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31

독서 목록(2016)

  1. 20160103 - 후지타 야스노리 감수, 우메야시키 미타 그림, 무라카미 유이치 스토리 원안, 유주현 옮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만화로 완전 정복』(경기도 파주: 이콘, 2015)
  2. 20160103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손영미 옮김, 『여권의 옹호』(경기도 고양: 연암서가, 2014)
  3. 20160108 - 김영란,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4. 20160112 - 조너선 패터봄, 이상국 옮김, 『트리니티』(경기도 파주: 서해문집, 2013)
  5. 20160117 - 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사피엔스』(경기도 파주: 김영사, 2015)
  6. 20160119 - 조형근, 김종배, 『섬을 탈출하는 방법』(서울: 반비, 2015)
  7. 20160121 - 문흥호, 주리시, 『한국-타이완 관계사(1949~2012)』(서울: 폴리테이아, 2015)
  8. 20160123 - 페드로 리에라 글, 나초 카사노바 그림, 엄지영 옮김, 『인티사르의 자동차 - 현대 예멘 여성의 초상화』(경기도 파주: 미메시스, 2015)
  9. 20160127 - J. M. 바스콘셀로스, 박동원 옮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경기도 파주: 동녘, 2003), 초판 1982년.
  10. 20160128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최필원 옮김, 『액스』(서울: 그책, 2011)
  11. 20160131 - 윤일구, 『함무라비 법전: 고대법의 기원』(경기도 파주: 한국학술정보, 2015)
  12. 20160201 -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김명남 옮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13. 20160203 - 로브 레이블로, 박성실 옮김, 『동물 쇼의 웃음 쇼 동물의 눈물』(서울: 책공장더불어, 2013)
  14. 20160204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김수정 옮김, 『죽어가는 자의 고독』(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2). 개정판.
  15. 20160206 - 앨버트 허쉬먼, 김승현 옮김, 『열정과 이해관계: 고전적 자본주의 옹호론』(서울: 나남, 1994)
  16. 20160210 - 유광수, 『가족 기담: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2)
  17. 20160212 - 이시윤, 『민사소송법입문』(서울: 박영사, 2016)
  18. 20160215 - 에릭 브린올프슨, 앤드루 맥아피, 이한음 옮김, 『제2의 기계 시대』(서울: 청림출판, 2016)
  19. 20160217 - 월터 아이작슨, 이덕환 옮김,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서울: 까치, 2007)
  20. 20160217 - 로버트 F. 케네디, 박수민 옮김, 『13일: 쿠바 미사일 위기 회고록』(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12)
  21. 20160223 - 이종훈, 『사법시험 국제법』(서울: fides, 2015)
  22. 20160223 - 홍중기, 『국제법을 알아야 논쟁할 수 있는 것들』(경기도 파주: 한울, 2013)
  23. 20160302 - 장 폴 사르트르, 박정태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서울: 이학사, 2007)
  24. 20160303 - 하퍼 리, 김욱동 옮김, 『앵무새 죽이기』(서울: 문예출판사, 2002)
  25. 20160313 - 조윤민, 『두 얼굴의 조선사』(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6)
  26. 20160316 - 게르트 기거렌처, 안의정 옮김, 『생각이 직관에 묻다』(서울: 추수밭, 2008)
  27. 20160322 - 마이클 돕스, 김시현 옮김, 『하우스 오브 카드』(경기도 파주: 푸른숲, 2015)
  28. 20160328 - 브뤼노 라튀르,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경기도 일산: 사월의책, 2012)
  29. 20160328 - 계승범,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경기도 일산: 역사의아침, 2011)
  30. 20160329 - 스르자 포포비치, 박찬원 옮김,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6)
  31. 20160403 - 아오야마 모토오, 김정환 옮김, 임옥택 감수, 『자동차 구조교과서』(서울: 보누스, 2015)
  32. 20160407 - 네이트 실버, 이경식 옮김, 『신호와 소음』(서울: 더퀘스트, 2014)
  33. 20160407 - 에리히 프롬, 황문수 옮김, 『사랑의 기술』(서울: 문예출판사, 2006), 제4판
  34. 20160408 - 스탕달, 이규식 옮김, 『적과 흑 1』(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09)
  35. 20160409 - 스탕달, 이규식 옮김, 『적과 흑 2』(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09)
  36. 20160416 - 토마 피케티·이매뉴얼 사에즈, 박나리 옮김, 이정우 감수, 『세금혁명』(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6)
  37. 20160422 - 기무라 히데아키, 정문주 옮김, 『관저의 100시간』(서울: 후마니타스, 2015)
  38. 20160424 - 조엘 바칸, 이창신 옮김, 『기업에 포위된 아이들』(서울: 알에이치케이코리아, 2013)
  39. 20160428 - 라종일, 『장성택의 길』(서울: 알마, 2016) 
  40. 20160501 - 게르트 기거렌처, 강수희 옮김, 『지금 생각이 답이다』(경기도 파주: 추수밭, 2014)
  41. 20160502 - 전인권, 『남자의 탄생』(서울: 휴머니스트, 2003)
  42. 20160508 - 엘프리데 옐리네크, 정민영 옮김, 『욕망』(서울: 문학사상사, 2006)
  43. 20160509 - 리베카 솔닛, 김명남 옮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44. 20160514 - 피터 템플, 나선숙 옮김, 『브로큰 쇼어』(서울: 영림카디널, 2008)
  45. 20160526 - 손정목, 『손정목이 쓴 한국 근대사 100년』(경기도 파주: 한울, 2015)
  46. 20160530 - 바버라 에런라이크, 최희봉 옮김, 『노동의 배신』(서울: 부키, 2012)
  47. 20160603 - 권혁범,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서울: 또 하나의 문화, 2006)
  48. 20160605 - 에멀린 팽크허스트, 김진아·권승혁 옮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서울: 현실문화, 2016)
  49. 20160605 - 하인리히 뵐, 김연수 옮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서울: 민음사, 2008)
  50. 20160605 - 윤보라·임옥희·정희진·시우·루인·나라,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서울: 현실문화, 2015)
  51. 20160606 - 재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옮김, 『총, 균, 쇠』(서울: 문학사상사, 1998)
  52. 20160610 -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서울: 이매진, 2008)
  53. 20160613 - 레이첼 카슨,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침묵의 봄』(서울: 에코리브르, 2011)
  54. 20160617 - 귀스타브 플로베르, 김화영 옮김, 『마담 보바리』(서울: 민음사, 2000)
  55. 20160619 - 막스 베버, 김덕영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서울: 길, 2010)
  56. 20160621 -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이상임 옮김, 『이기적 유전자』(서울: 을유문화사, 2010), 전면개정판
  57. 20160625 - 토마 마티외, 맹슬기 옮김, 『악어 프로젝트』(서울: 푸른지식, 2016)
  58. 20160626 - 피터 싱어, 김성한 옮김, 『동물 해방』(경기도 고양: 연암서가, 2012)
  59. 20160702 - 정민구·김상태 사진, 노정태·안인용·이진·정현·함영준·현시원 글, 『Cherry Blossom』(서울: 시청각·G&Press, 2016)
  60. 20160703 - Hayao Miyazaki, trans. Eugene H. Saburi, Laputa The Castle in the Sky(Bellevue, WA: Tokuma Shoten Publishing, 1992)
  61. 20160704 - 이범준,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서울: 궁리, 2009)
  62. 20160709 - 모신 하미드, 안종설 옮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경기도 파주: 문학수첩, 2016)
  63. 20160709 - 박성규·오승호, 『뻐근하게 아픈 몸, 참지 말고 셀프 마사지』(서울: 북돋움라이프 X 롤링다이스, 2016)
  64. 20160711 - 정유정, 『종의 기원』(서울: 은행나무, 2016)
  65. 20160711 - 리아드 사투프, 박언주 옮김, 『미래의 아랍인 2』(서울: 휴머니스트, 2016)
  66. 20160714 - 작자 미상, 정창권 옮김, 『박씨전』(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67. 20160801 - 리처드 도킨스, 이용철 옮김, 『눈먼 시계공』(서울: 사이언스북스, 2004)
  68. 20160801 - 강명관,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서울: 휴머니스트, 2016)
  69. 20160807 -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서울: 봄알람, 2016). 2판.
  70. 20160807 - 박정희,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서울: 걷는책, 2011)
  71. 20160809 - 앨버트 O. 허시먼, 강명구 옮김,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서울: 나무연필, 2016)
  72. 20160810 - 헨리크 입센, 안미란 옮김, 『인형의 집』(서울: 민음사, 2010)
  73. 20160814 - 오미일,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서울: 푸른역사, 2015)
  74. 20160818 - 박경신, 『진실유포죄』(서울: 다산초당, 2012)
  75. 20160822 - 존 스튜어트 밀, 최명관 옮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서울: 도서출판 창, 2010). 개정판.
  76. 20160823 - 우에노 지즈코, 이선이 옮김,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서울: 현실문화, 2014)
  77. 20160829 - 피에르 부르디외, 김용숙 옮김, 『남성 지배』(서울: 동문선, 2000)
  78. 20160903 - 다카바타케 마사유키, 김보화 옮김, 『궁극의 문구』(경기도 파주: 푸른숲, 2016)
  79. 20160907 -  노나카 이쿠지로 , 스기노오 요시오, 데라모토 요시야, 가마타 신이치, 도베 료이치, 무라이 도모히데, 박철현 옮김, 이승빈 감수,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인천: 주영사, 2009)
  80. 20160907 - 문유석, 『판사유감』(경기도 파주: 21세기북스, 2014)
  81. 20160909 - 로버트 해리스, 조영학 옮김, 『어느 물리학자의 비행』(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14)
  82. 20160912 - 스티븐 킹, 이은선 옮김, 『미스터 메르세데스』(서울: 황금가지, 2015)
  83. 20160913 - 토니 포터, 김영진 옮김, 『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서울: 한빛비즈, 2016)
  84. 20160913 - 오찬호,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서울: 동양북스, 2016)
  85. 20160917 -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송섬별 옮김, 『죽음의 스펙터클』(서울: 반비, 2016)
  86. 20160920 - 막스 베버,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소명으로서의 정치』(서울: 폴리테이아, 2011)
  87. 20160922 - 윤원화,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6). 도미노 총서 2
  88. 20160923 - 박세진, 『패션 vs. 패션』(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6). 도미노 총서 3
  89. 20160923 - 노정태, 『탄탈로스의 신화』(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6). 도미노 총서 1
  90. 20160923 - 대릴 커닝엄, 권예리 옮김, 함병주 해설, 『정신병동 이야기(증보판)』(서울: 이숲, 2014)
  91. 20160925 - 플로르 바쉐르, 권명희 옮김, 『조직된 한패』(경기도 파주: 밝은세상, 2016)
  92. 20160926 - 에르네스트 만델, 이동연 옮김, 『즐거운 살인』(서울: 이후, 2001)
  93. 20160927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옮김, 『문명화과정 I』(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6)
  94. 20160927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옮김, 『문명화과정 II』(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9)
  95. 20160930 - 후루이치 노리토시, 한연 옮김, 『아이는 국가가 키워라』(서울: 민음사, 2016)
  96. 20161001 - 윤세상, 『땅 사서 지을까 집 사서 고칠까』(서울: 한겨레출판, 2016)
  97. 20161002 - 최낙언, 『식품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법』(서울: 예문당, 2016)
  98. 20161005 - 앤드류 포터, 노시내 옮김,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서울: 마티, 2016)
  99. 20161009 - 이민경,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서울: 봄알람, 2016)
  100. 20161010 - 찬호께이, 강초아 옮김, 『13·67』(서울: 한스미디어, 2015)
  101. 20161010 - 린 헌트, 전진성 옮김, 『인권의 발명』(경기도 파주: 돌베게, 2009)
  102. 20161017 - 고바야시 히데오, 임성모 옮김, 『만철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서울: 산처럼, 2004)
  103. 20161022 - 윌리엄 그릴, 박중서 옮김, 『커럼포의 왕 로보』(서울: 찰리북, 2016)
  104. 20161026 - 김시덕, 『일본의 대외 전쟁』(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16)
  105. 20161028 - 댄 포인터, 여인혜 옮김, 『나이든 고양이와 살아가기』(경기도 파주: 포레, 2013)
  106. 20161102 - 김시덕,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서울: 메디치, 2015)
  107. 20161104 - 임상혁, 『나는 노비로소이다』(서울: 너머북스, 2010)
  108. 20161108 - 전인권, 정선태, 이승원, 『1898, 문명의 전환』(서울: 이학사, 2011)
  109. 20161116 - 박경신, 『진실유포죄』(서울: 다산북스, 2012)
  110. 20161120 - 아메노모리 호슈, 김시덕 옮김,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경기도 파주: 태학사, 2012)
  111. 20161123 - 조엘 바칸, 윤태경 옮김, 『기업의 경제학』(서울: 황금사자, 2010)
  112. 20161129 - 조성주,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서울: 후마니타스, 2015)
  113. 20161130 - 마크 라이너스, 이한중 옮김, 『6도의 멸종』(서울: 세종서적, 2014), 개정판
  114. 20161204 - 베네딕트 캐리, 송정화 옮김, 『공부의 비밀』(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6)
  115. 20161206 - 에릭 브린올프슨, 앤드루 맥아피, 이한음 옮김, 『제2의 기계 시대』(서울: 청림출판, 2016)
  116. 20161214 - 스티븐 핑커, 김명남 옮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서울: 사이언스북스, 2014)
  117. 20161228 - 김한민, 『비수기의 전문가들』(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6) 
  118. 20161231 - 홍춘욱, 『환율의 미래』(서울: 에이지21, 2016)
  119. 20161231 - John Patrick Shanley, Doubt, A Parable(New York: Dramatists Play Service, Inc., 2007)

2016년 1월 1일부터 2016년 12월 31일 사이, 표1부터 표4까지 통독한 책들의 모음. 중간중간 뒤적거린 책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총 119권. 2016년은 매우 다사다난했고, 큰 성취를 이루기도 하였으나, 때로 힘겨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을 해내야 했는데, 그 중에는 아직 끝내지 못한 것도 있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롭게 결의를 다져본다.

2016-12-27

[북리뷰] 그래도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커, 사이언스북스, 6만원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약 470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후, 미국은 큰 병력 손실이 예상되는 일본 본토로의 상륙 작전 대신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전의를 꺾는 쪽을 택한다. 그 후의 역사도, 강대국끼리의 무력 충돌만 없다 뿐이지, 피로 점철되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미국의 대리전이기도 했던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간중간 벌어진 온갖 끔찍한 테러까지. 우리가 아는 20세기 이후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과 기술, 사회적 관습과 제도가 인류를 가장 효율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며 살해하는 대량살상기계로 둔갑해 인간을 옥죄어온 시대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스티븐 핑커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바로 그와 같은 비관론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이미 핑커는 『빈 서판』을 통해 '인간의 본성은 빈 서판과 같으며 올바른 양육, 즉 교육을 통해 모든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진보 진영의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들었던 전례가 있다. 그런 그가 인류 역사 전체를 무대로 삼아 실증주의적 논박의 포문을 열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최악이다'라는 선언적 전제가 왜 문제인가?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나태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방부제일 뿐, 당장 우리들 중 그 누구도 100년 전은 고사하고 1970년대로 돌아가 살라고 해도 거부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문제는 이러한 비관주의적 관점으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이 너무도 크다는 것이다. 명백히 확인되는 과학적 사실을 거부하고, 인류 역사 진보의 원동력이자 결과물인 근대성을 부정하며, 이성에 의한 인간의 폭력적 욕구 통제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개인주의, 세계주의(cosmopolitanism), 이성(reason), 과학의 힘이 가족, 부족, 전통, 종교를 잠식하는 현상으로 규정되는 근대성(modernity)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이런 변화의 유산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곧 오늘날의 세상을 범죄, 테러, 집단 살해, 전쟁의 악몽으로 보느냐 아니면 역사적 기준으로 보아 유례없이 평화적인 공존과 축복의 시기로 보느냐에 따라, 참으로 많은 문제가 결정된다."(14쪽)

중앙집권적 궁정사회의 출현이 개인에게 에티켓을 강요하면서 그들에게 현대적 도덕을 내재화하고 중세인들을 순치시켰다고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을 통해 주장했다 핑커는 그 거인의 어깨 위에서 '문명화 과정'이 실제로 남의 총이나 칼 혹은 도끼나 망치 등에 맞아 죽은 사람의 숫자를 줄이는 결과를 불러왔음을 숫자와 그래프로 그려낸다. "유럽은 도시화, 세계주의, 상업화, 산업화, 세속화를 겪을수록 점점 더 안전해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현상을 유효하게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 즉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견해를 떠올리게 된다."(137쪽)

특히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를 다른 대형 사건들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대화'하는 등의 작업은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암울하면서 우스꽝스러운 대목을 통과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지금, 아주 묵직하고 두툼한 위안이 된다.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 우리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특히 이성의 힘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복받쳐오르기 때문이다.

2016.12.27ㅣ주간경향 1207호

2016-12-18

20161211 - 20161217: 알레포 함락,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출, 두테르테의 살인 자백

* 현지시각 12월 15일, 시리아의 거점 도시 알레포에서 반군이 완전히 철수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간접적 지원을 받는 시리아 반군은, 러시아의 직접적 지원을 받는 아사드의 정부군에게 알레포를 내주게 된 것이다. 이로써 2011년부터 진행된 시리아 내전은 다시 한 차례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시리아는 197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정권을 잡은 후, 그 아들인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력을 이어받은 독재국가였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인해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대대적인 유혈 진압이 뒤를 이었으며, 시위 그 자체는 진압되었지만 시리아는 내전의 구렁텅이로 빨려들어갔다. 러시아의 비호를 받는 아사드는 물러나지 않았고, 독가스 살포 등으로 국제 사회의 비난을 무릅쓰면서도, 끝내 버텨냈고 알레포를 수복했다.

이것은 이라크 전쟁 이후 해외에 대규모 육상 병력을 파병할 원동력을 상실한 미국, 영국, 그 외 서방세계의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시리아 내전이 악화되면서 발생한 대규모의 난민이 유럽의 극우주의를 부추겼고 그러한 국제적 기류 속에서 미국 대선이 치러졌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리버럴'의 정치적 패배였다. 오바마 행정부가 빚어낸 최악의 실패다.


* 12월 16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정우택 의원이 선출됐다. 충북 청주상당을 지역구로 하는 4선 의원인 정우택은, 김종필 전 총리에게 발탁되어 자유민주연합에서 정치 이력을 시작한 충청도 정치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2012년 이후 친박으로 분류되는 여당 의원이라는 사실이다.

새누리당 소속 의원 119명이 참석한 의원총회에서 친박계 후보인 정우택은 62표, 비박계를 대표해 나온 나경원은 55표를 얻었고 2표는 기권이었다. 과반을 넘긴 탓에 재투표 없이 곧장 원내대표가 결정되었다. 새로운 친박 원내지도부가 구성되자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그 외의 여당 지도부와 함께 곧장 사퇴 의사를 밝힘으로써, 새로 선출된 원내지도부에 힘을 실어주는 행보를 보였다.

탄핵안 가결 이후 민주당의 지지율은 국민의 정부 이후 최초로 40%대에 진입하는 고공행진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여당인 새누리당은 친박계가 굉장히 단단한 결집력을 과시하면서 비박계의 탈당이 예측된다. 3당 합당 이후 어색한 동거를 이어가던 TK와 PK의 분화가 본격화될 조짐이다. '우리가 남이가'의 시대가 비로소 끝난 것인가? 참고로 정우택을 찍은 62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에 반대한 56표, 무효표를 낸 7표를 더한 숫자인 63표와 거의 비슷하다.


* 12월 12일,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대통령궁에서 사업가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다바오시에서 마약 용의자들을 개인적으로 살해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12월 14일 현지 언론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에 대해 조시 어니스트 미 백악관 대변인은 '매우 우려된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 외에 달리 어떤 반응을 보일 수가 없는 것이, 이미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전통의 우방인 필리핀에 북한 전문가인 성김 전 대북특별대표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한편 비탈리아노 아기레 필리핀 법무장관은 두테르테의 발언을 "자신의 메시지를 이해시키"기 위한 과장법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화법과, 그에 대한 미국 보수 진영의 합리화를 당연히 연상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테르테는 이미 "시장 재직 초기에 중국인 소녀를 유괴, 성폭행한 남성 3명을 직접 총살한 적이 있다고 지난 대선 때 인정"한 바 있기에, 이러한 살인 고백을 그저 '블러핑'으로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통령이 사람을 죽였다고 떠벌여도 탄핵당하지 않는 나라가, 비행기로 4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별별시선]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한 장면을 펼쳐보자. 백정인 꺽정이는 양반인 덕순이와 죽이 좀 맞는 편이었다. 하지만 서로 존대와 하대를 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일 임꺽정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존대와 하대에 대해 논쟁이 오가던 중, 머리 깎고 병해대사가 된 갖바치 선생이 꺽정이의 성정을 좀 다스려 보려 한다. “우리말에 층하가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겠지. 그렇지만 어른 아이는 고사하고 양반이니 상사람이니 차별이 있는 바에야 말이 자연 그렇게 될 것 아닌가.”

계급 차별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꺽정이의 반론에 대해 병해대사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응수한다. “벌써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에 차별이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임꺽정이 아니다. “못쓸 차별을 없애려면 영을 내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설령 영을 내린다 한들 그 차별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겠는가? 그러자 결국 임꺽정은 본인의 명성에 걸맞은 대답을 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면 될 것 아니오.” 병해대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대화는 마무리된다.

이 대화에서 임꺽정과 병해대사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 사이에 차별이 없다. 그게 바로 민주공화국의 본질이다.

우리 대한국민은 모두 같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 차별적 특권 계급의 존재는 용인되지 않고, 모든 이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누리며 동시에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할 의무를 진다. 그리고 그 법은 국민의 대표 기관인 입법부에서 만들고, 행정부에서 실행에 옮기며, 사법부를 통해 갈등을 법적으로 해결하도록 되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은 결국 동일하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결합된 법치주의의 핵심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박근혜 게이트는 왜 문제인가? ‘민주적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는 믿음을 뒤흔들었다는 점이 가장 심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가정을 깨뜨렸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 사건이 아니다. ‘선출된 권력’ 박근혜의 뒤에 ‘선출될 생각도 없었던 권력’인 최순실 일당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설령 최순실이 ‘착한 비선 실세’였다고 해도 사안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국민은 박근혜를 뽑았지 최순실을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다. 그러므로 최순실이 기밀로 취급되는 대통령 연설을 주무르고, 온갖 인사에 개입한 것은, 그 자체가 민주공화국의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는 법의 지배를 ‘당하는’,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복종’하는 임꺽정 같은 신분사회의 피지배계층이 아니다. 우리는 울화가 터진 꺽정이처럼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는 식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헌법, 법률, 조례, 규칙 등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움직이고, 필요하다면 유권자를 대의하는 기관인 의회에서 법규를 바꾸거나 새로 만든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국민의 뜻이 아니라 ‘비선 실세’의 뜻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으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그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은 그러므로 혁명이 아니다.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적 법치주의의 근본 원리가 온전히 작동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민란’이나 ‘혁명’보다 급진적인 사건이다. 드디어 우리는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입력 : 2016.12.18 20:37:01 수정 : 2016.12.18 20:43:39

2016-12-13

[북리뷰] 박근혜를 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
조성주 지음·후마니타스·9000원

광장에는 논쟁이 피어난다. 11월 26일 제5차 촛불문화제 무대에 오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왕년의 '악동' 힙합 그룹 DJ DOC를 둘러싼 논란이 그것이다. "수취인불명"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 박근혜를 '미스박'이라 칭할 뿐 아니라, '문고리 삼인방'에 대해서는 국민에겐 사과없이 fuck그네만 / 챙겨 양심팔아 돈을 땡겨"라는 식의 원색적인 욕설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미스박'이라는 표현이 여성비하적이라는 것을 굳이 설명해야만 하는가? 놀랍게도 적잖은 사람들, 특히 남성들은 목청높여 '상대가 대통령이니까 괜찮다'느니, '원래 '미스'라는 말은 존칭의 의미로 쓰인다'느니,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을 늘어놓았다. 조성주의 책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을 펼쳐들 때다.

조성주는 칼 세이건을 읽고 천문학자의 꿈을 꿨던, 하지만 막상 천문학과에 진학해보니 자신의 관심사는 먼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있음을 깨달은 청년 정치인이다. 그는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3위를 기록하며 많은 이들에게 적잖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 그가 2015년 정치발전소에서 강연한 내용을 묶어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렇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보다 '앞으로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그 시기에 필자의 고민을 많이 정리해준 책이 바로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었다."(9쪽)

조성주의 강의에 귀를 기울여보자. "알린스키가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폭력 사태였다."(38쪽) 노동조합, 이민자 중하층 계층, 지역사회 운동가, 흑인 민권운동가, 반전 운동가 등 한데 묶기 어려운 진보 세력을 규합해낸 로버트 케네디가, 그의 형 존 F. 케네디처럼 암살당하고 난 후 치러진 전당대회였다. 충격과 좌절에 빠진 급진주의자들은 폭력 혁명 노선에 경도되거나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때문에 알린스키는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통해, 실망하고 좌절한 젊은이들에게 정치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끈질기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자고 설득하고 용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42쪽)

알린스키의 입장은 이상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철저한 현실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마치 저 먼 곳의 수평선같은 이상으로서의 진보를 제시하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근접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룰에 맞춰 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알린스키의 투쟁론은 '당위로서의 정치'가 아닌 '윤리로서의 정치'를 제시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도 맞닿아 있다는 것이 조성주의 설명이다.

알린스키의, 혹은 알린스키를 사숙한 조성주의 현실주의는 그러나 '윤리적 기준을 내던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적 기준마저도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 인식하고 궁극적으로는 지켜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조성주는 한탄한다. "알린스키가 50여 년 전에 지적한 미국의 모습은 어쩐지 2015년 한국 진보 진영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닭그네' '쥐새끼' '견찰' '색검' 따위의 단어는 풍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여성에 대한 비하를 서슴치 않는 경우도 많다."(67쪽)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증오의 표출이 우리 편이 승리할 가능성을 높이거나 단결을 강화해 주는 것도 아니"(67쪽)라는 것을 말이다.

'쥐박이'라고 이명박을 욕했고,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이제 박근혜를 욕하지 않으면서 이겨내기 위해, 알린스키의 실용주의로 맞서야 한다.

2016.12.13ㅣ주간경향 1205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12061009171&code=116

2016-12-12

페미니즘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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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공부, 이럴 거면 하지 마라


요즘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남자들이 늘어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아주 원론적으로 보자면 누가 됐건 자신이 모르던 것을 배우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남자'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보다 좀 더 복잡한 맥락 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남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책을 집어든 사람, 특히 남자 독자라면, 아마도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책에 "페미니즘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제목을 단 글이 한 꼭지 실려있다는 것은 일종의 독자 기만, 사기, 배신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본인이 남자가 아니지만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던, 혹은 내용을 검토해본 후 자신이 아는 다른 남자에게 권해주고자 하는 여자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몇 가지 조건이 먼저 갖춰지지 않는 한,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 글은 그 몇 가지 조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늘과 쑥, 그리고 페미니즘


단군 신화를 떠올려보자. 환웅은 일단 호랑이와 곰에게 마늘과 쑥을 100일간 먹인 후, 그 중 그 고통의 시간을 참고 견뎌낸 곰이 웅녀로 변신하자 결혼을 했다. '있는 그대로의 호랑이', '꾸밈과 가식 없는 곰'은 포용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해도 되는 사람인가? 남자인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만큼 최소한의 성숙함과 자의식을 갖추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된다면, 이제 마늘과 쑥을 먹어보자.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하는 여성들이 무언가에 대해 설명할 때,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은 후 자연스러운 태도로 다음 문장을 발화하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꼭 "아, 그렇구나"가 아니어도 된다. 상대가 손윗사람이면 적당한 존댓말 표현으로 바꾸고, 손아랫사람이면 정중한 느낌을 잃지 않는 평어체로 바꿔서 말해보자. 핵심은 상대방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동의하는 것이다(단, 학교 선생님이나 어머니, 할머니처럼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기만 해도 상대방의 말을 고분고분 듣게 되는 상대는 논외로 한다). 아니, 네 말이 맞긴 하지만, 근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말야,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같은 소리를 절대 하지 않고 '여자의 말'에 동의하는 것. 이것이 마늘이다. 100일간 먹어보도록 하자.

장난하는 게 아니다. 많은 남자들이 이 관문을 넘지 못한다. 상대가 여성임을 본인이 알고 있을 경우, 그 상대방의 지적 수준이나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 등과 무관하게, 남자는 자기가 설명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그것을 전문 용어로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고 부른다. 맨스플레인을 끊고 여자인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 그것이 페미니즘을 공부할 자격을 얻기 위한 첫 단계인 것이다.


100일간 맨스플레인 끊어보기


여자들의 말을 끊지 말라고? 그게 그렇게 대단한 문제란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페미니즘 공부의 첫 단추일 뿐 아니라, 한 사람의 '한국 남자'가 보편적 차원에서의 '사람'으로 진화하기 위한 첫 걸음이기도 하다. 여자들의 말을 끊는 남자,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얕잡아보면서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맨스플레인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는 최소한 빨간색 초록색 신호등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맨스플레인이란 남자를 뜻하는 man과 설명한다는 뜻의 explain을 합성한 것으로, 『옥스포드 사전』의 온라인판에 정식으로 수록되어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리베카 솔닛의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표제작인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영감을 받아 태어난 그 단어는, 일상화된 여성혐오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다. 솔닛의 책을 펼쳐보자.

그는 자신이 파티에서 겪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라는 19세기의 사진가가 있다. 달려가는 말의 모습을 연속 촬영한 작업으로 유명한 그는, 사진의 발전 뿐 아니라 영화의 탄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리베카 솔닛은 바로 그 마이브리지에 대한 책을 한 권 썼고, 《뉴욕 타임스》의 서평란에 자신의 책이 소개되어 흐뭇해하던 참에, 친구의 손에 이끌려 그다지 내키지 않는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솔닛은 한 부유하고 나이 많은 남자와 대화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쓴 예닐곱권의 책들이 다룬 주제는 상당히 다채로웠지만, 나는 2003년 그해 여름에 나온 최신작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림자의 강: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기술의 서부시대』(River of Shadows: Eadweard Muybridge and the Technological Wild West)라는 책으로, 시공간의 소멸과 일상의 산업화를 다룬 내용이었다.
내가 마이브리지를 언급하자마자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올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책이 나왔다는 거 압니까?"[1]

그 남자는 솔닛에게 무슨 책을 썼는지 "친구의 일곱살 난 아이에게 플루트를 얼마나 배웠는지 이야기해보라고 구슬리는 사람처럼"[2] 물어보았다. 그런데 자기가 아는 이름인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나오자 곧장 솔닛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당연히 자기가 상대보다 더 잘 안다는 투로, 올해 나온 아주 중요한 책의 존재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문제는 그 책이 바로 솔닛의 책이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솔닛에게 '당신이 쓴 책에 대해 말해보라'고 했으니 말이다. 솔닛이 이야기하는 주제는 자신이 책을 쓴 것들이다. 게다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에 대한 책이 그렇게 자주 출간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올해 나온 아주 중요한 책은 바로 내 앞의 이 여자가 쓴 책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러나 그 남자는 이렇게 상식적인 사고를 전혀 하지 못하고, 속담을 빌어 표현하자면 뻔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고 돼지 앞에서 코를 뒤집고 있었다. 보다 못한 솔닛의 친구가 끼어들어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이 친구입니다'라고 몇 차례 가르쳐 주었지만 그 남자의 뇌는 그 정보의 수용을 단호하게 거부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구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알고 보니 그가 직접 읽은 것은 아니고 몇달 전에 《뉴욕 타임스 북리뷰》에서 서평만 읽었을 뿐인 그 아주 중요한 책의 저자가 나란 사실은 깔끔한 범주들로 분류되는 그의 세상을 몹시 교란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아주 잠깐. 그러고는 이내 다시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여자인 우리는 조신하게도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곳까지 벗어난 뒤에야 웃음을 터뜨렸고, 한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3]

자신의 눈 앞에 바로 그 중요한 책, 본인은 《뉴욕 타임스 북리뷰》에서 서평만 읽었을 뿐인 그 책의 저자가 서 있었고, 그 사실을 알려주기까지 했음에도 그 남자는 끝내 리베카 솔닛을 가르치려 들다가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더 끔찍한 것은 본인이 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소개한 후 솔닛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4]

남자는 무슨 말도 못 하나?


남성 독자의 불만이 들려오는 것 같다. 이 사소한 에피소드와 그로부터 영감을 얻은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냥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이건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전문가가 전문가 앞에서 지식 자랑을 하다가 된통 당하는 그런 이야기일 뿐 성별과는 무관한 일 아닌가?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소개된 후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했다. 이것은 성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 대 무식, 혹은 잘 모르면서 용감한 사람과 잘 알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사람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맨스플레인이란 불필요한 성별 갈등을 부추기는 잘못된 개념일 뿐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남자들은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이 한국에 전래된 후, '우먼스플레인'도 있다는 둥,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남성과 여성 사이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둥, 온갖 볼멘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려 하는 남자들. 여기에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다. 왜냐하면 맨스플레인이란 '남자들은 여자들이 하는 말을 동등한 인간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향해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을 제시할 때, 남자들이 그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려 든다면, 그들은 그러한 반응을 통해 맨스플레인이라는 현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셈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아니 차라리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그런 실수를 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오지 않았다'는 여자들의 항변을 부정하고 드는데, 더 이상 여자들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내가 방금 설명한 내용을 리베카 솔닛의 표현으로 다시 한 번 들어보자.

어떤 남자들은 남자들이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것은 사실 젠더화된 현상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대개 여자들은 지적했다. 여자들이 제 입으로 직접 겪는다고 말한 경험을 기각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우긴다는 점에서, 그 남자들이야말로 내가 그들이 종종 그런다고 말한 바로 그 방식으로 여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셈이라고. (확실히 밝혀두는데, 여자들도 이따금 남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든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젠더 간 엄청난 힘의 격차가 악랄한 형태로 표출된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거니와, 젠더의 사회적 작동방식에 드러나는 거시적 패턴을 반영한 현상도 아니다.)[5]

그러므로 '남자들은 그저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가르치려 든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이 책뿐 아니라 그 어떤 페미니즘 서적도 읽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배움은 불가능하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등 모든 인류의 성현들이 한번씩은 비슷하게라도 이야기한 진리 아닌가. 그런데 적잖은, 어쩌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들이 여자들의 말을 단지 상대방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낮잡아 본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이 과연 '여자들의, 여자들을 위한, 여자들의 사상'인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을까?


"남자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부부싸움 같은데"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 기특한 결심을 한 남자는 반드시 '경청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리고 그 훈련은, 남자로 태어나고 자란 모든 사람이, 평생토록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100일간 먹어야 하는 마늘의 주 성분이다. 여자들의 말을 자르지 않고, 내가 상대보다 잘 알 것이라는 식으로 지레 넘겨짚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것 말이다.

여자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말은 본인의 성별 때문에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여자들은 참고, 포기하고, 스스로 분노를 삭히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여성 억압의 역사이며, 그것은 여성의 발언권에 대한 억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자.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실로 '인간적인 삶'의 거의 모든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우리는 그 집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고 지식을 주고받으며 감정적 교류를 한다.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몸을 부비고 따스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 정도의 교감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충분히 벌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고도로 훈련된 침팬지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인간 외의 그 어떤 동물과도 '할 말이 있으니까 방과 후에 학교 옥상에서 만나자'며 러브레터를 주고받을 수 없다. 언어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고, 특별하게 하며, 그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거의 모든 것이다.

신체 장기 중 하나인 성대를 울려 음성 언어를 전달하는 협소한 행위를 넘어서 '말하다'의 의미를 확장해보면 그 중요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단적인 예로, 투표권이란 무엇인가? 유권자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의사를 말할 수 있는 권리다. 단, 그 말하기의 방식이 객관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바로 그 투표권을 얻기 위해 19세기 말 영국의 서프라제트들은 우체통을 폭파하고 골프장의 잔디를 황산으로 태워 죽였으며 유리창을 깨고 심지어 건물을 폭파하기도 했다. '나는 이 후보를 지지한다'라는, 오늘날 우리에게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그 의사 표현의 권리를 위해 말이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해서 경찰에 신고를 한다고 해보자. 상식적인 경우라면 경찰은 당신의 말을 경청할 것이고, 그 증언에 기반하여 용의자를 특정하고 수사에 착수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남자들'에게는, 이런 '공적인 차원에서의 말하기'가 무시당하고 묵살당하지 않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다.

예컨대 일명 '오원춘 사건'을 떠올려보자. 피해자는 성폭행을 당하는 와중에도 112에 신고하고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정확히 밝혔지만, 전화를 받던 경찰들은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여보세요, 주소 다시 한 번만 알려주세요." "여보세요, 주소가 어떻게 되죠?" 같은 질문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던 경찰들은, 심지어 "아는 사람인데, 남자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부부싸움 같은데"라고 자기들끼리 중얼거리고 있었다. 피해자가 살해당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나는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경찰들은 듣지 않았다. 소쉬르의 구분법을 빌자면, 시니피앙은 전달되었지만 시니피에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인지 똑똑히 알아들었으면서도 그것을 '말'로서 존중하며 인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있고, 살해 위협에 처한 여성의 말은, 사람 말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잘못된 대응이 이루어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 여자가 부부싸움을 하고 있을 뿐인데 경찰에 신고해 '괜한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닌지, 경찰이 의심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했을까?

더 끔찍한 것은 그 경찰들이 전화를 통해 전해오는 폭력적인 상황을 잘 인지하면서도 '부부싸움'을 떠올리고 입 밖에 꺼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고통을 당하는 소리, 가해자가 분노에 차서 내뱉는 소리,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테이프를 찢는 소리 등이 모두 112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극단적 폭력을, 경찰은 '부부싸움'이라고 뭉뚱그리고, 자기들끼리 안심하기 위해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게 '부부싸움'이었다면 어떤 남편이 부인을 살해하거나 심각하게 구타하는 상황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에도 말이다.

세상이 여자들의 말을 쉽사리 묵살하고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건 이런 뜻이다. 강간을 당해서 신고를 해도 '네가 먼저 꼬리친 게 아니냐'고 경찰이 되묻는다. 고장난 보일러를 수리하기 위해 기사를 부르면 '집 주인분 안 계세요?'라고 물어본다. 전화해서 부른 사람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진짜 집 주인'이 아니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택시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상황들은 또 어떠한가. 여자들의 말이 무시당하는 세상은, 여자들의 존재 그 자체가 지워지고 있는 곳, 다시 말해 생명과 안전이 직접적으로 위협당하는 곳이다.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구체적인 여성의 경험들을 엮어 만들어낸 다양한 사고 체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남자가 경험하는 세상과 여자가 살아야 하는 세상은, 때로는 흡사하겠지만 많은 경우 심각하게 다르다. 그러니,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무시해 왔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모든 여자들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어떤 여자들은 112에 허위 신고를 할 것이고, 어떤 여자는 남자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흉계를 꾸밀 수도 있다. 어떤 여자는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어떤 여자는 본의 아니게 횡설수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들의 경우와 달리, 모든 여자들은 자신의 발언이 공적으로, 또 사적으로 평가절하당하고 무시당하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자 하는 남자들은, 일상의 영역에서 여성의 발언을 '일단' 긍정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물론 계약서를 쓴다거나 범죄 피의자를 심문하거나 변호사로서 이혼 소송 당사자와 상담하거나 하는 중이라면,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요구되는 직업적 상황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겠다. 지금 나는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하는 여성들과의 대화 속에서 실천해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숨쉬듯 자연스럽게 누려왔던 '남자인 내가 옳고 여자인 네가 틀렸다'의 기득권을 내려놓아보자.

가령 '아까 택시 타고 오는데 기사 아저씨가 현금으로 계산 안 했다고 욕했어'라고 말하는 주변의 여성에게, '뭐야, 나는 그런 일 겪은 적 없는데, 그건 택시 기사에 대한 너의 편견 아니야?'라는 식으로 되묻거나 쏘아붙이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까지만, 동의하는 표정으로, 대답해보자. 그런 반응을 돌려주는 것만으로도 남자인 당신은 '평범한 남자'와는 사뭇 다른 존재로 취급될 가능성이 크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 그렇구나'라는 담담한 동의의 표현. 상대가 여성일 때, 일단 그렇게 동의하고 공감하는 표현을 하는 남자가 되는 연습. 그렇게 마늘을 먹고 있는 남자라면, 이제 쑥을 먹어볼 차례다.


세상에 뿌려진 폭력만큼


남자인 당신과 어떤 여성이 있다고 해보자. 당신에 대한 그 여성의 인간적 신뢰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지표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만약 그가 당신에게, 본인이 겪었던 성추행이나 성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적어도 지나가는 남자1보다는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종종 SNS를 통해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이 겪었던 성폭력을 이야기하는 경우라거나, 가해자를 고발하기 위해 성폭력 피해를 공개하는 것을 당신이 엿듣는다거나, 그런 경우는 모두 제외한다. 오직 사적인 대화로만 범위를 좁힌다. 남자인 당신은 주변의 여자가 겪었던 성폭력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또 어떤 남자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 주변에는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겪은 사람이 없다'라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남자인 당신에게 본인의 성폭력 경험을 이야기해준 사람이 있는가'라는 것은 굉장히 좋은 지표가 된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단 한 번의 성추행도 당하지 않고, 성차별을 경험해본 적도 없는, 그런 여자는 말하자면 유니콘과도 같다. 어딘가에 있다고도 하지만 그 실체를 목격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리고 내가 아는 여자들이 아는 여자들 중에는, 전혀 없었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는 넓은 의미의 성폭력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여성이 한 명 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임의의 한 남자를 골랐을 때 그 남자 주변의 모든 여자들이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들었던 사례들만 해도 이렇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떤 남자가 '뭐 묻었는데요'라고 해서 자신의 치맛자락을 보니 알 수 없는 흰 액체가 발라져 있었다. 그걸 닦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 남자가 따라들어와서 가슴을 만지며 협박을 했는데 너무 심하게 울었더니 도망갔다. 늦은 밤 주택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큰 길가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자 어떤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쫓아오더니 성폭행을 시도했다. 기타등등…

여자들이, 혹은 여성의 편에 서는 남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여기는 '대다수의 남자'들은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한다. 그건 일부 또라이 범죄자들이 하는 짓 아니냐고, 대체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강간범 취급해서 얻는 게 뭐냐고 화를 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자신들의 겪는 일상적인 젠더 폭력과 사회적 압력에 대해 '어지간한 남자들'에게는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다만 여자들끼리 모였을 때, 그리고 상대가 '명예 남성'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을 때, 이야기가 나오면 그제서야 서로의 고통을 위로할 뿐이다.

남자들은 절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여성들에게는 이것이 '보편적 경험'이다. 여성의 일상에는 폭력과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여성가족부의 연구 용역을 받아 "2013 성폭력 실태조사"를 출간했는데, 그에 따르면 한국의 여성 중 19.5%는 평생 신체적 성폭력, 즉 가벼운 성추행, 심각한 성추행, 강간미수, 강간 중 하나의 범죄를 경험한다. 그렇다면 비신체적 성폭력의 경우는 어떨까? 여성들은 평생 10.1%가 성희롱을, 52.3%가 음란 전화 등에 의한 성폭력을, 36.8%가 성기 노출 목격을, 2.9%가 스토킹을 경험한다.[6]

위에 언급된 수치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미 19.5%, 다시 말해 거의 5명 중 1명이 강간, 강간미수, 성추행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온다. 음란 전화 등 통신 수단을 이용한 성폭력을 겪었다고 응답한 여성은 조사 대상자의 절반이 넘고, 성기를 노출하는 이른바 '바바리맨'을 목격했다는 사람 역시 3분의 1을 넘는다. 이상하게도 이 연구보고서에는 '신체적 혹은 비신체적 성폭력의 평생 경험 빈도'가 나와있지 않다. 이런 저런 수치를 다 합치면 100%를 넘기기 때문에, 즉 신체적이건 비신체적이건 어떤 방식으로건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굳이 그 수치를 제시하지 않은 게 아닐까.

물론 이 조사는 여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3500명의 표본 집단을 선정하여 진행한 것으로, 흔히 말하는 '통계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치가 너무 높아서가 아니라 너무 낮아서 말이다. 가령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이른바 '신안 섬마을 교사 성폭행 사건'이 벌어진 후 자체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0.7%가 교직 생활 중 성희롱·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었다고"[7] 응답했던 것이다.

가장 많은 피해 경험은 술 따르기·마시기 강요(53.6%)였다. 이어 노래방 등 유흥업소에서 춤 강요(40.0%), 언어 성희롱(34.2%), 허벅지나 어깨에 손 올리기 등 신체 접촉(31.9%) 순이었다. 상대적으로 교장·교감 등 관리자들이 많은 권한을 갖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피해 경험이 많았다. 또한 응답자 2.1%는 키스 등 심각한 성추행 피해를 경험했으며, 강간과 강간 미수 등 성폭행 피해 비율도 0.6%(응답자 중 10명)로 나타났다.[8]

2016년 5월 20일, 강남역 공용화장실 살인사건과 10번 출구에서의 추모 열기가 불타오르던 그때, 신촌에서는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가 개최되었다. 필리버스터는 본래 의회에서 의사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무제한 토론을 벌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혹자는 '대체 그게 왜 필리버스터인가? 여자들이 떼로 모여서 하소연 할 뿐이지 않은가?'라고 빈정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와 달랐다.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졌던 그 살인사건을 여성혐오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우발적'인 '묻지마 살인'으로 치부하고자 하는 사회적 의제 날치기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해의 목표물이 될 여자를 일부러 기다렸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했고, 피의자의 입에서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증오심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경찰은 꿋꿋하게 '묻지마 살인'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상당수의 언론은 반성도 고민도 없이 그것을 받아적고 있었다. 여성혐오인가, '묻지마 살인'인가? 후자를 주장하는 남성 기득권 세력들의 사회적 의제 날치기가 진행중이었다. 그에 맞서는 여성들의 발언은 명실상부한 필리버스터였던 것이다.

언론에 보도된 사례들만 다시 인용해보자. "지하철 여자화장실 옆칸에 한 남성이 화장실 바닥으로 몸을 눕혀 보고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친 뒤 한동안 지하철 화장실을 못 갔다."[9] "새벽 1시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술에 취해 이상한 소리를 연거푸 내뱉는 낯선 남자가 두려웠다."[10] "12세 때 학원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상가 공용화장실에 갔다가 술 냄새가 나는 남성 두 명이 흉기로 위협해 그 일(성폭행)을 당했다."[11]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이렇게 범죄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확실한 이야기만 나왔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겪는 수많은 성차별, 성'희롱', 위계에 의한 성적 행위 강요, 감정노동, 일상적 차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수의 남자들이 연단에 올라 '나는 남자인데 여자들의 세상이 이런 줄 몰랐다'고 고백하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여성혐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오직 여자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할 차별과 폭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을 이야기였을지 모르지만, 현장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가 복받쳐올라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여자들의 세상과 남자들의 세상은 너무도 다르다. 그리고 여자들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범인의 성별은 대부분 남성이며, 그 남자들은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에 강간하고 성추행하며 '농담'을 지껄이고 있다.


악어 가죽 속의 남자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을 읽고 있는 남자인 당신이 다짜고짜 어떤 여자에게 '네가 겪은 성폭력의 경험을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까지 당신이 여자들로부터 직접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은, 미안하지만, 그만큼 당신이 여자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남자'로 인정받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니 말이다. 전화번호 알려달라고 하는 것도 짜증나고 때로는 두려운데, 성폭력 경험을 들려달라고 어떤 남자가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폭력의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여성이 먼저 말할 때까지, 남자는 상대에게 성폭력의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남자는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할 자격도 없고 알 권리도 없으니 그냥 여자들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옳다고 하고 입 다물고 살라는 뜻인가? 이런 식으로 발끈하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책을 덮길 바란다. 친구에게 선물로 주거나 중고 서점에 팔아도 좋다. 페미니즘을, 아니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기본적 태도가 갖춰지지 않은 남자가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만을 쌓는다면 그것은 여성들에게 더욱 해로운 결과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편에 서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고, 그래서 페미니즘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남자, 맨스플레인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맨스플레인하는 다른 남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하기 위해 공부하고 싶어하는 남자라면, 다 떠나서 일단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토마 마티외, 맹슬기 옮김, 『악어 프로젝트』(서울: 푸른지식, 2016)

프랑스의 그래픽 아티스트 토마 마티외는 자신의 친구들 중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일상적 성폭력의 사례를 수집했다. 인터뷰를 통해 모은 사례들을 만화로 그려내면서, 그는 남자들을 초록색의 악어로 형상화하고, 여성들에게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남겨주었다. 요컨대 남자는 모두 잠재적 가해자인 악어로 그려져 있고, 그 남자들이 뱉는 침, 싸고 도망가는 정액, 불쾌한 손길 등등도 모두 마치 방사능 폐기물이라도 되는 양 초록색으로 그려진다.

2015년 이후 국내 출판계에 페미니즘 열풍이 불고 있고, 다양한 서적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현학적이고 복잡한 이론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고, 또 어떤 책은 남자들의 긍정적 변화와 발전을 촉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악어 프로젝트』처럼 철두철미하게 여자들이 겪는 세상, 모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세상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다룬 책은 없다.

만약 남자인 당신이 『악어 프로젝트』를 읽어봤는데 너무 불쾌하고 화가 나서 그 책장을 끝까지 넘길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이 책도 끝까지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여자들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평생 한 차례 이상의 강간, 강간미수, 성추행을 당한다는 사실을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렇기에 여자들은 남자들을 '잠재적 강간범' 취급해도 우리 남자들은 그저 부끄러워하는 것 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페미니즘 '공부'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당신은 계몽과 설득의 대상이 되기에는 기본적인 공감력이 모자라다. 곰과 호랑이가 변신하지 않는다면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치 단군 신화가 그랬던 것처럼, 『악어 프로젝트』 역시 일종의 변신으로 마무리된다. 한 악어가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악어 가죽을 벗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 책의 지향점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함으로써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임으로써 변화의 첫 단추를 간신히 꿸 수 있을 따름이다.


마늘과 쑥, 그리고 사람


남자인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혹은 알면서도, 여성들의 발언을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저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이 맨스플레인의 주체였음을 알아차리고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한국 남자'라는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 위해 먹어야 할 마늘이다.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남자들의 그것과 달리 강간과 성폭력과 성희롱과 불쾌한 '농담'으로 가득차 있음을 이해하고, 여성들이 그런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를 얻는 남자가 되는 것, 그 쑥을 먹지 않는 한 '한국 남자'라는 곰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언어를 쓰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여자인 그들의 세상과 남자인 '우리들'의 세상은 그토록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가 페미니즘 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을 우리는 아래와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여자들의 세상과 남자들의 세상은 너무도 다르다. 둘째, 여자들의 세상이 엉망진창인 것은 나와 같은 종족인 남자들이 저지르는 폭력과 억압 때문이다. 셋째, 나는 한 사람의 남자로서, 나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기득권에 속하며 따라서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고통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페미니즘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일단 페미니즘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여자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많은 경우 남자인 나보다 옳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동시에, 그 여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을 싫어할 수도 있고 당신의 데이트 거절이나 메시지를 무시할 수도 있으며,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며, 진심으로 남자를 혐오할 수도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남자인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모든 장점만큼이나 단점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라.

여자도 사람이다. 이 당위적 명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남자도 사람이다. 우리를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인 것이다.



[1] 리베카 솔닛, 김명남 옮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12쪽.
[2] 같은 곳.
[3] 같은 책, 14쪽.
[4] 같은 책, 15쪽.
[5] 같은 책, 27쪽.
[6] 황정임, 윤덕경, 이미정, 김영란, 주재선, 김동식, 이인선, 정수연, 김현정. “2013 성폭력 실태조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3년 12월 15일. 연구보고 2013-49. 125쪽 참고.
[7] 배문규, "여교사 70% 성폭력 경험했다···“가해자는 주변사람”", 경향신문, 2016년 6월 15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151130001&code=940100 
[8] 같은 곳.
[9] 이승준, 박수지, “너무나 오싹했지” 꾹꾹 눌렀던 경험 털어놓다…옆집 여성들의 ‘필리버스터’, 한겨레, 2016년 5월 20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44765.html 
[10] 같은 곳.
[11] 신혜정, "“폭행 당하고도 내 잘못인 줄 알았다” 눈물의 증언 봇물", 한국일보, 2016년 5월 21일. http://www.hankookilbo.com/v/9c41cf18938145f9bc648906ab418042 

2016-12-11

20161204 - 20161210: 이탈리아 레퍼렌덤 실패,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앙겔라 메르켈의 연설

* 12월 4일, 이탈리아에서 치러진 국민투표가 부결되었다. 상원과 하원 동수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의 양원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상원의 숫자를 3분의 1로 줄이고, 총리가 갖는 권한을 대폭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투표에서, 마테오 렌치 총리가 이끄는 국민투표 찬성파는 참패를 당했다. 투표 결과는 찬성 40%, 반대 60%. 무려 20%p 차이가 나는 엄청난 패배다.

이탈리아는 하나의 국민국가를 이루고 있지만 대단히 강한 지역색과 역사와 문화를 가진 지방들의 연합체이다.  그렇게 분열적인 문화적 바탕 위에, 상원과 하원이 동수로 구성되어 법안 발의권과 부결권을 동시에 갖고 있다보니,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간 63차례나 정권이 바뀌는 극도로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인 정치 체계가 유지되어 왔다. 마테오 렌치 총리는 그러한 구조를 개혁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결국은 자신이 가장 큰 권력을 쥐게 되는 개헌안을 추진했고, 실패했다.

문제는 반대파를 주도한 것이 이탈리아에서 포퓰리즘을 주도하고 있는 오성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번 승리를 계기로 오성운동이 더 큰 영향력을 얻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유럽연합으로부터의 탈퇴를 이끌어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었다.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투표에 참가했으며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집계되었다. 오후 3시부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롭게 진행된 탄핵소추의결서가 오후 5시 넘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되면서, 현재 그의 국가원수 및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권한은 정지되어 있는 상태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그의 탄핵을 지지하던 70% 이상의 한국인들은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음식 쿠폰 등을 선물하고, 탄핵안 가결을 기념하여 외식을 하러 가는 등, 그야말로 '창조경제'의 한마당이 펼쳐졌다.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지지층의 반감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표정 관리에 들어갔으며, 이후 펼쳐질 조기 대선 정국을 준비하고 있다.

만약 12월 9일이 아니라 12월 2일에 표결을 했다면, 비박계가 마음을 굳히고 돌아올 시간이 없었을 것이므로, 탄핵안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인들의 정신 세계에 깊고도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 분명하다. 이 글에서 설명했다시피 이 결과는 박지원이라는 한 정치인의 과감한 희생적 결단과, 그렇게 얻어진 시간동안 정치권을 압박해낸 유권자들의 합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한 고비를 넘겼다.


* 4선에 도전하는 독일 총리 앙겔레 메르켈이 '문화적 관용주의'의 종언을 선포했다. 12월 6일, 그는 기독민주당 당원 대회에서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독일 내의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2015년 전격적으로 시리아 난민들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89만명이 한꺼번에 입국하도록 하였던 메르켈이기에 이러한 결정은 큰 변화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서구권을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적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다. 이전과 같은 이민자 포용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한 다음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프랑스의 중도 우파가 전신을 덮는 수영복인 '부르키니'를 금지했던 것처럼, 유럽의 기존 우파들은 스스로 타협 가능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양보하고 있는 셈이다.

종교의 자유는 다른 자유와 마찬가지로 상황에 따라 합리적 근거 및 절차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 여성들에게 스스로 원하는 옷을 입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과연 메르켈의 이러한, 극우 세력을 향한 유화적 움직임이, 다른 자유의 침해를 최소화하며 극우파의 부상을 억누를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2016-12-10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형량 계산기' 김기춘 vs. '표결 계산기' 박지원

'성지 순례'를 위한 기사를 먼저 하나 소개해보겠다. 11월 27일,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오늘 아침까지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과 접촉했다"며 "탄핵 공조자들이 60명을 훨씬 넘었다는 통화를 했다. 탄핵안은 확실히 가결된다"고 강조했다."

이미 탄핵안이 통과된 이 시점에 우리는 박지원의 표 계산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 1명 기권, 234명 찬성, 56명 반대, 7명 무효. 새누리당의 이탈표는 총 62명으로 예상된다. 박지원이 옳았다. 그의 표 계산이 정확하게 맞았다. 11월 27일 현재, 그 시점까지만 해도 탄핵은 예정된 수순처럼 보였다.

그리고 11월 28일, 박지원은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두고 "대한민국 법 미꾸라지이자 즉석 형량 계산기"라며 구속수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의 지시로 차은택을 만났다고 언론에 밝힌 그가, 본인에게 돌아올 죄책을 박근혜에게 덮어씌우고 자기만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정국을 뒤흔들었다. 박근혜 본인을 향한 모든 혐의를 부인하면서, 본인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그의 말은, 탄핵을 향해 치닫던 비박계의 기세를 꺾고 주저앉히는 것이었다. 이 묘수를 박근혜 본인이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특히 형사법체계에 통달한 누군가가 대신 내준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굉장한 한 수였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탄핵의 칼날이 순식간에 무뎌졌기 때문이다.

현실을 현실로서 좀 받아들이고 논의를 시작하자. 야3당의 의석을 전부 더해도 167석이다. 탄핵에는 200표가 필요하다. 33표를 어디에선가 가져와야 하는데, 그 '어딘가'는 당연히 새누리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11월 29일의 3차 대국민담화는 그 33표를 가진 새누리당 비박계를 뒤흔들었다. 그대로 탄핵 절차가 진행된다면, 과반수 의석을 가진 야3당에 의해 발의는 가능하지만, 200표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인'이라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박지원이 택한 경로는 당연히 '이길 수 있는 확률을 최대화'하는 것이었다. 1일에 발의하고 2일에 표결하기로 했던 일정을 수정하여, 9일에 표결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일주일 미룬다고 해서 백퍼센트 탄핵안이 가결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야 없다. 하지만 그렇게 확보된 일주일동안 어떤 변수가 등장하여 비박계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얻으려면 일단 탄핵안 발의를 멈추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민주당, 혹은 민주당의 주류 세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가 터져나온 후에도, 우상호 원내대표는 탄핵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비박과 친박을 가리지 않고 '새누리당'을 향해 강경한 비난의 어조를 높이면서, 그들의 표를 얻어내기 위한 다른 방안을 마련하지는 않은 채, 그냥 표결을 하자고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가결이 아니라 부결을 향해 달려가는 질주와도 같았다.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가? 이것은 3000만명이 아니라 300명이 하는 투표다. 누가 무슨 표를 던질지 투표 개시 전에 미리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한다. 그 모든 정치적 불이익과 야당 강경파들의 야유를 무릅쓰고 양심적인 비박계 및 새누리당 탈당파 33명이 표를 던져주기를 염원하면서 2일에 탄핵안을 표결한다는 것은, 낙하산을 매지 않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묻지마 표결 강행이었을 뿐이다.

다행히도 '이쪽'에는 '형량 계산기'에 맞설 수 있는 '표결 계산기'가 있었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난과 인신공격, 혐오발언 등에도 굴하지 않고 9일 표결안을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벌었고, 그동안 탄핵 정국을 둘러싼 '게임의 법칙'이 바뀌어, 새누리당에서 62명의 이탈표가 나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만약 2일에 그대로 표결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건 박근혜, 혹은 '형량 계산기' 김기춘의 뜻대로 정치권이 놀아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야권 일각에서는 그렇게 '망하는' 결과가 벌어졌을 때, 국민들이 분노하여 '촛불 민심'이 더욱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는 탄핵당하지 않고, 하야하지도 않고, 내년 대선까지 쭉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안정국을 강화해나갔을 것이다. 국민들은 광장에서 경찰에게 쫓기고, 탄압당하고, 얻어맞고,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져간다. 그렇게 쌓이는 불만의 목소리를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세력은 미래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박근혜에 대한 국민적 반감에 기대어 손쉬운 대선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12월 1일까지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치권이 갇혀 있었던 '죄수의 딜레마'

'죄수의 딜레마'라는 개념을 꺼내는 것도 요즘은 좀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이 그랬다. 탄핵안이 부결되어도 상관 없다는 민주당 주류의 입장은 진정 솔직한 것이었고, 또 합리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민주당 주류, 즉 친 문재인 계열은, 문재인을 제외한 다른 대선 주자가 부상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탄핵안 가결'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현재의 탄핵 정국을 2004년의 그것과 1:1로 대조하는 사람들이 현 정국의 초반에 탄핵 절차 진행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 탄핵과 이 탄핵은 완전히 다르다. 여당을 탈당하고 미니 여당을 차린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박근혜는 아직도 거대 여당 소속 대통령이며, 노무현의 선거법 위반과 박근혜의 온갖 비리 혐의는 애초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대통령의 온갖 비리와 국정농단 등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이 탄핵에 동참하는 것은, 일종의 속죄 의식으로 작동한다. 박근혜를 탄핵함으로써 비박계,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구 친이계는 박근혜와의 선긋기에 성공하고 오명을 조금이나마 벗을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근소한 차이로 탄핵에 성공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비박계가 심지어 새누리당을 탈당하지도 않은 채로 압도적인 탄핵 찬성표를 끌어올 수 있다면, 그들은 새누리당 내의 헤게모니 투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것이고, 새누리당의 자산을 잃지 않은 채 조기대선 국면에 임할 수 있다.

대체 왜 민주당의 주류는 탄핵 정국에서 계속 한 발씩 늦게 움직이고, 불필요한 돌발 행동과 강경 발언으로 비박계를 위축시키고, 심지어 12월 3일 촛불집회에서까지 '탄핵'이 아니라 '하야'를 외치고 있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지렛대삼아 비박계가 부활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적은 표 차이로 탄핵이 가결되어 도덕적 면죄부를 얻었지만 새누리당 내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게 된 비박계가 집단 탈당하여 '제3지대'를 형성하는 것도 원치 않고, 지금처럼 비박계가 세력을 과시하며 새누리당을 재접수하는 것도 민주당 주류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그저 '지금처럼', 인기 없는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대선이 치뤄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므로 탄핵안은 안타깝게 발의되지 못하거나, 발의된 후에 부결되어야 하거나, 부결되어도 상관 없다.

국민의당의 셈법은 좀 더 복잡했다. 가결되되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어, 친박과 비박의 싸움이 좀 더 커지고, 이른바 '제3지대'가 넓어질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속죄 의식을 제대로 치렀지만 그 결과 갈 곳을 잃어버린 구 새누리당 의원들을 하나씩 포섭해가며 '합리적 중도'로서 외연을 넓힌다거나, 아니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안철수 외의 다른 대선 주자를 수용할 여지를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비박계가 아예 새누리당 내에서 이겨버리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므로 그다지 이익을 볼 수가 없다. 반면 탄핵안을 발의하지만 실패한다면 애초부터 탄핵론을 펼쳐왔던 안철수의 입지가 더욱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반드시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죄수의 딜레마가 발생했다. 국민의당은 일단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할 상황이지만, 너무 많은 표 차로 탄핵에 성공하면 그렇게까지 즐거운 상황은 되지 못한다. 반면 민주당은 지지층을 향한 강경 발언과는 별도로, 탄핵을 통해 비박계가 속죄하는 것도 원치 않으므로, 우상호 원내대표의 말마따나 탄핵이 부결되어도 상관 없는 쪽이다. 비박계는 탄핵을 하면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성공한다면 최대한의 표를 이끌어내어서 승리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각 정당이 얻게 되는 보상의 상대적 선호도를 -1, 0, 1로 놓고 표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민주당국민의당비박계
큰 표차001
작은 표차-110
부결1-1-1

민주당 입장에서는 작은 표차로 이기는 것보다는 부결되는 게 훨씬 낫다(2점 차이). 국민의당은 작은 표차건 큰 표차건 일단 탄핵안을 가결시켜야 1점의 손해를 안 볼 상황이므로, 새누리당이 4월 퇴진을 당론으로 정하기까지 한 상황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비박계는 작은 표차건 큰 표차건 탄핵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아예 참여를 하지 말아야 마이너스 1점의 손해를 피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부결되는 것이 이득인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죄수의 딜레마였다. 무기명투표를 이용해 민주당에서 이탈표가 나오면 그 비난은 민주당이 아니라 비박계, 더 나아가 국민의당으로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12월 1일과 2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보수 성향의 일간지 뿐 아니라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진보 계열 언론에서도 행간에 녹여 계속 언급하던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정작 간절하게 탄핵의 성사를 원하는 쪽은 국민의당과 비박계이지만, 그들은 민주당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다. 반면 민주당은 굳이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할 간절한 이유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급격한 여론 변화와 보상 매트릭스 변동

12월 3일의 촛불시위 이전까지의 계산이 그랬다. 그 후 지역구 의원들에게 쏟아진 전화, 문자, 메신저 등 또한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욱 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반성을 해야 한다. 총선이 무려 3년이나 남았고, 다음 총선은 다음 총선의 이슈를 가지고 진행될 것이므로, 국회의원들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 전방위적으로 쏟아지는 여론의 압박이 정치권의 보상 매트릭스를 바꿔놓았다.

일단 민주당은 더 이상 탄핵 여론의 발목을 잡으며 한 템포 늦게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온라인 여론전에 힘입어 직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었으나, 문제는 문재인의 지지율이었다. 성난 탄핵 찬성 여론을 이재명이 모두 쓸어가면서, 물론 경선을 하면 어떻게든 문재인이 이길 테지만, 불안감이 커진 것이다. 탄핵안이 부결되고 '촛불정국'이 이어진다면 문재인이 아니라 이재명만 좋은 일이 되어버린다. 탄핵에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국민의당과 박지원은 2일로 예정된 탄핵 투표를 9일로 미루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주장을 해놓고도, 탄핵안을 통과시키라는 국민 여론의 불만을 한 몸에 떠안았다. 부결되고 나면 대선 국면을 거치면서 국민의당의 존속 자체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변함이 없지만 손해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여기서 빠진 변수가 있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4월 30일 18:00를 기해 나는 모든 권한을 여야가 합의한 총리에게 넘겨주마' 같은 4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면 탄핵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그런 수를 두지 않았다. 이유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다. 헌재로 가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비박계와 접촉을 했는데 이빨이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해버렸을까?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고 책상을 두드리다 보니 시간이 다 지나갔을까? 내게 주어진 정보 하에서는 알 수가 없고, 결론에 영향을 주지도 않으므로, 일단 넘어가자.

비박계의 셈법은 변함이 없었다. 표결에 참여했는데 부결되면 곤란하다. 표결에 참여한다면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그런데 이제 민주당에서 배신표가 나올 여지가 사라졌고, 너무도 이상하게도 청와대에서 침묵을 지키면서, 거리낌없이 투표장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공적 용어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이른바 '촛불 민심'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의원 압박의 결과로 변경된 보상표를 다시 그려보자.

민주당국민의당비박계
큰 표차001
작은 표차-110
부결-2-2-2

이제 죄수의 딜레마는 해소되었다. 부결되는 것은 모두에게 확실한 손해를 안겨준다. 작은 표차로 가결되어서 국민의당이 이익을 보는 상황이 생긴다 해도 민주당으로서는 감수해야 한다. 부결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박계는 일종의 꽃놀이패를 쥐고 탄핵안 표결에 나서게 되었다.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혹자는, 아니 적잖은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이, '여론조사 결과와 딱 맞아떨어진 국회 표결 결과'를 두고 감탄하는 모양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다. 대의민주주의는 국회의원을 리모콘 삼아 국민의 여론조사 그대로 움직이는 정치체제가 아니다.

만약 12월 1일 '여론' 그대로 탄핵안을 발의하고 12월 2일 표결했더라면, 국민의 여론과는 완전히 다른 국회 표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12월 9일의 탄핵안 투표가 여론조사와 우연히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12월 1일에 어떤 정치인이 '여론을 거슬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꿋꿋이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 정치인의 이름은 박지원이다.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른다면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박근혜 게이트를 두고 박영선 의원에게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자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고 일갈했던 박지원의 성차별적 의식과 발언을 나는 여전히 규탄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모두 남자들이다. 게다가 박근혜는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박정희의 자식'이기 때문에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온 정치인이다. '여성 대통령' 박근혜의 실패를 보상하는 방법은 다음 대통령도 여자가 하고, 그 다음 대통령도 여자가 하는 것 뿐이다. 나는 성차별주의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한, 구시대 정치인 박지원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하지만 2016년 12월의 탄핵 정국 속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한 명 선정하면, 그건 당연히 박지원이다. 그가 홀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가며 '1일 발의 2일 표결'안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12월 3일의 촛불 시위대는 앞으로 벌어질 표결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이미 실패로 돌아간 표결의 절망을 안고 거리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특정 정치세력에게는 이득이 될 수도 있었겠으나, 국민들이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미 정치 외의 다른 영역에서 충분히 '이기는 경험'을 해온 사람들이다. 2002년 월드컵으로 '세계의 벽' 앞에 무릎 꿇는 비루함이 극복되었다. 김연아 선수를 대표로 한 여러 스포츠인들의 활약은 오늘도 계속된다. 이제 한국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문화 수출국이며 경제 강국이다. 그런데 왜 유독 정치에서만큼은 '우리 정치권이 힘이 약해서 저 악당들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찌질한 서사가 아직도 통용되어야 하는가?

정치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 국민 여러분이 힘을 모아주시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정치 세력, 적어도 나는 절대 사절한다. 욕을 먹을 때 욕을 먹더라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정치권 내부의 논리에 부합하는 행보를 하는 그런 정치인과 정치 세력을 나는 원한다. 합법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키는데 성공한 기쁜 날, 앞으로 대한민국의 정치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긴 글을 써 보았다. 이것은 국민의 승리이며 정치의 승리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계속,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2016-12-04

20161127 - 20161203: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박근혜 3차 대국민담화, 트럼프 차이잉윈 통화

* 11월 3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새로운 대북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대북제재결의 2321호는 지난 3월초 채택되었던 대북제재결의 2270호를 보완하는 것이다.

북한의 석탄 수출에 상한선을 정하고, 그 외 광물의 수출금지를 강화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원자재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을 차단하여 경제적 압박을 가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결의 채택일인 오늘부터 올해 말까지는 석탄 수출에 5천349만 달러 혹은 100만 톤의 규제를 받고, 내년부터는 연간 4억달러 혹은 750만 톤의 석탄만을 판매할 수 있"다. 동, 니켈, 은, 아연 등의 광물 뿐 아니라 헬리콥터, 선박, 심지어 조형물, 즉 독재자 우상화 조각상의 판매 역시 금지 대상의 목록에 올랐다.

기존 안보리 제재안에서도 석탄의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민생 목적'일 경우에는 허용한다고 예외 조항을 둠으로써, 중국이 북한으로부터 석탄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하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새로운 결의안은 그러한 예외 없이, 가격 혹은 무게 둘 중 하나라도 상한선에 도달하면 석탄의 수출을 금지하는 강경한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중단되지 않고 있으며, 2년 내 미국 본토에 공격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 11월 29일 오후 2시 30분, 박근혜 대통령이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이전과 달리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기자들 앞에 섰던 그는,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들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던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며 자신을 향하고 있는 범죄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을 향한 탄핵의 칼날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정치적 수를 두었다는 것이다.

저는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의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국정의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주시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이미 '국가 원로'라는 그 어떤 헌법적 정당성도 갖지 못한 임의의 노인 몇 명이 모여 '4월 퇴진, 6월 대선'이 좋겠다고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다음의 일이다. 새누리당 역시 그 '원로'들의 견해에 따라 '4월 퇴진, 6월 대선'으로 가닥을 잡기 시작했고, 그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만 탄핵에 임하겠다고 새누리당의 비박계는 입장을 선회했다.

야3당의 탄핵 추진은 동력을 잃고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200표가 나와야 탄핵안이 가결될 수 있는데, 야3당을 다 합쳐도 결국 30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본래 12월 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표결을 9일로 연기해야 한다고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이 주장하였으나, 온라인의 여론은 당장 탄핵 표결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는 식으로 휘몰아쳤다. 확보되었어야 할 표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결을 늦춰야 한다는 상식적인 주장이 왜 그토록 비난당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탄핵안은 상정되었고, 표결은 9일로 결정되었으며, 지난 3일 토요일에는 220만명 가량이 전국에서 촛불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9일 탄핵안이 가결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 12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대만의 차이잉윈 총리와 통화했다. 이것은 미국이 자유중국을 버리고 중화민국과 수교하기 시작한 이후 37년만의 일이다.

당연히 중국은 발칵 뒤집혔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성명에서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타이완은 중국 영토의 일부"라는 입장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대만은 정식 외교 대상이 될 수 없는 상대인데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전화를 한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는 뜻이다.

미국과 중국의 오랜 밀월이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거니와,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이 종잡기 어려운 방향으로 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만약 트럼프가 대선 캠페인 당시 했던 말처럼 김정은과 직접 통화를 하면 대한민국은 어떤 처지가 될까? 주사파들이 꿈에 그리던 '통미봉남'이 시작된다면? 대한민국은 어서 탄핵 절차를 밟아 국내의 정치적 혼란을 제거하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응해야 한다.

2016-12-02

탄핵은 대박이다

지지난주 토요일의 일이다. 충무로 인근에 즐겨 가는 한 식당이 있다. 닭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집이며 백숙을 잘 삶는다. 그런데 광화문 집회를 몇 시간 앞두고 좀 일찍 저녁을 먹으려 가보니 닭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몰리면서 광화문과 종로 인근을 넘어 충무로까지 식당 매진 사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것도 창조경제라면 창조경제다. 요즘 분위기 살아난 광화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말만 되면 한산하기 그지 없었던 종로와 청계천 일대 상가들까지 '촛불 특수'로 북적거리게 만들었다니 경이로울 따름이다. 경찰이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통행을 막지 않으니, 2008년에는 아예 장사를 못하고 울상이었던 광화문과 종로 인근의 대형서점들도 부쩍 늘어난 유동인구의 온기를 느낀다.

그러나 서울 시내의 촛불 호경기는 웃을 일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 앉아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통째로 마비되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기업들은 박근혜 게이트의 불똥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 임원 인사를 한없이 미루고 있다. 경제 성장률 하향이 예상되지만 민간이건 공공이건 경제 연구소들은 한없이 비관적인 수치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체감 경기는 한없이 얼어붙었고, 이제는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던 5000원짜리 순댓국집들 중에도 폐업하는 곳이 보인다.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가 정말 굉장한 것이다. 관련 보도를 인용해보자.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6년 11월 소비자동향조사’ 자료를 보면 11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95.8로 조사됐다. 10월보다 6.1포인트 떨어진 것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월(94.25) 이후 7년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링크)

한국 대기업들에 대한 신뢰 역시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다. 우리 한국인들끼리야 원래 그랬거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현실이 영화보다 저질이구나, 하고 덤덤하게 지나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해외 투자자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최순실 사태로 인한 국정 불안에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원화 가치 하락이 겹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에서 빠르게 돈을 빼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와 연루돼 총수의 이름이 거론되는 삼성전자(11월 1일 이후 순매도 4627억원), 현대차(321억원), SK텔레콤(408억원) 등 9개 재벌 그룹 관련주도 대부분이 외국인 순매도를 기록 중이다. 이 9개 그룹이 코스피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에 육박한다."(링크)

국내 소액 주주들의 심정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 당신이 해외 투자자라고 생각해보자. 스마트폰을 잘 만들어서 수익을 내고 배당도 많이 해달라는 생각에 그 비싼 삼성전자 주식을 매입했는데, 그 삼성전자가 정유라라는 들어본 적도 없는 승마 선수를 위해 수십억 짜리 말을 사고 관리비까지 대고 있었다고? 그래서 검찰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하고 있다고? 이건 갤럭시 노트7이 폭발한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황당한 사건 아닌가?

시간을 한 달 전으로 되돌려보자. 당시만 해도 한가한 소리를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대통령에게는 외치와 국방을 맡기고 내정을 전담할 책임총리를 임명하면 어떻겠느냐는 식의 공허한 정치적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정치권에서 시끄럽게도 울려퍼졌다. 바닥 경제가 말라붙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돈보따리를 챙기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기상천외한 소리들을 하고 있는 판에, 한국의 정치권 중 일각은 이 난국을 합법적 절차에 의해 해결하려 들기는커녕 최대한의 정략적 이해만을 도모하다가 헛된 시간을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궁지에까지 몰렸다. 누군지 몰라도 법에 대해 잘 알면서 동시에 정략적 이간질에 능숙한 사람이 대신 써준 듯한 3차 대국민 담화문이 투척되자 일순간에 탄핵 대오가 흔들렸다. 이대로는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을지언정 통과시킬 수 없다는 게 분명한데도 야권 일각의 분노한 지지자들은 같은 편에게 '사쿠라', '부역자'라며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나는 대체 왜 이런 지지자들의 행태를 제1야당에서 제지하지 않는지 의아하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중요한 건, 이제 더 물러설 길이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를 탄핵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산다. 최순실이 대신 써줬다는 의혹이 있지만 최순실 본인은 한사코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 표현을 빌려보자. 탄핵은 대박이다. 끝없는 불황의 터널 속을 헤매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반전시킬 수 있는 단 한 장의 카드가 바로 탄핵안 가결이다.

생각해보자. 박근혜를 탄핵시키자고, 하야를 촉구하자고, 수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들면서 일대의 경기가 매주 주말마다 불타오른다. 만약 적법한 헌법적 절차에 따라 박근혜의 대통령 권한이 12월 9일 정지된다면 온 나라가 광장으로 돌변할 것이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심지어 장례식장에서 눈물 흘리던 유족들도 환호성을 질렀던 것처럼, 4%의 골수 지지자를 제외한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이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오늘날의 불황 속에 소비심리를 진작시키고 사람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이벤트가 이것 외에 또 있을까?

탄핵은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불안정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해법이다. 탄핵안이 통과되는 날 시민들은 축제를 벌이며 주가는 폭등할 것이다. 어쩌면 출산율도,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그랬던 것처럼, 조금은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중요한 건 탄핵안이 부결될 경우 현재의 우울하고 침체되어 있으며 무기력한 분위기가 반전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탄핵만이 해법이다. 이제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야당 정치인들은 광장에서 사진 찍을 생각 하지 말고, 비박계 의원들에게 '충성충성충성' 문자 보내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부정청탁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로비를 퍼부어라. 광장은 시민들이 알아서 지킬테니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일을 하란 말이다. 오직 비박계의 표를 확보해 탄핵안을 가결시키는 것이 당신들의 역사적 사명인 것이다.

영국의 권위있는 경제지 『파이넨셜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박근혜의 퇴진을 요청하며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박근혜가 결국 무대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은, 대한민국이 더욱 강력한 민주주의와 함께 이 사건으로부터 솟구쳐오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만한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링크) 성공적인 탄핵이 바로 그 출발점이다. 지금 탄핵하지 못하면 박근혜는 끝까지 버티려 들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의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경제가 버텨줄 수 있을까?

탄핵은 대박이다. 12월 9일은 대통령 탄핵안을 표결하는 날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 부활의 첫 단추를 꿰는 날이다. 탄핵안 가결을 위해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한다.

2016-11-29

[북리뷰] 광장의 불꽃은 백년 넘게 타오르고 있다

1898, 문명의 전환
전인권·정선태·이승원 지음·이학사·1만8000원

정치학자 전인권에게는 꿈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기원을 정치사상사의 관점에서 밝혀내고, 이 나라가 직면한 제반 상황을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의 그를 병마가 덮쳐왔고, 전인권의 미완성 원고를 그의 동료인 정선태와 이승원이 이어받았다.

<1898, 문명의 전환>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왕조의 신민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거듭났던 그 순간이 언제인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을 건국한 주체는 3·1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대한국민이다. 그렇게 새로운 나라를 만든 주권자들은 부정과 독재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을 쫓아냈고, 빈 틈을 노리고 들어온 군부에 잠시 권력을 내줬지만, 기어이 승리를 거두어 대통령 직선제 민주 헌법을 이룩해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대한국민은 3·1운동을 통해 이 나라가 독립국가임을 천명한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런데 갑오개혁이 시작된 것은 1894년이고, 3·1운동은 1919년이다. 불과 25년 만에 조선의 신민들이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전인권은 역사학계의 통념에서 벗어나 한 매체와 그 매체로 인한 정치 운동에 주목한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고문 자격으로 돌아온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주도로 시작된 후 자체적인 생명력을 얻어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만민공동회가 바로 그것이다.

최초의 순한글신문으로 띄어쓰기를 도입하여 혁신적으로 가독성을 끌어올린 <독립신문> 덕분에 새로운 공론장이 탄생했다. 말하고 읽고 쓰게 된 조선왕조의 백성들은 광장에 모여 밤을 새가며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한 끝에, 상호 간에 평등하며 근대적인 정치 체제의 도입을 요구하는 시민으로 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협회의 주체가 비교적 소수의 엘리트였다면, 만민공동회는 대중들이 이끌어간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정치운동”(169쪽)이었다. 하지만 기존 역사학계는 민중주의 사관에 집중한 나머지 동학농민운동을 주요 사건으로 되새기면서 만민공동회를 다소 소홀하게 다루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새로운 매체와 광장에서의 모임을 통한 새로운 정치의식의 출현. 전근대사회의 신민에서 근대사회의 시민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그 중대한 의미를 병상에 누워 정선태와 이승원에게 남길 유언을 녹음하던 전인권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역시 문명의 전환이 왜 1898년이냐, 1876년 개항일 수도 있고, 김옥균이 쿠데타 한 때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시 근대의 출현이라고 하는 것은 ‘대중의 출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대중들이 집단적인 의사 표현을 하고, 과거 백성들과 신민들이 민족의 이름으로 새롭게 호명되면서, 균질화된 혹은 동질화된 그 자격을 가지고 공론장에 참여하고 있는 이 형태.”(304쪽)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광장’의 체험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성공하고, 가끔은 실패했지만,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정치적 주체화의 도저한 흐름 말이다. 우리의 문명은 바로 지금 한 단계 더 나아가야만 한다.

2016.11.29ㅣ주간경향 1203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11221050471&code=116

2016-11-27

20161120 - 20161126: 앙겔라 메르켈 4선 도전, 박근혜 탄핵 추진, 크리스 패튼의 홍콩 독립주의 비판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4선에 도전한다. 2005년 이후 총리직을 유지하고 있는 그는, 현지시각으로 11월 23일 연방하원 정책 토론회 연설에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해도 앙겔라 메르켈은 독일 총리직에 다시 도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현재, 메르켈은 자유무역과 관대한 이민 허용의 마지막 수호자가 되었다. 그는 연방하원 정책 토론회 연설에서 TPP 탈퇴를 천명한 트럼프를,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며 비판했다.

지난 해, 시리아 난민을 대거 수용하기로 한 결정 이후 난공불락이었던 메르켈과 기독민주당의 지지율이 큰 하락세를 보였다. 트럼프의 당선이 보여주고 있다시피 반 이민 정서는 기존 정치권 바깥의 극우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경향이 있다. 메르켈은 구 동독에 임대주택을 확충하는 정책을 펼쳐 지지 기반을 다지고자 한다.


* 야권에서 이번 회기 중으로 탄핵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하면서, 빠르면 12월 2일, 늦어도 12월 9일까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국민의당은 최대한 빨리 탄핵소추안을 가결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민주당은 9일까지 여유를 갖고 최대한 비박계 의원들을 포섭하며 표 단속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새누리당에 탄핵을 구걸하지 않겠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이기도 한, 부역자 집단의 당 대표를 지낸 분이 탄핵에 앞장서겠다고 한다"는 등의 공격적 발언을 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민주당에도 부역자가 없다고 할 수 있느냐'며, 지금은 탄핵안 통과를 위해 집중해야 할 때라고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현재로서는 탄핵안을 통과시켜서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키지 않는 한, 검찰 뿐 아니라 특검의 수사 역시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비박계가 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하는 일에 앞장섬으로써 '면죄부'를 얻는다는 식의 비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거야(巨野)의 지지자들이 곧잘 말하던 '차악'과 공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 1997년 퇴임한 마지막 홍콩 총독인 크리스 패튼(Chris Patten)이 두 명의 홍콩 입법회 선거 당선자인 식스투스 바지오 렁과 야우와이칭에 대해 "일종의 학생 놀음"을 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식스투스 바지오 렁(좌) / 야우와이칭(우)

식스투스 바지오 렁(梁頌恒)과 야우와이칭(游蕙禎) 당선자는 '홍콩은 중국이 아니다'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입법회 선서에 임했다. 게다가 그들은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고 중국을 야유하는 내용으로 선서문을 바꿔 읽었다. 홍콩 법원은 11월 15일 두 당선자의 의원 자격을 박탈했다.

크리스 패튼은 중국의 홍콩 자치권 침해에 대해 침묵하는 영국 정부를 비판하지만, 홍콩의 독립 그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파이넨셜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진지하게 조언하건대, 당선자들은 통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대화에 복귀하고, 독립과 관련된 것들은 멀리해야 한다. . .  독립은 실현될 수 없으며 홍콩 주민들은 독립이 가능한 것인 양 생각하는 것의 위험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국내의 언론은 홍콩에 대해 놀라우리만치 관심이 낮다. 특히 스스로를 민주화 세력으로 인식하거나 그에 동조한다고 여기는 언론들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지속적으로 추적해볼 사안이다.

2016-11-20

[별별시선]트럼프 당선과 ‘진보’의 가치

미국 대선 결과는 뜻밖이었다. 하지만 국내의 반응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마치 페이스북을 통해 조작된 뉴스를 보고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미국인들처럼, 특히 일부 진보 인사들은 잘못된 사실관계를 기반으로 해 엉뚱한 방향으로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하나씩 짚어보자.

‘트럼프는 미국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틀렸다. 현지시간으로 11월17일 현재, 힐러리 클린턴의 총득표는 6282만5754표, 반면 트럼프는 6148만6735표에 그치고 있다. 약 130만표 차가 나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500만표가량 개표되지 않은 표가 남아있다.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 국민들은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미국이 연방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은 국민들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50개의 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당선은 민주주의적 원칙보다 연방주의적 원칙이 우선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트럼프 지지층은 분노한 노동자들이다?’

천만에. 트럼프의 지지층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백인들이다. 숫자를 보자. 미국인의 중위소득은 5만6000달러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은 약 6만1000달러의 중위소득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의 중위소득은 7만2000달러로, 클린턴 지지층에 비해 1만달러가 높을뿐더러 평범한 미국인들에 비해서도 1만6000달러나 더 높다. 이것은 평균이 아니라 중위값이므로 ‘슈퍼 리치’들이 공화당을 지지해서 왜곡된 통계가 아니다. 주요 트럼프 지지층이 ‘가난하고 분노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샌더스가 나갔다면 이겼을 것이다?’

어림도 없다. 샌더스는 클린턴에게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다. 특히 민주당의 ‘미래 지지 기반’인 히스패닉 및 소수자 집단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경선 패배의 원인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전국 득표력이 필요하다. 샌더스는 백인 밀집 지역인 ‘러스트 벨트’에서만 상대적 우위를 갖는 약한 후보였다. 게다가 샌더스가 트럼프와 1 대 1 토론에서 어떤 처참한 꼴을 당했을지 상상해봐야 한다.

미국 대선 관련 주요 이벤트를 모두 시청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샌더스는 트럼프의 상대가 못된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잽 부시를 문자 그대로 짓뭉개버렸다. “닥쳐”(You shut up)라며 손가락질을 해대고 목청을 높이는 트럼프를 부시 집안의 세번째 대통령 출마자는 감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트럼프는 온갖 부동산 거래뿐 아니라 리얼리티 쇼와 프로레슬링 무대 등으로 단련된 ‘미디어 인파이터’다. ‘남자 대 남자’로 맞대결해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 점잖게 나오면 말을 안 들어먹고, 똑같이 진흙탕 싸움을 하면 이쪽이 더 손해를 본다. 클린턴처럼 소수자에 속하는 누군가가 품위 있는 태도로 맞서는 것만이 해법이었다. 샌더스는 트럼프를 이길 수 없었다.

정리해보자. 트럼프는 클린턴보다 최소 130만표 뒤졌지만 선거인단을 많이 확보해 승리했다. 게다가 트럼프 지지자들은 평균적인 미국인뿐 아니라 클린턴과 샌더스의 지지자들보다 잘사는, 교외에 거주하는 겉보기에 점잖은 백인 중산층들이다. 이번 미국 대선의 키워드는 ‘분노한 민중’이 아니라 ‘소수자를 혐오하는 기득권층’인 것이다.

그런데 왜 미국 대선을 ‘가난한 노동자의 반란’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까? 한국식으로 치자면 여성, 세월호 희생자, 삼성반도체 백혈병 환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외국인 노동자, 중국계 동포 등을 모욕하며 증오를 선동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베 스타’가 바로 트럼프다. 일부 인사들은 그러나 승자에게 감정이입하여, 트럼프의 승리에 어떤 ‘진보적 가치’를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전 세계의 시민들과 연대하여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입력 : 2016.11.20 21:16:01 수정 : 2016.11.20 21:18:55

2016-11-19

20161113 - 20161119: 미 연준 금리 인상 예고, 박근혜 대통령 피의자 신분

*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현지시간 11월 17일 의회에 출석해 남은 임기를 다 채울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그가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비방 때문이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 중 연준이 민주당 정권을 돕기 위해 낮은 금리를 유지하고 있고, 그래서 달러가 저평가되고 있다고 공격했던 것이다.

옐런은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임기를 모두 채울 것임을 천명했다. 2018년 2월까지는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를 유임시킬 생각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므로, 이후로는 미국의 통화 정책이 크게 요동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옐런 의장은 의회에서 "현 시점에서 볼 때, 나는 경제가 우리의 목표를 향해 대단히 훌륭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며, 연준이 11월에 도달한 판단 역시 유지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기준금리 인상은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에" 시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준금리 인상이 필요한 이유로, 견실한 회복세를 보이는 미국의 경제 외에도, 지나치게 낮은 금리로 인해 투자자들이 위험한 자산(가령 부실한 주택 담보 대출)으로 향하게 될 우려가 있음을 덧붙였다.


* 11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주중 이루어질 것처럼 이야기되었던 검찰 조사를 거부했다. 검찰에서 그를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하려 했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고 언론과 법조인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러자 11월 18일 늦은 시각,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을 피의자라고 적시하지 않은 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특수본 관계자는 18일 “박 대통령에 대해 ‘형제번호’를 땄다(기재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신문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형제번호’는 검찰이 입건된 피의자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사건번호다. 참고인은 입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형제번호가 기재됐다면 피의자라는 의미다."

그러나 검찰은 공식적으로 단 한 번도 박근혜 대통령이 피의자라고 밝히지 않았다.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바는 어디까지나 '관계자'의 말일 뿐이고, 아직 공식적으로 피의자 신분인 대통령에 대한 소환장이 발부되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의 통신사인 교도통신은 검찰 관계자가 박근혜 대통령을 '중요 참고인'으로 지적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한국갤럽에서 1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5%, 부정 평가는 90%, 의견 유보는 6%로 지난주와 유사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16-11-15

'클린턴의 패배에 대한 오바마의 분석'에 대한 코멘트

클린턴의 패배에 대한 오바마의 '분석'은 밥을 꼭꼭 씹어먹어야 소화가 잘 된다 같은 원론적인 소리일 뿐. 그거 모르는 정치인도 있나? 문제는 클린턴 캠프가 '왜' 위스콘신 등을 동선에 넣지 않았느냐임. 내 추측은 인구 구성표를 믿고 도박을 했다는 쪽.

카운티 단위의 순회 일정을 감당하기에는 클린턴의 건강이 안 받쳐줬을 것이고,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재수없는 년'과의 휴먼 터치를 좋아할지조차 미지수이니, 플로리다와 (심지어) 텍사스 등 인종 구성이 다양한 대도시가 있는 주에 캠페인을 집중하고 망함.

이 가설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음. 1) 힐러리 클린턴의 건강 문제가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 2) 백인 남성과 가정주부들의 미소지니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클린턴 캠프에서 알고 선제적으로 포기했다. 아무튼 숫자를 놓고 보면 해볼만한 도박이었을듯.

문제는 막판에 FBI가 선거에 개입하면서 안그래도 투표율 낮은 마이너리티들의 투표 의지를 떨어뜨리고, 원래 투표율 높은 백인들을 반 클린턴으로 결집시키는 효과를 불러왔다는 것. 클린턴 캠프에서 패인을 FBI로 짚는 것을 왜 비난하는지 모르겠음...

이 가설이 맞다면, 클린턴 캠프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패인은 당연히 FBI 뿐임. '클린턴이 건강 때문에 카운티 단위 방문이 불가능했다', '우리는 판세를 보고 러스트 벨트를 버렸다' 같은 소리를 공개적으로 할 수야 없을 테니까.

* 2016년 11월 15일 오후 3시경 작성한 트윗들을 모은 것.

[북리뷰] 늑대왕 로보와 시튼, 그 문제적 관계

커럼포의 왕 로보
윌리엄 그릴, 찰리북, 1만5천원

영국 태생으로 캐나다로 이주한 동물학자 어니스트 시튼은 자신이 관찰하고 겪은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커럼포의 왕 로보'다. 미국 뉴멕시코의 커럼포는 로보라는 이름의 늑대가 지배하고 있다. 로보는 수백, 수천 마리의 양, 염소, 개 등을 물어죽이고 사냥하며 커럼포의 목장주들의 골칫거리를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초청받은 시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로보를 추적한다. 강력한 독약을 정성스럽게 만든 미끼에 설치하고, 비싼 덫을 놓았다. 하지만 로보는 시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보다 영악해서, 그 어떤 미끼도 물지 않고, 덫도 피하며, 오히려 사람을 조롱하듯 그 위에 똥을 싸놓기까지 했다.

시튼은 사냥꾼이면서 동시에 동물학자였다. 그는 로보의 무리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감히 로보를 앞서나가는 어떤 늑대가 있다는 것. 암컷이었다. 시튼은 그 늑대가 로보의 짝임을 직감한다. 흰 털을 가진 아름다운 암컷 늑대 블랑카. 블랑카를 잡으면 로보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적중했다. 블랑카의 시체를 찾기 위해 로보는 평소라면 절대 빠지지 않았을 함정으로 달려들었고, 결국 시튼에게 붙잡혀, 물과 음식을 모두 거부한 채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영국의 젊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윌리엄 그릴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주로 색연필을 이용한 따스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필치로 로보와 블랑카, 로보의 무리, 사냥당하는 동물들, 그들을 추적하는 시튼의 모습을 담아냈다.

단지 그림만 다시 그린 게 아니다. 그는 시튼이 로보를 사냥해낸 후 늑대 보호 운동가로 변신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이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시튼이 깨달은 바, 로보가 가축을 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이 늑대의 먹잇감이 되어야 할 다른 야생동물의 씨를 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그릴의 로보 이야기는 시튼의 원작을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그것을 오늘날의 맥락에 맞게, 야생의 피 냄새를 파스텔톤으로 지워내면서 환경과 생명에 대한 고민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커럼포의 왕 로보>는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며, 고전의 리메이크라는 면에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몇 개의 고민이 뇌리에 남는다. 시튼은 로보를 죽이고 나서야 늑대의 '보호'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윌리엄 그릴은 그 이야기에 다시 한 번 현대적 맥락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것은, 늑대의 야생성을 이미 거세한 후에 벌어지는, 안전한 '애도'의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이미 정복한 자연만을 '보호'하며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어네스트 시튼의 로보 이야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시대적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수많은 갱스터물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바, '남성미를 뽐내는 마초가 짐덩어리밖에 안 되는 철없는 여자를 사랑해서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죽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의 몰락을 위해 종종 포르노적으로 학대당하는 여성 캐릭터의 원형을 암컷 늑대 블랑카가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맥락 속에서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처음부터 '불편한' 이야기이며 우리를 고민하고 사색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면이야말로 <커럼포의 왕 로보>를, 윌리엄 그릴의 것이건 그 원작이 되는 어니스트 시튼의 것이건, 두고두고 되짚고 곱씹어야 할 걸작으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6.11.15ㅣ주간경향 1201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11090916411&code=116

탄핵 역풍? 노무현을 모욕하지 마라

노무현은 왜 탄핵을 당했을까? 대통령이기 이전에 변호사였던 노무현은, 본인의 발언이 선거법에 위반될 수 있음을 뻔히 알면서, 왜 공개적인 경로로 자신이 속한 신생 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던 것일까?

물론 일각에서는 그가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일부러 대통령 탄핵을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의 '선거 개입' 발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간과하는 듯하다. 그는 대통령이 한 사람의 정치인이자 정당인으로서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우리는 1987년까지, 그리고 어쩌면 그 이후로도, 지속적인 정권의 선거 개입을 목격해왔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선거 개입'은 무조건적으로 막아야 할 일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만들어진 공직선거법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얼마 전 치뤄진 미국 대선에서 전례 없이 높은 임기 말 지지율을 자랑하는 오바마 미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유세장을 찾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연설을 했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라고 클린턴을 소개하고, 상대편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하면서, 클린턴의 약점인 '인간적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심지어 영부인 미쉘 오바마까지 동원해가며 말이다.

2016년 미국 대선의 경우, 권력 기관의 '선거 개입'은 오히려 야당 후보를 돕기 위해 벌어졌다. FBI 국장 제임스 코미가 이른바 '이메일 게이트'에 대한 재조사를 거론하면서 막판 부동층이 투표를 포기하거나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클린턴이 근소한 차이로 이길 것이라 예상되었던 모든 경합주를 빼앗기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제를 택하는 민주 국가의 경우, '선거 개입'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FBI, 경찰, 국가정보원, 기무사, 기타등등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그런 '선거 개입'이 첫번째다. 우리의 헌정질서는 바로 그런 '선거 개입'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두 번째의 '선거 개입', 즉 여당의 당원인 대통령이 공개적인 발언 등을 통해 여당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는 '선거 개입'도 있다.

노무현의 의지는 첫 번째의 '선거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는 대신, 두 번째의 '선거 개입'을 할 수 있는 권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노무현은 자신이 탄핵당하게 된 사유 그 자체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또 대통령의 신분으로 공직선거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이유다. 다른 공무원들과 달리 대통령은 '공직자'이기 이전에 '정치인'이므로 정치적 활동을 금지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발언'에 대한 제약이 존재한다면 대통령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활용하여 선거에 개입할 유인동기를 갖게 된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개선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발상이다. 국민에게는 결사의 자유가 있고, 대통령 또한 국민이며, 따라서 선출직 공무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헌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을 제외한 수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대통령의 선거 개입 '발언'을 허용한다. 다만 권력기관을 동원한 음성적 '개입'을 철저히 금지할 뿐이다. 왜 대한민국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가?

노무현의 선거법 위반은 이렇듯 그 자체가 헌법적, 더 나아가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판단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설령 노무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자체가 논쟁할만한 사안이라는 것만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은 '다른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을 뿐, 민주적 헌정 질서 그 자체를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당시의 국민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민주주의인가'의 문제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안이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발의될 때부터 찬성보다 반대가 더 많았던 것이다. 탄핵안이 발의된 2004년 3월 9일 당시의 신문을 인용해보자. "조선일보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9일저녁 전국 성인 714명을 상대로 전화 조사한 결과 탄핵반대가 53.9%, 찬성이 27.8%였다."(링크)

심지어 국민들은 그 탄핵안이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같은 기사를 더 읽어보자. "국회 본회의에서 탄핵소추안의 통과를 전망하는 답변자는 24.4%이며 부결을 전망하는 답변자는 50.3%였다." 왜냐하면 애초에 대통령을 탄핵할만한 '깜'이 되지 않는다는 게 누가 봐도 명확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다만 "노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60.8%이며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은 30.1%로 조사됐다." 그는 사과하지 않았고, 발의된 탄핵안은 국회에서 통과되어 헌재로 향하게 되었다.

탄핵 불가론 등을 운운하는 야권 내 주류 세력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박근혜-최순실-우병우 국정 농단 사건과, 노무현의 '선거 개입' 논란이, 당신들의 눈에는 동등하게 보이는가?

전자는 두말할 나위 없는 국정 농단이다. 최대한 빨리 그들을 처벌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후계자에게 합법적으로 넘겨야 하는 사안이다. 반면 후자는 '지금과는 다른 민주주의'를 꿈꾸던 이상주의자가 대통령 당선 이후 새 당을 만들더니 기존의 민주당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그 외 보수 세력을 자극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특히 구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들에게 대북송금특검에 뒤이은 열린우리당 창당과 대통령의 입당은 굉장히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지만, 그것은 어쨌건 최순실-우병우-김기춘 일당의 국정 농단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말이다.

실제로 국민들은 현임 대통령의 국정 농단을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정치권 내부의 갈등이 오작동하고 불거졌던 2004년의 경우와 달리, 현재 국민들의 60퍼센트 가량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임하거나 탄핵당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탈당하고 여야 합의 총리에 국정을 이양해야 한다는 의견은 18.4퍼센트에 지나지 않으며, 박근혜 대통령이나 김병준 국무총리 임명자가 중심에 서서 국정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14.1%에 불과하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이 제1차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던 10월 25일 조사에서는 ‘자진 사퇴 및 탄핵’ 의견이 42.3%를 기록했고, 1주일 후인 최순실씨가 긴급 체포되어 검찰 조사를 받았던 11월 2일 조사에서는 55.3%로 10%p 이상 더 늘어난 데 이어, 역시 1주일 후인 이번 9일 조사에서는 60.4%를 기록하며 25일 조사 대비 20%p 가까이 ‘자신 사퇴 및 탄핵’ 여론이 더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링크)

놀랍게도, '이 탄핵'과 '저 탄핵'이 뭐가 다른지,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그저 '탄핵 역풍'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다름아닌 노무현의 이름과 이상을 내걸고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과 그 정치인의 지지자들이라는 것이다. 노무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다가 탄핵을 당했는데, 그의 유지를 받든다는 세력은 누가 봐도 잘못된 짓을 하다가 탄핵을 당하게 생긴 악당들과 노무현을 등치시킨다. 그들에게 '이 탄핵'이건 '저 탄핵'이건 중요한 건 그 내용이 아니라 그저 '탄핵 역풍'을 안 맞는 것 뿐이라는 뜻이다.

국민들은 '이 탄핵'과 '저 탄핵'이 다르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과거의 그것에는 정당성이 없었지만, 현재의 국정 마비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는 한이 있더라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양자를 혼동하는 세력은 오직, 과거에 '탄핵 역풍'으로 재미를 본 바 있는 사람들 뿐이다. 이 역설은 너무도 받아들이기에 괴롭다.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사람들이, 노무현을 박근혜와 같은 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에게 2004년의 탄핵은 '떡고물'이 떨어지는 정치적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노무현에게 그것은 끝까지 '쪽팔려'가며 싸워야 할 어떤 민주주의의 싸움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팔아 정치 생명을 이어가는 세력이 본인의 이상을 이토록 진흙탕에 처박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 탄핵'과 '저 탄핵'은 분명히 다르다. '탄핵 역풍'을 걱정하며 똑같은 범주로 싸잡을 사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뜻을 받든다는 이들이 더 이상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2016-11-13

2016/11/06 - 2016/11/12 : 미국 대선과 100만명의 시위

* 현지 시간으로 2016년 11월 9일, 미국에서 제45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거의 모든 언론은 여론조사에 기반하여 힐러리 로댐 클린턴의 낙승을 예상하였으나, 결과는 정 반대였다. 경합주에서 모두 패배하였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텃밭으로 여겨지던 미시건, 위스콘신, 펜실베니아 등을 빼앗겼다. 11월 13일 현재, 도널드 트럼프는 290명, 힐러리 클린턴은 228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함으로써, 승리를 확정지은 상태다.

2000년 앨 고어가 조지 W. 부시에게 패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민주당의 후보는 전체 득표수에서 앞서면서도 선거인단 숫자에서 밀려 백악관을 내어주게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간선제 및 승자독식 룰은 연방국가로서의 미국이 택하고 있는 대선의 규칙이며, 수백년에 걸쳐 내려오는 그 규칙을 준수하는 것 자체에서 미국인들의 모종의 숭고함을 느끼고 있을 뿐 아니라, 민주당측에서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도 수정하지 않고 동의하였던 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 결과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 이민자 뿐 아니라 장애인까지 거리낌없이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에게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여성들의 고발이 선거 운동 기간 중에 빗발쳤고, '그랩 바이 푸시' 녹음이 공개되었으며, 탈세 의혹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요컨대 그는 미국인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미국적 가치'의 거의 모든 것을 배반했다.

투표율이 50%선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전체 득표수에서 클린턴이 더 많은 표를 얻었으므로, '미국인 전체'가 트럼프에게 동의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치 역시 독일연방의회의 과반 의석을 단독으로 점유해본 적이 없다. 선거는 특정 집단 내의 절대 다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 다수가 의사결정권을 가져가기 위해 치러진다. 트럼프의 발언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더라도 묵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미국 사회의 의사결정권을 적어도 4년간 가져가게 되었다.

이에 대한 분석은 단번에 끝날 수 없다. 특히 미국 대선이 한국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나는 계속 관찰하고, 분석하며,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어 부정적 영향과 맞설 것이다.


* 11월 12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최순실 등 비선들의 국정 농단을 규탄하는 제3차 촛불시위가 개최되었다. 경찰은 늘 그렇듯 참가 인원을 수십만명 선으로 낮게 추산하였으나 서울시는 공식적으로 120만여명 가량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했다. 이는 기존의 그 어떤 도심 집회보다 많은 숫자다.

토요일의 초대형 집회 이후 정치권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비박계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안철수, 이재명, 박원순 등 야권의 대선 주자들은 이미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 상태이며, 여권의 움직임이 보이자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 역시 조금씩 하야 요구 쪽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한편 더민주의 주류 세력은 대통령 탄핵 요구에 동참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시위 후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실상 하야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가운데, 정치권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2016-11-12

박근혜를 사면하라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왜 박근혜 대통령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사임하지 않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그의 뒤를 이어 대권에 도전하고 안위를 보호해줄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노태우가 있었기 때문에 직선제 개헌 수용이라는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대중적 인기와 후광이 돌아오게 한 후 퇴임했고, 노태우는 대통령이 된 후 3당합당을 통해 김대중과 '재야'를 제외한 반대파를 모두 흡수했다.

물론 여당의 일원이 된 김영삼이 결국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으로 보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5공 세력에게는 나름의 탈출 전략이 존재했으며 그렇기에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넓게 잡아 친박에게 주어지지 않은 정치적 선택지가 바로 그것이다. 친박(이라는 게 뭔지 현재로서는 대단히 아리송하지만)은 마치 박근혜라는 텅 빈 인물을 데려다놓고 대통령으로 만든 후 권력을 잡았듯, 반기문이라는 또 다른 텅 빈 인물로 그 자리를 채워넣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기름장어는 박근혜의 지지율이 거덜나자 재빨리 손을 떼는 모양새이다.

박근혜에게는 퇴로가 없다. 단지 정치적 수명의 문제가 아니다(애초에 박근혜라는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 듯하고). 지금 하야하면 곧장 감옥에 갈지 모른다는 아주 원초적인 공포심이 박근혜의 결단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야권의 대선주자들 중 일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조건으로 사면을 약속해야 한다. 특히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일수록 그러한 유화책을 내걸 때 박근혜의 사임을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사인의 천관율 기자가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1) 박근혜는 헌법적 정당성을 가진 대통령이며 2) 시민사회는 불법적 쿠데타를 저지르지 않는 한 그를 끌어내릴 수 없다. 다시 말해 3) 박근혜가 임기를 끝내지 않고 조속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스스로 사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뿐이다.

이 시점에서 시민사회와 대통령의 대립이 장기화될수록 대통령과 청와대가 유리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직도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의 인사권이 있고, 국정원과 일베 같은 초특급 정보 기구들도 그의 수중에 있으며, 길거리에서 덜덜 떨면서 시위해야 하는 시민들과 달리 대통령은 따뜻한 청와대에서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명박도 그런 식으로 '소나기가 지나갈' 때까지 버텼다. 박근혜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박근혜가 잔여 임기를 채울 가능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경찰과 검찰은 그냥 청와대의 편을 드는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최근 몇 주 동안 경찰의 태도가 눈에 보이게 유순해졌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권력기구이며, 청와대의 편이다. 단지 지금 여론이 너무 안 좋기 때문에 시위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근혜 개인을 감옥에 집어넣는 것과, 그를 청와대에서 끌어내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박근혜는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최대한 청와대에서 버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를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그러므로 여기서 누군가는, 적어도 '정치인'이라면, 박근혜에게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면 사면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물론 수많은 이들에게 비난받겠지만, 현재 '쪽팔려서' 여당을 지지하지 못하는 부동층들의 여론을 수습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야 우병우와 최태민 일가 및 김기춘의 비위를 최대한 밝혀내고 처벌할 수도 있다.

박근혜를 사면하라. 그리고 그를 청와대에서 쫓아낸 후, 박근혜 외의 모든 악인들을 처벌하라. 이러한 결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지지하겠다.

2016-11-10

박근혜, 클린턴, 정치인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볼 때 놀랍게도 박근혜와 힐러리 클린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 박근혜는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독특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영애' 시절을 넘어 정계에 재입문한 이후의 박근혜에 대해 생각해보자. 박근혜는 '여성스러움'을 무기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박정희가 낳은 삼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활동 가능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딸'임을 굳이 강조할 이유가 없다. 그는 중성 명사인 '후계자'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성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지지 여부를 놓고 9말0초의 진보진영은 한바탕 뜨거운 '논쟁'을 했다. 그런데 그걸 논쟁이라고 불러도 될까? 실상은 '여자로서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말한 최보은에 대한 인간사냥에 가까웠다.

그 인간사냥이 문제였던 것은 최보은의 '지지 선언'의 반어적 맥락을 무시했다는 것 뿐만이 아니다. 최보은을 몰아가던 자들, 대표적으로 김규항 같은 사람들은, 2002년 당시 정치인 박근혜가 지니고 있던 중요한 페미니즘적 함의를 도외시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유효했던 상황이다. 정치인 박근혜는 '여성의 성 역할'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역할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박정희의 생물학적 후계자 중 주류 정치권에서 활동 가능한 유일한 소실이라는 정치적 역할이 박근혜에게 할당되었을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성 역할을 밀어내버렸다.

그러므로 박근혜가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비판을 부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고 있지만 박근혜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두고 '섹스는 여성이지만 젠더는 남성이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근혜는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남성'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박근혜가 자의건 타의건 수행하고 있었던 '여성의 성 역할 거부'는 '남성 되기'와 동일시될 수 없다. 힐러리 클린턴의 역사적 대선 도전이 실패로 끝나고 나니 너무도 뚜렷하게 보인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난과 검증을 당한 대선 후보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얼마나 거센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나긋나긋한 굿 와이프' 따위의 역할을 거부했다. 빌 클린턴의 불륜은 힐러리 클린턴의 '성적 매력'에 대한 온갖 종류의 시시덕거림을 낳았지만, 애써 '사랑으로 결합한 부부'의 모습을 연출해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본인의 성별로 인해 남자들이라면 받지 않을 검증과 비난과 모욕을 당한다는 사실을 힐러리 클린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비난은 그가 '스마일링 맘' 같은 태도를 취하면, 요컨대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익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사회적 태도를 보여주면, 어느 정도 줄어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언제나 단호하게,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의 태도를 고수했다. '정치인'으로서 페미니즘적 의제를 선언하고 또 실천했다. '굿 와이프'로서의 자신을 연출하면서 가부장제와의 타협을 도모하는 대신, 가부장제 사회가 '여자 정치인'을 받아들일 때까지 모욕을 참고 견디며 자신의 일을 하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백악관 시절 이후 뉴욕 상원 의원으로서의 경력이 쌓였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 대단한 정치인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어떤 사회적 역할을 뒤틀어서, 가령 '남자들이 어질러놓은 정치판을 뒤치닥거리해주는 엄마' 같은 역할을 감내하지 않고서, '여성이면서 워싱턴 정가를 주무르는 정치인'이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박근혜가 본의 아니게 도달한 지점도 사실 그와 같았다. 박근혜는 '아줌마'도 '아가씨'도 '엄마'도 아니었다. 한때의 '영애'였지만 성인으로서 정치인이 된 후에는 줄곧 '박근혜'였을 뿐이다. 그것은 그가 물려받은 정치적 상징 자산에 힘입은 것이지만, 사실 정치권 내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은 모든 여성들이 누려야 마땅한 너무도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박근혜는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의 자리를 그냥 획득했고, 그에 딱히 미련을 갖지도 않았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2차 대국민담화에서 그는 '대통령'의 표정을 버리고 '죄송하다고 울먹거리는 중년 여자'를 드러냈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고, 실은 멍청하고,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한 게 아니라며 푸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높은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둘러대는 모든 종류의 부정적 성 역할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정치적 수명은 바로 그 시점에 끝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이라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싸워 얻어낸 위치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를 수십년에 걸쳐서 사냥했던 적들이 간절히 원하는 그 전리품만은 절대 내어주지 않은 것이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 선거에서 졌다고 눈물을 흘린다면, 다른 여성 정치인들이 '울지 않을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박근혜와 클린턴 모두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되, 사회적으로는 '여성'이 아닌, 어떤 중간지대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정치 경력은 반드시 이 시점에서 끝장이 나야 한다. 다른 한 사람의 가장 높은 유리천장에 대한 도전은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성 역할을 거부하면서 정치적 커리어를 쌓는 여성은 앞으로 더욱 늘어나야만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선거는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힐러리 로뎀 클린턴을 지지한다. 여성의 사회적 성 역할에 갇히지 않은 채 정치인으로서 이력을 쌓아나가는 더 많은 여성 '정치인'의 출현을 두 손 모아 소망하면서 말이다.

2016-11-08

거국중립내각은 최순실의 꿈을 꾸는가

최순실-박근혜-청와대 스캔들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국민이 대통령에게 위탁한 권력이 엉뚱한 곳에서 휘둘러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권력을 이용해서 무슨 '갑질'을 했건, 어디에서 얼마를 '해먹었'건,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문제의 핵심은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도 않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듣도 보도 못한 누군가에게 국가의 핵심적 권력 행사를 위탁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정치권 내에서 무슨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번 스캔들이 터지기 전이라면, 내게 주어진 정보를 이용해서 이런 저런 계산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 교주에게 빠져 그 딸에게 국정 전반의 전권을 위탁했다'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사실로 확인되었으니, 현재로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거국중립내각'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가 야권에서 추천하는 인물인지 아닌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내가 가진 시민사회 및 법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름이 '거국중립내각'이건 '편파치중내각'이건 '최순실 내각'이건, 모든 내각은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내각을 해산할 권리 역시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이것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통령의 수많은 권한 중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 중 하나다. 국무총리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86조를 살펴보자.

제86조 ①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②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
③군인은 현역을 면한 후가 아니면 국무총리로 임명될 수 없다.

국무총리가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명을 받아" 이루어진다. 설령 그 '명'이 국정 전반에 대한 포괄적 위임이라 하더라도, 대포폰을 쓰건 비선실세를 만나건 최태민에게 정신과 육체를 모두 지배당하건,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무총리에게 '명'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국무총리는 그 '명'을 거역할 수 있는 권한을 갖지 못한다.

'거국중립내각'의 구성요소인 다른 국무위원들은 또 어떤가?

제87조 ①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②국무위원은 국정에 관하여 대통령을 보좌하며, 국무회의의 구성원으로서 국정을 심의한다.
③국무총리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④군인은 현역을 면한 후가 아니면 국무위원으로 임명될 수 없다.

국무총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의 국무위원 임명에 대한 제청, 그리고 국무위원의 해임에 대한 '건의' 뿐이다. '거국중립내각'의 법무부장관이 우병우의 혐의를 유야무야 덮으려고 하는 것을 총리가 파악했다 한들, 그 총리는 자신의 권한으로 법무부장관을 해임할 수 없다. 역시 이 경우에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대통령인 박근혜가 갖는다. 가령 문재인이 총리가 된다 한들, 박근혜가 거부한다면, 조윤선 문체부장관을 해임시킬 수 없다. '책임총리'란 이토록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현행 헌법상 '거국중립내각'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책임총리'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이 총리의 편에 서서 그에게 국정을 일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헌법적 개념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 당시 이해찬 총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통령으로부터 포괄적으로 권한을 위임받은 총리가 누릴 수 있는 한시적이며 임의적인 특권에 불과하다. 박경신 교수의 말을 인용해본다. "우선 새로운 총리가 누가 되었든 그가 권한이양을 얼마나 받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어야 하고 그 총리는 국회의원들이 뽑는 총리 즉 내각제 하의 총리와 유사한 정치적 위상을 갖게 된다." 지금 국민들이 야당에 요구하는 것이 고작 '박근혜를 잘 모시는 총리'인가?

절반이 넘는 국민들이 박근혜를 지지했고, 투표했다. 나머지 국민들은 그 결과에 승복했고,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민주적 절차를 통해 주어진 권한을 박근혜는 엉뚱한 사람들의 손에 넘겨준 상태였다. 이 모든 상황은 대통령제의 실패도 아니고, 내각책임제를 시작해야 할 이유도 되지 못하며, '거국중립내각'을 통해 유야무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해결될 수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대통령제가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처리해야 하는 '비정상적' 상황일 뿐이다. 대통령제의 원조격인 미국에서도 이미 겪었고, 심지어 대한민국 역시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는, 흔하다면 흔한 대통령 하야 요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야 요구를 하지 않는가? 왜 하야 요구를 하지 않으며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국회에 띡 방문한 박근혜가 '야 니네가 추천해'라고 띡 던지고 가는 상황을 만들어서 주도권을 뺴앗기는가? 야권은 '최순실 게이트'에 진정으로 분노하긴 했는가? 최순실 일당에게 국정 농단을 허락한 박근혜를 몰아내고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합법적 권력을 획득하는 대신, 박근혜를 식물대통령으로 만들고 자신들이 '비선실세'가 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닌가? 선출되지 않았으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정작 책임져야 할 때에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낸 후 차지하고 싶어서 '거국중립내각' 타령으로 세월을 허비한 것은 아닌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일개 비리 사태가 아니다. 헌정 질서의 위기다. 국민에게 선택받은 이가 헌법상 주어진 권력을 올바로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주판을 튕기며 스스로를 또 하나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자리에 놓기 위해 골몰하는 야권을, 국민들은 절대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정 총책임자는 대통령이지 '책임총리'가 아니다. 정치권은 헌정질서 농단 사건을 두고 또 다른 헌정질서 농단을 모의하는 짓을 당장 그만두고, 헌법상 정해진 절차에 따라, 대한민국을 정상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2016-11-05

2016/10/30 - 2016/11/05: 두 번째 사과, 주필리핀 미국 대사, 파리협정

* 지난달 25일 이른바 '비선실세' 최순실의 존재와 대통령 취임 전 연설문 개입 등을 시인한 박근혜 대통령은, 11월 4일 두 번째 대국민담화를 통해 필요하다면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것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되어서는 안"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하루 전 취임 의사를 밝힌 김병준 국무총리 내정자의 '냉장고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누군가에 의해 현 상황이 조율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동력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온 국정과제들까지도 모두 비리로 낙인찍히고 있는 현실도 참으로 안타깝"다며, 현재 수사의 대상으로 오른 사안들과 그 외의 비리 의혹 사이에 선을 긋고 있다.

이번 대국민담화의 핵심은 최순실의 혐의를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지으려 한다는 것.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권력형 비리의 직접적 당사자가 아님을 주장함으로써, 대통령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도. 이것은 검찰의 수사를 통해, 혹은 내부 고발 등을 통해, 뒤집힐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한 "심지어 제가 사이비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박근혜 대통령은 단언하였다. 이 또한 향후 수사 혹은 내부 증언에 의해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의 네티즌들은 대국민담화 중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이런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는 구절을 패러디하고 있다.


* 성김 전 대북특별대표가 주필리핀 미국 대사로 임명됐다.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연이은 공격적 발언 및 그에 상응하는 친중 반미 행보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된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러셀 국무부 차관보는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는 “작은 난관에 직면했다”며 “양국을 연결하는 우정과 공통의 가치관에 변함은 없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우방 혹은 태평양 전진 기지였던 필리핀 대사로 성김 전 대북특별대표를 임명한 것은, 미국이 바라보는 필리핀의 지위가 '우방'에서 '불량국가'에 한 걸음 가까워졌음을 보여준다.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애정, 호의, 동경심을 감추지 못하는 한국의 일부 '진보' 인사들은 미국의 이러한 인사 조치를 보다 진지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 지구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 협약인 '파리협정'이 11월 4일 정식으로 발효됐다. 주요 37개 선진국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이 비준을 거부하고 캐나다가 탈퇴하는 등 뚜렷한 한계를 드러냈던 교토의정서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우선 당사국이 총 195개국으로, 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했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미국, 중국, 인도 등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고 있거나 온실가스 배출량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국가들이 구속력 있는 협약을 맺었다.

교토의정서와 달리 파리협정의 채택이 폭넓게 이루어진 것은 그 어떤 국가도 기후 변화를 더이상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평균 기온이 오르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안다. 북극의 바다가 여름에 얼지 않고 있다는 것 역시 인공위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투발루 뿐 아니라 뉴욕 역시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극단적인 기상 현상으로 인해 지구 곳곳에서 이재민이 발생하고 있다. 위기가 구체화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지구 평균온도의 상승폭을 섭씨 2도씨 내로 제한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지난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400PPM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유엔 산하 IPCC(정부 간 기후변화 협의체)를 비롯한 기후학자들은 그동안 지구의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가 450PPM에 도달하면 지구 생명체의 멸종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파리협정의 준수 및 각계의 노력과 기술적 발전을 통해, 예정된 파국을 지연시키고 막아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2016-11-01

[북리뷰] 만주를 생각한다, 철도를 고민한다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고바야시 히데오, 산처럼, 1만2천원.

부산에서 신의주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럽의 끝인 지브롤터까지 향하는 꿈.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대륙을 향한 철도의 로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만주라는 공간, 그리고 그 만주에 철도가 깔리던 그 시대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민중가요의 한 구절처럼 '광활한 만주벌판'을 노래하지만, 정작 그 만주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심지어 몽고인과 러시아인들이 뒤섞이는 점이지대가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이해는 아직도 피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와세다대학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교수인 고바야시 히데오의 책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를 펼쳐보자.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일명 '만철'은 한때 설립되고 사라져버린 일개 기업이 아니었다.

정식명칭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南滿州鐵道株式會社). 이 책에서 그 '탄생부터 사망까지' 40년에 가까운 역사를 더듬어보면서 이 회사가 가진 의미를 고찰해보려 한다. 1906년부터 1945년까지 20세기 전반의 반세기를 버텨온 이 회사는 일본 최대의 주식회사로서 중국 동북(東北)지역, '만주'에 군림했다. '만주'의 중요 산업을 지배하고, 철도 인접지역에 '부속지'라는 이름의 '영토'를 가진 이 회사는, 명칭은 주식회사였지만 그 실상은 하나의 식민지 국가였다. 세칭 '만철왕국.' 이 회사는 물론 중국 동북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일본 국내에도 그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15쪽)

마치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영국이라는 국가 이전에 동인도회사라는 한 기업이 먼저 기틀을 다졌던 것처럼, 일본의 만주 지배 역시 일본이라는 국가의 프로젝트였지만 만철이라는 한 기업의 영리 활동의 외관을 빌렸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댓가로 얻어낸 철도 영업권 및 철도 부속지 관할권을 메이지 천황은 만철에 일임했고 야심만만한 일본의 엘리트들이 미개척지를 향해 뛰어들었던 것이다.

만주는 '비어있는 땅'이었다. 청나라가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그 진공에 수많은 세력들이 동시에 빨려들어갔다. 그런 만주에서 철도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기관차와 열차 및 기타 부속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 재료를 공급하는 제철소, 그 모든 시설과 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무장 세력까지 포괄하는 준 국가 활동과 다를 바 없었다. 만철의 조사부는 그 모든 과정을 통솔하는 브레인 역할을 하면서, 훗날 일본의 대장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국가통제와 관려통제를 섞어서 짜낸"(16쪽) 통제경제의 모델을 생산해냈다.

그 여파는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만철 조사부는 1937년부터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했다. 그것은 30여년 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군복무를 한 박정희에 의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부활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만주국의 5개년 계획은 안산(鞍山) 제철소와 쇼와(昭化) 제강소를 중심에 두고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그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 일본으로부터 얻어온 차관과 기술력을 동원해 포항제철소를 건립했던 것이다.

만주국의 관료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논의는 이미 몇 차례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만주국과 만철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 분위기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짧고 가벼운 책은 일제강점기 만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입체적으로 끌어올려주기 위한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해낸다. '광활한 만주벌판', 그곳에는 철도가 놓여 있었다.


2016-10-31

입동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7년 11월 15일 저를 양육자로 선택했던 입동이는, 두 달이 넘는 투병 끝에 2016년 10월 31일 내가 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심장과 폐가 멎은 상태로 병원에 당도하여, 네 차례의 심폐소생술 끝에 잠깐 심박을 되찾았지만, 혈압과 호흡 등이 돌아오지 않았고, 설령 그러했더라도 완전한 소생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인은 급성신부전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 손상으로 추정됩니다.

다 큰 다음에도 자그마한 체구에 겁이 많았고, 고집이 셌으며, 사람과의 스킨십을 좋아했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언제나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꾹꾹이를 하던 입동이. 함께 살기 시작한 그 날을 '생일'로 간주하였기에 만으로 열 살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햇살 속에서 행복한 낮잠을 즐기며, 나를 기다려주길.



2016-10-18

[북리뷰] 진정성을 갖고 작성한 사망진단서라는 거짓말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 마티, 1만6천원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 원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표기한 사망진단서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서울대병원은 사망진단서를 재논의하는 특별위원회를 열어, "백남기 씨의 사망진단서는 일반 지침과 다르게 작성됐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단서가 붙었다. "담당교수가 주치의로서 헌신적인 진료를 시행했으며, 임상적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작성했음을 확인했다"고 말이다.

과학의 일부인 의학적 진술에 '진정성'이라니. 즉각적으로 조롱이 뒤따랐다. 주치의가 에세이를 쓰는 것도 아니고 무슨 소리냐, 진정성 따지고 들 거면 대체 한의학은 왜 비판하냐, 의사들이 결정적인 국면에 국민들의 신뢰를 배반하니까 허현회 같은 대체의학 사기꾼들이 판치는 것이 아니냐,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책꽂이에서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꺼내들었다.

2008년 여름, 프랑스의 한 엔지니어가 아내 그리고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중고 요트 여행을 하다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붙잡힌 후, 그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특공대의 총탄에 맞고 사망한 사건과 함께 책은 시작된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현대 문명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털어 중고 요트를 산 후,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적이 우글거리는 해역으로 진입했다. "그들이 욕망한 삶의 '본질적인' 핵심은 달리 말하면 '진정성'(authenticity)이다."(10쪽)

이 사례만 들어도 많은 독자들은 저자가 비판하는 '진정성'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민주주의, 소비주의, 대량생산, GMO, 화학적 생산물, 기타등등 '현대적'(modern)인 것과 대척점에서 '진정한 나'를 일깨워주는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진정성'을 찾고자 한다. 이제 제주도는 틀렸다. 산티아고나 히말라야에서 트래킹을 해야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 개천의 물을 퍼마시고 과탄산소다를 풀어 빨래를 하는 삶이 '친환경적'인 것으로 언론에 소개된다. '진정한' 면역력이 활약할 기회를 빼앗는 백신을 거부하고 서로 병을 옮겨주는 '수두 파티'를 벌인다.

캐나다의 트렌트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현재는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앤드류 포터는 전공인 철학 위에 다양한 대중문화적 지식을 접목하여 21세기 현재의 진보 운동이 빠져 있는 '진정성'의 늪을 파해쳐 보여준다. 그가 조지프 히스와 함께 쓴 책 <혁명을 팝니다>에서 보여줬던 것과 유사한 방법론이다. '진정성'이라는 것이 '근대성'에 대한 반발로 제시된 퇴행적 이념이라는 것을, 그리고 '진정성'에의 추구와 파시즘에 대한 열망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대단히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평범한 대중들과 달리 '깨어있는' 나는 대량생산되는 GMO 작물이 아니라 유기농 식품을 먹는다는 자부심 느끼기.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구분짓기'의 욕망이다. 그러한 '진정성' 담론이 힘을 얻을수록 수많은 인류를 굶주림과 질병에서 구하고 범죄율을 떨어뜨린 "자유민주주의의 전반적인 과학·법률·정치적 기반과 그 속에서 번성하는 문화"(312쪽)는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성'을 찾아 야만과 폭력이 들끓는 전근대의 망망대해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물며 대한민국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진정성'을 운운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진정성'에의 호소가 권력을 향한 전근대적 복종의 습속과 맞닿아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6-10-04

[북리뷰] 남자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인가

맨박스
토니 포터, 한빛비즈, 1만4천원.

'남자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말을 우리는 최근의 페미니즘 열기 속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남자다움'의 틀에 갇혀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고, 여자들과 가까워지는 법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일하는 기계'로 살다가 늙은 후 황혼이혼을 당한다는 것이 오늘날 남성의 인생을 애틋해하는 표준 서사를 이룬다. 이게 다 '남자답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우리 남자들은 더 이상 '남자답게' 굴지 않겠다, '여자를 지켜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못난 풍경도 더러 눈에 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자. 토니 포터의 책 <맨박스>는 그렇게 뻔뻔한 소리를 하는 책이 전혀 아니다. 남자들이 남성성이라는 정해진 틀을 강요당한다는 것, 그로 인해 남성 스스로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서사를 이루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가이며 사회운동가로서 오래도록 남성들을 상대해왔던 토니 포터는 남자들, 특히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들에게, 값싼 면죄부 대신 유죄 판결을 내린다. '남자도 가부장제의 희생자'라는 이야기만을 듣고 싶어서 이 책을 펼친 사람은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맨박스는 그 속에 갇혀 있는 '선량한' 남자들을 답답하게 한다. 그러나 그 남자들이 갑갑해하면서도 결국 여성을 향한 그 억압을 용인하는 사이, 세상은 점점 더 나쁜 곳이 되어간다고 고발한다.

선한 남성들이 폭력적인 남성들을 대놓고 지지하지는 않는다. 무언의 합의에 따라 그들의 행동을 묵인할 뿐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묵시적 규범이자 기대치 그리고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는 모든 규범들이 맨박스 안에 엉켜 있다.(41쪽)

매력적인 목소리와 화법으로 '맨박스'에서 남자들이 나와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던 토니 포터의 TED 강의만을 생각하던 이들, 특히 남성 독자들에게, 위와 같은 서술은 어쩌면 공격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선한 남성'들이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정 반대로, 스스로 선량하다고 믿고 있는 남자들 역시 맨박스 속에서 그것의 존속에 기여하고 있는 한, '나쁜 남자'들이 저지르는 직접적 폭력을 거들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일단 남자들에게 맨박스의 존재를 알리고, 맨박스가 이끄는대로 '자동 주행 모드'로 살아가지 않도록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남자들이 "일단 현실이 어떤지 알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생각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남성 모임에서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143쪽) 기존의 남성성 모델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고, 남자들이 스스로 새로운, 보다 평등하고 감정적으로 풍부하며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 스스로에 대해서도 억압하지 않은 성 역할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맨박스>는 한 활동가가 평생에 걸쳐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지도해왔던 내용을 최대한 평이한 문체와 짧은 분량에 담아낸 책이다. 토니 포터가 가진 자기 확신, 카리스마, 설득력 넘치는 화법 덕분에 그는 수많은 남자들을 맨박스에서 끄집어내는데 성공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의 저작물은 국내에 소개되면서 종종 오해받는 듯하다. '착한' 남자, 침묵하는 방관자들은 남자마저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아니다. 여성에 대한 공격적 행동을 당연시하는 남성성 모델을 재생산하고 있는 공범인 것이다. 우리 남자들은 이 책의 메시지를 좀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2016.10.04ㅣ주간경향 1195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9270958021&code=116

2016-09-25

[별별시선] 거울도 안 보는 남자

남자들을 여장시키는 행사를 요즘에도 여기저기서 하는 모양이다. 일단 이 점을 분명히 해두자. 한국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적용할 때 불편한 일이다. 남자들이 부끄러워하는 건 그다지 문제가 아니다. '여자같이 꾸민 모습'을 품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성 비하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남자답지 않게 꾸민 남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니만큼 동성애, 크로스드레싱, 트랜스젠더에 대해 적대적인 맥락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젠더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반해, 하위 주체로서의 '여성'의 위치에 남자들을 억지로 구겨넣은 후 남자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행사다. '여자다운 꾸밈'은 감상과 품평의 대상이 되며 그의 인격적 존엄은 짐짓 무시된다. 즉, 여성성을 조롱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 사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여장을 한 남자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그 결과, 가부장제의 기득권층인 이성애자 남자들을 '여자'로 만드는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종종 역설적으로 해방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여자다움'이 비하와 멸시의 대상으로 취급되지 않는 맥락에서는 어떨까? '여장남자 대회' 역시 품위를 획득한다. 미국의 유명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인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태어났을 때 산부인과에서 '남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성성'을 어떻게 현시하는가, 즉 '드래그'하는가를 놓고 경쟁하는 리얼리티 쇼다. 그곳에서 '남자가 여자처럼 꾸미는 행위'는 미적 도전 과제로 재탄생한다.

이러한 상식에 기반해 9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역사학자 전우용의 칼럼을 검토해보자. 그는 자신의 막내아들이 고등학교에서 겪은 일을 소개한다. 위에서 설명한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가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가 여장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남자인 친구들이 당황하고 벌벌 떠는 모습과, 그런 꼴을 보고 웃어대는 여학생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전우용의 막내아들은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전우용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설득에 실패했고, 오히려 내가 반성했다.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전우용은 태세를 전환하여 '메갈리아'와 '미러링'을 두고 근엄한 태도로 훈계를 하는 것이다.

아주 원론적인 차원부터 말하자면, 자신의 아들마저 설득하지 못했다는 그의 경험담은 여성차별에 대한 전우용의 식견이 매우 얄팍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자기 아들에게도 한국 사회의 여성차별에 대해 가르치고 설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신문 지면에 해당 주제에 글을 쓴다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전우용의 막내아드님, 혹은 그와 유사한 분노를 느끼는 남자들에게, 내가 대신 대답해 주겠다.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가 열리고, 당신이나 당신의 친구들이 여자들에게 놀림감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여자처럼 꾸미는 행위' 자체를 천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구조적 차별이 있기 때문에 남자인 당신이 '여장'을 할 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전략적 발화로서의 '미러링'이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미러링'으로 받아들이고 화내는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 거울에 무엇이 비춰보이는가? '용모 단정'한 여직원을 뽑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지하철에서 분가루 날리며 화장하는 여자'라는 상상 속의 마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이 사회의 여성 차별이 보이지 않는가?

'여자처럼 꾸미되 꾸밈을 드러내지 말라'는 모순된 사회적 요구에 여성들은 짓눌려 있다. 그러나 '거울도 안 보는 남자'들의 눈에는 이런 구조적 차별과 억압이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남자들도 거울 좀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



입력 : 2016.09.25 21:02:04 수정 : 2016.09.26 09:59:4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52102045&code=990100&s_code=ao122#csidxcac882c268f09ea9f7f21300ee443a2

2016-09-23

'여장남자 외모품평회'라는 "미러링"

트위터에서 몇 차례 지적을 했더니, 역사학자 전우용(@histopian) 씨는 내 계정을 블락하였다. 그런다고 해서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에 대해 왜곡된 의견을 내놓는 그의 행태가 비판받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블로그에 글을 쓴다.

전우용은 경향신문에 "혐오의 상승작용"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링크) 여성 대 남성의 성비가 3:1인 고등학교에 다녔던 자신의 막내아들이 겪었던 '고초'를 소개하며 글을 시작한다. 남학생들에게 '원치 않는 여장'을 강요하고 여학생들이 투표하게 하는 학교 행사가 있었는데, "다행히 자기는 강제 출전당하는 ‘굴욕’을 겪지 않았지만, 강제로 ‘여장’당하며 민망해하는 친구들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 고등학생이 느낄법한 뻔한 '분노'인데, 전우용은 그런 시시껄렁한 사건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녀석이 살아온 세계는 내가 살아온 세계와 달랐다. 집에서 아들이라고 대우받은 적도 없고 학교에서는 언제나 여자 선생님들에게 순종했으며, 여자아이들에게 종종 ‘타자화’ 대상이 되었으니, ‘사회가 남자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주장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게다."

전우용의 작은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까지 나무랄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역사학자'님이, 아직 세상의 쓴맛을 보지도 않은, 게다가 자기 아들이므로 혈육에 의한 끌림과 가중치가 주어질 수밖에 없는 편향적 경험에 대해, 대단히 큰 의의를 부여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설득에 실패했고, 오히려 내가 반성했다.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것이 메갈리아의 미러링이라고 전우용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에서 줄기차게 비판당한 바와 동일하다. '메갈리아의 미러링 그것도 남들 기분 나쁘게 하는 점잖치 못한 소리인데, 그런 걸로 여성혐오를 극복하려 해봐야 도리어 반감만 커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저 고등학교의 ‘교육 프로그램’도 미러링에 해당하지만, 역효과가 더 컸다. 질 나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쓰는 온갖 추잡한 말들을 그대로 복제해서 남자 일반에게 돌려주면, 남자들이 회개할까? 이런 행위는 오히려 여자들로 하여금 ‘폭력적인 남성성’을 내면화하게 하여 여성주의가 그토록 혐오하는 ‘폭력성’의 저변을 확대 강화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전우용은 '여장 시켜놓고 깔깔거리고 쳐웃는 저 기집애들 줘패고 싶은 남자 고등학생'에 감정이입하고 있다. 적어도, 그가 여학생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지 않거나, 못하거나, 그럴 의지도 없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남자들에게 여장을 시키고 외모 품평을 하는 것, 그것을 전우용은 "미러링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여장남자 외모품평회'라는 "미러링"은 무엇을 비춰보이고 있는 것인가? 여성적으로 꾸미는 것에 관심이 있건 없건, '여자니까 여자답게 꾸며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외모 품평에 나서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전우용은 이미 '억울한 남자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미러링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거울에 비춰 보이는 모습이 왜 자신에게 분노를 일으키는지 되짚어볼만한 냉철함이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그저 자신의 막내아들을 달래려다가 도리어 '남자로서의 분노'를 공유해버린, 어른스럽다고 말하기 힘든 자아를 고스란히 폭로해놓고는, 그걸 또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된 양 신문 지면에까지 칼럼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전우용이 '너희 남자애들은 그렇게 1년에 딱 하루 외모 품평을 당하지만, 잘 생각해보렴, 여자애들은 지금도 계속 외모 지적을 당하고 품평 당하고 있잖니. 너와 네 남자인 친구들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볼 기회가 되지 않았니?'라고 물어보았다면, 아마 전우용의 막내아들은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른'스러운 대답이다.

하지만 전우용은 '여자의 입장에서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가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장남자 가장무도회라는 '미러링'을 겪은 아들을 설득하지도 못했다. 문제는 이런 협소한 남성중심적 시각과 협소한 세계관, 그리고 SNS에서 욕먹은 사실을 굳이 앙갚음하기 위해 신문 지면까지 동원하는 '선택적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진보 진영에서 주요 필자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 진영의 인적 쇄신 및 젠더 감수성 회복이 절실하다.

2016-09-19

『탄탈로스의 신화』가 출간되었습니다


책에 적혀 있는 발행일은 2016년 9월 1일, 실제 발행일은 9월 8일. 아무튼 책이 나왔습니다. (구입: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 잡지 도미노에 실렸던 원고들을 중심으로, DT3에 수록된 "스테일메이트"를 많이 고쳐 쓰고, 도미노에 싣지 않았던 "진리와 동굴"을 추가한 후, 순서를 정렬하고 업데이트하여 만들어낸 책입니다.

그러나 책은 책으로서 별개의 맥락을 지니는 법. 이미 도미노를 읽어온 독자라 하더라도, 『탄탈로스의 신화』를 통해 사뭇 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글을 썼던 나 스스로도, 도미노 동인으로서 열심히 활동하던 그 때와는 다른 독서의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탄탈로스의 신화』는, 비유하자면 저의 첫 번째 개인전과도 같습니다. 그럼 『논객시대』는 무엇이었느냐, 역시 비유하자면 졸업 전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청년 논객'으로서, 아무튼 '그때 그 논객'들의 영향권 하에서 지적으로 성장해왔던 개인사적 맥락을 당대의 분위기와 엮어, 한 편당 충분한 지면을 활용하는 본격 서평의 형태로 뽑아낸 것이니만큼 '졸업'의 느낌이 강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반면 『탄탈로스의 신화』는 전례가 없는 책입니다. 적어도 내가 한국어로 읽어온 텍스트 중에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표현한 결과물은 없었습니다. 저자의 말에 써놓은 것처럼 나는 에세이스트이고자 했으며, 에세이스트가 아닌 그 무엇도 되고자 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셈입니다.

앞으로도 같은 종류의 작업만을 계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에세이스트의 글쓰기는, 다른 그 어떤 요소와도 뒤섞일 수 있지만, 대량생산은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금년 중으로 『남자를 위한 페미니즘』(가제)이 출간될 예정이며,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체와 방법론으로 여성차별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룹니다. 그 외에도 다수의 계약된 번역서가 있고, 모 출판사와 논의중인 단행본도 있는데, 그것은 대선 국면이 불타오르기 전에 세상에 나와야 합니다.


『탄탈로스의 신화』는 도미노 총서의 첫 번째 책입니다. 도미노에 실렸던 원고들을 개고하거나, 아예 도미노 필진이 처음부터 글을 다시 쓰는 방식으로, 도미노 총서는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세 권이 나왔고, 올해 11월 언리미티드 에디션 이전에 세 권을 더 출간할 계획입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지적 풍경을 만들고 또 지배해왔던 문학계의 주요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새로운' 잡지를 펴내고, '신선한' 시도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를 폄하할 의도는 없습니다만, '정말 그게 새로운 것인가, 늘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움이라는 이름의 낡음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떨쳐내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제가 『탄탈로스의 신화』를 써냈다는 것, 도미노의 편집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것, 도미노 총서의 발행을 기획하고 있다는 것, 그 모든 요소들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와 제 동료들의 작업은 '낡은 새로움'을 윤색하기 위해 동원되는 그 무언가와 전혀 다른 층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탄탈로스의 신화』와 도미노 총서가 새로운 시대의 전범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미래로 향하는 추진력을 얻고자 시도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합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남들이 해내지 못했던 무언가를 해냈습니다. 다른 필자들 역시 각자의 성취를 거두었고, 나름의 자부심을 거리낌없이 드러내야 할 시점입니다. 『탄탈로스의 신화』, 그리고 도미노 총서의 출간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며, 사건이어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독자 여러분들의 독서 경험 속에서 개별적으로 피어나겠지만 아마도 거의 동일한 곳을 향할 것입니다. 그 방향에,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