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부동산세의 세대별 합산에 대해 부분위헌을 선언한 것 외에도, 헌법재판소는 최근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지상파 방송광고 판매를 전담하도록 한 방송법 제73조 5항과 그 시행령 제59조 3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두 판결 모두, 해당 법률에 위헌 소지가 매우 다분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름의 공익적 차원에 기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사실 상식적으로 조세 부과의 단위가 개인이 아닌 '가구'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코바코나 코바코가 출자한 회사가 아니면 방송광고 판매업을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자본주의적인 상식선을 이미 어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코바코는 출발 자체가 위헌적, 아니 차라리 초헌법적이었다. 1981년 전두환 시절에 만들어진, 신문과 방송을 옥죄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언론사를 통폐합한 후, 한국방송광고공사를 통해 방송사의 돈줄을 정부가 움켜쥐어버렸다. 이게 코바코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작이 그렇다는 거고, 지금은 코바코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여 수많은 지역방송, 종교방송 등의 군소방송업체가 영세한 살림을 근근히 꾸려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코바코는 태생적으로 헌법에 부합하지 않지만, 그것이 현재 '공공의 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미디어 시장 자체가 좁고, 미디어 수용자들의 쏠림 현상이 심한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언론의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시장 경쟁보다 높게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읽어보면, 그러한 정책적인 방향성은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지 않다. 종부세에 대한 판결문에서는 최소한 '비례의 원칙'에 대한 판단이 있었고, 세대별 합산이 왜 만들어진 규정인지는 알지만 그래도 헌법불합치이다, 이런 논증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나는 헌법재판소가, 이 두 건의 판결에 있어서, 해당 법의 입법 취지와 정책적 지향성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가급적 존중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사법소극주의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그 판결로 인해 모종의 지향성이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점에서는 사법적극주의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이것은 여담인데, 특히 대한민국처럼 정치적 균형이 짧은 시간 안에 격렬하게 요동치는 국가의 경우, 사법소극주의와 사법적극주의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렵다. 사법적극주의는 입법부 내지는 행정부와의 관계에서는 "헌법, 법률 자구의 문어적(文語的)인 의미에 얽매이지 않고 선거에 의해 뽑힌 공무원들의 정책 결정을 대체하는 정책 결정을 판결을 통해 감행하는 진보적인 사법부의 태도"로 이해되는 반면, 판결을 통한 적극적인 가치 실현에 방점을 두고 사법적극주의를 "판사들이 선판례에 엄격히 얽매이지 않고 상급 법원의 판사들이 싫어할지도 모르는 진보적이고 새로운 사회 정책을 선호하는 사법부의 철학"으로 이해하는 입장 또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21쪽. 임지봉, 《사법적극주의와 사법권 독립》, (철학과현실사, 2004)]
만약 헌법재판소가 종부세의 세대별 합산을 합헌으로 처리했다면, 그것은 입법부와의 관계에서는 사법소극주의가 되겠지만, 행정부와의 관계에서는 사법적극주의가 된다. 그러므로 가령,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경향신문, 2008년 11월 20일)를 놓고 '사법소극주의적 입장'이라 말하는 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최종적으로 남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헌법재판소가 우리의 정치 지형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역할에 걸맞는 책임을 어떻게 부과할 것인가? 원칙적으로는 헌법재판소가 그저 '재판소'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최종심까지 판결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법감정과, 정치적인 문제를 모두 헌재에 떠넘기는 정치권의 '관습'이 맞물려, 헌재는 현재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헌법 기관이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생각은 이렇다. 헌법재판소 판사 개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평가가 높아질 필요가 있다. 사법부, 특히 헌재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그에 걸맞는 윤리적 평가가 판사에게 돌아가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것이 'XXX판사, 지켜보겠어!'라는 수준에서 멈추어서는 곤란하다.
헌재가 'Watchmen'으로 더더욱 큰 활약을 보이고 있는 지금, 'Who watches the watchmen(누가 감시가를 감시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은 천진난만할 뿐 아니라 위험할 수도 있는 발상이다. 사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과 감시가 더욱 절실하다.
진짜 몇사람이 법을 판단하는게 좀 웃기긴 한 거 같아요. 그렇다고 대안은 없어보이고 관심을 늘리자는 외침 외엔 답이 없는 듯 ㅜㅜ
답글삭제근데 헌법불합치는 다시 판정이 번복될 수 있나요? 위헌이랑 똑같은데 효력정지기한만 다른건가;;
하지만 '다수'가 법을 판정함으로 인해 정의가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에 지나지 않겠죠. 이 모순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는 플라톤 이래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헌법불합치에 대해서는 이 백과사전의 정의를 참조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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