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가 주대환은 “나는 4·19의 시(詩)만 읽은 게 아니라 5·16의 밥도 먹고 자랐다”고 즐겨 말한다. 이승만의 농지개혁과 박정희의 산업화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 인식에 터를 잡고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펴낸 후 그는 진보진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주대환은 따돌림과 배척을 무릅쓰고 한국 현대사의 어떤 진실을 말했다.
하지만 저 표현은 불완전하다. 주대환의 잘못은 아니다. 5·16과 박정희에 대한, 혹은 박정희가 한반도의 역사에 불러온 변화에 대한 그릇된 통념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을 뿐이다. 4·19에는 시가 있었고, 밥은 없었다. 하지만 5·16에는 밥만 있었던 게 아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한 가지 지적해 두자. 아직 한국 사회는 위선적이다. ‘시’와 ‘밥’을 대조해 논하면, 시가 더 고결하고 밥은 세속적이며 천박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시보다는 밥이 더 중요하다. 시가 밥보다 더 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밥을 먹기 위해 모든 시를 억압해도 되는 것 또한 아니다.
5·16에는 밥도 있었지만 시도 있었다. 군사정변, 권력을 잡고 강화하기 위해 벌인 헌정 질서 문란 행위,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등이 정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5·16은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 정신사적 사건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 의미를 새기고, 배울 건 배우되 반성할 건 반성해야 보수진영, 더 나아가 진보 그리고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
5·16의 잘살아 보세, ‘혼자 말고 함께’
1962년 어느 날, 음악평론가 이상만이 방송작가 한운사를 찾아왔다. 5·16 1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데 많은 사람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랫말을 하나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이상만을 통해 작사가를 물색한 이는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 훗날 자서전에서 한운사는 “지금 국민은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한번 외쳐볼라나.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의 보따리를 팽개치자고. ‘잘살아 보세’라는 제목이 떠올랐다”고 술회했다. 그렇게 한운사는 김희조 당시 경희대 음대 교수가 만든 가락에 가사를, 즉 시를 붙였다.
‘잘살아 보세 / 잘살아 보세 / 우리도 한번 / 잘살아 보세.’ 설령 그 시절을 살지 않았더라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5·16 1주년 기념행사에서 초연됐으니 그야말로 ‘5·16의 시’다. 과연 우리는 이 노랫말을(시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잘살아 보세.’ 말 그대로, 잘살아 보자는 이야기다. 저 대목만 놓고 보자면 그리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면 감동을 준다. 진보적 관점에서 한국의 대중문화를 살피는 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는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대중문화로 보는 박정희 시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잘살아 보세’의 핵심 구절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하는 대목은 묘하게 가슴을 울린다. 이 구절에서 징글징글하게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이를 벗어나고 싶은 절실함이 함께 확인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저 가사의 마법은 ‘잘살아 보세’에 있지 않다. ‘우리도 한번’이 핵심이다. ‘우리’가 함께 잘살아 보자는 말은, 그냥 ‘내가 잘살면 좋겠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잘 먹고 잘살고 싶은 욕망이라면 늘 있어왔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대 초, 인기 절정의 배우가 등장했던 신용카드 광고 문구를 떠올려보자. “여러분, 부자 되세요!”
하지만 ‘부자 되세요’는 ‘잘살아 보세’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우리도 한번’이 없기 때문이다. 5·16의 노랫말에는 ‘우리’가 있다. 이승만 정권의 부자들이 그랬듯,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이나 미군정에서 불하받은 적산가옥이나 미군 원조를 독식하는 식으로, 혼자만 잘살자는 게 아니었다. 성실한 노력과 노동을 통해 함께 잘살자는 목소리였다. 새 시대를 각자도생이 아닌 우리의 힘으로 일궈보자는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그러한 경향성은 4·19와 5·16을 전후해 등장한 대중문화 작품 속에서 고루 발견된다. 이영미에 따르면, 당시 인기를 끌던 TV 드라마이자 영화로도 제작된 ‘신입사원 미스터리’와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는 공히 “근대적 기술의 힘을 지닌 개혁적이고 실천적이며 성실한 청년이 낡고 비윤리적인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대립 구도”를 지녔다.
신상옥 감독의 1963년 영화 ‘쌀’도 마찬가지다. 물이 부족해서 쌀농사를 짓지 못해 배고픈 마을이 있다. 지주이자 정치인인 송 의원은 젊고 실용적인 차용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저수지 공사를 하는 것을 방해한다. 결국 ‘합리적’으로 말이 통하는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차용의 뜻은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이영미의 평가가 흥미롭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이 작품은 정권 홍보의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너무도 명료한 영화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노골적인 정권 홍보 영화지만 나름의 감동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중학생 시절, 한국 고전 명작 영화를 TV에서 방영할 때 ‘쌀’을 처음 본 필자 또한 같은 감동을 느꼈다. 자연환경의 제약을 넘어, 고루한 인습과 기득권의 틀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개혁을 달성해 내는 서사 구조에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대중은 바로 그런 것을 원했다. 주대환뿐 아니라 필자 본인을 포함한 지식인들은 그 무렵의 시대정신을 애써 모른 척해왔다. 대신 현실의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에 진저리를 내고, 그러면서 술이나 마시고 신세 한탄을 하고, 푸념하고, ‘광장’의 주인공처럼 중립국을 외치다 죽거나 김수영 시의 한 구절처럼 “작은 것에만 분노”하는 자아상을 탐닉해 왔다. ‘4·19의 시’란 그런 것이었다.
정작 그 시대를 살았던 대다수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전근대적인 잔재를 일소하고 근대적인 합리성을 장착해 가난을 극복하고 잘살아 보자는 에너지가 사회 전반에 넘치고 있었다. 박정희와 육사 8기로 대변되는 3공 세력은 그와 같은 대중적 분위기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고, 놀라운 경제 발전의 첫 시동을 걸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5·16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오늘의 시발점이 됐다. 그 이면에는 밥뿐만 아니라 시도 있다. 어쩌면 밥 그 자체보다, 합리적이고 계획적이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실용적이고 성실한 인물상을 그려낸 시의 출현이 더 중요한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1960년대에 한정해서 이야기해 볼 때, 박정희는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박정희 시대는 박정희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도록 만든 에너지가 있었고,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만들어낸 결과가 있었다. 양자를 완벽히 나누기란 쉽지 않고 사실상 불가능할 테지만, 구분을 포기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그 구분은 유의미하며, 꼭 필요하다. 한국 보수 진영이 몰락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서다.
누구라도 재벌이 될 수 있는
이승만 시대, 1950년대는 ‘사바사바’하지 않으면 취직할 수 없고, 취직해도 ‘빽’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비합리와 전근대의 시대였다. 당대인들은 그렇게 느꼈다. 그 시절을 배경에 둔 수많은 문학, 영화, 드라마 등에서 확인되는 바가 그러하다. 박정희는 억눌린 젊은이들에게, 적어도 이전에 비해서는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꿈과 희망을 줬다. 그리하여 군사정변 이후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식인들을 위한 4·19의 시가 아닌 대중을 위한 5·16의 시는 더욱 널리 퍼졌고, 애창됐고, 시대정신이 됐다. 경제는 고도성장을 시작했고 온갖 진통을 겪으면서도 한국인은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달려가며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물론 성공을 만들어내기 위해 동원된 방식이 전적으로 공정하지만은 않았다.
김우중의 대우그룹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김우중 회장부터 모든 임직원이 상상하기 어려우리만큼 열심히 일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우의 급성장은 김우중이 박정희와 맺고 있던 돈독한 인연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었다. 국민 모두가 잘살아 보겠다는 열망을 품었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이 절대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장 크고 달콤한 과실은 결국 권력과의 거리에 따라 분배됐다.
오늘날 보수 정치는 박정희 시대가 만들어낸 재벌그룹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국민은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바로 그 점이 보수 정치가 네 차례 연이어 패배한 이유일 테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던 시절, 그의 정치는 국민 모두가 잘살고 싶은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반면 지금은 국민 모두가 잘사는 나라가 아닌, 이미 잘살고 있는 사람들만 잘사는 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1960년대의 국민이 박정희를 지지한 까닭은 누구라도 재벌이 될 수 있는, 실낱같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기회를 나눠줬기 때문이었다. 2020년 현재 보수 정치는 과연 국민에게 그런 꿈을 꾸게 하는가?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보수 정치인과 언론이 “이렇게 복지 퍼주기만 하다가는 나라가 베네수엘라 꼴이 된다”고 외쳐도 국민들이 듣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국민들이 ‘빨갱이’가 돼서가 아니다. 보수 정치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정신을 내팽개친 채,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치는 기득권 패거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남 탓을 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국민은 현재 보수 정치를 건강한 시장경제의 수호자로 여기지 않는다. 구멍가게에서 시작해 재벌그룹까지 도달할 수 있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 따위는 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흙수저’는 ‘흙수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복지 예산 좀 축내는 게 뭐가 대수인가?
민주노총이냐 대기업 임원과 오너냐
조국 전 법무장관이 한 유명한 말을 떠올려보자. “우리들 ‘개천에서 용 났다’류의 일화를 좋아하지만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개구리·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 소위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경제적 역동성과 그로 인한 사회계층 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대신 각자 자리에서 안분지족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많은 이가 저 트위터 발언의 후안무치함을 지적했지만, 이번 총선 결과가 보여주다시피 그렇다고 국민이 더불어민주당 대신 미래통합당을 택하는 일은 없었다. 통합당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 역시, 대놓고 말을 안 하고 있다 뿐이지, 조국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국민 기층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주지하다시피 민주당은 민주노총이라는 노동계의 기득권과 한편에 서 있다. 하지만 통합당은 그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다니는 대기업의 임원 및 오너 등의 이익을 대변한다. 평범한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현실을 놓고 볼 때, 나 혹은 내 자식이 민주노총에 들어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대기업 임원이나 재벌 총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유권자로서는 누구를 지지하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일까?
누구나 자신의 손으로 더 나은 내일을 개척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다면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개천에서 붕어·개구리·가재로 살아가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조국조차 딸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사하기 위해(재판 중인 사안이긴 하나) 매우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시키지 않았던가.
그러한 욕망은 모두가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제공할 때 사회는 건전해진다. 자유시장경제 이론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신비한 힘을 역설했다.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다. 6·25전쟁 직후 어떤 영국 언론인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건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조롱했지만, 우리는 기어이 꽃을 피워내고 말았으니 말이다.
동력은 분명하다. 국민 모두 잘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열망을 헛되이 하지 않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고 외치며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스스로 자신과 자녀들의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는 ‘우리’로 호명됐고, 보수 정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문제는 보수가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자신의 근본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박정희가 처음 집권할 당시 그들은 보수가 아니었다. 혁신적인 젊은 피였고, 이전에 비해 공정하고 활기찬 시장경제를 선사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으며, 그 약속을 지켜냈다. 상대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진보에 가까웠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인류학 박사 윤보선과 달리 박정희는 논두렁에 앉아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셨고 온 나라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었다.
양주잔 내려놓고 막걸리 마셔야
오늘날의 보수 정치는 시바스 리갈을 마시던 박정희에 훨씬 더 가까워져 있다. 오직 그런 모습만 떠오를 뿐이다. 국민들로서는 박정희 시대의 추억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거나, 지역적 연고가 강하거나, 박정희 체제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아닌 다음에야, 보수 정당을 찍을 이유가 없다. ‘여당 프리미엄’마저 이제는 민주당이 누린다. ‘이기는 편 우리 편’이라며 중도층이 찍어주는 정당은 통합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라는 말이다.
언필칭 청년 진보 논객으로 불려온 필자가 노년층이 지지하는 보수 정당을 향해 고언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지금 한국에는 올바른 시장경제와 합리적인 법치주의를 목표로 삼는 정당이 필요하다. 많은 국민은 통합당 혹은 넓은 보수 진영을 그저 ‘늙은 기득권 정당’으로만 바라본다. 그런 인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치는 자신의 핏속에 진보의 DNA가 섞여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 유전자를 깨울 때, 젊은이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은 돈이 아니라 꿈을 보고 투표한다. 모든 이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든 표심은 돌아올 수 있다. 양주잔을 내려놓고 막걸리를 마셔야 할 때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