해볼 때다.
이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국격의 문제다. 피땀흘려 이룬 나라가 하루아침에 후진국 수준으로 주저앉는 꼴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우리의 경제 수준에 걸맞는 정치적 발전을 고대하며, 숨죽여 외쳐본다. 종북세력 물러가라. 자유민주주의 만세.
하지만 '형식적 종북'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국정 운영의 많은 부분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주체적인가?
가령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행사를 생각해보자. 블랙 프라이데이는 기본적으로 북미 지역의 백화점이 그간 쌓아두었던 재고를 헐값에 털기 위해 하는 행사다. 처음부터 수많은 물류 비용을 공급자가 떠안고 있으며, 물류 비용이 미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는 그런 행사가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당에서, 아니 청와대에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유통업체들은 눈물을 머금고 할인 행사를 벌였는데, 최종적으로 그 손실은 공급자가 나눠서 지게 되었다.
이것은 시장 경제가 아니다. 하다못해 북한 장마당에서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격 통제를 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공산권 국가를 조롱하기 위해서나 등장했던 그런 에피소드가, 2015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이 의사 결정의 방식, 막무가내식 상명하달, 시장 경제와 가격 결정 원리에 대한 철저한 비존중을 놓고 볼 때, 그 행사는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종북 프라이데이, 혹은 블랙 장마당데이 정도로 불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현 정부의 북한 따라잡기는 급기야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교과서화에 이르고 말았다. 전 세계적으로 국정교과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 중 우리가 '발전 모델'로 삼을만한 나라가 전혀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중에 북한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어휘라는 이유로 '동무'가 일상 언어에서 완전히 소거되어 버릴 만큼 반공은 우리의 제1국시였다. 북한에서 하는 것은 무조건 정 반대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자신들이 어떠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함에 있어서 북한의 길을 뒤따르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쉽게도 말하지만, 정작 그 통일이 되고 나면 북한의 깊은 산속에 숨어드는 게릴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나는 홀로 고민해보곤 한다. 북한은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오래도록 유지되고 있는 유사 종교적 독재 국가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고, 통일이 되고 난 후에는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 주체주의자들이 가장 큰 안보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 대한민국은 '형식적 종북'에 대해 이토록 관대한 나라가 되었을까. 우리는 북한이 하는 짓을 고스란히 따라해서가 아니라, 북한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정 반대의 방향을 택했기에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 설마 아직도 대한민국이 북한과 '경쟁'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시점에서 우리의 핵심 과제는 북한을 이기는 게 아니다. 이미 이겼다. 북한을 흡수하고도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튼튼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박근혜 정권은 정신을 좀 차려야 한다. 통진당이 해산된 이 시점,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 청와대를 능가할만한 조직이 대한민국에 없다. 동시에, 국정교과서 논란을 '역사 왜곡'으로만 몰아가는 야권 역시 역사 인식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국정교과서는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그 형식부터가 '쪽팔리는',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말해보자.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측에서는 '내용적 종북'이 들어있기 때문에 여타의 교과서를 없애고 국정교과서로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그것은 친일 독재 세력의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하면,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그 덫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끝나지 않는 논쟁을, 혹시 즐기는 게 아니라면, 이제는 피해야 한다.
어떻게? 상대방을 종북주의자로 몰아가면 된다. 위에서 우리가 이야기했다시피 현 정부는 '내용적 종북'과 거리가 멀지언정(정말 그런지도 의문이지만),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공격적인 어법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최근 시사 용어로 '미러링'이라고 한다. 종북 프레임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 너희들은 친일파라고 몰아붙이는 것, 다 해봤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지 않나.
이제는 미러링을 해볼 때다. 야권이 종북이라고? 아니다. 북한이나 하는 국정교과서를 기습 추진하는 현 정권이야말로 종북 정권이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보호해야 한다. 청와대에 종북 세력이 숨어들어 있다. 건국 70년, 공산주의와 맞서며 이룩해낸 우리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성취를 이렇게 무위로 돌릴 수는 없다. 통진당의 해산 이후, 대한민국에 조직화된 '내용적 종북'은 없다. 이제는 '형식적 종북'의 문제를 고민해볼 때다.
이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국격의 문제다. 피땀흘려 이룬 나라가 하루아침에 후진국 수준으로 주저앉는 꼴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우리의 경제 수준에 걸맞는 정치적 발전을 고대하며, 숨죽여 외쳐본다. 종북세력 물러가라. 자유민주주의 만세.
2015-10-06
[북리뷰] 우리말의 탄생, 우리말의 재탄생
우리말의 탄생
최경봉, 책과함께, 1만4천9백원.
<우리말의 탄생>이라는 제목은 언듯 들으면 형용모순 같다. '우리말'은 따로 '탄생'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우리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책의 부제인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를 보면, 그리고 위에서 인용된 본문의 첫 문단을 읽으면, 우리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한국어를 '모국어'로 재정립해나가던 바로 그 과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1894년 조선 정부는 칙령 제1호 공문식에서 한글을 공식 언어로 선포했다. 제14조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되, 한문을 덧붙여 번역하거나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한국어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식 언어가 아니었다. '문자'를 사용하는 식자층은 고전 한문을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었고, 사실상 지배 계급 역시 필요에 따라 한글을 이용해 한국어를 소리대로 적고 있긴 했지만 그 언어에 어떤 공식적 지위와 권능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간판을 바꾸고 신장 개업을 하면서,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한국어를 공식어로 선언한 것은 그 중 하나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문제는 그때까지 조선의 식자층이 한국어 그 자체를 그다지 진지한 연구와 학습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국문'이 된 입말은 어제까지만 해도 '언문'으로 불리던 백성들의 말이었을 뿐이다.
<우리말의 탄생>은 바로 그 '국문'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수많은 학자들과, 그들이 겪었던 내부 갈등 및 외부로부터의 탄압 등을 다각도에서 조망하는 책이다. 우리말에 규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어로 한국어를 설명하는 사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한제국에는 그런 국책 사업을 추진할만한 힘이 없었고,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 지배의 필요성 때문에 한국어 연구를 어느 정도 방관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로는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말 큰 사전>을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한국어 혹은 한글에 대한 신화적 열광을 떨쳐내는 데 도움을 준다.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세종대왕이지만, 그의 발명품을 이용해 어떻게 한국어를 담아내고 또 다듬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와 혼란이 있었다. 한글을 알파벳처럼 풀어서 쓰자는 급진적인 논의가 가능했던, 말하자면 우리말의 가소성이 큰 시점을 다각도에서 조망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말이 지금의 이 모습인 것에는 그 어떤 절대적 필연성도 없다. 다만 수많은 학자와 언어 대중이 고심하고 합심하여 이루어 낸 결과물일 따름이다. 한국어는 근대적 민족국가와 함께 탄생하였고, 지금도 계속 재탄생하고 있는, 살아있는 언어인 것이다.
2015.10.20ㅣ주간경향 114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최경봉, 책과함께, 1만4천9백원.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물러난 후라 경성역 창고에는 갈 곳이 없는 화물이 많이 쌓여 있었다. 화물을 정리하는 인부들 사이에서 이를 점검하던 역장은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된 상자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내용물을 살펴본 역장은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이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야.'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서어사전 편찬사업의 결실인 원고지 2만 6천5백여 장 분량의 조선어사전 원고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당한 지 3년 만에, 해방 후 사전 원고의 행방을 수소문한 지 20여 일만에 조선어학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37쪽)
<우리말의 탄생>이라는 제목은 언듯 들으면 형용모순 같다. '우리말'은 따로 '탄생'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우리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책의 부제인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를 보면, 그리고 위에서 인용된 본문의 첫 문단을 읽으면, 우리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한국어를 '모국어'로 재정립해나가던 바로 그 과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1894년 조선 정부는 칙령 제1호 공문식에서 한글을 공식 언어로 선포했다. 제14조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되, 한문을 덧붙여 번역하거나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한국어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식 언어가 아니었다. '문자'를 사용하는 식자층은 고전 한문을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었고, 사실상 지배 계급 역시 필요에 따라 한글을 이용해 한국어를 소리대로 적고 있긴 했지만 그 언어에 어떤 공식적 지위와 권능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간판을 바꾸고 신장 개업을 하면서,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한국어를 공식어로 선언한 것은 그 중 하나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문제는 그때까지 조선의 식자층이 한국어 그 자체를 그다지 진지한 연구와 학습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국문'이 된 입말은 어제까지만 해도 '언문'으로 불리던 백성들의 말이었을 뿐이다.
<우리말의 탄생>은 바로 그 '국문'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수많은 학자들과, 그들이 겪었던 내부 갈등 및 외부로부터의 탄압 등을 다각도에서 조망하는 책이다. 우리말에 규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어로 한국어를 설명하는 사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한제국에는 그런 국책 사업을 추진할만한 힘이 없었고,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 지배의 필요성 때문에 한국어 연구를 어느 정도 방관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로는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말 큰 사전>을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한국어 혹은 한글에 대한 신화적 열광을 떨쳐내는 데 도움을 준다.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세종대왕이지만, 그의 발명품을 이용해 어떻게 한국어를 담아내고 또 다듬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와 혼란이 있었다. 한글을 알파벳처럼 풀어서 쓰자는 급진적인 논의가 가능했던, 말하자면 우리말의 가소성이 큰 시점을 다각도에서 조망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말이 지금의 이 모습인 것에는 그 어떤 절대적 필연성도 없다. 다만 수많은 학자와 언어 대중이 고심하고 합심하여 이루어 낸 결과물일 따름이다. 한국어는 근대적 민족국가와 함께 탄생하였고, 지금도 계속 재탄생하고 있는, 살아있는 언어인 것이다.
2015.10.20ㅣ주간경향 114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0-04
[별별시선]기성세대의 염치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기성 지식인이나 청년 논객 할 것 없이 지금의 청년들을 뭔가 구별지어 특별하게 다루어주는 듯한 각종 형태의 ‘청년 담론’들을 즐비하게 내놓고 있다. 이것들을 조심하라. 답은 ‘다수화 전략’에 있다.” 지난달 11일, 경향신문에 실린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의 칼럼 ‘또 하나의 기울어진 운동장’의 결론이다. 인용문에서 지적된 ‘청년 논객’에 속하는 한 사람으로서, 대답해볼 필요가 있겠다.
칼럼이 게재될 무렵, 새누리당은 “청년 일자리를 위하여 임금피크제를!” 같은 구호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노동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수사는 청년들을 중장년층과 대립하게 만들어 고립시키고, 결과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홍기빈의 지적이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1992년 대선·총선 이후의 한국 정치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을 호남과 수도권 일부로 고립시키고,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의 보수 지배세력이 하나로 뭉치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대립 구조에 지배당해왔”다는 대목을 보면, 그의 논리 구조가 결국 ‘피해자 탓하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2년 이후 한국 정치에서 호남이 고립된 것은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 민주화 세력의 절반을 군사독재 세력과 뒤섞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노무현은 바로 그 3당 합당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이의 있습니다!’라며 반대했고, 결국 통합민주당에 합류한 사람이다. 호남의 고립은 호남의 탓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김영삼의 지지 기반인 영남이 등을 돌려서 벌어진 일이다.
청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청년 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보다 높을까? 정부의 주장대로 임금피크제가 시행되지 않아서라고 할 수야 없겠으나, 청년 실업률을 높이는 주된 원인에 진보 진영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번 비정규직으로 시작하면 절대 정규직으로 올라갈 수 없는 노동시장의 구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시장은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를 ‘1차 노동시장’이라고 하고, 후자를 ‘2차 노동시장’이라고 부른다. 그 사이에는 임금, 고용안정성, 노동조건 등에 있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한 번 ‘눈높이를 낮추면’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유사 신분제에 가깝다. 당연히 청년들은 처음부터 ‘1차 노동시장’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진보 진영에서는 자본과 정부의 책임만을 묻는다. 하지만 조합주의에 빠져버린 노동계 역시 이 사태에 있어서 결코 결백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홍기빈이 청년들에게 요구하는 ‘다수화 전략’은, 노동조합 조직률 10%대를 맴도는 한국의 노동계가 진작에 수행했어야 한다.
청년들은 정부에 속고 있는 게 아니다. 중장년층이 가지고 있는 ‘양질의 일자리’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진보 진영을 믿지 않을 뿐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잘 조직되어 있는 일부 대기업 생산직에서 이미 가족이나 친지를 대상으로 한 ‘일자리 대물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같은 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차별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모른 체하면서 말이다.
대체 청년들이 뭘 어쨌어야 한다는 말인가? ‘청년 담론’은 때로 보수의 분할 통치 방안으로 동원된다. 하지만 청년들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동의 영역에 분할 통치와 이간질이 가능한 차별이 존재함에도, 그것을 미리 바로잡아놓지 않은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좀 해줬으면 한다. 그것이 기성세대가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염치라고, 한 ‘청년 논객’은 외치는 바이다.
입력 : 2015.10.04 20:48:37 수정 : 2015.10.04 20:52: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042048375&code=990100#csidxf53f26551e49056a682ddaf2c5c432b
칼럼이 게재될 무렵, 새누리당은 “청년 일자리를 위하여 임금피크제를!” 같은 구호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노동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수사는 청년들을 중장년층과 대립하게 만들어 고립시키고, 결과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홍기빈의 지적이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1992년 대선·총선 이후의 한국 정치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을 호남과 수도권 일부로 고립시키고,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의 보수 지배세력이 하나로 뭉치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대립 구조에 지배당해왔”다는 대목을 보면, 그의 논리 구조가 결국 ‘피해자 탓하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92년 이후 한국 정치에서 호남이 고립된 것은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 민주화 세력의 절반을 군사독재 세력과 뒤섞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노무현은 바로 그 3당 합당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이의 있습니다!’라며 반대했고, 결국 통합민주당에 합류한 사람이다. 호남의 고립은 호남의 탓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김영삼의 지지 기반인 영남이 등을 돌려서 벌어진 일이다.
청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청년 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보다 높을까? 정부의 주장대로 임금피크제가 시행되지 않아서라고 할 수야 없겠으나, 청년 실업률을 높이는 주된 원인에 진보 진영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번 비정규직으로 시작하면 절대 정규직으로 올라갈 수 없는 노동시장의 구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노동시장은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를 ‘1차 노동시장’이라고 하고, 후자를 ‘2차 노동시장’이라고 부른다. 그 사이에는 임금, 고용안정성, 노동조건 등에 있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한 번 ‘눈높이를 낮추면’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유사 신분제에 가깝다. 당연히 청년들은 처음부터 ‘1차 노동시장’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진보 진영에서는 자본과 정부의 책임만을 묻는다. 하지만 조합주의에 빠져버린 노동계 역시 이 사태에 있어서 결코 결백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홍기빈이 청년들에게 요구하는 ‘다수화 전략’은, 노동조합 조직률 10%대를 맴도는 한국의 노동계가 진작에 수행했어야 한다.
청년들은 정부에 속고 있는 게 아니다. 중장년층이 가지고 있는 ‘양질의 일자리’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진보 진영을 믿지 않을 뿐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잘 조직되어 있는 일부 대기업 생산직에서 이미 가족이나 친지를 대상으로 한 ‘일자리 대물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같은 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차별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모른 체하면서 말이다.
대체 청년들이 뭘 어쨌어야 한다는 말인가? ‘청년 담론’은 때로 보수의 분할 통치 방안으로 동원된다. 하지만 청년들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동의 영역에 분할 통치와 이간질이 가능한 차별이 존재함에도, 그것을 미리 바로잡아놓지 않은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좀 해줬으면 한다. 그것이 기성세대가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염치라고, 한 ‘청년 논객’은 외치는 바이다.
입력 : 2015.10.04 20:48:37 수정 : 2015.10.04 20:52: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042048375&code=990100#csidxf53f26551e49056a682ddaf2c5c43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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