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13

라캉과 정신의학, 그리고 관념론

하룻밤 사이에 논쟁이 정리되었고, 특히 아이추판다 님이 "라캉 위에 그어진 선"이라는 포스트를 통해 자신의 논지를 명확히 밝혀버린 덕에, 내가 이 논쟁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대단히 협소해진 것이 사실이다. 우선 입장을 밝히자면, 나 또한 라캉의, 혹은 넓은 의미에서의 정신분석학이 의학으로서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프로이트와 융이 정신분석을 하던 시절의 의학과 현대의 의학은 완전히 다르다. 당시는 의학의 여명기였다. 크루그먼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 의학 교수들은 인간의 신체 기관과 작용에 관하여 수많은 정보를 축적해 왔으며, 이를 토대로 질병 예방법에 대해 극히 유용한 충고를 해 줄 수 있었"지만, "그러나 막상 병에 걸리면 대개는 치료할 줄 몰랐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행위를 의학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은, 환자가 치료되고 말고를 떠나서 당시 의학의 연구 방식 자체가 체계화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사가 하는 행동이 곧 의학이며 치료였던 것이다.

문제는 정신분석학이 바로 그 당시의, 굳이 명명하자면 '원시 의학'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데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 등의 텍스트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실천적인 차원에서 수행하는 독특한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만약 정신분석학이 의학이라면 우리는 전기 라캉의 텍스트를 읽을 필요가 없다. 실재계를 도입한 정신분석이 상상계와 상징계만을 이용하는 정신분석보다 낫다는 의학적, 통계적 결론이 이미 나와 있다면, 사실 전기 라캉 뿐 아니라 프로이트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도 없다. 이건 마치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인간의 정신, 마음 일반에 대한 연구이기 이전에 프로이트와 융, 라캉 등의 텍스트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와의 직접적인 대면 및 임상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인 인문학과의 차이일 뿐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자들은 자신들이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임상'의 과정을 거친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위치를 인문학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모든 인문학이 오직 텍스트만을 분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령 인류학의 경우 필드워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사학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그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에 직접 가보는 일이 대체로 권장되는 편이다. 단지 임상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정신분석을 의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인류학과 사회학을 혼동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정신분석에는 의학에 요구되는 과학적 방법론과 객관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비판을 위해 그동안 벼르고 있었던 《라캉과 정신의학》을 읽었으니, 그것의 구절을 인용하며 정신분석이 '정신의학'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보자. 정신분석에 우호적이지 않은 미국과, 정신분석가의 권위를 인정하는 프랑스의 경우를 비교하며 핑크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어떤 효과를 낳을까? 우선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가령 프랑스인들은 처음부터 분석의 효과에 훨씬 더 개방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의사에게 지식이나 권력을 부여한다면, 이는 그들이 의사의 암시suggestion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메스머Mesmer와 샤르코charcot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환자들은 <기적의 치료사>라는 명성 때문에 쉽게 그들의 암시에 말려들 수 있었다. 샤르코는 걷지 못하던 환자도 최면을 통해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프로이트는 자신이 최면을 사용했을 때엔 다른 의사들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적이 있다. 이는 아마 환자들이 프로이트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이트에게는 치료의 <아우라aura>가 없어서 환자들이 쉽게 암시에 빠져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가 유명해지자 당연히 상황은 바뀌었다. 환자들은 그를 쉽게 신뢰하게 되었으며 그만큼 암시 효과도 증가했다. 그러나 대개 암시 효과는 수명이 짧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동일한 암시를 계속 반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점차 암시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나갔다. 프로이트는 환자들의 신뢰가 없이도 점차 치료를 잘 해낼 수 있었다. 암시에 매우 쉽게 빠져드는 환자라면 단지 분석가와 분석 일정을 잡는 것만으로도(단지 그것을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을 잠재울 수 있겠지만, 이런 효과는 사실 <위약 효과Placebo effect>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분석의 효과라기보다는 환자가 처음부터 갖고 있던 자기 최면의 결과인 것이다.
62, 브루스 핑크, 맹정현 옮김, 《라캉과 정신의학》(서울: 민음사 2002)

아무리 너그러운 기준을 세우려고 해도, 치료자 개인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에 따라 다른 결과가 도출되는 행위를 과학적인 의료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일반적인 의학적 치료의 경우에도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에 따라 치료 효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는 투여한 약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사례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일 뿐이다. 반면 정신분석의 경우 분석가의 개인적인 능력과 카리스마, 혹은 '치료자로서의 아우라'에 따라 분석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그러한 행위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이다.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정신분석이 '치료'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핑크의 책에 따르면, 정신병의 증상으로 환각, 언어 장애, 질문 부재 등이 나열되는데, 그 각각에 대해서 "사실상 <치료>라는 것이 불가능하다"(144-145, 같은 책)고 한다. 라캉이 말하는 정신병이 우리가 아는 정신병과 다른, 특수한 좁은 범주의 무언가를 지칭한다고 해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샤르코나 그 외 19세기 말에 활동한 의사들이 최면 요법 등을 통해 치료하고자 했던 정신질환 중 상당수는, 정신분석이나 최면요법 등이 아닌 일반적인 의학적 방법론을 통해 적절하게 치료되고 있다. 간질, 발작, 수면 장애, 그 외 수많은 정신질환에 대해 의사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한 진지한 접근을 지속했고, 결국 그러한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뇌의 이상으로 인한 간질의 경우 현재의 의학적 기술로써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말은 '정신병은 치료가 불가능하다'라는 라캉의 말과 정 반대의 지점에 위치한다. 간질을 치료하기 위한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캉의 말대로라면 (그가 말하는) 정신병은 치료가 아예 불가능하다. 이렇게 무기력한 의학을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만나본 적이 없다.

심지어 한 발 더 나아가면, 지젝처럼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만날 수 있다. 정신분석이 진지한 의학이라면, 설령 비유라고 해도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당신의 폐암을 즐겨라", 내지는 "당신의 편두통을 즐겨라"라고 환자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는 (라캉이 말하는) 정신병을 '치료 불가능'이라고 도려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정신분석이 다루는 대상이 극히 한정적이며, 긴박한 치료를 요하지 않는 시점에만 효용성이 있는 일종의 지적 여가 활동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결국 이 논의는 핑크에서 시작하여 슬그머니 지젝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미 한윤형과 아이추판다 님이 나눈 논쟁을 통해 잘 드러난 바와 같이, 라캉을 통해 치료를 (한다고 주장)하는 핑크와 라캉을 해석하여 문화비평을 하는 지젝 사이에는 사실상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라캉의 글이 직접 번역되어 수입된 바 없기 때문에, 한국의 독자들은 두 명의 해설자를 통해 라캉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라캉을 임상의로 파악하는 일군의 무리와 철학자로 보는 또 다른 무리의 구분은 희미해진다. 이러한 논의의 지형도를 그림으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문제는, 라캉의 텍스트 자체가 번역되어 있지 않은 한국의 특성상, 프랑스어 혹은 영어를 수월하게 읽을 수 있고 또한 원서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라캉을 옹호하는 자신의 주장을 라캉 그 자체를 통해 지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지젝을 통해 라캉을 알게 되었을 때 지젝만으로는 자신의 말에 더 이상 논거를 댈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고 가정해보자. 프랑스어권의 독자라면 라캉의 《세미나》따위를 직접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게 안 된다. 따라서 그는 슬그머니 핑크의 책을 집어든 다음, '라캉은 임상의거든요! 이걸로 정말 환자 치료 할 수 있거든요!'라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라캉의 용어를 빌자면, 라캉은 그저 상상계에 머물러있을 뿐 그 주장을 하는 이의 상징계속에서 언어화되어 있지 않다. 도표를 보자. F와 Z가 있고, 위에 L이 있다. 그 사이에 그어져있는 직선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선을 뜻한다.

한국의 '라캉쟁이'들이 오직 지젝과 핑크의 책만을 읽는다는 것, 라캉의 텍스트에 직접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캉에 대해 그렇게 논의하면서도, 정작 라캉 그 자신은 '라캉쟁이'들의 상징계에 포섭되지 않았다. 상징계에서 특정 요소가 폐제됨으로써 라캉이 규정하는 정신병이 발생하듯이, '라캉쟁이'들의 상징계에는 정작 라캉이 폐제되어 있다. 그들은 라캉을 이야기하지만 라캉이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부권적 기능이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학자인 핑크로 돌아가보자. 한국의 '라캉쟁이'들의 상징계에서 라캉은 폐제되어 있다. 그 결과 그들은 환각, 언어 장애, 은유 생산 능력의 결여, 통제되지 않는 충동들, 질문 부재, 심지어 여성화 등의 증상을 겪게 된다. 진정으로 슬픈 것은, 이들의 증상은 그 개념상 라캉이 말하는 정신병이기에, 정신분석을 통해 치료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캉쟁이'들을 치료하겠다는 발상은 과감히 접고, 라캉을 구원할 수 있는 해법에 대해서 고민해보도록 하자. 지젝이 설명하는 형이상학자로서의 라캉의 위상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맥락상 무시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으므로, 라캉을 유사 과학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일종의 관념론으로 재가공하는 것이다. 나는 지젝이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라고 추측한다. 철학사적 맥락에서 볼 때, 라캉은 프로이트적인 관심사와 방법론을 헤겔적인 구상으로 실현한 관념론의 대가 중 한 사람이다. 나는 그와 그의 학파가 진행하고 있는 작업을 '프랑스 관념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브루스 핑크가 말하는 바와 같이 프랑스에서는 학교에서도 정신분석을 가르치며, 분석자의 권위가 살아있고 그에 따라 그것이 치료 효과를 거두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해도, 그 자체의 개념 정의상 정신분석은 도저히 과학일 수가 없다. 프로이트가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은 당시의 정황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캉과 그 후대의 사람들도 끝까지 자신들의 작업을 과학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과학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수학소' 등의 용어를 도입하였다가 소칼의 빈축을 사는 것 등은 '프랑스 관념론'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상담과 임상 사례 등의 연구를 통해 발전해온 인문학의 한 분야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예 임상을 없애라는 요구 또한 가혹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해법은 '과학'에 대한 페티쉬를 버리는 것이다. 용법에 맞지 않는 과학과 수학의 언어를 도입하면서 스스로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것은 일종의 자기 패러디가 될 수밖에 없다. 이미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나름의 방법론을 갖추고 전문적인 과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이 심리학보다는 차라리 인류학에 더욱 가까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레비-스트로스 이후 인류학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은 사회학자들이 쓰는 통계 프로그램을 억지춘향이격으로 가져다 쓰면서 자신들이 '과학'을 하고 있다고 우기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분석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추측한다. 소칼 논쟁을 통해 드러난 프랑스 철학자들의 모습은, 비유하자면 과학이라는 유방을 욕망하지만 미국이라는 엄마는 부정하고 싶어하는 도착증 환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1학문의 위상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긴 논의를 요약해보자. 정신분석은 의학으로서 갖춰야 할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젝이 해설하는 철학자 라캉은 큰 의의를 지니는 인물이다. 그런데 라캉의 심리학과 정신분석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철학자로서의 라캉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닌 인류학적인 방법론과 자세를 받아들여,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치료가 아닌 인문학적 탐색과 통찰을 얻어내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이 라캉 이후 태동하고 있는 '프랑스 관념론'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한편 한국의 경우 라캉의 텍스트가 직접 유입되지 않음으로써 라캉주의자들에게는 라캉이 그들의 상징계에서 폐제되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래서 그들은 라캉의 임상의로서의 권위를 빌어 그의 철학을 옹호하다가, 혹자가 라캉의 심리학이 지닌 약점을 지적하면 지젝 등의 문화비평의 성공 사례를 들어 라캉이 과학자임을 역설하는 등의 언어 장애를 보이는데, 이는 라캉이 말하는 바 정신병이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하고, 그냥 "징후를 즐기"는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렇듯 라캉을 폐제해버린 '라캉주의자'들이 라캉을 직접 번역하여 소개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라캉의 철학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들의 증상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댓글 10개:

  1. 노정태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대부분 동의합니다마는, "정신분석학이 의학으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라는 주장에 한 단어가 빠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지금은"일 것입니다.

    지금의 확립된 과학적 절차를 완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즉 미래에도 같은 모습으로 살아남을 것이라는 가정은, 중세 천동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근거를 님이 인용한 브루스 핑크가 잘 암시해 주고 있군요. 환자가 의사의 "암시"로 낫는 경우가 있다면, 외부의 자극/치료와 달리 내부의 기전으로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패러다임으로는 "확립"되어 있지 않고 그 신뢰성이 떨이지기에 "암시"를 이를 치료법으로 확립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 "암시"가 나중에 그 기전이 알려져--그 방법은 꼭 "실험"으로 발견된다는 보장은 없고, 더 나은 발견방법이 "발견"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치료법 또는 의학의 패러다임으로 "확립"된다면, 지금의 치료 패러다임은, 지금의 의학에서 한의학을 보는 수준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Experimentalists(실험주의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실험이라는 것은 neutral (가치중립적?)일수 있을지 모르지만 관찰자/실험설계자는 theory-laden, 즉 실험설계와 관찰이 실험자의 신념에 좌우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실험의 결과가 참이냐 거짓이냐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때, 그 결과가 사람들 사이에 오래 살아남으면 어쨌거나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님의 글을 보면 라캉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정신분석학쪽에서도 말이죠. 제가 현재로서는 라캉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세부사항을 밝히기에는 시간이 없지만, 어쨌거나 위의 논리에 따라보면, 라캉을 "막장"취급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냥 그런 패러다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짜피 끼리끼리 노는 것이 과학의 세계인 것을, 그들끼리 놀던지 말던지. 진정 막장이라면 필요가 없으니 알아서 없어지겠죠..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말이죠...

    따라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조건 닫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과학의 발전을 막는 반과학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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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는 과학적 방법론이 영원하다거나, 절대적으로 옳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지적 활동 중 어떤 것들은 분명히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거죠. 과학이 무엇이냐는 정의를 내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대체로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놓을 수는 없어도, 정신분석이 과학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과학을 완전한 것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등의 주장에 대해서는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건 제 논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다만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검증된 치료술만이 의학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과학으로 검증된 지식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안전해서죠. 과학적 방법론으로 얻어진 지식은, 오류가 발생하였을 때 그것을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다른 지적 방법론보다 훨씬 더 열려있습니다.

    무조건 닫지 말자는 말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반과학이 아니라 유사 과학입니다. 그건 과학적 방법론이 시작되던 당시부터 그랬습니다. '과학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식의 주장을 곧잘 하는 사람들이, '이것도 과학으로 인정해줘'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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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야, 이것 참 복잡하다. 노정태 선생님이 라캉에게 들이댄 비슷한 스타일의 메스를 비슷한 방법으로 심리학에도 들이댈 수 있을 것 같거든. 이것 참.. 이상한 구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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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과학이 무엇이냐는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정의를 위해 무엇들이 있는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과학철학책 한권만 읽어보면 됩니다. 이 댓글에서 이를 논의하는 것은 현재 논점을 벗어나지만, 한가지 말씀드리면, 세상을 밝혀내는 인간의 지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과학적 방법론을 인정하고 신뢰합니다. 그런데, 과학적 방법론으로 얻어진 지식이 더 열려있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과학은 그럴지 몰라도,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과 과학자를 동일 가치로 보는 것은 많은 오류를 낳습니다.

    현재의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검증된 치료술만이 의학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님의 주장에 태클 걸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현재 종속적입니다. 현재의 방법만을 유일한 기준만으로 삼아 다는 것을 배척하는 데에 주로 사용한다면, 예전 천동설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사고와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닫지 말라는 말은, "닫힌 사고"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한 20여년전에 의사선생들께서 심야의 한 TV 토론에 나와 "단호"하게 한의학에서 "침"은 효과가 없고 "우연"이다라 주장한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WHO에서도 그 "침"을 우연으로 보지 않고, 그 효과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과학으로도 완벽한 설명은 아직 불가능 합니다. 그 20년전의 의사선생님들이 다시 그 심야토론에 나온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WHO에 항의할까요?

    그 의사선생같은 이들을 저는 "닫힌 사람"이라 봅니다. 그들이 가진 지식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기에, 오히려 존재를 부정하기까지 하는 것이지요. 철학이나 논리를 아신다면, 정언명제의 부정이 "존재의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실 것입니다. 이런 비논리에 기댄것을 반과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닫힌 과학자들은 자기가 모르기에 연구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가 모르는 분야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류"냐 하는 것이겠지요. 아마 남이 발견한것 잘 외워 다른이에게 설명만 잘해도 밥벌이에 문제가 없어서 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수꽝을 넘어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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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그나저나 핑크 인용은 나쁘지 않은데 지젝 인용은 별로. "징후를 즐겨라-"는 말의 '징후'를 흔히 얘기하는 '병'으로 봐서는 안 되잖아? 뭐 물론 지젝의 그런 어법 자체가 의학이 아닌 관념론의 어법이지만, 그 관념론을 활용하여 그들을 비판하려고 했던 것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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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이상한 모자/ 그러한 비판을 해냄과 동시에 자네는 빠리의 정신분석가가 되는 걸세. 라캉이 되어보아요.

    동물원/ 이번 일을 계기로 과학철학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만, 동물원님이 제기하는 의문에 대해 저는 필요한 대답을 다 했다고 봅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형/ 관념론을 '활용'하는 거지, 그러한 식의 인용도. 정상적인 의학, 즉 진지하게 질병과 투쟁을 벌이는 의학이라면 그 용어를 저렇게 유쾌하게 비유로 들이댈 수도 없을 거 아냐. 혹은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는 '징후'는 사실 '병'이 아니다, 이렇게 인정하는 꼴이 되는데 그럼 대체 그걸 왜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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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아니 그런 식으로 질문한다면 증상의 개념과 이러저러한 맥락에 대해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설명을 하는 수밖에 없잖아. 그런 질문은 옳지 않아. ㅋㅋㅋ

    병은 치료의 대상이고, 증상이나 징후는 분석의 대상이겠지. 분석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분석하면서 주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리고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괴롭다고 말할 때, 그 괴로움이 실은 고장난 증상을 제대로 작동하게 해달라는 요구라서, 증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대면하고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던 것 같아. (읽은지 오래라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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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행위와 분석행위가 명확히 분류되는 것이고, 그것이 다루는 대상이 각각 다르다고 전제할 수 있다면, 미국식 심리학과 정신의학에 대한 정신분석가들의 조소는 근거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겠군. 정신분석을 엄연히 '의료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프로이트의 유지도 그 순간 어기게 되는 거지. 네 말대로 하면 정신에 대한 연구와 치료를, 정신분석은 결코 대체할 수 없고 다만 부분적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라캉의 임상의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 이들이 과연 그런 타협안에 만족할지 나로서는 크게 의문이 아닐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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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논쟁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라깡은 잘 모르지만, 라깡주의자들이 인류학의 방법론과 자세에서 대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조금 납득하기가 어렵네요.

    방법론이 없으면 학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라깡의 사유는 정신분석학적 방법론과, 철학적(그 안에서도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따른 듯 합니다. 지금까지 흐른 논쟁을 따라가다보면, 두 학문을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체계적이고 건전한 지식을 생산해내는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인류학은 '질적방법론'을 통해 지식을 생산합니다. 질적방법론은 꽤나 성공적으로 지식을 생산해내지만, 그것이 라깡의 실패한 기획에 참고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라깡이 살아남을 길은, 그 담론내부의 방법론을 더 성실하게 가다듬고. 그를 통해 타당하며 건전한 지식을 생산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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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질적방법론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는데, 문화기술지(ethnography)의 연구에서 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저는 정신분석의 '사례 연구' 혹은 '임상'을 읽을 때마다 레비-스트로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의 연구 대상은 부족이고 프로이트의 그것은 개인이지만, 또 지금 명확한 언어로 구체화하기는 어렵지만 말입니다.

    라캉의 정신분석이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제가 더 보탤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에 대해 jiva님과 더 토론하는 것도 그다지 실익이 없는 일일 거고요. 하지만 덕분에 '질적방법론'을 알게 되었으니, 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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